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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가락-요한복음11장50절(예수님 이야기)161004b-이 근호 목사자유게시판요한복음

가락-요한복음11장50절(예수님 이야기)161004b-이 근호 목사

지난 시간에서 간단하게 설명하게 되면, 나사로를 죽은 자에서 살려낸 그 모습이 사람들은 죽은 나사로가 살아났다고 하는데, 예수님은 그게 아니고 처음부터 나사로는 자기 안에 죽든 살아있든 관계없이 자기 안에 살아있었어요. 나사로는. “누구든지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 입장을 가지고 자기는 숨 쉬고 있으니깐 살아있다. 그런데 “나사로도 살아 있는데 죽었구나. 어! 또 살았구나.” 이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이렇게 생각하면서, 왜 죽은 자가, 살아난 것은 좋은데, 왜, 그 우리가 싫어하는 예수라는 인물 때문에 살아났느냐? 이게 시비 거리가 된 거에요. 그것에 대해서 예수님은 “너는 네가 속해있는 세상 자체가 지금 나에 대해 공격이다.” 이 말이에요. “너희들이 그렇게 너희들끼리 그렇게 숙덕숙덕 하면서 꾸려나가는 이 세상 자체가, 이 세상 자체가 몽땅 그거는 나를 대적하는 죽은 세상”이 되는 거예요.

예수님은 전체와 예수님 자신을 일대일로 보는 겁니다. 일대일로. 그러나 그들은 나사로 하나 살아났다. 죽었다. 이것이 문제가 아니고, “너희들 전체가 그렇게 나사로가 죽었다. 살았다. 할 쨉이 못된다. 너희들은 이미 죽은 세상 가운데서 그냥 같이 죽어 있는 입장이다.” 이거예요. 이 말은 스스로의 힘으로 구원되겠다는, 그럴 거 같으면 주님께서 오지도 않았다는 거예요.

내가 내 백성은 따로 있고 그 백성에 대해서 내가 회수하듯이, 찾아가듯이, 끄집어내듯이 하면 그게 영생이 되는 겁니다. 자기 힘으로 구원되는 것은 없어요. 어차피 이세상은 주님의 세상이니까 그렇게 정리하시면 되고요. 그래서 나사로는 예수님의 자신의 모습에 대한 반영이다. 자신의 모습을 세상에 드러낼 때, 세상은 자기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하는 가를 나사로와 더불어서 나타내는 것이 11장 이야기였습니다.

자, 그 다음 12장 들어가 봅시다. 12장 내용은 그 마르다가, 동생 마르다가 예수님에게 비싼 향유를 갖다 한꺼번에, 그것도 조금씩 붓는 것이 아니고, 적금 붓듯이 한 달에 조금씩, 조금씩 붓고 다음 달에 또 붓는 것이 아니고 한꺼번에 쏟아 부었다는 거예요. 이게 중요해요. ‘한꺼번에 쏟아 부었다.’ 한꺼번에.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그냥 예수님 발에 그냥 갖다 부어버린 거예요.

그러면 향유를 부은 것은 2회, 3회 연속적인 것이 아니고, 어떻습니까? ‘단회성’이죠? 한번이죠? 한번! 한 번에 다 부었죠? 그러면 예수님의 모든 인생의 마감은 바로, 한 번의 죽음으로서 온전히 다 이루는 겁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향유가 만날 때, 그 죽음이라는 횟수, 한번에! 단번에! 예수님의 죽음은 일반인들의 죽음이 아니고, “세상은 과연 나빴다!” 세상은 나빴다를 단 한번으로 다 끝내 버리는 겁니다. 한번으로.

따라서 이, 한번으로 끝내버리면 어떤 효과가 있느냐 하면은, “내가 더 나빠지면 안 돼. 여기서 내가, 내가 더 악한 사람이면 안 돼!” 라는 모든 시도는 다 부질없는 시도가 되는 거예요.

“내가 하나님의 이렇게 은혜를 받았는데, 내가 술, 담배는 일단 끊어야 되고, 그리고 절대로 이제부터는 나쁜 짓은 더 이상 하지 않아야 돼.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아야지.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했는데 앞으로 점점 더 거룩해지고, 온유의 화평을 더하고, 화평에 뭘 더하고, 연단을 더해 가지고, 점점 더 나아져야지.” 라는 모든 시도는, 바로 이것이 예수님의 죽으심의 단번, 단회성을 모독하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이 마르다가 향유를 주님 앞에 왕창 부었습니다. 그러면 부었다는 말은 마르다의, “마르다가 돈 푼이나 썼겠네?” 이렇게 생각하시면 안 되고, “아이고, 마르다가 큰마음 먹었네? 한턱냈네?” 이렇게 생각하면 안 되고, 마르다의 목숨을 거기에다가 향유와 더불어서 그냥 다 날린 거예요.

“내가 알던 나는 어차피 내가 아니었습니다. 내가 쥐고 있던 나는 어차피 그것은 내가 아닌 ‘허상적인 나’를 나라고 우겼습니다. ‘진짜 나’는 내가 관리할 몫이 아니고 예수님이 나를 관리해야 되는데 이것은 처음부터 예수님이 그래 왔었습니다.”는 고백이에요.

“내가 향유 부을 때 그때부터 우리 주님, 잘해 봅시다.”가 아니라 “처음부터 내가 이 땅에 태어나서, 창세전부터, 처음부터 나서 이 모든 것도 사실은 주님의 인생이었지, 내 인생이 아니었고, 내 이야기가 아니고 주님의 자신의 이야기였습니다. 라는 고백입니다. 이제 합류코자 합니다. 주님의 거대한 그 스토리에 제가 ‘일부’로 ‘파편’으로 ‘파티클’로 하나의 ‘조각’으로 끼어 들어가기를 원합니다.”해서 향유를 뿌리는 거예요.

그 향유를 한꺼번에, 한꺼번에 몽땅 다 한꺼번에. 그러니까 향유를 한꺼번에 했다는 것은 조금씩, 조금씩 감질나게 했다는 게 아니에요. 감질나게 했으면요. “주님, 저 이런 여자에요. 저 어때요? 괜찮죠?” 이렇게 되잖아요. “다음에는 곱빼기로 낼게요. 향유를.” 이게 아닌데. 이거는 한꺼번에 다 했다는 거 같은, “그러할 입장도 안 되고, 그러할 생각도 저는 없습니다. 아직도 남아있는 난 없습니다.

