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20160812b히12장 9절(관계)-이 근호 목사
안양20160812b히12장 9절(관계)-이 근호 목사자,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아까 끝에 시간이 지나서 자세히 못했습니다만, 거룩함을 좇으라고 할 때, 방법은 예수님처럼 살면 된다. 그게 거룩함을 좇는 거예요. 거룩함 하면 뭐 주기철 찾고 손양원 찾고 하지 마시고, 테레사 수녀 찾지 마시고, 성경에 나오는 예수님 계신데 왜 자꾸, 사도바울 있는데 왜 그런, 역사적인 인물을 찾는지, 그건 참 잘못됐어요. 예수님의 거룩함은 뭐냐 하면 하나의 희생의 삶이었습니다. 희생의 삶이라고 하면 너무 추상적이잖아요. 그럼 뭐냐 하면 손해 보는 거예요. 해놓고 이익을 못 보는 것. 거룩은 대가를 노리면 안 된다는 거예요. 대가를 노리면. 대가를 노리면 이건 아주 음흉한 것이고, 장사속이고, 꼼수가 되는 겁니다. 거룩했으니까 30배 내놓으세요. 이거는 거룩을 모독해도 가장 극단적으로 모독한 것이 그걸 걸요. 착한 일 했으니까 뭐 내놔라. 부모가 자식 키워놓고 내가 우에 키운 자식인데, 근본도 없는 것이 어디 감히 내 아들을 넘봐? 봉투 받고 애 지우고 유학 가든지. 이런 것이 막장드라마에 나오듯이. 어딜 감히 내 아들 내가 어떻게 키웠는데 니가? 자식을 참 거룩하게 키웠습니까? 결국 뭔가 괜찮다고 여기는 그것을 사수하고 방비하기 위해서, 주변의 모든 것을 강하게 밀칠 때, 그 안에 담긴 것은 결코 거룩이 될 수 없습니다. 정말 좋은 것은 나누어줘야지. 내가 이 정도 의롭고 이 정도 착한데, 어디 더러운 것들이 내 착함에다가 흠집을 내고 손때를 묻혀? 이거는 전혀 예수님이 생각한 거룩이 아닙니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종교의 거룩은 뭐냐, 니가 훌륭한 것을 대외적으로 알려라. 이게 거룩의 동기유발 되었어요.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신이 신앙인 것을 거룩을 통해서 표방하세요. 그럼 이거는 경쟁적이죠. 난리도 아니죠. 자, 정리해봅시다. 거룩은 희생이다. 희생은 누구의 손해? 예수님의 손해 보심. 예수님의 손해 보심이죠. 근데 우리들의 평소의 육적인 모습은 뭡니까? 우리는 우리의 잘남을 조금이라도 건지기 위해서 손해 보기는 커녕, 절대로 손해 보는 장사는 안 하겠다는 거죠. 그럼 이 거룩은 두 개의 대립이 되어 버려요. 뭐냐 하면, 손해 보는 결과의 거룩이 있는 반면에, 이 거룩을 빙자해서 이익에 이익을 창출하는 거룩이 있겠죠. 이 두 개의 거룩이 충돌하는 겁니다. 충돌하는데, 징계를 받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나는 거룩함을 통해서 세상 것을 뭔가 소득으로, 반대급부로 얻고자 하는 이 거짓된 거룩에 진짜 거룩이 찾아오게 되면 여기서 무엇이 발견되느냐 하면, 미안스러움이 생기고, 미안스러움은 이게 감사로 이어집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꼼수를 가진 것을 주께서 이렇게 들통내주시니 감사합니다. 인생 자체가 꼼수와 꼼수의 연결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가신 길은 어찌 우리와 다른지요? 손해보고, 손해보고, 결국 마지막 자기 생명까지 죄인을 위해서 아낌없이 내어주신 이가 어찌 우리를 구원하지 않겠느냐? 하나님 보시기에 소중한 것은 우리가 기대한 이익이 많은 게 아니라, 주의 희생이 담겨있을 때, 우리는 거룩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땅! 땅! 땅! 하고 판정받게 되어 있습니다. 나로 인하여 주께서 손해 보셨다는 사실을 품고 있을 때, 우리는 거룩을 품고 있다고 보시면 이거는 정답입니다. 내가 이만큼 착하다고 품고 있으면 그거는 거룩을 빙자한 마귀의 생각을 품고 있는 중입니다. 이렇게 할 때, 거룩을 가는 길은 의외로 굉장히 어려운 길이 아니고 무지무지하게 쉽죠. 그냥 못난 놈이라고 자신을 바라보면 그게 성령의 열매고 그게 거룩입니다. 온유와 화평과 자비와 양선. 거룩을 하라고 하니까 갑자기 헌금내고, 돈을 다리미로 다려서, 다리다가 태우고, 뭐든지 깨끗한 것, 내가 얼마나 깔끔 떨고, 경건스럽기 짝이 없고, 얼마나 남한테 흠도 티도 없이 완벽한 삶을 추구하는지를 대외적으로 알리는 것, 그거는 거룩이 아닙니다. 항상 손해봐요. 15절 봅시다. “너희는 돌아보아 하나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두려워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고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러움을 입을까 두려워하고 ” 16절,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 이것은 뭐냐 하면 쉽게 말해서 돌아보라. 돌아보게 되면 뭐가 있어요? 없어요. 이미 얻었기에 미안함을 가지고 주위 사람을 한번 돌아보라. 그것은 바로 손해 보는 짓을 하라. 