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강-고전 15장 54-56(사망을 삼키다)160717-이 근호목사
198강-고전 15장 54-56(사망을 삼키다)160717-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전서 15장 54-56절입니다. 신약성경 283페이지입니다.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세상현실을 설명하면서 정치적으로 또는 군사적으로, 중국이 어떠니 혹은 미국이 어떠니, 북 핵이 어떠니, 이런 식으로 해야 설명이 되는데 사도바울은 세상을 설명하면서 무엇으로 설명하는가? 사망과 율법과 그리고 율법의 권능, 사망의 권능, 죄, 이것 가지고 현실을 설명합니다. 참 희한하지요. 우리가 알고 있는 정치나 경제문제, 환율문제 가지고 어떤 현실이냐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어떻게 율법 가지고 또는 나중에 늙어 죽을 때나 나오는 그 죽음을 가지고 이 현실을 설명할 수 있단 말입니까? 사도바울은 성경에서 말하기를 ‘성령 받은 사람’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사도바울만 성령 받은 것이 아니거든요. 오늘날 성도들도 다 성령 받은 거예요. 성령 받은 사람 같으면 사도바울이 현실을 설명하는 것과 똑같이 이 세상을 율법이나 사망 죄를 가지고 세상현실을 제대로 설명할 수 있어야 됩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가 아는 합리적인 것을 가지고 설명을 하지만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합리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고 믿음으로만 믿어진다는 겁니다. 아는 것으로는 왜 안 되는가 하면, 천국은 다 들어갈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그래요. 데살로니가후서 3:2에 보면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라는 말은, 사람들이 ‘믿습니다.’ 하는 것에 대해서는 귀담아 들을 필요 없다는 거예요. 믿는다, 믿는다, 다 그렇게 주장해요. 하지만 정말 믿는다면 사도바울처럼 현실을 볼 때 율법이나 죄와 사망,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 이런 것 가지고 충분하게 현실을 같이 설명하고 같이 공감할 수 있어야 이것이 믿는 자, 또는 성령 받은 자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인력으로 되지를 않지요. 인력으로 되지 않기에 오늘 본문에, 죄의 권능, 그리고 율법이 권능, 사망의 권능, 그리고 거기에 대해서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로 이겼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 권능의 싸움, 힘의 싸움인데 그 힘에 우리가 같이 말려든 거예요. 인생을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힘에 의해서 하나님의 짜인 율법과 죄와 사망과의 연관성에서 나오는 힘에 의해서 우리가 성도로서 생산된 겁니다. 성도는 본인이 된 것이 아니고 성도로 생산이 된 거예요. 이렇게 옛날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만들어졌지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는 원래부터 없어요. 없는데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없는데서 새로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만들어졌습니다. 이점은 오늘날 신약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약은 새 언약시대라고 되어 있습니다. 새 언약은 그 자체에서 능력이 나오는데 그 권능은 어떤 권능인가? 히브리서 10장 16절에 보면, “그날 후로는 저희와 세울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저희 마음에 두고 저희 생각에 기록하리라.” 저희 생각에 기록한다. 옛날 이스라엘을 없는데서 만든 그 권능의 약속이 신약시대에도 우리 성도에게 주어지게 되면 성도의 마음과 생각에 하나님의 법이 새겨지게 되는데 그 새겨진 법이 어떤 효능을 갖고 있느냐 하면,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지 아니하리라.” 뭐가 들어오면? 하나님의 새언약이 들어오게 되면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지 아니하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불법을 저지르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고, 우리가 죄가 없다는 말이 아니에요. 