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 ( 마 21:15-17) 대전- 77강
지옥 ( 마 21:15-17) 대전- 77강 이근호 2016년 6월 28일 본문말씀: 마태복음 21:15-17 (마21:15)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하시는 이상한 일과 또 성전에서 소리 질러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 어린이들을 보고 노하여 (마21:16) 예수께 말하되 그들이 하는 말을 듣느냐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렇다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하게 하셨나이다 함을 너희가 읽어 본 일이 없느냐 하시고 (마21:17) 그들을 떠나 성 밖으로 베다니에 가서 거기서 유하시니라 마태복음 21장 15절 보는데 세례 요한부터 먼저 생각해 봅시다. 세례 요한은 바리세인에게 “너희가 구원을 얻으려고 나에게 나왔더냐? 차라리 돌멩이가 구원받을 것이다”라고 이야기 한 적이 있습니다. 왜 돌멩이를 그 당시 바리새인과 비교했을까? 오늘 본문을 모면 어린 아이와 젖먹이 이건 어디 나오냐 하면 바로 시편 8:2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시편 8편에 보면 다윗의 시라고 되어 있으면서 무슨 상황이 일어났냐 하면 전쟁 상황에 대해 이야기 합니다. 전쟁에 대해서 이제부터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내용이 많아서 어려울 수 있는데 잘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대지 = 땅] 인간은 땅에 살도록 만들어 졌지요? 그러면 땅에 살도록 만들어 졌으면 그냥 땅에 살면 되요. 성경을 공부하는 신학자들 간의 정통적인 신학에서 근본적인 물음을 물어야 하는데 묻지 못하고 피해 가는 것 중 하나는 왜 땅에 사는 인간들이 감히 천국에 들어가고자 하는 욕망이나 이유가 왜 있어야 하는가를 질문한 적이 없어요. 땅에 와서 땅에 살면 되는 거에요. 왜 천국을 넘봅니까? 마땅히 넘봐도 되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지요.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과 천사만 살면 그만 이에요. 인간이 끼어들 권리도 없고 자격도 없어요. 왜 자꾸 하늘나라를 넘봐요? 땅에 왔다가 땅에서 살다 죽으면 그만이지 왜 자꾸 천국을 거론하느냐 이 말이에요. 천국을 거론 할 때 성경에서는 처음 구약에 보면 천국, 하늘나라라는 게 없어요. 몰랐습니까? 없습니다. 약속의 땅이 있을 뿐이에요. 약속의 땅은 가나안 원주민들이 살던 땅에 모여 사는 거에요. 끝이에요. 뭘 더 욕심을 내고 탐을 내요? 거기에 젖과 꿀이 흐르잖아요. 그러면 된 거에요. 물론 그 땅에서 쫓겨났지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한 게 뭡니까? 천국을 약속한 적이 없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사대 만에 애굽에서 후손이 올라와서 열 족속이 있던 가나안 땅을 네가 접수하고 거기서 하늘의 별과 바다의 모래같이 살리라 끝. 그 이상 없다니까요. 그러면 아브라함을 찾아왔던 세 천사는 어디에 사느냐? 얍복강가로 야곱을 찾아왔던 천사는 어디에 사느냐? 그들은 하늘나라에 살아요. 그러면 그들이 하늘의 별과 바다의 모래같이 가나안 땅에 사는 집단의 구조는 어떻게 되는가? 야곱의 허리로부터 나오는 왕이 나옵니다, 대대로 왕이 나와서 왕의 통치를 하는 것을 통해서 이스라엘 나라, 하나님의 언약의 나라가 됩니다. 주신 하나님의 언약대로 완벽한 언약의 나라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사두개인에게는 무엇이 없느냐? 부활이 없어요. 사두개인들은 부활을 믿지 않습니다. 부활이 없고 뭐가 있느냐? 그럼 영원히 살면 되잖아요. 천년, 만년. 그 내막에 대해서 바리새인들은 모세 오경만 이야기하기 때문에 부활이란 것은 없어요. 모세 오경만 인정하고 나머지는 필요 없다가 아니라 모세 오경이 원판인데 자기의 조상들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모세 오경에서 추방됐다는 거에요. 그래서 다시 제대로 된 원래대로 하려면 모세 오경으로 돌아오면 이게 원래라는 겁니다. 모세 오경을 무시하고 떠나 버리고 다른데 더 완벽한 세계가 있다고 생각하지 말자고 하는 것이 사두개인이에요.