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1007a 울산강의-레위기 1장 : 네 속에 나
20161007a 울산강의-레위기 1장 : 네 속에 나
(강의:이근호 목사)
레위기 1장 3절부터 17절까지 내용은 번제라는 거거든요. 레위기를 보는 사람들이 짜증을 낼 수밖에 없습니다. 제사 지내는 과정이 지겹거든요. 출애굽기까지 재미나게 왔다가 레위기에 막혀서 더 이상 짜증나서 안 보고 민수기로 넘어가든지 하는데 레위기 숲을 지나가기가 만만치 않아요.
그리고 우리의 선입감이 성경을 보면 은혜를 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있거든요. 그런데 레위기를 보면 어디에서 은혜를 받아야 될지 난감하거든요. 누가한테 이야기할 때는 핵심으로 이야기해야 될 텐데 지루한 이야기를 반복하면 질리죠. 그래서 레위기를 보면 큐티할 것도 없고, 내용을 뽑아내고 싶어도 어느 게 핵심인지 뽑아낼 수 없습니다. 레위기를 하면서 레위기가 번잡스럽고 지루하게 기록했는지 그 내용부터 설명하고자 합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이 세상 자체가 뭐로 꽉 차있어요. 세상이 동그라미라면 동그라미 속에 하늘이 있고 인간은 땅에 있고 바다도, 강도 있겠지요. 그런데 우리가 스스로 생각해봅시다. 하늘에 별이 있지요. 별이 왜 있어야 되지요? 우리는 살아가면서 하늘이 텅텅 비어있는 것처럼 살아가요. 늘 우리가 살아가면서 별 보면서 나는 별 때문에 산다고 하는 사람 없어요. 별이 있든 없든 간에 밤에 달이 있든 없든 간에 낮에 해가 있든 없든 간에 나만 챙기며 살아가요.
자기중심의 현실체제를 갖추면서 현실관에 맞추어서 살아가는 거예요. 내 중심으로 살아가는 게 뭐가 문제냐 하면, 그렇게 되면 달이 있는 이유, 별이 있는 이유가 스며들지 않아요. 구태여 해가 있을 필요가 없어요. 어차피 내 중심으로 사는데. 그렇지 않습니까? 어차피 세상은 나만 있으면 된다고 살게 되면,
오늘 아침에 집 앞에 새가 날아가요. 흔해빠진 이야기잖아요. 너는 내 허락도 없이 공중을 나느냐? 그런 생각이 문득 들었단 말이죠. 새야, 너는 왜 내 구역을 나느냐고 하면, 새가 뭐라고 하겠어요? 너는 왜 내 앞에 얼쩡거리고 있느냐? 마찬가지거든요. 둘 다 뭐가 잘못됐느냐 하면, 새까지 아우르면서 또 새는 나까지 아우르면서 전체를 보는 안목이 우리가 미흡하다는 점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 전체를 창세기 1장에 보면 해와 달과 별, 코끼리, 코스모스, 바다 이런 것들을 다 의미 있어서 만들어놨는데 우리는 그런 건 다 빼버리고 마지막 날에 만들어진 나, 나 자신만 챙기면서 나는 현실에 대해서 안다고 하고 있단 말이죠. 그러면 현실에 대해 안다는 사람에게 묻고 싶어요. 당신이 하나님이라면 세상을 어떻게 만들겠는가? 내가 하나님이라면 쓸데없는 것은 안 만들지요. 별은 안 만들어요. 새똥만 뿌리는 새도 안 만들고, 달도 안 만들고, 아는 친구들만 만들고 재미나게 살겠지요.
사람들은 그걸 천국으로 상상해요. 하나님께서는 창세기 1장 1절을 통해서 이 세상 전체와 천국을 연관시키는데 우리는 이 세상 속에 살면서 나만 달랑 끄집어내고 자기 위주로 자기 이익 되는 위주로 따로 현실을 자기 영역, 개들이 오줌 누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조폭들이 자기 구역 차지하는 것과 똑같지요. 내 구역 위주로 살면서 이걸 고대로 마치 천국이었으면 좋겠다는 식으로 생각합니다. 천국이 왔으면 좋겠다.