나에게 나는 남아있지 않습니다. 나는, 나에게 나는 전혀 없습니다. 그냥 나는 주님 위해서 늘 그동안 만들어져 왔습니다. 주의 것으로 만들어져 왔습니다. 내 인생, 내가 사는 게 아니고, 내 인생 내가 관리하는 것이 아니고, 어떤 믿음의 결단? 그런 것은 내게 애초부터 없습니다. 믿음의 결심? 장렬함? 비장함? 단호함? 그런 것은 애초부터 나한테는 그런 것은 생겨날 수가 없습니다.”

이 말은 우리에게 믿음이라는 것은 빼앗기는 것이지, 내가 보이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내 것을 주 앞에 생색내는 게 믿음이 아니고, “나 이래요. 나 이런 존재, 인간입니다.”드러내는 게 믿음이 아니라 그냥 다 빼앗기는 건데 사실은 빼앗긴다는 말이 잘못된 건데, 원래 주님 거니까 주님 것으로 돌려주는 것이죠. 빼앗기는 게 아니고. “죄송합니다. 남의 물건을 써서 죄송합니다.” 하고 그냥 돌려주는 것이죠.

그래서 존재보다 ‘사명’이 우선되는 겁니다. 이 사명도 나의 사명이 아니고 주님이 하실 일. 주님의 사명, 아버지께 받은 사명, 주님의 일. 그 주님의 일이 우리의 존재에 올 때, 이것을 두 자로 뭐라고 하느냐? 이것을 가지고 ‘은사’라고 합니다. 은사. 그 은사를 소유화 시킨다는 것은 있을 수 없지요. 은사가 오면 올수록 우리는 내 것이라는 게 파괴되게 되어있어요. 자신이 파괴되게 되면 무엇도 파괴되는 줄 알아요?

내가 갖고 있던, 내가 내 인생 내가 관리 한다고 갖고 있던 모든 스트레스와 노이로제는 공포, 두려움, 불안. 이것도 그 순간 같이 “파악~!” 하고 다 깨져버립니다. “미쳤어, 미쳤어, 미쳤어. 내 인생도 아닌데 내가 걱정을 내가 왜 해? 내가 왜 해? 걱정을 왜 내가 해?” 농사를 짓는데 비가 오지 않는다. “비가 와야 될 텐데.. 아이고~ 비가 너무 안 온다. 올해 농사 버리는데.. 가만 있어보자. 과거에 뭐를 잘못했는가..

세상에! 십일조를 딴 데 냈구나~ 꼴을 먹여주는 본 교회에다 내야 될 걸.. 십일조를 딴 데 냈구나! 참~ 죽겠어. 참, 눈치도 빨라. 그것을 어떻게 알고 이렇게 나한테 또 제때, 제때 이렇게 벌을 내려주시니.. 아이고~ 이제는 알았으니 이제라도 그때 못낸 거 플러스 곱빼기 해가지고, 주님이여! 네 배나 갚겠나이다.” 해가지고 삭개오처럼 갖다 주게 되면 다시 비 옵니까? 딱 갚는 순간 그 다음 월요일 날, 일요일 날에 네 배 갚아주면 그 다음 날 비와요.

비 오는데 누가 쾌재를 부르는지 알아요? 교회도 안 나오고 돈도 한 푼 안 낸 옆에 있는 농부가 쾌재를 불러요. “난 아무것도 안 했는데 비 맞았다. 너는 돈만 날리고, 이 바보야! 조금만, 하루만 참지. 하루만 참아도 공짜로 될 걸. 괜히 나대가지고 돈만 날렸잖아 교회에.” 이러한, 이러한, 결국은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이 나 잘되기 위해, 나의 유용성.

시카고, 미국 강의 첫 번째 강의가 뭐냐 하면, 유용성 강의 했잖아요. 모든 의미는 뭐다? 나의 유용성 할 때 만 의미가 있다는 거. 한번 들어 보세요. 한번 보세요. 시카고 첫 강의입니다. 거기에 이렇게 늘 얼굴을 내미는 분 계시죠?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요. 그거 보고난 뒤 미인이라고. 미인이라는 사람이 있고, 좀 짜증내 하는 사람도 있고. 카메라 앵글 때문에. 그것은 제 아내가 카메라를 처음 촬영했기 때문에 좀 조절이 안 되서 그러는데 좀 이해해 주세요.

어쨌든 간에 그 강의는 음성으로 들으면, 신경 쓰이거든 음성으로 들으면 괜찮거든요. 보면 거기에 모든 의미는 나와 연관성이 있을 때 의미. 연관성 있을 때 의미. 주께서~ 누가 7절 좀 읽어 보세요.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를 가만 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요12:7) 네, 예수님의 죽으심이, 사람들은 예수님이 죽었다고 하잖아요. 예수님이 죽은 거 맞지요? 안 죽으면 안 되니까. 죽었는데, 그걸 달리, 달리 생각하면 안 되겠습니까?

차를 갈아탔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까? 차를 갈아타는거요. 이쪽은 지옥으로 가고 있는데, 마리아가 감 잡았어요. 감을 잡고 “야 이거 큰일 나겠다. 내가 나이아가라폭포를 가면서 만약에 나이아가라의 수많은 물줄기가 만약에 이 세상의 모든 한 사람, 한 사람의 육신이라면, 이것들이 앞에 나이아가라를, 이걸 몰라. 넓은 길이니까. 넓은 길로, 다수가 진리라 하는 것은 인문학에서 다 이야기하잖아요. 다수가 진리에 가깝다는 말이죠. 소수의 의견과 다수의 의견이.

