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강의(2016. 7. 22) 1강
광주 강의(2016. 7. 22) 29-1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꾸짖으시면서 하신 말씀이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막8:33).”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사람의 일과 하나님의 일을 어떻게 구분해야 합니까?
사람의 일은 항상 집단적입니다. 내가 이런 말을 하면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할까를 고려해서 말을 합니다. 즉 한 통속이 되어 움직이는 것이 사람의 일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일은 뭔가? 사람의 일이 먼저 등장한 후에 하나님 일이 출현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반드시 사람의 생각을 바탕에 깔고 그것과 현격한 차이가 있음을 일러주시는 겁니다.
차이를 발생시킬 때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은 “우리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주님이 더 좋은 생각이 있으면 말씀해 보세요.” 이렇게 나옵니다. 이처럼 인간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의 일은 자기 자신을 초월하는 것을 하나님의 일로 봅니다. 그런데 주님은 초월적인 일을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베드로를 꾸짖으시지요. 사람은 나쁜 짓을 해도 남이 꾸중하면 기분이 나쁩니다. 누구에게 꾸지람 듣고 기뻐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것을 아시고 꾸짖습니다. 꾸짖으시면서 사람의 일이 사단의 일임을 알려 주십니다.
예수님이 꾸짖는 것은 베드로 개인이 미워서가 아니라 사단을 꾸짖는 차원에서 그를 꾸짖습니다. 그러면 개인적으로 무엇이 잘못 된 것이 아니고 그가 속한 집단이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잘못된 행동을 변명하면서 ‘저만 그런 것이 아니라 다 그렇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이런 말 자체가 집단을 끌어오는 겁니다. 이것을 ‘전체성’이라고 합니다. 인간은 인간들끼리 전체를 만들어 놓고 신을 이 전체에서 벗어난 초월적 존재로 바라봅니다. 그러면 인간이 아는 것보다 신은 더 많은 것을 알고 있겠지요? 그러면 신의 아는 것까지 추가해서 알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 인간의 아는 것이 다칠 필요가 없어요. 인간이 아는 것을 고스란히 유지한 채 하나님이 알고 계신 것까지 알게 되면 하나님 나라에도 갈 수 있단 말이지요. ‘모르는 것은 가르쳐 주세요.’ 이렇게 나오는 거지요. 모르는 것을 알려달라는 것과 꾸짖는 것은 다릅니다.
쟁판위에 포도가 한 송이 있는데 쟁판이 꽉 차지는 않았어요. 그래서 여백에 복숭아를 한 개 추가해서 놓으면 쟁판이 가득 차지요. 그런데 주님께 “복숭아 주세요.”라고 하니까 주님이 “포도를 왜 담았어?”라고 꾸짖었다는 것은 포도를 버려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 생각은 내가 가진 것은 그대로 유지한 채 주님이 주시는 것을 추가적으로 가지면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으로 여깁니다.
‘부족합니다.’라는 말의 뜻은 무엇입니까? ‘남은 부분을 채우면 좋겠습니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현재 내가 가진 것은 손대지 마세요.’라는 뜻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사람이 이 땅에 살다가 복음을 믿게 되면 천국에 간다고 말합니다. ‘이 땅에 살다가 죽으면 천국 간다.’ 사람들이 성경을 보면서 이런 마음으로 봅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이 땅에 살다가 죽으면 천국 간다. 그러면 천국은 보이지 않는 세계지요. 이렇게 되면 무엇이 빠지는가 하면, 이 땅에 사는 것이 옳지 않다는 점이 누락됩니다. 사모님이 교사로 일하면서 학교에서 배구하다 목이 다칠 것을 예상했습니까? 못했지요. 사람은 좋은 것을 주면 고맙게 받겠지만 주님이 주시고자 하는 것이 나를 꾸짖고 나를 부정한다면 우리는 안 받고 싶고 밀치고 싶은 속성이 있어요.
하나님의 일은 새로운 정보가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만 알고 있는 독점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는 예수님만 아십니다. 왜냐?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는 하나님이지만 예수님께는 아버지에요. 그래서 인간들이 하나님을 찾을 때 예수님이 아는 아버지 하나님과 일치하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은 인간이 알고 있는 하나님과 자신이 알고 있는 아버지의 차이를 드러내기 위해 반드시 꾸짖음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밤새 그물을 던졌지만 고기를 잡지 못했어요. 그런데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졌을 때 많은 고기를 잡았습니다.