하나님의 뜻은 해와 달 이런 것들이 천국을 설명하는데 필요해서 만들어놨는데 우리는 그런 요소는 귀찮다고 다 빼버리고 일방적으로 내 위주로 나는 크게 그리고 남은 작게 그리겠죠. 이런 식으로 자기한테 필요한 것은 크게 느껴지고 필요치 않은 것은 있으나마나 한 것이고.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거예요.
여러분이 집에 오면서 가로수에 나뭇잎사귀가 몇 개인지 아십니까? 잎사귀 몇 개인지 내가 왜 헤아려봐야 돼요? 그러나 하나님은 그 잎사귀가 달리게 했거든요. 그러나 우리는 아무리 하나님이 존재하게 할지라도 나한테 의미 없으면 그건 있으나마나 한 거죠. 그러면 누가 신이에요? 우리는 마치 내가 신인 양 여깁니다.
내가 원하는 이상세계, 나한테 적합한 이상세계를 천국이라고 꿈꾸고 있으니까 이런 천국에는 십자가가 필요치 않아요. 십자가 대신 낚싯대만 있으면 됩니다. 하늘에서 낚싯대 드리워서 <흐르는 강물처럼> 영화처럼. 이번에 캐나다 갔는데 그 영화 촬영지가 그 동네에 있어요. 벤프 국립공원이라고 경치 좋은데 있습니다. 포스터에 보면 낚싯대 던지는 장면이 있거든요.
하나님은 능력이 많잖아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낚싯대로 걸어서 잡아당기면 하나님 좋고, 나 좋은 천국에 들어갈 수 있잖아요. 그렇게 되면 십자가가 낄 자리가 없어요. 그래서 오늘날 교회에는 십자가가 없어요. 십자가는 잠시 들어갔다가 곧장 빠져버려요. 왜 예수님의 죽음이 필요한지 내가 바르게 살면 되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어야 되느냐 말이죠. 참 이상한 일이잖아요. 말씀 주셨다. 성실하게 지키면 돼. 그러면 착실한 사람 되고. 천국은 착실한 사람이 들어가고.
시편 1편에 주야로 말씀을 묵상하는 자로다. 묵상하면 되잖아요. 묵상하는 자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열매를 맺고 그 사람이 의인이 되고 묵상하지 않는 사람은 악인으로 분류되어서 의인의 회중에 참여하지 못한다. 굉장히 간편하잖아요. 시편 1편에서 십자가가 보이지 않아요. 우리 구미에 딱 맞습니다. 흡족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시편 1편을 지키려고 하는데 괴기영화처럼 내 다리 내놓으라는 식으로, 전설의 고향에 귀신처럼 들어와서 너는 엉뚱한 길로 갔거늘 나는 네 죄 대신 채찍 맞는다 하고 오면, 왜 그런 이벤트가 필요한지 낯설단 말이죠. 착실한 나에게 당신은 누구세요?
여기서 십자가로 인하여 들어오면 우리가 생각한 천국 자체를 한 자로 죄가 되는 거예요. 우리가 천국 가겠다는 게 죄가 돼요. 구원받겠다는 게 죄가 되고. 좋은 나라에서 계속 살겠다는 그것이 죄가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추방시켰는데 추방의 취지와 안 맞거든요. 십자가 피를 흘렸다는 것은 천국을 생각하는 어느 누구도 진짜 천국에 들어갈 자격이 없음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방향이, 노선이 잘못됐다는 거죠.
그러면 하나님의 노선은 뭐냐? 하늘엔 별이 있고 달이 있고 바다에는 고기 있고, 땅에서 너와 코끼리, 맨드라미, 사슴, 너구리도 있고. 이 모든 것과 관련된 천국을 준비했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입장에서는 뱀 같은 것들이 필요치 않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꼭 필요하다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는 벌써부터 의견충돌이 일어나는 겁니다. 의견이 서로 맞지 아니해요. 우리는 우리중심이고, 하나님은 전체를 몰고 가는 겁니다.
