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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안양20160708a히12장 5절(인솔)-이 근호 목사자유게시판히브리서

안양20160708a히12장 5절(인솔)-이 근호 목사 히브리서 12장 2절을 보겠습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라고 되어 있지요. 앞의 11장에서 어떤 신앙의 긴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그 역사에서 제일 먼저 신앙이 나타난 사람, 믿음의 증인으로 제일 먼저 등장한 사람이 아벨이지요. 가인부터 등장하지 않고 아벨부터 등장하지요. 아벨부터 등장합니다. 아벨부터 등장하면서 아벨은 과거 가운데서 처음이 되고 아벨 다음에 등장하는 사람이 에녹이고 그 다음에 노아가 등장하고 그렇지요. 히브리서 11장이 그렇지요? 그러면 처음 등장하는 사람은 보다 더 전의 과거가 되는 겁니다. 과거에서 어디로 향하느냐? 미래로 나아가요. 그러면 히브리서 11장은 전체가 일직선으로 어디를 향하여 달려간다고 보시면 되는 겁니다. 자, 그런데 달려가는 가운데 어떤 분이 있다고 한다면 이 사람이 달려갈 때 그냥 달려가는 게 아니고 도착 지점을 생각할 수밖에 없지요. 그 도달 지점이 어디 있느냐 이 말이에요. 그 도달 지점이. 이것은 오늘날 우리에게는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어요. “교회에 다니십니까?” “그러면 교회에 다니면 그 목적이 어디까지 갑니까?”라고 물으면 전부 다 “천국입니다.”라고 하거든요. 그게 맞을까? 우리가 교회에 다니고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게 천국이 목표냐 하는 겁니다. 천국이 목표냐.. 히브리서 11장에도 그렇게 이야기하더냐 하는 겁니다. 보험에 가입하는 사람의 목적은 보험을 타 먹는 것이 목적이 되겠습니다. 그래서 보험금을 타기 위해서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고 한 푼 한 푼 아껴서 폰뱅킹으로 하든지 돈을 넣고 있지요. 그러면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데 자기가 지금 교회에 오는 이것이 신앙생활의 끝이라고 본다면 이건 말이 안 되잖아요. 이렇게 적금 붓듯이 그 목적을 향하여 가는데 그 목적이 성경에서는 (2절에 보면) 십자가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천국이라는 것에 너무 성급해요. 그것은 교회에서 “천국이 목적입니까, 십자가가 목적입니까?”라고 했을 때 “천국입니다.”라고 하지 않고 “십자가가 우리의 갈 길입니다.”라고 한다면 교회에서서 도중 자진해서 이 노선을 철회할 사람들이 많이 나올 거에요. 많이 나오는 정도가 아니고 대부분 이 노선을 안 갈 거에요. 보험금을 넣는 것이 보험금을 타 먹어서 내 소유가 될 때, 다시 말해서 내가 지금보다 더 괜찮아진 내가 되는 것을 목표로 지금 내가 견디잖아요. 그런데 이 신앙의 선조들이 그렇게 견디고 아팠고 서글펐고 특히 외로웠고 남한테 욕을 얻어먹으면서도 견디고 견디는 그 힘은 어쨌든 간에 이 십자가에 참여하기 위해서 그렇게 했다면 이 말을 오늘날 교회 교인들이 알아먹을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 전에 여러분들이 알아먹었습니까, 지금 여러분들이 알아먹겠습니까? 그 십자가에서 죽으려고 그렇게 참고 했습니까? 만약에 어떤 보험 회사에서 “보험금 들으시면 뭐 주십니까?”라고 물었더니 “십자가 죽음입니다.”라고 했다면 이 보험을 누가 들어요? 아무도 안 들어요. 엄마가 딸한테 그렇게 기악(바이올린)시키고 피아노 가르치고 했는데 딸이 “엄마, 이거 왜 하는데?”라고 물었더니 엄마가 대답하길 “십자가에서 죽기 위해서!”라고 한다면 애가 그 말을 못 알아듣겠지요. 그래서 이렇게 봅시다. 이 믿음의 조상들이 자기가 착해서 알아들어서 용기가 대단해서 따라가는 게 아니고, 이 십자가의 긴 그림자가 이들이 걸어간 길에 뻗쳐져 있다고 보시면 되는 겁니다. 십자가가 이렇게 뻗쳐져 있으면 (이제부터 설명을 잘 들어야 돼요.) 우리가 천국을 바랐는데 천국을 바라던 우리에게 십자가가 나타났다면 이것은 기이한 겁니다. 이상한 거에요. 그렇다면 아벨 있잖아요. 그리고 에녹, 노아, 이런 사람에게 십자가의 긴 그림자가 덮인다면 아벨의 인생에서 기이하고 신기한 정도가 아니고 절망스럽다고 할까, 또는 낙망이 되고 좌절이 되는 그러한 일이 자기의 인생에 끼어들게 돼요. 제사를 잘 드렸는데 하나님이 받았다, 그 순간 자기는 어떤 포부를 가질 겁니다. ‘야, 이렇게 나가다가는 하나님께서 내가 잘 되게 해주시겠지.’ 그런데 형이 뒤에서 와가지고 돌을 가지고 쳐죽였다.. 죽을 뻔했으면 또 몰라.. 아예 죽었잖아요. 죽을 뻔했는데 다시 일어나서 형한테 복수하는데 하나님이 도와줬다면 막장드라마인데 그게 아니고 아예 죽어버렸어요. 거기에서 아침드라마를 끝낸다면 그 드라마를 볼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뭔가 희망이 있어야 될 게 아니에요. 희망이.. 그런데 죽었다는 것은 이제 모든 희망은 손을 털고 없다는 말밖에 안 돼요. 죽었다는 말은.. 아벨이 무슨 희망을 갖겠어요? 