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행 13"34-41 (율법과 부활)
Re..행 13:34-41 (율법과 부활)
이름 : 이근호(IP:)
율법과 의
2004년 10월 6일 본문 말씀: 사도행전 13:34-41
13:34 또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저를 일으키사 다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을 가르쳐 가라사대 내가 다윗의 거룩하고 미쁜 은사를 너희에게 주리라 하셨으니
13:35 그러므로 또 다른 편에 일렀으되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시리라 하셨느니라
13:36 다윗은 당시에 하나님의 뜻을 좇아 섬기다가 잠들어 그 조상들과 함께 묻혀 썩음을 당하였으되
13:37 하나님의 살리신 이는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였나니
13:38 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가 알 것은 이 사람을 힘입어 죄 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며
13:39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
13:40 그런즉 너희는 선지자들로 말씀하신 것이 너희에게 미칠까 삼가라
13:41 일렀으되 보라 멸시하는 사람들아 너희는 놀라고 망하라 내가 너희 때를 당하여 한 일을 행할 것이니 사람이 너희에게 이를찌라도 도무지 믿지 못할 일이라 하였느니라 하니라
오늘 본문 내용을 얼핏 보아도 주된 내용은 이것입니다. "그 분에 힘입어 죄사함을 얻는다는 것"으로 사도 바울의 복음의 핵심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흔히 이 내용이 쉽게 믿어지는 정도가 아예 인간으로 태어났다면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내용이라는 겁니다. 즉 사도 바울은 설교를 할 때에 사람을 설득시키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 자신이 설교하는 이것까지도 구약에 이미 예언된 바에 준한 하나님의 치밀한 계획에 해당된다는 겁니다.
뿐만아니라 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 믿고 안 믿고 하는 것도 인간의 자의에 의해 이루어지는 일들이 아니라 그것조차 구약에 이미 예언된 바가 있다는 겁니다. 참 신기한 일이지요.
사도 바울이 인용한 선지자는 하박국 선지자입니다. 하박국 1:5에 보면,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열국을 보고 또 보고 놀라고 또 놀랄찌어다 너희 생전에 내가 한 일을 행할 것이라 혹이 너희에게 고할찌라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리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예언대로라면 인간들이 상식선에서 알고 있는 식으로는 결코 진리가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의 설교를 믿게 되는 것도 본인의 이해능력에 의해서 34절의 예언의 말씀처럼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은사가 선물이 주어져야 가능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사도의 설교가 어떤 내용이 담길 때에는 사람들은 의아해 하는 겁니까? 사도 바울의 설교는 예수님의 부활에서 죄사함의 원리가 들어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하고 성도가 죄사함을 받는 것하고 무슨 관계가 있단 말입니까? 과연 성령을 안받은 자라면 즉시로 외면해 버릴 내용인 것이 분명합니다.
34절에 보면, "또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저를 일으키사 다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을 가르쳐 가라사대 내가 다윗의 거룩하고 미쁜 은사를 너희에게 주리라 하셨으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죽은 자 가운데서'라는 말이 나옵니다. 예수님의 부활의 의의는 예수님만이 죽은 자들 속에서 벗어나야 될 분이고 나머지 그 어떤 자라도 '죽은 자들 속에 그냥 머물러야 하는 자'라는 겁니다.
심지어 열심히 하나님의 일을 잘 수행했다고 보여지는 다윗이나 선지자 조차도 말입니다. 이 점이 중요합니다. 아무리 하나님에게 충성, 봉사를 다해도 그 행함의 공로로 자기 육의 썩어짐에서 면제될 자격이 될 수 없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열심히 하나님에게 순종했던 신앙인이 왜 죄인이냐를 알려주는 것이 무엇일까요? 이점이 사도바울에 있어 획기적인 바입니다.
율법이 바로 그들이 죽음 속에 들어가야만 하는 타당성을 제공했다는 겁니다. 그동안 율법을 받은 유대인들이나 율법적인 요소가 들어있다고 여기는 이방인들에게 있어 윤리적 요소들은 모두 자신들의 의로움이나 신적인 거룩함의 흔적이라고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진짜로 하나님의 것이 인간 속에 약간이라도 들어있다고 한다면 죽음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다고 사도 바울은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동안 인간의 죽음이란 그저 인간의 연약성으로 인해 생긴 현상이라고 보았고, 완벽하지 않고 완전치 못한 속성으로 인한 결과라고 보았지 전적으로 더러운 존재라서 죽음이 왔다고는 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인간의 죽음에 합류하므로서 비로소 인간은 자기 죽음의 원인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전적인 죄인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이것을 사도 바울은 신약 성경 곳곳에서 '육'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창세기 6:3에 보면,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일백 이십년이 되리라 하시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그들은 육이기에 그들의 수명히 확정되어 버렸다는 말입니다. 왜 이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육체'라는 평가를 받는 것일까요? 그것은 인간 속에 다른 요소가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완벽하게 윤리적이고 도덕적이지 못했기에 육체가 된게 아니라 그 근본 원인은 그 출생에서 찾아야 한다는 겁니다.