이러한 의견충돌이 바로 욥에게 일어납니다. 욥이 모든 걸 빼앗기고 난 뒤에 화가 나서 하나님께 대들었지요. 저한테 왜 고난을 주십니까, 라고 할 때 하나님의 답변은 이래서 고난 주신다는 게 아니고 엉뚱하게 하늘의 별 이야기하고 바람이 어디서 부는지 아느냐, 염소새끼 낳을 때 본 적이 있느냐? 지금 고난 받고 아파하고 있는 사람에게, 고난 받고 아파할 때는 염소나 하늘의 별에 관심이 없어요. 아파하는 지금, 그러니까 모든 정신이 자기한테만 쏠리게 돼있어요. 신이시여, 저와 이야기합시다.
하나님은 욥과 이야기하면서 주제가 달라요. 욥이 평소에 생각지도 않은 다른 이야기를 해버려요. 다른 이야기할 때 욥의 답변은 간단해요. 모릅니다, 모릅니다. 모른다는 이야기를 꼭 해야 되겠어요. 하나님께서 욥이 모르는 이야기만 골라서 했는데 모른다는 답변도 구차한 거죠. 하나마나한 소리에요. 모른다는 사실로 유도했기 때문에 그래요.
하나님이 욥에게 네가 전체를 알아? 모릅니다. 전체를 모르는데 왜 나한테 대드느냐? 이겁니다. 네가 전체를 알면 나와 이야기가 되는데 일부만 아는 입장에서 저한테 고난을 주는 것은 형평성에 어긋납니다. 억울하다고 나오니까 하나님께서는 깨놓고 이야기해요. 네가 네 사태에 대해서 뭘 안다고 그런 소리하느냐, 알긴 알아?
별, 삼성, 북두칠성 만들 때 네가 있어나? 없었는데요. 황무지에 비오는 이유를 알아? 채소밭이 아닌 황무지에 비가 왜 오느냐 말이죠. 인간들은 자기 채소밭에 비오는 것은 자기 의미기 때문에 하나님 감사합니다. 채소 잘 가꾸고 시금치 잘 먹겠습니다. 그건 니 생각이고 황무지에 비오는 이유를 아느냐? 황무지에 쓸데없이 비는 왜 내립니까? 그러니까 네가 너에 대해서 모르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욥은 재를 뒤집어씁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모든 천국의 활동은 먼저 우리에게 죄인이라는 것, 우리가 죄 속에 있음을 발각시키는 것부터 시작되지요. 그게 욥기는 구약이지만 신약은 바로 십자가로 우리에게 찾아옵니다. 네가 죄인으로부터 출발해야 된다.
어떤 분이 저한테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미국에 계신 분인데 아들이 선교단체에서 꾀어서 선교하겠다는 거예요. 하나님 뜻이라 해서 선교하겠다는 거예요. 제가 사정은 잘 모르니까 간단하게 답변했어요. 그 사람이 선교하겠다는 것이 어떤 바탕에 있느냐 하면, 부모가 자기한테 돈을 대주면 고맙겠다는 바탕 위에서 선교하겠다는 생각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나이가 열아홉 살 됐으면 인간의 가장 기본을 알아야 돼요.
내가 하루 세끼 먹는 밥이 그냥 공짜로 먹을 수 있는 권리가 본인한테 없다는 걸 알아야 돼요. 부모가 희생해서 밥을 줄 때 어릴 때는 이해되는데 열아홉이면 성인이잖아요. 자기 밥벌이는 스스로 알아서 해야 될 거예요. 밥을 공짜로 주는 걸로 생각하게 되면 자기 근본을 모르고 건방떠는 것밖에 안 돼요. 예를 들어서 자식이 대학에서 전공공부를 한다면 부모입장에서 자식이 나중에 밥벌이할 수 있도록 자립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하도록 부모가 협조해줘요.
그런데 선교가 취직하는 겁니까? 아니잖아요. 취직하는 게 아니라면 제 의견은 이거에요. 네가 전공과목 살려서 대학에서 공부하고 취직해서 돈을 저축해서 그 돈으로 하나님 뜻이라고 해서 선교하게 되면 그건 자립된 존재로써 얼마든지 자신의 의지대로 알아서 할 거고. 그건 부모가 말릴 수 없는데 지금은 자기가 배부른 상태에서 부모한테 손 벌려서 선교하겠다는 말은 아무리 봐도 놀러가겠다는 의미 외에는 다른 게 없어요.