아벨이 (특히) 형한테 죽었다는 이 사실은 장차 예수님께서 억울하게 죽었다는 것을 아벨을 통해서 십자가의 긴 그림자, 이 전봇대의 긴 그림자가 아벨의 인생을 덮어서 아벨에게 이런 기이하고 특이한 사항이 일어나는 겁니다. 성도는 자기가 예상도 못한 특이사항을 몸에 품고 가는 거에요. 이것은 이렇게 표현할 수 있어요. 성도가 하나의 화물 열차의 객차라면 하나님의 특이함이, 객차마다 시멘트, 모래가 쌓이듯이, 거기에 쌓여서 같은 형제끼리 조인트 되어서, 객차와 객차가 연결되어서, 칙칙 꽥 하고 예수님 품속으로 들어가요. 예수님 품은 이렇게 열려있고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안 가봤습니다마는 거기에 유명한 동상이 있지요. 산꼭대기에 예수상이 있습니다. 그 예수상의 모습이 이렇게 팔을 벌리고 있어요. 마치 모든 걸 포용해줄 것처럼, 모든 것을 받아주는 것처럼, 자기한테 오는 사람들을 받아줄 듯이 팔을 벌리고 있단 말이지요.예수님께서는 이 기관차, 신앙의 선조들의 그 노선을 예수님의 품 안에 받아주는데 예수님의 십자가로서 받아줍니다. 이 말의 뜻은 너희들에게 일어난 일은 십자가를 나타내기 위해서 너희의 소원과 관계없이 일방적으로 너희 인생 속에 터져버려야 할 사건이었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저와 여러분들의 십자가 사건은 어떤 겁니까? 암벽 타는 거요? 어떤 것이 십자가 사건이지요? 하루하루가 십자가 사건과 연루되어 있습니다. 특별한 것을 십자가 사건이라고 간주하지 마세요. 그러면 그 사건이 우상화가 돼요. “나 이만큼 잘 났어.”가 됩니다. 그러나 우리의 인생이 십자가의 바다에서 오는 그 은혜로 뒷받침이 된 인생이라면 우리의 일상 자체에. 매일 아침에 일어나서 이 특이함에서 오는 감사가 있어야 되지요. 전기 보일러든, 가스 보일러든 밑에 깔아놓고 돌리게 되면 어디에 앉아도 보일러가 둥글둥글하게 있어서 뜨뜻하지요. 우리는 어디에 가도, 집에서나 직장에 가든 어디에서든 십자가의 뜨끈뜨끈함이, 기이함이 올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가 놓쳐버리면 무엇이 주어지는지 5절을 한 번 보겠습니다. “또 아들에게 권하는 것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그 다음에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주의 징계하심” “징계하심”이라고 되어 있지요. 이제부터 징계에 대해서 언급을 하겠습니다. 물론 그것을 하면서 3절과 4절을 다시 계속해서 설명해드리겠습니다. 다시 이야기합니다. 히브리서 11장의 긴긴 선조들의 레일은 우리가 흔히 알듯이 천국에 가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십자가 속으로 전부 흡수가 돼요. 모음이 되는 겁니다. 그래야 내 인생을 가지고 천국에 가는 게 아니고 주님의 십자가 인생으로 그 성격이 규정된 채, 천국에 들어가야 됩니다. 지금은 모르지만 옛날에는 초등학교에서 소풍갈 때 “얘들아 어느 장소에 모여라.”고 해서 가지 않고 학교 운동장에 모여서 깃발을 들고 선생님이 앞장서서 인솔해서 소풍 장소까지 가잖아요. 예수님이 그들을 자기 앞으로 모으시고 앞장서서 대제사장이신 예수님께서 깃발을 들고 천국에 가게 되면 천국은 예수님 본인의 나라이고 본인의 회사이기 때문에 (회사가 자기 회사거든요.) 자기에 의하여 인도함을 받는 자들은 거기에 다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천국이 예수님의 나라, 예수님 자기 회사라는 말은 쉽게 말해서 아무도 들어갈 자가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개인적 자격으로 예수님의 나라에 갈 수가 없어요. 그리고 예수님의 나라에 못 간다는 말은 천국에 못 가는 겁니다. 반드시 앞에 계신 예수님의 인솔을 받아야 갈 수 있는 나라가 천국이에요. 이곳은 인간의 자격으로는 갈 수가 없는 나라입니다. 이미 에덴 동산에서 추방되었기 때문에 갈 수가 없는 나라에요. 그래서 사실은 천국은 없는 곳이에요. 천국이라는 곳은 인간들이 자기가 이 세상을 사는 게 너무 힘들고 괴롭고 서글퍼서 죽고 난 뒤에 희망이 있어야 되겠다 싶어서, 상상해서 하늘나라, 천국, 극락이라고 이야기하는데, 그것은 자기의 자유이지만, 천국은 없어요. 없다는 말이 정답입니다. 왜 없어야 되느냐? 왜 없다고 해야 되느냐 하면은 그래야 자기의 주제 파악을 다시 하게 됩니다. ‘내가 없는 천국을 자꾸 생각하는 것을 보니까 ’나‘라는 것이 하나님이 생각하는 내가 아니고 내가 생각하는 ’나‘가 아닌가?’라고 하는 것을 되돌아볼 수 있어줘야 돼요. 노아 당시에 천국이라는 것은 없어요. 없는데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게 함으로써 기이한 날라가 장차 온다는 것이 노아를 통해서 표현되기 시작했습니다. 노아가 방주를 만들 때 노아를 빼놓고 다른 사람한테는 쓸데없는 짓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이 세상이 보기에 쓸데가 없는 짓이에요. 더운데 모여서 한다는 이 자체가 (돈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쓸데없는 짓을 하는 거에요. 노아가 방주를 만드는 것은 쓸데없는 짓을 하는 거에요. 