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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매질 (사무엘상 3: 15-19) 대전-15강자유게시판사무엘상

매질 (사무엘상 3: 15-19) 대전-(사무엘15강) 이근호 2016년 6월28일 본문말씀: 사무엘 상 3:15-19 (삼상3:15) 사무엘이 아침까지 누웠다가 여호와의 집의 문을 열었으나 그 이상을 엘리에게 알게 하기를 두려워하더니 (삼상3:16) 엘리가 사무엘을 불러 이르되 내 아들 사무엘아 하니 그가 대답하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그가 (삼상3:17) 이르되 네게 무엇을 말씀하셨느냐 청하노니 내게 숨기지 말라 네게 말씀하신 모든 것을 하나라도 숨기면 하나님이 네게 벌을 내리시고 또 내리시기를 원하노라 하는지라 (삼상3:18) 사무엘이 그것을 그에게 자세히 말하고 조금도 숨기지 아니하니 그가 이르되 이는 여호와이시니 선하신 대로 하실 것이니라 하니라 (삼상3:19) 사무엘이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셔서 그의 말이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시니 사무엘상 3장 15절부터 할 차례입니다. 사무엘상 3:15절에는 어른 엘리하고 어린 사무엘 사이에서 계시가 어른에게 오지 않고 어린 아이 사무엘에게 왔지요. 사무엘에게 온 이유를 지난번에 말씀 드렸습니다. 계시가 사무엘의 지혜나 용기가 아니라는 거에요. 어린 사무엘이 결단을 내렸다든지 어린 사무엘이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든지 훌륭하다든지 어린 사무엘이 헌신을 많이 했다든지 이런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그러면 이 계시의 의미는 뭐냐? 계시는 심판이지요. 간단한 거에요. 다 비슷한 겁니다.[계시: 심판, 정죄, 비난, 공격, 배제, 제거, 삭제, 밀침] = 단절(끊어 버리는 것)천국에 대해서, 하나님에 대해서 아예 희망과 기대를 잘라 버리는 겁니다. 주제 파악도 안되는 것이 감히 니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내가 누군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천국을 넘본다는 것은 이것은 100% 가짜요, 악마의 심성이에요. 다른 강의에서 했는데 악마에 대해서 다시 한번 말씀드리겠습니다. 창세기 3:15절에 악마가 나오지요. 거기에 악마가 뭐로 표현됐냐 하면 뱀이 아니고 뱀의 후손으로 되어 있어요. 우리는 ‘~의 후손’은 앞에 있는 선조보다 못하다는 느낌을 보통 가져요. 후손이니까 어른 따로 계시고 어른이 몸통이라면 꼬리가 후손쯤 될거라 생각하잖아요. 그게 아니고 반대에요. 후손이 몸통이고 앞의 선조가 꼬리가 되는 겁니다. 태양이 있다면 태양 주변에 불꽃이 피어 있어요. 이것을 코로나(Corona) 현상이라고 합니다. (태양의 표면으로부터 수천 Km에 이르는 태양의 대기층에 해당하며 태양의 온도가 6000도C에 비해 무려 180만도로 높다.)고 과학자들이 보는데 그래서 태양을 몸통이라고 보자면 (코로나)를 머리카락이나 털 정도로 보면 되겠지요. 뱀이라는 피조물은 털에 불가한 겁니다. 그래서 뱀의 후손이라 할 때 그냥 보면 뱀이 우선이고 후손은 나중이라 생각하지만 뱀의 후손이 등장하게 되면 창세기 3장의 에덴에서 활동했던 뱀은 바로 진짜 사탄의 쫄병이라는 것이 밝혀지는 겁니다. 이것을 어떻게 알 수 있냐 하면 뱀의 후손과 대비되는 분이 뭐라고 되어 있지요? 여자의 후손이죠. 여자에게 주도권이 있는 것이 아니고 여자의 후손에게 주도권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여자가 아들을 낳을 때 안게 됩니다. 안는다는 말은 이사야에 나오고 여자가 아들을 낳는 것이 뱀과 무슨 관계가 있나 관계가 있어요. 계시록 12장에 보면 여자가 아들을 낳을 때 계속 집요하게 공격해서 죽이려고 하는 실체가 드디어 등장하게 됩니다. 그것을 옛 뱀 곧 마귀, 사탄이라고 되어 있어요. 여기서 공식이 하나가 나와요. 악마에 대한 공식인데 악마가 무엇이냐? 악마가 어디 있느냐? 악마가 누구냐? 간단한 겁니다. 뭐냐하면 예수님에 복음의 현장에만 나타나요. 복음이 전해지지 않는 곳은 악마가 자기 정체를 나타낼 이유가 없어요. 왜냐 이미 악마의 지배아래 있기 때문에 악마의 통치 아래 있기 때문에 신경쓰지 않아도 되지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외치는 현장에서만 악마가 나오지 그렇지 않은 곳에선 나올 필요가 없다니까요. 