따라서 선교하겠다는 말 속에 뒤에 뭐가 빠져 있느냐 하면, 하나님의 선교가 선교인데 내가 하는 모든 짓거리가 죄가 된다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돼요. 그런데 선교단체에서 아이들을 어떻게 꾀느냐 하면, 중동 간답니다. IS가 자살폭탄 아이들 꾈 때 꼭 그렇게 꾀는 거예요. 당신은 귀한 존재고 사랑받는 존재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쓰시면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뭐가 빠졌어요? 하나님의 일은 신약에 십자가, 구약에서는 네가 자연세계를 알아? 죄로부터 시작하지 않고 죄를 비껴가서 너는 귀한 존재다. 이것부터 출발하는 거예요. 선교단체가 아니고 악마의 단체지요. 저는 선교단체가 다단계회사라 했습니다.
젊은 얘들 외국이 궁금하거든요. 외국소식 들으면 자기가 대단한 영웅이나 되는 것처럼 호기심+모험심을 주체할 수 없어요. 주체 없는 건 좋아요. 나중에 자기가 돈 벌어서 가든지 말든지 하면 되는 거예요. 제가 몇 개월 전에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요새는 개나 소나 다 서유럽 여행 간다고. 한국 아가씨들 배낭 매고 시집도 안 가고 여행 와 있어. 20대에 돈 벌고 30대에 배낭여행, 유럽에.
왜 갑니까? 행여 우연히 외국남자 만나서 결혼할 수 있을까 싶어서. 그래봐야 발렌시아에서 살림 살겠지요. 몇 달 전에 <인간극장>에 발렌시아 이야기 나왔어요. 인도에서 스페인 남자 만났는데 마음 맞는다고 결혼했단 말이죠. 그게 한국 아가씨들에겐 로망, 꿈이 되고 말았어요. 한국에선 생각만 해도 컴퓨터 일 보면서도 이번 보너스 받아서 여행가야지. sns에 여행사진 찍은 것 올리고. #좋아요, #뭐하고, 달려 나오는 거예요
그건 남자도 마찬가지에요. 선교를 핑계로 놀러가고 싶은 거예요. 왜? 답답하니까. 이 핑계로 부모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서 좋고. 그러면 돈은? 선교한다니까 주께 영광 돌린다고 하니까 군말 없이 주겠지. 제가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 세상에서는 자기 밥벌이는 자기가 해야 돼요. 근거가 창세기 3장입니다. 이 땅은 천국이 아니고 지옥이에요. 힘들여 고생하지 않으면 돈이 안 벌리도록 주께서 그렇게 궁지로 몰아넣는 세상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에 보면,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
10대는 철없다고 부모가 도와줘요. 하지만 20대가 되었으면 언제까지 취미생활이나 하고 오락이나 하면서 부모 돈으로 누가 못합니까. 상담하신 부모한테 그랬어요. 지금 돈 대주면 나중에 자기 뜻대로 안 되면 부모한테 대들 거라고. 왜 아버지, 엄마는 내가 뻔히 엉뚱한 길로 가는 줄 알면서도 안 말렸느냐고 나온다니까. 그런 소리 듣기 싫거든 가되 차비는 네가 벌어서 가라.
벌려면 어떻게 버느냐? 이 세상에서 직업을 가져야 돼요. 일단은 딱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적성검사해서 자기 노선대로 해야 되고, 두 번째는 직무능력이 배양돼야 그 회사에서 살아남을 수 있어요. 취직해서 6개월 동안은 진짜 정신없이 죽을 둥 살 둥 자기 업무에 프로가 돼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재계약 들어갑니다. 그 업무에 성과 못 내면 잘리는 거예요. 취직했다고 자랑질할 여유도 없어요. 모든 게 모르는 거니까.
제가 아는 전도사님 자제분이 삼성에 취직했는데 아침에 출근하면 이메일로 오늘 해야 될 일이 백 몇 가지씩 온답니다. 삼성 돈 많이 준다고 하지요. 감당 못합니다. 그래서 나왔지요. 사람 잡아요. 직무능력을 감당해야 그 다음 업무도 맡기는 거예요. 이 세상은 지옥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파키스탄, 중동 이라크 선교가 아니고 현재 울산바닥에 살고 있잖아요. 이게 선교지에요. 그래서 남 구원시키려하지 말고 본인이 죄인인 걸 살아가면 이것이 외부적으로 복음 전파하는 겁니다. 선교, 참 쉽지요? 정말 쉽지요.