우리는 죽을 때까지 죄를 짓고 불법을 저지르지만 하나님께서 그 언약을 맺기로 해서 다시는 우리 죄를 기억치 아니하신다고 했습니다. 누구 쪽에서? 심판주가 우리보고 “너 죄졌지?” 하지 않는다는 그 말입니다. “불법을 행했지?”라고 하지 않겠다고 약속이 우리 맘속에 들어와요. 그런 율법이 있는 사람의 특징이 있어요. 공통점이 뭐냐? “이것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드릴 것이 없느니라.” 다른 말로 하면, 저주를 피하기 위해서 우리가 추가적으로 해야 될 행위는 없느니라, 그 말이에요. 우리 인생의 저주, 죄 지어서 받는 그 벌을 피하기 위해서 추가적으로 우리 쪽에서 뭔가 교회에 충성 봉사한다든지, 율법을 지킨다든지, 이런 것은 더 이상 필요치 않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신약의 성도에요. 따라서 성도가 돼버리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나에게 찾아와서 죄를 일체 기억치 아니하시는 그 율법은 뭐며, 죄는 뭐며, 사망은 뭐며, 거기에 대해서 관심을 두고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의 언약, 말씀으로 모든 현실을 설명할 수가 있는 겁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목사님! 그 말은 좋아 보이는데 그걸 누가 믿겠습니까?” 라고 걱정하는 분이 있어요. 사실 그 말이 맞아요. 아무도 믿을 수 없는 말을 제가 지금 지껄인 거예요. 인간의 힘으로서는 아무도 믿을 수 없어요. 그런데 예수님 십자가 달릴 때에 옆에 달린 사람이 박사님들 아닙니다. 둘 다 강도에요. 살인강도 둘이 달렸습니다. 한쪽 강도는 못 믿겠다고 했어요. 그것이 당연해 보입니다. 그런데 다른 쪽 강도가 희한합니다. “주님! 오늘 주님이 주님나라 갈 때 저를 생각해 주세요.”라고 했어요. 예수님이 새언약의 완성자로 온 것을 믿었던 겁니다. 예수님의 응답이 있어요. “네가 오늘밤에 나와 함께 낙원에 갈 것이다.” 낙원은, 천국은 그렇게 가는 겁니다. 믿음으로 가는 겁니다. 믿음이란 자기의 처지를 보지 않는 거예요. 합리적으로 그동안 살아왔던 인생의 모든 길들여진 이성, 합리적인 것들을 믿지를 않습니다. 자기 자신을 믿지 않고 예수님의 말씀을 무조건 믿는 거예요. 뭘 포기하고? 똑똑하고 잘난 자기 자신을 포기하고. 내가 합리적으로 세상을 정치나 경제로 설명했던 그 세상 말고 오직 사도바울처럼 오직 율법과 주님의 언약과 죄와 사망가지고 세상이 온전하게 설명이 되는 겁니다. 세상에 많은 사람의 직업이 있잖아요. 그 직업이 있는데 인간이 자기가 하는 일을 설명할 길이 없어요. 왜냐? 내가 뭘 합니다, 나는 가위손입니다, 이런 소리를 할 수는 있는데 설명을 할 수 없는 이유가 궁극적인 것과 매치가 안 되어서 그래요. 어떤 사람이 “나는 의사입니다. 이런 일을 합니다.”라고 했을 때 다른 사람이 “그거 해서 뭐하는데?” “병을 고칩니다.” “병 고쳐서 뭐 하는데?” “오래 삽니다.” “오래 살아서 뭐하는데?” “오래 살면서 돈을 잘 벌지요.” “돈 벌어서 뭐하는데?” 계속 나가게 되면 궁극적인 것과 매치가 안돼요. “그렇게 해서 잘 살지요.” “살다가 죽어버리는데?” 결국 마지막에 남는 것은 이렇게 사나 저렇게 사나 결국 죽는다는 사실이에요. 그래서 인간이 자기가 하는 일을 아무리 설명하려고 해도 궁극적인 것이 못되기에 어느 정도 하다가 말문을 닫아버립니다. ‘아, 나도 모르는 밑바닥이 따로 있는 것을 나는 지금 의도적으로 회피하고 있구나. 내가 어디로 가는지를 모르면서 아는 척을 했구나.’ 그러면서도 우리는 나름대로의 합리적으로 살려고 합니다. 합리적으로, 합리적으로, 이 말을 여러 번 했는데 합리적으로 사는 사람의 예가 있습니다. 한 노인이 하는 말이, 자기 나이가 70쯤 되었는데 아내가 얼마나 합리적인지, 남편이 돈 벌어오면 밥 해주고 돈 안 벌어오면 밥을 안 해준다는 거예요. 얼마나 합리적이에요? 돈을 벌어줘야 그거 가지고 장을 봐야 그거 가지고 밥을 해줄 것이 아니겠습니까? 돈을 못 벌어오는데 밥을 하느냐 그 말이지요. 그 말이 맞는 이야기에요. 그런데 제가 생각하는 것은, ‘그 할머니가 식당을 차렸는가? 남편을 식당 손님처럼 생각하는 것인가?’ 부부라는 것이 합리적인 것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거든요. 돈 벌어올 때만 밥 해주고 돈 벌어오지 않으면 밥 안 해주는 그런 관계 말고 다른 관계가 있는 거예요. 그 다른 관계가 뭐냐 하면, 돈 하고 상관없이 서로 의지하는 관계가 부부사이입니다. 참, 70이 넘어서 무슨 돈을 벌어옵니까? 그런데 서로 의지하는 부부관계가 언제 깨지고 합리적으로, 돈 벌어주면 밥 해주고, 돈 안 벌어주면 밥 안 해주는 식으로 되느냐? 상대방에 대한 의존관계, 신뢰가 깨질 때 그 다음부터는 장삿속으로 상대방을 이용해서 돈만 챙기는 식으로 나오는 겁니다. 부부라는 것이 처음에 결혼할 때는 돈을 초월해서 했는데 서로의 신인도가 떨어져버리면 돈으로 귀환되지요. 