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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가락-요한복음11장50절(예수님 이야기)161004a-이 근호 목사자유게시판요한복음

가락-요한복음11장50절(예수님 이야기)161004a-이 근호 목사

(요11:50)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하지 아니하는도다 하였으니

50절부터 할 차례입니다. 11장 50절. 그런데 사실은 우리 47절부터 한번 보게 되면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리고 난 뒤에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 사람을 살려둬선 안된다고 하는 거예요. 참 이상하죠? 사람이 할 수 없는,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기적을 베풀었으면 어떻게 됩니까? 이 사람을 포섭을 해서 자기 사람으로 만들어야 되는데, 어디에서 차이가 나느냐 하면 율법에 대해서 예수님의 견해와 유대인들의 견해가 달라요.

유대인들의 견해는 뭐냐 하면 우리가 지킬 수 있는 법으로 율법을 본 겁니다. “우리가 지킬 수 있다. 지킬 수 있기 때문에 법을 줬었다.” 특히 율법에 보면 명령어에요. 명령어. 지시와 명령이잖아요. 누가 누구한테 지시하고 명령할 때는 행할 수 있기 때문에 지시하고 명령한다는 것이 우리의 선입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교훈은 뭐냐 하면은 모세의 율법은 너희들이 율법대로 심판하기 위해서 너희에게 율법을 줬다고 이야기 합니다. 심판하기 위해서.

그것을 갈라디아서 3장에서는 뭐라 하면은 행함으로 구원받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율법을 줬다는 겁니다. 율법을 주게 되면, 왜 그러냐 하면 율법을 주게 되면 반드시 행하려는 의지가 거기에 마중을 나오게 되어 있어요. 부모도 그렇잖아요. 부모가 자식한테 일시키면 대부분 행하고 싶잖아요? 그런데 행하게 되게 되면 열심히 해봐라 쪽으로 행하는 게 아니고, 만약에 제대로 지시한대로 되지 않았을 때에는 처벌이 주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처벌을 밑에, 밑창에 깔고 주께서 이야기 하는 겁니다. “네가 못 지키는 경우에는 너는 각오해라. 각오해라.” 이렇게 되는 겁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하는 이유가요. 그 당시 유대인 보고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구요. 그 당시 유대인의 그것이 어떤 동질성을 이루느냐 하면 이스라엘이 구약 이스라엘과 똑같은, 같은 평지를 이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같은 평지. 그림을 그리면 이렇습니다.

이스라엘이 처음 만들어진 게 언제이지요? 출애굽 때죠? 출애굽입니다. 애굽에서 나올 때부터 어떤 나라가 만들어지는데, 이스라엘이 만들어 집니다. 이스라엘을 만든 나라가 어떤 어떤 우여곡절을 다 겪고, 어떻게 신약에, 예수님 오실 때까지 유대 나라가 존속 되잖아요. 그런데 예수님 보시기에 이 시기가 뭐냐 하면 이 시기가 바로 마지막 때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심판주로 오시기 때문에. 따라서 이 이스라엘에 대한 총 정리를 어디서 하느냐.

그 당시에 유대민족, 이스라엘과 동족성을 유지하고 있는 이스라엘에게 마지막 때 다운 면모를 주께서는 말씀으로 보여주는 겁니다. 사사설교와 같은 경우에도 역시 하나의 율법인데요. 율법인데, “마음속으로 간음한 것도 간음 죄다. 형제를 미워하는 것도 살인죄다.” 라고 해서. 지금껏 이스라엘 사람들이 옛날 고대부터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너희가 어떤 식으로 이해했기에, 어떤 식으로 잘못 이해했기에..”

망했다는 것을 최종적으로 종합해서 예수님께서 산상설교로 말씀해 주시는 거예요. 그렇게 되게 되면, 이러한 예수님의 전략인데요. 예수님의 작전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에서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2장 후반부터 3장까지 이렇게 이야기 하죠. 율법으로서, 율법으로 의롭게 될 수 없다. 율법으로 의롭게 될 수가 없다. 그 말은 뭐냐 하면은 율법은 두 가지 방향으로 적용되는데, 율법을 보통 사람에게 줘버리면, 율법으로 의롭다 할 사람이 없어요.

그러면 율법을, 그럼 사람에게 율법을 줬다? 그러면 나머지 다른 쪽은 누구에게 줬느냐? 다른 쪽은 예수님 본인이, 율법을 본인이 수용해 버립니다. 수용하고, 그것을 어디서 이루느냐 하면은 바로 그 이웃사랑을, 십자가에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어 버립니다. 죽음을 통해서. 십자가에 죽음을 통해서 그걸 다 이루십니다. 그것을 저는 인터셉트라고 하는데 주신 율법을 예수님이 중간에 인터셉트, 가로채기 해가지고 자신에게로 물줄기를 돌려버리죠.

그러면 예수님이 율법을 과연 다 이루었는지 아니면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율법에 실패했는지 그 여부는 예수님이 율법대로 죽고 난 뒤에 사흘 만에 판정이 나요. 예수님이 그냥 죽어서 무덤에 예수님의 시신이 있으면 죄 값으로 죽은 게 되거든요. 죄 값으로 위반해서 죽은 게 되는 저주, 율법 어기면 죄입니다. 말을 좀 쉽게 합시다. 사람이 죽는 이유가 뭐냐 하면은 사람이 죽는 이유는 본인이 몰라요.

모든 사람 중에서 자기가 죽는 이유에 대해서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것을 원형적으로 원천적으로 주께서는 말씀을 통해서 죽는 이유를 살핍니다. 그러니까 쉽게 해서 죽어가는 사람을 보고 율법을 줬다는 말은 “네가 이거 믿으면 죽음이 취소된다는 말이 아니고 어차피 죽어가는 거 죽는 이유나 알아라.” 이 말이에요. 죽어가고 있으면서 살아보려고 율법을 지킨다는 것은, 이거는 주님의 의도를 몰라도 너무 모르는 거예요. 이 교회들이.

