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강-YouTube강의(진정한 강자)160719-이 근호 목사
162강-YouTube강의(진정한 강자)160719-이 근호 목사제 162강, 제목은 ‘진정한 강자’입니다. 요즘 사람들은 강한 사람을 얼마나 찾습니까? 정치판뿐만 아니고 모든 직장에서나 가정에서도, 가장되시는 아버지가 힘 좀 쓰는 그런 강자가 되기를 원합니다.자식들이 공부를 하는 이유, 또 부모들이 자식을 공부를 시키는 이유도 약자가 되어서는 안 되고 사회 나가서 강자가 되어야 살아남는다, 그런 뜻이죠. 가정에는 가훈이 있고 학교에는 교훈이 있지만, 그 가훈과 그 교훈 그 밑바닥에 담겨있는 그 표어의 정신은 오직 강자가 되어라, 바로 그겁니다.그리고 교회에서 교인들이 기도를 열심히 하는 그것도 따지고 보면 딴 게 아니고, 약자가 되기 싫다는 겁니다. 강자로 한 번 살아보겠다는 겁니다. 성경에서 무엇을 말하는지는, 그들은 귀담아 듣고 싶지 않아요. 그들에게는 본인이 뭘 원하느냐가 제일 우선순위입니다.그래서 교회에서 설교를 하더라도 고객만족이니까, 그들이 강자가 되고 싶어 하니까, 설교도 이렇게 합니다. “여러분들이 이런, 이런 식으로 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지금보다 훨씬 더 강자로 키워주십니다.” 이러한 거짓말에 그들은 왠지 속아 넘어가고 싶은, 그 말 듣고 싶어서 교회 나옵니다.본인인 스스로 강자가 될 희망이 없을 때는 강자하고 사귀고 싶어 하죠. 그래서 작은 교회와 큰 교회 중에 어느 곳에 강자가 많겠습니까? 아무래도 큰 교회에 강자가 많죠. 큰 교회 장로쯤 되게 되면 돈도 좀 있어야 되고 세상에서 발언권이 센 사람들이 장로를 맡습니다. 개척교회 청년들이 한 다섯 명, 여섯 명, 열 명, 모이는 데서는 전혀 뭐 강자가 나올 길이 없어요.실제로 사회에서 강자가 된 자만 강자가 아니라, 비록 약자지만 언젠가는 나도 강자가 되겠다고 이렇게 그걸 희망하게 되면 잠재적 강자가 되죠. 그래서 강자도 강자고, 잠재적 강자를 노리를 사람도 강자고, 이 세상에서 강자에 대한 원리와 법칙, 거기에 대한 희망, 그것 외에는 아무것도 아닌 세대. 이 세상이 강자에 의한 투쟁의 장이 되고 말았습니다. 어느 교회가 만약에 “여러분 약자를 만들어드릴게요.” 라고 그런 식으로 모토를 세우고 그런 식으로 설교를 한다면 그 교회는 얼마 안 가서 문 닫게 될 것입니다. 과연 강자되는 것이 주의 뜻이냐? 하나님 뜻이 그거냐? 사람들이 그걸 자진해서 스스로 묻지를 않아요. 지금 진리에 관심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뜻에 관심 있는 것이 아니고 자기 뜻이 곧 하나님의 뜻이기를 고집하고 있는 겁니다. 억지를 부리죠. 그러니까 이 땅에서 마지막 때에 믿음을 보겠느냐는 주님의 예언이 지금 정확하게 실현되고 있는 중입니다. 다들 가는 길로 가지마라, 그건 아주 잘못된 선택인 겁니다. 사람들이 찾는 많은 길, 결과와 결말 뻔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신 것은 예수님만이 아시고 있는 결말을 너희들도 미리 앞당겨서 너희들도 알고 살라고 예수님께서 주신 말씀이십니다.성경을 보면서 우리가 미처 기억나지 못한 것, 우리가 마지막에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알 수 없는 것을, 모든 것에 도달이 되시고 알파와 오메가가 되신 주님의 말씀 속에서 우리는 마지막을 미리 알게 되는 혜택을 누리시기 바랍니다.오늘 그 주의 말씀 가운데서 한 말씀을 성경을 통해서 제가 알려드리겠습니다. 고린도전서 10장 22절에 보면 “그러면 우리가 주를 노여워하시게 하겠느냐 우리가 주보다 강한 자냐”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보다 강한 자가 아니라는 뜻이죠. 누가 주님보다 강하겠느냐, 라고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이유는 이 세상이 예수님과 인간 사이에 누가 강자냐를 표현하고 그걸 드러내는 그런 분위기가 이미 형성되어 있다는 겁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운영하고 경영하실 때에, “역시 예수님이 최고의 강자다!” 그것을 증명하는 식으로 이 세상은 운영하고 있다는 겁니다. 근데 사람들은 그 반대에요. 주님한테 이렇게 묻습니다. “주님! 제가 뭐 이렇게 가진 것 없어도, 뭐 배운 것이 없어도 제가 장자 맞죠?” 