이것이 인간이 본성입니다. 인간은 말합니다. “믿는다.” 뭘 믿어요? 자기 합리적인 것을 믿지요. 그런데 어쩌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그렇게 인간이 믿고자 하는 합리성을 피해서 이야기해요. 죽음이 어떠니, 율법이 어떠니, 이것은 도저히 믿고자 해도 이것이 무슨 현실입니까? 오늘 본문 다시 읽어볼까요?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특히 55절에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이게 도대체 무슨 말입니까? 올림픽 사격 하는 겁니까? 사망이 왜 쏩니까? 사망이 어떤 인격자입니까? 사도바울이 어떤 현실을 설명하는 말을 하고 있는데 도대체 납득이 되도록 설명을 해야지요. 납득이 되도록 설명을 해야 우리가 성경하고 친밀해지는데 성경자체가 뭔가 밀치는듯하기도 하고 “너는 몰라도 돼. 모르면 모른 채로 그냥 가.” 하는 식으로 자꾸 밀어내는 듯 하는 느낌이 든다는 말이지요. “안 가르쳐 줘.” 하는 그런 뜻이거든요. “네가 이걸 알려고 애를 써봐. 그런 맘으로 알아지겠어?” 이런 식으로 말이지요.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말 그대로 하면, 사망이 양궁선수에요. 활을 이렇게 제키면서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하는 거지요.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이것은 또 무슨 말입니까? 사람이 양궁을 하든지 국궁을 하든지 활을 드는 것은 사람이고 활시위를 매기는 것도 사람이잖아요. 그런데 사도바울이 하는 말의 특징이 뭐냐 하면, 사람을 다 빼버려요. 사람은 들러리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현실을 구성하기 위해서 사람은 들러리에요. 내 인생 내 힘으로 이렇게 살아왔다? 아닙니다. 우리가 이 몸으로 이렇게 살아온 자체가 들러리고 사실 따지고 보면 다른 힘들의 조합에 의한 만남과 충돌 그리고 결합에 의해서 지금의 내가 이렇게 생존했다고 사도바울은 주님의 말씀으로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 이야기를 누가 알아듣습니까? 열심히 하세요. “여러분, 다 부자 되세요.” 이게 세상인데. 어느 식당에 들어갔는데 벽에 이렇게 붙여놓았어요. “이 집에 들어오는 사람 다 부자 되세요.” 손님 기분 좋으라고 그렇게 한 것 같아요. 그런데 거기에다가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이렇게 하면 그게 무슨 말인지 굉장히 궁금할 겁니다.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오늘 설교의 핵심내용입니다. 이걸 설명해드리겠습니다. 굉장히 난해하고 어려운 말입니다. 이걸 설명하려면 인간을 빼세요. 여기서 “목사님! 제가 어떻게 하면 됩니까? 주님! 제가 어떻게 하면 됩니까?” 이거 완전히 빼세요. 우리는 들러리니까 빠져야 됩니다. 우리 자신에서 우리를 구원하는 권능이 안 나와요. 히브리서 10장에 하나님의 새언약이 우리 마음에 들어오게 되면 우리는 언약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거예요. 우리가 언약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직접 언약이 우리 속에 들어온다니까요. 화살로 쏘면 박힌다는 말이지요. 새언약이 박히는 거예요. 박힐 때 거기에 박히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동원되는 개념들이 바로 인간은 빠지는 겁니다. 인간의 믿음도 빠져요. 강도가 믿었던 것은 권능의 조합에 의한 결과지 자기가 합리적으로 생각해서 예수를 믿은 것이 아니에요. 인간은 빠질 때도 그냥 안 빠져요. 54절에 보면,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라고 되어 있잖아요. 교회에서 2천년동안 거짓말 한 것이 있습니다. 교회는 다 거짓말이라고 보면 돼요. 그 거짓말이 뭐냐? 사람이 살다가 죽는다는 겁니다. 교회안도 바깥도 다 그렇게 아는데 그 말이 거짓말입니다. 사람은 살다가 죽는 것이 아니고 반대에요. 사람은 죽었다가 사는 겁니다. 이게 진짜입니다. 살아 있다가 죽는 것이 아니에요. 살아 있다가 죽고 또 사는 것이 아니고 처음부터 죽었는데 예수님 때문에 살아 있는 겁니다. 참 이거 모르면서도 끝나면 점심 먹을 생각들 하시는데, 점심 드신다는 것은 이걸 이미 알고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사람이 죽었는데 예수님 때문에 사는 거예요. 지금 살아가는 모습이 그 모습이에요. 사회경제적으로, 교육으로는 이것이 파악이 안 되고 율법에 의해서 이것이 파악이 되는 겁니다. 그것이 파악이 될 때 사도바울과 우리는 한 동지가 되는 겁니다. 우리교회에 정석훈 목사님 설교한 것을 올려놓은 것이 있습니다. 