사도의 권면, 명령도 마찬가지고 성경 말씀은 너보고 뭘 해보라는 것이 아니고 너에게 일어나는 모든 현상들, 죽어가는 현상 자체가 이미 확정적이라는 겁니다. 이게 돌이킬 수 없어요. 이게 그 이야기가 어떻게 돼요? 깔끔하잖아요. 깔끔하지요? 제가 얼마 전에 7월 달에 드라마를 보다가, 띄엄띄엄 보다가 9월 달에 미국 간다고 못 본, 마무리 못 지은 드라마가 있어요. ‘더블유’라는 드라마였어요.

MBC에서 했던 드라마인데 그 ‘더블유’라는 드라마가 내용이 뭐냐 하면은 만화 속에 주인공이 갇혔어요. 만화 속에. 이 만화 속에 갇혔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은, 만화 속에 있는 본인은 무슨 일이든지 자기가 알아서 미래는 내가 결정해서, 내가 선택해서, 나의 행동에 따라서 내 앞길이 달라진다. 그렇게 생각하겠죠? 자기가 만화 속에 갇힌 것도 모르고. 나의 미래는 지금 나의 어떤 결정에 따라서 내 하기 나름이다. 이 생각 하겠죠?

그러나 작가의 입장에서는, 또 그 드라마의 만화 안에 있는 인물이 있고 또 만화를 그려내는 만화 밖의 또 인물들이 있어요. 시청자들은 그 둘 다 다 보지만. 만화 밖의 인물은 뭐냐 하면은 “너는 만화 속에 갇혀 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럼 만화 속에 갇혀 있다면 어떻게 되겠어요? 만화라는 것은 종이잖아요. 종이니까 이것은 몇 차원이에요? 2차원이지요. 2차원. 표면에, 표면 밖에 나오면 3차원이 되는데, 입체가 되는데, 묶여 있잖아요.

묶여 있으니까 일종의, 동물로 말하면 이건 뭐다? 이것이 되는 거예요. ‘오늘 제목을 이걸로 할까? 가자미.’ 이 가자미가 돼. 가자미처럼 납작하게 돼. 쥐포처럼. 형태는 코, 눈이 있는데 이것을 위에서 프레스, 압력을 가하니까 납작하게 되잖아요. 모든 인간은 죽음에 의해서 그냥 죽음이라는 그런 망하는 것 속에서, 죽는 이유도 그 안에서, 자기는 바깥의 벗어난 외곽의 시선을 갖지 못하니까. 관찰자가 되지 못하니까.

만화를 그린 작가는 알잖아요. 그 작가는 주님이 작가고, 그 만들어진 피조 세계의 그렇게 묶여있으니, 갇혀있는 꼴이 되니까, 자기는 거기서, 바깥세계의 안목이 없어서, 거기에다가 율법을 주니, ‘아! 율법을 지키면 복 받은 모양이다.’ 라고 오해를 하게 되는 겁니다. 이게 오해에요. 네가 지키면 복을 받고 안 지키면 저주를 받는다고 하는 게 전부다 다 오해다 이 말이에요.

이것은 유대인들에게 그런 오해를 줬다는 말은 모든 인간이 다 그렇다는 거예요. 현재 눈에 띄는 서울 시내 시민들 모든 인간은 뭐, 원 총장인지, 반 총장인지 모든 사람,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권력자든지 국회의원 모든 인간들은, 종교인들도 마찬가지고. 그들은 본인을 볼 때에 오해의 안목으로 볼 수밖에 없어요. 이걸 오해가 아닌 제대로 보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의 안목밖에 없어요.

그 안목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 바로 성령께서 오게 되면 비로소 알지요. 그러니까 제자들이 오해한 것은 자기가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은 자기를 사랑하고, 이런 관계라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가룟 유다가 자살하고 자기가 도망칠 때 비로소 성령을 받고 알게 된 것은 처음부터 주께서는 이미 우리를 사랑하기로 작정했다는 거예요. 사랑이라는 만화책에 우리가 갇혀 있어서 구원 받는 사실을 알게 된 거에요.

그래서 로마서 9장에 보면 야곱은 처음부터 행하기도 전에 야곱은 이미 사랑받기로 작정이 되 있고 에서는 어떤 짓거리를 해도, 예수가 아니고 에서. 에서는 어떤 짓거리를 해도 미움 받기로 되어 있습니다. 어제 대구 강의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거든요. 하갈이 낳은 이스마엘을, 하갈과 이스마엘은 억울하기 짝이 없어요. 주인, 못된 여자 주인을 만나서, 누구냐 하면은 사라가 아니고 ‘사래’ 아주 못된 사래.

사래라는 여자를 만나가지고 이건 뭐.. 예. 결국 추방되고 저주받죠. 그런데 얼마나 가슴 아팠으면 통곡, 대성통곡 하면서 웁니다. 방성대곡 하면서 울어요. 쫓겨나가지고. 왜냐하면 제가 어제 강의 했지만 그 이스마엘 그게 아버지가 누굽니까? 아버지가 아브라함이잖아요? 양아버지입니까, 그것도? 예? 아니 진짜 아버지. 진짜 아버지가 자식을 낳았으면, 자고로 남자라면 책임져야죠. 예?

저 마누라가 잔소리 한다고 그걸. 자기가 낳은 자식하고 그 엄마를 그렇게 내쫓아버리면 굶어 죽으라는 소리와 똑같잖아요. 실제로 그, 얼마나 자식이 물이 없어 가지고 굶어 죽어가지고 대성통곡하면서 울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그 모자지간이 지옥가요. 그리고 매몰차게 내쫓았던 질투의 화신 공효진 질투의 화신. 질투 했던 그 사래는 이름도 ‘사라’로 바뀌면서 천국 갑니다. 이게 뭐에요? 이게 뭡니까?

뭐냐 하면은, 구원이라는 것은 인간들의 방식이 아니고 내가 가라고 하면 가고 오지 말라고 하면 안 오는 그 방법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구원이란. 인간의 모든 종교적인 노력과 교회 열심히 다니는 것은 전부다 헛수고입니다. 다 헛수고에요. 아무짝도 소용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대구 강의하면서 제발 좀 사고방식 좀 뜯어고쳐. 좀 바꿔라. 언제 바뀔 건데? 제발 좀 주님의 구원 방식으로 좀 바뀌어 주시옵소서! 제발! 네?