그 때 베드로가 한 말이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 나를 떠나소서.”라고 했어요. 베드로가 무엇을 느꼈는가 하면, 현재 나는 어부다. 신의 은총이 임한다면 보다 많은 고기를 잡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나의 가치는 유지되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이 어떤 일을 했을 때 남들 보기에는 ‘베드로는 고기를 많아 잡아서 좋겠다.’고 하지만 본인은 무엇을 느끼는가? ‘나는 죄인입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라고 했단 말이지요.
베드로가 무엇을 느꼈는가? 예수님과 나는 함께할 수 없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아는 아버지 하나님과 내가 아는 하나님은 전혀 다른 분이었던 것입니다. 그동안 내가 아는 하나님은 가짜인 것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들통 남으로 하나님이 가짜인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내가 나를 괜찮은 존재로 본 이 평가와 기준도 엉터리였던 것입니다.
인간은 자기를 보는 기준이 엉터리입니다. 내 자신을 내가 본다는 것은 잘못된 기준입니다. 그러면 잘못된 기준은 어디를 경유해야 되는가? 예수님의 꾸짖음이 오게 되면 우리의 잘못된 기준은 사단에 제시한 것이었다는 쪽으로 가야 합니다. 예수님을 만나 “주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시옵소서.”라고 바로 예수님께 가는 것이 아니고 먼저 우리 자신과 --
‘우리’라고 해야 돼요. 왜냐하면, 집단적이니까. 우리의 모든 생각은 집단적이고 예수님만 단독적이죠. 예수님은 독생자입니다. 여러 아들 중 한 분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제물로 바친 아들은 누구입니까? 이삭입니다. 이스마엘을 제물로 바치라고 한 적이 없어요. 하나님이 주신 아들을 바치라고 했지요.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것이 없어요.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드려야 하는데 우리는 그분이 원하는 것을 갖고 있지 않기에 내놓을 것이 없어요. 우리가 내놓으면 다른 집단들이 다 알고 있는 것을 내놓을 수밖에 없는데 그렇게 되면 하나님이 누구는 천국 보내고, 누구는 지옥 보낸다는 그 기준이 우리가 내놓은 것에서는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아버지가 죽기 전에 자식 3명을 불러놓고, 막내아들에게 “이 집은 네가 가져라.”고 하고, 둘째아들에게는 “내 땅은 네가 가져라.”고 했습니다. 이 때 장남은 머리가 복잡합니다. ‘아버지의 소유는 집과 땅이 전부인데 집은 막내, 땅은 둘째에게 주셨으니 나는 받을 것이 없다.’ 이런 생각이 들겠지요? 이것을 주께서 노리는 거예요.
‘주님을 사랑합니다.’ 이런 말이 안 통합니다. 먼저 내가 노리는 것이 얼마나 사단과 한 통속인가를 드러내십니다. 장남에게 “너에게는 아무것도 줄 것이 없다.” 이렇게 말했을 때, 둘째와 막내는 얼마나 기분이 좋겠습니까?
주님은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다 빼앗아버립니다. 그들이 예수님과 결탁해서 예수님으로부터 은근히 기대한 것을 일체 허용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천국 가는 백성에 대한 주님의 일관성 있는 대우입니다. 우리가 구원 받으려면 다 빼앗겨야 됩니다. 탕자처럼 몽당 다 잃어야 합니다. 세상 것을 기대하다가 크게 망신당해야 해요.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우리 집단을 사단과 한 편인 더 큰 집단으로 묶어버려요. 사단이 천국 못가는 이유는 사단에게는 기회가 부여되지 않아요. 왜냐하면 천국은 사단이 못 오는 동네이고, 지옥은 사단을 위해 만든 처소입니다. 그러니 사단이 천국을 가는 일은 없어요. 바로 그 지점에 제자를 비롯한 모든 인간을 다 집어넣습니다.