정석훈 목사님이 오랜만에 친구 목사님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했다고 했지요. 제가 그 글을 보면서 느낀 감정은 이거예요. 처음에 신학교 졸업할 때는 같이 뭉쳐 있어요. 그런데 각도가 정해져 있으면 세월이 가면 갈수록, 나이가 먹으면 먹을수록 점점 더 그 각도가 벌어져요. 점점 더 벌어지는데 그 벌어지는 차이가 뭐냐? 내가 정말 살아 있는가, 죽어 있는가, 이런 기준을 생각하는 사람은 복음과 가까이, 복음의 기준을 놓치지 않고 있는 노선으로 가는 반면에 사기꾼들은 뭐냐? 그런 복음에 관심이 없어요. 교회에 사람 끌어 모으고 헌금을 더 끌어 모으고, 이거만 관심이 있어요. 어떻게 목회 성공해 볼까, 그런 것에. 그러니까 같은 신학교 동기생으로 이야기는 억지로라도 되는데 그 격차는 점점 더 벌어지는 겁니다. 여러분, 세상에 나가서 세상친구들 만나 보세요. 여러분이 복음을 조금 알 때에는 격차가 요만큼 벌어져요. 그러나 많이 알게 되면 격차가 이만큼 벌어져요. 나중에는 입을 다물고 있을 수밖에 없어요. 왜냐하면 입을 벌렸다가는 사단이 나요. 관심사의 기준이 달라요. 저 인간은 대체 어디로 가는지, 이쪽에서는 보입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만 있는 곳으로 가요. 오늘 본문대로 하면 사망이 쏘는 곳으로 가요. 사망이 쏘는 것은 죄거든요. 죄인이 가는 곳에 가요. 그러나 본인들은 어느 로켓에 실려서 날라 가는지 몰라요. 왜? 많은 사람이 그리로 가니까. 죽음의 길로 가니까. 오늘 본문의 핵심은 이겁니다.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할 때 그 사망이 무엇인지만 규명하면 돼요. 사도바울에 의하면 사망은 두 종류의 사망, 두 종류의 죽음이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가 요청하는, 미리 당겨서 생각하는 죽음이 있는 반면에 살다보면 찾아오는 죽음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살다보면 찾아오는 죽음, 그 죽음의 두려움을 미리 당겨서 해결하기 위해서, 내 쪽에서 조치를 하기 위해서 요청을 하게 되는데 그것은 사람이 늙으면 죽는다는 흔히 아는 죽음입니다. 이것은 충격적이지 않습니다. 이것은 병원에 많이 보는 거예요. 심장이 멈춘다든지 두뇌가 멈췄을 때 사망하는 것, 이것은 인간이 요청하는 겁니다. 인간이 요청한다는 것은 자기 선에서 미리 그 죽음이 주는 외로움과 쓸쓸함을 대비하기 위해서 미리 상상을 해보는 죽음, 인간들이 아는 죽음이라는 것은 기껏 이런 죽음이 다입니다. 그런데 막상 죽음이 찾아오게 되면 파격적이고 충격적이에요. 왜냐하면 우리가 기대했던 그 죽음이 전혀 아니거든요. 내가 생각했던 죽음, 숨 끊어지는 그것이 죽음의 다가 아니었어요.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었어요. 그것은 허상이었습니다. 진짜 죽음은 어디서 나오는가? 진짜 죽음은 바로 예수님의 죽음에서 진짜 죽음이 나타납니다. 아버지여,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나님 앞에 버림받는 그 죽음, 그 죽음이 진짜 죽음입니다. 그 진짜 죽음을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최종적으로 알려줬지만 그 이전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만드시고 이스라엘 나라와 더불어서 하나님이 진짜 알고 있는 사망의 힘을 그 이스라엘에 담아서 신약까지 죽 끌고 왔습니다. 그 끌고 온 내용이 출애굽기 21장 12-14절에 나옵니다. “사람을 쳐 죽인 자는 반드시 죽일 것이나 만일 사람이 계획함이 아니라 나 하나님이 사람을 그 손에 붙임이면 내가 위하여 한 곳을 정하리니 그 사람이 그리로 도망할 것이며 사람이 그 이웃을 짐짓 모살하였으면 너는 그를 내 단에서라도 잡아내려 죽일찌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도피성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제가 이 본문을 골라잡은 이유가, 하나님에 의해서 일어난 살인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도피성에 피하게 되면 그 사람을 죽일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만이 아시는 죽음, 인간들이 아무리 해도 모르는 그 죽음은 옛날 이스라엘나라를 통해서, 율법을 통해서 어떻게 알려졌는가? 그것은 도피성을 통해서 알려졌습니다. 이 도피성을 통해서 죽음이 어떻게 나타나는가? 하나님이 계획하는 바에 의해서 사람이 죽게 된 그 죽음 속에서만 진짜 죽음으로 우리에게 나타나는 겁니다. 창세기 2장에 보면 에덴동산에 선악과를 심어 놓고 죽음의 기운을 심어놓았어요. 그게 선악과인데 선악과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했습니다. 그 의미를 인간은 몰랐지요. 