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의존교회 160708a (사명)-이 근호 목사
서울 의존교회 160708a (사명)-이 근호 목사 디모데후서 3장 13절부터 하겠습니다.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나니” 14절,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네가 뉘게서 배운 것을 알며” 15절,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이렇게 되어 있죠. 방금 읽었던 이 대목을 보게 되면 그 느낌이 이런 거예요.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사람들은 더욱 더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나니, 라고 하는 말을 해서 방치되는 현상이 일어나 줘야 된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의해서 “니 맘대로 살아. 니 마지막 때까지 니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살아. 나는 너에 대해서 신경 안 쓸게.” 라는. 로마서 1장에 나오는 것처럼 “내어 버려 두사” 그래 니 맘대로 살아라 하는 그쪽 현상이 일어나게 돼요. 그쪽 현상이 일어나면서 ‘너희는’, 또는 ‘너는’ 이래 되죠. 이런 이야기를 대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지금도 구원을 하십니다. 구원 작업을 하십니다. 하시는데 어디서 하는가, 골방에서 하는가, 기도원에서 하는가, 교회에서 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일상생활 가운데에서 하나님의 구원 작업은 쉬지 않고 지금도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어요. 있는데, 그 현상을 우리가 어디서 파악할 것이냐 그 문제거든요. 어디서 파악하느냐, 악한 사람들로 하여금 서로 속이고, 더욱 더 악하여지기도 하고,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는, 그런 현상들을 찾아봐라. 그러면 그들이 스스로 속이고 싶어서 속이는 것도 아니고, 악하고 싶어서 악한 것이 아니라, 주님의 방치하는 적극적인 활동에 의해서 그들은 서로 속이고 속기도 하는 그런 현상으로 이해해야 된다는 겁니다. 악한 사람들로 하여금 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방치하시는 현상을 통해서 방치하지 않는 쪽은 어떤 쪽으로 주께서는 유도해내시는가를 파악할 수가 있다는 겁니다. 보통 세상은 사람들에 의해서 사람들끼리 구성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이 세상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들밖에 없기 때문에, 사람들이 알아서 자기들끼리 친하게 지내면 좋은 관계되고 나쁘게 지내면 나쁜 관계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리 돼버리면, 사람들만의 세상이라면 여기서 뭐가 성립이 안 되느냐 하면 구원이라는 것이 성립이 될 수가 없어요. 구원. 그저 사람들만의 세상이라면, 남들보다 조금 더 행복하고 여유 있게 살게 되면, 이것이 자기 기대치에 만족한다면 이걸로 주저앉고 마는 겁니다. 구원이라는 것이 나오질 않아요. 사람들만의 세상에서 성실하게 살게 되면 행복하고 여유 있게 산다. 이것은 어떤 관계냐 하면, 여기 모자람에 열심히 성실하게 살았더니만 여유 있게 살았다. 이 사이가 끊어짐이 없어요. 이어지는 겁니다. 한때는 방탕했지만 지금은 착실하게 열심히 노력했더니만 마지막을 여유 있게 보낼 수 있었다. 이 사이에 어떤 끊어짐이 없습니다. 매일같이 노력하고 성실하고 바르게 살고 착하게 살았더니만 여유 있게 되었다. 이게 구원입니까? 이게 인간들의 희망사항이지, 이게 구원이겠어요? 여기 무슨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 이렇게 여유 있게 살고 행복한데, 구태여 구원받을 필요가 뭐가 있겠습니까? 우리 애기엄마. 애기 잘 크고, 지금 보니까 가장 행복한 순간 같은데. 애만 집착하면 되니까. 딴 거 걱정하지 않아도 되니까. 애하고 하루 종일 잘 놀고 잘 키우고 기저귀 갈아주고. 그런데 여기 기필코 구원돼야 돼! 라는 그러한 의지가 생겨나겠어요? 애기야 잘 커서 우리 나중에 행복하자. 이러한 희망만 있을 뿐이지. 아니야. 기필코 구원받아야 돼! 라는 동기유발이 안 되잖아요. 동기유발이. 애를 낳아서 성실하게 착실하게 잘 키웠더니만 나중에 역시 거기 노력에 대한 대가를 얻었다. 여기에 무슨 끊어짐이 있습니까? 단절이 있겠어요? 무슨 구원이라는 것이 성립 됩니까? 그래서 성경 자체도 그렇고, 사도바울 자체도 그렇고, 지금 사람들에게 있어서 구원이라는 관심사가 없어요. 구원에 관심사가 없는데, 구원에 관심사가 없는 세상을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그렇게 방치했다는 것이 오늘 본문의 뜻이에요. 구원에 관심도 없고, 구원에 대해 아무 생각도 없고, 천국도 지옥도 관심도 없는 그것을 가지고 그들은 서로 속는다고 이야기하고 서로 악하여진다고 그렇게 표현하는 겁니다. 안 악하면, 착하게 살면 구원된다는 이야기가 아니에요. 