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913 요한1서 버지니아강의16-이 근호 목사
20160913 요한1서 버지니아강의16-이 근호 목사 오늘 본문은 요한일서 2장 22절 보겠습니다. “거짓말하는 자가 누구뇨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뇨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그가 적그리스도니” 이렇게 나와 있죠. 성경을 이렇게 보지 않고 제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의 많은 이야기들의 느낌이 뭐냐 하면 인격을 모독한다고 저한테 많이 해요. 근데 제가 인격을 모독하는 이상으로 성경이 인간을 모독합니다. 여기 본문에 보면 예수님과 아들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아버지가 없다는 자체가 모든 종교에 대한 모독입니다. 인간모독이죠. 사도요한이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니까 성경을 믿는 사람들이 믿고 싶어도 성경내용 전체가, 모독, 모독, 인격모욕으로 계속 주어지는 거예요. 참 성도는 성질도 좋아요. 이렇게 모독하고 모욕하는데도 이걸 기어이 참고 이걸 받아들이니까. 원래 성격이 좋은 건지, 아니면 무슨 뜻인지 몰라서 그러는지 분명히 둘 중의 하나일거예요. 사실은 이 말이 무슨 뜻인지 몰라서 그냥 순하게 받아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인격을 모독할 때에, 여기에 우리의 인격 모독이라고 제가 이렇게 접근하는 이유는 인간 나름대로의 원하는 바가 있습니다. 그걸 제가 쓰겠습니다. 새로운 매직에다가 새롭게 쓰겠습니다. 행복입니다. 이건 영어로 자신 있습니다. 해피HAPPY, 행복. 이건 본심이고 본능이죠. 행복에 대해서 이유를 물으면 그게 또 인격 모독이 되고. ‘에구, 행복 하고 싶어. 해피하고 싶어.’ 행복은 감정적으로 어떤 감정이냐 하면, 유쾌한 감정. 또는 상쾌함. 상쾌한데 행복 안 할 수가 있습니까? 상쾌, 유쾌해요. 근데 상쾌, 유쾌인데 사람이 늘 상쾌하고 늘 유쾌한 것이 아니죠. 다시 말해서 인간이 늘 행복한 것은 아니죠. 그럼 행복 원한다는 것은 유쾌함과 상쾌함을 맛보고 그것을 은근히 기대하고, 그렇게 됐으면 하고 그것을 원하고 있죠. 그것은 뭐냐 하면, 이건 크게 쓰겠어요. 우울, 또는 우울감. 아휴! 우울해. 이렇게 우울한 가운데서 인간은 비로소 상쾌를 고대하게 되고 그것이 우리에게 남들에게 ‘나는 행복 하고 싶어.’ 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실은 우리의 목적과 기대가 이게 전부 아니겠어요? 그런데 상쾌하고 유쾌하잖아요? 상쾌하고 유쾌하게 되면 이 상쾌 유쾌가 오래가지를 않아요. 어떤 상황이 벌어지게 되면 불안감이 생기고, 불안감이 생기면 상쾌 유쾌가 5분 지속되다가 다음에 도로 어디로 내려갑니까? 우울해져요. 아, 이거 또 지진일어나면 어떻게 하지? 경제가 나쁘면 어떻게 하나? 주식이 떨어지면 어떻게 하지? 우울하게 되니까 또 상쾌한 것과 유쾌한 것을 기대하게 되고, 그것을 남들에게 “나는 행복 하고 싶어요.” 이렇게 하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제가 만약에 성경을 이야기 않고, “여러분들에게 행복을 주시려는데 한 번 들어보시렵니까?” 그러면 내가 원하는 바가 행복이기 때문에, “무슨 소리인지 모르지만 뭐 분명히 객소리겠지만 뭐 이야기나 해보소.” 관심 없으면 고개 핵 돌리고. “뭐 이야기나 해보소.” 안 들은 척 하면서 다 듣고. 왜? 내가 원하는 것이 행복인데, 사람이 살아가면서 행복하게 살게 해준다는데, 그걸 마다할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이야기하죠. 그렇다면 내가 행복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여러분들의 상쾌해지는 방법을 알려드린다면 인격모독이겠습니까? 인격옹호겠습니까? 인격모독이 아니고 옹호해주는 거죠. 근데 성경은 뭐라고 했죠? 이거는 뭐 대놓고 인격을 모독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건 뭐냐 하면 우리가 기대하는 행복을 누가 알아요? 뻔히 하나님이 알죠. 이걸 지워버리는 겁니다. 너희는 이걸 원하는 것을 알거든? 알고 내가 본격적으로 인격모독에 나선다. 그게 뭐냐 하면 바로 행복과 대척지점에 있는 심판입니다. 하나님은 심판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성경을 보고 성경을 묵상하고 좋다는 사람들은 둘 중의 하나에요. 제대로 성경을 알고 보는 것과 안 그러면 성경을 보면 내가 원하는 행복 줄 줄 알고 보는, 성경 자체를 오해해서 보는 것. 그래서 설교나 강의하고 난 뒤에 기분이 상당히 안 좋은 사람들이 있는데, 그건 뭐냐 하면 인격모독을 당했다는, 그것도 공개적으로 노골적으로 당했다는 찝찝한 기분이 들죠. 그러면 두 번 다시 보기 싫어요. 내가 원하는 것은 행복인데, 원하는 것은 제공하지 않고 하나님의 심판을 이야기하니까. 제 이야기는 싫어하면서 성경은 또 본다고요. 분명히 성경을 통해서 다른 것을 노리고 있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게 해놓고 오늘 본문 22절을 봅시다. “거짓말하는 자가 누구뇨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뇨” 이것은 이미 우리의 행복하고는 상관이 없는 이야기죠. 행복하고 상관없는 이야기를 제가 분명히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원하는 상쾌함과 유쾌함과 분명히 상관이 없어요. 