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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서울 의존교회 160610a (경건)-이 근호 목사자유게시판디모데후서

서울 의존교회 160610a (경건)-이 근호 목사 디모데후서 3장 12절. 신약성경 345페이지입니다.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12절,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오늘 강의 제목은 이겁니다. “몸의 용도”입니다. 용도라는 말이 상당히 개인적으로 보면 기분 나쁜 이야기에요. 왜냐하면 용도라는 말 자체가 이 육체 덩어리는 다른 분에 의해서, 용도, 쓰인다는 것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내 몸은 절대로 나를 위해서 쓰라고 만들어 진 것은 아니라는 거죠. 왜냐하면 내가 태어 날 때 나한테 물어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몸의 용도를 일반 가정에서는 부모를 위해서 또는 그 집안의 대대의 가문을 위해서 쓰는 용도로 쓰라고 이미 어릴 때부터 압박 적으로 강압적으로 양육을 받고 교육을 받습니다. 너의 몸은 우리 집 가문을 위해서 우리 뼈대 있는 집안을 위해서 쓰라! 그렇게 하려면 그렇게 요구하는 쪽에서 요구 받는 쪽이 만족스럽게 해 줘야 돼요. “내가 우리 집 가문을 위해서 일어 설 테니까 부모님은 내가 원하는 대로 다 해 줄 용의가 되어 있습니까?” 그렇게 되면,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지 무슨 말이 많아!” 이렇게 나오죠. 몸의 용도가 예를 들어서 우리 집 가문을 위해서 한다면 이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가문이 잘 되는 것이 이것이 진리가 되고 이게 선이 되고. 악한 것은 우리 가문의 명예를 더럽히는 것이 악이 되는 이것이 어릴 때는 가능한데, 우리의 몸이 나중에 성인이 되면 이것은 독자적으로 권리를 하게 됩니다. 독자적으로 친구 만나서 집에 늦게 오고 집에 안 들어오고 되면 “너 왜 부모 말 안 들어?”하면 “이제 나도 다 컸어요.”하는 것이 있어요. 코미디 프로를 보면 이런 것이 있어요. 80이 넘은 아버지가 딸에게 잔소리를 하니까 뚱뚱한 딸이 하는 말이 “아버지, 저도 나이 50이에요. 힘으로 안 져요.” 힘으로 안 진다는 거예요. 다른 말로 번역하면 내 몸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언제 까지 아버지의 원하는 용도로 제공 할 의사가 없습니다. 그런 뜻이거든요. 그러면 아버지가 너는 우리 집 가문을 위해서 살지 않고 네가 독자적으로 산다면 그러면 네 몸은 무슨 용도로 그렇게 너는 몸을 굴리느냐? 하면 글쎄 그것을 내가 모른다니까요. 이게 문제가 되는 거예요. 부여 받기는 집안을 통해서 부여를 받았는데, 왜 나는 여자가 아니고 남자이고 왜 나는 키가 180이 아니고 170 얼마이고 왜 나는 인물이 송중기처럼 잘 생기지 못하고 송중기하고 전혀 없는, 아니면 송사리하고 닮았던지. 왜 이 용도가 내가 원하는 것과 내가 기대하는 것과 다른 몸이 이렇게 주워졌는지는 살아가면서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 갭을 메울 수가 없어요. 왜 나는 금수저가 아니고 입에 흙만 묻었느냐? 이렇게 나올 때 해답은 없고 짜증만 난다, 해답이 없는 것이 중요한 겁니다. 몸의 용도를 일방적으로 누구를 위해서 사느냐? 어릴 때는 부모 말을 듣지만 사실은 본색을 드러내게 되면 이 몸의 용도는 누구를 위해 사느냐 하면 나를 위해서 사는 겁니다. 나를 위해서 살아요. 그런데 나를 위해서 사는 “나”가 없습니다. 나중에 치매 걸리면 나가 흐리멍텅해가지고 정신이 없어요. 나인지 귀신인지 분간도 안 되게 돼요. 나라는 것이 있지도 않은 나를 위해서 자기 몸을 쓰겠다는 겁니다. 그런데 나는 뭐로 되어 있느냐 하면 이게 욕망으로 되어 있고 욕망에는 무슨 욕망이냐 하면 주변의 욕망으로 되어 있어요. 주변이라는 것은 나에게 뭔가 기대를 하고 있고 나에게 시선을 보내고 있는 주변 사람들, 나라는 것은 남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서 나라는 것을 이렇게 구축을 해 놓은 거예요. 남의 장단에, 남이 치는 북장단에 평생을 놀아나는 겁니다. 인간이. 나에게 기대하는 사람에게 실망스럽지 않은 인생, 그것은 자기 인생이 아닙니다. 나의 인생이 아닙니다. 그것은 남의 인생입니다. 내 몸은 힘들어도 내가 언제 한 번이라도 주인공 된 적이 없어요. 내가 참아야 돼! 왜 참는데? 참을 때 주위 사람들이 “역시 너는 참, 우리 집안의 훌륭한 장손이다” 이미 기존에 상주해 있는 그러한 시선들. “그렇지 그래야 너는 내 자식답지!” 하는 그러한 따가운 시선들 속에 그동안 힘들게 내 몸을 그들의 입맛을 맞춘다고 놀아난 겁니다. 백날 해 봐야 나중에 유산이 남아야 주지, 없는 유산 주지도 않아요. 그저 유산 생길까 싶어서 아부하는데, 나중에 아파서 돈 다 썼다고 하면 끝나는 거예요. 도대체 왜 그런 장단에 놀아난 거예요. 내 몸인데 주변의 욕심에 욕망에 기대에 왜 그렇게 부응을 했어요?