예수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거든요. 자신이 악한 그룹에 속하지 않고 벗어나 혼자서 바르게 산다고 구원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돼버리면 여기 구원이라는 것이 있을 필요가 없어요. 인간들끼리 사는 세계에서 남들은 악하더라도 너는 빠져 나와서 너만 바르게 살면 된다. 이렇게 돼버리면 예수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도 필요 없고 구원도 필요 없고, 오직 자기 성실함과 착실함만 있으면 돼요. 그렇게 본문을 이해하면 안 되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이것이 틀렸다는 의미에서 악하고, 악한 것을 지우는 거예요. 악함을 게을렀다. 인간의 마음이 나쁘다. 이것으로 보지 말고, 이것을 뭘로 보느냐 하면 방치하심으로 보자 이 말이죠. 왜? 오늘 본문 취지가 그러니까요. 악한 자들로 마음껏 악하게 해! 속이는 자들로 원 없이 속이는 걸로 구성하라고 해! 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배후에 의도적으로 몰아세운다는 느낌이 강하게 있다는 거예요. 이 세상에 대해서. 그래야 구원이라는 것은 노력해서 얻는 것이 아니고, 저쪽을 방치하는 대신 이쪽에는 하나님께서 성심성의껏 관심을 보인다. 그래서 관심의 결과가 뭐냐, 구원이었다. 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야 구원받고 난 뒤에는 니가 착실해서 구원받았지? 아닙니다. 그럼 뭐냐, 예수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이 되었습니다. 이게 그런 고백이 나오는 거예요. 누구로 말미암아요? 자기로 말미암아 자기가 구원된다고요? 아니에요. 무엇으로?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 때문에 그렇게 됐다는 거예요. 그러면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왜 구원받지 못해요? 자기들 때문에? 아니에요. 예수님 때문에 구원받지 못하는 거예요. 그래서 지금 신바람 나는 겁니다. 신바람 이박사 되는 거예요. 세상을 살 때 이왕 사는 것, 날씨도 더운데, 신바람 나게 살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신나게 살아야 되지 않습니까? 자유가 뭐, 이게 자유죠. 하나님께서 제거해주시는 쪽 따로 있고, 하나님께서 챙겨주시는 쪽 따로 있다는 것. 그걸 안다는 것. 그걸 안다는 것은, 모든 이 세상의 움직임이, 그 주인공이, 인간들의 세상이 아니라 그 위에 누가 계셔요? 예수그리스도가 다스리는 세상이다. 라는 이러한 낌새를 알아챘다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런 그리스도의 활동과 그걸 알아차린 내 마음속에 연결고리가 성립되어 있다는 뜻이에요. 이걸 동일시라고 합니다. 어려운 말로 동일시. 같다. 통하는 것이 있다. 이 동일시는 같은 공간에 형성될 때 가능한 겁니다. 그 공간 형성을 요한복음 14장에서는 성령이 오게 되면 같은 공간이 마련될 것이다. 성령이 오게 되면 길길이 날뛰고 방언하고 뜨겁고, 뭐 이게 아니고, 같은 공간에 편입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성령이 온다는 말은, 예수님 계신 곳, 아버지 계신 곳에 너희도 함께 있다는 거예요. 그렇다면 그 공간 안에서는 인간의 행동에 따라 결과가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함께 계신 예수님의 행동에 따라서, 같은 공간에 있다는 이유 때문에 동일한 혜택을 입게 되는 거예요. 이게 복음이에요. 이게 복음입니다. 세상이란, 인간 대 인간들만의 세상이 아니에요. 그걸 주도하시는 분이 따로 있는 거예요. 그걸 어떻게 아느냐? 너는 그걸 어떻게 알아? 할 때, 질문이 두 가지 종류의 질문이 될 수가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신자로서 어떻게 아느냐? 알고 묻는 것, 다른 말로 하면 성령 받은 자가 “목사님. 그걸 어떻게 알지요?” 라고 묻는 것과 성령 안 받은 사람이 “그걸 니가 어떻게 알아?” 묻는 것과 질문에 대한 답변이 상호 달라요. 성령 받은 사람이 “목사님. 그걸 어떻게 알아요?” 한다면 그 다음이 말이 돼요. “그거는 성경에서,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성경에서 압니다.” 라고 말이 되는데, 성령 받지 않은 사람이 “목사님. 그걸 어떻게 알아요?” 한다면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라고 하면 “성경 그거 뭔데?” 이래 된다 이 말이죠. “성경 그거 뭔데?” 16절 봅시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라고 되어 있죠. 성경은 □로의 감동으로, 무엇의 감동으로? 하나님의 감동이죠. 그러면 성경을 계시를 받았던 선지자나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서 썼던 사도바울이나 이런 사람들의 감동은 포함이 될까요? 포함되지 않을까요? 성경을 썼던 사람들의 개인적인 감동, 선지자의 감동은 하나님의 성경책 작성에 있어서 어떤 기여도를 할 수 있느냐 이 말이죠. 5퍼센트 포함이 되어 있습니까? 1퍼센트? 안 되죠. 