같은 편인데 왜 나와요. “열심히 주를 섬깁시다.!” 이럴 때는 악마가 안 나와요. 마귀가 그렇게 설교하는데요. “예수를 믿어야 구원 받습니다.!” 이런 건 악마가 다 하는 거에요. 예수를 믿습시다가 왜 악마가 하는 소리이냐 하면 예수를 믿읍시다를 한번 보세요. 누가 믿읍시다? ‘내가’ 반드시 ‘내가’가 성립되지 않으면 믿읍시다가 성립 안 되잖아요. 예수를 믿읍시다. 누가? 내가 그러면 구원은 누가 받는다? 내가, 이게 바로 악마가 이야기 하는 거에요. 그러면 우리는 ‘나’라는 것이 여기 있고 죽어서 천국에 가있는 나를 미리 예상한다면 천국의 내 모습을 당겨서 생각 한다면 지금 내가 할 조치는 간단해요. 예수 믿으면 되는 겁니다. 예수를 믿으면 이 땅에서 살지만 결국 죽어서도 천국에 가 있는 나를 발견 할 것이다. 이렇게 되잖아요. 아까 말했지만 예수 누가 믿어요? 동생이 믿어요? 남편이 믿어요? 남편이 믿고 내가 구원 받습니까? 아니지요. 내가 믿잖아요. 그러면 믿음이 성립되려면 누구를 절대 포기해서 안된다? 나의 결심을 절대로 포기해선 안되지요. 정신 바짝 차려야 되지요. 정신 바짝 차리고 깨어서 믿으면 구원 받는다는 겁니다. 그런데 졸음 오거나 치매 걸리면 졸음와서 비몽사몽에 교통사고 일어나서 자기의식을 잃어버리는 순간 주께서 재림 하시면? 빡! 하고 차에 박았는데 앞 차가 운전해서 혼수상태에 빠졌어요. 24시간 혼수상태에 빠졌는데 그 때 예수님이 재림 하시면? 보통 고민이 아니에요. 끝났네! 하필 그 시간에, 기름 준비하는데 하필 그 시간에 교통사고 나서 혼수상태에 있는데 기름 준비 백날해도 소용없지요. 그 때 예수님이 재림 하시면 깨보니 신랑 벌써 왔다 갔다고 하니 보통 문제가 아니에요. 깨었을 때 온다하면 교회에 후딱 갈껄 병원에 있다 보니 교회 가질 못했어요. 이 문제 어떻게 할 거에요? 예수 믿어서 구원 받는다 이건 신약에 나오지요. 사람들은 구약을 모르고 신약에 마구 뛰어든 거에요. 성질도 급하지 구약의 사무엘상 같은 내용은 모르고 신약에 뛰어든 거에요. 기어히 뛰어 들어서 일단은 예수 믿고 그 다음에 구약 보는 겁니다. 그게 믿음인지 마귀가 쳐 놓은 덫에 빠진 것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뭐냐 바로 함께 거든요. 로마서 6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우리에게 적용 될 때는 단독으로 죽으신 게 아니고 택한 백성과 함께 죽은 거잖아요. ‘함께’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을 때 함께 죽었지요. 사도 바울도 그랬지요.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갈 2:20) 이 함께가 내가 단독으로 있을 때 내가 단독으로 함께를 느낄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없지요. 왜냐하면 쌍둥이가 손을 붙잡고 있다고 합시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가 나타났습니다. 둘이 동시에 하나, 둘, 셋, 예수 믿습니다고 할 때 내 목소리가 앞에 인지 동생 목소리가 앞에 인지 경쟁이 되요. 항상 인간의 모든 행동은 함께를 용납하지 내가 앞장서면 동생은 나에게 종속이 되요. 내 뒤에 오게 되면 내가 전부를 차지하지 아니 하면 우리는 찝찝해요. 나의 행동을 1로 본다면 0.9로 되면 내가 용납을 못해요. 0.8도 안돼요. 1이라면 1이 돼야 되요. 이걸 영어로 하면 All 전부가 돼야 되요. 내 행동은 전부 내가 한 행동이어야 하는 겁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주와 함께 해야 한다니까 신학자들이 고민에 빠졌어요. 분명히 주님이 주신 힘으로만 예수 믿는다, 하나님이 주시는 성령의 힘으로만 한다 하니까 주님이 함께 해야 되고 그러면 나도 믿기 해야 되고 이건 퍼센트를 몇 대 몇으로 퍼센트를 해야 될지 신학자들은 50:50으로 보고 있는 듯해요. 물 50%에 커피 50%타고 물 50%에 꿀50%타면 꿀차 되는 것처럼 믿음에다가 내 의지 50%정도 들어가고 주님의 후원 50%정도 들어가서 구원 받는다는 겁니다. 대표적인 교단이 침례교입니다. 한국의 모든 이단들이 침례교에서 나왔어요. 왜 구원론 중심이니까! 여러분 구원받고 싶지요? 죽어서 천국가고 싶지요? 요렇게 하시면 됩니다. 그 요렇게를 알려줘서 사람들 끌어 모으는 겁니다. 그러면 “말씀만 하옵소서! 지킬 준비가 돼 있습니다.” 단단히 준비가 되어 있는 거에요. 요렇게라는 알려 주고 행동 지침만 이야기해 주면 되는 거에요. 