이거 하나 하나 좀 하면 의미 있겠지? 의미 없어요. 의미 없다 구요! 우리가 하는 하나님 나라를 위한 어떤 희생과 선교와 봉사, 그것 참! 헌금이고 다 의미 없어요. 사고방식부터 가 이게 바뀌어져야 됩니다. 그래서 오늘 강의하면서 먼저 생각해야 될 것은, 강의하면서 생각해야 될 것은 뭐냐 하면은 이거에요. 아까 가자미 이야기는 했지만, 주님이 개입해 버리면 우리의 이야기는 스탑! 멈춰야 돼요. 우리의, 우리 이야기로서 우리 인생은 멈춰야 돼요.

주님이 개입하게 되면 그 다음부터 무슨 일이 생기게 되느냐? 소급해서 누구의 이야기를 하게 되느냐? 이게 예수님의 이야기에요. 왜 그렇게 되느냐 하면은 우리는 원형을 몰라요. 우리는 원형을 모르고 나 자신이 나에게 유일한 원형이라 생각을 하는데 주님 보시기에는 원형 되게 하기 위해서 하나의 부속품, 하나의 일부로 우리가 보기에 이 세상에 태어난 거예요. 그거 저, 명태알을 뭐라고 하죠? 명란이라고 하죠. 창란은 뭡니까? 하여튼 그걸 따지는 것이 아니고 명란이라 합시다.

명태알 하나하나는 자기는 독자적인 존재라고 인식할 거예요. 알 하나가.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 하는데, 명태 입장에서는 여러 수 만개 알 중에 그냥 알 하나뿐이죠. 그 알이 명태 안에 들어옴으로써 전체 명태를 이루잖아요.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의 알맹이로서 이 땅에 태어나서 살아갈 뿐인데, 우리는, 알맹이로 태어난 우리가 마치 전부인 것처럼 세상의 현실의 중심에 있는 것처럼 그렇게 오해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뭐냐 하면 여기서 주님이 개입해 버리면 “멈춰라!” 하는 것처럼 주께서 갑자기 개입하면 멈추어지면서 멈춰진 동시에 그게 뭐가 되냐 하면은 소급해서 전부다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 어릴 때 뭐, 여고시절, 사진 찍은 거, 전부다 예. 춤추고 노래 부른 게, 모든 것도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춤 춰야 되고, 노래 부르는 이야기로 소급해서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것을 우리는 잘 모르는데, 구약 때부터 “멈춰라!”하는 소리와 함께 집어 들어온 자들이 있었어요.

그들이 누구냐 하면은 선지자들이었어요. 선지자 이전에 구체적으로 그것을 내걸어 보인 사람이 누구냐 하면은 이것을 나실인 이라고 합니다. ‘나실인’ 나실인을 기억할 때는 이렇게 기억 하면 돼요. 나실제 괴로움~ 이렇게 기억하시면 돼요. 나실인. ‘바친 자’, ‘주 앞에 바친 자’ 다른 말로 하면 ‘주님이 이스라엘 속에 주님의 속성을 품고 도로 주님 앞에 회수 당하는 자’ 처음부터 이거는 자기 인생이, 시작부터 자기 인생은 없고 주님의 속성으로서 점철된, 연결된, 그렇게 그 인생이 나실인입니다.

나실인의 특징은 뭐냐? 다른 사람보다 특이해요. 특이성에 주목해야 돼요. 그 특이성을 다른 말로 하면 ‘경계’ 또는 ‘경계선’ 전에도 이야기 했습니다. 전에 민수기서에서 아니 출애굽기서에서 그런 이야기 했습니다만, 경계선의 특징이 뭐냐 하면은. 자기만의 폭과 면적이 없어요. 경계선이라는 특징은. 주름자체가 몇 평이냐 라고 말하는 건 아닙니다. 저 아파트의 창틀이 몇 평이냐 창틀이 몇 평이냐는 말은 안 해요. 아파트가 몇 평이지. 창틀은 뭐냐? 아파트와 바깥 영역과의 그 경계선이 창틀이잖아요!

창틀이 몇 평이 아니고 창틀 안에 몇 평이 되냐는 거잖아요. 창틀 자체는 그냥 경계선입니다. 경계. 그런데 경계선인데 그 경계선의 특징이 뭐냐 하면은 양쪽 다 본다는 거예요. 아파트 바깥도 거기 보이고 안쪽도, 양쪽 다 보는, 가자미 눈 같이 양쪽 다 보는, 그런 입장이 바로 나실인입니다. 그래서 저 사람이 나실인이 등장했을 때는 “저 사람이 우리 고향 사람 맞지? 그런데 저 인간 왜 저렇게 살아?”

“왜?” “아니 포도주도 안마신데. 그리고 머리는, 지가 뭐 지가 여자도 아닌데 머리가 왜 저리 깍지를 않지?” “세상에 장례식에 참석도 안한데. 자기 아버지 죽었는데도, 자기 아버지 시체도 더럽다고 안 만진데.” 죽음, 죽음을 멀리한다는 의미보다도 죽음에 대해서 죽음 안에서 죽음을 보는 게 아니고, 죽음 안에서 죽음을 보는 것은 우리들이죠. 죽어가고 있으면서도 죽음에 대해서 어설프게 논하는 우리들.

죽음을 죽음이 바깥에서 벗어난 제3의 객관적 안목에서 죽음을 다시 보는 안목이 나실인의 인생의 속성으로 포함되어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의 입장을 대변해 주는 거예요. “네가 죽을 때 죽는 이유를 모르지? 나는 알거든 뭐, 알려줘? 알려줘? 알려줄게. 아나 먹어라. 율법.” 율법이 온 것은 뭐다? 우리가 “이야! 진작 죽어야 마땅하군요!” 라는 것입니다. 율법이 온 것은.

십계명을 준 것은, “이야! 우리가 그냥 내가 숨 쉬고 산다고 사는 것이 아니고 십계명이라는 얼기설기의 그물망. 계명의 그물망 속에서 우리라는, 계명의 계명됨을 위하여. 계명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그 거룩함과 선함과 그 의로움과 엄중함을 위해서, 우리는 존재해야 되는데 그게 위험하니까, 계명을 계명대로 높이지를 못 할 경우에는 죽어 마땅하다.”는 그런 공식에 의해서 죽어가는 겁니다. 죽어가는 것이 우리라는 것입니다.