그러면 어떤 사람들이 말마따나, 그럼 기계냐? 미싱 기계? 밟으면 두드득 박히는 것처럼 그냥 미싱 기계냐? 하나님 손가락 오므렸습니다. 주여, 계시해 주옵소서. 알겠습니다. 두두두득...알겠습니다도 필요 없어요. 그냥 두두두득..그 다음 잠자고 있으면서 뭘 써내려 가는데 보니까 성경 되었다. 뭐 그런 거예요? 그런 기계적이에요?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다는 말은, 성경을 기록한 선지자들의 감동은 부정적 처사를 받는다는 겁니다. 성경을 쓴 사람, 선지자 본인이 하나님의 감동 속에서 내 행함은 가치 없음을 아울러 같이 표하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성경을 쓴 선지자뿐만 아니고 그 쓴 성경을 성령에 의해서 보게 된 사람들도 이 성경을 보면서 내가 죄인입니다. 내가 죄인이구나. 그런 고백이 절로 나올 수밖에 없는, 그것도 기쁨을 가지고 나올 수밖에 없는 형편에 있습니다. 내 행함을 가지고 집어넣었으면 큰일 날 뻔 했습니다. 라는 것. 그리고 내가 이런 공간, 성령 안이라는 공간에 들어오게 된 것에 대해서, 내 행함과 내 경건이 전혀 보탬이 되지 않고 도리어 방해만 됐을 뿐이라는 사실. 근데 그 방해마저 하나님의 감동이 극복하셔서 끄집어 들어오게 하셨다는 것. 그것을 우리가 같이 고백하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 단정할 수 있는 근거는 어디 있느냐, 그거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지금까지 한 거 다시 한 번 정리하겠습니다. 한 10분 지났으니까 다 잊어버릴만 하죠. 까먹을만 하죠. 오늘 본문에서 속기도 하고 악하여진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로마서 1장에 나오는 것처럼 “내어 버려 두사”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지만, 하나님이 분명히 방치한 사람들, 내어 버려 둔 쪽이 있다는 거예요. 그렇게 해놓고 “너는” 이라고 하는 거예요. “너는” 너는 이라고 해놓고 너는에 해당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방치하지 않으시고 관리대상으로 삼는, 하나님께서 친히 구원하시기로 작정 하셔서 관리대상이 되는 겁니다. 자, 그러면 악하다, 속이다, 그 개념이 뭐냐, 이거는 악하고 속이는 본인들은 몰라요. 그냥 처음 말한 것처럼 최선을 다하여, 인간만의 세상, 모든 것이 인간만의 세계에서 그냥 나름대로의 성실하게 살면 되는 거예요. 우리가 속이고 악하다 해서 교도소 가는 사람들만, 경찰서 오는 사람들만 생각해서는 안돼요. 이거 보통 사람들만 이야기하는 거예요. 관심사가, 내 인생은 나 하기 나름이다. 그거에 몰두 된 사람들이 여기 다 해당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방치하셔서 악하다는 그 개념을 그들은 도저히 수용을 할 수가 없습니다. 왜? 자기가 주인공인데. 내 인생의 주인공은 자기 자신인데. 남의 의해서 수동적으로 움직인다는 것에 대해서는 도저히 분노가 일어나서 참을 수가 없을 거예요. 참 점잖고 착실한 그런 사람들, 노인정에 가면 많이 있어요. 나이 70, 80세 되어서 장기, 바둑 두고 앉아있는 노인네들 쭉 보면 옛날에 전부 다 한 가닥 했다는 기억들을 갖고 있어요. 왕년에, 왕년에 잘나가는 사람들 거기 다 모여 있습니다. 거기 가서 그 사람들을 몽땅 죄인으로 만들어보세요. 여러분이 살아 온 것은, 이렇게 여러분이 살아오면서 늙어 죽어가는 것은 여러분의 죄 때문입니다. 라고 한다면 신발짝 던지고 난리날 거예요. 후딱 이야기하고 후딱 뛰어나와야지 안 그러면 몰매 맞는 수가 있습니다. 전부 다 한 가닥 하는 사람들이거든요. 뭐 대단한 결과가 없어도 사람이 나이 들면 남는 것은 자존심만 남게 돼요. 고집과 자존심과 아집과 왕년에 그거만 남거든요. 그래서 자기 자신에 대해서 굉장히 억지를 부리는데, 이것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것을 자기와의 동일시라고 합니다. 자기와의 동일시. 모든 인간들은 자기 자신과의 동일시. 내가 여기 있다면 정말 나 다운 것을 외부에서 가져오는 거예요. 가져와서, 그 마네킹, 그 대상을 이미지를 삼아놓고 그것과 억지를 부리면서 기어이 내가 좋아하는 그것과 나는 일치된다고 그저 자부하는 그런 즐거움으로 살아가는 거예요. 자부하는 그런 즐거움으로. 자기와의 동일시에요. 이 자기와의 동일시를 하는데, 여기 중간에 누가 끼어들어가지고, 당신은 죄인입니다. 당신은 속고 악합니다. 이렇게 해버리면 그들은 참을 수가 없어요. 왜? 이걸 깨트리면 이게 같이 죽어요. 자기와 동일시 한 것을 깨트리면 내가 죽어요. 내가 없어요. 이걸 깨트리면 ‘나’가 없는 거예요. 제가 무궁화 열차타고 부산 가면서 75살 먹은 할아버지가 전화를 하는데, 무궁화니까. 전화를 큰소리로 해요. 가서 조용하라고 했어요. 이게 하나의 시험, 테스트거든요. 저 사람이 얼마나 고집만 남아있는지. 나이 70넘으면 고집밖에 안 남아 있거든요. 그 변화추이를 살펴봤어요. 욱하고 들어서게 되면 일단은 기에 눌리게 되어 있습니다. 뭐라고 하느냐 하면 뭐 다른 사람도 떠드는데 내가 전화 와서 받느라고 떠들었지. 그렇게 나와요. 1단계에서 머무는 사람이 없어요. 2단계, 니가 뭔데 하면서 더 떠들어요. 갑자기 반항한다고. 3단계, 젊은 놈들이 이러면서 한국의 젊은이들 다 집어넣어서 욕하는 거예요. 