그래서 내가 행동 지침대로만 하면 되요. 문제는 뭐냐하면 그 행동 지침을 해서 만약에 천국에서 합격 통지서가 왔다면 내가 몇% 관여해서 합격했냐는 문제가 생겨요. 내가 50%하고 나머지 미비한 부분은 주께서 채워서 100%이냐? 아니면 100%냐? 그러면 우리가 아는 정답은 뭡니까? 우리는 몇% 관여 했어요? 0% 잖아요. 어떤 경우가 0%가 됩니까? 내가 예수 믿어서 구원 받는데 하늘나라에선 그것은 네가 믿어서 된 것이 아니고 네 안의 주님이 믿었다. 주님이 100% 다 했다고 한다면 난 0%가 되잖아요. 0%라는 것을 우리가 받아들일 때 내가 지금 움직이고 행동하고 있고 믿고자 하고 있는 나를 ‘0’이라고 숫자 제로라고 하려면 내가 어떤 자일 경우에만 되냐는 말이죠, 나의 ‘죽음’이죠. 나의 죽음이라는 말이 굉장히 어려운 말이기 때문에 쉽게 말씀 드리면 성경대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그래서 주의 이름을 불렀어요, 구원 받겠다고, 로마서에 나오고 사도행전 2장에 나오니까, 예수 이름을 부르는데 우리는 몇%가 돼야 되요? 0%로 가야 되거든요. 그래야 합격이거든요. 50:50은 안 되지요. 나중엔 그것도 아니고 내가 70먹고 주님이 30먹는데 그리고 간증 집회하면 95:5 쯤 하고 간증 집회라도 하게 되면 주님이 전부 하셨다라는 이야길 듣고 싶어서 나를 세운 세 아니잖아요. 당신은 어떻게 구원 받았습니까 그 소릴 듣고 싶어서 간증 집회에 세웠을 거 아닙니까? 그러면 자기가 90%정도는 해야지! 자기 90먹고 주님은 10먹고 간증 집회 끝날 때 찬송가 부를 때 어머님의 기도가 딱 준비되어 있으면 나 90%먹고 어머님이 기도 했으니까 5%먹고 주님 5%거 되겠지요. 그러다가 자기가 좀 부족하다하는 사람은 자기가 80% 먹고 자기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고 교회로 전도하신 권사님 10% 먹고 어머님 기도 못 잊는다 했으니까 어머님 기도 5% 정도 하고 천주교에서는 누구에게 한 5%를 칩니까? 성모 마리아, 왜요 마리아는 예수님의 엄마니까 빽서야 되니까 빽서서 5%그래서 천주교는 80%를 하지 않으면 나머지 20%를 안 채워 준다는 거에요. 여러분들이 노력하지 않는 인간을 주께서 예쁘게 보겠느냐는 거지요. 순종하세요. 순종하는 거 보고 20% 도와주신다 이렇게 나온다니까요. 천주교도 그렇고 침례교도 그렇고 장로교도 마찬가지고 그러면 0%되려면 어떻게 됩니까? 죽이신다 하는 게 가슴에 와 닿지 안잖아요. 왜? 살아 있으니까, 지금 눈 부릅뜨고 살아 있는데 뭘 죽여요. 바나나 우유도 먹고 있는데 왜 죽었어요. 이게 왜 죽은 거에요. 지금 먹고 있는데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냐? 군화발로 모가지를 콱! 밟아야 돼요. 군화발로 끽 소릴 못 하도록 밟아야 되거든요. 밟되 그냥 밟는 게 아니고 뱀의 후손 안에 놓여 있음을 근거로 밟아 줘야 되요. 내가 너를 밟는 게 아니고 네가 뿜어내는 모든 것이 뱀의 후손이 나의 100%복음으로만 구원하는 것을 방해하기 위해서 뱀이 후손이 너를 장악하고 사용하고 있다는 점을 같이 알려 주면서 주께서 사용하시는 거에요. 이야기 다시 해봅시다. 지금 이야기 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굉장히 많아요. 계시가 뭐 때문에 온다고 했습니까? 심판이지요. 어린 사무엘이 똑똑하지 않다고 했지요. 결국 계시는 누굴 심판하기 위해서? 사무엘을 통해서 누굴 심판해요? 엘리 제사장 가문을 심판 하지요. 엘리는 무엇을 통치하고 있습니까? 이스라엘의 모든 정신세계를 지배하고 있지요. 그 당시의 정신세계가 신앙적 체계니까. 그러면 방금 한 이론에 의하면 군화발로 누굴 밟아야 되요? 사무엘을 꽉 밟아야 되잖아요. 엘리 제사장님, 이번 계시는 제가 받았습니다. 요런 소리 나오면 안 되잖아요. 그 소리가 마귀의 외침이니까, 하나님께서 밟을 필요 없어 왜 그냥 사무엘이 아니고 어린 사무엘이니까 그런 소릴 하지 않지요. 제사장님 저요 계시 받았어요, 이렇게 촐랑대지 않겠지요. 그러기에 하나님께서 밟을 필요 없습니다. 그냥 어린 사무엘이에요. 나중에 어른 되면 밟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기 전에 진짜 밟혔습니다. 그때 옆에 누가 있었냐 하면 십보라가 있었지요. 십보라가 아니었으면 모세는 죽었어요. 십보라가 자기 아들을 할례를 했지요. 그것이 출애굽기 4장이니까 본격적으로 모세가 하나님을 만납니다. 만났을 때 하나님께서 계시를 모세에게 주는데 모세를 경유해서 누구에게 가지요? 바로 왕에게 가지요. 그러면 자기를 경유한다고 모세가 신바람 났습니까? 