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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서울 의존교회 160610b (경건)-이 근호 목사자유게시판-

서울 의존교회 160610b (경건)-이 근호 목사 자, 두 번째 시작하겠습니다. 다른 것은 다 없어도 된다, 라고 이야기 할 수 있지만, 자기 몸에 대해서는 없어도 된다, 라는 말을 할 수가 없어요. 그런 말 하는 자체가 이미 있기 때문에, 그런 말 하는 자체가 몸이 있으니까 그런 말하잖아요. 사람의 어떤 운명이나 팔자라는 것이 뭐냐 하면, 싫든 좋든 몸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폐기처분 할 수도 없고, 이 몸이 죽는다고 해서, 이 몸이 내 원대로 사라져 줄지 안 줄지도 보장 못하는 거거든요. 그래서 이미 있다는 것, 그 이미 있는 것과 나와 결부됐다는 것이, 내가 나를 처분을 못합니다. 그걸 처분불가능성이라고 이렇게 이야기해요. 처분불가능성이 있는데, 문제는 이게 바탕을 차지하고 있는 거예요. 바탕이 있기 때문에 여기서 그 위에 보면 처분가능이 돼버립니다. 처분가능을 다른 말로 하면 선택을 이야기하거든요. 어떤 취사선택하는 것. 바탕 자체가 처분 불가능함, 이것은 이유 없음이 되는 겁니다. 이유 없음으로 그걸 밑에다 깔고,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운명을 개척하겠다고 선택을 하게 되는 겁니다. 선택을 하게 되면, 선택하면서 느끼는 것이 뭐냐 하면, 왜, 남들의 선택은 괜찮은 선택이 되는데, 왜, 나의 선택은 처참하게 느껴지는 이 말이죠. 부자 집 애가 공부해서 검사될지, 판사가 될지, 선택하라고 하면 굉장히 행복해 보이는데, 못사는 애가 공사현장에서 미장할래?, 노가다 할래? 이런 선택을 하라고 한다면, 선택 자체가 비참하잖아요. 왜, 나는 괜찮은 선택을 못하고, 선택을 해도 꼭 제한된, 불쌍하기 짝이 없는 그게 선택의 항목으로 자리 잡느냐 이 말이죠. 왜 그러냐 하면 이게 아무리 내 인생을 하려고 해봐도 내게 주어진 선택의 폭 자체도 참 눈물 날 폭만 제공되는 게, 밑(바탕)에 뭐가 있기 때문에? 처분불가능성. 다시 말해서 어쩔 수 없음. 어쩔 수 없음이 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걸 캐가지고 나는 왜 이렇게 하느냐, 비참한 선택밖에 못하느냐, 맨날 해봐야 그거는 이유가 없어요. 타고난 것이, 니가 태어난 것이 그 집에서 태어나서 어쩔 수 없어. 그냥 받아들여. 니 운명이야. 니 팔자야. 운명이야, 팔자야, 라는 말을 써버리면 무엇이 죽느냐 하면 그럼 내가 내 의지로서 판단해서 미래를 개척하고, 나는 옳은 길로 선택하겠다는, 선택 자체가 의미가 없어져버려요. 그래서 제가 주일 낮에 그런 이야기했어요. 선택을 선택할 수 있는 선택은 없다고 했어요. 몰아넣어놓고 주스 먹을래? 커피 먹을래? 하는 이런 선택은 제한된 범위 내에서의 선택이잖아요. 이게 바로 처분불가능성, 다시 말해서 인간의 자신의 몸은 왜 있는지를 처음부터 모르고 태어난 겁니다. 내 몸이 왜 있는지를 모르고 태어난 거예요. 자기 몸이 자기가 누군지도 모르고, 내 몸이 왜 있는지 모르면서, 디모데후서 3장 11절, 12절, 13절...쭉 보면서 ‘그래, 경건하게 살아야지!.’ 하는 이것은 밑에 뭘 감추고, 처분불가능성을 감추고, 위에 ‘이거는 경건해. 이거는 경건하네.’ 일방적으로 처분 가능한 것처럼 착각해가지고 선택한다는 것은, 이것은 결국은 이 처분불가능성내로 침투가 불가능합니다. 침투가 되지를 않아요. 위선자만 교회에서 양산할 뿐이에요. 위선자만. 가증한 위선자만. 교회가 하나의 경쟁 장이 되어서, 나도 너처럼 기도 오래 할 수 있어. 너처럼 헌금할 수 있어. 이래돼버리면 이거는 교회가 아니고 게임하는, 게임 판이 돼요. 게임하는 장이 돼요. 상대를 꺾음으로써 일시적인 쾌감을 느끼는 겁니다. 그 쾌감을 느끼는 것은 새디즘적인 쾌감이지만, 남한테 짐으로써 그걸 핍박이라고 착각하는 매조키즘 쾌감. 이래나 저래나. 그저 일시적인 쾌감, 그것만 챙기면서 살아가는 게, 그게 근본적인 대책이나 아무것도 될 수 없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처분불가능성은 어디서 나왔는가, 처분불가능성이라고 할 때, 문제가 뭐냐 하면 몸을 개인적인 몸으로 간주한 것, 이게 반칙, 이게 틀려먹은 겁니다. 인간은 개인적인 몸은 없고 이게 아담 몸이라는 집단의 일부로서 몸이 되는 거예요. 아담의 몸. 아담의 몸 안에서는 모든 개성이라든지, 특징이라든지, 이게 다 무효가 되는 겁니다. 의미 없어요. 전부 다 모든 것이 다 보편화가 돼버려요. 그래서 내 몸을 없애버리고, 아담의 몸이 쭉쭉 엿가락처럼 늘어난 것이라고 생각하세요. 덩치 큰 아담의 몸의 일부가, 연계된 것이 내 몸이라고 보시면 돼요. 그렇게 보시게 되면, 처분불가능성인 이유가, 나 말고, 대표자 아담과 창조자이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나의 존재 이유가 밝혀집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죄 때문에 아담은 이 땅에 만들어져야 했다는 겁니다. 죄 때문에. 인간은 죄지으라고 만들어진 거예요. 죄지으라고. 왜, 죄지으라고 인간은 만들어졌느냐, 그 이유가 뭐냐, 인간이 처음 살았던 에덴동산에 인간만 살았던 것이 아니고, 이상한 두개의 물체가 함께 있었습니다. 하나는 선악과가 있었습니다. 