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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광주 강의(2016. 8. 26) 1강자유게시판마가복음

광주 강의(2016. 8. 26) 30-1

마가복음 8장 38절입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는 이유는, 사람들이 자기 목숨도 바치려는 마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목숨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어요. 목숨 버려 얻을 것이 있다고는 감히 생각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목숨을 잃으면 아무것도 소용없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지요. 준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염려하지 말라는 거예요. 그리고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고 하셨어요. ‘그 나라 의’는 어떤 상태, 경지를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없는 상황, 없는 경지를 만들어 나가실 거예요.

그런데 조건이 있어요. ‘무엇을 입을까, 먹을까, 마실까’를 염려하는 사람은 그 나라 의와는 상관이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뭘 생각하는가 하면, 이런 염려들을 하지 않으면 천국 간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실 때는 이미 천국에 온 사람은 예수님 말씀을 이해하고 납득하는 상태, 경지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여기 있는 나를 천국에 들어가게 하기 위해 이런 말씀을 주신 것이 아니고, 이미 천국에 있는 사람은 예수님 말씀이 어떤 취지에서 하신 말인지 이해가 된다는 겁니다. ‘아, 이정도로 좋은 나라이기 때문에 무엇을 입을까, 먹을까, 마실까를 염려하지 않아도 되는구나.’ 이렇게 된단 말이지요.

그런데 만약 내가 주의 말씀을 지켜서 천국 간다면 ‘무엇을 입을까, 먹을까, 마실까를 염려치 않도록 예수님이 보장해 주셔야 합니다.’라고 요구하게 될 것이고, 주님은 이런 조건을 만족시켜주지 않습니다. ‘월 수입 오백만원 정도 주시면 제가 입고, 먹고, 마시는 것 염려하지 않고 천국 가겠습니다.’ 이런 조건은 주님 앞에 통하지 않습니다.

천국에 가게 된 사람은 ‘수입이 오십만 원이든 오백만 원이든 염려할 문제는 아니구나.’ 이걸 이해합니다. 그럼 그 이해가 뭔가? 목숨보다 더 중요한 것을 획득한 사람에게는 그동안 내가 목숨 부지하기 위해 애쓴 이 모든 것이 다 부질없는 짓임을 납득하게 된다는 겁니다.

‘목숨 바칠만한 가치는 ( )다.’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어요. 뭔가 있는데 이게 어느 정도냐 하면, 목숨을 바칠만한 가치가 있는 그 무엇이란 것입니다. 이 빈자리는 9장 1절에 나옵니다.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하시니라.” 2절에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변화산으로 올라가지요.

변화산에 올라갈 때 베드로와 요한이 무엇을 입을까, 먹을까를 염려했습니까? 자기 목숨 부지하려고 애섰습니까? 전혀 그렇지 않아요. 왜냐? 변화산에서 예수님은 해같이 빛났습니다. 그래서 우리 같으면 ‘천국이다.’라고 하겠지만, 제자들은 ‘도대체 이게 무슨 상태냐? 이런 세계가 다 있어?’ 이렇게 되겠지요.

그래서 목숨 바칠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천국’이다. 이렇게 되면 사람들은 그곳에 들어가려고 합니다. 그러니 ‘천국이다’라고 하지 말고, 목숨 바칠만한 가치는 ‘주님이 주신다.’ 또는 ‘주님과 함께하는 상태다.’ 이렇게 이야기해야 정답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 자기 목숨에 연연하지 않게 되고, 그것이 바로 주님이 주시려고 했던 변화산의 상태가 된다고 보시면 됩니다.

방금 제가 한 이야기 중 ‘내가 무엇을 해야 한다.’는 것은 없어요. ‘이렇게 하세요.’라고 하면 안 되는 이유가 ‘이렇게 하면 천국에 넣어줍니까?’ 이렇게 나와요. 인간에게는 목숨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기에 목숨을 버리는 것은 절대 할 수 없습니다. ‘너희들이 모르는 목적이 있는데 내가 너희에게 그 목적을 달성해서 너희를 그 속에 넣어줄게.’ 라는 주님의 자기 스케줄을 이야기한 거예요.