자꾸 우리는 자기 자신인 강자라고 우기고 그걸 하나님한테 확인받고 싶은 경향을 가지고 성경을 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게 당연한 것처럼 그렇게 하죠. ‘지금은 비록 지지리 궁상이라도 하나님께서는 언젠가는 내 소원을 이루어 줄 것이다.’ 이런 포부를 가지고 하나님의 뜻과 매치를 시키고 연결을 시키고자 합니다. 그럼 오늘 읽었던 본문은 뭐냐 하면 우리는 그런 식으로 살게 되면 결국은 누구하고 경쟁자가 되느냐 하면 주님하고 경쟁하고 주님하고 시합을 하게 되는 반대파가 돼버려요. 항상 이 세상에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역시 주님만이 강자고 우리는 강자가 아닙니다, 라는 고백으로 결론지어져야 되는 겁니다.근데 우리는 ‘주님이 팍팍 밀어서 나는 역시 강자 맞아!’ 라는 자아도취적인 그것을 희망하면서 살아간다면 성경을 읽고서도 현실에 대해서는 엉터리 현실관을 갖고 살아가는 셈이 됩니다. 자,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내가 강자라고 알고 있는 아담의 죄에서, 역시 주님이 강자라는 그 차원으로 어떻게 우리가 넘어설 수 있는가? 넘어서는 방법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라이벌로 이렇게 현실에 등장하고 활동하시는 이유는 우리로부터 반성과 회개와 사과를 받아내시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에게 강자라고 고백할 때는 반드시 먼저 전제되는 것이 있습니다. “내가 멋도 모르고 까불었습니다.” 라는 고개 숙임이 선행되어야 해요. “참, 세상 내 맘대로 살면 내 뜻을 펼 수 있다고 이렇게 촐랑대던 것이, 아! 정말 주님이 강자임을 제가 미처 알아보지 못한, 정말 철없는 어리석은 짓이었습니다.” 하고 사과에 사죄에 그 표현을, 그 티를 내줘야 합니다. 이게 성도의 삶입니다. 그게 성령의 열매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제가 주님한테 졌습니다.” 라는 진정성이 있는 사과를 하는 겁니다. “주님이 역시 모든 일에 대해서 주님이 일방적으로 강자임을 표내기 위해서 꾸준히 우리 주변에서 사태와 상황을 유발시켰습니다.” 라는 사과를 해야 합니다.그럼 그런 사과를 받아내시기 위해서 주께서 우리에게 투입시켰던 것이 있었습니다. 이게 바로 아까 고린도전서 10장 22절을 읽었는데, 그전에 18절~21절을 읽어보면 거기에 귀신이야기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귀신을 언급하면서 개입하시는 이유는 우리가 평소에 ‘나는 남한테 약자로 보이지 않고 강자로 보이기를 원해.’ 라는 우리의 마음이 그냥 나만의 사적인 마음으로 생각하는데 실은 그게 아니고 나도 그러하고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이 나와 똑같이 자기 자존심을 챙기면서 “니가 강해? 내가 더 강해.” 강함의 경쟁자, 우열 그런 식으로 이런 현실의 판을 형성하고 있었습니다.주님께서는 그렇게 된 것이 일괄적이라는 겁니다. 니 마음, 내 마음 할 것 없이 모든 것이 일반적으로 마음이 된 것은 바로 귀신이 귀신의 마음을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심어져있기 때문에 이런 일반적인 현상이 일어난다고 하는 겁니다. 마귀가 웃으면서 같은 인간들끼리 꽈당 하고 머리와 머리를 쥐어박고 서로 충돌시키는 장난질을 하는, 마귀가 자기 게임을 하는 그 세상이 오늘날 현실이 되는 겁니다.부질없는 것 가지고 경쟁하고, 부질없는 인격가지고 남하고 헐뜯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그게 마귀로서는 두 사람의 머리를 꽈당 하고 부딪치게 하는 장난을 쳐놓고 “아프지?” 하고, 마귀가 우리를 박치기 하게 하고 시기하게 하고, 헤헤 웃는 그런 분위기를 주께서는 마귀한테 허락을 하신 거예요. 마귀의 취미생활 즐거움이 철딱서니 없는 인간들을 갖고 노는 겁니다.바로 그러한데 말려들었던, 그런 식으로 살아왔던, 부질없는 경쟁할 이유도 필요도 없는 것을 가지고, 평생토록 되도 않는 목표를 가지고 경쟁했던 여기에 대해서 사과하고 사죄하는 것, 그것이 진정 주님의 강함을 고백하는 성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