왜 자기와의 동일성을 왜 건드리냐 이 말입니다. 왜 건드렸느냐? 근데 자기와의 동일성이 되면 여기 뭐가 없느냐 하면 구원자체가 성립이 안 돼요. 구원 자체가. 이게 허물어져야 하거든요. 여러분 성경에 삭개오 있죠. 삭개오가 돈 많은 부자였습니다. 근데 삭개오에게 예수님이 들어서니까 삭개오가 어떻게 했습니까? “네 배나 갚겠나이다.” 이래 나오죠. 이게 뭐냐 하면 자기와의 동일성에서 벗어나서 주님과의 동일성. 주께서 바라보는 관점으로 바라보는, 주님과의 동일성이 형성된 거예요. 그건 본인이 잘해서가 아니라 삭개오의 집 자체를 예수님이 동거하는 예수님의 집으로 내놓았기 때문에. 전에 내가 턱하니 자리 잡은 그 자리를 예수님이 턱하니 자리 잡아요. 나의 주도권이 자리한 그 자리를 그 분이 자리 잡을 때, 그거는 공통 공간이 되면서 그 공간에 의해서 삭개오는 혜택을 입었는데, 그 혜택 중의 하나가 “네 배나 갚겠나이다.” 하는 그런 현상이 일어났어요. 자기 돈 주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에 의해서 시킨 거예요. 자기와의 동일성에서 주님과의 동일성. 쉽게 말해서 주님과 한 방을 함께 쓴다. 이래 보면 돼요. 주님과 동일성 하니까 자꾸 주님을 두 손 잡아가지고 나한테 오세요. 이렇게 하는데,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니고. 그것은 선교단체에서 그렇게 하는 거고. 그게 아니고 이 말은 내가 그전에 살았던 이 공간이, 사실은 내 것이라고 여겼던 이 공간이 처음부터, 창세전부터 이 공간이 내 공간이 아니고 주님이 터 잡아 준 공간이에요. 주님께서 조성해 준 공간에 그냥 내 안에 덩그러니, 처음부터 저를, 태어날 때부터 이미 그 공간에 상주하고 있으면서도 그 점을 몰랐죠. 세상살이 바빠 가지고. 자기와의 동일시 하느라 바빠 가지고. 이게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여기서 주님과의 동일시가 돼버리니까 여기서 주도권이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나를 일부러 만들었다는 것. 거기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은 그냥 방치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그러면 구원에 나를 이렇게 넣게 한 힘은 뭐냐, 이미 구원받아 놓고 그 다음에 뒤늦게 어떻게 해서 구원받았습니까? 어떤 방식으로 구원받았어요? 뭐 어떻게 움직여서 구원했고 나같이 고집이 센 사람을 어떻게 변화시켜서 구원했습니까? 라고 물을 때, 그거는 성경에 나와 있다. 이래 되는 거예요. 성경에 나와 있다.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성경에 보면 구원 될 수 없는 너를 구원되게 하신 하나님의 그 활동사항이 성경에 쭉 나와 있는 거예요. 그래서 구원받은 사람의 특징은 뭐냐 하면 자연적으로 보게 되죠. 왜? 도대체 성경의 어떤 내용 때문에 말도 안 되는 내가 천국을 가게 되었지? 주님과 영원히 동거하게 되었지? 라고 볼 수가 있는 겁니다. 창세기 3장의 에덴동산에서 아담이 쫓겨났습니다. 그걸 통해서 에덴동산은 영원히 살기 위해서 만든 장치가 아니고 거기에 선악과 심어놓아 가지고 여차해서 조건 안 맞으면 에덴동산에서 추방할 수 있는 그런 동산입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에덴동산은 에덴동산다운 사람만 하나님과 살 수 있다는 뉘앙스를 거기다가 담은 거예요. 조건 맞지 않으면, 다시 말해서 선악과를 따먹지 않는 조건하에서만 살 수 있고, 선악과를 따먹고, 다른 말로 하면 선과 악을 안다면 추방될 수밖에 없는 입장입니다. 그리고 추방되어서 나온 것이 오늘날 이 모양 이 꼴이잖아요. 이 모양, 이 꼴을 다른 말로 하면 선악에 대해서 알고 있다 이 말이에요. 선악을 알고 있기 때문에 선악을 모르는 자로 살 수 있는 그 낙원에는 두 번 다시 갈 수 없다. 이게 하나님의 원칙으로 이미 확정이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구원이라는 문제가 내 구원이 아니고, 구원 문제의 진짜 본질은, “내가 어떻게 구원받습니까?” 가 아니라, “나를 현재 있게 한 그 조건이 주님에 의해서 현재 어떻게 달라졌습니까?” 하는 문제에요. 그게 관건이 되겠죠. 왜? 추방된 자는 추방될 수밖에 없어요. 추방된 자가 도로 들어가겠다는 것은 건방져도 보통 건방진 이야기가 아니거든요. 아들로 태어났는데 딸이 되게 해달라고 하면 말이 안 되거든요. 그런데 갈 수 없는데, 어떻게 이미 들어와 버린, 이미 천국에 와버린 사람이 되었느냐, 그것은 나의 행함과 관계없이 나를 덮어씌운 조건이 주님의 의해서 변경되었기 때문에, 이게 달라졌기 때문에 그런 거거든요. 어떻게 나와 손잡지 아니하고 어떻게 나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주님이 일방적인 조치로 나의 영원한 운명의 조건이 그렇게 탈바꿈 될 수가 있는가? 궁금해요? 궁금하면 성경 보면 되죠. 그것 때문에 성경이 감동으로 된 거란 말이죠. 나도 감동으로? 자기 감동 집어넣을 필요 없어요. 주님의 감동, 하나님의 감동 되었으면, 우리는 성경에서 순수하게 하나님의 감동만 감사하면 되는 거예요. 거기다가 내 감동, 내 성실함과 내 경건함과 노력함이 들어가면 안 돼요. 오히려 그것이 방해가 될 뿐이에요. 빼야 되죠. 이제 성경 보는 것 쉽죠. 내 것만 다 빼면 돼요. 내 것만. 내가 할 수 있는 것 다 빼면 돼요. 