이 말입니다. 또 다른 말로 하면 실패하는 짓을 하세요. 이게 이미 거룩한 사람의 본분입니다. 그러면 인간을 가만히 보면 두 개의 인생밖에 없어요. 하나는 뭐냐 하면 실패하기 위해서 사는 인생이 있는 반면에, 실패는 때려죽여도 싫고 어떤 경우에도 성공하기 위해서 사는 인생. 이 두 종류의 인생이 있겠죠. 인생의 질이 다르겠죠. 그럼 모든 인간은 어느 쪽이겠습니까? 손해 볼라고 하겠습니까? 이익 보려고 하겠습니까? 이익 볼라고 하죠. 그래서 여러분들이 복음 전할 때, 그 사람에게 화를 내는 이유가 그것 때문에 그런 거예요. 어떤 다른 사람이 나한테 “이래서 당신한테 이익입니다.” 라는 소리를 듣게 되면 그렇게 화를 내지 않아요. 근데 잘난 나를 폄하하고, 잘난 나를 개 무시하면 그게 예수 소식이고, 십자가고 뭐고, 무슨 소식이고 간에, 그런 것 가리지 않고 우악하고 달려들어서, 꼭 짐승처럼 이빨로 물어 죽이고 싶은 충동을 가지고 우악하고 달려드는 것을, 그것을 시선을 통해서 알 수 있어요. 시선을 통해서. 그러니 세상사람 판단하는 것, 의외로 쉬워요. 그냥 판단하면 안 되고요. 살짝이 복음만 달랑 던져주세요. 던지게 되면 내가 뭐가 못나서? 내가 미쳤나? 내가 왜 손해 보는데? 나는 평생가도 남한테 내가 손해 보는 짓은 한 적이 없다. 특히 가부장적인 아버지 같은 경우는, 이거는 뭐 허세만 더덕더덕, 평생을 허세로 시작해서 허세로 말미암아 허세로 끝나는. 옛날 그 아버지들, 아버지상. 그래서 가정에서 아버지 권위가 산다나? 만다나? 뭐 그런 사고방식가지고. “내가 어때서?” “아버지 이제는 좀 놓으세요.” “내가 뭘 손을 놔?” “제발 어머니한테 좋은 말 해주시고..” “남자가 하늘같아야지. 가정이 권위가 서지. 그래, 니 엄마한테 자주 가? 꼴좋다. 집구석 잘도 돌아가겠다?” 이걸 세상에 구십 될 때까지 계속해서 반복하고 또 술 한 잔 먹으면 그걸 곱빼기로 하고. 계속 듣는 거예요. 계속. 얼마나 진짜 안에 들은 것이 없으면 했던 소리 또 하고 그런 소리 하겠습니까? 자, 그럼 남은 문제는 하나죠. 아무도 손해 볼 사람 없습니다. 근데 예수님 혼자 손해 봤어요. 그럴 때, 그럼 나는 어떻게 합니까? 라는 질문 자체를 하지 마세요. 나는 어떻게 합니까? 라는 질문 자체가 참 우스운 질문이에요. 뭐 정답이 이거라고 한다고 해서 할 거예요? 그런 말 없잖아요. 손해 볼 것 같아 절대로 할 생각이 없다면 나는 어떻게 할까요? 묻지도 말아야지. 그렇잖아요? 목사님 어떻게 하면 됩니까? 어떻게, 제가 알려드리면 그대로 하려고요? 내가 조금이라도 손해 날 것 같으면 할 위인들이 아닙니다. 묻기는, 뭐 그렇게 자꾸 묻는다는 말은 할 생각도 없으면서 묻는 것으로 좀 착한 것으로 때워 달라, 봐 달라 하는 그런 생각이겠죠. 자, 그러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하느냐, 주께서 끝까지 손해 보시면 되는 겁니다. 우리는 내 이익밖에 모르고, 나는 남한테 지기 싫어하고, 그러면 손해 보는 쪽은 누구만 손해 봐요? 주님만 손해 보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의 십자가를 함부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서 늘 주님은 나한테 학대당하고 나한테 개 무시당하고, 믿는다는 나부터 주님을 천시하고, 아무것도 아닌, 약간의 가치는 있겠지만, 그다지 가치를 두지 않고 평소에 살아가는 우리의 일상. 그게 주의 거룩만 담기는 그릇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또 나와야 해요. 우리는 죄밖에 할 수 없는데, 주의 은혜가 담기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주님께서는 그 그릇을 뭐로 바꾸느냐, 그릇 자체를 거룩한 그릇으로 바꾸어버립니다. 주께서 하셨어요. 어차피 거룩을 담아봐야 우리한테는 담기지도 않아요. 우리는 손해 보는 짓은 안 하기 때문에. 한 번 정리해봅시다. 우리는 손해 볼 짓을 안 합니다. 주께서 지시하면, 그거 하면 뭐 해줄 건데요? 그거 하면 내가 원하는 것 해줄 거예요? 항상 이래요. 기도하라. 기도하면 내 소원 들어 줄 거예요? 성경 봐라. 성경 보면 내 소원 들어 줄 거예요? 항상 뒤에 말을 안 해도 그게 붙어 있어요. 이 그릇 자체가 문제가 있습니다. mbc뉴스에 보면 스마트 살림이라고 살림지혜 같은 것을 모아서 알려주는 것이 있어요. 그 중에 보면 수박화채를 먹다 보면 처음에는 시원하다가 한 5분도 안 돼서 수박도 뭐 물러버리고 온도 높아져서 맛이 밍밍하고 그렇잖아요. 그럴 때, 수박을 계속해서 시원함을 유지하는 생활의 Tip, 생활 정보, 그거 알려 드리겠습니다. 이 그릇을 얼음그릇으로 바꾸는 거예요. 큰 그릇을 일단 준비하시고 그 다음에 물을 붓고 거기다가 작은 그릇을 그 안에 넣어요. 큰 그릇 밑에다가 꽃잎이나 과일 같은 것을 넣게 되면 나중에 무늬 있는 그릇으로 예쁘게 나옵니다. 그걸 4시간 동안 냉동실에 넣어두게 되면 나중에 안에 작은 그릇만 떼 내면 되거든요. 특히 화채 그릇은 되지만 냉면 그릇은 아주 일품입니다. 팁 하나 알려드렸습니다. 다 알고 있지만. 남자로서는 몰랐는데 이제 알았습니다. 