갑자기 편해졌지요? 물론 믿는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입니다. 제가 초등학교 시절에 들은 노래인데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이런 노래가 있었는데 그 가사가 굉장히 섬뜩하게 느껴졌어요. 그런데 제가 신학교에 입학해서 성경을 보면서 예수님이 우리의 시체를 넘고 넘어서 결국 천국을 이루신다는 것을 깨닫고 모든 것이 깔끔하게 정리가 되었어요.

‘목숨 버릴만한 가치는 주께서 주시는 천국이다.’ 라고 하지만, 실제 천국이 주어질 때는 ‘주님을 알고 있나?’ 이것을 묻는 겁니다. 주님이 천국을 이루기 위해 우리의 시체를 넘고 넘을 때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데 ‘내가 누구인가?’를 아는 변화입니다. 8장 34절을 보면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36절에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이 말씀을 지금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목숨 바칠만한 가치가 따로 준비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따로 준비하신 거예요. 그러면 이 말을 듣고 우리는 “그럼 그것 저에게 주세요.”라고 하겠지요.

예수님을 믿는다고 따라다녔으니 그만한 혜택은 받아야 하잖아요. “온 천하를 얻고도 네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고 해서, 목숨 버릴만한 그 무엇이 주어지면 필히 놓아야 하는 것이 있어요. 그동안 애지중지하고 귀히 여기던 목숨을 놓아야 합니다. 이것은 내 것이 있는데 추가적으로 더 주는 것이 아니라 교환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이렇습니다. ‘당신 천국 얻었지요. 그럼 이제 당신 목숨은 전혀 귀하지 않지요?’라는 질문이 되는 겁니다. 천국을 얻었다면 이제는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먹을까 하는 것은 별로 신경 쓰지 않는데, 이렇게 된 자는 바꿔치기 한 것이 맞다는 것입니다.

질문을 다시 해봅시다. “천국 얻었습니까?” “예” “그럼 먹고 마시는 것은 별 걱정 안 되지요?” “그래도 걱정 되는데요.” 이러면 바꿔치기가 안 된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꼼수를 쓰지요. “그러면 입는 것, 먹는 것 포기할 테니 천국 주세요.”라고. 하나님과의 이런 흥정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천국이 아무리 좋아도 내 목숨을 포기할 위인은 없습니다. 모든 인간은 자기 챙길 것 챙기되 목숨을 기본으로 깔고 챙깁니다. 내 목숨을 포기하고 뭔가를 챙긴다는 것은 너무 큰 도박이라 그런 모험은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오늘 롯데 2인자라는 분이 자살을 했습니다. 제 고등학교 5년 선배인데, 뭘 지킬 것이 있다고 목숨을 버립니까? 어리석은 짓이지요.

저는 안중근 의사, 이봉창 의사, 윤봉길 의사 이런 분들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나라 구하는 위인 되지 말고 자기 가정이나 잘 챙겼으면 좋겠어요. 남들 보기에는 대단한 사람 같지만 자식입장에서는 자기와 놀아주는 아버지가 최고 좋은 아버지입니다. 자기 가정 잘 챙기는 것이 위대한 사람입니다.

이걸 잘 못하니까 밖으로 돌면서 핑계를 댑니다. 따지고 보면 제일 어려운 것이 가정을 잘 돌보는 일입니다. 이것은 나라를 구하는 것보다 훨씬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를 포기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정답은 나왔습니다. 우리의 목숨보다 주님이 주시는 미지의 X가 더 귀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이렇게 나옵니다. ‘목숨보다 천국이 더 귀하다면 순교하고 천국 가지 뭐.’ 이런 발상 자체가 틀려먹은 것입니다. 주님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것은 사기입니다. 이런 인간은 지금까지 한 명도 없었습니다. 남들이 순교했다고 말은 하지요. 사실은 그게 아닙니다.