선악과를 따먹지 말아야 되는데 따 먹었잖아요. 그럼 선악과 자리에서 계속해서 뭐가 주어지냐? 주님의 율법이 주어지게 되면, “왜 따먹었어? 왜 따먹었어? 왜 따먹었어?” 자꾸 그렇게 되는 거예요. 왜 따먹었냐고. 그럼 우리는 뭡니까. “구경도 못했어. 왜 저보고 닦달내십니까? 저 안 따먹었어요! 저는 그때 태어나지도 않았습니다.” 이런 식으로 내빼는 거예요. 그런 걸 내뺄 때, 내빼지 못하도록,

“아! 네가 참, 나중에 태어났지! 너 아담 아니지~ 내가 착각했어.” 이게 아니라, 내빼지 못하기 위해서 계명으로 엮어 버리는 거예요. 계명으로. 무슨 말이냐 하면은 “네가 나중에 태어나더라도 계명의 그물망 안에서 태어나기 때문에 계명의 저촉을 받는 것은 세월이 아무리 천년만년 흘러도 동일한 입장에 있다.”는 거예요. 동일한 입장. 이세상은 말씀으로 엮어져 있다. 다른 말로 하면 계명으로 엮어져 있다.

다른 말로 하면 율법으로 엮어져 있다. 다른 말로 하면 주님의 뜻으로 엮어져 있다. 다른 말로 하면 언약으로 엮어져 있다. 같은 말입니다. 이거 녹취 누가 합니까? 이미아 씨가 녹취합니까? 누가하죠? 방금 이야기 한 거 너무 미안하다. 너무 빨리 이야기해서. 랩을 너무 빨리해서 미안하다. 강의할 때 녹취를 생각해야 하는데, 이 세상의 이 모든 것은 천국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천국은 뭐냐 하면은 내가 갈 수 없는 천국이라는 것을 염두 해 두어야 돼요. 마귀는 천국을 뭐라고 소개 하는 줄 알아요? 내가 갈 수 있는 천국으로 소개합니다. 오늘 이 이야기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자! 마귀가 소개하는 천국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아까 그 이야기가 나왔기 때문에, 참 좋은 소재가 되었습니다. 내가 여기 있습니다. 어떤 목사가 성경책을 가지고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을 들이댑니다.

“영생의 나라가 여기 있으니까 당신은 내가 시키는 대로 하면 영생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자, 뭐가 누락되어 있습니까? 영생의 나라에 우리가 들어간다? 못 들어간다? 못 들어간다는 사실을, 이 목사가 알려주지 않고 있죠? 하나님께서 창세기 3장에서 인간을, 아담을 어떻게 했습니까? 에덴동산에서 쫓아냈지요? 쫓아내고, 쫓아내놓고, 흑흑 울면서 “그래도 쫓아냈지만 네가 알아서 기어 오너라. 내가 옆에다가 이렇게 샛길을 만들어 줬으니.”

이렇게 됐습니까? 아니면 철통같이, 철통같이 못 오도록 막아 놨습니까? 예, 완전히 이거는 용역도 그런 용역이 없지요? 불수레든 천사가 그 에덴의 동쪽으로 가는 길을 차단시켜 버렸습니다. 세상의 부모는 그렇지 않아요. 아버지가 술 먹고 화가 나가지고 “너 같은 자식은 내가 용납 못하겠다. 나가라! 당장 짐 싸가지고 나가!” 아버지가 아무리 고함질러도, 엄마는 맨발로 나와 가지고,

“아이고! 야야, 아빠가, 네 아버지가 지금 화나서, 술 먹고 화나서 하는 거 알지? 조금 피해 있거라. 그래. 피해 있으면 내가 나중에 집에서 쌀가마 들고 가지고 너한테 가서 줄게.” 이게 엄마 마음입니다. 한쪽은, 아버지는 영이 있어가지고 내보내놓고 엄마는 뒷 곳에 가서 딱 떠 가 줘가지고 “다시는 안하겠다고 사과하고 오너라.” 이렇게 하잖아요. 그러면 그것도 또 누가 알아요? 아버지가 또 안다고.

“당신 방금 저, 저, 저, 그 자식도 아닌 거에 쌀 퍼줬지?” “아이고 내가 언제?” “한번 걸리면 내 손에 죽는다.” 옛날 60년대 가부장제 모습입니다. 요새, 요새는 그런 거 없지요. 요새는 잘못보이면 쫓겨나는 수가 있습니다. 요새는 그런 거 없지만. 옛날엔, 아! 옛날이여. 옛날엔 그랬죠. 하나님은 그런 게 없습니다. 쫓아냈으면 못 들어갑니다. 영원히 못 들어가요. 그게 천국은 율법의 나라에요.

율법의 완성의 나라이기 때문에, 율법을 못 지킨다는 말은 율법에 완성된 나라도 이거는 못 들어가요. 그래서 이름이 뭐냐 하면 하나님 나라에요. 인간의 나라가 아닙니다. 인간이 끼어들 쨉이 못 되요. 어디를 얼른거립니까? 서울의 아주, 고급아파트에 서민들이 앞에 얼른 거리면 누가, 누가, 경비가 쫓아와가지고 “여여, 누가 여기, 여기 누가 사는지”, 참, 고급 빌라 있잖아요.

한강 옆에 고급빌라에 “당신이 여기 얼쩡거리나? 여기에 누구냐, 이병헌이 살고, 여기는 저 뭐고, 장동건이 여기 옆집에 살고 어디서 여기서, 이게, 여기에, 어디 서민이 여기에 얼쩡거리나. 여기에는 현대그룹 누구 살고, 이건희 살고, 이건희의 별장이 여기 있고 어디 여기 들어와!” 얼쩡거리면 안 되듯이 우리가 주님의 하나님 나라에 기웃거린다는 자체가 아직도 주님께서 우리를 쫓아냈다는 그 취지를 완전히 개 무시 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성경이 소개하는 천국은 어떤 인간도 “못 들어가는 거 맞지? 그렇지?” 확인 차, 확인 차 온 천국이에요. 그래서 천국 온다는 말을 다른 말로 하면 도끼들로 온다는 것과 같은 말이에요. 하나님이 “이 진노의 이 독사의 자식들아!” 아주 일괄적으로 독사의 자식들을 만들기 위해서 세례요한이 한 겁니다.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아까 두 번째 강의(유튜브). 도끼. 도끼라는 의미가 뭡니까?