나중에 이스라엘을 통해서, 십자가를 통해서 알게 되었는데 그게 뭐냐? 하나님께서 인간을 가지고 죽음이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에덴동산에 인간을 만들어서 세워놓았다는 겁니다. 그게 하나님의 뜻이에요. 인간이 죽는 것이 아니고 죽음을 살리기 위해서, 죽음을 생생하게 살도록 하기 위해서 보조물로서 인간을 에덴동산에 만들어놓은 거예요. 인간은 죽음을 설명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겁니다. 인간을 죽기 위해서 만들어놓은 거예요. 죽음이 무엇인가, 죽음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알기 위해서 인간을 만들어놓고 인간으로 하여금 따먹지 않으면 안 되게 만들어놓은 거예요. 그리고 인간은 그것을 따먹었고 그 따먹은 속성이 DNA를 통해서 인간대대로 전해집니다. 그것이 살인자의 피에요. 모든 인간은 자기한테 손해를 끼치면 남을 죽이고 싶어요. 꼭 칼 들고 죽여야만 살인이 아닙니다. 남이 미워져요. 그 미워지는 것, 형제를 미워하는 것이 곧 살인이 되는 겁니다. 마태복음 5장에 나옵니다. 인간은 죽기 위해서 태어났고 죽기 위해서 태어난 인간은 죄를 저질러야 되는 겁니다. 죄 덩어리로서 살아야 될 이유는 인간이 죽음을 설명하는 재료가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간이 살았다고 하지만 사실 산 것이 아니고 죽음을 중간에 두고 세월이 그 주위를 칭칭 감아놓은 거예요. 감아놓았다가 나이가 들면 속에 있는 죽음의 힘이 발휘되면 제일 바깥의 층부터 뜯겨져 나가지요. 기왓장 뜯겨져 나가듯이, 뒤꿈치 각질이 뜯겨져 나가듯이 자꾸 뜯겨져 나가는 거예요. 30대는 생생한 것 같아도 40부터 점점 더 멀어져 갑니다. 50, 60 점점 더 뜯겨져 나가다가 80되면 다 뜯겨져 나가지요. 죽음의 힘이 그만큼 센 거예요. 죄지어서 죽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이 죄를 짓게 해요. 죽음의 힘, 그걸 죽음충동이라 하는데 그 죽음충동을 인간이 막을 수 없어요. 죽음충동을 인간이 막을 수 없다는 말은 죄 짓고 싶은 마음을 인간이 맨홀 뚜껑으로 덮을 수가 없어요. 터져 나오고 폭발하는 그 죄를 인간이 무슨 수로 덮습니까? 아무리 착한 일을 해도 착한 일을 하는 그 현장에서도 죄가 나오는데요. 어느 한 순간도, 혼자 있어도 죄를 짓고, 둘이 있어도 죄를 짓고, 셋이 있으면 죄를 더 짓고. 이게 사도바울이 현실을 설명하는 방식이에요. 아까 말한 출애굽기 21장 12절에서 14절을 보면, 인간은 아무리 죄를 짓고 죽어도 죽음을 모르는 상태에서 죄를 짓고, 죽음을 모르는 상태에서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하나님의 율법이 필요하고 율법과 죄는 직접 만나야 돼요. 그래서 율법이 쏘는 것은 죄고 죄가 쏘는 것은 율법이 된다는 그 말입니다. 인간은 빠져야 돼요. 인간은 들러리에 불과합니다. 사망은 율법을 향해서 화살을 날리고 율법은 죄에 대해서 화살을 날리는 겁니다. 율법이 죄에 대해서 날리는 화살 속에는 누가 담겨 있는가? 예수님이 실려 있어요. 예수님이 사망을 이길 겁니다. 저주는 율법을 향하여 화살을 쏩니다. 왜? 모든 것을 몽땅 죽음으로 접수하기 위해서, 죽음으로 점령하고 다스리기 위해서. 그러니 인간은 그냥 빠지면 돼요. 나는 빠지면 돼요.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것은 다 내 덕이다, 이런 소리만 안하고 빠지면 돼요. 그냥 들러리 한 겁니다. 인간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에요.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걱정은 왜 그렇게 늘어지게 하는지. 염려는 왜 그렇게 많이 하는지. 한숨을 푹푹 쉬고. 인간은 왜 아무것도 아닌가? 있으나 마나한 존재입니다. 나 하나 없다고 해서 북핵문제 해결 되고 안 되고 아무 상관없어요. 나 하나 오래 산다고 해서 브렉시트 해결된다거나 그런 것이 없습니다. 이 세상 돌아가는데 돌멩이만도 못한 인간이 세상염려는 혼자 다하고. 사드문제에는 왜 그렇게 관여하는지. 아무것도 아닌 것이, 성주 사람들도 아니면서 왜 그렇게 간섭들을 하는지. 도피성에 가게 되면 하나님께서 계획한 바에 의해서 살인을 한 사람은 그리로 도망을 가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께서 살인하면 죽이라고 했습니다. 출애굽기 21장을 제가 읽어드렸잖아요. 죽여야 되는데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서 살인을 하게 된 사람은 절대로 죽여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이 말은, 살인 죄, 뭔가 사람을 죽였다는 그 죄에 대해서 일괄적으로 죽이라는 그 법칙은 예외규정이 있다는 겁니다. 그 예외규정을 통해서 인간의 죄와 죽음의 진수를 앞당겨서 이스라엘나라에게 알려주는 겁니다. 하나님의 계획대로 사람을 죽였다는 말이 뭐냐? 