그릇 자체를, 내 인생이 아니고 주의 인생으로 바꾸는 거예요. 그럼 어떻게 바꿀 수 있느냐 하면, 주님이 죄인으로 죽었잖아요. 의인이면서도 죄인으로 죽었잖아요. 그렇다면 십자가를 증거 하는 내 인생이 돼버리면, 그때부터 내가 이익 본다든지, 내가 손해 본다든지, 라는 그러한 판단은 더 이상 붙일 자리가 없고 날아가 버립니다. 사람이 이익을 봐도 불안해요. 왜? 이 이익이 언제까지 갈 것인지 불안하고. 손해 보면 자존심 상해서 또 손해 봐. 그러니까 아예 처음부터 이 그릇을 주님의 얼음그릇으로 바꾸는 거예요. 주님의 말씀을, 주님의 그릇이 되어서 바꾸어져 버리면, 이래도 주의 은혜입니다. 저래도 주의 은혜입니다. 그걸 바로 15절에서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두려워하라” 그런 사람을 살펴보면서 니 그릇은 얼음그릇인지 한번 살펴보라 이 말이죠. 하나님의 은혜의 그릇인지 니가 살펴보라 이 말입니다. 이게 거룩적 환경이라는 거예요. 거룩적 환경. 이게 뭐냐 하면 니가 잘하라고 하지 말고 그릇만 바꾸면 되는데, 내가 잘하라고 한다면 어떤 오류에 빠지는가 하면, 지금은 몸 건강하고 돈 좀 있어가지고 누굴 도와주면 뭔가 으싸으싸 착한 일 한 것 같지만, 만약에 내 몸이 아프면, “집사님. 아이구 몸이 아파서 귀찮고 전화도 일찍 끊읍시다.” 이래 될 수도 있어요. 몸 아프고 돈 없으면, 또 돈도 없어서 못 도와줘서 미안하고, 미안하면서도 돈 좀 있는 것 빼앗길까 생각하면 다행스럽고. 이런 생각이 들겠죠. 그러니 내가 뭐 한다는 자체가 아무리 해줘도 뒤에 뭔가 잡음이 많이 끼어들어요. 쓰레기 같은 게 착한 일 해놓고 많이 끼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주의 취지를 몰라서 그래요. 여러분, 왼손이 모르게 하고 오른손이 모르게 하라는 말은, 왼손이 했든, 오른손이 했든, 그건 니가 한 게 아니라는 거예요. 그걸로 깔끔하게 정리가 돼요. 내가 누굴 도와주는 것도 내가 한 것이 아니라 주께서 시켰다. 이렇게 하면 될 문제를, 내가 오른손가지고 참외를 들었다. 왼손아 니 뭘 들었는지 모르겠지? 왼손을 뒤로 감춘다고 이게 모를 수가 있겠어요? 산상설교는 니 그릇을 바꾸는 이야기입니다. 그릇 바꾸는 스마트한 하나의 정보에요. 그래서 산상설교에 이런 말씀이 나와요. 맹세하지 마라. 니가 이 세상에 기여한 것이 뭐가 있다고 니가 건방지게 맹세를 하느냐? 니 맹세에 해가 따르고 별이 따르고 달이 따를지 아느냐? 니 맹세에 저 들풀이, 저 대자연이, “아이구, 형님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 이렇게 따를 줄 알아? 자연세계는 주의 맹세만 따르지 니 맹세 안 따르거든요. 그런데 우리는 왜 자꾸 맹세를 해가지고, 맹세의 급을 높여요. 내가 제단에서 하는 것이 아니고 제단에 있는 금을 가지고 하고, 성전 전체를 두고 맹세한다. 주님께선 맹세하는 자는 나밖에 없으니까 그런 내 밑에 있는 것들에 맹세해봐야 그거는 씨알도 안 먹힌다 이 말이죠. 검증받은 자가 와야 되지, 뭐 검증받지도 않은 사이비가 와가지고 검사하겠다고 하면 그 대자연이 아이구, 형님! 하면서 받아주겠습니까? 자격 없는 사람이 여러분들을 부정하고 여러분들을 공격할 때, 너무 마음 쓰지 마세요. 그 사람들은 심판할 권리와 자격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자격증, 로스쿨도 안 나온 사람들이에요. 자, 그런데 그 다음에 봅시다. 16절에 보면,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 에서이야기가 여기서 등장 합니다. 에서이야기. 에서이야기가 하나의 언약을 위해서 설명이 필요합니다. 어제 수요일에 이야기한 건데, 수요일에 시간 가서 빨리 했는데 천천히 해봅시다. 이삭의 장자가 결국은 누가 되느냐 하면 야곱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어차피 장자가 마지막에 야곱이 될 것 같으면, 일을 복잡하게 만들 것이 없이 처음부터 야곱이 쌍둥이였을 때 먼저 태어나서 그냥 계속 가면 되잖아요. 처음부터 10점, 10점, 10점 쏴가지고 상대방 기 팍 죽이고, 6대 0 만들어 놓고 마지막에 10점 쏘면 되잖아요. 양궁 기보배 동메달 딸 때처럼. 줄곧 우세함을 보이면 되잖아요. 이게 더 속 시원한 하나님답지 않습니까? 왜 그런데 분명히 장자라고 떠벌려 놓고, 장자를 완전히 이 자리를 비워 놔버려요. 장자를 비워놓고 이 자리에 장자 아닌 자를 집어넣어 버리면, 이 장자였던 사람은 장자였던 자리가 박탈당하고, 장자 아닌 자는, 웬 떡이고? 하고 되게 좋아하겠죠. 이 언약 구조가 뭐냐 하면, 천국 갈 잘난 사람 손들어 보세요. 하면 잘난 사람들이 줄 쫙 설 거 아니에요? 제일 앞에 누가 있고? 바리새인이 있고. 바리새인, 사두개인 줄 쫙 선 다음에, 우리는 뭐 앞에 줄도 안 보여요. 밤 새면서까지 줄 서도 앞줄은 보이지도 않아요. 그래서 주님께서 줄 세워놓고,, 앞에 주님이 있다고 치고 제일 첫 번째 바리새인 있고, 사두개인 있고...착한 일 한 사람 있고, 쭉 있는데, 주님이 앞쪽에 있는 것이 아니고, 죄인으로 왔단 말이죠. 죄인으로 와서 뒤쪽으로 오니까, 누가 와요? 