다수가 쭉 가다가 떨어지면, 지옥에 떨어지면 어떻게 할래요? 지옥이 안보이니까. 안보이잖아요. 그런데 마리아는 일찍 폭포를, 마지막에 떨어지는 나이아가라폭포를 미리 봤어요. 봐가지고 갈아 탄 거 에요. 어디로? 주님 쪽으로 갈아 탄 거 에요. 물론 자기가 알아서 갈아 탄 거는 아니지만, 물론 주께서 믿음을 줬으니까 갈아타는 건데. 갈아탔을 때에. 죄인 같으면 알 수가 없다 할 텐데,

주님께서는 그 마리아가 하는 행위를 예수님의 구원의 하나의 시나리오로, 이것을 하나의 시나리오로 일어날 일로 집어넣은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의 구원이라 하는 것은 하나의 편지처럼 넓혀지는 동일한 사건이 되는 겁니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은 프라이팬에, 제가 광주 때 그런 이야기를 드렸는가? 프라이팬에 볶음밥 해놓고, 볶음밥 해먹으려면 뭔가 덮어야 되죠? 계란 후라이 해가지고 이렇게, 이래가지고, 저어가지고, 하게 되면,

그 후라이 노란 게 전체 얇게 막이 되어 덮이지요? 처음에는 어디서 나왔어요? 하나의 원형, 계란에서 나왔잖아요. 예수님의 죽으심이 계란이라면, 주님이 앞으로 할 일은 뭐냐 하면은, 마리아처럼 나의 죽음의 의미를 아는 사람들의 확대가, 그게 예수님의 구원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구원 받는 사람은 개인 구원은 없어요. 이게 소속구원이고 단체구원이거든요. 그러면 주님께 구원받은 사람, 천국 가는 사람은 뭡니까?

본인이 알아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자신의 계란을 많이 퍼뜨려가지고 그걸 평지로 만드는, 그 평지 속에 하나의 계란 입자로 포함이 되기 때문에 구원 받는 겁니다. 그래서 어느 것 하나 주님께서, 어느 것 하나 건드려도, 마리아를 건드리면 누구 건드리는 거예요? 같이 노란 계란이니까, 주님 자신을 건드리는 게 되죠. 그럼 마태복음 25장에 보면 뭐냐 하면은, “내가 목마를 때 너희가 마실 것을 주었고,

내가 벗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옥에 갇혔을 때 돌아보았고, 배고플 때 먹을 것을 주었다.” 하니까 구원 받은 사람이 뭐라 합니까? “제가 언제 그랬지요? 제가. 제가 언제 그렇게 했습니까?” 그렇게 하니까 “이 소자한테 한 것이 곧 나한테 한 것이다.” 저 끄트머리에 있는 계란의 퍼져있는, 계란 후라이 그것을 만진 것이 곧 누구를 만진 것이다? “나의 몸체를 만진 것이다.” 라고 보는 거예요. 이게 주님의 구원이에요.

예수님만 달랑 구원받는 개인구원이 아니고, 전체의, 예수님 믿는 백성들을 데려오는 그 전체를 가지고 ‘예수님의 구원’이라 하고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의’라고 하는 겁니다. 이 하나님의 의에 일부로 말려들면 그 사람은 의인이 되는 거예요. 그것을 가지고 예수 안에서 의인, 프라이팬 안에서 의인. 노랗게 되는 가 똑같은 거예요. 예수님이 노랗다면, 계란 후라이 노랗다면, 우리도 역시, 같이 노란 겁니다. 같은 색깔이에요. 예수 안에서.

그, 덮는데 바로 뭘 덮느냐? 죄를 하나님의 피로 덮어버리죠. 죄로 덮어버리면 뭐가 나오느냐? 하나님의 의가 나오는 거죠. 이것을 제가 광주 강의에선가, 대구 강의에선가 그런 이야기 했어요. 대구 강의에서, 죄가 들어오게 되고, 주님이 여기 계시고, 우리를 사용할 때 죄를 사용할 때, 죄가 옆에 들어오게 되면 이게 뭐가 나오느냐(→人→ 하나님의 의 됨). 하나님의 의가 된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구원에 우리가, 성도가 꼭 필요한 거예요.

죄가 들어오게 해서, 죄가 들어오는 방법은 뭐다? 아까 했죠? 율법과 말씀으로.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다.” 나오는 순간 우리는 뭐가 돼버려요? 돈을 사랑한 자가 돼버리죠. “탐내지 말라.”는 순간 우리 속에서 마중을 나온다 했지요? 탐심을 가지고 마중을 나오게 되면, 우리가 죄가 발생되고, 이 죄가 그리스도 안에서 뭐가 된다? 의가 되는 거지요.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뭐만 건지면 돼요?

주님은 자신의 의만 건지면 주님은 본거고 그 결과로 생기는 것이 뭐다? 구원 받은 자기 백성이 생겨버리는 겁니다. 막걸리. 집에서 막걸리를 담그면 뭐가 나옵니까? 막걸리가 생산되면서 뭐가 나오지요? 술 찌꺼기 나오지요. 어릴 때, 배고플 때는 그거 먹었어요. 배고플 때. 가난한, 뭐 어지간한 집은, 옛날엔 다 가난했으니까. 그걸 먹고, 아침에 그거 먹고, 아침에 술 취해가지고.. 이런 현상이 있다 아닙니까.

그 찌꺼기가 우리에요. 주님은 자기 의를 챙기는 그 나오는 뒷 분에 나오는 그 떨어지는 그 흔적이 바로 성도들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그것을 알기 때문에 여기 있으나 천국가나 자기의 면류관을 누구한테 반품합니까? 주님이, “주님이여! 주님의 일 때문에 우리 같은 죄인들이 구원 받았네요? 세상에! 이런 횡재가!” 이렇게 고마워하죠. 어떤, 만났던 분은 그렇게 고마워하던 가요?

이 죽일 날 이렇게, 이 찌끼 같은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 사용 안 해도 되는데 건지셨나? 이런 마음. 오직 주님께만 감사하는 마음. 주님께, 십자가의 공로만 감사하는 그 마음. 자, 그런데 여기서 봅시다. 그런데 왜? 향유가지고 주님을 마사지 해드리지. 왜 그것을 향유를 발에다 깹니까? 여기 보면 향유 병을 깨버렸잖아요. 발에 부어가지고 깨버렸지요. 우리 같으면 “예수님, 이 향유 가지고 아침에 면도 하시고 뿌리세요.”

이렇게 할 텐데, 왜 예수님 발에다가 왜 뿌립니까? 이것은 뭐냐 하면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틀을 깨시는 분이라는 의미로 마리아가 그걸 알고 그걸 깨는 겁니다. 우리 힘으로 이 세상을 깨고 바깥으로 탈출 못합니다. 우리 능력은 안돼요. 그 이유가 뭐냐 하면은 우리의 자아의 중첩되어 있는 모든 기억들이, 이것이 그냥, 생긴 게 우리 스스로 육신에 생긴 게 아니고,

이미 우리 주변에서 반복해서 계속 훈육 받고, 양육 받고, 교육받은 거예요 전부다. 끊임없이 거기서 발생 된 게 뭐냐 하면은 우리의 본성은, 우리의 육신은 선악으로 돼있고, 선, 악으로 되어 있는데다 받았던 모든 교육들이 선, 악과 관련돼서 연결 돼버리면 이게 우리의 뭐가 됩니까? 양심으로 자리 잡죠. 양심은 뭐냐 하면은 선과 악에 대해서 아는 겁니다. 일종의 우리 속 안에 있는 계명이라고 할 수 있죠.