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선지자들도 하나님의 신이 임했다고 보는 겁니다. 그래서 그들도 무시해선 안 된다고 보는 거지요. 모세로 모든 율법이 마감된 것이 아니고 그 뒤에 하나님의 뜻이 계속 이어졌다고 하는 거에요. 그러니까 사두개인들은 그게 위헌한 발상이라는 거에요. 모세 이후에 주어진 하나님의 율법은 하나님의 모든 선지자의 말씀은 모세 율법을 더 강화하고 제대로 지키라고 준 것이지 더 추가하라고 준 건 아니라고 보는 겁니다. 대체적으로 모세 오경은 지켜야 될 기준이 된 거지요. 어쨌든 약속의 땅이든 무슨 땅이든 땅입니다. 대지에요. 펄벅(Pearl S. Buck)의 대지처럼 그냥 넓은 땅입니다. 땅에서 사는 사람이 언제부터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관심이 있었느냐는 거지요. 이사야 65장에 보면 여호와 증인이 이야기 하는 골프장 같은 저 푸른 초원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사자고 이리고 어린 양이고 서로 해함도 없이 유토피아, 낙원 같은 광경이 펼쳐지지요. 그 때는 나이 100세가 되도 청년 같다고 되어 있어요. 이것이 이사야에 예언 돼 있지요. 그러면 구약에 유대인들 그들의 목표가 뭐겠습니까? 나이 많아도 젊음을 유지하는 것, 청춘을 돌려 줘요. 10대, 20대 때의 사진 보세요. 앨범 보면 이쁜 사진들 있지요. 젊었을 때 모임에 가서 전부 옆으로 하고 한복 입고 45 각도로 찍은 사진들, 요새는 한복 안 입지만 그렇게 같이 찍고 고등학교 때, 돌려줄게. 청춘을 돌려줄게! 그게 이사야 65장이에요. 돌려준다잖아요. 그러니까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버릴 수가 있습니까? 약속의 땅에 도착했잖아요. 지금 자기가 살고 있는 땅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까 아브라함이 자기를 후손으로 여기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 땅에 살고 있어요. 지금 IS랑 살고 있고 팔레스타인에 살고 있지만 빨리 쫓아 내버리고 빨리 살게 되면 나중에 메시야가 와요. 구름타고 와요. 메시야가 오게 되면 감람산이 갈라지고 스가랴의 예언대로 성전이 쪼개지면서 펑하고 내려오는 겁니다. 마징가Z 내려오는 거 하고 똑같아요. 빠빠라~ 빠밤바! 하고 마징가Z 서울 종로 한 복판에 내려오는 거 하고 똑같아요. 그것을 학수고대하고 기다리고 있다는 거에요. 지금. 그런데 사도 바울은 뭐라고 합니까? 그 분이 바로 너희들이 기다리는 그분이 누구라고? 얼마 전에 당신들이 죽였던 예수님이 사실은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거에요. 무엇 때문에? 무엇을 위해서? 인식의 변화, 관점의 변동을 위해서, 완전히 세상 보는 것을 바꿔야 되요. 인간들이 사는 대지, 땅이 아닌 예수님이 대지에 오심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계신 그 땅, 그 대지는 천국이 되는 겁니다. 그것이 요한 계시록의 새 하늘과 새 땅이고 두 개의 성전이 있어요. 하나는 아버지의 성전이고 또 하나는 어린 양의 성전, 또는 어린 양의 보좌가 있어요. 그리고 그 성전엔 뭐가 있냐하면 언약궤가 보입니다. (어린양의 보좌에서) 생명수가 거기서부터 흐르고 있어요. 그런데 지금 우리는 우리의 육신 자체가 육체이지요. 그리고 우리가 눈에 보이고 보고 있는 것이 뭡니까? 현재 인간들이 알고 있는 대지, 땅 흙으로 되어 있는 무기물 땅, 백 날 망원경으로 봐야 별이 있는데 별은 뭐냐 고철 덩어리에요. 별은 가스 덩어리(수소)이고 별의 유성들을 보면 고철 덩어리라는 거에요. 퇴물이 된 고철 모아 놓듯이 그게 유성이에요. 철 성분이 많은 거에요. 과학자들이 철 성분이 많은 것은 빅뱅 이후에 원소가 결합하면서 그렇게 되었다고 하고 철 성분 중의 하나가 바로 지구의 맨틀 아래에 있는 외핵을 형성합니다. 거기에 자기장이 있고 자기장이 유지되려면 지구가 자전하면서 자기장이 형성되면 태양광을 막아줘서 지구의 생명이 보존되고 있다고 과학자들이 그렇게 설명해요. 지구의 맨틀에 문제가 생기면 자기장이 걷혀 버리면 지구의 표면에 생물이 다 죽어버리죠. 물리학의 한계가 그 정도까지 와 있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저쨌든 백날 논해야 그냥 땅이에요. 예수님 오시고 난 뒤에 북한이 쏴올린 미사일이 간 대기권에 예수님이 계신 게 아니고 거기엔 북한의 인공위성이 있을 뿐이고 주님은 어디로 갔습니까? 부활 하셨다가 어디로 가셨습니까? 하늘이죠. 하늘이라는 말은 베드로가 이야기했듯이 이 하늘은 베드로도 가지 못하는 곳이죠. 