천하에 세리와 창기가! 주님이 잘난 사람 앞에 섰을 때는 몰랐는데, 바로 내 앞에 서버리니까 어쩌면 나하고 그렇게 가장 밀착된, 가장 가까이에....,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온 거예요. 주님께서 자리를 바꿀 때 그냥 바꾸는 것이 아닙니다. 의인이면서도 뭘로 바꿔요? 자체에서, 아버지에 의해서 죄인이 되신 거예요. 아버지께 버림받을 정도로 저주 받을 죄인이 되신 겁니다. 그러면 이 죄인 된 예수님과 구원받은 이 죄인 사이에 공통점은 뭐냐 하면 바로, 이 죄가 둘 사이를 이어주는, 태엽을 감아주는, 공통점이 뭐냐, 죄 이야기입니다. 죄 이야기.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 에서가 망령되었다는 말은, 에서는 내가 배고파서 팥죽을 먹은 그것은, 현재 나의 상태는 유지되면서 팥죽+팥죽, 팥죽에 팥죽 하나 더 보탠다는 생각을 하며 사는 거죠. 나는 건장하고, 나의 장자 된 신분은 끄떡도 없는 거고, 왜냐하면 팥죽과 장자를 바꾼다는 말은 말이 안 되거든요. 오히려 팥죽과 장자를 바꿀래? 하는 저 동생의 생각이 터무니없는 생각이죠. 신기하죠? 장자와 팥죽 한 그릇을 바꾸면, 진짜 그게 사실이라면 사람은 못 삽니다. 왜냐하면 아침에, 점심에 죽이 그릇에 담기게 되면 이걸 몇 그릇을 먹어야 바뀐 장자를 또 바꿀 수 있는, 몇 그릇이 되는 거예요. 이걸 먹었으면 팔았잖아요. 판 것을 또 먹으면 또 팔았으니까 둘째가 되니까 또 첫째가 될 가능성이 있고 또 첫째가 되면 또 뭐가 되고? 둘째가 될 가능성이 있고. 평생 팥죽 먹다가 볼일 다 봐요. 바꿨다, 바꿨다, 또 바꿨다.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되고, 먼저 된 자가 되었다는 이유 때문에 나중 되고, 나중 되었다는 이유 때문에 또 제자리를 찾아가고. 찾아가다보니까 거기 먼저 된 자가 또 나중 돼야 되고. 이거 장난치는 것도 아니고, 이고 뭐예요? 중간에 뭐가 끊어줘야 되는데. 잠언서에 보면 겸손하면 높임을 받는다고 했죠. 그럼 겸손했습니다. 그 다음에 졸지에 뭐가 돼요? 높은 자 됐죠? 높은 자 됐으니까 이건 또 교만한 겁니다. 낮은 자가 겸손한데 니는 높임을 받았으니까 이게 또 겸손 안 한 게 돼요. 이게 교회에서 쉬쉬하지만, 이게 이천년 교회역사동안 한 번도 품귀현상이 없는 딜레마 같은 거예요. 사랑을 베푸시면 여러분 겸손해야 합니다. 겸손하시면 성화됩니다. 이게 앞뒤가 안 맞는 게, 겸손한데 성화된다는 말은, 성화라는 것은, 거룩 이라면 남한테 못지않게 선두를 달린다는 이 말 아닙니까? 선두를 달리면 겸손이 아닌데? 겸손하면 진짜 겸손해야 되죠. “저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니라고 한다면 주께서, “그래, 니 말 맞다. 아무것도 아니구나.” 또 이러면, 이 소리 들을까봐 겁나서 또 아무것도 아니라는 소리를 못해요.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게 되면, 눈치껏 주께서, 아이구 착하다고 건져주면 이게 앞뒤가, 주님하고 손발이 맞아야 돼요. 주님하고.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면 “아무것도 아니니까 보낸다.” “이야기가 다르잖아요?” “뭘 이야기가 달라? 아무것도 아니라며?” “아무것도 아닌 것을 복 준다고 했잖아요?” “니는 그런 뜻으로 알았어?” “그럼 아무것도 아닌 것을 복 한 번 줘 볼까?” 복 줘놓고 하는 말이 “먼저 된 자가 나중 된다.” 하면 이게 마찬가지라니까요. 그 자리 오래 유지하지도 못해요. 또 내려와야 해요. 이 문제 예상외로 간단한 문제가 아니죠. 팥죽문제가.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야곱과 에서사이에 그 장자의 자리를 비워놓아야 됩니다. 제가 하나님의 수법을 말씀드립니다. 일단 장자의 자리를 비워놓아야 해요. 장자의 자리가 뭐냐 하면 이게 복 받는 자리입니다. 복 받는 자리를 비워놓아야 한다는 말은, 야곱이나 에서도, 그 누구도 탐낼 수 있는 자격자가 되지를 못해요. 야곱은 탐내서 문제고, 에서는 가졌다고 여겨서 문제가 된 거예요. 둘 다 나가 있어! 둘 다 꺼져야 돼요. 아주 어렵게 이야기하겠습니다. 자, 여기 빵이 있잖아요. 엄마가 빵을 사왔어요. 사왔는데, 형제가 세 명이 있다고 치면, 빵을 누가 봤느냐 하면, 엄마가 빵을 사왔다는 소리를 듣고 찾아낸 사람은 둘째아들, 셋째아들이 이걸 발견했어요. 있는데, 그때 형이 학교 마치고 늦게 마치고 마지막에 들어왔어요. 근데 평소에 형의 행세를 아는 동생들이, 형이 있어봐야 빵 한 조각 안 돌아옵니다. 저리가! 하면서 빵을 지 혼자 다 먹는 것을 아니까. 어떻게 하느냐 하면 빵을 가려버리죠. 거기서 노는 거예요. 그럼 형이 와서 “야야, 왜 거기서 노는데?” “으음~나는 평소에 여기가 좋더라.” 자꾸 하죠. 이게 뭐냐 하면 우리가 구원받기 위해서 자꾸 시도를 하는데, 정작 정말 십자가를 누가 가리느냐 하면 우리 자신의 착함, 말씀 지켜서 얻고자 하는 어떤 꼼수, 지켰으니까 반대급부적인, 이게 정말 주께서 사랑으로, 선물로 그냥 주신 것을 우리는 자꾸 행함으로, 내 대가를 치르고 얻으려고 하는 그 행세가, 이게 에서고 이게 야곱 같은 육적인, 둘 다 똑같아요. 