그럼 상관이 없는 이야기를 왜 우리가 들어야 합니까? 나는 행복을 원하는데, 행복과 상관없는 이야기를 왜 들어야 돼요? 그 이야기가 뭐냐 하면 아버지와 아들 이야기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이야기, 남의 집 이야기를 우리가 왜 들어야 하죠? 남의 집 이야기를. 우리집이야기 아니고, 뭐 시카고 어떤 집의 아버지하고 아들하고 싸웠다든지, 좋다든지, 하는 그 이야기를 내가 왜 들어야 합니까? 내 행복과 무관한데. 내가 원하는 것은 행복이고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아버지와 아들이야기인데. 사도요한이 예수님의 사도로서 아버지와 아들이야기 한다는 것은, 너희들 자리에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없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관심사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거기다가 개입시키는 거예요. 왜냐하면 아버지와 아들이 관계는 창세전부터 주어진 관계입니다. 창세전이라는 말은 쉽게 말해서 내가 없을 때, 여러분들이 없을 때, 우리 인간이 없을 때, 개구리하고 코스모스하고 코끼리가 없을 때, 해와 달과 별이 일체 만들어지지 않았을 때, 계신 분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밖에 없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너희가 들어야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아, 우리는 그것조차도 인격모독으로 다가오죠. 주님이여, 난 남의 이야기 별로 좋아한 적 없습니다. 나는 내 이야기하기도 바쁜데. 내 이야기도 지금 어떻게 우울한 감정에서, 어떤 수단을 통해서 하나님이 조치를 해주시면, 이 우울한 것이 상쾌함으로 바꾸어지면, 뭐 바치지 말라고 해도 바치고, 봉사하지 말라고 해도 봉사하고, 하나님이 이렇게 우리 가정을 행복하게 해주셨다면, 사람이 양심이 있지. 받은 것이 있으면 보답하는 것이 양심인데, 행복만 준다면, 뭐 아들 아니 아버지의 이야기라도, 뭐든지 듣겠습니다. 우선 행복하게 해준다는 조건을 주시고, 그 다음에 이 이야기 들으라면 듣겠습니다. 이렇게 듣는 거예요. 그러면 이미 전제가, 토대가 뭐로 깔려있습니까? 아버지와 아들 관계로 토대가 있는 것이 아니고, 창세 이후에 만들어진 나의 행복을 돗자리 깔듯이 깔아놓고, “신이시여! 이거 채워주세요.” 이렇게 돼버려요.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 거기서 나오는 유명한 단어가 뭐냐 하면, 참 이거 유명한 단어 하는데 전화가 와버리네요. 하나님의 주권, 또는 하나님의 주권사상입니다. 결론부터 말하겠습니다. 이거 사탄의 주권입니다. 하나님의 주권 자체가 사탄의 주권이에요.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것은 사탄이 통제하고 통치한다는 뜻으로 생각하면 됩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주권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한다고 할까요? 그것은 자기 장래가 궁금해서 그렇습니다. 사람은 자기 장래가 궁금해서 미쳐요. 왜냐하면 지금은 우울해요. 하지만 우울하다고 해서 포기할 인간들이 아닙니다. 행복은 저 산 너머 무지개 피는 그곳에 있을 거예요. 그러면 기다리든지, 내가 찾아가든지. 산 넘어서 바다건너서 찾아가든지 뭘 해야 해요. 행복을. 내가 어떻게 될 것인지가 지금부터 무척 궁금해 해요. 만약에 내가 장차 불행하게 된다면 여기서 수정작업 들어갑니다. ‘아, 내가 종교를 바꾸어야 되겠구나.’ 그러나 내가 행복이 보장된다면, 나는 지금 이 노선을 고수하면 되는 거예요. 그러고 보면 눈만 뜨면 사나 죽으나 결국 뭡니까? 내가 어떻게 행복해질 수 있느냐? 그 목적과 그 목표는, 저는 포기할 수 없어요. <목적이 이끄는 삶>이라는 책이 있데요. 제가 봤어요. 불행을 목적으로 한다면 절대로 하지 않아요. 그러나 주님은 오늘 본문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너희들이 그런 것을 기대한다는 자체가 창세 이후에 발생되는 관심사지, 창세이전의 관심사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럼 창세이전의 관심사는 뭔데? 나의 행복 아니야? 행복 아니에요. 그럼 내가 잘 되는 것? 아니라는 말이죠. 내가 천국 가는 것? 아니에요. 그거는 내가 없을 때의 이야기에요. 내가 없었을 때의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데, 자꾸 나를, 나를, 나를 집어넣어요. 내가 없을 때 누가 있었는가? 아버지와 아들이 있었어요. 성령님은 그걸 보조하고. 그러면 우리가 마땅히 피조물이라면, 피조물인 본인 생각은 접어두고 창조주의 뜻을 따라야 해요. 그럼 창조주의 뜻이 뭡니까?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받아들이면 그게 하나님의 창조에 흡족한 것이고, 그게 하나님의 형상이 되고, 그게 거룩인 겁니다. 그렇게 기존교회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자. 거룩해라.” 라는 이야기가 나의 행복 때문에 이게 방해받는 거예요. 나의 행복 접고,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이루어진다면 그게 저의 진정한 행복입니다.” 이래 되어야 될 거 아닙니까? 분명히 시작한지 몇 분 안 됐어요. 근데 이 이야기만 해도 벌써부터 인격모독이라고 간주하는 경우를 많이 봤어요. 