도끼질을 하는데 도끼날이 우연히 빠져서 옆에서 나물캐던 아주머니가 맞아죽었을 때 그 아주머니의 가족들이 와서 “네가 죽였지?” 하고 달려들 거잖아요. 그렇게 고의도 아니고, 사적인 아무 감정도 없었고, 그저 우연히 그런 일이 일어났을 때는 도피성으로 들어가야 돼요. 들어가게 되면 제사장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제사장이 죽을 때까지는 도피성에서 나오지 말고 그대로 살아야 돼요. 이 말은 뭐냐 하면, 그 제사장 덕분에 죽어야 될 제가 커버되고 있는 겁니다. 죄가 뭐냐, 죽음이 뭐냐 하는 이것은요, 오늘 설교에서 제일 중요한 대목입니다. 이미 죄를 해결하고, 죽음을 이기고 해결한 분과 함께 있을 때만 알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지금 죽어가는 입장에서는 죽음을 모르고, 죄 짓고 있는 때는 죄에 대해서 몰라요. 그러나 죄 짓고 있어도, 죽어가고 있으면서도 이미 내 죄에 대해서 기억치 아니하시고, 내 죄에 대해서 묻지도 따지지도 아니하시고, 이미 우리가 죽었지만 살려주시고 부활해 계시는 그분과 함께 있을 경우에만 죄와 죽음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서만 이 세상에 찾아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겁니다. 내가 죽는 것도 하나님의 계획의 일부였고, 내가 죄 짓는 것도 하나님의 계획의 일부에요. 이제야 말한다. 죄 지었으니 이번 주에 저주받겠지, 이런 소리 하지 마세요. 인간은 빠지세요. 모든 것 하나 주님의 계획 없이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게 사도바울의 복음, 기쁜 소식이에요. 예수 믿고 착하게 살아서 복 받자, 이런 것은 복음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그것은 다 거짓말입니다. 그런 것은 없어요. 예수 믿으면 죽어도 부활한다, 다 거짓말입니다. 그런 것은 다 자기가 예상하는 죽음을 자기 쪽에서 미리 해결하려는 것으로 다 거짓말이에요. 진짜 찾아오신, 우리가 요청하지 않았는데 그냥 막 들이닥친 그 죽음은 반드시 죽음 홀로 오지 않고, 죄 홀로 오지 않고 반드시 하나님의 약속과 더불어서 우리에게 찾아오게 되어 있어요. 그 약속된 분이 십자가 지심으로서 이미 해결 난 거예요. 하나님의 율법은 어디서 등장하느냐 하면, 출애굽기 24장 4절에서 8절을 보겠습니다. “4.모세가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기록하고 이른 아침에 일어나 산 아래 단을 쌓고 이스라엘 십 이 지파대로 열 두 기둥을 세우고 이스라엘 자손의 청년들을 보내어 번제와 소로 화목제를 여호와께 드리게 하고 모세가 피를 취하여 반은 여러 양푼에 담고 반은 단에 뿌리고 언약서를 가져 백성에게 낭독하여 들리매 그들이 가로되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모세가 그 피를 취하여 백성에게 뿌려 가로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율법이 어디에서 등장하느냐? 열 두 지파와 피 사이에 율법이 등장해요. 그 말이 뭐냐 하면, 율법은 이스라엘 사람을 통해서 피가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그들을 역할자로 삼아서 피를 설명하기 위해서 율법이 앞서서 열 두 지파에게 찾아온 거예요. 설명해도 잘 모르겠지요? 갈라디아서 3장 17절을 보면 아실 거예요.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의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 삼십년 후에 생긴 율법이 없이 하지 못하여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 만일 그 유업이 율법에서 난 것이면 약속에서 난 것이 아니리라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에게 은혜로 주신 것이라.” 이 말이 뭐냐 하면, 원래 하나님의 약속이 바탕에 있어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가 바탕에 먼저 깔렸어요. 그 “믿음으로 살리라”가 바탕에 깔렸는데 사람들이 그 내용을 모르잖아요. 알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이 땅에 열두 지파를 만들어 놓고 열두 지파가 뭘 만나는가 하면, 율법을 만나게 되어 있어요. 몇 년 후에? 430년 후에. 아브라함에게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네가 아무 행함 없이 믿음으로 의인이 된다.”는 것을 미리 밑밥을 깔아놓고 그 위에, 왜 아무 행함도 없이 믿기만 하면 구원되고 천국 가는지를 설명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필요했고 그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준 거예요. 