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우리 앞집에 부부가 살고 있는데 부부가 아주 금슬이 좋아요. 뭐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하는 그런 정도로 부부 사이가 좋은데, 74밖에 안 된 할머니가 계단에서 내려오다가 넘어져서 허리가 다쳐서 요양병원에 갔어요. 어느 날 76인지 78인지 된 할아버지가 나무에 목을 매고 축 늘어져 자살을 했어요. 근처에서 봤습니다. 그래서 제가 뭘 봤느냐 하면 중력의 법칙을 느꼈죠. 그때 119 와 있고, 경찰이 와서 사진 찍고 했어요. 금슬이 좋아서 자살한 거예요. 할머니가 요양병원 가니까 외롭잖아요. 외로우니까 살맛이 안 나서 이렇게 살아서 뭐하냐 하고 자살한 겁니다. 자살이 나쁘다 좋다를 떠나서 그동안 자기 몸이 자기 몸이 아니었던 거예요. 아내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그러한 기쁨조로서 몸이었던 겁니다. 아내가 죽고 난 뒤에 외로우니까 그때서 비로소 아는 거예요. 내 몸이라 하는 것은 주변에 읽히고 설킨 관계에서 쥐었다 당겼다는 밀당 하는 것에 같이 밀리면서. 그런 식으로 자기가 누구인지 모르면서. 그러니까 이 부부가 좋은 의미에서 서로 사랑한 거예요. 그런데 그 사랑한 것이 아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 때문에 내가 존재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자기 몸은 자기 몸이 아니라 누구의 것이냐? 아내를 기쁘게 하기 위한 기쁨조처럼 그렇게 살아온 거예요. 주변에서 뭐라 하느냐 하면 금슬이 좋다는 거예요. 금슬이 좋은 것이 인생을 망쳐놨어요.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자살을 한다는 것은 무엇을 포기 하는 것이냐 하면 내일에 주어질 행복을 제거하는 것이 돼요. 내일에 어떤 행복과 기쁨이 있다는 것을 본인이 일방적으로 없다고 취소시키고 죽는 거잖아요. 내일되면 또 살만한 이유가 있을 건데, 자꾸 과거에 살았던 그 익숙한 몸이다 보니까 내일 무슨 좋은 낙이 있겠어? 이렇게 죽으면 그만이지! 이렇게 된 겁니다. 그러니까 그 죽은 할아버지는 세상에 대해서 아무 것도 없고 궁극적으로 자기가 누구인지 몰랐던 거예요. 평생을 살아도 남에게 휘둘리면서 살아온 거예요. 남들의 시선과 이런데 휘둘려 온 거예요. 너 그렇게 하면 내가 때찌한다. 이런 것에 휘둘려 온 거예요. 자기 몸인데도 남이 시킨 대로 사는 겁니다. 제가 몸의 용도를 써서 그런데 이 말을 용도라는 말을 쓰지 않고 그냥 여기 몸이 있습니다. 하면 사람들은 그 몸은 제 거 에요. 전부 다 이렇게 이야기 할 거예요. 자기 것 아닙니다. 그동안 나의 자리를 대신 침범했던 그들의 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주변에 누가 있었느냐 하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몸의 용도에 대해서 분명히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6장에 나온 말씀인데 아버지께서 내게 주지 아니하면 아무도 내게 올수 없다고 보는 거예요. 예수님의 입장에서 볼 때에 제자의 몸은 럭비공입니다. 축구공입니다. 아버지하고 아들하고 축구하는데 거기에 왔다리 갔다리 하는 그 축구공이 제자들입니다. 그게 몸의 용도에요. 그게 “경계”, 예수님 같은 경우에 제자들을 통해서 뭘 만드느냐 하면 이 세상에 있던 그 몸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창조, 원래 원하시는 창조의 취지에 부합되는 몸과 그 사이에 양쪽을 다 품고 있는 그 경계 선상에 있는 몸으로 12제자를 택하여 세웠습니다.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렇게 되어 있어요. 택하여 세웠다 이 말이죠. 그러면 이제 해답 나왔습니다. 몸의 용도가 뭐냐? 이질적인 두 세계의 경계선을 보여 주는 용도, 그게 12제자의 용도에요. 이질적인 두 세계, 그 가운데서 양쪽을 다 보여 주는 것, 그런데 그 양쪽의 세계는 결코 결합될 수 없는, 서로 대치되는, 달라도 너무 달라. 성격, 성질이 너무 다른 두 개의 중간에 대치되어 서 있는 것이 바로 12제자 몸입니다. 그 몸을 먼저 시범적으로 보여 준 몸이 누구의 몸이냐, 바로 예수님의 몸입니다. 오늘 본문 12절을 봅시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 여기서 경건이라는 말이 어디서 나와야 되느냐 하면 예수그리스도 안에서만 경건이 나와요. 그런데 우리 인간의 몸에서 나오는 경건은 경건의 몸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몸은, 자기는 자기 몸의 용도를 모르기 때문에 그래요. 자기 딴에 경건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 경건 하 냐, 안 하냐를 본인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주변 사람들에게 일단 물어보고 되돌려 받은 그 응답이 조립되어서 나온 경건이에요. “목사님. 저 어때요? 경건합니까?” “아이구, 경건하네.” “저 어떻습니까?” “그거는 죄지.” 