또 하나는 뭐냐 하면 생명나무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옆에 있는 선악과에서 선악과 과실을 맛있게 만들어놓고,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이, 저것을 따먹는 날에는 정녕, 기필코 죽으리라고 하셨어요. 죽으리라. 그렇다면 인간의 목적은 간단해요. 죽으리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인간보다 우선이 되는 겁니다. 죽으리라고 명령을 했으면, 죽음이 뭔가를, 그 죽음을 현실상태로, 현실화시키기 위해서 인간이 필요했던 거예요. 이게 바로 죽음이야, 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말씀이 말씀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게 실제화 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 선악과 죽음에다가 인간을 갖다 붙인 거예요. 인간보다 뭐가 우선되는 거예요? 선악과나무가 우선되고 생명나무가 우선되는 겁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제 3의 것이 끼어들었다는 말이에요. 선악과, 생명나무가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끼어들었어요. 인간은 그 자체로 영원하지 않습니다. 니가 만일 선악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가 돼요. 죽는다는 것은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됩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일시적인 존재에요. 도로 흙으로 돌아가 버리면, 언제 니가 인간이었었어? 하고 한시적으로만 잠깐 등장했다가, 다시 흙으로 돌아가야 되는 겁니다. 인간 이름이 뭐예요? 흙이에요. 흙이니까, 흙이 되는 것이 정상이고, 흙이 아닌 것으로 잠시 인간의 모습을 띠었다면, 이것은 흙인 인간을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을 흙으로 만들었던, 어떤 다른 분의 본질과 속성을 드러내기 위해서, 잠시 한시적인 존재로 인간을 인형처럼 만든 거예요. 그 분이 누구냐? 그 분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1장에 보면 인간을 만들 때 앞에 조건이 있습니다. 어떻게 만든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인간을 만드신 거예요. 하나님의 형상대로. 그러니까 말할 때, 이렇게 말해야 해요. 하나님의 형상대로 인간을 만들었습니다. 그냥 말하면 안 되고, 하나님의 형상대로(....)형상대로(....) 형상대로 뭐? 형상대로 만들었단 말이죠. 목적이 뭐냐 하면 하나님의 형상을 드러내기 위해서 인간을 만든 거예요. 방법은 뭐냐, 선악과를 옆에 갖다 붙임으로써. 선악과 뭔데? 언제든지 죽을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럼 아담이 선악과를 안 따먹으면 어떻게 되는가? 몇 년 째 견디겠어요? 15년째 안 따먹으면 선악과가 ‘에이, 안 되겠네.’ 하고 선악과가 알아서 죽거나 안 그러면 뽑힙니까? 누가 고집 센지 보는 거예요. 니가 안 따먹는 기간이 긴지, 내가 따먹도록 기다리는 기간이 긴지, 한 번 버텨보자는 겁니다. 누가 고집이 세겠어요? 죽으리라는 말씀의 실현상태가 오기 위해서 어떻게 해요? 갈 때까지 가보는 거예요. 언제까지? 따먹힐 때까지. 그래서 뭘 드러낼 때까지? 아, 이게 죽음이구나!를 드러낼 때까지. 그래서 여기서 정리할 수 있는 것은, 죽음 없는 하나님의 형상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에서 주가 돼요. 죽음을 경유해서 주가 되는 겁니다. 인간은 그거는 모르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존재로서 창조되면 이게 인간인 줄 알아요. 그러나 그 존재가 한시적 존재며, 다시 흙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그거는 어떻게 설명할 건데요? 하나님께서 “인간아! 나는 너를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었다.” “아이구, 감사합니다. 이제 바이바이 합시다.” 이거 없어요. “까불지 마! 니 언제든지 흙으로 환원될 수 있어.” 라는 요소가 계속 있는 한, 인간은 독자적인 존재성을 주장할 수 없습니다. 나는 인간이란 말을 할 수가 없다 이 말입니다. 조건이 붙어요. 하나님의 형상이 있는 한에만 뭐가 된다? 인간이 된다. 창세기 1장 26절 말씀이 그 말씀이에요. 하나님이 우리의 형상대로 만들었다. 그동안 왜 이렇게, 이런 식으로, 예수님 중심으로 해석을 못할까요? 그것은 성경을 보는 당사자가 본인을 뭐로 단정 지었어요? 나는 인간이다. 이제 남은 것은 천국 가는 것 밖에 안 남았다. 나는 영원히 살래. 지금 주객이 반대되었어요. 본인의 존재자체가 목적이 아닌데, 목적은 따로 있는데, 자기가 이렇게 태어나고 보니까, 이제는 마음이 뭡니까? 이미 태어난 것, 이걸 도저히 취소하고 싶지가 않은 거예요. 이미 챙긴 이상, 예를 들면 애들한테 “애야! 이건 엄마가 준 거야.” 하면 “엄마. 고맙습니다.” 하죠. 양육을 그렇게 받았으니까. 엄마의 욕심이라니까요. 근데 줘놓고 “애야 그거 엄마 줘!” 하면 줍니까? 안 줍니까? 안 줘요. 줘놓고 뺏는 게 어디에 있어요. 