심지어 노아 본인도 마찬가지에요. 안 해도 되는 짓을 하나님께서 시켜서 하는 거에요. 벌써부터 노아는 “자기의 뜻대로 하지 마옵시고”라고 하는 그 규칙과 규정 안에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는 말씀대로 노아의 인생을 통해서 그런 일이 벌어지는 거에요. 그 다음에 노아, 아브라함, 모세, ... 여러 사람들이 나오잖아요. 이들은 다 마찬가지입니다. 모두 다 본인이 원치 않는 길을 가는 겁니다. 그래서 “천국은 없는데 알려주더라.” 이렇게 돼야 돼요. 그 천국이라는 말은 실재로는 아들의 나라입니다. 그래서 여기 징계라는 것은 어떤 경우냐 하면은 아들과 관련해서 징계가 주어지는 겁니다. 이것을 공식화시키면 이렇습니다. 성도란 아들과의 관계로서만 성도가 돼요. 그래서 징계를 언제 받느냐 하면은 아들과의 관계에서 이탈했다고 생각할 때 그때 징계가 주어지는 겁니다. 그런데 2절에 어떤 아들이가를 소개했는데 그 아들은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워하지 않는 아들”이 근본된 아들이거든요. 진짜 아들은, 십자가의 죽음에 대해서, 그걸 참으시고 부끄러워하지 않은 거에요. 그러면 십자가에 대해서 부끄러워하지 않았다고 했는데 중간에 뭔가를 강조해보면 “십자가를 참으사”로 되어 있지요. 이걸 다른 말로 제가 고치겠습니다. “죽음”. 아버지의 뜻에 따라서 죽는 것을 참으시고 그걸 부끄러워하지 않은 거에요. 이걸 아주 더 줄여보겠습니다. 살다 죽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죽는 것을 겁내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것이 얼마나 특이한 인생입니까? 모든 인생은 죽으려고 사는 게 아니고 살려고 사는 거에요. 이왕 사는 거 더 살려고 사는 거에요. 90까지 산다고요? “90까지 많이 살았으니까 욕심내지 마시고 이쯤 돌아가시지요?”라고 하면 “이 놈!” 하고 화내지요. 왜 90을 살았는데도 불구하고 더 살려고 하느냐.. 아이스크림 하드 있잖아요. 이건 많이 먹었다고 해서 만족하는 게 아니에요. 얼마가 남았는지 아까워해요. 아무리 많이 먹어도 막대 하드가 줄줄 흘러내리면 아까워해요.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산 만큼 남아있는 것이 아니고 산 만큼 이게 삭제가 되거든요. 꼭 여름에 먹는 빙과류 하드 같아요. 자꾸 녹아버려요. 그래서 그 폭이 딱 오늘 하루치밖에 안 남았어요. 오늘 아침에 눈 뜨고 (지금) 오후 3시까지만 남아있어요. 어제 산 것은 아무리 살아도 무효에요. “산 것은 산 것이고 앞으로 창창하게 내일 더 살고 싶어.” 이렇게 되는 거에요. 오래 살았다고 해서 포만감을 갖는 것은 없습니다. 그것은 왜 그렇습니까? 탄생부터 의미가 발생되는 게 아니고 인간은 어쨌든 저쨌든 죽어야 된다는 것부터 무의식적으로 의미를 강요받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만큼 살았으니까 이제는 네가 죽어도 원한이 없지?”가 안 돼요. “더 살았으면.. 더 살았으면..” 99세가 되어도 더 나아가서 이 사람은 100살이 되어도 “내년까지 더 버텼으면.. 계속 살았으면.. 살았으면..”이라고 하는데 그렇게 갈 수 없습니다. 그 이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인간이 살았다고 하는 것은 이미 죽음이 결정되었기 때문에, 아직 죽지 않았다는 의미에서, 살았다는 그 성질이 인간 속에 가득 차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나는 태어나서 이만큼 살았다.”가 좋은 게 아니고 “왜 나는 자꾸 살고 싶어해?” 그것은 죽음이 있음을 전제로 해서 자꾸 살고 싶어하니까 계속 이 사람이 힘들고 스트레스를 받는 거에요. “이만큼 살았으니까 이제 나를 놔주겠다.”는 게 없어요. 쉽게 말해서 생존을 위한 인생이 아니고 죽음이 얼마나 강하냐를 보여주기 위해서 인간은 이 땅에서 이렇게 서글프게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죽음을 바탕으로 해야지, 자기 생일을 바탕으로 하면 안 되지요. 그렇게 되게 되면 이 사람은 비겁하고 자꾸 도망치려는 인생이 돼요. 피하고 싶은 거에요. 그런데 피한다고 해서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로마서 5장에 나오는 것처럼 죄가 왕노릇하게 되면 모든 게 죽음이 되고 말아요. 어차피 죽을 수밖에 없고 아프고 뭐하고 하는 모든 것이 전부 죽음의 힘에 의해서 휘둘리고 있는 겁니다. 몸이라는 것은 결국 흙으로 돌아갑니다. 죽었을 때 흙이 되는 게 아니고 흙의 기운, 흙의 힘이 현재 흙이 되기 전부터 여기에 계속 작용하고 있습니다. 태어났을 때부터 내내 작용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누가 아시느냐? 예수님이 아셔요.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의 택한 백성에게 “네 근본을 내게 보여줄게.”라고 해서 보여준 사건이 십자가 사건입니다. “누가 십자가가 뭡니까?”라고 묻거든 여러분들이 이렇게 답변해주세요. 십자가라는 것은 홀로 죽은 게 아니고 죄를 가지고 와서 죄를 가지고 온 그들에게 죄+용서를 더불어서 제공해주는 게 십자가 사건입니다. 