인간이 스트레스를 받는 이유는, 내가 벌인 사기에 남이 곱게 안 속아주니까 스트레스가 쌓이는 겁니다. 사기를 쳐야 돈이 생기는데 내가 벌인 사기에 안 넘어 가는 거예요. 그 종교적 사기가 뭡니까? ‘나는 주를 위해서 목숨을 버렸다.’ 이건 정말 큰 사기입니다. 이런 인간은 없어요.

외국인 천주교 신부가 처음 일본에 복음을 전할 당시, 사무라이 대장은 포르투갈이 일본을 집어삼키려고 이런 사람을 보냈다고 오해해서 신부의 전도를 받은 사람들을 바다에 빠트려 죽이면서 하는 말이 “이래도 네가 예수 믿나? 네가 예수님의 초상화를 밟아라.”고 위협했어요. 처음에는 안 밟고 버티다가 나중에는 밟았어요.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 보이지 않는 예수님이 중요하다고 보이는 인간을 초월할 위인은 세상에 없습니다. 그러기에 본문의 ‘목숨보다’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목숨은 줄 수 있어요. ‘사자야 날 뜯어 먹어라. 나는 예수님을 위해 기꺼이 죽겠다.’ 이게 뭐냐 하면, 사실은 목숨을 버린 게 아니에요.

자아의 가치, 나의 자존심을 살리는 거예요. 어떤 경우에도 나의 자아는 포기 못하겠다는 확실한 증거입니다. 때려 죽여도, 어떤 경우에도 자기 자아를 버릴 수가 없어요. 그래서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따른다.’는 것은 인간 능력 밖의 이야기입니다. 남들이 볼 때는 고상해 보이고 순교하는 것처럼 보여도 사실은 자신의 가치, 자아의 위대함을 포기하지 않은 것입니다.

IS 대원들을 보세요. 죽어서 천국 간다고 하니까 아낌없이 자기 몸을 바치잖아요. 어떤 목사가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십일조를 내라. 그러면 낸 만큼 돌려받는다.’ 이건 보람상조에 가입하는 것이고, 곗돈 내는 것입니다. 십일조를 하나님이 안 받는 이유가 뭔가 하면,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하셨는데, 여기에 걸려요. 오른손으로 십일조를 하면 왼손이 모르게 해야 하는데 이게 안 됩니다.

내가 냈다는 말은 나를 바친 것이 아닙니다. 주님과 흥정하고 거래를 한 거예요. 이렇게 하면 자신이 한 것이 누적되어 보상을 기대합니다. 망가진 자기 인생을 빠른 시간 안에 만회하는 것이 보상입니다. 야구 선수가 수비에 실수를 했다면 다음 공격에서 홈런을 쳐서 만회하는 것처럼.

자신이 기대하는 나의 모습이 있는데, 인생을 살다보면 그 기대에 깨집니다. 그 때 빨리 하나님께 요청해서 그 기대한 바를 채우면 하늘나라에서 인정받은 괜찮은 사람이 된다는 겁니다.

사람은 자아가 두개입니다. 자아 1과 자아 2가 있는데, 바깥으로 보여지는 것은 자아 2인데, 나올 때 자아 1과 친밀성을 가지고 나옵니다. 그래서 자아 2와 만나는 모든 타인들은 자아 1을 원만하고 이상적으로 만들기 위해서 보탬이 되는 자를 만나요. 메슬로우가 이야기했지요. 인간의 최고 욕구는 ‘자아실현의 욕구’라고.

가장 원초적인 욕구는 생존의 욕구이고 마지막 욕구는 자아실현입니다. 내가 원하는 나라야 나답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나는 어디에서 만들어집니까? 어릴 때 엄마와의 관계에서 만들어집니다. ‘너는 우리 집안의 기둥이야. 그래 잘 했어. 아니야, 그러면 안 돼.’ 이런 것들이 나중에 법 감정으로 형성됩니다.

엄마, 아빠로부터 배운 것이 자아로 구축되고, 1.8개월부터 24개월까지 자아가 형성되고, 형성된 그것이 맞는지 확인하는 차원에서 자아성의 증거 수집에 나섭니다. 이정도 되니까 나답다는 것이지요. 이게 바로 친밀성입니다. 철학자 헤라클레토스는 주장했습니다. ‘세상 것들 중 나와 친밀한 것은 나에게 달라붙고 안 친밀한 것은 나와 멀어진다. 이 세상의 모든 운동은 사랑과 미움인데, 미움은 밀치는 것이고 사랑은 당기는 것이다.’