사단의 일을 생각하면서 감히 예수님 나라를 넘보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임을 분명히 해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일을 바라는 것조차 사단의 일이 됩니다. 사람의 일이 사단의 일인데 사단이 예수님께 “예수님 저 구원해 주세요.”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사단은 예수님과 대적하는 관계지 천국 갈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이 말은, 베드로 입에서 ‘나는 예수를 모른다.’는 소리가 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주님 앞에서 놀라운 신앙고백을 하고 기적을 체험했다 하더라도 자신의 마음을 본인이 몰라요. 인간은 개인적인 것이 없고 다 한 통속입니다. 집단적 생각을 나눠 가졌을 뿐입니다. 포도송이를 보세요. 알맹이가 단독으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한 덩어리가 되어 있지요. 이게 사단의 일이에요.
예수님 죽인 후에 그 사람들이 불행했습니까? 아닙니다. 굉장히 즐거워했어요. 예수님 죽이기 전에도 행복했고, 죽인 후에도 행복했어요. 예수님은 미미한 존재입니다. 자신들의 행복에 약간 신경 쓰였지만 없애버리면 그만이니까. 크게 영향 받지 않아요. 우리 인생에.
‘너희들은 사단에게 속했다.’는 것은 예수님의 일방적 기준이고 도그마적 선언이지 사람들과 의논해서 나온 결론이 아닙니다. 만약 의논했다면 ‘예수님이 너무 과한 기준을 세우셨다.’ 이런 결론이 나오겠지요. 전 세계교회의 문제점은 하나입니다. 자신이 구원 받을 자격도 없는 죄인인 것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성령 받은 사람을 제외하고.
성령을 받으면 성경을 많이 아는 것이 아니에요. 내 구원을 언급할 입장이 아니라는 것, 그런 자격이 나에게는 없다는 것, 내 모든 일은 사단과 한 통속이란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았으니까 하나님 아들로써 일방적으로 우리를 꾸짖으시니 무조건 우리는 ‘사단과 한 통속이 되어 있었구나.’ 하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당신은 죄인입니다.’라고 하면 ‘내가 어떤 잘못을 했기에 죄인이라고 하지?’ 라고 따질 필요조차 없습니다.
한 마디로 ‘다른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집단적이란 말은, 이 집단에서 단독적으로 빠져나올 수 없다는 말입니다. 포도송이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것입니다. 마귀의 힘을 인간이 이긴다고요? 그러면 본인이 메시야하지요.
동양철학은 하얀 바탕에 미리 색칠을 해놓고 색을 긁어내면 본연의 색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기질 지성 말고 본연의 지성. 본연의 마음은 깨끗한데 살다보니 사단칠정에 의해서 때가 묻었는데 정신을 차려 자기 마음을 거울같이 닦으면 다시 선한 마음이 된다는 것입니다. 성선설이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선하게 태어났다. 이것은 맹자의 주장입니다.
순자는 맹자와 달리 성악설을 주장했는데 이것도 우리가 죄인이란 의미와는 달라요. 그래서 주님 보시기에 화가 나고 꾸짖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내가 죄인이다.’라고 하면서도 ‘언젠가는 내가 의인이 되겠지.’라고 희망을 품는 그것이 주님 보시기에는 분통 터지는 일입니다.
인간이 어떻게 단독적일 수 있습니까? 집단에 속할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이 무슨 수로 사단의 힘을 이깁니까? 사단을 이기는 분은 예수님뿐입니다. 그런데 “저는 바알을 섬기지 않고 주님만 섬겼습니다.”한다고 해서 내신 성적이 올라가고 좋은 점수 받는 것은 없습니다.
사람들은 복음을 들으면 알아듣는다는데 그렇지 않아요. 복음을 알면 자신의 독자적 가치는 사단이 심어준 헛된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단독적인 나의 가치는 발각되어야 할 사단의 마음입니다. 사단이 우리에게 이런 마음을 준 것은 사단의 전위병이 되라는 것입니다. 즉 십자가 복음을 대적하도록 사단이 작전을 꾸면 것입니다.