아까 집사님하고 식사하면서, 뭐 늘 듣는 이야기지만 또 화가 나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어떤 교회, 어떤 교회 할 것 없어요. 그냥 우리들 교회에요. 우리들 교회 모임에 장로가 와서 자기가 출장 가서 바람피운 것을 공개적으로 이야기했는데, 사람들은 얼마나 용기 있느냐? 저렇게 바람피운 것 까지 공개석상에서 이야기를 하니까, 하면서 박수를 쳤다는 겁니다. 박수 친 사람 중에 집사님도 포함됐고. 그게 마귀가 그런 짓하고 있는 거예요. 마귀가. 자기의 사적인 이야기를 공개석상에서 할 이유가 없어요. 그거 왜 그런 이야기를 합니까? 자기가 바람피운 이야기를 했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다른 죄는 감추었다는 이야기에요. 비겁한 사람이에요. 바람피운 것이 죄라고 하는 것은 본인 생각이라고 생각하죠? 천만의 말씀. 주변에서, 이 한국사회, 모든 사회가 바람피운 것은 죄다. 어떤 죄보다 더 나쁜 죄고, 가정을 파탄하는 죄라고, 평소에 자기가 몸이 태어나면서 누누이 거기에 숙지되도록, 누누이 반복해서 그런 소리를 들어왔기 때문에, 그게 항상 각인되어 있어요. ‘이거 나쁜 죄야. 나쁜 죄야.’ 근데 시편 136편에 보세요. 별을 지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별을 보고 감사하지 않은 사람은, 주님의 인자하심을 발견하지 못한 것은 죄입니다. 성경대로 합시다. 그거 죄거든요. 그러면 그 사람이 그 공개석상에서 그렇게 자기 죄를 고백한다면, 뭘 해야 해요? 시편 136편이 왜 있습니까? 성경이 왜 있는 거예요? 자기 간음은 그게 계시가 아니에요. 그럼 뭐라고 해야 합니까? “성도 여러분! 내가 이런 지독한 죄를 고백하게 되어서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저는 북두칠성을 보면서 저는 주의 인자하심을 발견치 못했습니다. 돌로 치세요. 저는 죽어도 마땅합니다.” 이렇게 해야죠. 이렇게. 이렇게 해야 안 됩니까? 여기 시편 136편에 보면 “해로 낮을 주관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8절). 큰 빛들을 지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7절). 달과 별들로 밤을 주관케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9절).” 이렇게 되어 있잖아요. “그런데 목사님. 간음은 율법에도 나왔잖아요? 죄라고?” 이거 설명하고 방금 그거 설명하겠습니다. 하여튼 질문 한 것도 주의 뜻이에요. 무심코 나온 것이 아니고, 기초를 다지라고 주신 질문이거든요. 10계명 나오죠. 십계명 제일 밑에 나오는 것이 있어요. 뭐가 있느냐 하면 하나님을 사랑한 그 사랑으로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해야 된다고 나오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의 모든 인간의 움직임을 10가지 계명으로 커버가 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예를 들면 여기 3층이잖아요. 여기서 쿵쿵 거리면 2층하고 층간소음이 일어나죠. 그러면 이 10계명에다가 11계명이 뭐냐 하면 층간소음을 유발하지 말라. 이게 있어야 돼요. 왜냐, 그것은 이웃에 대한 사랑이 아니기 때문에. 그럼 제 12계명은 뭐냐 하면 부부싸움 할 때, 절대로 남자의 소리가 바깥으로 나와서는 안 된다. 여자소리는 나와도 되지만. 남자의 소리는 절대로 바깥으로 나와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이거 개그우먼 김숙이가 윤정수한테 이야기한 거예요. 김숙이라는 사람이 있어요. 가짜부부해가지고 하는 프로그램이 있어요. 어디 남자의 소리가 집 밖으로 나오느냐, 그거 집안 망한다는 거예요. 이거는 여자의 소리가 문 밖으로 나가면 집안 망한다는 조선시대 윤리를 반대로 바꾼 거예요. 의도적으로. 요새 시대는 그런 시대라는 말이죠. 여자가 나오는데 남자가 가만히 죽치고 앉아 있느냐 말이죠. 그렇다면 십계명에 주님의 사랑이 열 개로 충족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계속 조항이 늘어나겠죠. 365가지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열 가지 계명으로 멈추느냐, 마지막 계명을 몰라서 그래요. 마지막 계명은 이거에요. 아까 욕망이야기 나왔잖아요. 마지막 계명이 뭔 줄 알아요? 아시죠. 남의 것을 탐내지 말라. 탐내는 것이 뭡니까? 욕망이죠. 욕망. 인간의 몸을 지배하고 있는 욕망 자체가 이 십계명, 하나님의 사랑을 훼방하고 있는 중이다 하는 것을 까발리기 위해서 계명을 준 거예요. 계명은 죄를 더욱 더 죄 되게 하기 위해서. 10계명을 위반하기 이전부터 이미 죄고, 그것이 이런 뜻에서 들통 내는, 내 속에 이런 게 왜 들어있지? 라고 털어내기 위한 용도가 계속 10계명부터 추가적으로 계속해서 나옵니다. 그 추가적으로 나오는 율법적인 것이 뭐냐 하면, 제사지내는 것도 죄가 되고, 십일조 하는 것도 죄가 되고, 안식일 지키는 것도 죄가 되고, 그리고 성전을 경배하는 것도 죄가 되고, 찬송하는 것도 죄가 되고, 전도 하는 것도 죄가 되고, 교회 봉사하는 것도 죄가 되고, 계속 모든 게 죄가 나와요. 