설에 떡방앗간에 떡을 뽑으려고 하면 어떻게 합니까? 요새는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지만 쌀을 약간 물에 불려가지고 방앗간에 갖다주고 기다리잖아요. 옛날에 우리는 표를 받고 기다렸어요. 하도 명절 때 떡을 많이 해서요. 그래서 우리 할머니하고 어머니는 머리에 이고 앞집에서 가져 온 쌀이 있으면 그 다음에 자리잡아 놓고 말도 안 듣는 나를 보고 지키라고 하면 나는 그것 지킨다고 방앗간 돌아다니면서 구경하고 가끔 누가 안 볼 때 앞집에 해놓은 떡을 떼먹기도 하고 그러거든요. 쌀을 갖다주고 나중에 떡으로 되돌려받듯이 주님께서는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 속에 있는 죄를 가져가고 그 죄와 더불어서 용서를 주니까 성령을 받고 성도가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이제부터 주께서 어떠어떠한 죄를 가져갔는지 살아가면서 주께서 이미 가져가서 용서로 처리된 그 죄에 대해서 우리가 죽을 때까지 경험해야 되고 체험해야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에 구원을 받은 겁니다. 내가 그 죄를 어떻게 압니까? 나쁜 짓을 해서 아는 것이 아니고 기이하고 특이한 사건들이 연속해서 일어나면서 그 사건 속에서 주께서 이미 우리의 허락도 없이 몰래 와서 다 가져간 그 죄, 그러니까 이미 처리가 끝나, 의로 달라져버린 그 죄를 도로 받으면서 그 죄 속에서 주님에 대한 고마움과 감사가 일어나는 겁니다. 수련회 간다고 둘이 싸운다고 하지요. 그것도 주께서 이미 가져간 거에요. 가져가놓고 우리에게 그것을 되돌려주게 되면은 ‘아, 이것 때문에 주께서 십자가를 지셨구나.’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사건은 그 사람을 안 만났으면 일어나지 않을 건데 주께서는 그 사람을 배치해서 반드시 일어나야 될 일만 일어나게 하십니다. 그래서 그 사건이 일어나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현실 그 자체가 답이 된다는 말이 이 말이에요. 제가 지난 낮설교 때인가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특이한 답을 구하지 마세요. 지금 내가 살아가고 있다는 것, (개가 어디에 갔지요?) 개를 지금 안고 있다는 게 답이에요. 모든 것, 한 발자국, 한 발자국도 내 뜻대로 발자국을 옮길 수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알려주기 위해서 지금 이대로 내가 살아야 되는 이것이 하나님 앞에 완벽한(perfect) 해답이 되고 정답이 되는 겁니다. ‘다른 사람한테는 쌍꺼풀이 있는데 나는 부모를 잘못 만났나, 왜 쌍꺼풀이 없어?’라고 하는데 부모를 만난다는 게 따지고 보면 기적이에요. 내가 이 땅에 존재한다는 것도 기적이에요. 이건 도대체 수억분의 일이거든요. 내가 태어난 것도 수억분의 일이지만 양쪽 부모도 수억분의 일로 계산하게 되면 수억분의 일×수억분의 일이 되지요. 그 할아버지까지 계산해보세요. 모든 인간이 태어남은 우연은 없고 예수님께서 뜻이 있어서 태어나게 한 하나님의 기적들이 다 담겨있습니다. 그래도 그렇게 남을 부러워하지 마세요. 잘 사나, 못 사나 결국 어디로 모이느냐 하면 성도는 십자가로 모이고 불신자는 지옥으로 다 모입니다. 그래서 불신자들이 살아온 것은 지옥을 말하기 위해서 가는 거에요. 성경에서 우리가 자꾸 오해하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닌데 그 중에 하나가 뭐냐 하면은 나쁜 짓을 해서 지옥에 간다는데 나쁜 짓을 해서 지옥에 못 갑니다. 나쁜 짓을 해서 지옥에 가는 게 아니고 지옥에 가야 하기 때문에 나쁜 짓이 발생되는 거에요. 나쁜 짓을 하기 싫어도 나쁜 짓을 해야 돼요. 특히 지옥에 가는 이유에 대해서 고린도전서 16장에 나와 있습니다. “누구든지 □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했는데 □ 안에 들어가는 말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입니다. 여기에서 “주”가 누구냐 하면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누구냐? 예수님이거든요. 그렇다면 세종 대왕은 저주를 받아야 되는 거에요. 왜? 세종 대왕 때에 예수 이야기가 없었으니까요. 강감찬도 마찬가지고요. 이성계도 마찬가지고요. 지옥에 가야 돼요. 아니, 통째로 합시다. 이방 민족은 지옥에 가기 위해서 이방 민족이 있는 겁니다. 그런데 어떤 부흥사들은 이걸 몰라가지고 어떤 교인들이 이걸 물었던 모양이지요. “저, 목사님 복음이 들어오기 전에 우리나라 조선 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구원을 받았지요?”라고 하니까 이제 구라가 시작되는 거지요. 김구라.. “그들은 양심으로 구원 받습니다.” 그 사람은 요한계시록 20장 마지막을 지금 거부하고 있는 거에요. “행함으로 하는 사람”은 예외없이 누구나 지옥에 갑니다. 양심도 행함이잖아요. 