자기 목숨 바쳐도,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하늘이라고 하지 말고 처소가 마련되는데 하늘이 어디입니까? 하는데 요한복음 14장에서 (성령=처소) 성령이 바로 처소가 되는 거에요. 성령 안에서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이고 너희도 아버지와 내가 하나가 되는 성령 안에서, 그 보혜사 다른 보혜사가 오게 되면 아까 이야기한 군고구마 굽는 틀이 와요. 성령 안 다른 말로 하면 예수 안, 다른 말로하면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이 되는 겁니다. 그것을 우리가 만끽하려면 우리의 대지와 땅, 우리의 육신이 교체되면서 새로운 형상을 입어요. 지금 우리의 땅이 그냥 옛날 그 땅이기 때문에 불에 타질 않았거든요. 그러니까 이 땅에 맞는 육신으로 DNA가 조립된 거에요. 땅에 속한 육신이기에 주님의 나라가 보일 리가 있어요? 없어요? 없지요. 이 형체를 벗어야 보이지,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어서 이 옷을 벗어버리고 주와 함께 하고 싶다고 했잖아요. 주님이 계시는 데 못 보는 이유가 육신 때문에 그런 거에요. 그렇다고 번개탄 피우고 자살할 생각 하지 마세요. 그런 식으로는 지옥가지 천국 못 가니까. 문제 하나 낼 테니 알아 맞혀보세요. 노아 때 그들은 어디에 살았습니까? 땅에 살았지요. 노아에게 약속이 왔습니다. 그 당시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땅 위에 사니까 경작하고 해야지요. 그런데 그 땅이 없어진다는 거에요. 땅 위의 짐승도 같이 없어진다는 거에요. 그런데 그것을 누구에게 이야기했습니까? 노아에게 이야기 했지요. 노아에게 이야기 했다는 것은 노아만이 땅이 없어진 그 이후의 존재로 미리 노아를 군고구마 통으로 감싼 거에요. 그 군고구마 통이 뭐냐하면 노아 언약이라고 합니다. 노아 언약이 이 땅에선 어떤 형태로 나타나냐 하면 방주 형태로 나타나지요. 방주 형태가 뭐냐하면 오늘 본문을 봅시다. 21장 15절에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하시는 이상한 일과” 이상하다 했지요. 아까 보아도 알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한다고 했지요. 노아가 방주를 큼직하게 지어도 보이지요. 잣나무로 짓고 있는 것이 눈에 보이는데 어떤 형태가 갖춰졌는데, 봐도 모르고, 망치 소릴 들어도 알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모르고 옆집에서 나는 소리 쾅! 쾅! 소릴 들어도, 톱질하는 소릴 들어도 모르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도 제자들은 도망치고 무슨 말인지 모르고 오늘 날 성도가 외쳐도 모르고 방주지요. ‘낯선’ 이상한 물체가 여기 등장합니다. 그런데 방주의 재료가 뭐냐하면 땅에서 나왔어요. 그러니까 방주타고 영원히 하늘나라 갈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어요. 방주가 깨어져야 되요. 언약궤가 깨어져야 되고 성전이 깨어져야 되요. 왜? 전부다 땅의 소산물이에요. 왜 그러냐하면 노아는 현재 사람이 아니고 이 심판이 끝난 다음에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언약으로 이것을 캡슐화 시켜서 둘러 쳐 버립니다. 다른 사람들은 납득이 안 됩니다. 그런데 하늘에서 뭐가 옵니까? 물이 왔지요. 요만큼, 조금, 장마인줄 알고 많이 올 줄 몰랐어요. 산으로 올라가면 될 줄 알았어요. 결국엔 마지막 아라랏 산 위에 몇 미터냐 하면 15m가 차서 만약에 노아 당시에 키가 16m 되는 사람이 있었다면 그 사람은 살았을 거에요. 아라랏 산꼭대기에 서면 1m 남아요. 15m 아래인 사람은 다 죽었어요. 땅에 있는 건 다 죽었어요. 하여튼 다 죽인 거에요. 캡슐 안에 빼고 다 죽은 거에요. 캡슐 안은 뭐냐하면 미래 나라입니다. 미래가 성취 되어서 미리 댕겨서 현재에 와 버리니까 사람들은 못 알아듣는 겁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기존의 땅은 뭐로 멸망했습니까? 물로 멸망했어요. 그런데 베드로 후서 3장에 보면 처음 땅은 물로 만들어 졌고 물로 심판 받았다고 되어 있어요. 물로 만들어져서 물로 심판한다. 차~암 따라서 이 말은 땅은 어디서 나왔다? 물에서 나왔다. 이 말은 물이 있었지 땅은 없었다는 말입니다. 물은 있었고 땅은 없었는데 그들이 땅이 생기고 나니까 땅이 원래 있었는 줄 알고 착각한 거에요. 그러니까 땅에서 되어지는 것이 하나님의 언약이고 하나님의 말씀이고 하나님의 뜻이거든요. 