나중에 털털 털어버리면 죄 아닌 게 없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사도바울의 권면은 더욱더 심합니다. 예수님의 산상설교도 만만치 않거든요. 오른손이 한 것은 왼손이 모르게 하라, 기도할 때 달라고 기도하지 말라, 있어야 할 것을 주께서 아시느니라. 왜 자꾸 달라고 하느냐, 그것도 죄가 되는 겁니다. 오른 눈을 빼어버려라. 오른 손이 한 것은 잘라버려라. 나머지기 가지고 지옥가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주께서는 지옥을 전제로 깔고 하는 이야기에요. 그런데 사도바울의 권면은 그보다 더 셉니다. 우겨쌈을 당해도 싸이지 아니하고, 나는 남들 보기에 없는 자 같으나 있는 자요. 그렇다면 없는 자 같으나, 아무것도, 통장도, 재산도 없는데, 있는 자라는 것이 실감나지 아니하면 그거는 범죄입니다. 그건 범죄에요. 자기를 부인하라. 자기 십자가 지라. 전부 다 그거거든요. 형제를 미워하는 것은... 이거는 산상설교에 나온 거고. 처나 자식이나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않다. 그런 말씀들은 어떻게 매직으로 지울까요? 안 그러면 어떻게 없는 걸로 할까요? 어떻게 할까요? 인간은 간음을 모릅니다. 간음을 모르기 때문에 간음죄에서 회개하고 있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내가 그때 간음을 안 했으면, 나는 간음죄 짓지 않은 자라는 것을 전제로 깔고 그 다음에 간음죄를 회개 한 거예요. 그 사람 거꾸로 세워서 탈탈 털어보세요. 간음죄하기 전부터 이미 간음죄가 우르로 쏟아집니다. 그걸 감췄다는 말은, 감추고 간음했다고 생각하는 기준인데, 그 기준은 어디서 나오느냐, 그거는 성경에 나오지 않는 기준이에요. 어디서 나오느냐, 주변사람들이 성경을 왜곡해서 자기 자신한테 전달되었어요. 이런 짓 하면 안 된다. 남녀가 손잡는 것이 간음입니까? 간음 아닙니까? 말을 하는 게 간음입니까? 간음 아닙니까? 간음은 어떤 단절이 있으면 안 돼요. 간음하도록 유발시킨 그 원인을 계속 동질성으로, 연속성으로 이어가다 보면 처음부터 그 여자에 대해서 뭔가 뿅하고 반한 것부터가 간음의 시작입니다. 그걸 중간에 여기서부터 여기까지는 간음죄라고 끊을 수가 없습니다. 끊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옛날 고대부터 근친상간이라고 하는 것을 최초로, 모든 민족의 최초의 법은 근친상간이에요. 왜냐하면 자체적으로 의로움과 정의로움을 구현할 수가 없어서, 이웃집 마을과 이쪽 딸을 교환시키는 가운데 법을 만들어서 자기 속에 구멍을 만들어버려요. 우리 딸이지만 우리끼리는 결혼해서는 안 되고, 저쪽 옆집 총각과 결혼한다고 해서, 어떤 빈자리를 만들어놓고 여기서 그 빈자리를 뭐로 채우느냐, 그걸 하나님의 정의, 의로 간주해가지고 이것 중심으로 모든 게 돌아가게 되어있어요. 문화인류학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놓고 왕 자기는 해당이 안 돼요. 왜? 왕은 법을 초월하지 않으면 왕이 될 수가 없어요. 당신도 법대로 하라고 하면, 이러면 나라꼴이 안 돼요. 자기 빼놓고 예외적인 조항이 있어야 돼요. 예외적인 조항 빼놓고 전부 다 법대로 해야지 이게 나라꼴이 돼요. 교회법은 누가 절대 지켜서는 안 되죠? 목사가 지키면 안 돼요. 목사는 교회법에 해당이 되면 안 됩니다. 그러면 교회가 개판되니까. 누가 훅하는 카리스마가 있어야 되거든요. “당신은 뭔데 안 지키느냐?” “나는 교회지도자거든.” 이래야 교회가 돌아가요. 그게 재판관입니다. “목사님. 우리 이집사하고 김집사하고 싸우는데 어떻게 해야 합니까?” 판정할 때는 판정관은 반드시 법을 초월해줘야 해요. 이게 말이 어려워지는데 쉽게 하면 이렇습니다. 가정에서 문제 있을 때, 가장된 아버지가 법을 지키든가요? 안 지키든가요? 절대로 지키지 않아요. 그걸 만일 지키게 되면 애들이 우습게 봐요. 아버지를. 딸보고는 일찍 들어오라고 해놓고 아버지는 늦게 들어와요. 왜? 아버지니까. 그럴 때 가족은 법을 초월한, 우리하고 같은 동급으로 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법의 제정자입장이라는데 마음에 안심을 가져요. 나라는 몸에 뭘 정착시키느냐, 체계적인 정신이라는 질서가 몸에 부착이 됩니다. 그러면 그 애는 가정교육 잘 받은 애가 되는 거예요. 가정교육 잘 받은 애가 어떤 특징이 있느냐 하면 아버지가 지킬 만한 범위 내에서 가정교육 잘 받은 것이 돼요. 제가 말을 해놓고, 이게 뭔 뜻인지 모르겠죠? 이런 거예요. 대학생인데 어디 모임에 가서 술을 먹는다. 근데 어떤 학생은 술을 먹는데 그냥 먹지 않고 몸을 돌려서 이렇게 먹더라. 야, 웃기게 왜 이러 노? 우리 집에서는 아버지가 교훈하기를 반드시, 그러니까, 양육 받는데 몸이 있거든요. 몸의 용도. 몸을 아버지가 계속해서, 니는 어디가도 내 자식은 이래야 돼! 훈계를 시켜놓은 거예요. 그게 뭐냐 어른 있을 때는 앞을 보고 마시지 말고 돌아서서 예의를 갖춰서 마시는 것이다. 이렇게 되거든요. 그런데 다른 여학생은 술을 아예 안 먹어요. 니 왜 안 먹는데? 우리 집에서는 여자는 술을 먹으면 안 된다는 게, 그게 법이 되는 거예요. 