사단의 전위병들이 하는 짓은 복음을 알고 십자가를 안다면서 예수님을 욕하는 성향을 보입니다. 십자가 앞에서 죄인이라고 하면서도 복음의 광채를 가리는 일에 사단으로부터 이용당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인간들이 “나는 복음 안다.”고 하는 자들입니다. 왜 “나”가 붙습니까? 내가 복음을 알면 내가 복음을 소유한 것이 됩니다. 개인이 소유할 수 있는 복음은 없습니다.
복음은 우리를 죽이는 힘으로 작용합니다. 간단히 말하면 이렇습니다. 우리가 성령 받기 전에는 사단의 전위병이었습니다. 그런데 성령을 받게 되면 단독자가 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 속한 자가 됩니다. 아담 한 사람이 범죄함으로 우리가 아담에게 속했잖아요.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아 은혜를 받은 사람은 그리스도에게 속하게 되어 의의 왕노릇 하게 됩니다.
아담에게 속했을 때나 예수님께 속했을 때나 단독적으로 사는 것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 생각하니까 사단이 안 보이고, 부활 승천 하신 후 예수님이 안 보입니다. 그런데 오순절에 성령을 받은 후에 성도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성령의 지시를 받으며 살았습니다.
빌립보서 4장 13절의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는 말은 지금 예수님과 동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이 눈에 보입니까? 아니죠. 눈에 보이는 것이 왜 진리가 아닌가? 첫째, 내가 본다. 둘째, 남이 나를 본다. 그런데 무엇이 빠지는가? 내가 남에게 보이는 그것은 내가 보지 못한다. 이것은 알 수가 없는 거예요.
내가 본다는 것은 알아요. 그리고 남이 나를 보고 있다는 것도 압니다. 그런데 내가 보고 있는 나를 보지 못해요. 그냥 느낄 뿐이지. 그렇다면 ‘본다’는 것 속에 보이지 않는 것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결국 내가 본다는 것은 보는 것에 머무는 것이 아니고 보이지 않는 것을 끌어당기고 따로 설정을 해야 돼요.
이 설정을 라캉은 ‘응시’라고 했고, 사르트르는 이것을 ‘타인의 시선’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너는 누구냐?’고 할 때 ‘내가 누구지?’라고 생각하는 그 나는 거울을 보면 보이는 그 나는 아닙니다. 따로 설정을 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나’라는 말을 하는 순간 두 개의 나가 성립이 되어야 ‘나’라는 말을 붙을 수 있다는 겁니다.
나는 이렇다. 누가? 내가 그렇게 생각한다. 고 할 때 ‘나는 이렇다.’고 하는 나와, ‘내가 그렇다.’고 하는 나는 따로 노는 거예요. ‘말하는 주체와 말이 된 것 안의 주체가 다르다’고 하는데, 이것을 쉽게 말하면, 내가 말하는 것과 내가 말한 그 안의 나는 다릅니다. 마치 극작가처럼 내가 나를 지어내서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 말을 하는 거예요.
그렇게 하면서 그 안에 나를 담아요. 남에게 ‘나는 이런 존재다.’라고 담는데, 그 안에 들어 있는 ‘나’와 그런 말을 하는 ‘나’는 다르다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무슨 말을 하게 되면 새로운 내가 등장하는 겁니다. 결국 나는 수시로 변하기에 내가 누구인지 모릅니다. 상황에 따라 내가 달라져요.
부산 강의에서 프로이드를 할 때 ‘내가 말하는 것이 아니고 말이 나를 이용해서 하고 싶은 말을 내뱉는다.’고 했어요. 쉬운 예를 들면,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이미 간음한 자다.’라고 했어요. 내가 있다. 여자가 있다. 나도 여자도 전부 물질입니다. 그러면 정신은 어디에 있는가?
물질과 물질의 만남이죠. 길을 가다가 상대와 부닥치면 에너지가 생깁니다. “아!” 하지요. 물질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음욕을 품는 자’라고 하십니다. 음욕의 구성 성분은 뭡니까? 이건 물질이 아닙니다. 그러면 천국, 혹은 지옥에 가는 것은 물질로 해결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오늘날 모든 사람들은 과학적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돈만 있으면 여자도 두 명, 세 명 거느릴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물질로 해결됩니다. 이 말은 인간이 바로 물질이라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를 심판하실 때 물질로 심판하는 것이 아니고 ‘음욕을 품으면’이라고 하십니다. 이 말은, 물질이 먼저가 아니고 정신이 물질을 이용해서 등장한다는 거예요. 이게 권능, 권력입니다.