에서나 야곱이나 둘 다 똑같은 육적인 이 모습입니다. 애가 시험 친다, 대번에 떠오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여, 제가 하나님께 뭘 해드리면 되겠습니까? 우리는 당연한데, 성경은 그게 터무니없다는 거예요. 팥죽 줬는데 장자가 바뀐다, 그런 아이디어도 터무니없고. 웃기네! 하고 그래도 장자는 그대로 있거든. 하는 에서의 생각도 터무니없고. 하나님의 보시기에 둘 다 터무니없고. 그런데 인간이 아는 것은 터무니없는 그거 밖에 모르고. 그래서 성경의 핵심은 뭐냐, 십자가는 아무도 몰랐다. 이게 성경핵심입니다. 십자가는 사전에 누구도 몰랐다. 이거는 베드로도 몰랐어요. 그래서 자기 목숨 바쳐서 천당 가려고 하는데, 천국은 도리어 목숨 바치는 행위로 가는 곳이 아니에요. 그냥 있어. 내가 다시 성령가지고, 처소가 마련되면 내가 너를 찾아오는 식으로 건져주겠다는 겁니다. 이게 요한복음 14장에 나오잖아요. 제가 이 말을 안 했겠어요? 제가 전에 이 말을 대구 대덕교회에 있을 때 요한복음 강해를 했거든요. 하니까 장로들이 화를 내는 거예요. 가만있고 주께서 찾아와서 구원한다면, 만일 가만히 있는데 안 찾아오면 그럼 우리교회 한 명도 구원 못 받으면 당신이 책임 질 거야? 이런 식으로 나오는 거예요. 그 장로들은 뭐냐 하면 터무니없는 것은 안 믿겠다는 거예요. 그럼 저의 생각은 뭐냐, 터무니없는 것이 복음이고, 그게 안 믿어지면, 솔직하게 “나는 복음이 안 믿어집니다.” 이야기만 하면 된다는 거예요. 지옥 가더라도 그런 솔직함을 드러내고 지옥가라 이 말이죠. 안 믿어진다고. 그래서 갈라선 거예요. 갈라선 게 아니죠. 그냥 추방된 거죠. 그때부터 교단에서 이근호 목사는 이상한 사람이다. 사람이 설득 될 소리를 해줘야 꼬셔서 교회 다닐 텐데, 왜 터무니없는 이야기를 해가지고, 기도도 열심히 하는 사람들, 헌금도 열심히 하는 사람들, 안식일 지키는 사람들, 직분 감당하려고 하는 사람들, 이거 뭐 워워?~~하는 식으로, 왜 그렇게 하느냐? 그게 오해거든요. 저는 하시라 이 말입니다. 하시면서 그게 왜 구원하고 상관없는 것을 아시라 이 말이에요. 근데 그 이야기가 그들에게는 터무니없이 느껴지는 거예요. 그러면 저는 복음 제대로 전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여러분, 어떻습니까? 성경 볼 때는 다 납득이 되죠. 성경 참 쉽다. 쉬울 수밖에 없죠. 성경 본뜻은 모르고. 아, 이거 행하면 되겠네. 나는 에서처럼 절대로 장자의 명분을 팥죽 한 그릇에 안 팔아야지. 기껏 응용하는 게 뭐냐 나는 장자의 명분을 부패한 것에 안 갚아야지. 이 정도로 응용하는 거예요. 이 정도로. 나는 절대로 뇌물을 내 천국 명분을 안 뺏겨야지. 기껏 응용하는 것이 그거에요. 일반 공직에 있는 집사쯤 되게 되면. ‘아, 에서가 나쁜 짓을 해가지고 세상에! 천국에 못 갔구나. 그럼 내 직장이 나쁜 짓이구나. 내가 세무공무원인데. 세금 깎아달라고 뇌물 주는 것, 이제 예수 믿고 난 뒤에 달라져야지. 이제부터 뇌물 안 받아야지. 뇌물 안 받게 되면 망령된 행동은 안 하니까 나는 구원받겠지.’ 기껏 지 수준대로 응용한다는 것이 그 정도 응용이에요. 그 생각이 잘못된 생각이에요. 성도는 매일같이 터무니없는 것이 샘솟듯이 폭발해야 됩니다. 어떻게? 그냥 집에 가서 한 번 이렇게 생각해보세요. 참, 내가 사는 이 자체가 터무니없다. 이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참 쉽죠. 내가 이렇게 산다는 것이, 내가 아무 탈 없이, 하도 교통사고도 많고 집안의 일도 많으니까, 이렇게 편안하게 있는 것도, 이것은 내 행함의 대가가 아니고, 정말 이거는 터무니없는, 덤으로 복 받고 있다. 이런 생각하시면 되는 겁니다. 그래서 감사가 나오는 거죠. 자, 감사가 나오면, 오늘 본문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감사가 나오면 그 다음에 뭐냐 나오느냐 하면, 감사한 사람의 특징이 뭐냐 하면 성실함이 나와요. 그렇잖아요? 감사하는데. 동서끼리 일하는데, 갑자기 생전 안 하던 젊은 동서가, “형님 제가 할게요.” 이런다면 대번에 큰 동서는 데모합니다. ‘이거 우리 어머니가 뭐 준 게 있어. 분명히 뭐 줬어.’ 감사가 있으면 뭐로 바뀐다고요? 성실함이 있습니다. 감사하면. 그러면 제가 이야기하니까, 사람들은 막 놀면 되겠네요? 하는데, 감사는 고마움으로, 죄인이 구원받은 고마움으로 반드시 성실로 나타나게 되어 있어요. 성실은 뭐로 나타나느냐, 관심으로 나타나요. 세상에 대한 그냥 관심이 아니고 복음적인 관심. 보통 여름에 선글라스 끼잖아요. 복음이라는 선글라스를 끼고 세상을 보는 겁니다. 그러면 뭐가 보이느냐, 에서가 보여요. 에서가 보이고 야곱은 가끔 보이고. 우리끼리는 많이 보이고. 나가면 거의 안 보이고. 사실 야곱도 보이죠. 야곱도 마찬가지로 잘못했으니까. 야곱이 구원받은 것은 이렇게 장자를 노려서 구원받은 것이 아니고, 그냥 예수님이 야곱을 그냥 사랑해서 구원받은 거예요. 