그리고 하는 말이, 퉁명스럽게 이야기해요. 내 말이 틀린 게 없으니까. “흥! 이 목사님은 딱 들어보니 하나님의 주권이네?” 뭐 들었다고. 이 하나님의 주권이 사탄의 주권이라니까요. “기껏 해봐야 우리가 뭐 하나님의 주권사상이잖아?” 하나님의 주권사상은 사탄의 주권사상이라니까요. 하나님의 주권사상은 바로 칼빈과 루터의 칼빈주의 사상에서 나온 거예요. 그거는 복음이 아닙니다. 그거는 정보고 이론이에요. 그 하나님의 주권사상을 극대화한 것이 바로 이슬람교입니다. 그들의 주장은 딱 하나에요. 알라는 위대하다. 알라라는 것은 우리말로 번역하면 하나님이에요. 알라는 신이 아니고 그들의 하나님이 알라에요. 그러니까 우리말로 하면 하나님은 위대하다는 거예요. 근데 제가 어제 이야기했잖아요. 하나님이 위대한 것이 아니고 여자가 위대하다고. 하나님이 위대하다고 해서 사람 죽이고, 무슨 그런 하나님이 있어요? 하나님은 위대한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 모든 예정하심은 하나님의 주권을 이야기한 것이 아닙니다. 사탄의 주권이에요. 그러면 진짜 하나님이 원하는 하나님의 통치는 어디에 있느냐, 사탄의 주권의 범위 안에서 싸워야 돼요. 싸우고, 감추어진 겁니다. 감추어진 거예요.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유사 하나님의 주권을 내세우는데, 마귀가 그렇게 한 겁니다. "지금 너희들 돌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돌아간다." 얼마나 듣기에 믿음 좋은 이야기입니까? 뜻대로 돌아간다면, 그럼 여기 매직이 있는데, 매직을 내가 돌리는 것도 주의 뜻입니까? 주의 뜻입니다. 그럼 내가 말하는 것도 주의 뜻입니까? 주의 뜻입니다. 자, 여기서 뭐가 빠졌어요? 우리보기에는 주의 뜻이라고 하니까 굉장히 믿음이 좋죠? 그런데 뭐가 빠졌느냐 하면, 예수님의 고난당하심이 빠져있어요. 자, 여기 귤이 있습니다. 둘 중의 하나니까 답변해보세요. 이 귤이 나타나기 위해서 하나님의 전능하심으로 귤이 있다. 이게 1번이고. 2번.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하여 귤이 있다. 어느 것이 맞습니까? 2번이죠. 그런데 2번을 이야기하는 교회를 제가 본 적이 없습니다. 전부 다 1번을 이야기합니다. 왜? 납득이 되니까. 나 있고 신이 있는데 신이 모든 것을 만들었다. 이런 마음을 갖고 있는 것도 스스로 보기에 대견스러워 미치는 거예요. '미쳤어! 미쳤어! 와 이리 믿음이 좋아?' 거기다가 "신의 주권을 알았으니 신자입니다." 이것까지 쳐주니까. 저절로 행복이 오는 거예요. 그러나 사도요한이 말한 것은, 아버지와 아들 관계에서 인간이 끼어들 자리가 없다는 거예요. 모른다는 겁니다. 왜? 감추어졌으니까. 누가 오기 전에? 직접 아들이 오기 전에, 독생자가 오기 전까지, 너희들이 알았던 신과, 신에 관한 신과, 신의 존재와 신의 활동과 기능과 전능하심과 위대하심, 모든 성경에 나오는, 시편에 나오는, 모든 도, 용어들이 자기한테 와서, 그 용어들이 다시 자기로부터 나와서, 자신이 뜻을 가지고 다시 내뱉어서 형성된 모든 신학체계에는 뭐가 없느냐 하면,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이 일체 들어있지 않다는 거예요. 그 대표적인 기관이 바로 유대나라입니다. 여호와 있죠. 율법 있죠. 십계명 있죠. 안식일 있죠. 할례 있죠. 그리고 그들이 행하는 모든 법은 제사법이고 모세 율법에 나왔잖아요. 뭐가 없어요? 뭐가 딱 없습니까? 이거는 사도바울이, 나중에 사도행전을 보세요. 사도행전에 나오는데 뭐를 증거 했던가요? "여러분 율법 믿으세요. 안식일 지키세요." 그 이야기했던가요? 사도바울 죽이려고 했던 사람들이 이방인이었던가요? 유대인이었던가요? 유대인이죠. 유대인은 뭐냐 하면 신의 주권이에요. 여호와의 주권이었습니다. 자, 이제 제 말 이해하겠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의 주권 하는 그것을, 예수님은 뭐라고 했느냐 하면, 너그('너희'의 경남방언)애비는 악마라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이 화가 너무 났어요. 완벽에 완벽을 기했습니다. 행여나 하나님의 일에 누를 끼칠까봐, 영광 못 돌릴까봐, 철저하게 말씀 지켰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이 요한복음 5장에 보면 예수님을 비난할 때, 그냥 비난한 것이 아니고, 모세 율법에 근거해서 비난했습니다. "모세의 법에 당신은 모세의 법을 어긴다." 그렇게 하니까 예수님께서 딱 이야기하십니다. "너희들 정죄할 자가 내가 아니야. 물론 나도 정죄하지만, 먼저 너희들이 그렇게 좋아하는 모세가 너희들을 정죄할 거야. 왜? 모세는 나를 겨냥했는데 너희는 나를 비켜갔어." 모세율법과, 법에 대해서 마치 자기가 아는 것처럼 그렇게 한 겁니다. 안식일에 베데스다 못가에 있는 38년 된 병자를 낫게 했죠. 하필이면 안식일에 낫게 했죠. 제자들이 밀밭사이로 갈 때 이삭을 잘라먹은 것도 안식일이죠(마12장). 그때 유대인들이 다 지켜본 거예요. 지켜보면서, 안식 법을 어겼으니까, 안식 법은 에스겔, 예레미야에 보면 영원한 법이에요. 안식일 법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 했습니다. 그래서 안식 교인들이 예수도 믿고 안식일도 지키는 거예요. 바보도 아니고, 진짜 이건 뭐, 마귀 들렸으니까 그런 짓을 하겠죠. 유대인들이 바로 그겁니다. 유대인들이 그랬죠. 믿음으로 구원받고 행함으로 영광 돌리는 것. 그러니까 이미 홍해로부터 은혜를 믿고 받았으니까 값을 해야죠. 값을. 은혜 받은 값을 해야 내 백성 한다는 거예요. 