줬으면 내 소유인데, 왜 그걸 도로 뺏느냐 이 말이죠. “그럼 어떻게 할까?” “그건 내 허락 하에, 드리고 말고는 내가 결정하겠습니다.” 이래 나오겠죠. 여러분, 욥이 1장에서 뭐라고 하던가요? 주신 자도 하나님이시오 가져가신 자도 하나님이시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실 때 그 안에 어떤 내용이 들어있다는 말입니까? 언제든지 가져가도 내놓아야 되는데이~ 라는 것이 그 안에 포함이 됐음을 욥이 알았어요? 몰랐어요? 알았어요. 그러면 우리의 생명, 우리의 목숨, 우리는 흔히 이야기합니다. 기독교 신자라서 “주께서 주셨습니다.” 하죠. 그러면 “주께서 주셨습니다.” 하는 말에 뭐가 포함이 되어야 해요? “에이, 가져가려면 가져가세요.” 하는 이게 포함이 되어야 해요? 안 돼야 돼요? 포함 돼야 되죠. 그걸 겐세이(방해) 놓는 거예요. 마귀가. 이미 챙겼으면 됐지 그걸 왜 줘야 해? 기어코 니 살아야지. 그렇게 되면 그거는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고, 어떤 형상이냐 하면, 이게 자기의 형상이 돼버려요. 이 자기 형상을 창세기 5장에 보면 아담의 형상이다. 결국 아담의 형상과 누구의 형상이 싸움이 벌어집니까? 아담의 형상과 하나님의 형상이 싸움이 벌어집니다. 나를 위한 예수님이냐, 예수님을 위한 나냐, 이 문제에요. 이미 정답은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위해서, 영광을 위해서 한다는 거예요. 그러면 묻죠? 그래서? 그래서 누가 좋은데? ‘내가 주님의 영광을 살게 되면 반대급부로 나에게 잘해주겠지.’ 하거든요. 근데 주님께서 그것마저 내놓으라면 내놓겠습니까? 그러면 우린 또 믿음 있는 척을 해야 되니까, 그것마저 내놓죠. 그럼 그걸 왜 선뜻 내놓습니까? 그렇게 내놓으면 반대급부로 ‘더 괜찮은 나를 주시겠지.’ 하는 거예요. 바퀴가 두 번 돌았어요. 욥의 해석을 잘못된 해석을 하고 있는 거예요. 욥을 보면서 사람들이 느끼는 것이 뭐냐 하면 이렇게 욥이 인내하고 참았더니만, 무지하게 예쁜 딸을 세 명 주었고, 재산을 배나 줬다는 거예요. 참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릴만하죠. 그런 죄가, 욕심이 욥기가 없었으면 안 나타날 겁니다. 욥기가 있으니까 욥을 보면서 희망과 꿈을 갖게 되는 거예요. 이참에만 참으면 욥처럼 나중에 다 잃어버린들 낙을 누릴 것이다. 조금만 참자. 어떤 시험도 참으면 낙을 볼 것이다. 주께서 새로 시작합니다. 그 참아서 누렸던 낙을 도로 달라고 했을 때 우리는 아까워서 못 내놓을 가능성이 있어요. 잘 이해가 안 되시는 것 같은데, 어떤 사람이 암에 걸렸습니다. 젊을 때 암에 걸렸습니다. 처음에 하나님 원망하다가, 간증집회에서 은혜 받아서, 아, 이것도 하나님의 징계구나. 모든 것이 다 의미가 있는데, 이 의미는 나보고 신앙생활 똑바로 하라는 의미인줄 알아야지. 근데 보니까 그 간증한 강사가 기도원에 가서 나무뿌리 두 개 뽑고, 소나무 뽑고, 하여튼 산림훼손은 다해. 산에 올라가서 울며 통성기도해서 목 다 쉬고, 이렇게 했더니만 주께서 불쌍히 여겨서 성령 충만 응답을 줬다. 근데 돌아보니까 병이 낫더라. 이렇게 된 거에요. 그럼 간증한 강사, 니도 됐는데 나는 왜 안 되냐 해서, 라이벌 관계니까. 니 됐는데 내가 왜 안 돼? 오기거든요. 남아 있는 것은 오기밖에 없어요. 그래서 오기대로 해본다고요. 해보니까 병은 낫지 않았는데, 나았다는 감은 와요. 나았다는 감이 와서 엑스레이 찍어보니까 의사가 놀랩니다. “도대체 당신 몸에 무슨 짓을 했습니까? 어떻게 깨끗해졌습니까?” 그래가지고 감사했는데, 그러고 나서 간증하러 돌아다니면서 차비나 얻고 돌아다니는 거예요. 이런 생계수단이 있구나 하면서 돌아다니는데, 문제는 그거 하면서 뭐가 포함이 되어 있느냐 하면, 큰소리 쳤잖아요. 기도해서 나았기 때문에 병 나은 것이 중요한 게 아니고 나는 누가 뭐래도 신의 사자고 하나님의 성도 맞다고 하면서 늘 하는 것이 뭐냐 하면 처분 가능한 거예요. 내가 기도해서 했기 때문에. 문제는 뭐가 찝찝한가 하면, 그게 처분불가능성에 기초를 두고 있다는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주께서 그렇게 괜찮게 믿음이 좋다고 소문난 나를, 도로 전보다 배나 더 암이 걸리게 한다면 어떻게 되겠어요? 우사(쪽팔림, 경사도 사투리)도 그런 우사가 없단 말이죠. 간증한 거 다 물어내야 해요.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신경이 어디에 쓰이느냐 하면, 암에 다시는 안 걸리는 방법으로 계속해서 활동을 해야 되죠. 받은 돈 가지고 얼마를 기부한다든지, 착한 일 한다든지, 온갖 아부를 떨고 재롱을 다 떠는 거예요. 다시 몸 안 아프도록 자기 조치를 하는 거예요. 그렇게 한다는 것이 처분불가능성을 처분 가능한 것으로 이미 전환을 시킨 겁니다. 이걸 그들은 경건이라고 이야기하고 거룩이라고 이야기하고 성화라고 이야기하고 말씀대로 성령의 열매를 맺는다고 그렇게 자꾸 위장을 하는 거예요. 교인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서. 희망을 주게 되면 교인수 늘어나니까, 하늘나라 확장되니까 마귀가 얼마나 싫어하겠나, 이런 식으로 있지도 않는 신앙을 막 동원해서 도배를 하는 겁니다. 그러나 그 속에는 뭐가 있느냐, 불안해요. 정말 성령이 임한 사람은, 주여! 병 낫게 하지 말고 이참에 데려가 주시옵소서. 이래야죠. 병 낫게 하지 말고. 그럼 주님의 응답이, 그렇다면 죽여줄게. 죽여주는 방법 중의 하나가 병이 없어지는 방법도 죽여주는 방법이에요. 