출생이 인간 존재의 운명을 이미 결정짓고 말았습니다. 마치 이삭과 야곱의 운명이 그들이 이 세상에 사람으로 태어나지 전부터 결정난 것처럼 말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주시는 율법이란 인간의 본질을 들추어주는 기능을 하기 위해 투입된 것입니다.
율법으로는 의롭다함을 받지 못한다고 합니다. 인간 속에 있는 장려할 만한 의로운 요소에 율법이 주어지면 그 율법으로 의로움이 장려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 의조차도 악의 다른 얼굴이었다는 것이 폭로되는 겁니다.
예수님은 인간들이 죽은 그 죽음의 현장까지 들어와 버렸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갈라디아서 3:13에 명쾌하게 그 이유가 나와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즉 예수님은 저주를 받았던 것입니다.
그 분이 죽었다는 사실로 인해 비로소 이 세상은 인간들이 죽는 이유가 밝혀졌습니다. 그리고 모든 인간은 다 죽은 자입니다.
고린도후서 5:14에 보면,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결국 이 말씀은 예수님의 죽으심 안에 뭔가가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들어있을까요?
갈라디아서 3:10에 보면,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인간을 저주 아래 두기 위하여 율법을 주었고 그 율법을 준 결과 과연 인간들은 저주 이래 있게 되었습니다. 잘난 자나 못난 자나 모두 그러합니다. 그 어떤 인간도 예외라는 것이 성립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성도에게 무엇을 필요하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아십니다. 그것은 율법으로 인하여 주어지는 그 저주를 대신 받는 일입니다. 갈라디아서 3:13절에 보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또 갈라디아서 3:19에 보면,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율법은 모든 것을 죄 안에 가두었다고 갈라디아서 3:22에 나와있습니다. 갈라디아서 2:19에 보면,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죽음을 기정 사실화하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율법을 주신 그 취지에 부합된다는 겁니다. 율법이 오기 전까지는 사람들은 자신이 살아있다고, 혹은 살아날 수 있다고 여겼고 바울이 사울되었을 때는 그는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신 이유를 알았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본래의 실체를 말해주기 위해서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율법 때문에 죄와 저주 안에 갇힌 신세가 된 인간에게 결국 돌아오는 것은 죽음 밖에 없음을 알려주기 위해서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서 인간 죽음에 합세하신 것입니다. 율법은 인간 육체가 할 수 있는 것이 결국 죄로 드러난다는 점을 분명히 해줍니다.
육에 속한 자는 자신의 육에만 기대를 겁니다. 그런데 하박국 선지자의 예언에 의하면 육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사는 길이 열린다는 겁니다. 이것이야말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날개가 없어 날라 다니지는 못하고 걸어다녀야 하는 인간에게 갑자기 날개 없이도 날아다니는 사람이 나타났다면 너무나도 황당한 소식일 것입니다.
인간들에게는 육체가 있기에 좋으나 싫으나 자신의 행함으로 자신의 운명을 결정 지어야 될 입장에 있는 자에게 육이 아니라 영에 따라, 즉 영의 지배를 받는 그런 삶이 시작되었다는 소식을 접하면 놀랄 일입니다. 그런데 그 영이란 바로 부활의 영이라는 겁니다.
이로서 부활은 예수님의 부활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자기 백성으로 하여금 영적인 생활을 하게 하는 능력으로서의 부활이 적용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성령이 있는 자에게만 부활이 되고 성령이 없는 자에게는, 즉 육만 그냥 있는 자에게는 부활이 되지 못합니다.
오늘 본문 39절에 보면,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부활하신 분의 힘을 입지 아니하고 의롭게 될 자가 없는 것은 육은 어디까지나 율법의 저주 아래에 놓여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복음을 믿게 된 것도 다 본인의 자질이나 지적인 순발력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구원받기로 작정된 운명자라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지금까지도 하나님의 끊어지지 않는 은혜가 이처럼 주어졌다면 앞으로 성도의 운명도 완전히 은혜 안에만 머문다고 결정지어져 있습니다. 하나님이 예언하신대로 말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사도 바울의 설교와 그것을 믿게 된 것이 오로지 하나님의 성령의 활동력이라는 것이 확실한 현실이라는 점을 인정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