현대 심리학에서는 이런 이론을 타당한 것으로 수용합니다. BC 5세기의 철학자가 어떻게 이것을 알았을까?

어쨌든 지금 예수님께서 이야기하는 것은 ‘온 천하를 얻는 것보다 목숨이 더 귀하다.’고 했을 때, 이 말은, ‘네가 아무리 용을 써도 네 자아성은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네 것 내놓으면 내 것(천국) 줄게.’ 이런 것을 주님이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가? ‘너는 그냥 있어라. 천국이 와서 너를 덮칠 것이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천국이 덮쳐올 때 우리는 그림자가 됩니다. 그림자는 상징, 또는 표상이지 실체가 아닙니다. 그림자가 있다는 말은 실체가 있다는 말이지요. 만약 실체가 전봇대라면 그 전봇대의 그림자가 있겠지요. 인간의 존재는 마지막 아담의 긴 그림자였습니다.

여기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는 분들이 있어요. ‘우리가 이렇게 촐랑대고 까부는데 그러면 주님도 우리처럼 촐랑댄다는 말인가?’ 주님은 두 가지 속성이 있습니다. 심판과 긍휼의 속성입니다. 우리가 촐랑대고 까불고, 남은 생각지 않고 나만 챙기는 모습은 주님이 심판 주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이런 모습이 나오는 거예요. 그러다가 ‘남은 생각지 않고 나만 챙기는 것은 철없는 짓이구나.’ 이런 생각이 들면 이것은 예수님의 긍휼의 그림자입니다.

우리는 가만히 있지를 못하고 늘 출렁입니다. 좋았다가 슬펐다가, 웃다가 울고. 이런 것을 예수님은 다 아십니다. 본문은 누구에게 하신 말씀입니까?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제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이 이것입니다. ‘목자를 치니 양은 흩어진다.’ 예수님께 일이 벌어지니까 12제자가 모두 도망쳤어요.

도망 칠 사람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단 말이지요. 무슨 뜻입니까? 도망치는 것도 구원 받을 성도가 갖추어야 될 소양에 해당됩니다. ‘내가 목숨을 바쳐서라도 주님을 지키겠습니다.’라는 이야기를 베드로가 할 때 본인은 진심으로 한 이야기입니다. 인간은 진심을 몰라요. 즉 자기가 누구인지를 몰라요.

그러면 내가 누구인지를 알아서 구원 받습니까? 아니죠. 끝까지 나는 내가 누구인지를 모르는 채 천국을 간다는 것이 예수님 말씀입니다. 참 신기하지요? 내가 반듯하게 살고, 절제하고 조심해서 행동해야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성도다운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주님은 전혀 달리 말씀하십니다. ‘네가 네 자신을 모르니까 그런 소리를 한다.’

예수님은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어김없이 다 이루리라(마5:18)’고 하셨는데, 이게 무슨 의미입니까?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고 우리에게 주신 말씀 같은데 사실은 그것이 아니고 예수님 본인이 그 말씀을 가로채는 거예요. 옛날 아이들이 갖고 노는 장난감 중에 호루라기처럼 된 것인데 훅 불면 펴졌다가 다시 감기는 것이 있었어요.

주님이 주신 모든 말씀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해라.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리를 동행하고, 돈을 빌리려고 하는 자에게는 그저 주어라.’ 등등 이런 말씀을 들을 때 우리는 착시 현상을 일으킵니다. 이 말씀을 내가 지켜야 될 숙제처럼 여기는데 사실 그것이 아니라 장난감 호루라기처럼 말씀하신 그분에게 되돌아와 십자가에서 다 이루십니다.