같은 인간의 몸인데, 그게 상충되는 두 개의 분위기가, 환경이 따로따로 노는 겁니다. 서로 다른 정신세계를, 서로 다른 자아상이 성립되어버려요. 그럼 몸이 충돌돼서 친구하든지, 아이구, 니 잘났다. 니 집은 술 안 먹고 그래. 좋겠다. 이래 된다 이 말이죠. 그 아버지가 술을 왜 못 먹게 하느냐, 그 집이 바로 기독교 집안이거든요. 그럼 기독교 집안은 술 먹지 말라는 것은 어디서 나온 겁니까? 이미 한국의 기독교 150년 역사 가운데서 담배와 술을 금한다는 것이 들어와 있는 거예요. 술을 안 먹고 담배 안 피움으로써 집사로 교회에서 고위직을 차지할 수 있고, 다른 사람한테는 대외적으로 산상설교에서 말씀한 것처럼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고 교회에서 대대로 교사들이 그렇게 가르쳐 왔거든요. 근데 그 가르침에 대해서 예수님은 어떻게 생각하죠? 예수님 어디 한 마디 하시죠. 예수님 이 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예수님은 이거에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겁니다. 우리는 기독교 집안의 영광을 위해서, 그것이 곧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그런 공식에 의해서 훈계 받았지만, 직접 우리의 모든 몸은, 인간의 어떤 가문에 속한 몸이 아니고, 예수님의 용도를 보여주는, 예수님을 보여주기 위한 용도거든요. 그걸 보여주기 위해서 열두 제자는 자기의 가족과 자기의 친척을 버려야 했던 겁니다. 중요한 거 처음으로 나왔죠. 예수님의 성도의 몸은 먼저 조건이 뭐가 있다? 처나 자식이나 아비나 남편이나 그 가정을 떠나야 한다는 겁니다. 육을 떠나야 해요. 아브라함처럼. 이삭처럼. 야곱처럼. 육을 떠나야 돼요. 육을 떠날 때 그냥 떠나지를 못해요. 떠난다고 하니까 성경구절이 어디 있느냐고 하는데, 어떤 제자가 가기는 가지만 아버지 장례 치르고 가겠다고 할 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섭섭한 이야기하죠. 부조도 안 하고 하는 말이, 죽은 자는 죽은 자로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했습니다. 그걸 제자들한테 이야기 한 거예요. 너희들의 입장은 바로 산자와 죽은 자, 죽은 자와 산자, 천국과 지옥의 경계선을 보여 줄 용도로써 쓰여 진다는 거예요. 용도로써. 그런데 저쪽세계, 죽을 세계에는 이미 누가 선점하고 있느냐,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아이디어를 갖고 있습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 그들의 모든 윤리 도덕적 아이디어가 어디서 나오는가, 그들이 구약을 나름대로 해석해서 한 거예요. 그럼 구약을 나름대로 해석할 때, 그들이 도입한 것은 뭐냐 하면 바로 역사적 해석이라는 거예요. 역사적 해석이라는 것을 다른 말로 하면 전통적 해석이라고 해서, 전통적 해석인데, 전통적 해석에서 좀 더 설명이 필요해요. 이게 뭐냐 하면 옛날에 이랬으니까 해석하자. 그런 뜻이 아니고, 전통이 스스로 해석을 낳는다는 뜻입니다. 전통적으로 이런 해석입니다. 우리 그냥 수용합시다. 그게 아니고 전통적으로 오더라도, 이 시대에 그 전통이 합리적으로 맞느냐, 안 맞느냐에 따라서 적합한 것만 우리에게 적용시킵시다. 새롭게 전통을 만들어낸 그 해석이다 이 말이죠. 그 해석, 얼마나 합리적입니까? 누가 뭐래도 이것은 이성적으로 이의를 걸 수가 없죠. 과거를 답습하라는 것이 아니에요. 과거를 답습하라는 것이 아니고 과거의 좋은 것 가운데서 지금에 적합한 것을, 그것을 약간의 수정을 해서라도, 그걸 현재 우리에게 필요한 해석으로 삼자는 것이 전통적 해석입니다. 그런데 그 단어에서 적합하다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요? 적합하다는 게? 적합하다는 것이 뭡니까? 상황에 맞다는 뜻이에요. 그럼 자기가 처한 상황을 자기가 판단 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서 그게 나오잖아요. 이 상황은 지금 위기상황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이렇게 적용하자. 근데 그 상황 판단은 누가 일방적으로 합니까? 그 공동체가 일방적으로 하거든요. 그럼 공동체 하나하나, 개인 속에 뭐가 들어있죠? 욕망이 들어있죠. 아까 그대로입니다. 욕망은 뭐로 만들어졌습니까? 어릴 때부터 익숙해지고 들어왔던 윤리도덕체계가 그들의 욕망을 이루어줬잖아요. 이것은 해도 되고 이것은 안 해도 된다는 것이 이미 거기에 누적되어 있는 겁니다. 예수님은 말합니다. 바로 그것들이, 그것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거예요. 그 윤리도덕이. 그럼 그 윤리도덕을 로마서 10장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너희들의 성경해석은 무슨 행위냐, 그 근거가 있는데 그게 “자기 의” 라는 겁니다. “자기 의.” 그럼 자기 의는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남의 몸은 다 죽고 고생해도 내 몸은 평안해야 하고 행복해야 되고 오래오래 살아서 천국가야 됩니다.” 