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1장 17절(가락-세계관)160621b-이근호 목사
요한복음 11장 17절(가락-세계관)160621b-이근호 목사두 번째 시간 합시다. 첫 번째 시간에서 이미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원리에서 모든 것이 해명이 되었습니다. 우주라는 것은 관계망이고 관계망 속에서 에너지가 직결되는데 어떻게 직결이 되면 지렁이가 되고 어떻게 직결이 되면 달팽이가 되고 어떻게 직결이 되면 그건 원숭이가 되고 또 어떻게 직결이 되게 되면 인간이 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인간이라는 것이 언제까지 인간이 될지를 몰라요. 왜냐하면 이 세상에 곧 제 3의 인류가 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은 항상 있기 때문이지요. 그게 바로 진화론적 사고방식입니다. 진화론적 사고방식은 말로는 똑바로 가는 것 같은데 똑바로 가는 게 아닙니다. 결국 질서는 회귀한다. 언젠가는 비스므리한 것들이 다시 온다. 똑같은 것은 아니지만. 비동일적인 것이 계속해서 똑같이 돌아온다. 이것이 불교요 물리학이고 현재 이 세상의 진화론자들의 종교입니다. 무엇이 영원한 게 아니고 영원함 자체가 계속 돌아오는 거지요. 특정 인간이나 물체가 돌아오는 게 아닙니다. 그냥 돌아옴이 반복되니까 한 번 돌아올 때마다 거기에 속해있던 인간과 개, 돼지, 자연, 꽃이 전부 돌아오는 거에요. 지구도 깨졌다가 다시 지구가 될 수도 있고, 달도 없어졌다가 다시 만들 수 있고, 이게 현대 천문학입니다. 지금 학생들은 그렇게 배우고 있어요. 모든 것은 시작도 없고 끝이 없는 거에요. 그런데 그러한 물리학의 바탕 위에서 인간들이 만든 인문학, 윤리, 도덕, 경제학, 사회, 양심 이런 것들은 어떤 사고방식이냐 하면은 모든 게 힘이니까 그냥 모을 때 바짝 모으고 호강하다가 죽을 때 그냥 죽으면 그만인 거에요. 그걸 제가 아메바라고 했지요. 아메바하고 똑같아요. 뭔가 꿈틀거릴 때는 생명인 줄로 알았지만 장례식에 가 봤지요? 죽고나니까 아무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그 동안 잠시 몸을 움직인 것이 80년이거든요. 이게 무슨 의미가 있어요?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마라.”라고 했어도 옛날 사람이라 지금은 흙이 되어 가지고 있잖아요. 모든 인생은 마찬가지거든요. 그래서 물리학의 기초가 되는 생물학에서 보면 딱 한 가지만 중요해요.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은 번식입니다. 이것은 모든 것에 보편적인 거에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원리에 입각한 우주관에 있어서, 모든 질서들이 뭉치고 흩어지고 뭉치고 흩어지게 하는 것을 다른 말로 하면 번식이라고 하는데 이 번식을 하기 위해서는 짝짓기가 필요해요. 이 짝짓기를 사랑이라고 하고 이 사랑이 드라마의 주제가 되고 우리가 이것을 보고 재미있어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따지고 보면 이것은 자기 종을 번식하는 겁니다. 이걸 도킨스는 번식이라고 하지 않고 DNA의 자기 확산이라고 했습니다. 도킨스는 말하기를 인간이 DNA를 갖고 있는 게 아니고 DNA가 자기의 티를 낸다고 인간이라는 바깥의 단백질 덩어리를 만들어냈다라고 이야기했어요. 그 도킨스의 멱살을 쥐고 흔들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왜? 