옛날에는 값을 못해서, 예레미야에 보니까 안식일을 못 지켜서 매 맞았으니까, 유대인들은 과거가 교훈을 주어서 그들은 특별히 안식일에 고난도 많이 해요. 왜냐하면 예레미야에 보면 "너희들이 안식일에 그렇게 놀면 되느냐? 고난하고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어야지." 그러니까 마태복음 6장에서 바리새인의 주특기가 뭐냐 하면, 구제전문가들입니다. 누가복음 18장에 보면 성전에서 바리새인이 기도하는 내용이 나오죠? 구제하고 금식하고 십일조하고. 십일조 모아서 뭐하는 줄 알아요? 구제해요. 오늘날 교회하고 똑같아요. 그 아이디어가 고만고만해요. 특별한 아이디어가 없어요. 유대인들이 했던 짓을 오늘날 교회가 그대로 하는 겁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거기에 대한 무슨 하자가 있느냐 하는 겁니다. 거기에 무슨 하자가. 어제 오신 그 분이 저에게 묻고 싶은 것은 딱 한가지에요. "구원파에서는 죄 짓지 않는다는데, 목사님 의견은 어떻습니까?" 그 질문 하러 왔을 거예요. 요한일서에 나오잖아요. 요한일서 5장에 18절에 보면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유병언이가 이거 주장했잖아요. 그래서 아들 이백 명인가 사백 몇 명인가 죽였잖아요. "하나님께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따라서 회개할 필요 없다는 거예요. 이게 바로 기존교회는 몰랐던 건데, 우리는 알았으니까 우리한테 나오고 해야 구원받는다는 겁니다. 문제는 이게 개인구원이라는 거예요. 개인구원. 근데 개인구원이 문제라고 누구하나 지적하는 사람이 없어요. 왜? 기존교회가 다 개인구원가지고 영업하고 장사하기 때문에. 근원적인 문제가, 아버지와 아들하고 해야 되는데, 현재 우울증에 있는, 지금 우울감에 젖어 있는 내가, 이 땅에서 지금은 우울하지만 천국에 가서 행복하자는 거예요. 해피니스Happiness. 영어 막 쓰자. 해피니스, 행복하자는 거예요. 그러니까 소망이 있는데 왜 내가 포기하겠어요? 그 소망을 찾아서 어디로 온다? 소망 찾아서 교회오고. 더 확실한 소망 찾아서 구원파에 가고. 정보가 더 확실해보이니까. 그럼 그 가는 방법이 뭐냐, 성경구절가지고 수집하면 되지 뭐. 어느 구절이 정확합니까? 어느 구절이 더 정확합니까? 지금 성경구절문제가 아니고, 교리문제가 아니고, 해피니스 문제거든요. 나는 행복해야 되겠다는 거예요. 무슨 창세전에 행복이 어딨습니까? 아버지와 아들의 뜻만 이루어지면 끝나는 거지. 거기에 내 행복이 왜 끼어듭니까? 고급식당에 가면 손님들 가운데, 그런 일은 별로 없습니다마는, 약간 짜증나는 일은 그거에요. 뭐냐 하면 손님들 이야기하는데 웨이트리스가 팔 뒤로 하고 물 쭉 따르면서, "뭐 더 필요한 거 없습니까?" 라고 할 때, 지금 이야기하는데 끼어들지 마세요. 필요한 거 없으니까 말하지 말라고. 지금 한창 이야기하는데 흐름 다 깨진다고." 왜 자꾸 인간이 하나님의 일에 끼어듭니까? "혹시 영광 돌리려고 하는데요?" "가만있어. 내가 알아서 영광 돌리고 해." "거룩해드릴까요?" "선악과 따먹어놓고 무슨 거룩이 돼?" 피 뿌리면 거룩 되는데, 히브리서 보세요. 거룩은 피 뿌림으로 거룩을 얻었노라고 되어 있어요. 하여튼 그런 구절들은 눈에 안 들어오는 모양이라. 피 뿌림이 남아 있으면 누가 봐도 거룩이고. 세리든 창기든 거룩이고. 피 뿌림이 없으면 뭘 해도 오염된 더러운 거예요. 왜 그런 구절들을 선택적으로 배제하고 선택적으로 골라내느냐 하면, 노림수가 ‘지금은 불행하지만 나중에는 하나님께서 사랑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우리를 버릴 리가 없다. 하나님은 우리를 분명히 행복하게 하실 것이다.’ 라고 했는데 그거는 이미 유대인들이 테스트해서 실패로 끝난 거예요. 성전지라고 해서 성전 지었죠. 십계명 지켰죠. 안식일 지켰죠. 하라는 것은 다 했어요. 다 망했어요. 하라는 것 다 했다가 다 망했어요. 다 망했다는 소릴 들을 때마다 늘 생각하는 것이 뭐냐 하면 박미선 이봉원이 생각이 나요. 15개 사업해가지고 15개 다 망했어요. 지금은 옥중화에 나와서 성공했는데, 그래서 사람들은 이봉원이 보고 박미선이한테 빨대 꽂고 산다고 해요. 이 이야기하니까 중국 조선족은 몰라요. 드라마를 안 보니까. 우리가 망했으니까, 망하면 자기 죄를 알아야 하는데, 그게 아니고 오기가 생겨가지고 한꺼번에 만회를 하려고 해요. 만회하려고 교회에 오는 겁니다. “나! 행복할 자격이 있다.” 이 말이거든요. “목사! 당신은 나한테 행복하게 해줘!” 그런데 말씀대로 해버리면 인격모독인데? 그러면 “나는 인격모독 하는 데는 안 가! 나는 행복하게 하는 데에 가겠어!” “행복을 기다립니다. 하나님은 여러분들을 사랑하십니다.” 그럴듯하게 플랜카드 붙여 놓은 교회에 가는 거예요. 행복해질 줄 알고. 시키는 대로 다 해가지고. 요케요? 이케요? 해서 다 시키고. 하나님의 아들이고 하나님이고 숨겨져 있습니다. 숨겨져 있을 때, 유대인들은 아들을 다른 말로 메시아라고 해요. 기름 부은 자이니까. 얼마나 메시아가 오기를 기다렸습니까? 그런데 이사야 53장에 미리 엄포 놨습니다. 보내는데, 보내는 것은 맞아요. 그런데 너희들의 희망? 너희들이 행복? 없어. 보냈는데 알아보는 사람이 한 명도 없네. 알아 못 본 정도 같으면 괜찮아요. 심지어 기피한다니까요. 싫어버린바 돼요. 싫어버린바 된다는 것은 사람으로 태어나서 인격모독도 그런 모독이 없습니다. “사장님. 왜 저를 싫어합니까?” “무조건 싫어” 이거 뭐 무슨 말을 더 하리요. “어머님은 같은 며느리 셋 중에서 왜 저를 제일 싫어합니까?” “싫거든.” 여기서 무슨 말을 하리요. 이거 성경용어입니다. 시어머니가 싫다는데? 니 오지 말라는데 뭐 어떡해? 니 유산 없다고 하는데 여기서 무슨 말을 더 하리요. “어머님. 저 너무 서럽습니다. 같은 며느리인데?” “싫어.” 한 번 물어봅시다. 