그럼 그 사람이 어디 자기 신앙 간증 할 때 뭐라고 하겠습니까? “여러분, 여러분이 건강하든, 병이 낫든 상관없이 십자가가 중요합니다.” 라고 이야기하겠죠. 그게 바로 사도바울이고 사도들이 쓴 이 성경내용이에요.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내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나는 언제든지 처분을 어떻게 하든 처분대로 할 따름입니다. 다시 암에 걸리든 그것은 내 소관이 아닙니다. 내가 관여할 소관이 아닙니다. 왜? 나는 이미 죽었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계시기 때문에. 그런 이야기를 해야 된다는 거죠. 그게 바로 십자가의 반복되는 능력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거예요. 자, 이제부터 어려운 거 해봅시다. 아담의, 인간의 개인적인 사적인 몸은 없습니다. 개인이 개인의 자기 몸을 지키려고 하지 마세요. 그것은 다 의미 없어요. 자기 몸 지키기 위해서 성경 백날 백독하고 기도해도 다 소용없어요. 다 거짓말입니다. 벙커 만들어서 생수 쌓아놓고 핵폭탄 피하기 위해서, 전 천년주의, 첫 번째 환란이오기 전에 벙커 만들어서 자기들끼리 살겠다고 곗돈 넣고 하지 마세요. 세상에 그런 이기적인 것이 어디에 있어요. 이 세상을 떠날 생각을 해야지 왜 자꾸 이 세상에 죽치고 있을 생각을 합니까? 뭐 좋다고. 생각해보세요. 벙커 안에서는 핵폭탄 피할지는 모르지만 자기 죽음의 폭탄은 우에 이깁니까? 점점 더 피부가 늙어 가는데. 이건 핵폭탄보다 더 센 폭탄이에요. 세월 따라서 주름살 생기는 이 폭탄은 어떻게 할 건데. 결국은 거기서 죽잖아요. 죽음보다 더 센 것이 어디에 있어요? 인간은 죽음을 못 이겨요. 그래서 죽음에 해당되지 않은 몸이 필요한 겁니다. 죽음에서 이미 벗어난 몸이 필요해요. 그것은 바로 부활의 영이 필요하기 때문에, 부활은 반드시 부활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게 세트가 돼요. 십자가 결합된 부활이 오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 몸은 십자가 이 코스를 밟아야 하기 때문에 사도바울이나 우리나 육신의 몸은 이게 늙어가야 돼요. 늙어야 돼요. 늙어가는 것에 대해서 참, 어떠하든지 십자가에 참여해서 부활에 이르는, 이래거든요. 그런데 사람들은 십자가 제거해버리고, 부활의 영이 와서 나를 더 탱탱한 피부로 만들기를 원해요. 새 생명이라. 이름이 멋지잖아요. 새 생명. 이거 새 생명운동이거든요. 새 생명운동 하니까 이거 뭐 윤기 나는 피부 밖에 생각이 더 납니까? 특급칭찬이라고 하는 김희애의 물광 피부, 그거밖에 생각이 더 나겠어요? 정력에 좋다고 장어 먹고 이런 거. 몸에 좋은 거. 새로운 몸을 바꾸려면 여기 열두제자와 예수님의 관계를 생각해봐야 합니다. 항상 열두제자는, 12라는 숫자가 뭐냐, 하나님이 잃어버린 이스라엘을 재창조하는 숫자가 12라는 숫자입니다. 12는 야곱에게 받은 복을 이야기하고요. 복의 가현체, 또는 복의 현실태, 또는 실현태가 이스라엘이에요. 하나님께서는 복 받으라는 것을 말로 하는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을 봐라. 주변에 아무리 악한 민족들이 와도 이스라엘을 못 이기잖아? 왜? 내가 함께 동행 하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이스라엘은 뭐냐 하면 집단적으로 아들이 돼요. 집단적 아들이에요. 아들이 단수에요. 아들이 되는 이유가 사적인 것이 아니고, 아들에서 나왔던, 하나의 줄기에서 나와서 이게 파생된 거예요. 이것을 저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참 빛(×) 아니지요. 참빗. 제가 어릴 때 골목에 방물장수들이 있어요. 이동슈퍼가 있었습니다. 거기에 참빗이 있어요. 옛날에 이가 많이 있었거든요. 여자들이 이 쓸어내릴 때 쓰는 그 참빗을 팔았어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숨어 있는 아들께서 이 땅에서 아들의 속성을 사람과 구애 없이, 그 안에 속한 사람만 이렇게 골고루 내려줍니다. 근데 이게 다 다양하게 만들어놓고 이걸 단일하게 만들어요. 사람마다 다 다른데, 그들의 운명은 동일하게 아들로부터 혜택을 입도록 그렇게 조치를 취합니다. 그 실상을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과 예수님과 그들 사이에 뭐냐, 아들의 모형을 집어넣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제물을 바침으로써 어떤 죄를 지었든 간에 동일한 혜택을 일괄적으로 받습니다. 일괄적으로. 참 좋은 말입니다. “일괄적으로.” 다른 말로 하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것.” 일괄적으로 용서를 해주시는데 조건이 있어요. 어떤 조건이냐 하면, 우리의 이름을 반납해야 합니다. 아무개, 아무개 이름을 제거해버리고, 이제부터는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것이 점령당해야 하고 접수당해야 합니다. 우리 이름이 아닙니다. 그래서 접수당한 사람한테 “야! 니 이름이 뭐야?” 하면 “주의이름입니다.” 이럴 때, 주의 이름으로 구원을 받는 거예요. “접수 당했습니다. 나, 당신한테 점령당했습니다.” 하는 거예요. 그런데 사람들은 이런 것을 모르고 어떤 대상을 생각해요. 