9월 5일 미국에 가는데, 그곳에서 강의할 주제는 ‘복음이 무엇인가?’ 본문은 요한 1서입니다. 예수님이 내뱉은 말씀을 예수님이 알아서 다 이루는 것이 복음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착시현상을 일으켜서 이 말씀을 내가 지키려고 하지요. 지난 수련회에서 ‘시차적 관점’을 말씀드리면서 어려워서 지구의 공전으로 설명했어요.

지구는 태양 주위를 도는데 시계 반대방향으로 돕니다. 돌 때 지구 가까이에 별이 있다면 이 별은 청색 편의가 일어납니다. 그러나 멀어질 때는 적색 편의가 일어나요. 이것을 도플러 효과라고 합니다. 베셀이 이것을 증명함으로 지구가 공전한다고 주장했어요. 태양이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는 것 같지만 이것은 겉보기 운동이고 실제로는 지구가 태양을 도는 거죠.

이처럼 예수님이 말씀을 하실 때 시각적 차이가 나는 거예요. 예수님이 보는 시각과 우리가 보는 시각이 달라요. 우리는 예수님 말씀을 지켜서 따라붙으려 합니다. [헨젤과 그레텔]이라는 동화가 있어요. 계모가 아이를 쫓아내니까 아이가 돌멩이나 식빵을 던져놓았기에 그 흔적을 보고 집을 찾아오지요.

사람들은 어떤 착각을 하는가 하면, 거룩한 하나님이 거룩한 말씀을 주셨기에 이 말씀을 지키는 분량에 따라서 점점 더 자기의 착함이 커진다고 생각합니다. 이게 오해란 말이지요. 그렇게 생각했던 사람들이 바리새인이었고 유대인들인데 예수님은 이들에 의해 죽임 당했습니다.

카스트 제도에서 제일 바닥에 있는 자들이 수드라입니다. 예수님은 높은 계층이 아닌 제일 낮은 계층으로 오면 어느 쪽이 거룩입니까? ‘잘 지켰다.’가 거룩이 아니고 ‘저는 못합니다.’ 이것이 거룩이란 말이죠. 자아를 버리란 말이 아닙니다. 인간은 자아를 못 버립니다. 도를 닦아 자아를 버렸다는 것은 자아 2를 버렸다는 것입니다. ‘나는 부족합니다.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하는 것은 자아 2가 자아 1의 조종을 받아서 연출하는 거예요.

자아 1을 버리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인데 이것은 버릴 수가 없어요. 인간의 자아는 예수님의 자아와 어떤 대립관계에 놓여 있는가를 안다면 너는 천국 관계망 속에 들어온 자라는 것입니다. 내가 착하면 착할수록 주님의 값없이 주시는 용서가 모독 받는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더 이상 먹는 것, 입는 것 염려할 필요 없다는 겁니다.

천국 갈 때 돈이 있어야 들어가는 곳이 아니잖아요. 미모로 들어가는 곳이 아닙니다. 착한 것 모아서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스스로 잘났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아 1을 숨기기 위한 위선적인 행동을 괜찮은 자아 2로 조작한 것입니다. 조작할 때 모델이 있는데, 그 모델은 역사에서 수집합니다. 역사적 인물 중 괜찮을 사람을 본받으려고 합니다. 토마스 아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라는 책이 있어요. 기독교인이 읽어야 할 필독서처럼 되어 있어요.

이것이 뭔가 하면, 내가 아닌 내가 되려고 꼼수를 부리는 거예요. 사람은 평생 살면서 입에서 거짓과 사기만 나온다고 보시면 됩니다. 왜냐하면 세상 자체가 자본시장이고, 여기에 각자 자신의 점포가 있어요. 점포는 손님을 기다립니다. 손님은 돈을 가지고 오고.

“저 어떻습니까?”라고 마치 창녀촌에서 창녀들이 화장을 하고 자기를 선택해 달라고 유혹하는 것처럼. 우리는 창녀를 욕하지만 어떤 의미에서 창녀는 자본주의 원리에 충실하고 있는 거예요. 돈을 위해서 나의 전부를 바치는 거예요. 자본주의의 민낯을 최전선에서 가장 노골적으로 보여주는 모델들이 창녀입니다.