마음에 안 들면 애기가 있을 때 DNA를 끄집어내가지고 태아의 DNA를 바꿔치기 하게 되면 천재가 돼요. 그러니까 도킨스의 말이 맞는 거에요. 이제는 맞춤 DNA를 할 거에요. 왜 그렇게 못하지요? 돈이 없어서 못하는 거에요. 또 돈이에요. 결국 돈이 없는 사람은 맨날 바보가 되고 돈이 있는 사람이라면 태아를 조사해가지고 천재적인 DNA로 바꿔치기를 해가지고 짜깁기 인간을 만들 거에요. 그걸 제 3의 인류라고 합니다. 인간이 기계를 이용하는 게 아니고 인간이 자진해서 기계가 되는데 그냥 우리가 생각하기를 ‘기계’라고 하면 딱딱한 느낌이 들잖아요. 그 기계라는 말 대신 맞춤 DNA를 집어넣으면 기계도 아니면서 이미 조작된 인간이 인간을 위하여 지금 다니고 있습니다. 단 조건이 있는데요. 그것은 이윤이 남아야 돼요. 그러니까 자본 시장에서 그런 연구도 돈이 될 때에만 그게 연구거리가 돼요. 거기에 무슨 예수 복음이 필요하고 기독교나 교회가 왜 필요해요? 그런 게 아무 필요가 없어요. 그냥 DNA 알고 돈 벌고 그냥 사는 대로 살다가 아메바처럼 죽으면 그만이에요. 나쁜 짓은 안 들키면 돼요. 들켰다면 검사장에게 돈 1억을 먹이면 되는 겁니다. 뭐든지 다 돈으로 때우면 돼요. 돈으로 말이에요. 내가 흥분할 것이 없이 자연스럽게 그렇게 돌아가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말입니다. 여기 24절에 보니까 “마르다가 가로되” 그 다음에 나오는 말이 무엇입니까? “마지막” 예수님은 이 시대를 “마지막”으로 봐요. 그러나 이런 종말이라는 것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원리에서는 안 나온다는 겁니다. 종말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하면 구약의 이스라엘이 받았던, 모세가 시내산에서 받았던, 그 계시 안에 종말이 들어있어요. “마지막 때”. 아인슈타인에 의하면 마지막 때는 비극적이고 겁나는 거에요. 왜? 살아있는 것의 존재를 무가치로 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무엇이 희망이 있느냐 하면은 고저고저 마지막 때가 오기만을 기다려요. 왜? 그날이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유대인들은 잘못 생각했지만, 잘 생각했든 잘못 생각했든 간에 그들의 희망은 마지막 때,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에요. 그것은 유대인들도 그렇지만 교회도 마찬가지에요. 요한계시록 마지막에 나오지요. 그러면 제가 여기에서 이야기할 것이 있어요. 지금 예수님께서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찾아오셨잖아요. 그러면 인생관(사고방식)을 바꿔야 되는데 어떻게 바꿔야 됩니까? 그냥 “예수 믿고 행복하게 삽시다.”가 아니라 (오빠가 마지막 날에 살리라는 그런 시간 개념의 마지막 때가 아니고) 예수님은 지금이 마지막 때라는 것을 알려주는 세계관으로 지금 바꾸기 위해서 오빠를 죽인 겁니다. “다니엘에도 보면 마지막 때에 무덤에 있는 자들이 무덤을 열고 나오잖아요. 우리도 그 정도는 압니다. 오빠가 죽었지만 마지막 때에 부활하겠지요.” 그러면 주님께서 “아니야, 그건 아니야. 그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야. 그 이야기가 잘못 된 거야. 지금 예수님이 너와 함께 있는 이 순간, 지금 이 순간이 마지막 때야.” 도대체 사고방식을 어떻게 바꿔야 예수님의 이 말에 대해서 동의가 될 수 있겠어요? 뭐부터 바꿔야 되겠지요? 