행함으로 사는 사람은 다 지옥에 가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천국은 (오늘 본문에 의하면) 아들이 되어야 되는데 아들의 원형은 출애굽기 4장에 나오듯이 이스라엘이 아들이에요. “이는 내 아들이요 내 장자다” 그리고 이 이스라엘 아들은 태어났다고 이스라엘, 아들이 되는 것이 아니에요. 그들은 히브리인들이에요. 히브리인들+죽음이 만나게 되면 이게 아들이 되는 겁니다. 이 죽음에는 모세가 길에서 죽는 죽음, 그리고 유월절의 죽음이 다 포함이 되어 있어요. 히브리인들이 죽음을 맞이해야, 유월절을 맞이해야 아들이 돼요. 아담이 자손이 십자가를 맞이하게 되면 아들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5절에 있듯이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이라고 할 때 누구한테 이야기합니까? “징계하심” 앞에 뭐가 있어요? “내 아들아”라고 나오지요. 그렇잖아요. 잠언서 3장 11절을 인용한 말씀인데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이라고 할 때 거기에 나오는 “징계”는 아무나를 보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내 아들”이라는 조건에 부합되도록 주께서 이미 규정한 사람에게 하는 말인 겁니다. 그러니까 징계라는 말을 했다는 말은 이미 아들입니까, 아들이 아닙니까? 이미 아들입니다. 아들이기 때문에 내 말을 알아먹는다는 거에요. 징계라는 말을 자꾸 때린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징계라는 것은 본 노선으로 유지시킨다, 또는 확인시킨다라고 보시면 되는 겁니다. 그 노선이 아들이에요. 아들의 노선은 조건이 있어요. 그 조건은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 조건이 아들의 조건입니다. 그래서 앞에 있는 노아, 에녹, 아벨의 공통점이 뭡니까? 아브라함, 이삭, 모세의 공통점이 뭐겠어요? 그들이 하나님에 의해서 일어난 그 죽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공통점이 있는 겁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하겠어요? 죽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겠지요. 내 인생 망했다고. 그런데 여기 11장 36절~37절을 누가 한 번 읽어보세요. “또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칼에 죽임을 당하지요. 이럴 때 이런 신앙인이 그걸 굉장히 속상하게 여기고 부끄럽게 여겼습니까? 아니지요. 이런 일을 당했다는 자체가 이 사람에게 이미 천국이 미리 당겨서 왔다고 보시면 되는 겁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목사님, 우리도 옥에 갇혀야 되고 시험을 받아야 되고 안양에 돌이 막 날아와야 되고 제재소 옆에 지나가다 끌려가가지고 톱으로 켬을 당해서 사지가 몇 개 짤려야 천국에 갑니까?’라고 생각을 하는데 사람이 기분이 나쁜 것이 꼭 톱으로 켜이고 돌에 맞는 것만 기분이 나쁜 게 아니에요. 된장에 고기가 나왔는데 자기가 고기를 먹으려고 할 때 다른 식구가 고기를 먼저 건져먹는 게 기분이 나쁜 거에요. 그 고기를 빼앗긴 “부끄러움을 참으사”에요. 모든 바닥은 십가가가 깔려있습니다. 보일러처럼.. 모든 게.. 사람이 기분이 나쁘다는 것이 돈을 빼앗긴 것만 기분이 나쁜 게 아닙니다. 구분 기다려서 차를 타고 가는데 내 바로 뒤에 같은 차가 뒤따라올 때 속이 상하지요. 오늘 십자가 경험하셨잖아요. 자기는 차를 잘 타고 있는데 뒤차가 가까이 왔다는 것 자체에서 구분 동안 땡볕에서 기다렸다는 그 억울함이 드는 거에요. 만약에 뒷 차가 구분 뒤에 오는 게 아니고 20분 뒤에 온다면 얼마나 감사하겠습니까? 요런 못된 속아지를 이미 처리한 용서와 겸해서 우리한테 (이런 못된 속이 있다고) 택배로 보내주신 겁니다. 그게 바로 성도가 갔던 길입니다. 평소에 암벽을 잘 타다가 동영상을 찍을 때만 암벽에서 미끄러질 때 우사를 당하지요. 그래서 제가 대구 강의를 하면서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망신당하지 아니하면 인간이 안 된다.” 망신의 정도는 뭔지 모르겠습니다마는 망신을 다른 말로 하면 실패에요. 그런데 실패라고 하고 “실패당하지 아니하면 인간이 안 된다.”고 할 때 어떤 사람은 “도대체 재산이 몇 백만 원, 몇 십만 원 없어져야 실패입니까?”라고 하는데 이 실패라는 것은 돈 문제가 아니에요. 어떤 부자는 1억이 날아가도 껌값이다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1만 원이 날아가도 실패로 봐요. 만 원을 가지고 하루를 사는데 그것을 바람에 휙 날려버리면 자기는 그걸로 죽는 거에요. 인간은 평소에 ‘나는 이 정도야.’라고 자아가 규정된 것이 있어요. 그 자아의 틀에 흠집이 나면 그걸 인간은 실패로 봐요. 이게 공식입니다. 자아는 ‘나는 이 정도야.’ 하고 규정한 게 있는데 그게 흠집이 나고 그것이 우사가 될 때 그것을 실패로 보는 겁니다. 그래서 진짜 밥을 굶어서 자살한 사람은 거의 없어요. 속이 상해서 자살한 사람이 대부분입니다. 못 먹어서 죽은 사람은 거의 없어요. 지금 우리가 히브리서 12장을 하고 있지요. 다시 한 번 정리해드리겠습니다. 정리해봐야 기억이 안 날 거지만 그래도 정리해드리겠습니다. 