여러분, 아브라함의 아들 이스마엘이 무슨 잘못 했습니까? 저는 아무리 찾아봐도 이스마엘 잘못한 점을 못 찾겠어요. 그러면, 이스마엘 지옥 갔거든요. 참 인격모독입니다. 성경 그 자체가 인격모독이에요. 자, 에서가 뭘 잘못했는가? 에서는 취미가 있어요. 사냥하는 취미가 있어요. 에서의 잘못을 끄집어내기 위해서 얍삽한 야곱이 형을 현혹하는 짓거리를 했어요. 야곱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에서는 아무 잘못이 없는 사람이 돼요. 그리고 야곱이 팥죽을 끓일 때 까지도 에서는 아무 잘못이 없습니다. 그런데 사냥하고 헐떡거리면서 돌아왔는데, 배가 고프다 이 말이죠. 자, 아까 배운 것 이제 써먹을 때가 됐습니다. 불행한 것은 뭐라고 했습니까? 불쾌죠. 우울한 거죠. 그러면 행복은 뭐냐, 상쾌한 거죠. 지금 에서의 기분이 배고파서 상쾌, 유쾌가 아니고, 불쾌한 상태죠. 불쾌한 상태에서 뭘 기대하겠어요? 인간은 반드시 불쾌한 상태에서 유쾌한 상태를 그리워해서 회복하려고 하겠죠. 그때, 코에 뭐가 쳐들어오느냐 하면, 스멜smell, 냄새가 오는데 아주 미치겠는 거예요. 팥죽이다! 저것만 먹으면 불쾌에서 뭐로 바뀝니까? 유쾌로 바뀌죠. 스탑STOP, 스톱은 한국말로 하는 것이고, 영어로 스탑. 스탑STOP! 이제 게임이죠. 야자타임 있잖아요. “내가 형하고, 형은 동생해라.” 그냥 놀이하자는 이야기죠. 눈에 뵈는 것이 없습니다.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어요. 한 번 태어난 것은 영원히 먼저 태어난 것인데. 그게 뭐 우리끼리 소꿉놀이하듯 바꿔지지 않아요. 그렇잖아요? ‘어이구, 바보! 내기한다고 이상한 것을 내기해가지고.’ “그래 알았어! 알았어!” 하고 불쾌에서 유쾌로 바꿨습니다. 배부르죠. 기분 좋죠. 근데 그걸 사진으로 찰칵 찍었습니다.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겼다는 겁니다. 이거는 함정수사에 걸려든 거예요. 억지입니다. 억지. 억지라도 이 에서를 지옥보내기 위해서 함정을 판 거예요. 그래서 지옥 갈 사람은 아무리 교회 나와도, 복음 알아도 결국 지옥 보냅니다. 그리고 천국 갈 사람은 구원파에, 구구파라고 할지라도 괜찮아요. 마음대로 가라. 구원파 가고, 여호와증인 가고, 다 돌아가세요. 결국은 십자가복음 알고 돌아오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목회라고 하는 것은 목회자가 하는 것이 아니고, 목회를 포기한 평신도들이 목회해요. 왜? 애초부터 목회할 생각이 없기 때문에. 어떻게 목회하는데? 나 개판이다. 주님이 찾아와서 그냥 십자가로 건졌대. 이방인에게 성령세례 온 것처럼. 나 예수 관심 없었거든. 예수님이 다 했대. 다하고 난 뒤에, 다 했으니까, 끝. 다 이루었다. 다 이루었대. 어떤 짓을 해도. 이게 목회입니다. 이게 목회에요. 목회한다고 새벽기도하고, 전화하고, 대심방하고, 그게 목회가 아니고. 그거는 자기 영업수완이고. 영업이고요. 목회는 모든 것을 놔버릴 때, 목회가 돼요. 이미 구원받은 사람은 미래가 보장되었죠. 그거 이야기 미리 해봅시다. 요한1서 2장 25절 누가 읽어보세요.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약속이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 이미 우리가 예상한 것은 행복밖에 없어요. 그런데 그 행복에 뭐가 개입했다? 아버지와 아들이야기가 개입하면서, 아버지와 아들만 오신 게 아니고, 뭔가 선물 들고 온 거예요. 아들만 오고 날 믿으라가 아니라, 아예 믿을 수 있는 믿음까지 셋팅 되어 다 온 거예요. 출장뷔페 하는데 젓가락 숟가락도 안 가져오면 되겠어요? 다 가져와요. 셰프까지 다 와서, 요리사까지 다 와서 열심히 음식 만들고 저쪽에서는 서로 히히덕거리고. 이게 출장뷔페 아닙니까? 주께서 출장뷔페 오신 거예요. 오늘 제목은 출장뷔페입니다. 뭐 다 해서 내가 할 게 없어요. 할 게. 믿는 것부터 해가지고, 그리스도께 속한 자는 죄짓지 않는다는 것 까지 전부 다. 다하는데, 문제는 개인적인 행복을 포기해야 돼요. 왜냐하면 나만 그런 것이 아니고 집단구원이기 때문에. 개인구원 같으면 내가 믿는다가 성립돼요. 구원파가 침례교에서 나왔거든요. 침례교는 뭐냐 하면, 개인의지를 인정해줘요. 십자가는 코앞에까지 왔고, 믿고 안 믿고는 니 의지로 해야 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게 처음부터 개인구원이에요. 이걸 할까? 저걸 할까? 부처 믿을까? 예수 믿을까? 지가 예수가 누군지 안다는 거예요. 알기는 뭘 알아요. 그래! 결심했어! 딴따단따단따~♬ 이휘재처럼. 결심해가지고 믿었어요. 지금 이 개그가 통한다는 것은 20년 동안 개그가 끊어졌다는 거예요. 새로운 개그가 버지니아까지 안 왔다는 거예요. 옛날 이휘재가 개그 할 때, 20대에 살았으니까 다행스럽네요 제가 행복합니다. 선택을 한다는 자체가, 나의 선택입니다. 그게 포함되어서 천국 가는 거예요. 그러면 창세전에 선택은 날아가 버렸어요. 그러니까 침례교는 예정을 안 믿습니다. 개인구원이기 때문에, 니 하기 나름이라는 거예요. 남자는 여자하기 나름이에요. 지는 그렇게 해놓고 자살해버리고. 하기 나름이다? 뭘 하기 나름이에요? 몰랐는데? 함정수사였어요. 나쁜 짓은 야곱이 나쁜 짓 했고, 에서는 바보같이 걸려들었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창세전부터 사랑받기로 작정했고. 그러니까 사랑이 이 땅에 왔다는 것은, 사랑을 찾고 싶어? 보고 싶어? 얍삽한 짓! 이래 보시면 되는 겁니다. 얍삽한 짓이에요. 얍삽한 짓인데, 이게 어떻게 통하느냐 하면 누가복음 16장의 불의한 청지기. 회사 잘렸다. 좀 이렇게 챙기고 잘려야지. 불의한 청지기처럼 되어야 되는데, 양심이 너무 고와서. 횡령하고 나오셔야지. 