그것 바꾸기를 지금부터 한 번 시작을 해봅시다. 이제부터 지금이 마지막 때라는 사실을 해봅니다. 마지막 때는 하나님의 언약 안에 들어있습니다. 언약이 완성이 되게 되면 그 안에 이사야의 예언이 들어 있어요. 이사야의 예언에 보면 사자와 소가 어린아이와 같은 굴에서 놀고 라고 되어 있어요. 이사야 65장도 그렇고 이사야 30장 마지막에도 그렇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이사야가 예언한 모든 개념은 어디에서 나왔느냐 하면은 에덴 동산을 모델로 삼았어요. 에덴 동산처럼 만들어준다고 하는 겁니다. 이사야가 그런 이야기를 할 때 앞에 조건이 있어요. 죄가 없어야 되는 조건이 있어요. 그렇게 보게 되면 이사야가 그런 예언을 할 때 마지막 때는 어디에 있느냐 하면은 마지막 때는 나중에 오는 게 아니고 마지막 때라고 이야기하는 그 말씀 안에 이미 들어있는 거에요. 이것이 들어있는 것을 쉽게 설명하기 위해서 제가 이렇게 하겠습니다. 바람이 없는 원형 풍선 안에 옥수수 한 알을 넣었다고 합시다. 바람이 안 들어갔습니다. 옥수수 알은 그대로 있고요. 여기에서 바람을 휙 불었다면 바람이 들어가니까 풍선이 커지겠지요? 풍선이 커지면서 옥수수 알은 그대로 있겠지요? 이렇게 풍선에 바람이 안 들어갈 때는 2차원이 됩니다. 그리고 2차원은 안과 밖이 성립이 안 돼요. 그런데 풍선에 바람을 넣으니까 (옥수수 알은 분명히 풍선 안에 들어있습니다.) 풍선이 커짐으로 말미암아 풍선 밖은 밖이 되지요. 이것이 뭐냐 하면은 예수 안과 예수 밖이라는 복음을 만들기 위해서, 지금은 공생애 십자가를 지기 전이기 때문에, 2차원적인 옥수수 알로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에 들어오신 거에요. 그러니까 여기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목수의 아들이고 아무리 보아도 평범한 보통 사람이니까 (마태복음에 성령이 임했다고 하지만 그것은 나중에 성령이 임해서 해석해야 되는 것이고) 이때는 예수님 중심으로 새로운 안과 밖을 조성하지를 못하는 거에요. 조성하지 못한다는 말은 기존의 인간들이 알고 있는 세계관에 그냥 예수님이 한 명 더 추가해서 들어온 것으로 생각하는 거에요. ‘당신이나 우리나 똑같으니까..’ 이렇게 생각을 한다 이 말이지요. 그러면 예수님이 오실 때에 사람들은 예수님하고 2차원으로 한 통속이니까 같이 봅시다. 땅 위에 예수님이 사시고 사람들이 섞여 있고 시장바닥에 열두 제자가 같이 있다고 합시다. 그런데 유대인들의 사고방식은 언약대로 이루어지게 되면 땅 위의 나라는 천국이 된다. 하나님 나라가 된다고 생각한 거에요. 심지어 세례 요한도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라고 했지요. 그러니까 지금 유대인들이 천국을 기다린 거지요. 아까 천국이 뭐라고 했습니까? 두 번째 강의 제일 처음에 했는데요. 마지막 때만 되면 그 동안 고생한 것이 다 씻어지는 거라고 했지요. 왜? 이사야 30장과 65장에 보면 그 멋진 나라가 있으니까 모든 이 땅에서 고생한 것, 설움 받는 것을 깔끔하게 다 잊어버리는 거에요. 특히 시편 말씀에 보면 “할렐루야 마음껏 찬양하고 하늘에는 하나님의 성전이 있고 성전에서 복을 받고 그래서 성전에 문지기로 있는 것이 세상 밖의 천 날보다 나으니라“라는 시편 84편 말씀이 있잖아요. 그리고 시편 23편에 보면 뭐라고 했어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를 사투리 버전으로 해가지고 돌아다니는 모양인데요. 부흥사들이 그걸 경상도 말로 하고 전라도 말로 하고 이북 말로 해가지고 유튜브에 돌아다니는 게 있어요. 