아니면 힘들어 합니까? 어떻습니까? 본인이 힘들어요. 왜냐하면 말도 안 되는 예언들을 입에서 쏟아 내라고 하시니까 저쪽을 어떻게 설득하고 납득을 시키고 융화되도록 좋게 하는 말이 아니고 이것은 전하는 본인도 납득이 안되요. 설교자가 설교하는 방식이 딱 하나 밖에 없습니다. 자기가 하는 설교에 자기가 죽어야 되요. 살 생각 하지 말아야 됩니다. 앞으로 한 시간 뒤에 나는 없다. 이렇게 돼야 되요. 설교하고 한 시간 후에 “아이고~목사님! 은혜 받았습니다.” 이런 것을 주께서 밟아 버려요. 당신 따라서 우리 함께 교회 해 봅시다. 이런 게 없어야 되요. 완전히 주께서 밟아야 되요. 밟으면 어떤 내용이 되냐 하면 새로운 내용이 되요. 전에 내가 알던 내용이 아닌 새로운 내용이 돼야 되요. 새로운 내용이 그 현장에 주어져야 됩니다. 그래서 교회는 존재의 연속이 아니고 그때그때마다 성령에 의해 발생하는 겁니다. 발생의 특징은 연속이 안되요. 발생하고 난 뒤에 교회는 없는 거에요. 발생 할 때뿐이에요. 이것을 ‘사건’이다하고 교회의 나타나는 사건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 사도행전 5장에 나오지요. 사건 이전에 헌금 반만 내면 죽는 사건이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없었어요. 베드로는 몰랐어요. 그런 적이 없어요. 또 사건 후에도 헌금 반을 내서 죽는 사건이 있었을까요? 없었을까요? 없었어요. 아나니아와 삽비라 죽고 난 뒤에 사람들이 헌금을 몽땅 다 내고 속이지 않았을까요? 속였을까요? 속였어요. 모든 게 하나의 사건이에요. 사도 바울이 손수건을 가지고 죽은 자를 살렸습니다. 그 다음에 또 손수건 사용 했겠어요? 안 했겠어요? 안했습니다. 왜 사건이기 때문에 한번 써먹은 것 두 번 써 먹으면 안되요. 자! 홍해 건너 왔습니다. 그 다음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또 건넙니까? 건너지 않습니까? 끝이에요. 그 다음엔 요단강을 건너요. 요단강이 있다는 것을 사전에 알려 줬어요? 안 알려 줬어요? 안 알려 줬어요. 홍해를 또 건너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싱긋이 웃습니다. 왜 한번 건너 봤기 때문에 누굴 보겠어요? 모세를 보고 또 모세 지팡이를 부겠지요. “모세님! 하세요. 전에 하듯이 하세요. 잘하시대요.” 뭐 말인데? “지팡이 가지고 바다에 손 내밀고 하시대요” 라고 했을 거에요. 그러나 그런 거 없습니다. 이것을 ‘단회성’이라고 합니다. 계시의 내용은 두 가지입니다. [ 단회적(우발성) = 사건 ] 예를 들어 태 집사님이 성도라면 어제 6월27일 하나님의 계시 안에 있었으면 우발적이에요. 오늘은 6월28일이잖아요. 어제의 집사님과 오늘의 집사님의 사이가 끊어져야 되요. “그날의 걱정은 그 날에 족하니라” 같게 이어지면 안돼요. 이것이 철학이 감히 복음에 들어오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아무리 철학을 공부해도 그들은 복음의 우발성에 대해서 무슨 말이냐고 못 알아들어요. 알아듣지를 못해요. 하나의 예를 들면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합니다. 복음을 전할 때 제가 주일 낮에 같은 귀절을 세 번 씩 예를 든 게 있어요. 이사야 6장이야기 했고 마태복음 13장이야기 했고 사도행전 28장 이야기 했지요. 내용은 동일한 내용이었습니다. (사 6:9)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사 6:10)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하시기로 구약의 이사야에서와 신약의 마태복음과 사도행전 모두 내내 이 내용으로 간다고요.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 납득을 시킨다? 아니에요. 너희가 들었지? 구원받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전한 거에요. 왜 그렇게 합니까? 사도가 왜 그렇게 해요? 많은 사람에게 전해서 천국에 많이 넣어주면 하나님이 더 기뻐하시고 내 백성이 이렇게 많구나! 하늘의 별같이 바다의 모래같이 왔구나! 하고 대 환영을 할텐데, 왜 복음을 깨닫고 알지 못하게 하냐 말이죠. 한 영혼이라도 건져야지! 불쌍히 여기고 모든 사람이 구원 받기 원한다고 디모데 전서에 되어 있는데 왜 그걸 사용 안해요. 사도 바울의 복음은 사람 대 사람의 관계가 아니고 중간에 누구를 맞이해야 되요. 맞이하는 것을 화학적 용어로 매질(파동을 전달하는 물질: 공기, 물..) 