이렇게 돼버리면 우리는 무엇을 추구합니까? 선악 추구하고, 뭐를 버리려고? 악을 버림으로써 내가 생존해야 될 거만한 값어치가 있다는 것을, 신 앞에서 지금 당당하게 말하고 싶은 거예요. “남은 죽이더라고 저는 죽이면 안 됩니다. 제가 얼마나 바르게 살았는데, 바른, 착한 교회 오빠고, 착한 사람인데.” “나름 성실하게 살아가고, 나름대로. 저 자식 세 명 낳고 다 키웠는데, 내 손으로 시장가서, 장사해서 다 키웠고,

저 말썽부리는 술주정뱅이 남편을 내가 다 인간 만들었고.” 전~부다, 모든 자기 주변에 있던, 그 모든 것. 그것을 자기 가치성으로 다 끌어 모으면서 그런 식으로 뭐는 내 앞에서 점점 더 옅어지게 하고, 악은 점점 더 나와 상관없는 것처럼 취급하고, 선은 돋보이게 만들고. 그 작업 외에 우리가 24시간 하는 작업이 이것 말고 있으면 나오라고 그래요. 아침에 눈만 뜨면 “아이고, 잘났다.” 눈만 뜨면 하는 짓거리가 이 짓거리가 아닙니까?

“오늘도 나는 얼마나 가치 있는 존재냐?” 이 짓거리. “오늘도 태양은 떴구나. 태양은 나를 비추어라.” 비춰서 뭐할 건데? 죄인 비춰서 뭐할 건데. 보람~찬 또 하루를 위하여 열심히 매진하겠다. 매진해서 뭐있는데? 매진하겠다는 게 뭡니까? 어두운 악은 물러가고, 선한 나만 돋보여라! 이런 거. 선하면 뭐가 온다? 복이 오고. 악하면 뭐가 온다? 저주 오니. 복 받기 위해서는 계속 선을 쌓고, 또 쌓고, 마일리지 쌓고, 그 짓 하는 거. 그거 하는 거 외에는 없지요?

그러면 거기서 선과 악의 기준은 누가 이야기 하는 거예요? 선과 악의 기준은? 그건 집안 어른들이 이야기 했지요. 어릴 때부터 교회 목사가 이야기 했고, 또 학교 선생님이 이야기 했고 사회 영민과 통영민 윤리적인 통영, 도덕이 그렇게 이야기 한 거예요. 그러니까 선악체제라고 하는 것은, 이거는 타고난 거예요. 그런데, 여기서 봅시다. 여기서 조금 더 깊이 들어가야 돼요. 좀 참아야 돼요. 여러분들이 힘들더라도 참아야 돼요.

우리는 육신 덩어리, 육체, 세포 덩어리. 육신인데, 우리의 정신세계는, 우리의 정신세계가 육신 덩어리를 덮고 있습니다. 정신세계가 덮고 있어요. 그래서 제가 광주서 그런 이야기를 했는가. 인간의 육신 가운데서 인간의 정신이 육신을 덮는다고 생각 하는데, 하지만 육신은, 육신에는 인간의 정신이 덮어지는 게 아니고 오히려 육신이 갖고 있는 자체적인 욕망에 의해서 인간의 정신은 그때로부터 개조가 되고, 변명이 되고, 핑계를 댈 수밖에 없어요.

인간의 육신에 나오는 욕망은 인간의 정신으로써 이것을 다스릴 재주가 없습니다. 네? 그것을 순 우리말로 하면, 이게 되죠. 뭐에요? ‘욱’ 욱하는 성질. 품사의 감탄사가 다 이런 종류에요. 감탄사가. 모든 현재의 언어학자, 기호학자의 특징은 뭐냐 하면은 인간의 기본적인 어어는 감탄사지. 그 외에는 아니라는 거예요. 그것을 그대로 신학자들이, 그것을 봐 가지고 ‘여호와’라 하는 것은 이름이 아니고 ‘하!’ 신에 대해서 감탄이,

‘하!’ ‘이야!’ ‘야훼’가 되었다는 겁니다. ‘야!’ 그게 야훼가 되고 가나안 땅에서는 ‘엘’이 되고 ‘야훼’가 되고 여러 형태로, 그러니 모든 인간이 기호의 분석을 해보니까 인간이 갖고 있는 어떤 정신적인 것이 아니고, 육신에서 그냥 ‘아야!’ 하는 것처럼 뭔가 자극을 받았을 때 자연적으로 나오는 그 ‘외마디’ 같은 것. 그런데 외마디가 나온다면 이건 정신에서 나오는 언어체계가 아닙니다.

언어체계와 언어체계 이전에, 아주 가장 생생한 ‘생속’이라고 하죠. 어떤 이미징이 없고 극히 네추럴, 자연적인 요소. 그게 언어의 기본이 되어서, 그것으로 사회가 발달 하면서 소통 하다 보니까, “야! 너 감정 좀 추스르고, 너 좀 오바 다.” 해서 어느 정도 얼추 단어를 맞춰가니깐 그 단어들이 형성됐고, 그 단어들이 형성 됐으니까, 그 안에서 언어를 뜯어보게 되면 원바닥이 나오죠.

특히 한자에 나오는 한자 뜻은 전부 뭡니까? 한자 뜻이 전부 옛날에 제사 지낼 때 모양새를 가지고 한자를 만들었고요. ‘코미디’라는 말이 있죠? 코미디의 원뜻은 ‘코마디’인가 그런데 이게 ‘시골 시장’이라는 뜻이에요. 천박한 인간들을 갖고 노는 것을 코미디라 하는 겁니다. 자꾸 원어를 이렇게 끄집어내게 되면 이것은 따져서 하는 이성적인 것이 아니고 그냥 욕구라 할까? 욕구. 자연적인 욕망, 욕구가 외마디처럼 튀어나오는 것들이 언어의 파편이 되는 거예요.