주신 자도 하나님이요 가져가신 자도 하나님이라는 것을 이론으로 알았던 욥이, 욥기의 마지막 장면에서는 이론으로 아는 게 아니고 그 말씀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고 말씀이 욥을 삼켜버렸습니다. 욥은 거기서 죽을 뻔했습니다. 진짜 주신 자도 하나님이요, 가져가신 분도 하나님이라는 실습도 그런 실습이 없어요.
오늘 우리가 해야 될 것이 번제인데 이 세상 전체에서 인간은 처음부터 아무것도 모르면서 아는 척하면서 세상을 내 중심으로 우겼던 그러한 죄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죄를 알리기 위해서 다섯 가지 제사로 찾아오십니다. 번제, 소제, 속죄제. 속건제. 화목제. 제사에 마주치면서 우리는 죄를 발견하면서 이 제사가 나를 죄인으로 몰아세우는 자체에서 천국 들어갈 수 있는 의, 다른 말로 거룩이 나와요.
그렇다면 이 세계 말고 다른 세계를 봅시다. 첫 번째는 적성검사, 두 번째는 직무수행 능력을 배양한다. 이게 일단은 육적으로 사는 겁니다. 이것이 첫 번째라면 두 번째는 감정적으로 해야 되는 게 있어요. 여자가 자식을 낳으면 자기 직업, 직무능력과 상관없이 무조건 키워야 돼요. 정 못 키우면 아파 죽든지 어떻게 해야 되죠. 앞의 것이 사회적이라면 뒤의 것은 생물학적입니다. 그리고 직업과 상관없이 어떤 남녀가 불꽃이 튀면서 서로 사랑한다? 이건 사회적인 것과 상관없이 생물적인 본능이죠.
이 두 가지가 이 세상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것의 전부라고 생각한 겁니다. 이걸 ‘의미’라고 해요. 의미는 두 가지가 있어요. 사회적으로 내가 밥 먹고 살기 위해서는 내가 애써야 된다는 것과, 그것과 상관없이 딱 보니 서로 통했다, 반했다. 아무리 따져도 직업상 도저히 안 어울리거든요. 어떤 여자가 있는데 두 남자가 나타났어요. 한 남자는 기자고, 한 남자는 방송국 사장님이고. 자꾸 재벌 아들이 자기한테 프러포즈하고 사장 엄마는 구박해도 아들은 기어코 하겠다는데 마음으로는 기자한테 끌리는 거예요. 누구냐면, 공효진입니다. <질투의 화신>
이게 사회적 판단과 관계없이 마음으로 끌리는 것, 이것뿐이에요. 이게 사는 의미다. 사회에서 스트레스 받는 것 사랑으로 풀자. 이게 육적인 인간들이 살아가는 게 딱 이것뿐이에요. 제가 캘거리 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했습니다만 남녀가 사랑했다. 그런데 결혼했다. 끝인가? 아니요. 본격적으로 여자 입장에서 헤어질 때 이 정도 사랑했다면 같이 얼마나 사랑하겠는가, 그런 기대를 품고 결혼하는 거예요. 남자들은 결혼했다. 그걸로 사랑은 마감이 돼요. 내 것 돼버렸는데 이러고 있단 말이죠. 그러니까 의미라는 게 두 가지밖에 없구나.
그러면 성경에서는 뭐라 하느냐 하면, 이건 인간중심의 의미라면, 하늘의 새가 날고 하늘엔 별과 달이 있는 이 전부를 통합했을 때 나오는 의미는 뭐냐? 그 의미는 골로새서 1장 16절에 나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만들어졌다는 그 의미, 이제는 그 의미를 택한 백성, 이스라엘 백성에서 집어넣는 거예요. 집어넣을 때 나오는 본문이 시편 50편 5절입니다. “이르시되 나의 성도를 내 앞에 모으라 곧 제사로 나와 언약한 자니라 하시도다”
제사로 나와 언약한다. 하나님의 약속, 몇 시에 다방에서 만나자. 태화종합시장에서 만나자. 요새는 울산이 얼마나 유명한지 틀면 태화종합시장이에요. 그것도 물에 잠긴 서점이 나와요. 어느 특정 지점에서 만나자는 약속이 아니고 제사 안에서 만나자는 거예요. 이 말이 굉장히 어려워요. 제사 안에는 못 들어갑니다. 그런데 만나자는 겁니다.