소리가 전달될 때 진공 상태에선 안되고 매개 물질이 있어야 되요. 소리의 매질이 공기입니다. 이 말은 천지를 창조 하실 때에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모든 창조물을 연결시키는 매질이었다고 하는 거에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했지요. 천지창조의 모든 목적은 인간에게 있는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형상에 있지요. 다스리고 정복하라는 인간을 말한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두고 이야기하는 거에요. 하나님의 형상은 보이지 않아요. 보이지 않는 것으로 인하여 보이는 것들이 연락 체제를 갖추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철학은 존재거든요. 존재에서 윤리와 도덕을 어떻게 끄집어내는 게 철학의 목적입니다. 현재 존재하는 눈에 보이는 세계를 얼마나 이상적인 세계로 만들까에 기여하겠다는 것이 철학이거든요. 따라서 보이는 것을 손질해야 되요. 보이는 것을 나무라든지 교육을 시키던지 회초리를 들던지 보이는 인간들을 조져서 개과천선시켜서 이상사회를 건설하는 게 철학의 목적이에요. 그런데 성경은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너희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 한다 이것을 다른 말로하면 “네가 너를 알아?” 이런 뜻이에요. 너는 너 자신을 너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에 우발적 사건으로 보지 않고 존재로 보는 거에요. 이 존재를 어떻게 천국에 합격 할 존재로 만들까? 자기 사랑에 몰두해서 주님이 하신 말씀을 가지고 내 사랑을 강화시키고 미흡한 것을 채워서 괜찮은 완벽한 자아를 만들어서 천국에 들어갈 때 주께서 거부 할 수 없는 인간으로 만들어서 집어넣겠다는 거에요. 누가? 내가, 누구를? 나를, 그거 아니면 교회를 왜 오는 데요, 그거 아니면 성경 왜 봅니까? 우발적 사건이 되려면 나 말고 다른 분이 있어야 되요. 사건 유발자가 있어야 되요. 성경에서 사도 바울은 그 분이 누구냐 하면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이라고 했고 문제는 안 보인다는 것이에요. 이 분이 안 보이는 것이 문제에요. 교회가 친목단체가 된 이유가 뭐냐하면 아무리 목사가 설교하고 성경에 뭐라고 했던 간에 천국 본 놈이 없어요. 본 사람이 없어요. 처음에는 있다고 천국 있다고 가정했는데 천국이 있고 하나님을 믿으면 진짜 믿는다면 누구의 뜻이 잘돼야 되요? 그렇게 믿는 내가 하는 것이 만사에 형통해야 되지 않습니까? 형통해도 문제에요. 왜냐하면 99번을 형통해도 1번 형통 안하면 여기서 의심이 들 수밖에 없어요. 이게 딜레마입니다. 99번을 기도에 응답 받아도 1번 응답 안 되면 진짜 하나님이 계신 게 아닌가? 99번 됐다고 1번 마저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뉴튼의 관성의 법칙이지 진리 아니에요.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하나의 (우발적)사건인데 우발적 사건은 존재를 사건으로 전환시킬 때 매질이 필요합니다. 중간 매개체, 중보자가 필요해요. 그런데 그 중보자가 안 보이는 게 문제거든요. 안보여요. 오늘 본문 간단해요. 사무엘하고 엘리 제사장하고 서로 의논해서 “오늘 새벽 3시에 나를 만나러 오너라!” 이런 일이 있었어요? 없었어요? 없었지요. 그런데 누가 꿈속에서 사무엘에게 계시를 주고 누가 엘리에게 찾아가도록 했습니까? 매질이잖아요. 이 믿음을 “누구든지 주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라!”를 그대로 집어 넣어줘야 되요. 집어 넣어줄 때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0%가 되는 게 너무나 당연하지요. 왜 우리는 어린 사무엘이니까, 내가 예수를 믿는 데 기여한 게 아무것도 없어요.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남을 전도 할 때 어떻게 해야 되요?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것을 내다보면서 이야기 해야지요. 나도 그렇게 구원 받았기 때문에 0% 아닌 것을 군화발로 모가지를 밟는 게 바로 복음이에요. 