뭐, 성경 언어라고 뭐 고상한 게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 말은 뭡니까? 정신은 육신보다, 육체보다 앞서는 것이 아니고, 정신은 육체에 뒤따라오죠. 그런데 육체의 욕망은, 자, 문제입니다. 육체의 욕망은 그건 누가 관리해요? 이것을 현대 과학과 현대 철학이 풀어내지를 못해요. 인간은 왜 욕망하느냐? 이 말입니다. 인간은 왜 욕망하느냐? 생물학에서 말하기는 “그것은 살기 위해서 산다.” 살기 위해서, 왜? 살기 위해서 하니까 그 다음에 더 큰 문제가 벌어졌어요.

살아야 되겠다는 그 산다는 주체자가 누구냐 이거에요. 누가, 내 안에 어떤 괴물이 있어 살으라고 하느냐. 괴물이 있어서 “야! 너 살아야 돼! 너 살아야 돼!” 가짜보고 자꾸 살아야 된다고 부추기는 거예요. “살아야 돼! 살아야 돼!” 사람이 ‘욱’하고 누가 ‘확!’하면 욕하잖아요. 또 누가 밀치면 반드시 밀치잖아요. 왜 밀칩니까? 왜 욕하는데 화가 나요? 그것은 뭐냐 하면은, 생물학적으로 내가 살기 위해서 방어 본능 하는 거라 구요. 방어 본능.

외부에서 병균이 들어오게 되면 여기서 누가 나와서 방어를 합니까? 면역성이 있어서 방어하게 되어 있죠? 그런데 어디서도 면역성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몰라요. 영원히 미제라니까요. “누가 나를 방어 하냐? 누가 나를 방어 하냐?” 쉽게 말해서 내 육체의 주인이 따로 있는데 그게 누구냐를 모르겠다는 거예요. 그냥 그 육체의 주인이 밤 낮 뭐라고 하느냐 하면 “살아야 돼. 더 살아야 돼! 살아야 돼!”

그런데 욕망을 조사해 보니까 “살아야 돼”가 그게 다가 아니에요. “네가 최고가 되어야 돼. 남한테 밑지면 안 돼. 너 남한테 지면 안 되는 거야. 네가 더 최고여야 돼. 네가 성적이 떨어지면 안 돼. 네가 남보다 더 작은 평수가 아니라 더 높은 평수의 아파트에 살아야 돼.” 이걸 누가 하느냐? 성경은 간단합니다. 예수님이 찾아오니까 그게 들통 났어요. 궁금하지요? 그게 누군지 궁금하지요?

구약에서는 이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면 ‘죄악’이라고 하고 신약에서 그것을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면 ‘사탄’이라고 했습니다. 어디서 알 수 있느냐? 바로 광야 40일 동안 예수님이 금식 할 때, 인간은 빠지고, 인간은 빠져야 돼요. 인간은 빠지고, 누가? 영대 영으로 마주치는 거예요. 예수님과 사탄이 마주쳤어요. 사탄의 무기가 드디어 시작됩니다. 이 사탄의 무기는 평소에 인간들이 감추어졌던 거. 왜 나는 이 땅에서 살고 싶어 하는지.

그냥 살아야 된다는 본능이라는 말 이외는, 본능이라는 말을 조사해보면 아무것도 담겨있지 않아요. 할 말이 없으니까 “본능이야” 이거지. “누가 너희에게 그 본능을 주었느냐?”에 대해서는 누가 답변할거에요? 이 세상에 어느 철학자가 답변, 어느 의사가? 답변 못해요! 그 물대포 맞고 죽은 사람 누굽니까? 백, 백남기 할아버지 죽었지요. 왜 죽으면 안 되죠? 죽으면 왜 안 되는데요? 뉴스에 묻고 싶어요. 왜 죽으면 안 되는데?

벌써 질문 자체가 다르잖아요. “나가 죽였다! 이 놈의 정권, 박근혜 정권”이 죽였다는데, 그래, 왜? 죽으면 안 되는데? 왜 죽으면 안 되는데? 그, 예루살렘을 포위했던 앗수르 군대가 18만 5000 그 사람들 죽었잖아요. 천사가 죽였잖아요. 그 사람들 왜 죽으면 안 되는데요? 성경은 간단합니다. “네가 언약을 건드렸기 때문에” 죽인 거예요. 언약을 건드렸기 때문에. 언약을 건드려서 죽은 거예요. 구약에 나오잖아요.

구약 그대로 신약까지 광야에 옵니다. 마귀가 자기 무기를 발휘합니다. 마귀의 무기는 하나밖에 없어요. “너는 죽으면 안 된다”는 거예요. 첫 번째부터 했잖아요. “돌이 뭐가 돼라?” 왜, 돌이 떡이 돼야 됩니까? 왜 돌이 떡이 돼야 돼요? “예수 당신, 당신이나, 내가 다스리는 인간이나 당신이나 똑같은 거야.” 결국은, 사람은 뭐 좋은 일 하려면, 뭘 해야 돼요? “살아야지~ 살아야지. 당신 그렇게 굶어야 되겠어? 살아야지.

당신 굶어 죽으면 주의 일을 못해. 주의 일 하기 위해서라도 살아야 돼.” 예수님은 사탄의 무기가, 기본이 뭐가 깔려있다? ‘살아야 된다.’는 거예요. 그러나 인간이 이미 선악과를 따먹었을 때 이미 어떻게 됐는가? ‘죽어야 되는 거예요!!’ 왜 자꾸 죽어야 되는데, 왜 자꾸 살아야 되느냐 말이에요! 그래서 성도는 뭐냐 하면은 이렇게 이야기해요. “주님이여! 왜! 죽여야 되는데, 왜! 살려주십니까?” 이런 이야기를 주님 앞에 해놓을 때 그게 성도다운 거예요.

앞으로 그런 분 만나면 죽어야 된다고 이야기 하세요. “당신, 그렇게 이야기 하는 것은 결국 뭐냐, 더 살겠다하는 당신의 본능밖에 안 된다.” 하면 쑥 들어가 버립니다. 얼마나 살고 싶으면, 죽어서 천국에 가서 또 살고 싶어 하겠어요? 그러니까 마귀가 자꾸 천국 가게 하는 이유가 바로 그거에요. “지금 너 살고 싶지? 내가 좋은 것 알려줄까? 팁 하나 줄까? 예수 믿으면 죽어서 천국 가서 또 산다.”