어떤 객관적인 대상이 있고 나라는 주관이 있고. 주관적인 나의 의지력에 동원된 어떤, 믿는다고 하는 이 발언 자체가 저쪽에 도달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데 믿습니다가 안되면 쌍시옷을 넣어서 믿씁니다. 믿씁니다. 해가지고 저 대상에게 다가서려고 하는데, 그것은 제자들을 통해서 이미 실패한 적이 있습니다. 제자들은 믿씁니다. 믿씁니다. 해도 중간에 계집애가 “베드로 당신도 저 사람하고 한 패죠?” 이 말 한마디에 나는 믿씁니다가 아니고 저 사람 저주합니다로 바뀌어버렸어요. 심지어 베드로가 자기 목숨을 내놔도 주께서는 그 목숨을 뇌물로 받아서 천국을 넣어주지 않았습니다. 그냥 니 목숨 갖고 있어. 니 구원은 니 목숨 상관없이 내 목숨으로 가는 거지 니 목숨으로 가는 것이 아니야. 그러나 우리의 목숨은 반드시 우리의 명예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내 이름과 관련되어 있어요. 내 이름과 관련된 귀한 것은 하늘나라에 아무짝도 쓸모없습니다. 내게 귀한 것, 주님 앞에 귀하지 않습니다. 뭘 바쳐도 쓰레기입니다. 뭘 바쳐도. 어디 뭐 천국이 쓰레기장입니까? 자꾸 그런 거 갖다 바치게. 일체 사람의 것을 받지 않습니다. 왜? 더러워서. 주께서 받으시는 것은 주께서 주신 것만 받습니다. 그걸 두자로 은사라고 해요. 믿음과 사랑, 소망을 받습니다. 하늘에서 주신 것을, “이것은 주께서 주신 거잖아요?” 하면서 도로 반납하는 식으로 받지, 우리 것은 안 받습니다. 왜? 거기에 우리 노동이 담겨있기 때문에 그래요. 자기의 잘남과 자기의 가치성이 담겨 있어요. 근데 인간의 가치성 속에는 뭐가 빠졌느냐 하면 처분불가능성이 빠져있어요. 처분불가능성이. 예를 들어서 애가 여기에 예쁜 색종이가 있다면, 색종이 가지고 새를 만들었어요. 보통 장학사나 선생들은 “아이고, 이 학교 아동들은 종이접기를 참 잘하네요.” 이렇게 칭찬할 건데, 또 이거 이상하게 보는, 삐딱한 장학사는, 학생이 “장학사님! 이 새 잘 만들었죠?”하니까 “학생! 잠깐만 이 종이는 누가 줬죠?” “누가 줬더라?” “그거는 학교문교부에 감사해야지, 너의 솜씨에 감사하면 돼?” 이렇게 하면 또 애들이 막 울죠. “엄마한테 이를 거야.” 하는데, 일러봤자 소용없고. 현재 자체 우리 몸이 왜 이런 몸인지를 내가 모른다니까요. 내가. 왜 머리카락이 빠지고 하는 이런 몸인지를 모른다니까요. 모르는 것을 기초로 해서 안다고 우기니까 진짜 웃기지도 않는 거예요. 종교인도 마찬가지고, 목사, 신부, 중, 박사들도 마찬가지에요. 과학박사 땄습니다. 이래 나오거든요. 왜 기쁩니까? 이유가 없네. 기쁜데 무슨 이유가 있어요? 기쁜데. 근데 왜 기쁩니까? 이유가 없죠. 그러면 그 이유에 대한 정답의 힌트를 줍니다. 우리나라 인구가 오천만 있는데, 오천만 인구가 다 박사입니까? 다 박사가 아닙니까? 박사는 몇 명 안 되죠. 그러니까 당신이 기쁜 거예요. 아무나 하면 안 기뻐요. 이게 문제에요. 결국은 인간이 수상한 거예요. 기쁨 속에 뭔가 수상한 기운이 들어있어요. 니는 못하는데 나 잘났잖아. 자기 의와 자기 가치와 결부돼서 이게 기쁜 거예요. 그거 누가 했겠습니까? 독자적으로, 너 말고 나의 독자적, 이걸 가지고 바로 악마가 피조물이면서도 독자적인 주장을 내세웠던 것이 바로 최초에 악마가 그렇게 했고, 그 악마가 뱀을 이용해서, 선점해서 인간에게 다가 온 겁니다. 선악과 심어놓은 하나님의 노림수고 덫이었습니다. 마귀야! 빨리, 빨리 유혹해야지. 기다렸던 거예요. 옳지! 옳지! 미끼 물었어요. 창세기 5장에 보면 아담은 죽었더라, 죽었더라, 죽었더라, 죽었더라, 죽음의 보편화라고 합니다. 죽음의 보편화. 살아있어요? 결국은 죽습니다. 그러면 살았다는 것은 거짓말이고 전부 다 죽음밖에 없어요. 자, 그렇다면 경건한 몸은 도대체 어디서 나오느냐, 그 이야기를 해주시기 바란다고 한다면, 경건한 몸은 바로 죽음 속에서 나오는 몸이 경건해요. 모든 죽음이 죽음을 붙잡아도 죽음을 떨쳐버리고 죽음의 위세를 뚫어버리고 거기서 솟구쳐 나오는 몸. 그 죽음이 죽음 되는 이유가 뭐냐, 죄의 삯은 죽음이거든요. 사망이거든요. 그렇다면 죄의 권세에서 빠져나온 유일한 몸이 바로 무슨 몸이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경건한 몸입니다. 경건한 몸은 기초가 이제는 처분불가능성에서 나왔어요. 우리의 몸도 처분불가능이죠. 왜 이런 몸인지 모르죠. 우리의 구원받은 몸도 우리가 손댈 수 없는 몸이에요. 뭐냐 하면 죽음에서, 다른 말로 하면 죄에서, 또는 악마의 권세에서 빠져나온 몸이 경건한 몸입니다. 이 몸이 되기 위해서 어디서 오느냐 하면 우리의 썩어가는 아담의 몸에게 연결되어야 하는데, 연결된 몸이 어디서 나오느냐, 예수님의 몸에서 나온 영이 있어요. 그게 성령이거든요. 성령을 받게 되면 성령 안에서 어떤 경로를 밟느냐 하면 십자가 죽었다가 부활한 그 이후에 성령이 오시기 때문에, 십자가 부활을 우리 몸을 가지고 반복해서 발산하게 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발산하느냐, 죄인데 의다. 이게 죈데 의다. 왜? 사람은 무심코 행동할 때 따져보면 이게 다 내가 살고자 하는 거잖아요. 근데 주의 말씀은 뭐가 됩니까? 누구든지 살고자 하는 자는 죽을 것이고, 예수님을 위해서 죽고자 하는 자는 살 것이라 했잖아요. 평소에 무심코 하는 행동조차도 성경말씀에 비춰보면 이게 죄가 되는 거예요. 아이구, 내 새끼! 하는 순간 뭐가 나타났습니까? 처나 자식이나 나보다 사랑하는 것은 합당치 않다. 이렇게 되거든요. 아버지 받으소서. 하는 순간에 죽은 자는 죽은 자로 장사하게 하라. 