그래서 내가 공부를 많이 해서 알았다든지 내가 사도 바울 말을 딱 들으니 알겠데요 라는지 이런 것은 모가지를 밟아야 되고 사도 바울이 전하는 복음 자체도 그렇고 부활하신 주님이 밟아버려요. 그러니까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인 겁니다. 말씀 듣다 졸아도 괜찮아요. 주께서 그렇게 모가지 밟아 구원 하면 되요. 그러니까 나하고 존재하고 연결시키지 말고 가운데 예수님을 집어넣읍시다. 왜냐 모든 창조는 그리스도사 항상 여기에 사건으로 투입이 되기 때문에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 사이에 누가 개입했어요? 예수님이 개입 하셨잖아요. 그러니까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 맞잖아요. 참 쉽지요? 사람들이 성경을 보고 참 어렵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것은 사건-우발성, 단절, 심판을 위한 계시의 속성, 이런 것들을 들어본 적도 없을뿐더러 이런 것을 본인들이 배제해 버려요. 평소에 내가 좋은 절이나, 성당이나, 교회에 가서 나를 괜찮은 인간으로 전환시켜서 전환된 것으로 오늘 죽더라도 천국에 도착된 내 모습을 미리 당겨서 상상 하는 것, 그러는 자기 욕망의 동일성입니다. 자기의 동일성은 뭐 낳는가? 집착을 낳고 그 집착을 구약에서는 이것을 우상이라고 하지요. 나에 대한 우상, 그러면 오늘과 내일 사이를 내가 끊으면 될까요? 안 될 까요? 이건 응용 문제인데 맞추나 봅시다. 6월27, 6월 28일이 있는데 27일이 자꾸 생각나네! “생신 이었구나!” 그렇지요. 자! 6월 27일의 나와 28일의 나를, 방금 제가 단절 돼야 된다, 그래야 나에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했지요? 단절을 내가 시키면 어떻게 됩니까? 그건 단절이 아니에요. 왜? 어제는 어제이고 오늘은 오늘이다 이렇게 내가 단절시키는 것은 꼼수입니다. 이건 매질이 살아계신 주님이 아니고 주제도 안되는 자기가 자신의 힘으로 요령 부려서 계속 주님 앞에 괜찮은 인간으로 남으려고 몸부림치고 있는 겁니다. 결국 남는 것은 이것뿐이에요. ‘막 살아라’ 단 조건이 있어요. 결과적으로, 그러면 막 살면 구원받습니까? 조건적으로 되면 안되고 원인 자리에 들어가면 안되고 결과 자리에 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결국 나는 어떻게 살아도 막 살았다가 되요. 이것을 주일 낮에도 이야기 했습니다만 종말에는 나(자아)가 옅어진다. 얇아진다, 또는 희미해진다, 마지막 때가 되면 얇아져요, 오늘 우리 교회에서 질문하신 분이 있지요? 제가 답변을 해 놓았잖아요. 나는 갈수록 안 중요하고 주님은 갈수록 고귀해 진다. 다시 정리해 보면 계시는 두 가지로 볼 수 있고 첫 번째는 단 한번 주어지고 두 번 째는 반드시 계시는 바깥으로 온다 했지요. 이 자체가 계시는 이 세상에 대한 심판용이다. 이 세상이 자기 연속성과 자기 내부적으로 어떻게 해 보려는 모든 것을 심판하려는 겁니다. *[계시 = 심판 : 1. 단 한번 2. 바깥 ] (매질) ↓그렇다면 우리가 다음에 이야기 할 것은 A (나) — A′ (나) 중간에 매질로 주님이 우발적인 사건으로 개입하신다면 “이렇게 하나 저렇게 하나 남는 것은 괜찮은 ‘나’가 남잖아!” 이럴 때 성경은 매질인 중보자를 바깥으로 확대시켜 버려요. A (나) — A′ (나) 사이에 중보자가 구약의 중간에 들어가면서 여전히 엘리의 세계가 사무엘의 세계로 바뀌잖아요. 그런데 매질되시는 중보자가 함께 하는 하나님의 이름인데, 중보자가 점점 더 확대되면 양쪽의 인간적인 요소는 존재 가치가 희박해 지겠지요. 나는 갈수록 대수롭지 않아요. 반면에 예수님은 갈수록 고귀해 지죠. 처음에는 “예수님 덕분에 구원받았습니다.”라고 구원받은 나를 굉장히 고귀하게 여겼는데 점점 갈수록 구원받은 나는 별로이고 대수롭지 않고 구원하신 주님이 돋보이게 되는 거에요. 에베소서 1장 18절에 있어요. (엡 1:18)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풍성함’을 설명하기 위해서 군고구마 통을 설명하겠습니다. 겨울 되면 막상 먹어보면 별로인데 사먹기 전에는 그렇게 맛있어 보이는 군고구마, 옛날 어려서 못 살 때는 그렇게 맛있었는데 지금은 먹을 게 많아져서 그 맛이 안나는 군고구마의 통이 있잖아요? 드럼통 반을 잘라서 만든, 그럼 고구마는 드럼통 안에 들어 있지요? 그럴 때 그 드럼통이 풍성함으로 보이는 겁니다. 이것을 신약에서는 ‘예수 안’이라 해요. 그럼 예수 안에 있는 자가 자기를 중심으로 새로운 ~안을 만들 필요가 있을까요? 없을까요? 없지요.