그러니까 그것을 미끼로 삼아서 막 오라고 해서, 교회에서 돈이란 돈은 꿀꺽 내고 가는 거예요. 주님은 반대입니다. “죽어 마땅하냐?” “예!” “그럼 천국이다!” 이게 주님의 뜻이에요. 이게 주님의 뜻입니다. “주여! 죽어 마땅한!” 거지 나사로가 천국 가는 이유를 아시겠죠? “병 낫게 해 달라!” 이렇게 했습니까? 네? “내가 죽으면 병 때문에 죽은 것인가? 아니면 늙어 죽은 것인가? 물대포 맞아서 죽은 것인가?

그걸 파악해가지고 막 천국가고, 주님보고 막, 항의 했어요? “개가 와서 핥아도 마땅하고 내가 몸이 거지가 되도 이것도, 그리고 그만큼 살아온 것도 고맙습니다.” 하고 마음껏 거지가 될 수 있고. 욥이 처음에 몰랐어요. 자기는 착했기 때문에 고난이 오면 안 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고난이 왔거든요. 욥은 아직도 자기가 고난 받으면 안 된다고 생각해 가지고 자꾸 뭐라고 따지냐면 “고난을 왜 주십니까?” 고난을 왜 주시냐고 따졌어요.

그런데 막상 하나님이 나타나니까 그 질문이 쏙 들어가 버렸어요. “고난을 왜 주십니까?” 라는 질문 자체가 이건 내가 할 질문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어요. 이건 누가 해야 되느냐? 이것은 자기 속에 있는 장차 오실 예수님만이 아버지한테 “주여, 아버지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그것은 자기 말고 자기 대표자가 할 이야기지, 자기가, 대표자가 아닌 자기가 할 이야기가 아닌 거예요.

예수님 인생이 “다 비켜!” 만 해도 우리는 뭐가 뭔지 아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대표자 됨을 연관 관계, 주님이 대표자임을 연관 관계 때문에 욥에게 고난이 온 거에요. 그래서 욥은 주시는 대로 받으면 되는 거예요. 고난이 오면 고난 받으면 되고, 축복 오면 축복 받으면 되고, 영생 주면 영생 주는 대로 받으면 되는 거예요. 욥은 처음으로 다시 돌아갑니다.

그동안 자식 열 명 낳았고, 부자 되었고, 내가 이렇게 장사 잘되고 산 것은, 그것은 내가 잘해서가 아니라 그냥 건강한 것도 주셨기에, 건강을 주셨기에 건강한 것뿐이고, 자식 열 명 주셨기에 받은 것뿐이고, 부자 되게 하셨기에 부자 된 것뿐이었어요. 그래서 처음에 욥이 제대로 이야기 했어요.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욥1:21) 제대로 이야기 해놓고, 머리로 알아요. 머리로. 머리로 알았다고요.

그런데 그게 머리로 안 정답을 실감나게 만들어 버렸어요. 그래서 나중에 욥이 마지막 끝에 뭡니까? 죽은 자식 대신에 미스코리아 진선미 그렇게 예쁜 딸을 줬고, 갑절이나 더 부자 되게 했을 때에, 고난 받았던 대가로 얻은 게 아니고, 이것도 그냥 주셨기에 그냥 받은 거예요. 그러나 한국교회는 욥기를 보는 모든 사람마다 조금만 참으면 부자 될 수 있는 방법을 거기서 끄집어냅니다. “까짓 거, 고난은 잠깐이요, 부자는 영원이다.” 뭘 노립니까?

부자를 노리는 방법을 거기서 찾아서 약간 힘들기만 하면 나중에 부자 된다 이거야. 시작은 미약하나 나중에는 창대하리라. 그렇게 창대하고 지옥가면 어떻게? 그러고 보면 창대한 사람 많이 봅니다. 프라이팬 이제 이해하시겠죠? 전부다 나의 구원, 내가 살아있다고 존재하는 게, 내 이야기 아닙니다. 전부다 주님의 자기업무고요. 자기 숙제지, 뭐 내가 꾸며놓은 가짜로 설정한 나라는 이미지하고 아무 관계없어요. 그것을 소급해서 봐야 되는 겁니다.

향유를 조금씩 뿌린 게 아니고, 두고두고 놓고, 적금 붓는 게 아니고, 한꺼번에 다 깼다는 것은 예수님의 장례를 함으로서, 우리가, 내가 지금까지 속해 있던 이 세상이 사실은 어둠의 세계요, 요한복음 1장에 나오는 어둠의 세계요, 죽음의 세계다. 죽음의 세계인 것을, 죽음의 세계인 본인들이 못 알아 본거에요. 왜? 만화 속에 납작이 엎드려 있고, 그리고 요한복음 9장에 의하면 그들이 뭐냐 하면은 바로 그들이 ‘소경’ 그들이 소경. 본다고 하는 소경이에요.

그런데 소경에게 누가 터치 했다 했습니까? 예수님이 터치 하니까, 소경은 그냥 눈만 뜬 게 아니고 뭘 봤어요? “아! 이 세상이 어둠”이라는 걸 알지요. 나사로에게 주님이 관여 하니까, 나사로도 “아! 내가 전에 살았던 것은 사실 죽음이고, 주님과 함께 있는 이것이, 살았던 죽었던 상관없이 이게 영생” 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겁니다. 그 이야기가 요한복음, 이제는 12장을 넘어서서 요한복음 20장까지 가는데, 20장 미리 봅시다. 20장.

20장 29절을요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20장 29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요20:29)

보이지 않고 믿는 자가 복되지요? 자, 보지 않고 믿는 다는 말은, 이 말씀은 굉장히 무서운 말씀이에요. “네가 네 믿음에 대해서 한번 점검해봐라.”는 거예요. “네가 나를 믿는다고 우기는데, 네가 보는 걸 내가 한번 철거 시켜볼까? 그걸 한번 빼 봐? 그래도 내가 믿으면 믿음이고, 네가 은근히 기대 했던 거 빠지면?” “어이구, 내가 이럴 줄 몰랐지.” 이렇게 나오면 그것은 가짜 믿음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보고 믿는 것에 대해서 안심하지 말라는 거예요. 보고 믿는 것으로 시작 했더라도, 슬슬 뭘 빼겠다? 보고 믿은 요소를 전부다 와장창 다 빼버리겠다는 거예요. 보고 믿는다는 말은 뭐냐 하면은 예상되는 결과를 의미해요. 예상되는 결과를 미리 아는 거. 이것을 예상 안 되게 만들겠다. 라는 겁니다. 본다는 것은, 상상한다는 뜻이니까, “요렇게 하면 요렇게 되겠지. 기도하면 우리 애가 공부 잘하겠지? 요렇게 하면 요렇게 되겠지.” 이런 것을 왕창 빼는 거예요.