뭐 쓰다듬으려고 도끼를 쓰겠습니까? 작살내려고. 작살내려고. 세례 요한이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세례 요한이 그들과 함께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의 공동체와 그들의 사회와 함께 있는 것이 아니고, 어디에 있습니까? 따로 나와 있죠? 어디로? 세례 요한의 위치가 어디입니까? 광야잖아요. 광야. 광야는 홀로, 옷도 이것은 완전히 이상한 옷을 입고, 너희들과 차별화 시키는 겁니다.

“너희들이 있는 그 공동체 그 자리와 내가 하나님의 성신에 의해서,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서 예수님의 부름을 받고 있는 이 위치가, 나의 위치는 너희들을 제대로 볼 수 있는 객관적 위치라는 말이다.” 너희들은, 그 객관적인 안목을 놓친 거예요. 그게 없는 거예요. 있을 수가 없어요.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죽은 자를 살려 냈다는 이 말은, 이게, 이게 기적이 아니고 표적입니다. 자, 기적과 표적의 차이점은 기적은, 인간들이 은근히 기대하는 것은 기적이고, 표적은 예상 못한 일이 표적이 됩니다.

그렇다면 표적이 기적입니까? 아닙니까? 표적은 기적이 아니지요. 기적을 기다리는 사람은 가슴이 심쿵 안 해요. “그럴 줄 알았어~” 이렇게 돼요. “역시 주께선, 역시 주님! 엄지척이에요. 주님 최고!” 이렇게 되는 거예요. “역시 참, 우리 예상대로야!” 이렇게 되는데, 표적은 의외로 미미하고 시시하고 당황스럽게 만듭니다. “뭐지 저 이벤트는? 십자가에 죽어? 저거 뭐하는 거지? 십자가가 표적 중에 표적이다?

저게 뭐야? 왜 스스로 자살해? 우리가 살려 준다 해도 안 살려고 하고 왜죽지? 왜? 메시야가 왜 죽어버리지?” 이점은요. 예수님을 비난한 자만 아니고 열두 제자도 아무도 그것을 이해 못했습니다. 아무도. 열두 제자도 은근히 노렸어요. “주님 좋은 분 만났으니까 팔자 펴야겠다.”싶어서 하늘나라 벼슬 차지하려는 계획만 했지. 예수님이 누군 줄 몰랐어요. 차라리 가룟 유다가 어떤 의미에서는 솔직하다고. 가룟 유다가. 정말 가룟 유다가 상남자예요.

지가 잘못한 것을 지가 책임지겠다고 나섰으니까. 이런 상남자가 어딨어요. 자살할 정도로. 양심의 가책이 돼서. 상남자가 되면 뭐합니까? 그 순간은 멋있게 보이는데, 지옥 가도, 지옥에 가서도 멋을 챙겨보지요. 이 지옥의 특징은, 지옥 이야기 나왔으니까. 지옥의 특징은 뭐냐 하면은 이거에요. 매력이 없어요. 지옥은 모든 매력을 주님 앞에 강탈당합니다. 매력이란 뭐지요? 내가 남한테 내세울만한 어떤 것이 매력이잖아요. 챠밍. 내세우는 거.

남녀들 이렇게, 처녀, 총각들 모여가지고 할 때, 나름대로 꾸미고 오잖아요. 꾸미는 게 뭐냐 하면은 매력 발산하러 온 다 이말 이에요. 매력발산. 그런데 지옥도 마찬가지고 천국도 마찬가지이지만 일체 매력은 주께서 뭉개버립니다. 매력 없어도 구원 받고 매력 있어도 지옥 갑니다. 이 세상이 가장, 최고의 매력은 부자 되는 거잖아요. 그런데 거지가 되어 몸이 아프다는 것은 이거는 전혀 매력 제로가 아닌 매력 마이너스죠 마이너스.

그래도 어디 갑니까? 천국가고. 매력이 넘치는, 매력이 줄줄 흘러넘치는 그 자는 지옥가고. 여기 여러분들이 너무 매력 발산 너무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뭐 내놓을 매력도 없지만. 천국이라는 것은 천국이라는 마지막 때에, 마지막 때에 천국에 왔다는 것은 “네가 생각하는 천국은” 반드시 인간들이 생각하는 천국은 자기를 포함시킨 천국을 생각합니다. 천국이 한 사람마다 천국이 다 달라요.

어떤 천국에는 자기를, 자기 사랑하는 딸래미하고, 남편하고, 시아버지와 시어머니는 저 지옥 보내버리고, 저 친정 엄마와, 친정 고것만 무조건 가야되는 천국. 저, 딴 사람이 천국이라는 것은, 딴 사람이 천국이라는 것은 자기 마누라 놔두고 지가 좋아하는 연예인하고 같이 사는 것. 한가인하고 한평생 살아 보는 게 소원인데, 자기 마누라 때문에 못사니까 천국 가서 소원 풀어보겠다고.

한가인하고, 한가인도 천국가고 지도 한가인과 같이 가서 거기서 같이 둘이 사는 걸 생각하는 천국. 이 천국이, 누가 만들었냐면 본인들이 붙잡고, 본인들이 만들었는데, 어디서 만들어졌냐면 자신의 살아오면서 나오던 경륜과 경험에 정보를 이렇게 압축해서 그걸 내용으로 장착해서 만든 천국들을 만들어 내지요. 그리고 그 생각들을 가지고 교회 와서 그대로 철야하면서 그걸 또 노골적으로 내뱉어요. 점잖은 사람들은 꿍하고 있을 건데.