뜻을 위반 하니까 어떻게 한다? 있는 것을 취소 시켜버린 거에요. 뭐가 취소 됐다? 땅이, 대지가 취소 된 거에요. 다시 물로 환원되어 버린 겁니다. 그러고 난 뒤에 땅이 생겨 날 때 무엇이 포함 된 땅이야 하면 희생의 피가 담겨서 움직이는 땅이에요. 노아가 도착한 땅은 그러면 그 피는 무엇과 관련되어 있냐 하면 땅 위에 떠있는 무지개와 관련되어 있는 겁니다. 무지개는 전에 수분이 있었다. 수분으로 덮혔다라는 것을 공중의 무지개로 표현한 겁니다. 무지개가 뜨는 자리는 예전에 물이 있던 자리였다고 이야기 하는 겁니다. “너희는 물속에 잠겼다고 생각하고 살아라! 꼴까닥 하고 죽어야 되는데 노아가 드린 희생으로 인해 네가 지금 숨 쉬고 까불고 야구도 하고 축구도 하고 있는 줄 알아라!” 코파아메리카(2016) 축구 대회 얼마 전에 칠레가 우승했잖아요. 아르헨티나가 준우승 했거든요. 축구 왜 합니까? 인간들이 축구 왜 합니까? 뭐라고 답합니까? 땅이 있기에, 그러면 성도들은 어떻게 답해야 됩니까? 무지개가 있기에 또한 예수님의 피가 있기에,이 땅과 무지개가 피 때문에 유지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창세기 9장에 “너는 피를 먹지마라” 단 한 개념으로 요약이 되요. 이 땅의 유지책이 ‘피는 먹지마라’ 식사용이 달라져요. 피를 빼고 먹어라. 그리고 피를 흘린 자는 내가 용서치 않겠다. 다 피와 관련되어 있어요. 무지개와 피가 관련되어 있어요. 그래서 전에 70이레 논문 발표할 때 개혁 신학주의 학회에서 논문 발표 할 때 옆에 있던 구약 박사가 피와 무지개가 어떻게 연관되는지를 모르겠다는 거에요. 논평을 하면서 어떻게 피 중심인지 모르겠다는 거에요. 성경을 보지도 않았어요. 성경을 봐도 그냥 넘어가서 그래요. 그래서 이 세상은 피와 장차 오실 예수님과 십자가와 관련된 체 유지되고 있는 것이지 사람이 살기 위한 용도가 아닙니다. 이 땅이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팔고 살라고 있는 땅이 아니에요.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아들이 있는 자는 없는 자 같이하라, 이 땅은 너하고 관련된 것이 아니고, 네 행복과 관련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피를 증거 하기위한 용도로 있다는 겁니다. 이것을 지금 오늘 본문의 바리새인들이 모으는 거에요. 서기관들이 모르는 겁니다. 왜 자꾸 당신 스승은 이상한 말만 하느냐는 말이죠. 어린아이가 왜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이상한 찬양을 하고 있냐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땅은 장차 뭐로 멸망합니까? 베드로 후서 3장에 보면 불로 태워지게 되어 있어요. 왜 물이 아니고 불이냐? 제가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홍해 건너고 난 뒤에 또 홍해 안 건넌다고요. 같은 것 두 번 안 시킵니다. 같은 것 두 번하게 되면 인간이 0%로 구원 받는 게 아니고 5%나 10%로 구원 받아요, 아하! 이런 수가 있구나! 자기가 미리 알아차려요. 구원 받는 방법을 하나의 자기가 협조하는 바 돼버려요. 뭐로 구원 받는 가? 같은 말로하면 뭐로 멸망되는 가? 다 같은 말입니다. (구원=심판) 이기 때문에 어디서 구원 받는 가란 말은 어디에서 어떻게 심판이 이루어지는 가하고 같은 말입니다. 심판 속의 구원이고 죄 속에서 의가 나오기 때문에 그래서 죄인 되지 않으면 구원도 없습니다. 죄 짓지 않은 자는 천국에 못 갑니다. 제가 어느 강의에서 이야기 했지요. 죄 짓지 않은 자는 천국에 못 간다고 이 말은 뭐냐하면 ‘순수한 공백’ 이게 악마의 최종적 뜻입니다. 악마의 최종적 뜻이 뭐냐 내 속에 순수한 공백을 만드는 거에요. 하얗게 순결함 그 자체,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고 비어 있음 그 자체, 공백, 불교나 기독교나 전부 노리는 것은 그거에요. 너의 마음을 순수히 비워라! 그게 천국이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 안에 예수님의 피로 가득해야 된다고 되어있습니다. 그러면 방주가 있다는 것은 물에서 유일하게 방주만이 건질 수 있다면 나중에 불의 심판으로 받는 이유가 뭐냐하면 요한계시록 20장에 보니까 마귀와 협조한 사람 마지막 편에 든 사람들이 불과 유황 못에 던져지니 지옥 불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선 경계선을 만든 겁니다. (땅=지옥) 이 땅자체를 지옥으로 만들고 무엇이 아직까지 찾아오지 않았다? 