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해석법
요한계시록 해석법 Ⅰ 서론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짐승’의 역할은 예수님의 공로를 가로채는 일이다. 요한계시록이 존재하는 이유도 이런 짐승적인 해석을 도출하기 위함이다. 요한계시록을 접하면서 세상은 여지없이 ‘예수님의 공로’를 갈취하는 식으로 해석을 하게 마련이다. 그래야만 ‘짐승의 노예’다운 면면을 보이기 때문이다.따라서 요한계시록을 해석해야만 새삼스럽게 요한계시록의 말씀이 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세상이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대로 움직인다는 사실만 노출시킬 뿐이다. 즉 인간이 요한계시록을 해석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는 입장이 아니라 요한계시록에 의해서 늘 추궁당할 처지에 놓여 있다는 점을 새삼 자백할 뿐이다. 이것도 성령 받은 성도에게만 해당되는 인식이다.사람이 요한계시록을 대한다는 것은 곧 ‘언어’를 대하는 일이다. 이 특별한 언어를 마주하면서 인간은 자신의 소속을 극명하게 드러내게 되는데 아무리 숨기려 하여도 소용없는 이유는 말씀이 인간을 상대로 말씀다운 주도권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 사실을 모르고 건방지게 자신이 말씀을 해석하려 든다. 이로 인하여 인간의 짐승적 속성이 노출되는데 바로 그 노출의 환경이 요한계시록이 밝혀 놓은 그 세상이다. Ⅱ 본론 1. 언어 해석단어의 의미는 늘 근사치를 나타낸다. 작은 차이만 남아 있다는 뜻이 아니라 다른 더 광활한 의미와 연결될 여지가 남아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이게 바로 그 뜻이다.”고 단정 짓게 되면 이는 더 많이 연결된 미지의 의미들을 곧장 부정하는 것이다.“이게 그것이다.”고 단정 짓는 바로 그 자체를 부정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항상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데 그 의미가 바로 말씀을 이 세상에 주신 하나님의 취지다. 마술사가 손에 공을 넣고 “방금 제가 손에 넣은 것이 무엇입니까?” 물을 때, 답변하는 답변에 따라서 제각기 다른 물건을 내놓는 것과 같다. 바로 그렇게 해서 인간 자체가 이 세상에서 악마의 앞잡이 노릇을 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려 하신다. 사람들이 “맞다”고 우기는 것은 본인이 ‘궁금해 하는 기대치’일 뿐이다. 바로 이 의식을 요한계시록에서 십자가 죽음에 근거한 성령의 복음으로 조사에 나서게 된다. 요한계시록을 비롯해서 성경의 단어는 고유적인 의미를 갖는 게 아니라 다른 근본적 의미에 봉사하게 되어 있다. 즉 그 자체로 설명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을 설명하는 설명의 양식이 된다.특히 요한계시록에는 ‘도판 옮기기’가 성행하는데 이는 마치 옷 수선 집에서 행하는 짜깁기 양상과 같다. 구약의 역사적 표현들을 그대로 옮겨놓고 그것을 하나로 이어지게 하는 바는 그 도판 밑에서 작용하는 십자가의 힘이다. 곧 ‘어린 양의 죽음에서 나온 능력’이다.사람들이 자기 힘으로는 이 죽음에 참여하지 못하기 때문에 성경 언어를 대하면서 다음과 같은 절차를 밟게 된다. 문제의식→성경→역사(현실) 재구성→주체성성경학자이든 원어학자이든 일반인이든 상관없이 모두 이 원칙을 따른다. 바로 이러한 절차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인간들이 제시하는 모든 궁금증이나 문제의식은 결국 자기 주체성 정립을 위한 것이다. 즉 자기 동일성을 기정사실로 여기고 시도하는 자기 존재감 발산에 해당된다. 쉽게 말해서 예수님 빼놓고 다 사이비라고 보면 된다. 사도 요한 같은 경우는 성령에 충만함을 입었다는 점에서 다른 사람과 다르다.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 내 뒤에서 나는 나팔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계1:10).” 이 말은 아무리 대단한 권위를 발휘한다 할지라도 성령 없이 계시의 본 내용에 도달할 수 없다는 말이고, 이 성령감동은 곧 그동안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 동질성을 유지하게끔 했던 모든 역사적 인식이 부정당하는 것을 감수해야 한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요한계시록 1:7에 나오는 말씀(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을 증명해줄 그 어떤 이전의 경험은 그 누구도 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즉, 재림에 대해서 아무도 과거에 체험한 적이 없고, 체험한 적이 없다는 말은 인간이 그 사실을 기억에 담아 둘 수가 없고, 기억되지 않은 것을 말한다는 것 자체가 곧 허구요 거짓말이 되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나 증명할 길이 없는 법이다. 기껏 증거는 하지만 상대방이 그 말을 곧이들을 그 어떤 바탕은 역사 속에서 만들어질 수 없다. 인간들이 역사 속에서 내놓는 의미는 세 가지의 반복에 의해서 구축된다. 첫째 반복: 습관(강도가 굳어짐), 둘째 반복: 기억.이 두 가지 반복으로 동일성 취득, 곧 자기와 남의 차이를 느낀다. 이것은 인식될 수 있고 포착될 수 있다. 그러나 세 번째 반복은 인식론적이 아니라 창조적이다. 차이를 따질 수 없다. 주체가 나서서 인식할 수 없다. 계속해서 새로운 창조가 이루어지는데 이로서 첫째, 둘째와는 달리 역사적인 인식과 묵시적인 창조성에서 차이가 난다. 같은 것의 반복에서 반복 없는 차이로 추상화된다(확정적이라는 말이다).바로 이 세 번째에는 인간들이 미지의 것을 희망하는 종교적 품성이 발휘된다. 미지의 X를 무작정 기다리게 되는 것이다. 이 미지의 X에 대한 온갖 성경에 나오는 묵시적 단어들을 대입해도 그것은 그저 인간들의 비-성경적 본성에서 나온 것이기에 여전히 육적이다. 이렇게 해서 요한계시록을 비롯해서 모든 말씀은 인간들의 성경해석을 반대하거나 저항하거나 전치(轉置)하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