그래서 지난 낮 설교 때 그런 이야기를 한 기억이 납니다. 사도 바울이 사형선고를 받았잖아요. 사형선고를 받은 이유가 뭐냐 하면은, 자기 개인 구원에 관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 모든 주석들이 그렇게 이야기해요. 사형선고 받았다는 것은 아시아에서, 아시아라는 것은, 터키 때 이고니온에서 돌아 맞아 죽을 뻔한 그 이야기거든요. 그런데 에베소에서도 사실 죽을 뻔 했어요. 그 이야기인데,

죽을 뻔 했는데 꼭 참으니까 나중에 뭐, 환난을 참음으로 구원받았다. 개인 구원 말하는데, 절대로 그런 뜻이 아니고, 사도 바울로 하여금 그렇게 환난을 준 것은, 사도 바울이 속해있는 이 세상이, 어떤 세상이었는데, 그리스도께서 나를 빼내줬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케 하는 겁니다. 주께서 어떤 일을 했는가를 확인하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그러면 사형선고라 하는 것은, 어려울 때만 사형선고가 아니고 사도 바울 존재 자체가 사도가 되고 난 뒤, 모든 행적들이 전부다 사형선고 받은 형국입니다.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내가 어려움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고, 가난에 처할 줄도 아는데, 알죠? 그러니까 풍부에 처하면 사형선고 안 받은 겁니까? 맨 그분이 그분인데? 똑같은 분인데, 사도 바울 똑같은 분인데.

그래, 사도 바울이라는 사람이 풍부할 때는 “주여! 여기가 좋사오니” 이렇게, 이렇게 할 사람이에요? 풍부할 때도 누굴 본다? 그리스도를 볼 사람이고, 어려울 때도 누구 본다? 옥에 갇혔을 때도, 오직 하늘, 땅을 생각하지 않고 주를 볼 사람이죠. 그렇다면 사도 바울이 사형선고 받았다는 말은, 사도 바울을 통해서 이 세상이 얼마나 악독한 세상인 것을 증거 하기 위해서 그렇다면, 그 삶이 그대로, 성령 받은 우리도 마찬가지다 이 말이죠.

그래서 제가 예를 든 것이 바로, 로또 당첨되는 예를 들었고, 또 예를 든 게 뭐냐 하면은 “그래! 우리 애들이 공부를 잘하네!” 애 공부 잘하는 것이 바로 내 발목을 잡는, 사형선고를 흐릿하게 만드는 세상적인 유혹일 수가 있다 이 말이죠. “공부 잘해가지고 그래도 판사 되는 걸 보고 죽어야지” 이러면 안 된다 이 말이죠. “공부 잘하는 건 잘하는 거고, 주여! 오늘 밤에는 낙원에 있으리라. 난 그게 더 좋아요.”

그런 마음가짐을 가진 나를 보여주기 위해서 주께서는 눈에 보이는 것, 자식들이 공부를 그렇게 잘하고, 또, 딸이 스무 살 들어가고부터 예쁘기는 왜 그리 예쁜지, 김연아 저리 가라하고, 주위에선 미스코리아 나가라. 미용실 갈 때마다 미용실 원장이 조금만 머리 올리면 완전히 이거는 미스 서울이다. 왜 그러나? 그런 것들이 전부다 나한테는 뭐다? 뭐다 말입니까? 주님 앞에서는 사형선고감이다 이 말이죠.

제가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설교가 너무 비참하게 빠지지 않기 위해서, 행복한 사형선고. 그게 7절 이야기 다시 해 봅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를 가만 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 (요12:7)

“계속해서 그 여인이 하는 일이, 계속해서 번지도록 하라. 왜냐하면, 네가 보기에는 마리아로 보이냐? 너희들은 그 안에 그리스도의 결과물로 보아라. 예수님이 그와 함께 살아있는, 죽었다가 살아난 나사로의, 제2의 나사로와 제3의 마리아의 오빠라고 봐라.” 말이죠. 이게 성도입니다.

자, 그다음에 9절 보겠습니다. 조금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12절에 보면, “그 이튿날에는 명절에 온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는 것을 듣고” (요12:12) 방금 이야기가 나오네요. 유대인의 큰 무리가 여기 계신 줄 알고 보니, 그 다음에 10절을 봅시다. “대제사장들이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모의하니” (요12:10) 그러니까, 보세요. 예수님이 벌여놓은 일이, 판이 커졌어. 이제는 누구를 잡아 죽이려고 합니까?

나사로를 죽이려고 하지요? 지금 예수님이 십자가 지기 전이죠. 그러니까 모든 일이 지금 눈에 보이는 일이잖아요. 그럼 예수님이 승천하고 난 뒤에는,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되다는 말은 뭡니까? 결국은 예수 믿는 사람을 건드리는 것은 곧 누구를 건드리는 것이다? 예수님을 건드린다는 사실을 누가 믿어야 돼요? 예수 믿는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말은 달리 말하면, 나는 여기 나 혼자 있는 것이 아니고, 홀로 있는 것이 아니고 주와 함께 있는 거예요. 이게 성령 있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고백입니다. 이거는 사도 바울의 편지에 보면 계속해서 나와요.

“바울아, 바울아, 네가 홀로, 천사가 네 옆에 있다. 너는 반드시 로마에 가 있어야 된다.” 사도 바울이 가는 곳 마다 주님이 함께 있었고, 성령께서 우겨쌈을 쌓여도 쌓이지 않게 만들었고, 그러한 나 같은 이러한 일이 여러분에게도 동일하게 일어납니다. 라고 이야기 하는 거예요.

한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누가복음 16장. 누가복음 16장에 서두에 나오는 것은 뭐냐 하면은, 여러분, 들어봤지요? 불의한 청지기 알지요. 자, 누가복음입니다. 빨리 합니다. 누가복음에서 십자가를 경유하게 되면 사도 바울의 편지에 나오는 성도가 돼요. 이 말은 사도 바울의 편지에 나오는 십자가를 앞으로 당겨 버리면, 누가복음에 나오는 불의한 청지기가 되는 겁니다.