라고 자기 몸에 대해서는 그렇게 좋은 이미지를 남기는 겁니다. 왜, 남보다 자기 몸은 그렇게 평안해야 되고, 영원토록 행복해야 될 근거는 어디서 가져왔습니까? 그거 어디서 가져오죠? 그것은? 어디서 가져 올 데 있습니까? 없습니까? 가져올 데가? 성경에 그런 게 있어요? 여기 누구누구는, 이름 안 적혀 있죠? 그 근거가 있다? 없다? 없는 거예요. 놀라운 사실은 없는 근거가, 우리의 실감나는 현실이 된다는 것이 무서운 이야기입니다. 근거도 없으면서 이상하게 예수이야기는 거부하고 싶고, 그렇게 당신은 무조건 사랑받아야 되고, 당신은 사랑받기위해서 태어난 사람~당신은 무조건 행복해야 된다는 근거는, 듣기만 들어도 흐뭇해지는 이 몸은 숨어있는 보이지 않는 권력입니다. 그게 바로 악마의 권력이에요. 유대인들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성경해석은 딱 하나입니다. 이래나 저래나 무조건적으로. 무조건, 무조건, 유대나라는 해방되어야 된다. 그게 전제조건이었습니다. 이유를 묻지 마세요. 왜? 무조건 그렇다는 거예요. 어떻게? 하나님의 약속이 그렇다는 겁니다. 모세가 그렇게 했다는 거예요. 이스라엘은 영원하리라. 이게 모세의 약속이라는 겁니다. 예수님이 이야기하죠. 모세가 너희들을 저주한다. 너희 애비는 악마다. 예수님하고 이렇게 충돌할 만하죠. 예수님이 과장된 발언을 하신 것이 아니에요. 진실을 이야기한 겁니다. 피조물을 대표해서 창조주인 나를, 천지를 창조하신, 별과 해와 달을 만드신 나를 죽이라고 하나님께서 너희 유대인들을 남겨뒀다는 것이 예수님의 뜻이에요. 그 해석을 유대인들이 “예. 아멘. 할렐루야!” 하고 받아들이겠습니까? 안 받아 들이겠습니까? 예수님이 하신 이야기를 그들이 그걸 안 받아들인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가 생각했던 하나님과 충돌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 정리합시다. 사람들은 몸을 갖고 있는데, 외형적으로서는 뭐냐, 타인의 욕망이 가득 차 있다. 근데 타인의 욕망 중에서 나를 칭찬하고, 사랑하고, 나를 위해주고 보호해주는 그 이야기만 유독, 왜 내가 좋아하느냐, 그 근거는 없어요. 없는데, 무조건 내 위주로, 내 중심적으로 너는 잘 할 것이라는 그 격려와 위로에 대해서는 내가 굉장히 선호한다는 이 자체가, 그것을 선호한다는 그 자체의 이유를 몰라요. 이거는 아무리 박사라 해도 몰라요. 남들은 박사학위 안 따는 게 섭섭하지 않고 내가 박사학위 따는 것이 좋다. 이유를 모른다니까요. 자기 애 유치원에서 달리기 하는데, 남의 애가 엎어지게 되면, 잘한다. 할렐루야! 하고 자기 애가 엎어지게 되면, 야야 애가 왜 이러나? 왜 그런지 이유를 모른다니까요. 내가 왜 자꾸 내 편인지를 몰라요.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서 많은 철학자나 학자들이 분투노력합니다. 두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하나는 채식주의자. 한강이라는 사람이 지었던 채식주의자. 아버지가 동물 학대한 것에 죄책을 느끼고, 본인이 속죄하는 의미에서 고기를 먹지 않습니다. 결혼 한지 5년 된 아줌마가. 근데 그게 속죄가 되던가요? 잘 들어보세요. 외형적으로, 어릴 때 자기는, 월남전 참전했던 아버지가 개를 진짜로 개같이 다루었던 것에 대한, 그렇게 학대해서 잡은 그 개고기를 어릴 때는 어쩔 수없이 고기를 먹었다 이 말이죠. 그러면 외형적으로 남들이 아는 것은 뭐냐 하면 내가 채식만 고집하는 것은 아버지가 동물 학대했기 때문에, 동물한테 미안해서라도 내가 고기를 먹어서는 안 된다 했는데, 그것으로 자기가 속죄가 되느냐, 이것은 외형적으로 되는 것인데, 내면적으로 들어가 보니까, 두 번째 몽골 반점만 보게 되면 거기에 이런 내가, 속에 내가 뭘 깔고 앉아 있느냐 하면 성적인 욕망을 깔고 앉아서 이런 짓 하고 있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진짜 성적인 욕망은 가득 찬 데, 그걸 누른 방법이 뭐냐 하면 나는 착하다고 설치므로 말미암아 나에게 이런 꿈틀거리는 더러운 욕망이 있다는 것을 안 들키고, 그게 외부에 터져 나오지 않도록 고이고이 지금 땜질하고 있는 거예요. 그게 형부하고 관계를 가지면서 들통이 나버렸어요. 그래서 이 문제로 그 앞에 문제, 동물학대 문제는 날아가 버렸어요. 해답이 없습니다. 왜, 나는 그렇게 성적인 욕심이 아직도 있는지, 그게 왜 그런지, 그 이유를 모르겠다는 거예요. 이미 생물학적으로 나왔습니다. 인간은 짐승 같아서 짝짓기 하게 돼있어요. 이게 본성이에요. 그러나 소설에서는 과학책이 아니기 때문에, 자기 자신이 나라는 것은 없고, 그냥 작업적인 욕망덩어리로 그게 내부에, 지하실에 있다는 것을 알아요. 근데 그걸로 끝나지 않잖아요. 제 3부, 내가 무기물이 되는 겁니다. 내가 다시 사람이 아니고 나무가 되는 거예요. 그러면 무기물 위에 짝짓기 한 욕망이 있고 그 욕망 위에 껍데기만 살아있는 것이 있다. 이게 한강이라는 작가가 보는 이 세상의 군상이다. 상 받을만하죠. 감추고, 감추고 있고. 숨기고, 숨기고 있고. 그런데 그거는 남성들은 몰라요. 해병대 나오고 월남전 참전한 아버지는 몰라요. 남성들은 철이 없어서 눈에 보이는 것 가지고 설쳐대고 게임 벌이는데, 그걸 아는 것은 누구의 몫이냐 하면 여성의 몫입니다. 