내가 할 있어서 어떤 결과를 계산한다면 그것은 악하고 속이는 거니까 그건 다 빼면 되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그럼 구원받았으면 뭐 할 거 없네? 우리 십자가 마을 들어와서 복음을 알았다는 사람들에게 느낌 같은 것이 그런 게 많이 있어요. 구원받았으면 아무것도 할 게 없네요? 라고 해요. 그 사람들이 성경은 안 보고 십자가마을 사람들이 글 주고받는 논쟁하는 것만 봐서 그래요. 성경에 보면 나와요. 뭐냐 하면 구원받은 사람의 특징이 이거에요. 사명이 있습니다. 어디에 나오느냐, 출애굽기 4장에 보면 모세가 나오잖아요. 모세는 사명을 받았는데, 모세의 사명이 뭐냐, 제가 결론부터 먼저 할게요. 이게 굉장히 어려운 거라서 결론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모세의 사명이 뭐냐 하면, 마지막임을 드러내라. 어디에서? 이 땅에서. 이 땅이 마지막 땅이라는 사실을 너가 드러내는 사명을 해라. 마지막 때 다른 말로 하면 이 세상에서 움직이는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다는 것을 드러내는 식으로 살아봐라. 이게 모세에게 주어진 사명이에요. 그래서 출애굽기 4장에 보면 갈 때 손에 뭘 들고 가죠. 뭘 들고 갑니까? 모세가 애굽에 내려갈 때 빈손으로 가는 것이 아니고 뭘 들고 가죠. 지팡이죠. 그 지팡이를 가지고 움직일 때마다 어떤 사실이 등장하느냐 하면 이 땅이 심판의 대상인 것을 드러내는 사건들이 일어나요. 땅이 심판이 대상이라면 땅위에 사는 사람들은 어떻게 되겠어요? 자동적으로 뒤집어지는 거죠. 자동적으로 무가치한 것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출애굽이라는 것은 출애굽기에 나오지만 사실은 마지막 때에서 건짐 받은 집단이 이스라엘이라고 보면 됩니다. 신약의 마지막이 출애굽에도 이미 거기에 걸쳐있다고 보시면 돼요. 큰 치마를 이렇게 덮듯이. 십자가가 전봇대라면 전봇대의 긴 그림자가 출애굽기까지 이렇게 드리워져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애굽 바로는 나중에 하도 재앙을 얻어맞으니까 타협적으로 나왔습니다. 자, 왜 모세는 바로와 타협을 할 수 없습니까? 타협이 돼버리면 기존 세계를 그냥 연속적으로 유지하는 것이 돼요. 마지막이 안 된다니까요. 마지막이. 지금 살던 세계를 개선해서 그걸 보완하는 식으로, 그냥 살던 식으로, 더 나은 형편으로 살기 위해서 바로 왕이 타협했잖아요. 그렇잖아요. 목사가 설교하면서 세상 사람과 타협해서는 돼요? 안 돼요? 타협해서는 안 되죠. 자, 교회 오는 사람들 대부분이 어떻게 오느냐 하면 내 인생 원상복귀 해달라는 거예요. 내 인생 하나님이 조져났으니까 하나님이 책임지라는 거예요. 시키는 대로 다 할 테니까. 십일조하고 주일성수 다 할 테니까. 목사 대접하고 봉사하고 청소하고 다 할 테니까. 잃어버린 30년을, 30년까지 갈 것 없고, 내 잃어버린 청춘을 빨리 보상해놓으라는 거예요. 내가 20대에 꿈꾸던 것을 구체화해서 내 눈앞에 내놓으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게 뭐냐 하면 짧게 이야기해서 나와 내가 기대했던 나와의 동일시를 계속 보완, 보정해달라는 거죠. 나는 주님이 좋은 것이 아니에요. 내가 그리는 내 이미지가 좋은 거예요. 나는 이런 인간이 되고 싶다가 좋은 거예요. 그게 비전이고 꿈이고 드림이고 그런 겁니다. 근데 그게 망가지고 세상 살다보니 힘들어졌으니까, 신의 힘을 빌려가지고 내 꿈을 이루어달라고 악을 쓰면서 기도하잖아요. 악을 쓰면서. 또 협박공갈해가면서. 그게 오늘 본문에 뭐냐 하면 13절,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나니” 이게 뭐냐 하면 전에 좋았던, 내가 20대 생각했던 그것이 나로서는 최고 이상적인, 그걸 자아이상이라고 하는데, 또는 이상자라, 자아이상은 상상계에서 일어난 것이 있고, 이것은 상징계에서 일어난다는 라캉의 이론이 있는데, 자아이상이란 방금 제가 이야기한 상상한 것, 상상한 것을 동일시, 일치성, 그것과 나는 일치해야 하는데 자꾸 결핍이 일어나고. 그러다 한 번 동일시 될 때도 있어요. 정말 행복하다. 그게 되는데, 근데 그 다음부터는 행복하기 때문에 불안감이 새로 생겼습니다. 주여! 이 행복이 언제까지 되겠습니까? 행복해 줘도 문제라. 사이좋은 이 부부사이가 언제까지 가겠습니까? 얼마나 하나님 앞에 충성봉사하면 이 행복한 관계가 계속 유지될 수 있겠습니까? 그게 구원입니까? 자기 경배지. 자기 숭배지 그거는 구원이 아니에요. 구원이라는 것은 자기에게서 빠져나와야 구원이죠. 자기를 쥐고 있으면서 그게 무슨 구원입니까? 나의 세계에서 벗어나서, 이탈되어서, 나의 세계가 아닌 아들의 세계로 가는 것이 천국이거든요. 근데 아들의 세계에 가기 위해서는 내가 가고자 하는 천국은 모조리 박살나야 해요. 내가 가서 턱하니 생명수에 발 담그고 반신욕하고 있고 그런 꿈들은 다 깨어져야 해요. 그거는 여호와 증인한테 가라고 해요. 그것은 다 깨어지고 내 나라가 아닌데 들어 왔다. 내 나라가 아닌데. 내가 꿈꾸는 나라가 아닌데, 예수님의 자기의 명예와 자존심을 걸고 예수님의 신부가 되어서, 색시가 되어서 거기에 합류되어야 그것이 바로 천국의 백성, 천국에 가는 겁니다.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 사랑이 뭐예요? 사랑이라는 것은 대상에 손도 대고 싶지 않아요. 왜? 너무 거룩하기 때문에. 