여러분들이 그런 논리에 속아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야곱이 구원받은 것은 야곱의 행동여부와 관계없이, 그냥 창세전부터 사랑받기로 작정되었기 때문에 그냥 구원받은 것이지. 야곱이 장자명분을 탐을 내고, 팥죽을 끓여주고, 어떻게 속여서 그렇게 구원받은 것이 아니에요. 그러하고 구원하고 관계없습니다. 다만 주님께서 바꿔치기 할 때 인간이 어떤 조건을 내는 어떤 조건도 주께서는 구원의 조건으로 받아주지 않는다는 것을 증거 기 위해서 야곱이나 에서를 이렇게 이야기한 겁니다. 그 다음에 17절에 보면, “너희의 아는 바와 같이 저가 그 후에 축복을 기업으로 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구하되 얻지 못하였느니라” 그 다음에 뭘 흘렸다고 했습니까? 눈물을 흘리죠. 이게 곡성이에요. 곡성. 통곡. 그래서 천국과 지옥은 가서 맛보는 것이 아니고 지금 이 땅에서 미리 맛보는 거예요. 울고 있는 사람과 웃고 있는 사람으로서 천국의 맛배기를 벌써 우리가 맛보고 있는 거예요. 이 땅에서 천국 맛보면 천국 가고 이 땅에서 지옥을 맛보면 그거 지옥 가는 거예요. 자, 왜 울까요? 개인의 욕심 때문입니다. 내가 가야 되는데, 내가 가야 되는데, 그래서 주님께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마8:12). 이를 간다는 것은 이가 간지러워서 간다는 것이 아니고, 사태파악을 못한 자기에 대한 분노. 이럴 줄 몰랐다. 내가 그 정도밖에 안 되는 인간인지 내가 미처 몰랐다. 근데 백부장은 같은 인간이라도 눈치 챘어요. 눈치가 빨랐던 모양이라. 까라하면 까겠나이다.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겠나이다. 저 군대생활 좀 합니다. 군대식으로 말씀만 하면 가지 말입니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한 거예요. 이게 뭐냐, 독자적으로 살지 않겠다는 겁니다. 독자적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그냥 관계성. 언약이라는 관계성 때문에 늘 마음이 기쁘고 편안하고 그렇다 이 말이죠. 까짓것 실패하면 어때요? 지옥 같은 세상에서 실패했다는 것은 곧 성공을 의미하는데. 그래, 잘 먹고 잘 살아라! 그래. 살만큼 살면 되지. 늘 이런 여유가 자유로써 여러분들에게 주어지기 바랍니다. 물론 눈물을 안 흘릴 수는 없는데, 우리가 눈물을 너무 자주 흘리죠. 눈물을 흘린다는 말은, 세상에 대한 미련이 죽을 때까지 계속 주어진다는 거예요. 그것은 뭐냐 하면 새로움을 나타내기 위해서 옛날, 갖다 버려야 될 육을 주께서 활용해 주신다는 말입니다. 쪼끔 복음 알았다고 생각했는데 또 울 일이 생겨요. 이쯤하면 이제 눈물이 말랐다고 생각했는데 또 눈물나오고. 천하에 냉정을 유지하는 그 사격선수라도 연속 금메달 3개 따니까 남자의 눈물을 흘리고. 남자는 눈물을 세 번 흘리는데, 하나는 뭐냐 하면 태어날 때, 하나는 부모님 죽을 때, 또 하나는 사격 3연패할 때. 뭐 그런 건가요? 나라를 잃을 때 눈물 흘리라고 했잖아요. 초등하교 애들은 게임에 졌을 때 울라고 그런 식으로 바꾸어서 이야기해요. 그 다음에 봅시다. “회개의 기회를 구하되 얻지 못하였느니라” 아, 이거 어렵다. 회개의 기회가 꼭 와야 됩니까? 그냥 생각나서 회개하면 되는데, 회개하니까, 끝났어. 뭐 그런 것이 있어요? 회개의 기회를 얻지 못한다는 말은 회개하는 것도 서류접수 기한이 있었던 모양이죠. 기한 넘어가면 서류접수도 안 되는 모양이라. 그러면 에서가 회개의 기회를 얻지 못했다는 말은, 그 기회가 없다는 말입니까? 야곱이 있을 때, 야곱 앞에서 회개를 했어야 된다 이 말입니다. 이 말은 바로 오늘날 주님이, 주님께서 세상 마지막 끝내기 전에 회개해야 된다. 뭘 회개해야 하는데, 여러분 뭐 나쁜 짓 한 거 있어요? 없잖아요. 독자적으로 내 인생 내가 알아서 꾸려간다는 그것을 회개를 해야 돼요. 왜냐하면 독자적으로 되면 손해 보기 싫어하고, 손해 보기 싫어하면 실패 안 하려고 하고, 실패 안 하려고 하면, 감사가 없고, 고마움도 없고. 용서도 필요치 않고. 지가 알아서 잘하는데 무슨 용서를 해요. 이런 것들이 바로 에서라는 하나의 성질의 다양성이 거기서부터 나왔다고 보면 돼요. 인류를 두 종류로 보면 돼요. 야곱 같은 인간과 에서 같은 인간. 그럼 모든 파생된 인간들은 거기서, 에서의 요소와 야곱의 요소가 파생되어서 모든 인간에게 주어졌다고 보시면 되는 겁니다. 18절을 하기 전에 한 마디만 더 하겠습니다. 아까 감사에서 뭐가 나온다고 했습니까? 성실함이죠. 그래서 아까 14절, 15절, 돌아보라는 것은 전부 다 성실함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그냥 하면 안 되고, 감사한 마음속에서 성실하게 돌아보라 이 말입니다. 자, 그 다음에 18절에 봅시다. “너희의 이른 곳은 만질 만한 불붙는 산과 흑운과 흑암과 폭풍과” 19절, “나팔 소리와 말하는 소리가 아니라 그 소리를 듣는 자들은 더 말씀하지 아니하시기를 구하였으니” 이게 뭐냐 하면 바로 시내산을 그림자로 삼고 심판의 순간을 묘사한 거예요. 그렇다면, 이걸 오늘 강의 제목으로 삼으면 좋겠네. 뭐냐 하면 “저주의 완판” 완판은 다른 말로 완결판. 