그런데 거기에 보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되어 있다 이 말이지요. 그러니까 그것은 뭘 기대한다는 거에요? 언젠가는 우리의 왕이 되신, 다윗의 자손, 우리의 메시아가 오게 되면 여기 시편 23편에 나오는 모든 말씀은 누구의 것이 된다? 우리의 것이 된다는 거지요. “마지막에 내 상이 흘러 넘치리라” 세상에, 상다리가 흘러 넘친다는 말이거든요. 그러니까 그 동안 아무리 수모를 당하고 이방인에게 억압을 받아도 무슨 믿음만 있으면 된다? 오신다. 오신다. 누가 오신다? 다윗의 혈통, 다윗의 자손이 오면 된다. 다윗의 자손의 계통이 뭐냐 하면은 이스라엘의 왕들이에요. 그 사람들이 다 유다의 혈통이라고요. 그리고 유다 혈통이 다 하고 난 뒤에는 사독부터 해서 이미 피가 섞여가지고 혼혈아가 되었거든요. 혼혈아들인데 억지를 부려요. 그래도 유다지, 유다 자손에게.. 자꾸 찾는 겁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예수님한테 “네 고향이 어디냐?”라고 묻는 겁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오느냐?” 적어도 메시아가 나오려면 유다의 고향에서 나와야 돼요. 유다의 고향이 어디입니까?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야지 저 강원도 촌 동네에서 메시아가 왜 오시지? 그래서 예수님을 그런 식으로 또 배척한 거에요. 그래서 성경을 보면서 기존의 그들의 세계관이 이미 짜여져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둬야 돼요. 오늘날 21세기 현대인이 성경을 보니까 왜 이것이 충돌이 되는 말이고 왜 이것을 가지고 화를 내는지 이해가 안 되잖아요. 성경은 이스라엘이 고대하고 기대하던 바, 그것은 언약이 이루어지는 그날, 그 마지막 때가 되게 되면 자기 나라 이스라엘 백성을 빼놓고 다 지옥에 가요.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른 나라하고 차이점이 있습니다. 그들은 할례를 받은 사람들이에요. 창세기 17장에 보면 “할례를 받은 자는 끊어지지 아니하리라”라고 되어 있어요. 약속에 말이에요. 아브라함에 속한 자손은 할례를 행함으로써 거룩한 백성이 되는 겁니다. 할례 하고 또 에스겔에 보면 뭘 합니까? 안식일은 영원해요. 그 두 가지만 하면 돼요. 안식일을 지키고 할례를 행하면 되는 거에요. 만약에 이방인들이 천국에 가고 싶다면 두 가지만 하면 돼요. 그것은 할례를 행하고 안식일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러면 되는 겁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에요. 지금도 유대인들이 다른 사람을 보고 구원을 받고자 한다면 이 두 가지를 꼭 지켜야 된다고 해요. 그런데 골로새서에 보면 사도 바울이 뭐라고 했습니까? “할례 같은 소리를 하고 있네. 또 뭘 해? 안식일? 복음 앞에서 그걸 왜 지켜야 되는데?” 이렇게 나와요. 제 말이 아닙니다. 골로새서 2장에 나와요. 그것은 다 허물어져야 될 거야. 그것은 부숴버려야 돼.“ 부숴버려야 될 것이다 이 말이지요. 그런데 교회를 보세요. 주일 성수하지요. 부숴버려야 될 십일조를 지키지요. 갈라디아 4장에서 사도 바울이 이렇게 말했어요. “너희들이 그런 것을 지키면 내 복음이 헛될까 하노라”라고 말이에요. 사도 바울은 완전히 가슴을 치는 거에요. 귀한 것을 줬는데 그들은 깔고 앉는 거에요. 완전히 모독하고 있는 겁니다. 마치 개국 초기에 서양 사람에게 요강을 선물하니까 요강에다가 밥을 말아먹는 것과 똑같은 겁니다. 