이 권력의 배후가 누구입니까? 모르지요. 모르는데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사단아 물러가라.’고 하시면서, 정신 배후에 사단을 언급해서, 정신세계에서는 근원적인 것이 뭐냐? 사단과 예수님의 전쟁입니다.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의 전쟁이지요. 창세기 3장을 지금 예수님이 끄집어내는 겁니다.
이래도 이 복음이 현실이 아닙니까? 성경 내용만큼 현실적인 것이 어디 있습니까? 모든 인간들의 배후에 사단이 있어요. 인간은 사단의 전위병입니다. 인간이 복음을 싫어하는 것은 세상 신이 장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보다 더 생생한 현실은 없습니다. 세상은 기껏 과학을 거론할 뿐입니다. 에너지가 어떻고 -- 이런 것으로 끝납니다.
예수님 말씀 한 마디, 한 마디는 제자들에게 본질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IS 대원들이 테러를 일으킬 때 방법이 뭡니까? 자살이죠. 왜 그들은 자살 테러를 일으킵니까? 보통의 범죄는 자신은 살고 남을 해치는 것인데 그들은 자기 몸에 폭탄을 장치해서 죽으면서 까지 테러를 일으키는 이유가 뭡니까?
그들은 자본주의를 공격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 타겟(target)이 잘못되었어요. 자본주의가 싫다는 말은 달리 표현하면 자본주의가 부럽다는 말입니다. 자신들은 이스람을 통해서 초월적인 천국을 소망한다고 말은 하는데 실은 돈이 더 좋은 거예요. 돈을 좋아하면서 천국을 가고자 하는 그 이중적인 마음이 본인들이 싫은 거예요.
돈을 좋아해서 순수하지 못하면 알라의 나라에 갈 수가 없어요. 가는 방법은 못난 자신을 희생함으로 이 세상에서 선교를 하는 겁니다. 돈과 권력이 최고가 아니고 알라의 진리가 최고라는 것을 목숨 바쳐 전해서 천국 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팔미라 유적이 지중해, 시리아 쪽에 있어요. 팔미라가 뭐냐 하면, 제노비아 여왕이 있는데 그 부족이 326년 로마의 침략을 받아 항복할 것은 종용받았어요. 로마는 무조건 정복하지 않습니다. 항복하면 자치권을 주겠다고 하는데 끝까지 저항하면 정복합니다. 그래서 헤롯의세 아들이 항복해서 갈릴리 지역은 안디바, 유다 지역은 아켈라오, 가이사랴 빌립보 지역은 빌립이 맡아 다스리지요.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을 세 구역으로 나눠 이들이 통치했습니다.
이들을 성경에서는 분봉 왕이라고 했어요. 로마의 통치 방법은 직접 주둔해서 다스리는 것은 비용이 너무 많이 들기에 자체적으로 다스리고 세금만 내도록 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로마가 이스라엘을 이런 식으로 다스렸습니다.
팔미라 지역은 여왕이 로마의 요구를 거절해서 전멸되었어요. 그곳에 로마가 여러 유적 아폴론, 제우스 신전 등을 세워놓았어요. 이 유적을 최근에 IS가 폭탄으로 파괴했어요. 그리고 아프가니스탄, 실크로드라고 하는 불교의 유적지도 미사일을 발사해서 박살을 냈어요. 이게 뭐냐 하면, 알라의 본질 앞에서 인간의 모든 문명은 의미 없다는 거예요. 의미 없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자기 목숨을 바치는 거예요.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인간들은 이미 한 통속이 되어 있어요. 사단에 종속되어 움직입니다. 그 중 12제자도 포함되어 있어요. 왜? 그들은 독생자가 아니기 때문에. 그래서 새삼스럽게 주님은 개인에게 ‘똑바로 해!’라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너 배후를 알아야 한다.’고 하십니다.