그 불의한 청지기가 그 당시 바리새인들보다 훨씬 이 세상에서 지혜롭다는 겁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모욕감은, 모욕감이 아니고 모멸감이라도, 뭘 받아도 우리는 마땅합니다. 주님께서 예수그리스도를 증거 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증거 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시면 이 세상은 사탄의 주권이 있었고, 여기서 예수님, 메시아와 전쟁이 일어나야 되거든요. 이사야 53장에서 메시아, 아들을 보냅니다. 자, 감추어진 세계가 이 땅에 오는데, 감추어진 세계가 이 땅에 오실 때, 그때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3장 비유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다 생략하고 이 단어만 쓰겠습니다. “뿌리는” 자, 뿌린다는 의미는 무슨 말일까요? 뿌리기 전에는 여기는 아무것도 어떤 흔적도 없었다는 겁니다. 농부가 땅에 씨를 뿌리매 하늘나라 무늬가 발생돼요. 근데 하늘나라 무늬가 뭐냐 하면, 전투하는 하늘나라에요. 완료된 완성품이 아니고, 뭔가 그동안 우리가 몰랐던 다른 영적세계가 윤곽을, 본체와 본질을 드러내면서, 인간은 배제되고, ‘그동안 우리 배후에 이런 존재가 있었어?’ 라는 것을 새삼스럽게 들추어내는데, 그 존재가 죄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은 죄를 짓는 것이 아니고요. 죄가 인간을 다루고 있었죠. 근데 이 모든 것이 인간은 행동중심이기 때문에, 죄를 짓는다고 이야기하니까, 오늘 요한일서 5장에서도 그 개념을 수정해주는 겁니다. 18절,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범죄치 아니한다고 하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에 누가 말려들겠어요? 예수 믿고 무슨 짓을 해도 죄 안 짓는다고 해서 그걸 자기 행위로 돌리는 사람들, 구원파죠. 이런 사람들이 적그리스도라는 것을 노출시킨 거예요. 적그리스도가 옹호하는 구절이 구원파가 적그리스도임을 노출시키는 결정적인 증거가 되는 겁니다. 아직도 행함이야? 아직도? 그럼 뿌리는 의미는 어디로 날아가 버렸어요? 주께서 뿌린다는 말을,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모든 게 인간 대 인간으로 생각하는 거예요. 인간 대 인간의 관계처럼, 하나님도 인격자니까, 다른 사람과 사귀듯이 하나님도 사귀고, 이렇게 인격적으로 교류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요한일서에서는 그렇게 보지 않고, 이 악한 자가 너희를 지배하고 있다는 겁니다. 요한일서 2장 14절 끝에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시고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라고 되어 있고요. 요한일서 2장 10절을 누가 한 번 읽어보세요.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11절, “그이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두운 가운데 있고” 제가 이걸 시카고강의에서 할 때 소속이라고 했습니다. 소속으로만 표현돼요. 소속이라는 것은 어떤 장충체육관, 창고 안에 들어있는 거예요. 창고 안에. 우리가 집안에 있는 것처럼. 우리가 안에 있을 경우에는 안의 영향력을 못 벗어나요. 못 벗어날 것 같으면, 어두움 같으면 어두운 짓을 해야 되고, 빛이라면 빛의 짓을 해야 되는 거예요. 어두운 짓을 한다는 말은 우리는 죄를 짓는 것이 아니고, 죄가 우리를 마음대로 부리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저항할 수 없었다. 이 말입니다. 저항할 수 없으면 어떻게 됩니까? 그게 자연스러운 거죠. 그럼 목사님! 죄가 뭡니까? 아들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죄라는 겁니다. 이게 어려운 이야기에요. 간음, 살인이 죄가 아니고. 창세전에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모르는 것이 죄라는 겁니다. 그러면 죄 안 지을 수밖에 없죠. 그럼 왜 그걸 모릅니까? 사탄의 주권이 가로막혀있으니까. “왜 자꾸 목사님, 사탄의 주권이라고 합니까? 하나님의 주권이지?” 아니에요. 유대인들이 그걸 여호와의 주권, 하나님의 주권으로 이미 포장을 다 해놨기 때문에, 그들은 정상적으로 여긴 겁니다. 하나님을 잘 믿는 걸로 여겼어요. 사도바울이 사도되기 전에. 자기가 하는 일이 적그리스도일인지 몰랐어요. 하나님께 충성한다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았어요. 잡기만 한 게 아니에요. 죽였어요. 성경 보면 나와요. 그러니까 이게 얼마나 사도바울이 뻔뻔합니까? 자기 하나 때문에, 자기 잘못된 신앙 때문에, 죽은 사람들이 있을 것이고, 죽은 사람들 가족들은 어떻게 생활해요? 그 미망인까지 생각해줘야죠. 지가 미망인하고 결혼해줄 것도 아니고. 해피니스를, 행복을 보장해줄 것도 아니잖아요. 지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몰랐다. 나는 그때 주님을 안 만났거든.” 그럼 그 말 한마디 하면 다 끝나는 겁니까? “나는 죄인 중의 괴수다.” 뭐 그렇게 한다고 해서 자기로 인하여 희생당하고 피해 받은, 먼저 자기 손에 죽었던 스데반 가족의 유족들은 그럼 행복합니까? 스데반 집사 죽을 때 거기에 누가 있었어요? 행정적 책임자가? 사울이죠. 