이게 무슨 관계가 안 되는 거예요. 돈 좀 적금 탔다고 좋아할 때, 니는 빈손으로 돌아다니고 모든 소유를 버려라. 이것도 안 되는 거예요. 니 보물을 땅에 쌓아놓으면 되냐? 땅에 쌓아놓기는, 전부 다 보험 다섯 개씩 여섯 개씩 들어가지고. 건강보험, 무슨 보험, 보험은 왜 그렇게 많은지, 포트폴리오(분산투자)로 화려하게 투자해가지고. 그저 살라고, 백세인생 대비한다고 그렇게 사는 거예요. 그리 안 살면 왜 안 되는데? 왜? 이상하거든요. 비참하거든요. 누가 이야기하느냐 하면 주변사람들이, 나에게 기대 거는 주변사람들이 “아이구, 인간아 니 왜 이리 됐느냐?” 하는데, 뭐, 그렇게 하면 어떤데? 내가 부끄럽잖아요. 왜 그렇게 부끄러운데? 이유를 몰라요. 그게 왜 부끄러운지 이유를 몰라요. 왜냐하면 나라는 것은, 몸은 따로 인데, 나라는 몸은 안 부끄러워해야 된다는 것. 그런 수준을 맞춰야 된다는 것이 이미 주변으로부터 전통적으로 누적되어 있어서 그래요. 누적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은 환경 따라서 목적하는 바가 다 달라요. 얼마 전에 설교 시간에 그런 이야기했습니다마는, 우리교회가 그 장소에 11년째 있는데, 오자마자 11년 동안 한 번도 화장실 문을 잠그지 않았습니다. 아래쪽에 상가화장실이라고 온갖 지나가는 사람들이 다 들어와서 담배피우고 해서 맨날 고장 났거든요. 근데 얼마 전부터 술집이 이사 가면서 그 화장실 문을 잠갔습니다. 제가 설교시간에 그걸 숙원사업이라고 했습니다. 숙원사업. 얼마나 감사한지. 그런데 대부분 상가는 화장실 문이 잠겨 있어요. 그쪽에서 보면 그게 무슨 감사거리냐고 해요. 근데 우리는 감사거리에요. 그동안 그렇게 애를 먹였으니까. 이게 사람마다 다 다르다니까요. 사람마다. 다 다른데 죄인인 것은 마찬가지고. 아무리 수준을 낮추어도 나를 미워하는 수준까지 내려갈 수가 없어요. 인간은. 그냥 나를 미워하는 그 나를 사랑하기 마련이거든요. 한강이든 낙동강이든 어떤 작가든 간에 아무리 해도 해답이 없어요. 결국 그들이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것은 이 사람 해답이 없다. 결국 그들이 내놓는 것이 그거에요. 해답이 없어요. 해답이 없으니까 어떻게 됩니까? 갈 때까지 가보자. 강남스타일이에요. 갈 때까지 가볼까 하면서 춤추고 난리에요. 갈 때까지 가보자는 거예요. 해답이 없으니까. 그래서 자식이 엄마가 안다고 해서 물으면, 결국은 엄마가 화가 나가지고, 에이, 니 맘대로 해라. 그래 갈 때까지 가보자. 해답이 없어요. 그러면 성도는 해답이 있습니까? 아니요. 해답을 가질 필요가 없어요. 해답가지면 꼭 자기한테 짓을 하려고 해요. 괜찮은 인간이 되려고 해서 이게 탈이 돼요. 그냥 사시면 살아가는 것 그 하나하나가 어떤 짓을 하든, 주님의 결과물로 매일같이 새로운 아침을 맞이하게 되는 겁니다. 굿모닝이에요. 날마다 새로운 아침을 맞이하는 거예요. 새로운 아침을. 왜냐하면 내 작품이 아니기 때문에. 주님께서 오늘도, 주님 처분대로 누굴 만나든지, 또 어디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든지 그것은 주님 처분대로 할 거예요. 미리 예상하지 마세요. 미리 기대하지 마세요. 왜? 우리는 없어져야 하기 때문에. 없어져야 하는데, 만약에 있음을 생각한다면 이거는 주님의 처분불가능성이 아니라 나의 처분가능성으로 전환해가지고 은근히 내일은 보다 더 좋은날이기를 기대하게 돼요. 그렇게 되면 그것이 나의 우상이 되어 버립니다. 우상이 된다는 말은, 실망스러운 하루가 이미 시작된 거예요. “이참에도 안 되면 나는 실망할 거예요.” 라고, 이미 시작하고 들어가는 거예요.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 아니고 “요렇게 해주지 않으면 나는 화 낼 거예요. 주님.” 하고 시작하게 된 거예요. 새벽기도해도 소용없어요. 새벽기도하면서 미리 주님한테 압력을 가하는 겁니다. “주님 내가 새벽기도 나왔으니까 이래, 이래 안 해주면 나 진짜 오늘 삐질 거야!” 이게 협박인지, 압력인지, 그게 새벽기도에요. 그것도 고함 다 지르면서. 기도문제 나왔으니까, 잠깐 언급하는데, 반드시 기도하라가 아닙니다. 성경에서. 이게 간단한 건데, 이걸 몰라요. 기도하라가 아니고 반드시 앞에 붙는 것이 있어요. 경건한 기도를 하게 되어 있어요. 경건한 기도를 하라고 되어 있는데 이게 성경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주 안에서 기도하라고 되어 있어요. 주 안에서. 주 안이라는 것은 성령 받은 사람에 의하면 주 안에서 계속해서 동일한 어떤 사건이 되풀이해서 일어나야 해요. 뭐냐 하면 나는 죽고 내 안에 누가 산다? 주님이 살아있다는 것을 바깥으로 방출하고 증거 하는 기도가 되어야 해요. 그러면 그 기도를 어떻게 하느냐, 그럼 그 기도를 말로 해가지고, 지금 나는 죽었다. 그리고 내 안에 주님이 산다. 기도시작! 째깍째깍. 이렇게 해봤자, 니가 그렇게 하는 의도가 뭐냐 물으면, 다 내가 경건한 기도하기 위해서 이렇게 했습니다. 이렇게 한다면, 니는 또 니한테 기대를 했구나. 이래되어가지고, 그것도 탈락이에요. 그럼 어떻게 하면 되느냐, 막 기도 하면 돼요. 막국수 나오잖아요. 막국수. 그냥 막 기도 하면 돼요. 막 기도 하게 되면 일단은 흥분상태에다가 그 다음에 분노와 항의, 항변 막 나와요. 그렇게 하는 가운데, 우리가 스스로 할 수 있는 게 이것밖에 없다는, 이것을 기도하는 가운데, 이것이 개선이 되고 이게 변화가 일어나요. 실컷 떠들어놓고, 주여, 내 안에 이런 것들이 들어있군요. 나는 죄인입니다. 이렇게 나온다면 그게 바로 경건한 기도에요. 