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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캘거리 강의강의요한일서

20160919 요한1서 캐나다 캘거리강의22-이 근호 목사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들이 늘 말씀을 사모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뜻이 있어서 말씀중심으로 다시 모이게 해주심을 감사합니다. 같은 하늘에 어느 곳에 있든지 말씀으로만 일하시고, 말씀으로만 모든 것을 이끄시는 주님의 사랑을 이번 집회에서도 저희들이 잊지 않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제가 요한일서를 시작했고, 지금 캘거리에서는 요한일서 3장부터 해서, 그리고 5장까지 하겠습니다. 그래서 요한일서 3장부터 하려면 1장, 2장에서 무슨 이야기를 했는가를, 제가 요약할 필요가 있습니다. 요한일서라는 것은 사도요한을 통해서 전하신 말씀인데, 이 요한일서라는 편지를 왜 살기 분주한 인간들에게, 사도요한이 구태여 이러한 편지를 꼭 전해야 될 그 분만의 이유는 뭐냐, 이것부터 알아야 돼요.

사도요한은 하나님의 사도로서 예수님의 지시에 따라서 사람들에게 요한일서를 전하겠다는 겁니다. 이말은 뭐냐 하면 우리가 요청하거나 부탁한 적이 없다는 거예요. 이게 굉장히 중요한 문제에요. 사람이라면 마트에서 물건을 살 때, 또는 주문할 때, 또는 음식을 먹을 때, 자기가 원하는 음식을 지목하고, “이것 먹겠어요.” 또는 “이 물건 사겠습니다.” 이게 정상이에요.

왜냐하면 ‘자아’라 하는 것은, 자기결정이나 선택을 통해서 바깥으로 표현하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절에 가지 않고 나는 교회 가겠다. 나는 불교를 믿지 않고 예수를 믿겠다. 그래서 나타난 결과는 뭐냐, “예수 믿는 것을 내가 결정했다는 것, 그리고 그만한 결정권은 내가 원초적으로 갖고 있습니다.” 라는 것을 나타낸 이야기겠죠. “나는 지옥가지 않고 천국 가겠습니다.” 그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번 적어볼게요. “나는 지옥 싫어!(☓) 나는 천국 좋아!( ⃝)” 이 결정을 내가 했다는 말이죠. 나는 지옥가기 싫어 천국 가겠다고 했을 때에, 그러한 결정을 할 때에, 당신이 그러한 결정을 하는 근거가 어디에 있습니까? “나는 죽어서 좋은 데 가겠다. 그리고 나는 죽어서 내가 원치 않는 곳은 가지 않겠다.” 라고 이렇게 선택을 하고 결정을 할 때, “당신은 뭘 보고 그렇게 결정을 하고 선택했습니까?” 라고 하면 할 말이 없습니다.

모든 인간은 할 말이 없어요. “그냥 내가 죽어서 좋은 데 가겠다는 그 말입니다.” “당신은 왜 죽어서 좋은 데 가겠다는 그 권리를 행사합니까?” “내가 좋다는데? 니가 와?” 갑자기 시비가 되죠. “내가 죽어서 천국 가겠다는데 니가 뭔데 시비를 거느냐?” “내가 거기 가고 싶단 말이야!” 그런 뜻이거든요. 지금까지 제 말 틀린 것 있습니까? 없습니까? 제 말 틀린 것, 집사님! 있어요? 없어요? “내가 천국가고 지옥가기 싫다는데 니가 왜 시비를 걸어?” 이런 뜻이거든요.

그럼 그걸 한 번 적어보겠습니다. “나는 죽어서도 천국(좋은 곳)에 가겠다고 결정했습니다.” 자,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이게 성경입니까? 성경 어느 대목에 나는 죽어서도 꼭 좋은 데 가겠다는 것이, 창세기에 나옵니까? 예레미야에 나옵니까? 말라기에 나옵니까? 마태복음에 나옵니까? 어디에 나오죠? 안 나오죠. 성경에 안 나오게 되면 그게 진리일까요? 진리 아닐까요?