사도되기 전에 사울이죠. 그렇다면 나중에 적어도 인간적이라면, 사도되고 난 뒤에 주스 좀 사들고 친히 먼저 스데반 집사의 유족을 방문해서 사죄하고, “제가 몰랐다고 하는 것이 핑계인줄 알지만, 뒤늦게 와서 유족들에게 심심한 사의를 표합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사의만 더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세상의 모든 바탕에는 뭐가 있다? 돈이죠. 얼마 안 되지만 금일봉 드리면서, “나중에 더 후하게 드리리다.” 뭐 강도만난 사람에게 사마리아인이 했던 것처럼. “치유하고 또 필요한 것이 있으면 더 드리겠습니다.” 지가 천막장사해서 얼마 번다고 더 드리겠다고 하는 줄은 모르겠지만. 이렇게 적어도 인간이라면...., 근데 그런 거 없습니다. 입을 싹 닦아버려요. 사람이라면 자기 책임을 다 해야 한다고요? 책임 다 한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요. 어떤 인간도 우리의 죄에 대해서 그 책임을 다 할 수 있는 위인은 아무리 백 살까지 산다고 해도 다 모자랍니다. 나로 인하여 피해 입은, 정신적 심리적 보상은, 아무리 그 사람에게 충성을 다해도, 그런 거 없습니다. 그런데 충성을 다하겠다는 그것이 하나님의 주권, 사탄의 주권 안에 있는 인간들의 선악의 논리에서 나온 이야기입니다. 자기 안에 평안과 양심이라는 그 평온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자기를 학대하고 있는 거예요. 그때마다 또 생각나는 것이, 그런 예를 왜 또 드냐고 이렇게 하지만, 여기는 20년 텀이 있기 때문에, 저는 늘 생각나는 노래가 있어요. 산장의 여인. “그건 옛날 노래죠.” 예. 맞아요. 그 내용도 아시죠? 자기가 과거에 잘못된 것을 속죄하는 의미에서 어딜 혼자서 가는데, 혼자서 가고 또 어딜 가느냐 하면, 산장에 가요. 경치 좋은 데를 왜 찾아가요. 산장에 별장지어가지고 거기서 회개하고요. 실제로 그 노래를 부른 가수는 불교신자였어요. 그게 불교입니다. 남에 대한 피해 때문에 자기의 행복이, 해피니스가 깨지니까, 선악적인 체제가 어떻게 보상함으로써, 그 사람에게 보상하고 자기의 행복의 평온을 찾게 한, 하나의 수단으로써 그렇게 속죄하는 마음으로 한 거예요. 잘못을 자기 선에서 처리하는 겁니다. 한마디로 뻔뻔함이 없어요. 제발 좀 이봉원이 됐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빨대를 꽂을 수 있으면 꽂아야죠. 안 그렇습니까? 남자들이 직장을 잃으면 또 이래요. 미안하다고. 미안할 것 뭐 있어요. 꽂아야지요. 뭐. 좀 이제는 자기 분수를 알아야죠. 내가 결코 인간답지 못하다는 것. 어디까지 악랄할 수 있는가를. 죄라는 것은 뭐냐 하면 나쁜 짓해서 죄가 아니고, 독생자 예수를, 은혜를 모르는 것이 죄에요. 너무나 자기를 사랑하기 때문에 주를 사랑할 수 없어요. 너무나 자기가 착하기 때문에. 주께서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는데. 예수님은 뭘 준비해왔느냐 하면, 악랄해도 괜찮다는 것을 다 준비해 온 거예요. 악랄해도 괜찮다. 제가 뉴저지에서 버지니아로 올 때, 한식이 그렇게 먹고 싶었단 말이죠. 노스웨스트 국내선 타면서 또 나오는 것이 땅콩, 과자주고, 콜라 or 커피? 내가 아는 영어 나와서 그거 이야기하니까 주더라고요. 아이스는 내가 아는 단어니까. 아이스콜라 먹었다 이 말이죠. 오면서 한식이 먹고 싶다고 했는데, 갈비를 떡 내놨어요. 이게 뭡니까? 주의 약속이잖아요. 영생 아닙니까? 주께서 준비한 것 앞에서는 뻔뻔스러워질 수 있는 요인을 다하세요. 여기 갈비 먹는데 우린 아무것도 한 것이 없어요. 그러니까 이거는 아무것도 한 것도 없는데, 십자가의 공로로 한 겁니다. 자, 문제 나갑니다. 이제는 알아맞히시기 바랍니다. 이 귤이 온 것은 하나님의 주권입니까? 십자가의 피 입니까? 이 안에 십자가의 피가 있어요. 자 보세요. 색깔이 빨갛잖아요. 십자가의 피가 있다니까요. 십자가의 피. 그런데 기존교회는 뭡니까?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으로 은혜를 줬다는 거예요. 그거는 유대교고, 세상종교입니다. 사실은 그거는 세상종교에요. 사도요한은 말합니다. 너희들이 죄지을 수밖에 없는 것을 아시고, 외부에서 투입한 거예요. 독생자를 투입하신 거예요. 아까 이사야 53장에서, 투입할 때를 기다렸습니다. 기다리고 있는데, 어? 못 알아보는 거예요. 알아볼 수가 없어요. 왜? 감추어졌으니까. 감추어진 것은 뭐냐, 뿌려야 돼요. 뿌리게 되면 인간의 모든 행위는 배제가 돼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람하고 싸우지 않는다. 어떤 분은 그 이야기를 못 알아듣겠다고 하는 분도 있는데. 하나님은 우리하고 상대를 안 합니다. 그것을 우리교회 교인들도 처음에 못 알아듣는 사람이 있었어요. 나하고 상대를 안 한다고 하니까, 그러면 세상에, 인격모독도 이런 모독이 없잖아요? 나하고 상대를 안 한다는 것은 “나가!” 이런 뜻이거든요. 왜, 어른이 이야기하는데 웨이터가 팔 뒤로 하고 물을 따르느냐 말이죠. 왜, 손님이 이야기하는데 웨이터가 “필요한 것 없습니까?” 하고 묻느냐 말이죠. 면상을 밀어내면서 “저리가! 제발 저리가! 당신 때문에 흐름 다 깨져!” 모든 걸 밀어내고 하는 거예요. 모든 걸 밀어낸다는 이야기가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바로 로마서 9장에 나와요. 모든 사람을 불순종에 가두어두심은, 다른 말로 하면 밀어내면, 그냥 밀어내는 것이 아니고 면상을 대번에 밀면서, “가 있어! 애들 좀 가! 제발 좀 가!” 불순종에 가두어두심은, 그 다음에 762번 호출해요. 762번! 어? 나는763번인데? 앞에 있는 사람보고 너잖아? 