불이, 하늘에서 유황불이 떨어진다 했으니까 유황불이 떨어지지 않은 상태의 지옥이 지금의 땅입니다. 그래서 땅에서 하던 행세가 그대로 지옥까지 이어져요. 나사로 앞집에 살았던 부자가 물 가져오라고 했던 그 부자가 땅에서 죽어서 지옥 가는 게 아니고 땅의 속성 자체가 불의 대상이고 불에 태워 진다라는 말은 지옥을 앞당겨 보여주는 겁니다. 왜 지옥엔 불이 있기 때문에 지금 이 땅은 불이 대기 상태로 있거든요. 같은 거에요. 미리 앞당겨 보여주는 겁니다. 그래서 지옥이라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해서 주께서 뭘 주셨는가? 우리에게 말씀을 주신 거에요. 누구든지 말씀대로 다 지키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으리라 그런데 이 말씀은 법적인 형식으로 되지만 오늘 본문같이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으로 찬미를 하게 되면 보세요. 좀 어렵습니다. 어린 아이와 젖먹이는 본인 것을 소유하고 있지 않습니다. 본인 게 없어요. 본인이 소유하겠다는 것은 외부의 관계에 의해서 관계 주어진 것을 그대로 드러낼 뿐이죠. 이것이 방주에서 그대로 나옵니다. 노아가 방주 안에 있으면서 기도했습니까? 금식했습니까? 찬양했습니까? 뭐 했습니까? 아무것도 안 했지요. 왜냐하면 노아의 주변엔 물로서 둘러쌓였기 때문에 아무리 둘러 봐도 전부 물이에요. 방주는 멈춰 있는 거에요. 아라랏산에 머물러 있는 거에요. 방주에서 살아나는 길은 찬양이나 철야를 한다고 되는 게 아니고 방주 주변의 물이 빠져주면 되겠지요. 그렇다면 이것은 이미 정지된 상태를 말하는 겁니다. 인간이 아무리 설쳐도 군고구마 통 안에 고구마가 그냥 있듯이 자체적으로 아무리 설쳐봐야 그 자리에서 정지된 상태로 있다고 보면 되요. 그 자리를 유지할 뿐이에요. 어린 아이와 젖먹이는 나중에 어른이 되어서 예수 믿어 구원받는 게 아닙니다. 어린 아이와 젖먹이는 그 자체가 정지된 모습이에요. 정지된 모습에서 뭐가 나왔다? 찬양이 나오지요. 그렇다면 나중에 애들이 어른 되고 할머니 되어도 그들 내부에 뭐가 유지되어야 되요? 어린 아이와 젖먹이의 관계성이 유지되는 한 구원받습니다. 마치 노아가 방주 안에서만 구원 되듯이 어린 아이와 젖먹이 안에서 구원 받습니다. 그러면 어린 아이와 젖먹이는 보이지 않는 구원과 이 땅에서 보이는 연결 점이나 관계성으로 보여주고 있는 거에요. 어른이냐? 60먹었냐? 80넘었냐?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내가 80이어도 어린아이고 90이 넘어도 젖먹이라서 나는 나를 보지 않고 나와 관계된 주님만 찬양하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구원 될 자를 구원시키는 것, 그것이 예수님이 생각한 자기 백성의 특징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지적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과 사두개인들은 뭡니까? “에잇! 뭐도 모르는 어린 아이와 젖먹이가 뭘 안다고 찬양을 해” 이러지요. 그게 바로 심판의 대상이 되는 거에요. 이미 지옥 같은 세상에서 누가 지옥 불을 된통으로 맞느냐? 주님께서 새롭게 구성해 놔요. 이 땅서 전부다 자기 잘났다, 나는 예수님 잘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어린 아이와 젖먹이가 자기 자신의 행함이 0% 전혀 없는 것을 유발해서 만들어 내요. 만들어 내심으로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비웃음의 대상이 되게 만드시는 겁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결국 예수님의 이러한 발언과 태도가 가면 갈수록 주위에서 예수님을 존경하겠습니까? 비웃겠습니까? 비웃지요. 비웃는 그들은 권력을 가지고 있어요. 이번 수련회에서의 주제는 ‘지극히 작은 권력’입니다. 지극히 작은 권력 즉, 어린 아이와 젖먹이입니다. 어린 아이와 젖먹이에게 “너희는 권력이 어느 정도 돼? 재산은 얼마나 돼?” 이렇게 묻는 게 성립 안 되지요? 성도에게도 그렇게 묻는 건 실례입니다. 목사님에게 “목사님 월급 얼마나 받아요?” 복음 전하는 목사에게 이렇게 묻는 건 실례지요. “네 밥 먹고 살만큼 됩니다.” 저희 장모님이 제 아내에게 물어보시기를 “밥이나 먹고 사나?” 연세가 90중반이나 되셨으니까, 딸이 하나인데 물어요. “밥이나 먹고 사나?” 없으면 쌀 보태 줄게, 그런 뜻으로 묻는 거죠. “밥은 먹고 삽니다.” 일용할 양식을 주셨다는 말이 어린 아이와 젖먹이로 보고 있다는 거에요. 