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이 15평짜리 서민 아파트에 살다가 100평짜리 넓은 아파트로 가게 됐다고 해서 축복이 전가됐습니까? 안 됐습니까? 아니지요. 작았던 고구마가 커졌다고 해서 고구마의 자체적인 가치와 의미를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습니다. 네가 어디 안에 있느냐? 어느 매질 안에 들어 있느냐? 어느 중보자 안에 들어 있냐? 이것을 보신다는 거죠. 그러면 안에 들어 있다는 것을 나는 여기 있고 나는 ~안에 들어 있습니다. 나로부터 출발하면 잘못이에요. 예수님 안에 내가 있습니다. 이렇게 해야 되요. 출발점을 항상 시작할 때 모든 것이 다 부정되는 입장에서 나는 군고구마 통 안에 있는 시커먼 얼굴 새까만 군고구마, 타서 별 볼일인 없는, 그러한 나인데도 불구하고 통 안에 들어 있다는 점에서 구원의 완료가 되는 겁니다. 구원의 완료는 직선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 —⇥—⇥—⇥ A지점이냐 B지점이냐 C 지점이냐가 아니고 둥근 통 안에 들어 있는 그 자체가 완료가 됩니다.ABC 그안에서 주님의 사랑의 깊이와 높이와 넓이가 점점 더 알아 가는 거에요. 알아간다 하니까 또 직선적인 것을 생각하는데 알아간다는 것은 주께서 성령께서 하시면 나는 이만큼 왔다, 5Km 왔다! 난 기도 많이 해서 10Km로 왔다하는 낭[대한 자각 자체가 마지막 통 안에서는 점점 더 희미해진다는 거에요. 마치 수면 내시경 할 때 “나는 지금 주사 맞기 5분전이다, 드디어 5분 넘었다, 주사 맞고 난 후 10분 넘었다, 정신 바짝 차려야지! 의사가 내 입을 벌리는 것을 봐야지!~봐야지~ 봐야~!” 하다가 나중에 눈 떠보면 회복실에 와 있고 그동안 누가 무슨 짓을 한 거지? 거룩하라 했으니까 나는 점점 더 거룩하고 믿음에 덕을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고 더하다가 나중에 주체 자체가 회복실에 와 있는데요. 몇 퍼센트요? 0%. 다시 돌아가 보니까 성령께서 내 모가지를 군화발로 밟아서 나의 동질성을 인정하지 않고 매일같이 사건에 사건, 소낙비처럼 매일 은혜의 소낙비를 맞아서 주님의 매질, 중보자의 도우심으로 군고구마 통 안으로 들어오시고 통이 가만있는 것이 아니라 바비큐 돌리듯 돌아요. 같이 돌아 버립니다. 이 세상에서 못 살아요. 쿵탕! 쿵탕! 쿵탕! 거려서 바지락 씻을 때처럼 오른 쪽으로 기울이면 우르르 몰려가고 왼쪽으로 기울이면 우르르 몰려가듯 그저 숨통 트이는 곳으로 우르르 몰려가는 거에요. 귀농은 왜 합니까? 농촌을 사랑해서? 우리나라의 농업 근대화를 위해서 헌신하고자? 할 게 없어서지요. 할 게 없어서 하는 거에요. 다른 게 할 게 없어요. 주께서 그렇게 궁지로 몰아가시는 거에요. 그러면 현재 우리가 행복하게 웃는 이 곳이 뭐다? 궁지라니까요. 지금 우리가 어디로 틀지 몰라요. 주께서 재미없어서 다른 곳으로 가게 하시면, 길을 터주면 그게 숨통 트이는 곳인 줄 알고 빠져 버려요. 그것이 군화발로 밟히는 것이고 결국 우리는, 고상한 말로 하면 선택을 하는데 우리의 선택이 뭐로 바뀌냐 하면 무의미로 바뀌어요. 궁지 안에서의 선택은 의미 없는 거에요. 기껏 할 게 없어서 그것을 했는데, 해놓고 하는 말이 “내가 그렇게 선택했어! 내가 그렇게 되라고 기도 많이 했어!” 뭘 기도를 해요? 할 게 그것 밖에 없어서 해 놓고선, “왜 난 저런 남자하고 결혼했나?” 자꾸 후회 하지만, 딱 그 나이가 되어 보세요. 우리는 궁지에 몰려 보니까 그것 밖에 할 수 없는 거에요. 결혼은 따지고 하는 거에요? 따지는 게 아닙니다. 결혼은 그냥 해보고 싶은 거에요. 해치우는 거에요. 해 놓고 돌아서서 “나는 선택했다! 나는 몰랐다!” 이렇게 하는데 비겁한 변명이지요. 하나님은 어린 사무엘을 통해서 성도는 성도 외부를 심판하기 위해서 어린 사무엘의 입장으로 만들어 버려요. 이것을 요한계시록 2장에서는 에베소 교회를 이야기 하지요. 이것을 ‘처음 사랑’이라고 합니다. 매질만 증거하고 중보자만 나타내고 나는 그 앞에서 대수롭지 않은 상태, 그게 처음 사랑이에요. 에베소 교회를 보고 너희가 처음 사랑을 잊어 버렸다는 거에요. 그 때는 하나님이 궁지로 몰아넣어서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했을 뿐인데 남들이 “아이고! 잘되셨습니다, 왜 그리 출세하셨습니까? 성공하셨습니다. 이렇게 훌륭할 수가 이렇게 경건하고 거룩할 수가 있습니까? 이렇게 하니까 소급해서 뭐 보냐? 나는 악을 버리고 선을 선택했다고 우기는 거에요. 이건 모가지를 밟아도 한참 밟아야 되요. 나는 이것을 선택했다는 거에요. 그러면 이건 0%가 아니고 자기 딴엔 겸손 한다고 7.5%라고 하겠지요. 