‘제 몸 하룻밤 가지시고 돈 주세요.’라는 창녀나, 롯데 그룹의 2인자로 비자금 마련한 사람이나 다른 게 뭐가 있어요? 인간은 모두 이 범주에 속해 있습니다. 자본주의 시장에서는 돈이 권력입니다. 제가 수련회에서 마태복음 강의한 것을 책으로 내려고 제목을 ‘지극히 작은 권력’으로 정했는데, 제목이 너무 길다고 압력이 들어와서 ‘미미한 권력’으로 바꿨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아무런 권력이 없었어요. 빌라도가 하는 말이 “내가 당신을 풀어 줄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다.”고 할 때, 예수님 하신 말씀이 “위에서 주지 아니하시면 나를 해할 권세가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원하는 권력은 자아 1을 감추고 자아 2를 드러내기 위한 것인데, 교체되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와서 우리를 덮쳐서 교체하고 천국 백성 만드는 일과는 정 반대의 모습입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을 사형시킬 때 자기 부인이 꿈자리가 시끄럽다고 벌벌 떨었어요. 최고의 권력자가 두려워 떤다는 말은 자아 2가 날아가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 상태에서 예수님 앞에 서니까 자아 2는 부끄러워서 숨고 자아 1이 표면이 등장하지요.

주님은 이것을 원하십니다. “어찌할꼬--” 권력이나 돈이 있더라도 이것은 나를 감추기 위한 방패요 가면이고 실제로 나는 겁도 많고 두렵습니다. 라고 할 때 ‘네가 온 천하를 얻고도 네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말이 비로소 납득이 됩니다. 주님은 온 천하를 얻는 권력(자아 2)을 보는 것이 아니고, 그 밑에 숨어서 ‘이것만큼은 아니 되옵니다.’하고 벌벌 떠는 것 있잖아요.

이 도령이 춘향이에게 ‘우리 이 밤을 함께 지내자.’라고 하면 춘향이는 ‘아니 되옵니다.’라고 하잖아요. 이처럼 우리가 ‘이것만큼은 못 내놓겠습니다.’ 라는 것이 있을 거예요. 그것 내놓지 마세요. 율법은 ‘아니 되옵니다.’라는 것까지 찾아와요. 그러면 우리는 율법 앞에서 저항하고 반항하지요. 주님은 우리에게 이것을 찾으려고 하십니다.

과학수사대는 범인의 지문이나 증거를 찾지요. 주께서 말씀을 주신 것은 우리에게 착한 인간으로 달라지라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반항하고 저항하는 그 요인이 누구인가를 들춰내는 것입니다. 나도 몰랐던 나의 자아, ‘에고’라고도 하는데, 에고는 슈퍼에고와 이드가 중재해서 그때그때 만들어 내는 것이 에고입니다.

이드(동물적인 욕망)와 슈퍼에고(윤리, 도덕)가 내 안에서 그때그때 균형을 맞춰 에고(자아)를 만들어 냅니다. 그래서 이 자아는 결국 우리가 못 버리기 때문에 예수님의 복음에 대해서 강력하게 저항하게 되어 있습니다. 저항하는 그것이 진짜 우리 자신의 모습입니다. 그것을 드러내도록 하려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 말씀을 주신 겁니다.

베드로는 이 말씀을 듣고 주님께 순종했습니까? 아니죠. 배신했어요. ‘목자를 치니 양이 흩어지더라.’ 나는 양이라고 하지 마세요. 도망갈 때 양이 됩니다. 우리는 아직 도망치지는 않았잖아요. 그럼 아직 양이 안 된 겁니다. ‘나는 내 것 가지고 평생 살래요. 따라오지 마세요.’하고 도망칠 때 이것이 바로 12제자가 보여줬던 가장 양다운 모습이고, 이것이 성경에 기록되었다는 말은 어떤 인간도 제자들이 보여준 행동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제자들이 구원 받았다면 너희들도 충분히 구원 받을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본문에서 하신 이야기입니다.

10분 쉽시다.

(2016. 9. 8. 09:34 녹취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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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