원래 하나님의 성소에는 일반인들은 못 들어가요. 오른쪽 귀뿌리와 오른쪽 손가락과 기름과 피를 묻히지 않은 제사장이나 레위인 아니면 성막에 못 들어갑니다. 100규빗과 50규빗으로 동쪽에 문이 나있는 여기 성소가 있고 편물로 만들어놓고 여기 물두멍, 제단이 있거든요. 제단에서 제물 태우고 쓰레기는 동쪽에 버리고.
오늘 본문이 번제인데 번제는 어떻게 하느냐 하면, 입구에 백성들이 서있습니다. 양 한 마리 들어오면 마중을 나가서 끌고 옵니다. 양이 꿈틀거리면서 안 되니까 양의 목을 졸라요. 그리고 머리에 제사장이 안수하게 되면 양을 가져온 사람의 죄가 이전이 돼요. 양을 눕혀놓고 목을 치고 피가 나오면 양푼에 피를 담아서 제단 뿔 네 곳에 뿌리고 제단을 피로 도배해버립니다. 그 다음에 가죽을 벗기고 뼈 빼놓고 내장을 분리하고 고기를 발라서 몽땅 태우고. 쓰레기는 동편에 버리는 겁니다. 이게 번제에요.
이게 무슨 우주 전체, 하늘의 달과 별과 관련된 이게 의미냐 말이죠. 여러분 납득이 안 되죠. 왜 납득이 안 되느냐 하면, 우리의 선악적 사고방식, 선악과 따먹고 난 뒤의 우리의 선이라는 것은 악을 저지른 만큼 상쇄되는 선을 행하면 우리는 마음이 상쾌해서 기분 좋아요.
만약에 수해나서 차가 밀려서 교회 10분 늦게 왔다. 10분 늦었으니까 헌금시간에 오천 원 정도 넣으면 되고. 20분 늦었으면 만 원 정도 되면 마음에 위로가 되고. 그런데 끝날 시간에 왔다면 그때는 좀 더 쓰세요. 오만 원짜리 써야 하나님 앞에 늦게 왔다는 미안함이 상쇄되는 게 우리의 타고난 양심은 그런 식으로 구조돼있어요. 항상 대차대조표 균형 맞추듯이 우리의 양심은 그런 쪽이에요.
실수해서 악을 저지르면 다음에 고아원 방문한다든지 해서 선한 행동하면 주님 앞에 정당하게 큰소리칠 수 있거든요. 그게 바로 우리의 정서인데 하나님이 하는 것은 너무 과도해요. 죄 씻음 장치가 심해도 너무 심해요.
실제로 제가 어릴 때 그런 걸 느낀 적이 있는데 우리 할아버지에 유교에 철저한 분이에요. 질릴 정도로 유교적이에요. 자식들이나 손자들한테 유교적으로 철저하게 훈련시킨다고 저 같은 경우에는 신발을 어떻게 놓는지 감시해요. 저도 할아버지가 감시하는 줄 알고 나름 노력해요. 좀 삐뚤게 놓으면 근호야, 이리 와 봐라, 하면서 일주일 동안 잔소리해요. 너, 성질 안 고치면 나중에 출세 못한다. 범주를 추상적으로 넓혀서. 문 닫을 소리 나면 안 돼. 밥상 들어올 때 엉덩이부터 보이면 안 돼. 이제 보니까 할아버지의 취미생활이고 나는 그 할아버지의 취미생활에 노리갯감이 된 거예요.
내가 보기엔 조금 잘못했는데 그 처벌은 너무 가혹해요. 이게 매치가 안 돼요. 십자가에 죽었던 게 매치가 안 된다니까요. 너무 오버하시는 것 아니냔 말이죠. 십계명 줬으면 지키겠다는 최선의 노력을 가상히 여겨서 얼마든지 좋은 게 좋다고 말로 할 수 있는데 마음속으로 누굴 미워했다고 해서 자기 아들을 대신 그것도 십자가에 못을 박는다는 것은 더 이상 우리로 하여금 할 말을 잊게 만들어요.