지금 어떤 마트에서 세제를 파는데 세제 하나에 2달러, 근데 특별세일로 2달러에 두 개 드리겠다는 광고가 붙어있습니다. 자, 그게 성경일까요? 성경 아닐까요? 성경 아니죠. 마트에서 2달러에 한 개 살 것, 두 개 샀다고 해서, 그 사람이 죽어서 천국 갑니까? 아니라는 말이죠. 그럼 천국 갈 것 아니면, 그 마트 거래 끊고 가지 말까요? ‘나를 천국 못 보내는 곳이면 안 가!’ 이렇게 되는 겁니까? 그래도 꾸역꾸역 보다 더 새로운 세일을 찾아서 세제 사잖아요?

그 말은 뭐냐 하면 모든 출발을 뭐로부터 시작하느냐 하면, 나로부터 출발하게 되면, 이미 인간은 나 위주로, 내 좋은 쪽으로, 나름대로의, 이 나름, 나름대로의 자기 성경책, “나는 이거는 양보 못해! 죽어도 이건 양보 못해! 진리냐 아니냐, 나한테 묻지도 마! 나는 그러길 원했었어. 이건 내가 원하는 바야.” 라는 어떤 문장 같은 것이 ‘나’ 뒤에 붙을까요? 안 붙을까요? 반드시 붙게 되어 있습니다.

좀 늦게 오신 분이 계셔서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강의 처음에 이런 질문을 했죠? 우리가 사도요한을 초청한 적도 없고, 이 캘거리에 사도요한 초청한 적 있습니까? 없죠. 초청한 적도 없는데 사도요한이 건방지게 요한일서라는 책을 우리에게 왜 줬느냐? 이 말이죠. 그 준 의도가 뭐냐? “아, 하나님이여. 저는 천국가고 싶은데, 사도요한이 올 때 그냥 빈손으로 오지 말고 요한123서라는 그 편지를 손에 쥐어서 우리에게 보내주시옵소서.” 라고 우리가 사전에 요청한 적 있습니까? 요청한 적 없죠.

요청한 적이 없는데 우리 앞에 나타났다면, 마트에서 세일 하냐, 안 하냐를 우리한테 물아보지 않고 일방적으로 세일했다면, 그것을 믿고 안 믿고의 결정권은 누구한테 있습니까? 바로 나한테 있죠. 나한테 있다는 말은 어느 게 갑이고 어느 게 을이다? 성경이 을이고 내가 갑이다. 그걸 선택 하느냐, 마냐를 결정하는 내가 갑이 되죠. 그럼 내가 갑이 된 채, 계속해서 이번에는 요한일서, 다음에는 마태복음, 다음에는 말라기, 다음에는 창세기를 공부하겠다. 그가 계속 시도해서, 그런 식으로 죽을 때까지 시도해서 가는 나라는 무슨 나라냐? 무슨 나라일까요? 나의 나라죠. 나의 나라를 두 글자로 줄이면, 이게 바로 지옥입니다.

모든 인간은 교회 다니면서 지옥가고 있습니다. 모든 인간이. 교회 간 사람도 지옥가고, 교회 안 간 사람도 지옥가고. 모든 인간은 다 지옥 갑니다. 그 이야기를 어디서 하고 있느냐, 요한일서에서 하고 있는 거예요. 요한일서에서. “목사님. 요한일서를 믿고 싶습니다. 요한일서를 믿겠습니다.” 요한일서는 이야기합니다. “누구 선택이냐? 누구 결정이지?” “제가 그렇게 했습니다.” “아이고, 자기나라 만들 사람이 또 있구나.” 자기나라 만들 사람이 또 있어요.