여성만이 세밀하게 인간의 기본을 알 수 있다고 했는데, 결국은 무기물이 기본이었습니다. 무기물이 기본이라는 것은 이미 프로이드가 이야기한 거예요. 거기에 대해서 박찬욱 감독의 아가씨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오늘 재미있죠? 아가씨라는 영화가 뭐냐 하면 남성들 역시, 철딱서니 없는 남성들이 음란서적을 읽어주는 여성을 노리개 삼아서 고급책을 팔면서 귀족생활하고 있는, 이 일제시대 껍데기만, 그 껍데기에 놀아난 여자가, 어릴 때부터 그런 것을 훈련받다가 이제 이걸 뒤엎는 거예요. 뒤엎어버려요. 세상에서 정치권력 가진 것, 귀족이라는 것, 일제시대 정치, 경제, 문제 이 모든 것은 철딱서니 없는 남성들이 구축했지만, 그것은 여성에 대한 학대와 여성에 대한 무시, 여성에 대한 모멸, 그걸 근거로 해서 그렇게 세워진 거예요. 따라서 그 밑바닥에 깔렸던 그 카페트를 확 걷어버립니다. 남성들보다 더 여성적인 면에서 성적인 것을 까발림으로 말미암아 여성이야 말로 진실 된 숨어있는 진리를 찾아낼 수 있다. 이게 칸 영화제에 초청받은 박찬욱 감독의 아가씨라는 영화에요. 영화 봐도 잘 모를 거예요. 결국 이 세상의 학문이라는, 철학이라는 이것은요, 근본적으로 왜 나는 나를 사랑하는지 그 이유를 몰라요. 그런데 예수님이 분명히 이야기했다고요. 바로 그런 너가 나를 미워함으로써 비로소 나를 미워하기 위해서 인간은 자기만 사랑하게 돼있다는 것이 예수님이 내린 결론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창조주와 결부될 때 진실이 밝혀져요. 그런데 지금까지 모든 학문은 예수님, 창조주, 이런 것을 완전히 끊어버리고, 자기가 도 닦듯이, 도를 백날 닦아봐야 소용없습니다. 황진이라는 조선시대 기생은요, 살아있는 부처라는 그 사람도 꼬셨어요. 지족선사, 서경덕이라는, 당대의 투톱이죠. 최고의 윤리, 지혜로운 학자도 꼬시고, 그 당시 불교적으로, 종교적으로 최고의 살아있는 부처라는 그 사람도 꼬셨어요. 미모에 안 넘어 가는 남자가 어딨어요? 이래 되는 거예요. 근데 꼬셨는데, 해답이 있습니까? 왜, 해답이 없습니까? 조선시대 때 누구 이야기가 없어요? 예수그리스도 십자가 이야기 없잖아요. 이방민족이니까. 사람이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이것이 마귀적인 이유가 예수님 제치고 따로 경건하겠는 거예요. 예수님 제치고. 예수님을 모델로 삼아서. 나도 당신처럼 열심히 하면 할 수 있다는, 그런 라이벌의식을 갖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미 결정지었어요. 그것마저 결국은 너가 너를 사랑하는 극단적인 최정점의 방법이 뭐냐 하면 자기학대, 자기를 부인해서라도 자기가 자기를 구원하려는 모든 시도. 그게 악마의 최후의 모습이 그겁니다. 바리새인보다 더 의가 낫지 아니하면 어디 못 간다고 했습니까? 천국이죠. 바리새인들이 그 당시 사람들 보기에 율법에 합당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에요. 심지어 바리새인의 그 당시 율법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남이 싫어하는 행동을 니가 하지 말라는 거예요. 어렵지 않습니까? 어디서 많이들은 이야기 같죠. 남이 싫어하는 것을 니가 하지 마라. 산상설교에 보면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대접하라. 그것하고 비슷하죠.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이 바리새인 율법에 나와요. 심지어 공자이야기도 나옵니다. 공자이야기에. 그런데 그걸 통해서 사람들이 그걸 보는 순간 뭘 느낍니까? 나는 나를 사랑해서라도 저 말씀을 안 지키겠다고 나오겠습니까? 지키겠다고 나오겠습니까? 안 지키면 미워할 거야. 누굴? 나를. 내가 목표가 있는데 숙제를 안 한다는 것은 찝찝하거든요. 내가 안 들었으면 몰라도 이미 들은 이상은, 그걸 숙제를 할 때 뭔가 성취감이 있습니다. 세상에! 이런 말씀까지 내가 준수하는구나. 야, 이정도면 내가 대단한 신자네. 자기의 괜찮은 이미지에 자기가 매료되어가지고요, 자기가 자기 교주가 되고, 자기한테 유일한, 충실한 신자가 돼요. 자기 집구석은 성전이 되고. 집에 올 때 신발 벗고 와가지고 자기한테 경배하는 것. 심지어 찬양하면서도 경배하죠. 오늘 목소리 왜 이리 잘나오는지 모르겠다. 오늘 음정도 안 틀리고 와, 미치겠다. 정말. 나 이렇게 잘 나와도 되는가? 기도해놓고 은혜 받으면 와, 이렇게 은혜 받아도 돼? 자기를 인하여 즐거워하는 거예요. 시편하고 전혀 상관없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즐거워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로 인하여 즐거워하는 거예요. 나를 끄집어내는 과정을 통해서 즐거워하는 것이 아니고, 구원의 하나님, 구원이라는 것이 끄집어내는 것, 나를 질질 끄집어내는 그 과정 자체가 즐거운 것이 아니고, 끄집어냄을 당하는 내가 내 모습을 보고 좋아하고 있다니까요. 세상에 뭐 이런 정신질환이 다 있어요? 참, 이게 아담 안에 모든 인간은 정신병 환자입니다. 오늘 본문에 분명히 예수 안에서라는 말씀이 나왔어요. 예수 안에서. 