내가 그 사람한테 무슨 말을 하고 손만 대도 이 더러운 나로 인하여 흠집날 것 같은 그런 안타까움이 있어가지고 그저 바라보기만 하고 뺑뺑이 도는 거죠. 그 자리에 있으소서. 내가 경배하나이다. 이게 사랑이잖아요. 그런 사랑이 있을 때에 왜 절로 축복이 되고 행복하냐 하면 내가 쪼그라드니까 행복한 거예요. 사람이 자기의 표면이 넓어버리면 온갖 근심걱정 마귀가 다 들어와요. 일곱 귀신, 동네 지나가는 귀신들 다 들어옵니다. 내가 아무것도 아닌 존재, 한 줌 쥐어도 면적이 점 같은 존재가 될 정도로, 사랑의 대상이 나에게 넘치게 오게 되면, 저는요? 나는요? 라는 말을 할 이유가 없다니까요. 그대 있음에 그걸 끝나기 때문에. 만족하기 때문에. 제가 참 꿈같은 이야기 하고 있어요. 그대가 있는데, 내가 밥을 굶고 사자에 물리든 찢기든 불에 들어가든 톱에 켜이든 그게 무슨 대수냐 이 말이죠. 그대만 있으면 되죠. 태초에 말씀이 있으니라. 말씀이 있음으로써 생명이 있었느니라. 그렇다면, 말씀이 있는 생명이 있다면 나는 생명이 아닌 거예요. 그냥 생존이지 생명이 아니에요. 언젠가는 이거는 죽음에 의해서 갈 수밖에 없는 것. 그러면 생명은 나한테 크게 느껴지고 생존은 나에게 작게 느껴지게 되면, 어서 주의 나라에 가고 싶은 욕망을 갖게 되겠죠. 그 끌림을 사랑이라고 합니다. 결혼하기 전에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당신이 나하고 결혼하면 손에 물도 안 묻히게 한다고 하는데, 손에 물도 안 묻히게 한다는 것이 뭐냐 하면 그냥 자기가 물 묻혀 설거지 할 테니까 당신은 거기에 대한 혜택만 마음껏 누리소서. 그렇게 한다 말이죠. 그렇게 해놓고 부엌 근처에도 안 오고. 결혼하고 나면 근처도 안 오죠. 왜냐하면 해봐야 구박만 받으니까. 다시해라 하면 짜증나고. 사명이란, 사명이라고 하는 것은 그냥 예수 믿고 마냥 노는 게 아닙니다. 출애굽기 3장을 보겠습니다. 출애굽기 3장을 보면 하나님이 모세를 찾아오잖아요. 구원은 거저 주시는 것이다. 맞아요. 거저 줘요. 구원을 거저 주신다고 하니까, 사람들이 십자가마을에 글을 보고 뭘 오해하느냐 하면 평소에 인간 대 인간으로 살아오면서 거저 혜택 받은 것을 가지고 자꾸 거기서 상상하는 거예요. 내가 아무것도 안 했는데 밥상을 거저 주는 것처럼 주께서 거저 주심으로써 나는 혜택을 입는다. 따라서 나는 거저 받아먹으면서 그냥 가만히 있으면 되겠다. 라고 생각하는데, 구약의 출애굽기 3장을 보세요. 하나님이 모세를 찾아 올 때, 모세야 가만히 있거라! 이렇게 했습니까? 내가 가서 애굽에 있는 백성들 다 끄집어낼게. 이렇게 했습니까? 아니죠. 물론 하나님이 동행해서 애굽에 있는 자기 히브리인들을 다 끄집어냅니다. 그런데 누굴 대동해가요? 모세가 가죠. 모세가 지팡이를 들고 가죠. 그러면 모세가 분명히 구원받았지만, 모세가 구원받았다는 것은 변화산에서 확인될 수 있습니다. 엘리야하고 모세가 예수님하고 지금 천국에서 잘 계시는 겁니다. 선배들 있어요. 그냥 다 쫓겨난 것이 아닙니다. 선배들 다 있다고요. 분명히 간 사람이 있잖아요. 분명히 베드로 다 올라갔거든요. 사도바울도 삼층천 가서 다 올라갔다 이 말이죠. 그 사람들이 갔으니까 우리도 가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동일한 과정을 우리가 표현할 수 있어야 돼요. 표현되어야 되겠죠. 동일한 과정이. 그들이 구원받은 과정이 그대로 노출되어야 하고 우리에게 나타나야 되겠죠. 그 과정이 뭐냐 공생애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를 그들은 미리 앞당겨서 인생을 통해서 예수님의 공생애의 일부, 조금, 조금씩을 그들은 표현했던 겁니다. 그걸 신앙의 증인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미 구원받은 우리도 천국가고 있다면, 이미 우리는 예수님이 가신 그 노선을, 공생애 노선을 본의 아니게 성령에 의해서 조절 받아서 그 노선을 가는 거예요. 갈 때, 열 두 제자에게 주신 것처럼, 또는 모세에게 주신 것처럼 사명을 부여 받았어요. 사명이 뭐냐, 그걸 지금부터 설명해드리겠습니다. 모세 당시에는 성경이라는 것이, 오늘날 같이 구약성경, 신약성경이 없었습니다. 그저 그때, 그때마다 성경을 하나님이 주셨죠. 그러면 하나님의 감동으로 모세에게 성경이 왔습니다. 자, 오게 되면 모세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가. 동행의식이 일어나는 겁니다. 마음으로만 그런 것이 아니고 실제로 그 지팡이 가지고 하는 거예요. 동행의식입니다. 그러면 남들 보기에 모세가 애굽에 갔을 때 그 행세를 보게 되면, 모세 있고 그 손에는 지팡이 하나 달랑 들고 나타났습니다. 누가 봐도 사람이 지팡이 든 거예요. 그러나 어떤 인간도 모세가 있고 오른 손에 지팡이 하나 있고, 이렇게 모세가 있다면 누가 봐도 모세가 지팡이를 든 거예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지팡이로 모세를 데리고 다닌다는 사실을, 그거는 아무도 알 수가 없죠. 지팡이가. 그래서 지팡이라는, 어떤 나무 작대기가 인간을 다룰 수 없기 때문에, 모습은 지팡인데, 지팡이 안의 내부는 공백, 비어있다고 보면 돼요. 비어있는 것. 껍데기는 지팡이 모습이죠. 모양새가. 지팡이 모양새에 공백이 있고 그 공백을 통해서 모세를 이끌어 오고 있는 겁니다. 왜, 목사님은 이걸 공백이라고 합니까? 하나님이라고 하면 되지. 왜, 공백이라고 합니까? 하는데. 이것은요, 왜, 이걸 빈 곳, 아무것도 없는 빈 곳이라고 하느냐 하면 세상사람 보기에 모세는 달랑 지팡이만, 지팡이라는 나무 조각만 들고 온 거고. 