창세기 3장 15절에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나오지요? 그런데 우리는 그것과 나는 상관없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달리 말씀하십니다. ‘너희들이 잘못해서 그런 것이 아니고 마귀가 가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성경 말씀은 독생자가 이 땅에 오시는 과정을 기록하고 있어요.
선지자와 율법에 예언된 대로 예수님이 오셨어요. 그러면 구약은 예수님이 타고 내려오시는 통로가 됩니다. 성도는 그 통로를 따라 거꾸로 예수님의 공생애를 반복하면서 갈 때 예수님 나라에 합류됩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남긴 흔적은 끝난 것이 아니고 오늘날 우리 인생을 통해서 반복됩니다.
여기 포도송이가 있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 포도송이가 되려면 붙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개인적으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같이 갑니다. 모든 성도가 집단 구원이지 개인 구원이 아닙니다. 어디 있든지 우리는 붙어서 사는데, 붙어 있는 때 예수 그리스도는 머리가 되고 성도는 지체가 됩니다.
성도는 주님과 함께 갑니다. 지금 예수님과 제자들이 그 가는 방법을 만들어 냅니다. ‘사단아 물러가라.’는 말이 베드로에게만 해당되는 말이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현재 우리에게 매일 반복적으로 주어지는 것을 인지하면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은 자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우리는 본질 문제를 다시 한 번 생각해야 합니다. 지난 수요일 제가 이런 설교를 했습니다. 구원 받는 기준은 일방적으로 하나님이 인간에게 제시합니다. 이 말은, 인간이 하나님 앞에 제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기준이 언약입니다. 그래서 ‘피 채 먹지 말라.’고 하셨지요.
‘피 채 먹지 말라.’는 것은 기준에서 벗어난 상태에서 아무리 열심히 노력하고 애써도 주님은 그것을 일체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복음 전하는 사람이 십자가만 전해야 되는 이유는, 나를 알아달다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제시한 유일한 기준이 십자가뿐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말고 다른 것이 있다면 사람들은 그것을 어리석게 생각 안 할 겁니다. 십자가도 믿고 다른 것도 행하면 되니까요. 하지만 십자가뿐이면 내가 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사단의 전위병들은 화를 냅니다. 자신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으니까. 그래서 이런 자들에게 십자가는 ‘어리석음’으로 들립니다.
나는 아무것도 할 것이 없음을 아는 사람은 십자가가 유일한 하나님의 능력이며, 진리가 되어 그것에만 소망을 두지요. 그리고 어떤 다른 것보다 십자가만 기쁨이 되겠지요. 십자가를 아는 것은, 십자가를 믿는 것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가 안 되는 것을 되게 했다는 것을 알지요.
사단의 종이 주의 종이 될 수 없는데 주님이 십자가 지심으로 이루셨다는 사실에 감격할 뿐입니다. 이런 기쁨이 있는 자는 세상으로부터 어떤 비난과 욕을 먹어도 대수롭지 않게 여깁니다. 십자가를 안다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나는 사단에 속했기에 구원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신학자들이 사단의 종으로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진짜 복음을 깨달은 신학자라면 신학 자체를 죄라고 말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런 신학자는 제가 본 적이 없습니다. 혹시 있을 수 있지만 저는 본 적이 없습니다. 과학자는 자신이 주장하는 과학 지식이 죄고, 주부는 주부 생활하는 것이 죄고, 목사는 목사의 일이 죄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모든 하는 일이 사단의 앞잡이로 아이 키우고, 빨래하고, 밥을 합니다. 이것은 주님이 제시한 기준과 관계없이 움직입니다. 이런 일을 함으로 독자적인 자신만의 가치와 명예를 지킨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이 바로 십자가를 욕되게 하는, 십자가를 어리석게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이도 낳지 말고, 아무 것도 하지 말고 살라는 말인가?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가 계속해서 이 세상 일을 하게 하십니다. 그래야 우리가 베드로가 간 길을 가게 됩니다. 주님을 부인하고 욕하는 그 길. 우리가 그와 같은 길을 갈 때 이런 우리를 용서하신 주님의 사랑을 더욱 깊이 깨닫는 은혜를 받게 됩니다.
10분 쉽시다.
(2016. 8. 12. 09:27 녹취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