교회 오는 사람들이 점잖은 사람들만 옵니까? 좀 이렇게 맛 간 사람들도 오잖아요. 그러면 거기서 기도제목으로 막 터져 나와요. 특히 그 저, 아주머니들 금요일 오전에 모여가지고 구역할 때 뭐하나 하면 “우리가 서로 기도제목을 내놓으세요.” 해가지고 강제로 기도제목 끄집어내가지고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할 때 그 끄집어 내놓은 기도제목들 한번 보세요. 뭐 겉으로는 “(하나님의) 사업을 하게 하옵시고.” 하는데,

사실은 (하나님) 사업의 문제는 뒷전이고 딴 게 더 있어요. 우리 뭐, 하늘나라 확장을 위해 해놓고는, 뭐냐면 사실은 말을 안 해. 확장이라는 것은 그것을 빌미로 해서 이것 하게 되면 진짜 내가 원하는 것은 주께서 은밀하게 뒷주머니에 봉투 해가지고 주겠지요. “네가 건전한 걸 기도했으니까 내가 이것까지 더 주마.” 이런 거 있잖아요. 솔로몬의 그런 기도 나오잖아요.

“너의 건강과 원수 죽는 것을 원치 않고 백성들에게 아주 바른 말씀을 가르친다고 했으니까 덤으로, 덤으로 네가 오래 살고 부자 되게 해준다.” 덤이 문제야. 덤이. 덤에 꽃혀가지고. 덤을 노리고 은근히 기복신앙 다 빼버리고 건전하기 짝이 없는 문장만 골라가지고, 그런 문장 고르는 거 어디서 수입하느냐? 그 복음학교에서 수입 해가지고 김용의 목사한테 배운 거 있잖아요. 그거 배운 거 가지고, 그걸 쭉 하고, 그걸 채워가지고. 아이고, 그런 수작들을 부리는데,

근본적으로 그렇게 수십 년 해도 천국이 우리를 안 넣어주는 천국이라는 것을 오늘 처음 들었죠? 천국은 우리를 넣어주지 않습니다. 그러면 구원받은 사람은 어떻게 구원 받았습니까? 사람이 바뀌었거든요. 다른 사람이에요. 어떻게? 주께서 개입하니까. 평소에는 자기 인생인 줄 알았더니만 나중에 보니깐 주님을 위해, 주님을 위해서 태어나야만 했던, 그러한 안목으로 완전히 바뀌어 버린 그런 엘리야, 그런 모세.

그래서 그 엘리야와 모세가 주님 하고 변화산에서 이야기할 때, 뭐 이야기 했느냐?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이건 광주 강의에서 제가 언급했습니다. 뭐에 대해서 변화산에서 이야기 했냐면, “주님, 주님 죽으셔야 되잖아요.” 그 이야기 했다 구요. 그런데 그것도 모르고 철이 없는 베드로가 뭐라고 했습니까? 네? 마치 천국에 자기가 들어가야 되는 것처럼 생각해가지고, “여기가 좋사오니 맨션 세 채를 지어드리겠습니다.”

뭐 지가 하비타트인가? 뭐, 뭐, 집 지어주는 거 뭡니까? 그것 또, ‘해비타트’ 지가 해비타트 봉사대원도 아닌데 집을 왜 지어줍니까? “여기 집을 세 채 짓겠으니.” 자기가, 우리는 한편이라는 거예요. 베드로가. 한편 아니거든요. 베드로는 본인이 천국 못 갈 인간 인 것을 반드시 경유를 할 때까지는 어떤 천국인지를 몰랐습니다. 나중에 베드로 입에서 자기가 버림받았을 때에, 자기가 예수님을 버렸을 때에,

내가 생각하는 천국하고 정작 주께서 마련한 천국하고는 전혀 딴 세계라는 사실이에요. 내가 아무리 노력을 하면 노력 할수록 점점 더, 점점 더 관계없는 천국이에요. 진짜 준비된 천국입니다. 내가 내 노력. 내 노력을 한다는 것은 반드시 뭘 낀다? 나를 반드시 거기에 끼어 놓겠다는 아집과 고집과 열성과 집착. 그런 것들은 천국에는 절대로 끼어 들 수가 없는 요소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6장에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쉽게 이야기 합니다.

“같이 죽자. 같이 죽자!” 죽고, 그 다음에 다시 살아 날 때는 그 죽어야 될 나를 품을 때에 그, 지금까지 죽어야 마땅한 그 죄인을, 그렇게 죄 짓게 만드는 그 모든 과정들이 예수님의 자신의 이야기였고, 자신의 의도로서 그렇게 이끌어 왔다는 것을 알겠죠? 그러면 그 사람은 자기 이름으로 구원 받는 게 아니고 태어나면서 지금까지 누구 이름으로 이끌려 왔어요? 예수의 이름으로 갑니다.

그 자기가 뒤돌아 볼 때 주의 이름으로 주께서 활동하셔서 지금껏 살아왔다는 것을 통합해서 이야기 할 때 그것을 가지고 뭐냐. “주의 이름으로 구원되었습니다.” 라고 소급해서 전체적으로 설명하는 겁니다. 이 말은 바로 나사로를 살리는 것도 마찬가지고, 죽은 나사로를 살려내는 것은 사람 죽었다. 살았다는 기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이거는 표적을 의미하는 겁니다. 어떤 표적이냐 하면은,

이 세상 자체가 만화 속에 있어요. 만화속이니까, 만화. 만화 속이니까 이차원, 납작 엎드러져 있지요. 이 안에( ) 모든 인간들이 들어 있어요. 그러면 나사로가 여기서 살아나왔다고 해서 나사로가 살아나왔다고, 죽은 나사로가 살았다고 해서 이 바깥에 만화 속에 바깥으로 나온 게 아니고 살아도, 나사로 산 것도 역시 만화 속에서 살았어요. 그러면 나사로 입장에서는 정작 살았다는 것은,

이 만화 속에서 “살았다.” 라는 것은 살았다는 것이 아닙니다. 살았다는 게 아니에요. 여전히 이거는 죽은 거 에요. 진짜 살았다는 것은 이 만화 바깥에 있어요. 예수님 동네. 이곳이 진정한 “살았다.” 말씀으로 살았다. 생명, 영생의 세계가 이 바깥에 있습니다. 이 바깥의 세계의 예수님께서 그대로 영생 그대로 이 땅에 들어올 때에 모든 사람들은 예수님을 우리와, 자기와 똑같은 사람으로 간주하지요. 똑같은 사람으로 간주 하는 거예요.