그 점에 대해서 모세가 자유로울 수가 없는 겁니다. 모세만 믿음이 좋고 세상 사람들은 믿음이 나쁜 게 아니고 모세도 역시 세상 사람들과 동일하게, 세상 사람들이 보는 것처럼 자기 자신을 볼 수밖에 없는 거예요. 왜? 그래야 동행의 의미가 있기 때문에. 만약에 모세가 하나님이 나를 보냈다고 제대로 안다면, 모세 혼자 보내면 돼요. “아이구 믿음 좋아라. 아이구 믿음 좋아라. 니가 알아서 해” 이렇게 됩니다. 하나님이 모세와 동행해서 간다는 것은 애굽 사람도 치지만 동시에 누굴 치겠어요? 모세도 치는 거예요. 그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출애굽기 4장 24절에 나오죠. 길의 숙소에서 모세를 치죠. 그리고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는 모세는 가나안 땅에 들어갔습니까? 못 들어갔습니까? 못 들어갔죠. 책망 받았어요? 책망 안 받았어요? 책망 받았죠. 지팡이 가지고 가리켜야 하는데, 성질내고 두 번 쳤잖아요. 그렇죠? 물을 내는데 처음에는 지팡이 가지고 쳤죠. 그 다음부터는 지팡이 가지고 가리키면 되는데, 반석이 두 번 깨어질 수 없다 이 말이죠. 고린도전서에 보면 반석은 예수그리스도라고 했는데, 예수그리스도가 두 번 깨어질 수가 없어요. 한 번 깨어진 십자가가, 그 깨어짐이 계속 반복되어서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는 것이지, 십자가에 한 번 죽고 또 죽고 또 죽고 그런 것은 없다 이 말입니다. 이야기한 내가 나빠요. 무슨 말인가 하면 아무리 홍해가 갈라지고 유월절 양의 피를 발라서 산다고 할지라도 인간은 몸은요, 그걸 어떻게 해석을 하느냐 하면 우연이겠지. 행운이겠지. 한때 아다리가 맞아서 걸렸겠지. 그때 나의 성실함 때문에 하나님이 봐줘서 그랬겠지. 이렇게 되지 그게 하나님의 동행으로 이어지지 않게 되어 있어요. 왜? 인간은 자기와 동일시되지, 주님과 동일시가 안 되기 때문에 그래요. 몇 번 기적을 받았다고 해서 자기 자신을 포기할 수 있는 인간은 없어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성도의 몸을 늙어 죽이시는 이유가 거기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도 죽여요. 성도도 몸을 죽이는데, 세상 사람은 살다 보니 죽는 거고. 우리가 죽는 것은 죄 값으로 죽는다는 것을 인지하는 거예요. 우리가 그냥 지식으로 인지하는 것이 아니고,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그렇게 죄 값으로 죽는다는 것을 스스로 인식하도록 사태가 일어나고, 사건이 일어나는 거예요. 그래야 우리가 쪼그라들고 우리가 이 세상 근심에 대해서 휘둘리지 않게 되는 겁니다. 어차피 죽을 걸.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이게 말이 쉬운데, 체험화 되고 온 몸으로 감기면서 기쁨과 희열을 통해서 이런 느낌이 온다는 것은, 주의 성령이 동행하지 않으면 이런 느낌이 없습니다. 사모님 장사하다가, 장사가 하루 종일 안 되면 이런들 어떠하리. 저러들 어떠하리. 억지를 부려서 그런 고백을 하면 뭐 속이 시원하십니까? 별로 안 시원해요. 그런 고백한다고 안 시원한데, 정말로 그런 마음이 기쁨으로 올 때가 있는데, 그것은 성령께서 동행하셔서 그렇게 하시는 거예요. 그럴 때,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미친놈이에요. 왜? 손님 하나도 안 왔다 갔으니까. 공백이라니까요. 공백. 공백이라는 말은 우리가 이 지팡이 안에 있는 어떤 분을 상대해버리면, 모세는 자꾸 예수님한테 간섭을 하게 되고 기대를 하게 되고 포부를 이야기하게 돼요. “내 뜻대로 이렇게 해주시옵소서.”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근데 항상 일어나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서 일어나버리면 모세는 수동이 되고 예수님께서는 이게 능동이 돼버리는 거예요. 이걸 이해하라고 말한 내가 잘못이에요. 사람이 수동이 될 수가 있습니까? 내가 동행하시는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이런 일이 있다면, 믿은 주체가 누굽니까? 내가 믿었다는, 내가 이런 착한 짓을 해서 이런 것을 얻을 결과가 나와 버리면, 결국은 그 결과의 공로가 누구에게 환원됩니까? 내 쪽으로 환원된다고요. 내 쪽으로. 역시 내가 예수 믿으니까 이런 행복을 누리지. 이렇게 되는 것이 인간이에요. 그런데 공백이라는 말은, 예상치도 못한, 그럴 수가! 이런 깜짝 놀랄 일이! 깜놀! 깜짝 놀래버려요. 뭐 사태가 이럴 줄을 몰랐다. 아, 수동이구나. 이게 내 인생이 내 인생이 아니네. 주께서 만들어 가시는 인생이네. 그리 되는 겁니다. 애가 공부를 잘해야 되는데, 못했어도 깜짝 놀라지만. 분명히 꼴찌를 해야 하는데 일등을 해왔을 때, 우리는 애를 핍박할 수밖에 없어요. “니 컨닝 했지? 이실직고해. 니 성적으로는 이 성적이 나올 리가 없다. 내가 니 알거든. 니는 엄마를 몰라도 엄마는 니를 알아.” 그럼 애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엄마! 이건 공백입니다. 나는 수동적이었습니다. 찍다가 보니까 백점이었습니다.” 엄마가 “야! 아무리 백점이라는 가능성이 백퍼센트 있지만, 그런 일은 확률적으로 없다.” 