이게 성령께서 관여한 기도입니다. 기도할 바를 우리가 알지 못해요. 알지 못한다는 그것을 전제로 하고 기도하시면 되는 거예요. 어차피 하나 안 하나 모른 것인데 해보는 겁니다. 해보게 되면 살아계신 주께서, 정말 성령 있는 사람들은 그걸 자체적으로 수정해줘요. 니가 이렇게 기도하는 이유가 뭐냐? 이것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지금 이걸 감사하지 않는다는 뜻이냐? 그건 아니고...., 안에서 계속해서 대화가 돼요. 그렇다면 니가 이런 기도해놓고 양심에 걸리지 않나? 걸립니다. 그럼 기도 끝. 바로 이것은 주님 안에 내밀한 어떤 교제 같은 것, 이런 것이 계속 있는 거예요. 예를 들면 세례요한이 옥에 갇혔잖아요.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믿어요. 하지만 도저히 믿기지가 않는 거예요. 믿는데, 내면은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는 거예요. 그럼 어떻게 해야 됩니까? 제자 보내가지고 예수님한테 알아봐야죠. 예수님 당신이 오실 자 맞습니까? 해야 되겠죠. 그걸 오늘날 우리가 그대로 반복하면 돼요. 분명히 이런, 이런, 내가 별로 나쁜 짓 하지 않았는데 이런 낭패를 주니까, 제가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이걸 개선하려면, 다시 원상복귀하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모르겠습니다. 그런 마음이 들면 그대로 표현하는 거예요. 기도로써, 숨기지 말고, 자꾸 아름답게 꾸미지 말고, 남북통일하지 말고, 정치인도 아닌데, 당회로부터 주일학교까지 그런 것 좀 하지 말고. 정말 답답한 것이 있잖아요. 답답한 것이 있으면 답답한 것을 그대로, 사람한테 찾아가지 말고 자꾸 자기 안에 있는 자기한테 답답함을 푸는 거예요. 풀면서 세례요한이 예수님한테 묻듯이 그렇게 하듯이 하게 되면, 세례요한한테 이야기해라. 앉은뱅이가 걷고, 소경이 눈뜨고, 벙어리가 말하고, 죽은 자가 살아난다고 해라. 이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세례요한한테 가라. 너는 마땅히 앉은뱅이고, 벙어리고, 소경이고, 죽은 자인데, 아직도 멀쩡한 거보니까 이게 니 잘남이 아니라 하나님의 처분불가능성, 하나님의 은혜인줄 알아라. 가서 빨리 전해! 그렇다면 세례요한이 재수 없는 것이 아니고, 이게 자기 일이 아니고, 옥에 갇힌 일이 누구 일이냐, 주님의 일이에요. 그래서 쟁반에 목이 잘리든, 어떻든, 이것도 누구 일입니까? 주께서 그렇게 하신 거예요. 끝까지 선지자 노릇을 하면서 가야 되고, 우리도 지금 그 길을 성령을 통해서 가게 하는 겁니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성령을 받았다는 말은 뭐냐 하면, 십자가와 부활의,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있던 은밀한 그 언약의 완성을, 이제는 그 완성품을 가동시키는 거예요. 썩어가는 우리 몸에다 가동시켜버리면, 죽을 몸인데, 아직 멀쩡하게 있으면 이거는 있을 수 없는 크나큰 혜택이다. 이래 되는 거예요. 범사에 모든 것을 감사하게 되는 거예요. 그리고 나한테 감사 할 것이 안 나오잖아요? 감사할 것도 없는데 감사하는 것에 대해서 감사하는 겁니다. 삼중감사죠. 감사 안 하면 되는데 감사케 하신 것에 대해서 감사하는 겁니다. 그러면 그 감사에 뭐가 포함이 되는가, 짜증내고, 분통내고, 주님한테 욕하고 대드는 것도, 뒤돌아보니까 그것도 감사거리가 되죠. 그래서 내린 결론이 뭐냐, 막살면 되는 거예요. 막살면. 막사는데 불안하다? 신자아니죠. 막사는데 하나도 불안하지 않다? 성도입니다. 왜? 지나간 열두제자들이 조심껏 살았는데, 막 산 게 돼요. 그 조심스러움이 뿔뿔이 예수님 곁을 다 떠나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주님 보시기에는 그래야 되는 거예요. 왜? 목자를 치면 누가 흩어져야 해요? 양들이 흩어져야, 이게 원래 연극스케줄대본에 그렇게 나와 있어요. 근데 그 사람들은 나름대로 스승 섬긴다고, “주여! 제가 지키겠나이다.” 이러니까 “안 가나? 가!” “아닙니다. 제가 지키겠습니다.” “가라니까! 저한테 검이 있나이다.” “검을 꽂아라!” 검을 쓰는 자는 뭐로 망한다? 검으로 망한다. 이 말은 망한다 이 말이에요. 우리가 검쓰나 안 쓰나 망한다 이 말이에요. 망하는 자를 안 망하게 하는 것은 주님 솜씨로 돌려야지, 내가 거기에다 협조했다든지, 보탰다든지, 나의 의지와 용기, 과감한 결단성, 나의 선택성, 성령께서 완전히 그런 것들을 확 베어버립니다. 그런 것들은. 왜? 천국에 합당하지 않기 때문에. 천국에 그런 것이 끼어들면 안 돼요. 합당치 않아요. 그렇다면 우리의 교회생활은, 이건 위험한 거고, 바깥의 생활이 오히려 신앙생활다운 면모를 보입니다. 왜? 막사니까. 교회는 조심스럽잖아요. 주님이 계셔서 그런 것이 아니라 타인의 눈이 교회에서 괜찮은 인간이라고, 내가 사랑받고 싶은 욕망을 유발시키죠. 교회가. 그래서 13절 봅시다.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하고 속기도 하리니” 이제 이해되시죠. 악한 사람들이 악하다고 생각이 안 들어요. 그들은 최선을 다해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경건한 몸으로 봐서는 이게 뭡니까? 평가하기를, 악한 사람은 더욱더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리니. 