결국 나중에 그런 식으로 하게 되면 교회 다니는 것이 동호회나 친목회가 되는 거에요. 왜 이것은 동질성이니까. 자기가 돈 내고 투자한 예배당이니까, 조직이 있다는 것은 자기의 동질성을 대변해 주고 있으니까 조직이 있음으로 나의 가치도 함께 섞여서 대대로 이어진다고 보는 겁니다. 이것은 난도질 당해야 되요. 회치듯 해야 되요. 다 주께서 어제도 은혜 주셨지만 매일 은혜를 주시는데 우리 눈엔 보이지 않습니다. 누가 보이는 가? 내가 눈에 보입니다. 그래서 선택하는 것이 일과가 되었어요. 악을 버리고 선을 선택 하겠다. 이것을 시도하다 악이 나온 사람이 가인입니다. 자기 주제 파악을 못해요. 자기가 선택할 자격이 없다는 것을 본인이 몰라요. 그 다음 봅시다. 3장 17-18절. (삼상3:17) 이르되 네게 무엇을 말씀하셨느냐 청하노니 내게 숨기지 말라 네게 말씀하신 모든 것을 하나라도 숨기면 하나님이 네게 벌을 내리시고 또 내리시기를 원하노라 하는지라 (삼상3:18) 사무엘이 그것을 그에게 자세히 말하고 조금도 숨기지 아니하니 그가 이르되 이는 여호와이시니 선하신 대로 하실 것이니라 하니라*[계시 = 심판 : 1. 단 한번 2. 바깥 ]바깥의 계시가 심판용으로 단 한번 온다면 모든 진행되는 역사는 인간의 역사이겠어요? 아니면 계시의 역사겠어요? 계시의 역사이지요. 그러면 계시의 역사를 실행시키는 주체자가 누굽니까? 보이지 않는 분이지요. 그러면 엘리의 가정이 망하는 것은 결과가 되는 겁니다. 주님의 살아계심을 보여주는 결과에요. 네가 하나님 말씀보다 네 아들을 네 가문을 혈육을 사랑했던 죄과의 결과를 엘리가 보여주게 됩니다. 문제 하나 내겠습니다. 엘리가 지옥 갔습니까? 이게 문제입니다. 그건 모르죠. 왜냐하면 결과는 하나의 역할이기 때문에 사무엘은 계시를 잘 전해서 천국 갔습니까? 하나의 역할이거든요. 누구든지 천국가려면 예수님의 피로만 가는 거지 어떤 역할 잘 했다고 구원 받는 건 아니 거든요. 역할 잘 했으면 이건 군화발로 밟혀야 되요. 왜 0%가 아니고 3% 5% 늘어나기 때문에 그래요. 계속 밟아줘야 되요. 그래서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 어린 사무엘처럼 역할만 할 뿐인데 구원은 뭐로 받는다? 예수님의 피로 구원받는 겁니다. 그래서 군고구마 통 안이 피의 세계거든요. 피 안에서 우리는 이리 쏠리고 저리 쏠리고 그 쏠리는 것이 뭐냐하면 모든 것이 우리가 역할 하기 위해서 주께서 궁지로 궁지로 몰아넣으시는 겁니다. 그래놓고 돌아서서 내가 선택했고 내가 정신 차렸고 내가 믿었고 자꾸 ‘나’가 나오지요. 그런 우리를 위해서 오늘 같은 엘리 제사장 이야기가 나오는 겁니다. 아무리 잘 한다 해도 내 자식을 주님보다 사랑하게 되어 있어요. 우리 몸은, 자식이냐? 주님이냐? 내 자식이죠. 내 자식에게 잘 해 줄때만 주님이 좋은 분이라는 거지요. 결국 엘리 이야기가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엘리의 요소가 우리 안에 들어 있으니깐 주께서 우리를 군화발로 밟아 주시기까지 우리를 구원해 주시니 얼마나 고마운 일입니까? 정신차려! 해서 구원받은 사람 아무도 없거든요. 우리가 왜 밟혀야 되고 우리의 선택으로 왜 구원이 안되느냐? 사무엘 쪽을 선택하지 말고 엘리 쪽을 보세요. 엘리 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중재로 말미암아 어린 사무엘이 된 거에요. 그래서 양쪽을 다 보여주는 겁니다. 성급하게 어린 사무엘 쪽 할래요! 손들고 나오지 마시고 엘리를 경유 하세요. 누구나 엘리 밖에 안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피로 용서로써 어린 사무엘 같이 0% “제가 한 게 뭐 있습니까? 저는 시키는 데로 했을 뿐입니다.” 결과적으로 천국가는, 천국은 이런 사람의 것입니다.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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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220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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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43 자유게시판 광주 강의(2016. 6. 24) 2강 - 최고관리자 16-07-14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