저주 가운데 가장 악랄한 저주가 어디에 나오겠습니까? 어느 책에 나오겠어요? 바로 성경책에 나와요. 저렇게 잔인할 수가? 라는 잔인의 극한. 그만큼 잔인하다는 말은, 그만큼 하나님이 무섭고 거룩한 분이라는 뜻이에요. 자 이왕 말 나왔으니까, 여러분들이 많이 피곤해하시니까, 설명보다도 저주의 완판이 있는 곳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레위기에 나옵니다. 레위기 26장. 이걸 랩으로 하면 좋고요, 판소리해도 좋고, 랩으로 하는 것이 제일 좋은데, 우리 가운데에 지금 랩을 하는 사람이 없잖아요. 16절, “내가 이같이 너희에게 행하리니 곧 내가 너희에게 놀라운 재앙을 내려 폐병과 열병으로 눈이 어둡고 생명이 쇠약하게 할 것이요 너희의 파종은 헛되리니 너희의 대적이 그것을 먹을 것임이며” 17절, “내가 너희를 치리니 너희가 너희 대적에게 패할 것이요 너희를 미워하는 자가 너희를 다스릴 것이며 너희는 쫓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리라” 지금 랩으로 하는 겁니다. 18절, “너희가 그렇게 되어도 내게 청종치 아니하면 너희 죄를 인하여 내가 너희를 칠 배나 더 징치할지라” 아직 멀었습니다. 판소리에 흥부가라고 있죠. 놀부가 심술부리는 그 대목 있잖아요. 20절, “너희 수고가 헛될지라 땅은 그 산물을 내지 아니하고 땅의 나무는 그 열매를 맺니 아니하리라” 21절, “너희가 나를 거스려 내게 청종치 않을진대 내가 너희 죄대로 너희에게 칠 배나 더 재앙을 내릴 것이라” 22절, “내가 들짐승을 너희 중에 보내리니 그것들이 너희 자녀를 움키고 너희 육축을 멸하며 너희 수효를 감소케 할지라 너희 도로가 황폐하리라” 25절, “내가 칼을 너희에게로 가져다가 너희 배약한 원수를 갚을 것이며 너희가 성읍에 모일지라도 너희 중에 염병을 보내고 너희를 대적의 손에 붙일 것이며” 26절, “내가 너희 의뢰하는 양식을 끊을 때에 열 여인이 한 화덕에서 너희 떡을 구워 저울에 달아 주리니 너희가 먹어도 배부르지 아니하리라” 이거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 다음에 29절 봅시다. “너희가 아들의 고기를 먹을 것이요 딸의 고기를 먹을 것이며” 남의 자식이 아닙니다. 지 자식이에요. 에구에구, 내 딸! 에구에구, 내 아들! 지 자식이라니까요. 33절, “내가 너희를 열방 중에 흩을 것이요” 36절에 보면 “그들은 바람에 불린 잎사귀 소리에도 놀라 도망하기를 칼을 피하여 도망하듯 할 것이요 쫓는 자가 없어도 엎드러질 것이라” 37절, “그들은 쫓는 자가 없어도 칼 앞에 있음같이 서로 천답하여 넘어지리니 너희가 대적을 당할 힘이 없을 것이요” 뭐 그렇습니다. 어떻습니까? 세상에, 이렇게 더운데 밥 먹고 사는 것이 뭐가 잘못된 겁니까? 왜 이런 벌칙들을 준비했어요? 이런 벌칙들을 준비했다는 말은, 니가 하는 행동이 이런 벌칙 받아도 싸다. 그런 뜻이잖아요. 근데 우리는 벌과 우리의 평소 행동과 연결이 안 되죠. 1:1매치가 안 되죠. 우리가 납득이 돼야 되잖아요. 내 행동이 이런 벌 받아도 마땅합니다. 정말 내 자식의 고기를 먹어도 나는 쌉니다. 뭐 그런 게 감이 와야 되는데, 해도 너무 하잖아요. 해도 너무 한 거예요. 뭐 우리가 그리 나쁜 짓 했다고, 평생 시장에서 애 공부시키려고 반찬 장사 하다가 늙어 죽었다. 그게 뭐가 잘못됐습니까? 이게. 제가 한 번 따져볼까요? 그게 바로 배신했던 베드로나 열두 제자나 모든 사람들의 공통점입니다. 주님이 죄 용서한답시고 한 행동이 너무 과격해요. 말로 할 수 있잖아요. 앞으로 잘 하래이~ 니가 반성문 열 장 쓰고. 그 정도만 해도 우리가 짓는 죄에 대해서 충분히 상쇄가 되고, 우리는 그 정도의 죄로 알고 있는데. 그 피 흘리고 그것도 죄 없는, 죄가 있어 피를 흘리면 몰라도, 죄 없는 분이 피를 줄줄 흘리고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남한테 그렇게 착한일 하고 오병이어 베풀고 기적을 행했는데, 근데 피 흘리고 죽을 때에 이 사실을 눈치 챈 사람이 딱 한명 있었으니, 누구냐 하면 옆에 있는 강도밖에 없었어요. 강도가 알았어요. 저 분은 결코 자신의 죄 때문에 죽으신 분이 아니고, 저 분이 지신 다른 죄가 있는데, 그 다른 죄가 누구냐 하면 바로 나 때문에 돌아가신다는 거예요. 그게 세트인데, 나라는 죄인과 그리고 죄 없이 죽는 주님이 한 세트가 되어서 하나님의 나라는 이런 식으로 성립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이걸 강도가 알게 된 거예요. 강도만큼 믿음이 좋은 사람이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요. 정말 이런 믿음만 좋으면 강도짓이라도 하고 싶어요. 정말. 모든 신학에 대해서 전부 다 입 다물라. 모든 신학에 대해서 입 다물어라. 개혁주의 신학이고 천주교고 입 다물어. 이것뿐이에요. 교회 뭐 제직회 몇 분의 일이고, 예배당이 몇 미터고 다 필요 없어요. 딱 이거에요. 십자가가 구원의 능력입니다. 십자가가. 내가 칼빈 신학 나오고, 총신 나오고, 아이구 그런 소리. 