자기 나름대로 나는 남을 속여야지가 아니라 최선을 다하고 살고 싶어서 모든 노력을 다하고 속이더라도 양심껏 속이지만, 그러나 주님보시기에는 그게 자기 속임에 또 속아 넘어가는 짓을 하나니. 오히려 너는 그렇게 하지 말고, 무엇과 관련시키느냐, 그 다음에 성령과 관련시킵니다.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바로 16절,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거예요. 하나님의 감동으로. 그렇다면 이 성경책 안에 하나님의 감동이 들어있다면, 감동은 성경책 문자에 묶이지 아니하고, 바깥으로 반드시 이게 터져 나오게 되어 있죠. 아까 이야기해볼게요. 사람들은 성경을 보든, 하나님을 보든, 예수님을 보든, 삼위일체를 보든, 전부 다 자기 주관 밖에 있는 하나의 개체로 봐요. 하나의 대상체로 봅니다. 그러면 대상체와 자기 주관과 연결할 때는 뭐냐 하면 자기 지와 정과 의를 동원시켜요. 의라는 것은 의지고 정은 감정이고 지는 지식을 말합니다. 인간의 이성적 지식. 성경공부하고, 그 다음에 뜨겁게 사랑하고, 그 다음에 전도하고. 교회에서 이걸 가지고 동원시키거든요. 심지어 이것 뿐만 아니고 영과 혼과 육 삼분설이 막 나오고. 온갖 되도 않은 어설픈 솜씨로 숫자놀이 3가지고 다 해가지고, 부흥회 6일 동안 다 보내고 있어요. 그리고 마지막 시간에 돈 내는 시간에 돈까지 내야하고. 인간의 의지 이런 것들이 마중을 나가게 되면, 이쪽에는 뭐가 나오느냐 하면 성경말씀을 문자로 마중 나오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를 앞장세웁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니가 내 성경을 볼 때에 니 의식은, 너의, 너의 잘남을 위한 그런데서 나온 엉터리개념이죠. 이 엉터리개념을 가지고 성경을 문자적으로 보면서 계속해서 엉터리개념에 합치되는 행동과 의지를 총동원시켜서 이걸 몰고 쭉 나와요. 이걸 어려운 말로 권세인데, 나를 옹립하는 권세를 몰고 성경으로 나가게 되면, 주님은 이 모든 성경을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습니다. 다 이루었기 때문에 십자가를 가지고 마중을 나와요. 마중을 나오면 여기서 두 개의 종류의 의가 부딪치게 됩니다. 한쪽은 자기 의가 되고 이쪽은 예수님의 십자가 의가 되는 겁니다. 어느 의가 천국에 합당한 의냐, 자기 의는 탈락이요, 예수님의 의만 올라가게 되어 있어요. 그러면 예수님의 의를 받을 때, 어떤 성경말씀 일부를 쪼개서 받을 수는 없어요. 왜냐하면 이 예수님의 의는 일점일획이라도 모든 말씀을 다 이룬 의이기 때문에. 창세기 의나 에베소서 의나 모든 동일한 의가 될 수밖에 없어요. 동일한 의가 되려면 인간의 행함은 여기서 저지되어야 합니다. 인간의 행함이 아니고 그 자리에 예수님의 행함이 들어가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행하심으로 의로움을 얻어내야 해요. 그냥 거룩함이 덮쳐져야 돼요. 거룩함에. 에라, 바께스로 물을 확 부어버리면, 등목 하듯이 내가 혼자서 문지르고 있는데, 갑자기 아이! 차가워! 해가지고 온 천지가 디비지는(뒤집히는 경상도방언)물 천지가 되가지고 옴팍 덮어쓰는 거예요. 그럼 그 안에서 우리는 뭐가 됩니까? 천하에 죄인으로 드러나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우리가 죄인으로 드러나게 되면, 그 다음부터 어떤 행복이 기다리느냐, 내가 내 인생에 손을 놓는, 나는 새털처럼 가벼운 영혼이 되는 거예요. 신경 안 써도 되는데, 쓸데없는 내 미래상에서, 현재 내 행위와 내 미래를 직접 연결시킨 이 오류, 이 부담감, 이 스트레스를, 백날 약 먹어도 소용없어요. 이렇게 행동하면 이렇게 되겠지. 아니면 요렇게 행동했을 때는 요렇게 되겠지. 그래! 결심했어! 딴라라따~이휘재처럼. 이렇게 되면 이렇게 되고 저렇게 하면 저렇게 되는 그런 것 없습니다. 우리한테는. 지금 내가 결심한 그것이 예수님의 결실물이에요. 예수님이 개입한 결과물이 지금 내가 선택한 겁니다. 소급해서 모든 일에 감사하시면 그것이 바로, 그 마음가지고 성경말씀을 읽게 되면, 어떤 말씀을 해도 예수님은 주가 되시고 나는 그 앞에 죄인 됩니다. 어떤 말씀 앞에서도, 십계명 앞에서도, 나는 죄인 맞는데, 왜? 이미 구원받았기에, 나는 너무 기쁜 마음으로, 죄인이 어디에 있느냐? 할 때, 여기 있나이다. 제가 죄인입니다. 죄인 여기에 있습니다. 그렇게 하고 손들고 나오는 것, 그게 바로 찬미, 찬송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선입감이 문제였습니다. 우리의 어설픈 문자적 개념, 그것이 얼마나자기의로 돌아오는지를 깨닫게 해주시고, 십자가의 능력 앞에서, 그 내 의가 무참하게 주님의 의 앞에 패배 당하게 해주시옵소서. 늘 주님한테 지는 즐거움과 행복이 있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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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218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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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