주님께서 우리를, 우리를 어린 아이와 젖먹이로 보고 계시는데 그래야 찬양 튜브가 형성돼요. 찬양 관이 형성 돼요. 그냥 100%가서 100%가 와야 되요. 우리는 일용할 양식도 없어서 거지처럼 주님에게 얻어 먹습니다라고 해야 찬양이 된다니까요. 찬양은 노래뿐이 아니고 “내 것은 전부 주님이 다 일방적으로 만들어 놓으신 거잖아요. 내 인생은 없습니다. 주님의 인생입니다.”라고 할 때 그것은 곡조를 붙이나 안 붙이나 소프라노 바이올린 동원하나 안하나 관계없이 찬양이 되고 영광이 되요. 영광되면 됐지 음정, 박자 맞아야 됩니까? 세례 요한이 놀라운 것은 어린 아이와 젖먹이 정도가 아니고 돌멩이도 되요. “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아! 너희들이 구원을 받아 차라리 돌들이 구원받겠다.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바로 저주 받은 대지에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여기서 구원자가 나온다는 겁니다. 없는데서, 無에서 성도가 나옵니다. 저주 속에서 구원이 나와요. 다 저주 받아서 끽끽거리며 전부 다 고생해야 되는데 거기서 구원받는 자가 나옵니다. 그러니까 구원받은 자가 끽끽거리며 고생해야 되고 영원토록 불구덩이 속에 있어야 되는데 구원받았기 때문에 얼마나 주님이 고귀하겠습니까? 그래서 나는 대수롭지 않고 예수님만 고귀합니다. 어린 아이와 젖먹이의 특징이 절대로 부모와 관계를 끊지 않습니다. 관계를 끊으면 안돼요. 교회에 가서 노래 부를 때도 항상 쳐다봐요. 저희 손녀 동영상이 있거든요. 저희 딸이 손녀를 안고 찬양 하는데 “예수사랑 하심은 거룩하신 말일세” 노래 부를 생각은 안하고 엄마 얼굴만 자꾸 쳐다봐요. 마치 젖먹이 아이가 엄마 품에서 보듯이, 자꾸 쳐다보는 거에요. 뭐가 고귀하다? 엄마 내 소래 솜씨 어때? 이런 것이 없지요. 지금 노래가 중요한 게 아니에요. 뭐 봅니까? 엄마가 옆에 있는 가 그것만 보는 거에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여기서 어린 아이와 젖먹이의 흔적이 보이잖아요. 그 아이들이 크면 죄인 중에 괴수 되지만 그 흔적이 있다는 말이에요. 다시 정리해 보면 관계라는 것은 주님의 앞에서, 십자가 앞에서 어린 아이와 젖먹이가 되지 않으면 천국에 갈 수 없다는 것. 제자들도 그 당시엔 해당이 안 되지요. 어른들이기 때문에 누가 높으냐 자랑 질하기 바빠서 전혀 개의치 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죄 밖에 없는 인간이 어린 아이와 젖먹이가 될 수 있느냐? 신약에서 어려운 대목들이 여럿 나오는데 그중에 하나가 나옵니다. 제가 던지는 질문은 뭐냐하면 모든 인간은 죄 속에서 태어나기 때문에 절대 어린 아이와 젖먹이가 될 수 없습니다. 여기서 어린 아이와 젖먹이가 찬양하는 것은 주께서 역할을 맡긴 것이지 어린 아이 하나하나가 구원받는다는 뜻은 아니거든요. 어떤 모습, 상황을 구원받는 자와 연결시키고 대비시켜 대표로 이야기 한 것이지 젖먹이 하나가 나중에 커서 구원 받는다 그런 뜻은 아닙니다. 안돼요. 점점 크면 클수록 자아의식이 강렬하기 때문에 내 위주이고 내가 우선이지 예수님은 뒷전이 되는 거에요. 나부터 있고, 지난 낮 설교에서인가 나를 배신하지 않는 신이 참신이라 했지요. 그런데 주님은 그것을 뭘로 바꿉니까? 배신하지 않는 신은 신이 아니다. 사람을 기쁘게 하는 예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 1:10 에서 내가 사람을 기쁘게 했다면 누구의 종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다라고 했어요. 결국 이 말은 어린 아이와 젖먹이처럼 되라고 해도 결코 우리는 우리 힘으로 될 수 없다. 0%이다. 어떤 수라도 아무리 해도 어린 아이와 젖먹이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는 거에요. 이것은 사건이고 단절이에요. 지금의 나와 구원받은 나와의 연속성을 가질 수 없어요. 중간에 끊어져야 되요. 왜 우리는 땅에 속하였기 때문에. 수상해요.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이냐? 를 염두에 두고 19절 본문을 봅시다. 무화과나무를 만났어요, 그런데 무화과나무가 먹을 게 없어요. (마 21:19) 길 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리로 가사 잎사귀 밖에 아무 것도 찾지 못하시고 나무에게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하시니 무화과나무가 곧 마른지라 그러면 예수님께서 “아직 때가 안 됐구만 참! 