히브리서 12장에 보게 되면 12장 오기 전에 11장이 있었지요. 11장의 내용이 뭐였습니까? 믿음의 조상들이 마치 기차 객차처럼 고리에 고리를 물고 죽 이어져있지요. 제일 처음에 나온 사람이 아벨이었고 그 다음에 에녹이었고 그 다음에 노아였고 이렇게 줄줄이 쫙 이어져있지요. 그런데 그들이 이렇게 신앙적인 연줄로 연줄로 이어지면서 어떤 목표점이 있었는데 그 목표점이 히브리서 12장에 보면 나와 있습니다. 그 히브리서 12장의 목표점이 2절에 나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자”라고 되어 있고 그 예수님이 “□를 참으사”라고 되어 있는데 뭘 참았습니까? “십자가를 참으사”라고 되어 있지요. 이게 12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11장에 나오는 모든 믿음의 선조들은 무엇을 향하여 달려온 사람들이에요? “십자가를 참으사”를 바라보면서 달려온 거에요. 왜냐? 이런 주님을 바라보자고 했으니까요. 이들이 바라본 것은 자기가 잘되는 게 아니고 ‘도대체 왜 내 인생에 이러한 낭패적인 일, 이러한 희한한 일, 이런 기이한 일이 누구 때문에 발생되었는가?’ 그 주인공이 누구냐를 위하여 그들은 달려온 겁니다. 내 인생이 이렇게 남들하고 차이나는, 남들은 그냥 평범한데 왜 내 인생은 방주를 만들어야 되고, 내 인생은 왜 제사를 잘 드려놓고 돌에 맞아죽어야 되고, 야곱 같은 경우에는 요셉의 손자들에게 축복할 때 제대로 해도 되는데 왜 어긋맞게 하되 그것도 지팡이에 의지해서 해야 될 운명인지.. 어떤 사람은 톱에 켜였는데 톱에 켜이는 것을 희망사항 삼아서 사는 인생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광야에 유리했는데 광야에 유리하는 것을 자기의 인생의 목표로 삼아서 사는 사람은 없잖아요. 왜 이런 특이 사항이 일어나는가? 11장에 보면 중간중간에 그 이유에 대해서 이렇게 되어 있어요. 믿음으로, 믿음으로, 믿음으로가 반복이 되어서 나오잖아요. 믿음으로 이런 특이사항, 믿음으로 이런 특이사항, 그런데 그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주를 바라보기 위해서 달려왔는데 그 주님은 어떤 주님이냐? 십자가를 참으사 십자가에서 죽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거에요. 그런데 십자가에 대해서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말은 (십자가는 죽음 사건이거든요.) 그러면 예수님을 빼놓고 모든 인간은 자기가 죽는 것에 대해서 그걸 자랑스러워하겠습니까, 부끄러워합니까? 부끄러워하지요. 인생 실패잖아요. 살아 있으면 성공이고 이만저만 해가지고 죽었다고 하면 이것은 집안에 웃음거리(우사)가 되지요. 그러니까 사람으로서 믿는다는 것은 인간의 능력으로서는 생겨날 수가 없는 거에요. 어떻게 죽는 게 자랑스러워요? 이게 집안의 우사지요. 예수님은 32,3살에 돌아가셨어요. 아이고, 엄마인 마리아가 되게 자랑하겠네요. 우리 아들 죽었다고 자랑합니까? 슬퍼하겠지요. 그게 보통 사람이에요. 그래서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영광을 위해서 바라보는 게 아니고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바라볼 수 없는 것을 바라보는 그것이 믿음의 목표라는 것을 11장과 12장을 통해서 말해주는 겁니다. 그 십자가에 부끄러워하지 않고 죽었다 이 말이지요. 그러면 그 예수님이 여기 죽었으면 뒤에 있는 아벨부터해서 에녹, 노아, 이 사람들은 어느 품속으로 달려온 거에요? 이 기관차가 칙칙폭폭해가지고 어디로 달려온 겁니까? 예수님 품안으로 들어오는 겁니다. 왜 이들이 들어와야 됩니까? 이들이 들어오지 않으면 이들은 천국을 갈 수가 없어요. 그래서 천국은 인간의 힘으로 갈 수가 없는 나라입니다. 예수님께서 인솔하지 않으면 갈 수 없는 겁니다. 오늘 제목을 인솔로 하겠습니다. 주님이 인솔하지 않으면 갈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런데 그 주님이 인솔했는데 인솔하는 자격이 뭐냐? 히브리서 12장 5절에 보니까 이분이 “아들”입니다. 아들이지요. 그러면 하나님의 뜻은 이제 나타났어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은 사람들이 자기 품으로 오는 것이 아니고 누구의 인솔 하에 오는 자만 하나님께서 받는다는 겁니까? 아들의 인솔을 받아야 되지요. 그런데 아들은 이 땅에서 아들이라고 해서 아들이 되는 게 아니지요. 아들이라고 하는 것은 공식이 있는데 출애굽기 4장에 보면 히브리인들이 나와요. 아직까지 이스라엘이 아닙니다. 유월절 날이 되어야 이스라엘이 돼요. 히브리인들이 무엇을 만나야 이들이 아들이 되느냐 하면 “내 아들, 내 장자”는 죽음을 맞이해야 돼요. 이것은 내가 말을 하는 것보다도 직접 출애굽기 4장을 찾아보는 게 좋습니다. 출애굽기 4장을 한 번 봅시다. 22절에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고 되어 있지요. 23절에 “내가 네(바로)게 이르기를 내 아들을 놓아서 나를 섬기게 하라”고 이야기해도 바로가 들어준다, 안 들어준다? 안 들어주는 것을 미리 다 알고 계시지요. 그러니까 우리 인생에서 뜻대로 안 된다는 것을 누구도 알고 있다는 말입니까? 