제사로 언약했다는 말은 뭔 뜻이냐 하면 우리가 죄 지었으니까 벌 받으라는 게 아니고 이미 벌을 정해놓고 그 벌에 합당한 죄를 지으라고 우리를 울산바닥, 대구바닥에 평생 살게 만들어요. 또 다른 데 가면 다른 데서 살겠지만. 벌부터 이미 확정되었어요. 십자가에서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이미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을 저주받기로 확정했어요. 그게 벌이에요. 이 벌이 자기한테 합당하다고 인정한 그 사람은 천국 갑니다. 왜냐하면 벌을 내리신 행위가 의고 그것을 용서한 행위가 의기 때문에. 그러니까 의는 우리가 소유하는 것이 아니고 의가 우리를 소유하도록 그렇게 주님께서 약속을 맺은 거예요.
우리는 기껏 의미란 적성검사해서 밥 먹고 사는 것과 그리고 서로 당기고 사랑하고 그렇게 한 평생 아옹다옹하면서 사는 것, 그게 전부잖아요. 그렇게 되면 해와 달과 별이 있을 이유가 없다니까요. 뭔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내가 원치 않은 종달새가 울고 재수 없는 까마귀가 대나무 숲에 왔다 갔다 한 그 이유를 우리는 몰라요.
만약에 회사가 부도났다면, 하나님이여, 어찌 이럴 수 있습니까? 십일조 꼬박꼬박 냈는데 30배, 60배, 100배는 아니더라도 마이너스 30배가 뭡니까? 이럴 수 있습니까? 왜 물이 차서 서점이 다 잠깁니까? 이렇게 하면, 네가 태화강에 까마귀 있는 것을 아느냐? 이렇게 나온다니까요. 비오고 난 뒤에 하늘에 달이 휘영청 빛나는 이유를 아느냐? 엉뚱한 질문을 한다니까. 그건 모르지요. 어디서 모르는 게 내 앞에서 아는 척하느냐.
다시 말해서 우리는 그것만 모르는 게 아니에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은 이유를 몰라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왜 어린양을 잡아야 되는지 이유를 몰라요. 그것도 불에 다 태워지는 이유를 몰라요. 그것은 인간은 일단 그 기능을 할 뿐이지 그 기능의 의미에 대해서는 추가적인 율법이 투입됨으로써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궁지로 몰아세웁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는 것으로.
그러면 왜 우리가 살아야 됩니까? 그럼에도 죄인들이 왜 살아야 됩니까, 이런 문제가 나오거든요. 질문 자체가 잘못됐지요. 죄 지었으니까 죽어야 된다고 생각한 자체가 잘못된 선입관이에요. 죄 지어서 죽을 것 같으면 아벨을 죽인 가인은 즉사해야 돼요. 아벨을 죽인 가인은 내리 번창만 하더라. 온 도시를 다 점령하고. 산다는 것이 살만해서 사는 게 아니고 언약 때문에 언약에 의한 짝을 맞춘, 예수님은 의인이라면 우리는 죄인이라는 세트를 맞추기 위해서 우리는 계속해서 살기 싫더라도 살아가야 돼요.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율법은 우리가 지키라고 준 게 아니에요. 우리를 스쳐지나가서 십자가와 관련돼있어요. 이게 갈라디아서 3장에 나옵니다. 430년 후에 온 율법은, 하나님의 의를 전제로 하고 율법이 와서 착륙하는듯하다가 비켜 가버립니다. 이렇게 한 이유가,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의를 알지/믿지 못하는 죄인인 것을 율법을 통해서 알리고 죄를 규정해놓고 아브라함이 드린 희생제사와 결합시켜서 그것의 완성이 예수님의 십자가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온 우주를 총 동원시킨 거예요.