내가 목사를 몇 년 했고, 목회를 하고, 뭐 강의를 하고, 어디 미국 가고, 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딱 이겁니다. 십자가의 능력은 미국에 있으나 캐나다에 있으나 어디 있으나. 참 이 소식을 전광식도 알아들어야 해요. 이건 아무것도 아니에요. 인간관계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주와 십자가로 된 이 관계가 거룩이고 이게 의고, 이것으로 구원받지, 인간관계는 그냥 재미나게 사세요. 너무 거기다가, 인간관계에다가 투자는 많이 하지 마시고. 너무 정주지 마시고. 간, 쓸개 다 빼주지는 마세요. 주게 되면 실망만 늘어납니다. 포트폴리오, 너무 한 군데만 투자하지 마시고 분산투자 하세요. 그래서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예수님 없으면 나는 더 이상 살 의미 없습니다. 이게 성령 받은 사람 아니면 아무도 나올 고백이 없습니다. 이런 고백을 할 수가 없습니다. 물론 그 고백이 자주 안 나오고, 한 2초하다가 다시 세상에 파묻히지만. 세상 소음에 다시 묻혀서, ‘내가 지금 뭐라는 거야?’ 하면서 스스로 자기를 부끄러워하겠지만. 이제 아시겠죠. 히브리서 12장 마지막 조금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히브리서 12장에 나오는 그 무서운 이야기는, 무섭다는 것이 아니고 그 무서움이 강렬하면 할수록, 너희에게 오히려 고마움과 고마움을 더 배가할 수 있다는 이 말입니다. 아이고, 고맙습니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근데 그 산이, 시내산이 하나님이 계시는 산이거든요. 얼마나 무서운지 그 누구도 못 올라가느냐 하면, 짐승도 그 산에 함부로 못 올라가요. 올라가게 되면 뭐가 날아와요? 돌이 날아와요. 그 철없는 짐승도. 20절에 “이는 짐승이라도 산에 이르거든 돌로 침을 당하리라 하신 명을 저희가 견디지 못함이라” 그 견디지 못하는데, 우리보고 집합하라는 거예요. 너희들은 그쪽에 살면 안 되고, 세상의 어떤 인간도 감당할 수 없는 그곳으로 너희들이 다 소집통보를 받은 겁니다. 예비군 소집통보 받듯이. 소집된 거예요. 그럴 때, 우리는 뭘 갖고 나가야 합니까? 저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고 하면서 소집에 응해야 돼요. 저 아무것도 한 것 없습니다. 그것이 10장에 나오죠. 10장 27절에서 29절까지 누가 한 번 읽어보세요. 27절,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 28절,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세 증인을 인하여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어요. 두세 증인을 인하여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해요. 불쌍히 여겨준다는 것은 그냥 주께서 에이, 그냥 불쌍히 여겨줄게. 이게 아니라 불쌍히 여겨주는 것도 함부로 아무나 불쌍히 여겨주는 것이 아니다. 이 말이에요. 29절, “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자, 이제 강의를 끝냅시다. 결국 주님께서의 관심사는 어디에 있죠? 우리 구원에 있는 것이 아니고 어디에 있죠? 자기 아들이 흘린 피에 관심사가 있는 거예요. 그것을 저는 뭐라고 했느냐 하면 관계라고 했죠. 관계. 뭐 제목은 관계입니다. 우리는 관계에 있죠. 그러면 우리가 살아가는 것은 그냥 고맙게 여기면 돼요. 주어진 것은 뭐든지 고맙게. 왜냐하면 하나님 보시기에 가장 정상적인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살아도. 목사님 그러지 마세요. 오늘도 실수했습니다. 아니 그게 정상적이에요. 정상적이라고 믿는 것이, 여러분 터무니없죠? 그 터무니없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기위해서 우리보기에 오늘 그런 실수 같은 것도 했고, 남한테 해서는 안 될 그런 말도 한 거예요. 돌아보면 부끄럽죠. 부끄러워야 돼요. 왜? 미안해야 되니까. 하지만 미안하라고 그렇게 정상적인 사태를 일으킨 거예요. 어쨌든, 저쨌든 간에, 우리가 나름대로의 주님의 거룩에다가 내 거룩을 집어넣을 수가 없고, 주님의 의에다가 내 거룩을 집어넣을 수가 없는 거예요. 그저 주의 은혜로 구원받게 되었다는, 그걸 할 때, 누가? 예수님의 피가. 왜? 예수님의 피를 증거 하기 위해서 우리가 구원되었지, 나 구원하라고 피를 준 것이 아니고. 내 구원이전에 주님의 피가 흘렀고, 그 효과로써 구원이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것을, 뭐 주저 말고 싱글벙글하면서 증거 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 제대로 보게 하옵소서. 내 중심, 내 관점 정리하게 하옵소서. 내 중심으로 보다가 주님 중심으로 보면서 계속해서 주님께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