하나님도 알고 있어요. 혼자만 알고 하나님은 모른다고 자꾸 하나님한테 대들지 마세요. 이미 다 알고 있어요. 그 다음에 24절에 “여호와께서 길의 숙소에서 모세를 만나사 그를 죽이려 하시는지라”고 했지요. 아들이라면서요? 아들이라면 그냥 아들이라고 하지 왜 죽이느냐? 모세가 죽음을 맞이하지 아니하면 모세는 히브리인이 돼요. 히브리인인데 어디의 히브리인이냐? 애굽 나라에 속한 애굽인 중의 히브리인이 돼요. 지금 애굽 나라에서 히브리인들이 나오면서 나라의 이름이 이스라엘로 바뀌는데, 바뀌면서 그들의 성격이 하나님의 장자, 하나님의 아들로 바뀌어져야 되는 겁니다. 이들이 바뀌어지려면 필히 하나님이 준비하신 준비된 죽음과 결합이 되어야 돼요. 그래서 지도자인 모세부터 먼저 죽어야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 죽어야 될 모세가 (하나님은 모세를 죽이려 하는데) 나중에 (죽지는 않고 죽으면 드라마(영화)가 끝나니까) 죽을 뻔하다가 다시 살아나지요. 살아나면서 개입된 것이 있는데 그것이 뭐냐 하면은 십보라가 자기 아들에게 할례를 행하지요. 나중에 유월절 날 할례 받지 아니한 자는 어린 양의 피를 발라도 소용이 없게 되어 있어요. 출애굽기 12장에 유월절 행사를 할 때 조건이 있어요. 종이든 이방인이든 관계없이 문설주와 문지방에 피를 바른 집 안에 있는 사람은 일괄적으로 할례를 받아야 됩니다. 할례를 받지 않으면 그 사람은 이스라엘이 될 수 없어요. 할례의 의미가 무엇인지 그 의미를 알리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출애굽을 일으키기 전에 먼저 모세의 죽음과 견주어서 할례의 의미를 끄집어 냅니다. 아내 십보라가 아들에게 할례를 하게 되면 고추 쪼가리가 나오지요. 그 고추 쪼가리를 가지고 모세의 고추에다가 접촉을 시켜요. 그러니까 모세가 나은 거에요. 이것의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고추(생식기)라고 하는 것은 혈육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아들 됨은 육에서 아들이 됨은 성립이 안 되고 육이 죽어야 하나님의 영적 아들이 된다는 겁니다. 할례라고 하는 것은 육을 중간에 끊어버리는 거에요. 그것을 끊어버리면 피가 나와요. 그래서 십보라가 모세를 보고 하는 말이, “당신은 어쩔 수 없이 내 남편이 아니고 피 남편이다.”라고 하는 겁니다. 우리끼리 부부가 되는 것이 아니고 당신이 할례 속, 먼저 아들 속에 있어 당신이 아들이라면 아들과 할례 언약을 맺은 가족은 같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자격이 부여됩니다. 그렇게 되는 거에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을 보라”고 할 때 그 유월절의 반복이 신약까지 이어집니다. 그 유월절의 피를 흘렸을 때 그 날이 4월달인데 그 날짜를 1월달로 바꿔요. 그걸 아빕월이라고 하고 나중에 닛산월이라고 하는데 같은 말입니다. 이게 유월절 1월달, 정월 초하루입니다. 시간이 처음이 된다는 것은 없던 시간이 주어졌다는 것이고 없던 시간이 주어졌다는 것은 없던 나라가 새로 생긴 거에요. 그러면 이스라엘이 가면서 두 개의 시간이 생겼습니다. 이스라엘이 비행기라면 활주로에 비행기가 뜨면서 비행기 속에 흐르는 시간이 따로 있을 것이고, 비행기를 떠나보내는 활주로에 시간이 따로 있겠지요. 이 활주로의 시간이 우리 세속의 시간이에요. 천 년입니다. 그런데 비행기 안에는 천 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 년 같아요. 그렇게 되는 겁니다. 이 묵시 세계와 땅의 세계에, 비행기가 활주로를 떠나버리면 두 개의 층이 생겨 버립니다. 그걸 가지고 갈라디아서 4장에서는 두 개의 언약, 육에 속한 언약이 있고 하늘에 속한 언약이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 어머니는 예루살렘이라고 했어요. 갈라디아서 4장에 나와요.그러면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붕붕 떠가지고 다니느냐는 거에요. 이집에 올 때까지 허공에 떠가지고 휘저으면서 있다가 여기에 온 것이 아니잖아요. 하늘에 속했다고.. 하늘의 개념 자체가 달라져야 돼요. 안에 풍선이 들어있어서 붕붕 떠서 하늘의 개념이 아니고 하늘의 개념은 땅의 조건 속에 깊숙이 들어있는 개념이라서 이것은 기이와 특이성으로만 나타나는 거에요. 요모조모를 아무리 봐도 전혀 하늘답지 않아 보이는 것. 누가 알았으리요. 그냥 평범한데 십자가의 은혜이고 유난을 떨면서 신앙 생활을 잘하는데 지옥의 힘이고.. 진짜 이 소자한테 준 것이 곧 나한테 준 것이다. 예수님께서 나타나셨을 때 목마를 때 마실 것을 주었고 배고플 때 먹을 것을 주었다고 했는데 그것을 준 게 특이한 겁니까? 대단한 겁니까? 그것을 주고 나는 갑자기 30배, 60배 복을 받는 거에요? 아니지요? 심지어 얼마나 특이성이 없든지 마실 것을 주었고 먹을 것을 주었는데 나중에 천국에 와 있어요. 받은 사람이 오히려 의아해 합니다. “저는 주님한테 한 게 없는데요?” 얼마나 평범했으면, 얼마나 사소했으면, 사소한 일을 했는데 그게 곧 주께 한 일이 될 때 다른 사람들이 주님을 알아볼 수 있는 그러한 낌새는 전혀 없지요. 왜? 너무 평범하니까요. 