그럼 애가 “엄마는 지금 엄마 자신을 동일시하고 있습니다. 엄마의 경험을 신뢰하고 있습니다. 엄마는 지금 지팡이 있으나마나 입니다. 엄마는 지금 지팡이한테 압력을 가하고 있습니다. 엄마 정신 차리세요.” 이런 과정을 모세가 밟는 거예요. 모세가. 모세가 바로 앞에 섰을 때 1번. 신났다. 2번. 벌벌 떨었다. 몇 번 입니까? 벌벌 떨었죠. 이런 말도 안 되는 이런 시추에이션이 어디에 있어요. 말도 안 되는. 저쪽은 병거도 많고 무기도 많은데, 모세는 달랑, 이거 봉이 김선달도 아니고 김삿갓도 아니고 지금 지팡이 들고 가는 거예요. 또 이거 흉내 내지 마세요. 지팡이 만원주고 사가지고 가봤자 소용없어요. 청와대 올라가봐야 경찰한테 걸리기만 합니다. 이거는 어떻게 할 수가 없어요. 성도는 누구나 지팡이가 있어요. 뭐냐 하면 나를 꾸짖는 계기들이 다 옆에 붙어 있어요. 거기에 동행하고 있습니다. 잘됐다고 까불지 말고 못됐다고 절망하지 말고. 그런 요소들이 늘 있어요. 우리한테 늘 동행하고 있습니다. 그게 모세에게 있는데, 다만 그게 구원의 관한 문제가 아니고. 구원은 이미 받았고. 뭐냐 하면 사명에 관한 문제에요. 사명. 근데 사명의 내용이 뭐냐, 장차 오실 메시아의 메시지가 사명이 되는 겁니다. 구약 때, 또는 신약도 마찬가지고. 그 메시지가 뭐냐, 보라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세례요한입니다. 세례요한은 재미있는 게 분명히 예수님한테 세례 줬죠. 설교내용이 뭡니까? 마지막 때가 되었다. 알곡은 하늘 곳간에 채우고 쭉정이는 불에 태운다. 성령 세례와 불세례가 올 것이다. 분명히 자기는 시키는 대로 다 했어요. 그래놓고 옥에 갇혔을 때 뭐라고 했습니까? “혹시 오시 분이 당신입니까? 아니면 다른 분을 또 기다려야 됩니까? 이만희를 기다려야 되고 신천지를 믿어야 됩니까? 오실 분이 당신입니까?” 라고 해요. 성경을 보는 사람들은 어디에 초점을 맞추느냐 하면, ‘야, 세례요한 믿음 대낄이다. 믿음 좋다.’ 여기에 초점을 맞췄다가 그 대목에 와서 당황하지 않을 수밖에 없어요. ‘이거 세례요한이 지옥 가는 거 아니가? 이거 믿음 없네. 왜 갑자기 세례요한이 믿음이 없지? 그동안 세례요한은 믿음도 없는데 일은 이렇게 했지? 믿음도 없으면서 설교는 왜 이렇게 잘했지? 물세례는 왜 줬지?’ 그렇게 질문한 자체가 잘못이에요. 세례요한이나 우리나 여전히 수동적이에요. 한 번 일을 잘했다고 해서 그 다음부터 니가 알아서 해. 이런 것 없어요. 세례요한의 행함은 천국에 포함되어서는 안 됩니다. 끝까지 세례요한은 주님에 의해서 수동적으로 다루어져야 해요. 끝까지. 모세는 사명에 나섭니다. 그 사명을 제가 이야기했죠. 현재 우리가 마지막 때를 살고 있다는 것. 그럼 마지막 때라는 그 범위, 지평의 범위를 뭐로 보느냐 하면 땅으로 봅니다. 땅. 그럼 이 땅, 제가 지금 수요설교를 하는데요. 그 내용이 상당히 어렵습니다. 왜 어려우냐 하면 땅 개념이, 부동산 땅 개념이 뭐로 바뀌느냐 하면 예수님으로 바뀌는 과정이 계속 이어지기 때문에 이걸 하나 설명하려면 하나하나가 어려운 거예요. 땅 개념에서 쭉쭉 바뀌게 되는 겁니다. 원래 땅 개념은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는 땅인데, 그 땅 개념이 뭐로 바뀌느냐 하면 방주로 바뀌고, 방주에서 뭐로 바뀌느냐 하면 방주에서 나온 내용물들. 방주에서 우르르 쏟아져 나온 것이 있잖아요. 노아 식구하고 거기 정결한 각종 짐승들 있죠. 미국에서 백억 들여서 실제로 방주를 다 만들어놨어요. 뉴스에 나왔어요. 커다란 방주. 티비 보면 그 사진도 나와 있고. 실제로 방주에 칸막이 다 되어 있고 그 안에 모형으로 짐승들 다 해놨어요. 미국 여행가시면 그거 한 번 구경해보세요. 방주 안의 세계가 나옴으로써 여기는 무슨 땅이냐 하면 하나님의 은혜로 봐주는 땅으로 바뀌어요. 기존의 땅이 아니고. 이미 심판에 받쳐서 되어진 땅. 여차하면 이 땅은 사라질 그 땅. 다만 유지되는 것은, 오직 무지개를 통해서 유지되는, 하나님에게 노아가 드린 제물을 받으셨다는, 하나님이 자기가 자기에게 맺은 체결. 자기 동일시에 의한 자기가 선언한 언약에 의해서만 유지되는 땅에 있는 거예요. 그래서 이거는 이 땅 자체를 봐서는 안 되고, 그 땅을 땅답게 유지하려는 그 근거를 봐야 되는 그런 땅의 시대 속에 우리가 놓여 있는 겁니다. 이 근거가 계속해서 신약으로 이어져서 예수님의 십자가까지 이어지는 거예요. 성경 흐름이 이런 거예요. 그래서 땅 위에서 예수님의 피와 관련된, 희생의 피와 관련된 사건이 지금 이 땅을 은혜롭게, 단비와 햇빛을 주시는 은혜로, 별이 떠 있고 달이 떠 있는, 은혜롭게 하는 그것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사는 것은 잘나서 사는 것이 아니고 어려서부터 우리가 생각하는 모든 것이 악함이라. 지난 수요일에 창세기에서 설교 했어요. 우리가 어려서부터 악해요. 악한데 봐주고 있는 거예요. 악한데 봐주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애굽 사람들, 애굽 사람들이 살고 있는 것은 뭘 모르는 거예요? 애굽 사람들이 뭘 모르는 거예요? 하나님이 봐주고 있다는 것을 모르죠. 그러면 애굽 사람들만 모릅니까? 히브리인들은 알아요? 히브리인들도 몰라요. 모세는 알아요? 모세도 몰라요. 아무도 모르는데, 오직 수동적으로 움직이는 모세로 하여금 이 모르는 것을, 진짜 이 세상이 어떤 세상인지를 알려주는, 이미 마지막인데 봐주고 있다는 사명을 감당하는 겁니다. 10분 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