나도 정신없어! 몇 월인데 아직 열매도 못 맺었는데 성급했네.” 이렇게 스스로 자책하는 게 아니고 도리어 누가 잘못했는지 헛갈리게 만들지요. 열매 맺을 때도 안 됐는데 미리 열매 달라고 하신 분이 누가 봐도 잘못됐는데 예수님은 뭐한 사람이 성낸다고 도리어 화내고 성질을 내시면서 내가 달라고 할 때 열매가 없기 때문에 다음 달에 보자 이게 아니고 영원토록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가 되리라 저주를 했어요. 자! 해석해 봅시다. 어떻게 해야 되요? 이 일로 제자들이 놀랐어요. 제자들이 깜짝 놀랐습니다. 이것을 설명하고 마치겠습니다. 결과가 저주로 나왔습니다. 결과가 저주로 나왔으면 여기서 관찰자는 제자들이죠. [ ᷰ(원인) → 결과(저주) ]이런 결과가 저주로 나왔다면 앞에 서 무얼 찾겠어요? 이런 결과를 초래한 원인을 찾아야겠지요. 여기서의 결과는 무화과나무 저주잖아요. 예수님이 무화과나무를 저주했지요? 제자들에게 한 것이 아니고 무화과나무 당사자에게 했다 이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주를 받았으니까 저주받을 만한 짓을 누가 했다? 무화과나무가 했다고 봐야 되거든요. 원인자가 누구냐? 무화과나무거든요. 무화과나무가 저주를 받으려면 뭐가 성립돼야 되요? 저주 받을 죄가 성립돼야 되겠지요. 그런데 죄라는 것은 그것이 죄라고 기준을 내시는분이 있어야 되요. 본인이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해도 안 받아줘요. 죄다 아니다라고 결정지을 분이 누가 등장하냐 하면 길을 가시던 예수님이 죄라고 했기 때문에 무화과나무는 저주 받았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마음을 안다면 예수님이 내린 저주에 대해서 본인들이 동의를 하고 납득을 해야 되지요? 그런데 다른 대목에서는 제자들이 물어요. “예수님! 이 무화과나무가 저주를 받았습니다. 어찌하여 웬일입니까?”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 말은 그들은 예수님과 같은 노선에 있지 않다라 거에요. 자기들의 기존의 동질성, 자기가 알고 있는 그 노선에 그냥 머물러 있는 거에요. 만약에 전라도를 가는 노선이 있고 예수님이 경상도를 가신다면 전라도로 가는 노선에서 예수님의 노선으로 갈아타기가 안 된 상태에요. 예수님과 같은 노선으로 갈아탔다면 “그렇지! 예수님이 저주 하실 만 하지, 이해가 되네.” 이렇게 돼야 되는데 오히려 의아해 한다는 말은 예수님과 함께 있어도 함께 있는 게 아니에요. 예수님 생각 따로 제자들 생각 따로 떨어져 있는 겁니다. 이것을 ‘차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모든 행동과 말씀은 너하고 나하고 차이 난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거에요. 극단적인 차이가 뭐냐하면 바로 십자가의 죽으심입니다. 사람은 자기 자신을 알아야 되요. 자기 자신을 아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1.위선: (솔직함)을 덮는 방법 → 과학, 논리, 학문2. 솔직: (위선)적인 것을 벗겨 내는 방법 → 예술, 종교] 하나는 위선적인 방법으로 다른 하나는 솔직한 방법으로 위선은 솔직함을 덮는 방법으로 과학과 논리와 학문으로 무한대까지의 탐구하는 겁니다. 그런데 솔직함은 예술이고 종교가 되요. 자기의 덮혀 씌운 것을 다 벗겨내는 방법으로 대표적인 것이 불교지요. “나는 부족합니다.” 천주교에선 “다 내 탓이오,” 바리새인들은 굶어가면서 “나는 죄인입니다” 이사야에 보면 금식하면서 죄인이라 했으니까. 솔직하지요. 자기 보기엔 진실 하지요. 자기의 온갖 욕구를 다 퍼냈으니까, 아까 이야기한 순수한 공백이 되겠지요. 이게 진리입니까? 주님 들어오시라고, 이제 다 비웠으니까, 내 욕심 다 치우고 빈자리로 만들어 놨으니까, 주님이 와서 사랑과 은혜로 마음껏 채우시면 마음 것 찬양해 드릴 테니까 “드루와! 드루와!” 드루와서 그냥 채우면 이게 진실일까요? 주님은 “그냥 그 자리에 있어! 내가 저주하면 저주고 내가 축복하면 축복이야! 네가 나쁜 짓 한 것을 네가 찾아낼 필요 없어!” 왜 나쁜 짓 한 것을 내가 찾아내면 그게 ‘의’가 되기 때문에 그것도 나의 멋진 겸손이고 대견함이 되고, 나의 낮춤이 되고, 나의 도 닦음이 되기 때문에 그것이 바로 제자들이 의아해하는 이유입니다. 때가 안 됐기 때문에 열매를 못 맺었어요. 요모조모 아무리 따져 봐도 잘못한 구석은 전혀 없습니다. 사실 이렇게 어려운 대목이 마태복음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어요. 