그러면 이스라엘은 뭐냐? 율법을 실은 화물객차라고 보면 됩니다. 뒤에는 아브라함의 언약과 앞에는 예수님의 새 언약, 예수님의 십자가 피가 있고. 율법의 완성이 피거든요. 피를 머리로 하고 그 뒤에 줄줄이 율법들이 있어요. 율법들이 굉장히 많아요. 율법들이 줄줄이 긴 객차를 이루어서 따라가고 있습니다. 그 율법들이 주어지면서 그 율법이 우리 내부에 장착되어 있는 죄, 그리고 사망과 접촉하도록 되어 있어요. 인간은 원래 죽도록 되어 있다는 말이지요. 죽도록 되어 있는데 자꾸 살고자 하는 거예요. 그것은 악마가 자꾸 “네가 살았다. 네가 죄지어도 괜찮아. 지금 네가 숨 쉬고 있잖아. 그러니 너는 산거야.” 자꾸 거짓말을 하는 거예요. “산자가 예수 믿으면 영원히 계속 삽니다.” 이런 식으로. 이미 죽음부터 출발해야 돼요. 지난 시간에 한 것 다 잊었지요? 사람이 살다가 죽었다가 다시 사는 것이 아니고 썩어짐을 경유해야 돼요. 늙으면 늙어야지, 그게 아니고 썩어지는 이유가 있어야 돼요. 그게 죄 때문에 썩어지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현실을 설명할 때 썩어진 것, 그 다음에 죄, 율법, 사망, 이것가지고 설명하시는 거예요. 고린도전서 15장 53절 보겠습니다.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사도바울이 본인을 설명하면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나는 사도다.” 그렇게 하지 않고 “이 썩을 것”이라고 해요. 흔히 욕을 할 때 “이 썩을 놈아!” 하잖아요. 저는 평생 욕 해본 적이 없습니다만 성경을 빙자해서 할 수 있습니다. “이 썩을 놈아.”라고 하잖아요. 그 말이 맞아요. 그런데 썩을 놈에서 멈추지 말고 “왜 썩을 놈이 썩는데요?” 이렇게 설명과 결부가 되어서 썩을 놈을 알아야 돼요. 죄 때문에 이 썩을 놈이 돼야 돼요.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거울만 보지 말고 장례식에 가끔 가라는 그 말입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이 썩을 것입니다.” 하면 게임자체가 안되지요. “나는 아무개”라고 보통 하는데 “이 썩을 것, 이 죽을 것.” 세상에서는 안 되지만 주님 안에서는 이 게임밖에 없어요. “당신은 누구십니까?” 주님이 물으면 “이 죽을 것, 이 썩을 것.” 이렇게 주님 앞에 답변해야 된다는 말이지요. 왜 죽을 것, 썩을 것이라고 답변해야 되느냐 하면, 근심 걱정은 다 부질없는, 마귀가 준 헛되고 무거운 짐이기 때문에 그래요. 썩을 것이 왜 근심을 하고 죽을 것이 왜 걱정을 합니까? 납작한 각질, 그래서 그저 뜯겨져 나가는 존재가. 무슨 나라를 구하겠다고. 무슨 나라를 구합니까? 직장생활 하면서도 자기가 회사 다 살릴 것처럼. 자식걱정을 해도 자식을 살리지를 못해요. 부모라고 해서 자식을 못 살립니다. 자식은 자기 맘대로 살 수밖에 없어요. 나도 썩었고 자식도 썩었고, 나도 죽었고 자식도 죽어가고 있고, 그것뿐이에요. 잘난 인간들, 삼성그룹 이 회장은 언제 입원했는데 아직 깨어나지도 못하고 있어요. 살았는지 죽었는지 경계선에 있는지 분간도 안돼요. 그렇게 죽을 것을 회사걱정을 왜 그렇게 한 거예요. 사람의 걱정근심이라는 것은 내가 살았다고 착각하기 때문에 생긴 겁니다. 내가 살았다고 착각을 해버리면 이 복음으로 세상현실을 설명할 길이 없어요. 54절 끝에 보면, “사망이 이김의 삼킨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라고 했는데 사망이 이김의 삼킨바 된다, 말을 참 복잡하게 하지요. 그냥 “예수님의 부활이 사망을 이긴다.” 이렇게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는 문제잖아요. “예수님의 부활로 사망을 이겼습니다.” 이렇게 쉽게 할 수 있는 것을 가지고 사도바울은 “사망이 이김의 삼킨바 되리라.” 이렇게 이야기해요. 그 이유가 무엇인가? 인간은 그 출발점을 사망으로부터 해야 되기에 그렇습니다. 뭔가 당하고 있다는 것, 걱정근심하고 있다는 것은 지금도 죄와 사망의 힘에 눌려 살고, 숨도 못 쉬고, 턱턱 숨이 막히면서 살고 있는 겁니다. 근심 걱정 때문에 숨도 못 쉬고 살아요. 그러니까 “너는 지금 주님, 주님, 하지만 사실은 죄에 삼킨바 되어 있다. 죄에 삼킨바 된 그 죄를 오히려 주님의 생명, 부활이 너를 삼킨 그 사망마저 위층에서, 다른 층에서 삼키고 있다.”는 그 말입니다. “죄 지어라. 죽어가라. 하지만 너의 불법에 대해서, 죄에 대해서 기억치 아니하리라.” 하는 그것이 하나의 힘으로서 너를 삼키고 있는 거예요. 우리는 이중으로 삼킴을 당하고 있는 겁니다. 먼저는 죄와 걱정 근심에 매일 같이 삼켜지고 있고, 그런데 나에게 일찍 찾아온 죽음에 의하면 십자가의 용서에 의해서, 사랑에 의해서 또 삼킴을 당하고 있으니 우리는 제대로 세상을 설명할 수 있는 사도바울과 동기생이 되는 겁니다. 같은 성령을 받은 성도가 되는 겁니다. 키르키즈스탄이라는 나라의 여행 비디오를 보니 ‘오시’라는 도시가 있어요. 