이 나라는 것은, 또는 나라는 존재는, 이미 있습니다. 저는 거짓말 안 해요. 나라는 것이 있죠? 누가 있으라고 했습니까? 이걸 우리가 몰라요. 누가 있으라고 한 것도 모르겠고, 어쨌든 내가 태어나서 내가 있는 거예요. 태어나서 교회 갔더니만, 하나님이 당신을 있게 했다는 소리를 들어요. 그러면 하나님이 나를 있게 했다는 말이, 정답일까요? 정답이 아닐까요? 제가 물을 때 굉장히 수상하게 묻기 때문에 답변하기가 굉장히 난처하죠?

하나님이 나를 만들었다는 것이 정답일까요? 정답이 아닐까요? 둘 중의 하나인데, 아무거나 한 번 찍어보세요? 정답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나를 만들었다는 결정을 누가 내렸습니까? 내가 내렸죠. 왜? 내가 하나님이 나를 만들었다는 소식을 듣기 이전에 먼저 갑질 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나’이기 때문에. 요한일서는 복음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요한일서는 나의 구원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복음을 주니까 이게 나의 구원과 관련 있다고 일방적으로 그렇게 우기고 또 우기는 것은 뭐냐 하면, 타고난 나의 존재성이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고, 존재성이 담겨 있는 그 성질을 마음껏 발휘하는 겁니다. “기다렸습니다. 요한일서! 반갑습니다. 사도요한! 나를 천당보내기 위해서 이렇게 귀한 성경주시니 얼마나 고마운지!” 이래 나오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이 나는 무슨 나가 되게 되면 개인적인 나가 돼요.

성경은 복음에 대해서 이야기한다고 했죠? 자꾸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복음에 대해서 필요한 나는, 개인적인 나가 아니고 보편적인 나에요. 보편적 나. 너라고 하는 나와, 나라고 하는 나와, 차이가 없는 나. 이것이 바로 복음 안에서 요청되는 나입니다. 복음에서 새로 규정하는 나에요. 근데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어떻게 하느냐 하면, 개인적인 나에요. 개인적 나. 모든 것이 나로부터 스타트하는 거예요. 나로부터 출발하는 거예요. 천국가고 지옥가고 내가 결정하기 나름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아무리 사도요한, 아무리 예수라 할지라도, 내가 예수 이름을 부르기 전에는, 그것은 단지 하나의 예수였다. 그러나 내가 예수를 부를 때, 그것은 나에게 와서 하나의 꽃이 되었다. 어떤 시 패러디하는 느낌이 들죠. 예수라는 것이 예수 본인의 의미는 탈락해버리고, 이미 나한테 끌려오면서 이 예수는 나에게 구미가 맞는, 탈색되고 변질된 예수로 나에게 가까이 와서 나에게 이용당하는 겁니다. 활용당하는 거예요.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나는 괴물이 되고, 나는 더욱더 예수마저 알게 된, 하나의 굳건한, 강화된 존재성을 갖게 되는 겁니다.

이런 인간들이 교회에 모였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괴물단체가 되고 말았습니다. ‘나를 건드리면 누구라도 나는 가만 못 있어.’ 그런 것을 스스로 확인하는 식으로, 그렇게 서로가 모여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지금 하고 있는 이야기가 뭐냐, 1장, 2장 요약한 겁니다. 왜? 1장 2장은 몰랐으니까. 3장부터 진도나간다고 했으니까. 1장은 시카고강의에서 여덟 강의, 2장은 뉴저지강의에서 다섯 강의, 버지니아에서 여덟 강의, 지금 그걸 집약적으로 요약하는 겁니다.

이걸 하면서 지금 어디서 틀렸느냐를 보는 겁니다. 방금 제가 이야기한 것을 간단한 두 가지 질문으로 요약할 수 있어요. 구원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과 복음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의 차이. 구원이란 무엇인가? 할 때는, 무엇과 관련이 있느냐 하면, 내 개인적인 구원욕구와 욕망과 관련되어서 이런 질문이 나오는 거예요. 근데 복음이란 무엇인가? 성경에서는 복음이란 무엇인가? 라고 하지 않고, 성경대로 하면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복음이 나타났느니라.” “복음이 나타났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느니라.” 이런 뜻이라는 말이죠. “복음이 나타났으매.” 이런 뜻이다. 이 말이죠.