제자들은 난처하기 짝이 없어요. 주님의 말씀을 이해하려고 애를 쓰는데 도무지 납득이 안돼요. 왜 저주를 하셔야 되는 지, 무화과나무 당사자를 보세요. 얼마나 섭섭하겠어요? 무화과나무를 누가 만들었어요? 예수님이 만들어 놓고 열매 맺는 때를 누가 정했습니까? 주님이 정해놓고 5월 달에 맺는데 3월 달에 와서 열매 없다고 하니까, 가만있다가 뒤통수 맞은 거잖아요. 쉽게 말해서 “제자들아! 나 믿나? 믿지 마라!" 네가 믿는 식으로 나를 믿지 말라는 겁니다. 이건 하나의 위선이에요. 또는 내가 믿는 것도 죄입니다라고 해도 구원받는 게 아니에요. 이건 솔직함이고 솔직함은 진실이지 진리가 아니에요. 우리는 진실하게 대하면 하나라도 통하는 줄 아는데 진실은 통하지 않습니다. 그냥 맡은 역할을 할 뿐이지 진실의 끝이 어딘데요? 그냥 퍼낸다고 해서 퍼집니까? 예술가들 보세요. 나는 돈 안 밝힌다. 나는 명예도 싫다, 돈도 싫다, 오직 아름다움을 추구할 뿐이다. 순수한 아름다움을, 순수한 아름다움이요? “네 자신을 알기는 아나?” 우리 자신이 순수한 아름다움을 추구한다고요? 십자가 앞에 세워 보세요. 아름답습니까? 순수함이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뭐가 됩니까? 이미 죄인인 것을 무슨 순수함이 있어요. 없어요. 피를 흘릴 정도로 죄인인데 무슨 순수함이 있습니까? 우리는 순수함을 내가 우상화하고 있지 않은 지 돌아봐야 되요. 몇 번 이야기 하지만 또 이야기 합시다. 성령을 받게 되면 나는 대수롭지 않아요. 그런데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잘해볼라고 영광 돌려 보려고 될 수 있는 데로 기도 시간 늘이고 될 수 있는 데로 성경 많이 보고 될 수 있는 데로 전도 많이 하고 될 수 있는 데로 찬양 많이 해서 하나님께 더욱 영광의 양을 늘려 보려고 하면 할수록 점점 더 누구에게 집착하게 되어 있어요? 본인에게 집착할 수밖에 없지요? 맨 날 때찌때찌(이러면 안돼!) 착한 일 하면 까꿍(잘했어!) 때찌때찌! 까꿍까꿍! 맨 날 자기 자신에게 오늘도 후회한다, 오늘도 반성한다, 일기장 쓰고 “나는 못났습니다!” 못난 거 알면 구원 받습니까? 주께서 “너 못 난거 알아! 가만히 있어! 그 소리 듣기도 지겹다, 고만해!” 못 났습니다라고 하면 안돼요. 그냥 살면 돼요. 그냥 막 사세요! 못 났다고 하면 강아지 쓰다듬듯 이쁘다 하줄 알아요. 주여! 저 이정도 하면 젖먹이지요? 이렇게 하지 마세요. 젖먹이는 (주님을) 자꾸 돌아보는 것이지 어떻게 하면 더 젖먹이 될까? 응애응애 하면 젖먹이 되는 게 아니에요. 그냥 사에요. 그냥 사시면서 십자가, 십자가와 연경된 무화과나무를 생각해 봅시다. 주님의 뜻이라면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도 “나는 너를 저주한다” 그 말을 듣는 순간에 지옥으로 가야 됩니다. 토 달면 안돼요. 라면 먹고 금메달 딴 사람이 누굽니까? 임춘애 아닙니까? 아시안 게임에서 달리기해서 금메달 딴 사람, 그런데 그 사람을 현정화라고 우길 때, 토 달지 말라! 토 달지 말라는 말이죠. 왜냐하면 네 인생이 아니고 누구의 인생이다? 내 인생이고 너는 군고구마 통 안의 시커먼 고구마에 지나지 않아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장마 지던 말던 네가 왜 너는 그냥 이 땅에서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팔면 끝나요. 살다가~살다가~ 죽으면 그만이라, 갈수록 우리는 대수롭지 않아야 되요. 우리는 의미 없습니다. 남편이 어떻고 시아버지 돌아가시고 주님이 그냥 그렇게 하신 거에요. 아웅다웅 싸우고 그냥 지옥이에요. 지옥 같은 세상에서 예수님께서 지옥에 있는 땅에다가 저주 받으라고 하실 수 있는 그 땅에 제자들과 너희들은 지금 살고 있다. 이 땅이 지옥입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건져주게 되면 지옥에서 구원받은 거에요. 불 속에서 구원 받은 겁니다. 마치 방주에서 구원 받은 것처럼 우리는 이미 불구덩이 속에서 지옥 불에서 예수님의 피로 구원 받은 겁니다. 끝이에요. 십자가의 은혜가 우리를 지금도 이끌고 가고 있습니다. 기도 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살다 보니까 이 땅이 아쉽고 더 좋은 세상, 좋은 대통령 나타나서 더 선진국이 되고 싶고 자식들 행복하고 24시간 그 생각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말씀이 덮치니까 이것이 다 주의 은혜이고 이미 천국의 은혜를 미리 받고 산다는 것을 저희가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