그런데 본인은 그게 특이성으로 나타나는 거에요. 그 특이성에 대해서 히브리서 12장을 봅시다. 다시 한 번 2절 끝에 보면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라고 하지요. 모든 신앙인들이 예수님의 이 심성을 그들 시대에 앞당겨서 그들의 인생 속에 부여받은 거에요. 예수님을 열심히 본받은 게 아니고 예수님의 십자가가 전봇대라면 그 전봇대의 그림자가 이미 저 에녹과 아벨까지 그들의 인생에 본의 아니게 덮은 거에요. 성도가 뭡니까? 이미 벌어진 십자가의 그림자가 성도의 삶 속에 (대구든 부산이든 관계없이) 덮어 있는 거에요. 그러니까 성도가 다른 사람과의 차이점이 있는데 그것은 성경 그대로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고”가 되는 겁니다. 곗돈을 좀 떼였다고 그걸 가지고 죽고 사네 하지 않고 이 세상에서 내가 인생을 실패했니, 내 인생은 이런 게 아니었었어. 이럴 수가, 라는 것을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가지고 나와 보세요. 그것은 고민거리도 안 되지요. 왜냐하면 예수님은 뭘 바쳤습니까? 예수님은 발가벗고 우사를 당하고 자기 엄마 앞에서 그렇게 죽음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걸 부끄럽다고 여기지 않았는데 우리는 과속을 해서 5만원짜리 하나만 긁혀도 그걸 가지고 사흘 동안 고민하면서 ‘주여 이럴 수가 있습니까? 운전대를 쥐면서 기도를 열심히 했는데 기도발(운발인지 모르지만)이 다 어디에 갔습니까?’ 그런 식으로 하여튼 조그마한 흠집만 나도 길길이 뛰면서 쳘야하면서 땅을 쳐가면서 ‘어찌 이럴 수가, 이렇게 해주시면 제가 신앙 생활을 할 용기가 나지 않지 않습니까? 저에게 힘을 주옵소서.’라고 하는데 힘을 주긴 다 줬는데 울고불고 하는 것은 누구한테 하는 거에요? 그것도 주님한테 왔는데 무슨 힘이 또 필요해요? 그렇게 따질 힘이 있으면 감사하면 되지.. 무시로 기도하랬잖아요. 범사에 감사하고.. 비행기 안의 시간이라는 것은 아침, 점심, 저녁, 오전. 시간에 맞춰 갈 게 없어요. 항상 주의 은혜, 주의 사랑에 쌓여서 살아가는 겁니다. 그 관계를 무슨 관계라고 하느냐 하면은 (제가 아까 무슨 관계라고 했습니까?) 아들의 관계라고 합니다. 여기에 징계가 나옵니다. 징계란 뭐냐? 이미 수립된 관계에서 이탈했을 때, 그 관계로 다시 집어넣기 위해서 취해지는 하나님의 작용입니다. 부자가 되라고, 교회에 헌금 갖다 바치고 봉사를 하라고 징계를 하는 게 아니에요. 교회 관계가 아니고 아들의 관계에요. 아들의 관계에 대해서 방금 이야기했습니다. 어떤 일을 당해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 개의치 않는 관계, 아들이 학교에서 얻어맞는 일을 당해도 그것에 개의치 않고 그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 제가 어제 잘 안 보는데 후딱 보니까 드라마를 하고 있는데 그냥 훅 지나갔어요. 보니까 아들이 학교에서 싸움을 해가지고 정학을 먹었어요. 그 아들을 보고 엄마가 교무실에 가서 처음에는 땡깡을 치다가 안 되니까 나중에는 꿇어앉아가지고 두 손을 모으고 제발 내 아들을 좀 살려달라고 빌어요. 그 모습이 뭐냐 하면 아들을 위해서라면 나이 50살 넘은 아줌마가 꿇어앉아서 비는 이것도 전혀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을 용기가 되어 있다 이 말이지요. 그 여자 친구가 나쁜 애들이 유혹해서 거기에서 빼내기 위해서 주먹질을 했는데 그 여자 친구를 때린 애가 아주 유력한 집안이 되어 가지고 거짓말을 하는 거에요. “그때 가만히 있었는데 오빠가 나를 구해준다고 때렸어요. 오빠가 나대서 그렇지 그런 거 아닙니다.” 이렇게 거짓말을 하니까 그게 분통이 터진 거에요. “함부로 애틋하게”라는 드라마의 한 장면에 보면 나와요. 그러니까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는다는 것은 까짓것 내가 꿇어앉더라도 다른 더 큰 관계, 확정된 관계가 있다면 이런 것은 얼마든지 할 수 있다.라는 것이고 이것이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모든 신앙(믿음)의 선조들이 그렇게 한 거에요.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그렇게 살아온 겁니다. 이제 그들의 삶이, 십자가의 그림자가 있는 우리들에게 똑같은 현상으로 일어나는 겁니다. 주께서는 우리의 죄를 가져가시고 그걸 용서+죄로 다시 우리에게 되돌려줌으로써 이런, 이런 죄 때문에 이미 용서했다는 것을 우리한테 확인시켜주는 그러한 생이 이제 우리한테 남아 있습니다.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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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219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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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