그럼 우리는 “내 허락도 없이 왜 나타납니까?” 이래 되겠죠. “내 허락도 없이? 누구 마음대로? 내가 요청한 적도 없는데?” 자장면 시켰는데 짬뽕 왔다. 나는 자장면 먹기를 원하는데 왜 짬뽕이? 내가 원하는 것은 내가 어떻게 구원받느냐는 그 문제인데, 하나님께서는 뭐냐, 마지막 때에 뭐가 나타났으니? 복음이 나타났으니. 그러니까 인간이 미치지 않고서는, ‘아, 날 구원하기 위해서 복음이 나타났구나!’ 라고 이렇게 일방적으로 접목을 시켜버려요. 미치지 않고서야. 왜냐하면 항상 나는 무슨 나냐 하면 개인적인 나거든요. 개인적인 나.

우리가 언제 봤다고 하나님하고 나하고 개인적인 친밀한 관계입니까? 언제 봤다고? 복음이 나타났으니, 그 복음이야기는 무슨 이야기냐 하면, 내 이야기 아니에요. 내구원이야기 아니에요. 누구이야기냐? 예수님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이야기.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이야기를 받으면서 무슨 멍석을 먼저 깔았어요. 뭐냐 하면, 나는 어떻게 구원받지? 나는 어떻게 구원받지? 라는 멍석을 깔고 예수님이 오니까, 예수님이 본래 해야 될 일을 일방적으로 내 이익과 내 소원달성을 위해서, 어서 오세요! 이럇샤이마세~ 어서 오라고 반기는 거예요.

복음 안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담겨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담겨있다는 말은, 여기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기능이 나옵니다. 숨겨진 기능. 기능이 나오는데, 우리는 뭐부터 출발했느냐 하면, 존재가 이미 닦여져 있어요. 그러면 복음은 창세전부터 예정된 것이고. 창세전부터 성부와 성자사이에서 의논된 것이고. 이건 상식적으로 아시죠? 몰라요? 맞아요. 복음은 창세전부터 예정된 것입니다. 창세전부터 예정 되었으니까, 근데 나라는 존재는 창세전을 몰라요.

내가 여기 있음에, 그리고 생로병사, 살기에 너무 힘들기에, 뭔가 인생역전, 인생만회를 죽고 난 뒤에 천국에서 해보겠다는 심보로써, 어떻게 나를 이 고통에서 해탈할 방법이 없을까? 이 땅에서는 고생했지만, 저 세상에서는 아픈 곳도 없이, 눈물 닦고 그렇게 살아볼까? 이미 존재부터 출발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기능이 우선이겠습니까? 존재가 우선이겠습니까? 기능이 우선인 겁니다. 그럼 어떻게 됩니까? 복음을 받아들이려면 존재에다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고, 복음 안에 있는 어떤 기능과 현재 나의 존재가 그 후에, 그 나중에 나라는 존재가 어떻게 존재케 되었는가? 이렇게 연결시켜야 되겠죠. 제 이야기에 이의 있습니까? 없죠.

그럼 뭐를 잠시 유보해야 되겠습니까? 나의 구원을 유보를 해야 되겠죠. 나의 구원을. 만약에 내일 캘거리에 비가 온다면,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를 듣고 사람들에게, “이보게! 내일 비가 온대. 근데 그 비가 나를 위해서 온대.” 이렇게 하면 미친 사람이에요. 왜, 비가 오는 것이, 보편적으로 비가 내리는데, 개인이 거기에 끼어들어요? 개인이 왜 끼어듭니까? ‘아, 비가 와? 내가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내가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비가 와? 그렇다면 내가 대처해야 되겠지.’ 비 온다는 기능이 우선이고, 나라는 존재는 어떻게 대처해서 그 기능에 부합되게 살아남을까? 그걸 생각 하잖아요.

그렇다면 내가 여기 있고, “복음은 이렇습니다.” 라는 것이 귀에 들리더라도, 우리는 순서를 바꿔야 됩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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