그럼 똑같은 사람으로 간주할 때에 예수님께서 무엇을 유도하냐 하면은 모든 세상 자체가 나를 오해했다는 것을 의도적으로 그러한 상황인 것을 의도적으로 밝히러 온 겁니다. 그래서 여기에 50절에 보면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됐죠. 한 사람과 그 가야바 제사장인가? 한사람과 뭘 연결시킵니까? 한사람과 온 민족과 연관을 시키는 거예요.

가야바는 지금 만화 속에 자기가 이 세상이 전부인줄 알고, 그렇게 예수라는 인물이 와서 소요를 일으켜버리면 로마군들이 예수라는 그 인물 때문에 그걸 빌미로 해서 다시 더 강하게 이스라엘을 압박해 버리면 우리가 괴롭다 이 말이죠. 그래서 한 사람을 죽여서 누가 살자? “옛날처럼 예수 없던 그 시절처럼 다시 살자.” 라고 한 이 사건은 사실은 그 사건마저 예수님에 의해서 유발된 이야기다. 예수님에 의해서 의도된, 벌어져야 될 일이 되어야 하는 겁니다.

예수님 한분이 죽어서 누가 산다? 예수님께 속한 사람이 이쪽 만화 속에 있는 세계가 아니고 사실은 이쪽에 있는 세계로서, 이들이 살아나야 한다는 걸 알려주기 위해서 이 만화속의 세계를 그 법칙을 그대로 이용하시는 거예요. 굉장히 이게 예수님이 하신 일이 굉장히 복잡해요. 복잡하기 때문에 이것을 간단한 문장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나사로와, 죽었다가 살아났지요? 그러면 이제 나사로가 이 만화 속을 폭을 넓혀 봅시다.

원래 폭이 없는데 일단 있다 치고 넓혀 봅시다. 나사로가 살았는데, 죽었다가 도로 예수님 때문에 살아났지요? 그러면 죽었다가 살아난 나사로가 우리는 여기 있다 해요. 여기 있다고 하는데 사실은 여기 있다가 아니라, 그가 여기까지, 있다가 아니고 그가 여기 있도록 지금까지 있어 왔다. 도 아니고, 그냥 여기서 “생겼다!” 해야 말이 가장 적당한 말이 됩니다. 나사로가 여기에서 살아난 건 나사로가 생겼다. 라고 말하는 것은 뭐냐 하면은,

무엇과 관련해서 끌어 왔냐 하면 과거에 나사로를 알던 그 나사로가 아니고, 내가 알던 나사로가 아니고 “다른 나사로인 것을 너희들이 눈치 채라.” 이말 이거든요. 그러면 다른 나사로라면 그냥, 죽었던 나사로가, 우리 보기에는 연속이 있지만 그냥 연속되어 버리면 이 만화 속 세계, 외부 세계와 관련성이 없어지잖아요. 그런데 그냥 “생겼다.” 돼버리면 뭡니까? “네가 했어?” “아니!” “네가 했어?” 여기에 없는 분에 의해서 새로 만들어 진거죠? 없는 분에 의해서.

그렇다면 예수를 볼 때에, “예수님은 옛날부터 아는 사이야.” 이러면 안 되고, 예수님은 우리 인간들 세계에 없던 분이라는 그러한 안목을 가지고 나사로의 존재를 다시 한 번 연관을 지어 보라는 것입니다. “왜 지어야 됩니까?” 왜 지어야 되냐 하면은 우리 성도의, 성령 받은 성도의 입장이 그렇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제가 어느 학교 나오고, 고등학교 때 어디 다니고, 어제까지 뭐 했고.” 자꾸 이렇게 연결 짓지 말고 네?

지금 주께서 지금 나를 이 자리에 앉도록, 여러분이 앉도록. 주께서 만들어 냈다고 이렇게 보자 이 말이죠. 그렇게 보아야 된다는 겁니다. 저는! 자꾸 어제 나와 연속성으로 돼버리면 뭐가 누락이 되고 뭐가 빠지느냐 하면은 주님이 여기 있다는 사실을 자꾸 빠져 버리는 거예요. 주께서 이렇게 나를 여기 있도록 했다는 것을 빠져 버리고, “뭐, 내가 알아서 어제, 뭐 오늘도 아침에 밥 먹고 아침에 뭐, 아르바이트하고, 나 여기 살아있네.” 자꾸 이렇게 되는 거예요.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하고, 알아서 하다가 이러다 보면 천국에 가겠지?” 아니에요! 그런 인간은 천국에 못갑니다. ‘생긴’ 인간이 천국가지. 내가 알아서 살아가는 인간은 천국 못갑니다. 누가? 천국에 계신 분의 손길이 닿아져야 돼요. 천국에서 주님께서 나를 근원적으로, 원천적으로, 원형적으로 뭔가 새롭게 제조해야 돼요. 표적이 나 자신이 주님의 살아계심을 보여주는 표적이 돼야 됩니다. 이 대목을 보면서 많은 사람이 이야기합니다.

“아이고, 주님께서는 나사로만 살리고 나는 왜 안 살리나?” 자꾸 불평들을 하시는데, 내가 만약에 주님 때문에 살아났다면, “예수님이 세다고 막, 예수님이 나를 구원했다고, 막, 영어로 문자를 해가지고 티(셔츠)하나 만들어서 돌아 당기면서 나 죽었는데 살아났어! 이렇게 자랑 질 하겠는데, 왜 나사로는 그렇게 특혜 줘가지고 죽은 지 나흘 만에 살려주고, 왜 나는 안 살려주느냐 이렇게 하는데.” 한번 죽여 봐요? 그러면. 한번 인생 끝장 내 볼까요? 그러면. 네?

그러니까 성경을, 성경을 참, 너무 가볍게 해석하는 거예요. 지금 여러분, 살아 있잖아요! 죽었는데 나사로처럼 살려서 살아 계신 거예요. 여러분, 나사로만 표적을 거창하게 보시지 마시고, 내가 숨 쉬고 있고, 네? 이렇게 시차 때문에 졸고 계시는 이것도 표적이에요. 이게 하나하나가 내가 하루하루 살아가는 게 표적이에요. 사도바울이 그렇게 이야기 했어요. “나는 죽은 자 같으나 살아 있는 자고, 나, 없는 것 같지만 모든 것을 가진 자고, 너희들 보기에 내가 표적으로 안보여?” 그 말하고 있는 거예요.