이 말은 공관복음에 나오는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에 나오는 모든 사람들의 일어나는 일은 그게 남의 일이 아니고 오늘날 우리들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우리들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12년 동안 병들었던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더니만 나았다. 그런데 다른 점이 있어요. 이것은 뭐냐 하면은, 다 눈에 보이는 거예요. 예수님 승천하기 이전에 일어났던 일은 눈에 보이는 겁니다.

그리고 십자가 이후에 예수님 부활해도, 그냥 승천 한 게 아니지요. 40일 동안 저들과 함께 있었지요. 그게 뭐냐 하면은 눈에 보이는 식의 활동과 보이지 않는 식의 활동이 넘어서는 과도기적 모습을 보이는 겁니다. 눈에 보이니까 제자들이 만지려고 했지요? 그러니까 예수님은 “만지지 마라!” 했습니다. “만지지 마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갈 때가 되지 않았다.”고 했거든요.

사도행전 1장에 보면 “이스라엘 회복 할 때가 언제입니까?” 이렇게 하니까 “그 때와 시기는 너희가 알 바 아니요.”라고 했지요. 이게 뭐냐 하면은 경계선상에 있을 때에, 경계선상에 있는데 예수님이. 그 경계선상에 “내가 이젠 승천하고 올라가서 눈에 보이지 않는 상태가 될 때에는 누가 보이는 역할을 해야 되냐 하면 바로, 너희 성령 받은 너희들이 이 땅에서 옛날 예수님이 보이던 시절의 역할을 너희들이 담당해야 된다.

그래서 이 소자한테 한 것이 곧 누구한테 한 것이다? 곧 이 예수한테 한 것이다.” 우리들의 신분이 이렇게 고귀합니다. 비록 청자켓을 입고 왔지만, 주님의 놀라운 영광스러운 자켓으로 생각하시길 바랍니다. 이 신분이 천사가 부러워하는 신분이에요. 천사가 말합니다. “나한테 절하지 마라!” 오히려 자기가 사도 요한한테 절 할 입장이에요. 왜? 주께서 했던 그 일을 그대로 하기 때문에. 공통점이 있어요.

예수님하고 우리하고 공통점이. 일단 초라하다. 그리고 가진 게 없다는 거, 또 배운 게 없다는 거. 고린도전서 1장에 나오죠. 가진 자를 부끄럽게 만들고, 똑똑한 자라도 부끄럽게 만들고, 오히려 아무것도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부끄럽게 만들죠. 이렇게 그들한테는 우리의 모습이 십자가의 역할을 하기 때문에 미련하고, 뭐로 보인다? 어리석게 보이는 거예요.

“저 인간들은 뭐, 행하기는, 행함은 개떡치기고, 그냥 뭐, 십자가를 믿기만 하면, 믿기만 하면, 십자가 능력으로 구원 받았다. 십자가 이야기 밖에 안하지 않느냐?” 굉장히 어리석고 미련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구원 받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뭐가 된다 했습니까? 하나님의 네모요. 네모 안에 뭐?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요,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이야기해요.

“니들이 나하고 같아? 어디? 어디를 넘봐? 너희들은 눈에 보이는 것만 봐! 보이는 것만 봐!” 계속 눈에 보이는 것만 보니까 예수님을 죽였던 그 사고방식으로 그저 큰 거, 위대한 거, 부자 되는 거, 애 공부 잘하는 거, 출세하는 거, 성공하는 거, 큰 교회 목회하는 거, 그런 것만 보이지요. 그러나 예수님하고 똑같은 대우를 그들은 하는 겁니다.

어떤 목사님들은 복음으로 목회 하면 성공할 줄 알았지요? 성공할 줄 알았지?~ 30명 교회에 12명되고, 10명 교회 5명되고, 나중에 사모님하고 툭, 사모님도 이제는 의심돼. 그러니까 뭐냐 하면 “십자가 복음도 목회에 도움 안 되는구나. 버리자.” 진작에, 진작에, 진작에 그렇게 해야지! 그게 열두제자의 배신이에요! 물 위를 걷고, 오병이어 할 때는 뭐, 진짜 뭔가 되는지 알았죠. 세상에! 체포되어 갈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지? 체포 되는 데까지 힘 안 써.

체포되고 우루룩. 십자가에서 “이따구 십자가~” 거꾸로 매고, 이렇게 엎어버리고, 우두둑! “주여, 떨어지게 하옵소서.” 해가지고 삼손처럼 이렇게 할 줄 알았지? 조용해요. 고린도후서 13장에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십자가를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연약하사 십자가에 죽으신’ 끝까지 연약해 갖고, 끝까지 약해 갖고. 저는 성도 이름 지을 때, 한나, 다윗 그런 거, 조다윗 그런 거 좀 짓지 말고, 네? 이연약, 김연약 이런 거 지었으면 좋겠어요.

뭐 꼼수를 노리지 말고, 꼼수 있잖아요. 뭐, 끝까지 그냥. 좀 심하게 말하면 김거지 이런 거. 끝까지, 끝까지, 끝까지 연약한 거. 왜? 눈에 보이는 인간들은 하여튼 어리석고 미련하게 보이도록 성령께서 우리를 그렇게 기능으로 그렇게 기능하십니다. 그러면 목사님, 그러면 부자는 없다 말입니까? 아니지요. 그럼 우리 꼭 공부 못해요? 아니죠.

부자 되게 했는데 “이놈의 돈 40억이 발목을 잡는 구나.”이런 식으로 돈에 얽매이지 않고, 그런, 세상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모습. 뭐 주시면 챙겨야지요. 주시면 챙기는데, 전에 이야기 했잖아요. 전에 했지요. 탕웨이의 이야기. 열 번쯤 한다. “놓치지 않을 거예요.” 무슨 말인지 못 들었어. “놓치지 않을 거예요.” 이만큼 뭘 안고 하는 것처럼. 절대로 빼앗기지 마세요.

하지만 그런 것들을 주시는 이유가 “네가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에 어느 쪽에 총기가 있는지를” 보게 하십니다. 이제 요한복음, 우리가 저, 몇 장입니까? (요11,12장)한 것처럼 다시 한 번 합니다. 십자가 전까지는 눈에 보인다고 했지요? 그래서 나사로를 죽이려고 합니다. 나사로를 죽여 봤자, 나사로는 관계없이 살았어요. 그런 믿음이 여러분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도 죽이고, 나사로를 죽이고, 이제는 성도라는 사람에게 욕하고, 으레이 그래야 될 세상인 것을, 우리는 진작부터 알고 있어야 됨을, 이제는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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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215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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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