솔로몬에 거기에 몇 번 다녀가면서 기도를 했답니다. 실크로드 가는 여정에 있는 도시에요. 솔로몬이 다녀갔다는 그 사원에 움푹 파인 곳이 있는데 솔로몬이 하도 기도를 많이 해서 무릎이 닿은 자리라는 겁니다. 이슬람 신자들이 거기서 두건 두르고 예배를 드립니다. 솔로몬이 기도한 장소에서 기도를 하게 되면 효험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들을 하지요. 그러나 제가 보기에는 뭔가 앞일에 대해서 염려하고 걱정하고 있다고 보입니다. 그리고 염려와 걱정을 하고 있다는 것은, 본인이 아직까지 안 죽고 살아 있다고 착각을 하고 있는 거예요. 사망의 삼킴을 받았으면 이미 죽은 거예요. 뭘 해도 죽을 수밖에 없는 행동만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입니다. 뭘 해도 죽어요. 그런데 우리 힘으로 이 걱정근심을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보고 자꾸 나가래요. 우리는 나가고 우리가 나간 자리에 예수님이 그냥 들어와 버리면 우리는 뻔히 뭘 보느냐 하면, 악마와 예수님의 싸움을 바라보면서 누가 이기고 누가 졌는지를 보여주는 증인이 되는 겁니다. 쉽게 이야기하겠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졌잖아요. 양쪽에 두 강도가 있습니다. 한쪽의 강도는 예수님이 황당한 짓을 하고 있다고 삐졌고 다른 쪽 강도는, 예수님 나라에 갈 때 저를 생각해 달라고 했을 때에, 내가 강도질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예수님이 바로 죽음에서 승리하신 분이라는 증인이 되기 위해서 그동안 강도질을 하면서 평생토록 살다가 지금 예수님과 붙어서 고백하는 관계에 있게 되었다고 고백하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이 “네가 오늘 밤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했던 거예요. 같은 강도질을 했어도 현실을 보는 방식이 다르고 관점이 달라요. 성도는 별 다른 것이 없어요. 교회 열심히 다닌다고 해서 성도 되는 것이 아니에요. 세상 보는 관점이 달라요. 세상을 한꺼번에 보는 겁니다. 어떻게? 아무런 걱정과 근심을 할 이유가 없어요. 제가 걱정근심이 생겨난다는 그것을 부인하는 것이 아닙니다. 생겨나게 되어 있어요. 내일 일을 걱정하고 염려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걱정과 염려를 해 보세요. 그 순간 나는 어떤 미신적인 흔적을 남기는 겁니다. 키르키즈스탄의 그 사원, “주여, 제가 솔로몬이 기도했던 그 효험 있는 장소에까지 왔으니 기도의 효험을 보게 하옵소서.” 벌벌 떠는 거예요. 피디가 그 사원에서 나와서 보니 바위에서 미끄럼을 타는 것이 있거든요. 그 마을 사람들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거기서 세 번 미끄러지면 어떤 병도 낫는다고 되어 있습니다. 갓 바위와 비슷해요. 그걸 보고 느낀 것은, 그게 바로 모든 인간의 종교적인 흔적이잖아요. 그렇다면 인간이 살아가는 것, 신자든지 불신자든지, 소위 교회를 나오는 사람이든지 아니든지, 사실은 찝찝한 것을 해소하려는 미신의 흔적, 죄의 흔적, 사망의 흔적들로 지금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지 말자는 거예요. 성도는 절대로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어떤 방식으로. 이미 죽은 자이기에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지 말자고 해놓고 또 그럴 수밖에 없다고 하니 앞뒤가 안 맞는데요. 이미 죽은 자이기에 운전대 잡고 기도도 하게 되지요. “주여! 5만 원짜리 안 걸리게 하소서.” 그런 식으로 하는데 그 모든 것이 미신인 것을 알고, 그럴 줄 알고 그럴 수밖에 없는 우리가 죄인 중에 괴수인 겁니다. 그래서 제가 내린 결론은 이겁니다. 재미로 걱정합시다. 그냥 재미로. 어차피 세상은 다 거짓말입니다. 우리도 늘 거짓말 하고 있고. 거짓말은 거짓말대로 하시되 재미로 거짓말 하시고, 재미로 염려하시고, 재미로 걱정하시되 기본은 생명입니다. 이미 예수님이 십자가를 겹겹이 둘둘 감아 있는 우리의 팔 다리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하나님 아버지, 이미 현실이 이렇다 하고 확정이 난 입장인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말씀에서 얼굴만 돌리면 시작되는 것이 염려고 걱정입니다. 더 살아야지, 건강해야지, 돈 벌어야지, 그거 외에는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것, 궁극적인 해답도 모르고 살아가는 것, 이제부터는 이미 해답을 알고 재미로 걱정과 근심을 해보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