“나는 지금 성령에 의해서 살아가고 있는데 그게 안보여?” “미쳤구나.” “안보여? 나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의와 평화와 희락이 있는데, 하나님 나라 안에 있는데, 그리 안보이나? 그렇게 안보여?” 눈이 아직 못 알아 볼 수도 있고. 이런 식으로 그런 자신감을 가지고 살아야지요. 그런 당당함 가지고! 그래서 주일 낮에 설교했잖아요. 우리는 매일같이 죽었다가 매일같이 살아나고 매일같이 잃어버렸다가 매일같이 얻는다고.

그것이 바로 로마서 4장 17절에 나오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고 없는 자를 있게 하신다. 지금 주님께서 노시는 게 아니거든요. 활동할 때, 활동의 원칙이 그거예요. 죽은 자를 살리시고 없는 자를 있게 하시고. 그 이야기 하려고 요한복음 11장 이야기 예수님이 하신 거예요. “너희들이 나를 보는 안목과 내가 나를 보는 안목이” 이 환경 때문에 엄청난 차이 난다는 거예요.

“너희들은 유대 나라를 고수하려는 안목 때문에 다시 말해서 인간 대 인간의 온 역사적인 전통, 꾸준히 이어져 온 유대나라를 지켜야 되겠다는 그 안목이 너희들이 나를 볼 때, 왜곡되게 보게 했고 곡해하게 보았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우리 가정이 만약에 식구가 다섯 명이다. 대학교 다니는 아이 둘이 있고, 이제 졸업하고 군에 갖다온 애 하나 있고, 그리고 부모 있고 다섯 식구다.

그런데 우리 식구는 25년 전부터 교회 다녀가지고 애들은 유아세례 했다. 그리고 지금은 어느 교회 다섯 명 다 등록하고 세례교인이다. 지금 뭐가 빠졌어요? 이럴 때 뭐가 빠졌습니까? 25년 동안 신앙생활 잘해가지고 지금 어느 교회 다닌다는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은 이게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가야바의 오해에요. 가야바. 네?

“이 유대 나라는 하나님이 애굽에서 건져낸 이스라엘의 연속성을 유지하고 있으며 그동안 많은 선지자들이 지금의 우리들을 예언했으며 메시야까지 예언했는데 우리는 메시야를 고대하고 있다. 따라서 이 나라는 하나님이 친히 인도하시고, 지키시고, 지금껏 기적과 기적으로 연결된 우리나라기 때문에, 우리나라를 위해서 이게 어떤 소란이 난다해서, 일어나면 안 되기 때문에 저 예수라는 작자가 소란을 일으키니까 저걸 우리가 죽여야 한다.

죽여야 주께서 주신 이 덩어리. 하나님의 은혜의 덩어리인 인간을 지킬 수 있다.” 이거나, “우리는 다섯 명인데 25년 동안 신앙생활하다 지금 교회 다닌다.” 이거나, 안목이 어떤 안목입니까? 동일한 안목이죠. 거기에 대해서 예수님이 내세우는 것은 뭐냐? “나사로를 보아라! 나사로는 죽었다 살아났느냐? 아니면 죽은 자였는데 나 때문에 산자 되었느냐?

나사로가 죽었다가 살아났느냐? 아니면 처음부터 죽은 자였는데 나 때문에 죽어도 사는 자였는가?”를 묻는 거예요. 그 존재를 묻는 거예요. 그 존재를. 말이 내 참, 말이 어렵다. 어렵지만, 이 외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네.. 남들한테 참 좋은데, 달리 설명할 길이 없네.

나사로의 모습이 누구냐 면은 예수님 자신의 모습이에요. “너희들이 나를 누구라 보느냐” 이말 이에요. “그런데 어떻게 보이느냐? 목수의 아들로 보이느냐? 아니면 다른 특이성. 나실인 같은 다른 특이성으로 보이느냐? 나는 너희들이 속해 있는 이 사회 자체가 지금 완전히 죽은 사회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나는 내가 나타났다”는 겁니다. 그런데 “너희들은 그것을 모르고 나를 죽이고자 한다면 그렇다면 좋다.

니들 속에 포함되어 있는 진짜 천국 갈 사람을 나 하나 죽어서 그 사람들을 뽑아 낼 거야.” 그 이야기가 그 이야기입니다. 그 이야기에요. 예수님 죽기는 그들 손에 죽고 결과는 누가 얻고? 나사로 같이 영생 얻을 자들은, 영생을 얻어서 뽑아내가지고 예수님처럼 이 땅에 있으면서도 여기 있던 그 사람이 아니라, 여기서 발생된, 새롭게 발생되어서 이 땅을 사는 천국의 백성들이 여기 있네~ 라고 그걸 나타내는 삶을, 그러한 모습으로 주께서는 지금 일하고 계시는 겁니다.

참으로 이렇게 제가 설명해도 참 어려운데 이게 뭐냐? 표적이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제 말은 뭐냐 하면은, 지금 우리가 하루하루 성령 받아 사는 것도 죽었던 나사로가 살아난 것처럼, 그렇게 하늘에 속한 자로 살아가야 된단 말입니다. 이 땅에 속한자로 내가 어렸을 때는 맨 날 뭐 했다고 하지 말고, 매일매일, 매일매일 새로워~ 노래 있잖아요. 매일매일 새롭다고. 매일매일 새롭게. 매일 나는 날마다 죽고, 날마다 사는 모습으로. 해서 어떻게 그것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늘 ‘소급’하면 돼요. 물론 돌아서면 또 우리의 또 옛날 과거 생각나지요. 하지만 성령께서 깨우치면 다시 소급해서 지금까지 이렇게 나밖에 모르는 이것조차도, 주께서 의도적으로 그렇게, 나밖에 모르는 이기주의로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이기주의로 살 거 에요. 하지만 그것조차도 주께서 우리가 하늘에 속한 사람인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그렇게 이끄신다는 것을 다 주님을 위해서 그렇게 이끄신다는 것을 생각하시면 되는 겁니다.

예,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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