근데 "예수 안에서"는 실제로 보이지도 않아요. 딱 떼버리고 뒤에 뭐가 나오느냐 하면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이게 뭐냐 하면 핍박을 받으면 이거는 반대로 경건이고, 핍박 없으면 경건 아니다. 이렇게 돼버리죠. 그러면 핍박을 유도하기 위해서, 요즘 시대에 가볍게 핍박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은 있어요. 비행기타고 북경에서 연변에 갑니다. 두만강 건너가면 돼요. 특히 미국 시민권가지고 건너가게 되면 2년 만에 풀려나옵니다. 기자회견 한 번 하고. 인민들의 존엄성을 내가 목독했다고 인사하고. 한 2년 만에 풀려나와서 책 하나 쓰면 돼요. 얼마 전에 그랬죠. 미국 시민권 있는 목사가 가서 이상한 복장하고 기자회견해서 우리 어버이, 김정은께 잘못했다고 하고. 2년 있다가 나왔어요. 핍박은 그렇게 요란스럽게 하는 것이 아니에요. 핍박은 누가 하느냐, 본인이 본인을 핍박하고 있어요. 매일같이 핍박합니다. 때찌! 때찌! 본인이 본인을 때려요. 좀 더 열심히 해야지. 니가 이래서 되겠어? 이래가지고 너를 주시하는 시선이 한 둘이 아니고, 얼마나 너에게 실망스럽겠어? 남들 보기에, 너한테 기대 거는 사람들한테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서 더욱더 매진하고 열심히 해야지. 이래가지고 되겠어? 내가 나한테 계속 꾸중하고 그렇게 합니다. 이게 인간이 할 수 있는 경건의 한계입니다. 이러지 마세요. 정말 인간이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됩니다. 그건 나를 위한 몸의 용도지, 절대로 주님을 위한 몸의 용도는 아닙니다. 그럼 목사님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 열두제자 있잖아요. 열두제자. 어떤 열두제자? 성령받기 전의 열두제자 있잖아요. 그 코스가 지금 우리가 가고 있는 코스에요. 열두제자 성령받기 전에 참 착했습니까? 참 착하게 살았더니만 오순절에 성령 받았어요? 어떻게 살았습니까? 그냥 지 맘대로 살았죠. 지 맘대로. 그냥 막살았죠. 그냥 고기 잡으러 가고. 예수님 부인하고. 예수님 부인한 베드로는 용감하기라도 하지, 나머지기는 코빼기도 안 비치고 다 도망가 버리고요. 사도요한은 옷 벗겨도 그것도 모르고 도망가 버리고요. 나중에 비겁하다고 해가지고 마리아하고 여자들 틈에 섞여가지고 십자가 멀찍이 바라보고. 그랬던 사람들이에요. 왜? 내 몸은 귀하니까. 내 몸을 아끼니까. 경건은 둘째 치고 살고 보자. 이게 열두제자가 보여주는 거거든요. 그러니 열두제자의 존재가 얼마나 감사합니까? 어쩌면 우리들이 살아가는 모습과 거의 똑같은 거예요. 예수님하고 기적 일으키고 해도 항상 생각하는 것은, 우리 중에 누가 높은 사람 되겠습니까? 그거 미래의 천국에서 높은 자리에 앉으려고 생각하는 거예요. 성과급 바라는 겁니다. 저 인간을 꺾을 때, 심지어 치맛바람까지 해서 두 엄마가 와서 자기 아들들을 높은 자리에 해달라고 하니까 다른 제자들이 화를 내는 거예요. 화를 내는 제자들도 문제고, 뇌물 써서 치맛바람 일으키는 두 엄마도 문제고. 철저하게 우리의 본질을 십자가 앞에서 밝혀주는 그 과정이 열두제자의 3년의 과정입니다. 우리는 그것이 30년이 되고 50년이 되고 연금 타먹으면서 죽을 때까지. 하늘이 부를 때까지 계속해서 열두제자의 그 되지도 않는 것을 계속해서 반복해서 내놓아야 되는 겁니다. 왜? 그들이나 지금이나, 그들은 그런 짓해서 성령 받았지만 우리는 이미 그런 짓하고 있으면서 성령을 받고 난 뒤에 그 열두제자의 모습을 반복해서 보여줌으로써 우리 몸의 용도를 다하는 겁니다. 세상에 이런 기쁜 소식이 어디에 있어요? 죄지으면서 주님의 실험실에 좋은 재료가 된다는 것. 얼마나 이건 가벼운 겁니까? 나만 가볍나? 주님이 십자가를 증거 하는데 있어서 열두제자뿐만 아니라 우리까지 충분하게 활용을 해주신다는 그 점에 대해서, 더 이상 내 몸에서 내가 손을 떼라 이 말입니다. 어떤 좋은 기대를 가지고 내 몸에다가 부담감을 주지 마시라는 이 말입니다. 바람 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뱃전에 파도가 부딪치는 대로 그냥 사시다 보면 그게 몸의 용도에요. 나를 나보다 더 사랑하시는 분이 나로 하여금 나를 잡고 있는 손목을 억지로 꺾어서 제발 놓게 만들어요. 제발 좀 놔라. 니가 안 붙들어도 되거든. 내가 니 멱살을 쥐고 있기 때문에. 안 놓잖아요? 안 놓으니까 환란과 곤고와 핍박과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나 온갖 것 동원해서, 제발 니가 너를 붙잡지 마라. 다 놓아버려라. 그럴 때, 떨어지지 않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비로소 너가 느껴질 것이다.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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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218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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