근데 왜 날 부르지? 갑자기 부르는데 보니까 강도라. 강도니까 에라, 그냥 가자. 하는데, 오늘 밤에 니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832번! 어? 왜 부르지? 832번이 지금 뭐 할 때냐면 모텔에서 장사하고 있을 때거든요. 창녀라 이 말이죠. 어? 날 왜 부르지? 예가 좀 너무 극단적인데. 창녀와 세리와. 세리는 퉤퉤 돈에 침 발라가면서 세면서. 세리가 원래 이중장부를 만들어요. 원래 처음부터 세리에요. 원래 정부에서 5퍼센트 받으라고 했는데, 5퍼센트는 남는 게 없으니까 6퍼센트 받아서 1퍼센트 떼고 5퍼센트 주는 거예요. 그게 세리에요. 그걸 다 알아요. 다 안다고요. 그러나 그 당시에는 학자, 문자를 아는 사람이 얼마 없기 때문에, 나름대로 엘리트를 뽑아서 세리 맡겨가지고 철저히 자기들을 위해, 쉽게 말하면 일제앞잡이죠. 나까무라에요. 나까무라. 한국인 나까무라가 그런 짓 하고 있는 겁니다. 앞장서서 로마총독부에 돈 내라고 하는 거예요. 나까무라인데, 1246번! 호명받아서 나까무라가 간 거예요. 그러니까 그동안 목적이 뭐냐, 해피니스인데, 행복하려면 그 방법이 뭐냐, 돈이 있어야 되거든요. 그런데 니가 오늘 밤 니 집에 구원이 있으리라. 삭개오 이야기입니다. 있다고 하니까, 그럼 이 돈은 뭐야? 원래 법에는 두 배만 갚으라고 했어요. 근데 “네 배나 갚고 더 갚겠습니다.” 라고 나오는 거예요. 네 배를 갚는다는 말은 갚아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구원받았다!” 이런 거예요. “나 구원받았어!” 아무것도 한 것도 없이 돈만 챙기다가 구원받은 거예요. 사람들의 소원이 갑자기 다 삭개오 되고 싶어서. 돈은 돈대로 챙기고 구원은 구원대로 받고.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죠. 그러나 사실 그것은, 돈이 있다는 것은 나중에 없어질 때의 아픔을 경험하라는 기회를 준 거죠. 뿌린다는 말을 다시 정리하면 없는 겁니다. 없는데, 뿌리면서, 뿌릴 때 지키려고 덤벼드는 사람은 아직도 면상 밀린다는 것을 몰라요. 싸움은, 인간 배후를 유대교식으로, 그런 행함으로 하게 하는 원수가 있어요. 죄, 악마, 사탄, 뱀의 후손, 그것과 여자의 후손으로서의 싸움이 있고. 그 싸움의 결과가 뭐냐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로써 승리했느니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요한복음에 나오는 말씀처럼(요16:33). 예수님께서 그런 이야기를 하시는 것은, 제자들을 배제하고, 이미 단독으로 이겼고, 그 이긴 것을 이제는, 그럼 이겼으면 주님혼자 구원이지 우리는 아니잖아요? 기다려봐. 성령을 보내줄게. 보혜사가 오게 되면, 보혜사는, 이게 우주선 모체하고 떠도는 그것과 연결시키는 거죠. 연결. 도킹을 시키는 겁니다. 도킹 시킬 때, 여기서 교회가 나오는데요. 우주선 캡슐모체하고 여기서 나온 선을 우주선하고 연결시킬 때, 우주선은 한 사람만 있잖아요. 한 사람만 있으면 개인구원이 돼요. 다 교회라는 것. 내가 저 사람 모르고 저 사람이 나를 모르지만, 십자가(우주선모체)를 경유할 때만 형제가 되는 거예요. 왜? 둘 다 못난 사람이니까. 자기 직업자랑, 돈 자랑 안 하고, 전부 다 죄만 자랑하는 사람들만 모여서 하기 때문에 반드시 그 모임에서는 그냥 이야기하지 않고 십자가를 경유해서 이야기해요. “나도 못났지만 당신도 어지간히 못났군요.” 이게 인격모독이 아니고, 오히려 합당한 성령의 고백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워치만 니가 이단인 이유가 거기 있어요. 이미 구원받았기 때문에, 뭐는 잊어버리자? 십자가 필요 없다. 이게 단독구원이거든요. 단독구원이기 때문에, 나 잘났다는 거예요. 니 잘났다는 거예요. 혹시 여기서 설교할 사람? 설교 잘하면 그 사람은 또 종속되는 거예요. 설교하는 자체가 죄가 되는 이유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경유하기 때문에, 뭘 했든 간에, 죄가 가서 의로 나타나기 때문에, 설교하는 것도 죄고, 강의하는 것도 죄고, 헌금하는 것도 죄고. 이 말을 복음 깨나 안다는 사람들이 도대체, 마지막에 다 따라와 가지고 뒤로 돌아 갓! 여기서 딱 걸려버리는 거예요. 그러면 이건 죄고, 이건 죄지만, 죄 아닌 것은 있을 거야? 그 죄 아닌 것이 자기의 행복을 위한 종자 씨앗으로 깊숙이 집어넣어요. 종자씨앗으로. “내 인생은 망가졌지만 복음은 알았다!” 그 복음 알았다는 것이 자기 인격을 모독하지 말라는 마지막 남은 근거에요. 그럼 제가 또 가만히 있습니까? 그럴 줄 알고 그걸 또 공격한다고요. 그럼 삐져서 그 다음부터는 교회 안 나옵니다. 안 나옵니다. 잘 먹고 잘 살아라. 어떻게 헌금도 죄라고 하느냐? 그것도 성령의 뜻에 의해서 자발적으로 한 현금을 왜 죄라고 하느냐? 둘 사이의 관계를 자꾸 하는 거예요. 우리는 지금 한 곳에 모여 있는데. 216번 호출되게 되면 죄인으로 호출되고, 저쪽 816번 호출되었으면, 만남은 직접 만나면 안 돼요. 주님을 경유해서 만나야 돼요. 주 안에서 부모를 섬겨라, 주 안에서 자녀를 사랑하라는 말이 거기서 나온 거예요. 이 말은 효도하지 말라는 거예요. 자녀 사랑하지 말라는 겁니다. 왜? 효도하면 그게 죄가 됨을 익히 알기에. “부모님!” “왜?” “이렇게 봉투 드립니다. 봉투 봉투 열렸네~ 해서 봉투 드립니다. 이 봉투 드리는 죄를 범합니다.” 이렇게 하면, “진희야! 진희 너한테 용돈 받는 죄를 범하노라” 이렇게 되가지고 양쪽은 주 안에서 죄를 범하지 않는 거예요. 모든 게 죄가 되기 때문에 죄를 범하지 않는 겁니다. 이걸 왜 구원파가 모를까요? 그럼 우리는 안다고 치고 10분 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