시편 50편 5절을 다시 읽어드리겠습니다. “이르시되 나의 성도를 내 앞에 모으라 곧 제사로 나와 언약한 자니라” 그러면 제사에 언약했다면 중간과정이 레위기에서 너무 난잡하고 너무 복잡해요. 그래서 우리는 결론부터 알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데 히브리서 9장 22절에 보면,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이게 결론입니다.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방금 제가 결론 이야기했지 납득이 된다고 이야기하지 않았어요. 이런 결론에 도달하는 중간과정은 다 생략하고 이야기한 거예요. 결론은 뭐냐 하면, 피가 없으면 죄 용서도 생각하지 말라는 거예요. 그렇다면 피 흘린다는 말은 하나님이 과도한 액션을 취한 겁니다. 어쨌든 결론은 알았어요. 피 흘림이 있으면 용서가 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실 때 언약을 들고 왔는데 레위기에서 제사로 언약했다. 스타트 이야기했고 엔딩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면 중간과정이 어떻게 흘러서 결국은 역시 피 흘림이 없은즉 죄 사함이 없다는 것으로 마감되는지 그 과정에 누가 동원되는가? 이스라엘 백성이 동원되지요. 기능별로 동원되지요.
어떤 기능이냐? 죄 짓는 기능이 있고 죄 지었다고 양을 몰고 진 중앙에 있는 성막까지 끌고 오는 기능이 있고, 양을 잡고 성막 안으로 끌어당기는 기능이 있고, 거기에 안수해서 죄를 이전시키는 제사장 기능이 있고, 양을 잡는 레위인들의 기능이 하나로 통합되면서 역시 피 흘림이 없으면 사함이 없네요, 확인하고 그걸 증명하는 역할을 하라고 하나님께서 시내 산에서 레위의 율법을 모세를 통해서 전달하게 하신 겁니다.
이것을 그림으로 그려 보겠습니다. 지금까지 한 것을 복습해보겠습니다. 여기 시내 산이 있습니다. 모세는 홀로 있습니다. 나머지 백성은 남자만 사십만 대군이 있습니다. 이들은 적성검사해서 직능별로 하고 싶은 대로 사는 겁니다. 하지만 재정적으로 사회적으로 가난한 자, 부한 자가 있지만 생물학적으로 비록 가난해도 정 맞춰 평생 살아가면서 나름 행복을 느끼는 생물학적인 의미를 찾는 사람도 있을 거예요. 하지만 어디까지나 산 밑이에요. 두 가지 다 자기중심적인 의미에요. 산 위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완전히 빼버린 거예요. 이는 인간적인 소박한 꿈, 얼마나 소박한 꿈이에요.
이사야 37장에서 히스기야 때 앗수르 군대 십팔만 오천 명이 예루살렘을 포위합니다. 십팔만 오천 명이 산 밑에 인간의 삶에 충실한 사람들이에요. 앗수르 군대는 징병된 사람들이잖아요. 자기 집에서는 다 효자들이고 귀한 집 자식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어떻게 됐을까요? 천사가 와서 치니까 그날 밤에 다 죽었어요.
죽은 이유가 뭘까요? 다 집에서는 효자들이고 각자 직장들이 있었을 거예요. 앗수르 고향에서는. 나라가 전쟁한다니까 왔는데 하나님께서 너는 효자니까 빼줘야겠다. 너는 방금 결혼했으니까 빼주고, 너는 집에 가라는 게 있습니까? 없지요. 하나님께서 우리의 소박한 의미를 일체 용납을 안 합니다. 그럼 왜 죽였는가? 하나님의 언약이 있는 예루살렘을 포위했다는 이유로 다 죽인 거예요. 하나님의 언약에 대들면 그 자체가 저주의 형상입니다. 이게 시내 산 위의 의미에요.
10분 쉬고 우리가 해야 될 것은 뭐냐? 아래 의미와 위의 의미가 달라요. 위, 아래 의미가 다르다니까요. 우리의 소박한 의미를 하나님께 기도하지 마세요. 하나님은 우리기도 듣지 않습니다. 의미적인 기능만 기도 응답되지 밑에 있는 소박한 꿈, 결혼하게 해주세요. 우리 헤어지지 말게 하옵소서. 이런 것 응답 안 됩니다. 왜 다른 집은 멀쩡한데 우리 집은 수해드는가? 그것 의미 없어요. 까마귀 왜 왔는지 그 이유 알거든 나한테 찾아오너라.
10분 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