복음의 용도를 몰라요. 복음은 이런 것(안식일, 할례)을 다 버리라고 준 용도인데 그들은 십자가에다가 안식일 지키고 십일조도 하고 율법도 다 지키고 (그것을 다 지키지도 못하면서도) 사도 바울이 지키라고 했으니까 그것을 다 지킨다고 해요. 토정선생 이지함이 길을 갈 때 머리에다가 솥을 이렇게 쓴 것을 봤지요? 옥중화라는 드라마에 보면 나와요. 솥을 왜 머리에 씁니까? 기인이지요. 참 이상하지요. 이게 모자가 아니잖아요. 밥을 하는 솥인데. 십자가 복음이라는 것은 내가 뭘 해도 죄가 된다는 것을 알려주는 용도지, 십자가를 소유하라는 말이 아니에요. 주의 능력은 소유의 대상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주님 앞에 소유당해야 되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 예는 비일비재하게 많습니다. 남편이 술만 먹으면 늘 아내를 개패듯이 패가지고 아내는 멍이 퍼렇게 들어서 눈에 안경을 쓰고 있으면서 그 아내가 밖에만 나가면 “우리 남편 돈 많고 우리 남편 장이고..”라고 자랑질을 하는 거에요. 제가 한 이것이 무슨 비유인지 아시겠습니까? 곧 죽어도 자기 남편을 자랑하는 거에요. 우리가 예수님을 자랑한다는 말은 내 소유의 남편이 잘났다가 아니라, “너는 내 남편(우리 주님)을 모르지? 나는 주님 앞에 가면 인간도 아니야.” 그걸 이야기하라고 하는 거에요. 보통 사람들은 스스로 자립하잖아요. 독자적으로 살아요. 그러나 십자가를 아는 사람은 독자적인 그런 건덕지가 없어요. 모든 것이 주님 허락 하에서 움직이고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서 움직이기 때문이에요. 우리가 십자가를 자랑한다는 것은 내 소유가 많다는 것을 자랑하는 게 아니고 맨날 십자가에서 얻어터질 정도로 나 자신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는 사실을 증거케하는 겁니다. 계속 해봅시다. 이렇게 한다고 이해가 되는 것도 아니고요.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 언약이 이루어지는 날이 올 것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언약의 완성자가 이미 들어와 버렸잖아요. 그러면 그들이 언약을 기다리는 이 세계관이 제대로 된 세계관이라는 말입니까, 잘못되었다는 말입니까? 이게 잘못된 거에요. 왜냐하면 기다리지 말라는 겁니다. 왜 기다리지 말라는 것입니까? 기다리게 되면 기다림이 우상이 되고 이게 욕심 덩어리가 돼요. 기다림이 죄가 되는 겁니다. 사람이 죄를 짓는데 그 이유는 뭔가를 기다리기 때문에 그런 거에요. ‘아우, 우리 애가 공부를 잘해야 되는데.. 이번 시험에 합격해야 되는데..’ 그것에 집중해서 보다 보니까 그런 것이 없어도 구원을 받았다는 주님의 사랑과 용서가 오히려 가리워지는 겁니다. 아까 금환일식을 이야기했지요? 달이 태양을 다 가려버렸어요. 그러면 태양하고 달하고 맞장을 뜨면 누가 큽니까? 이건 말도 안 되는데 우리가 보기에는 다 가리니까 달이 대단한 듯 보이지요. ‘내 아들은 이번에 반드시 성적이 올라야 돼.’ 하는 순간, 십자가의 공로를 다 가려버려요. “그런데 왜 자식이 공부를 잘해야 되는데?” “내가 자식을 키운 보람을 맛보기 위해서..” “보람을 왜 맛보아야 되는데?” “그때까지 살아남기 위해서..” 그러니까 이게 마리아와 마르다가 되는 거에요. “오빠는 아파도 안 죽어야 돼.” “왜?” “오빠가 얼마나 주님을 사랑하는데? 주님께서 어서 오셔서 우리 오빠를 살려줄 거야.” 우리 가정만큼 주님을 잘 섬긴 적이 없어요. 오면 거기에서 숙식이 해결되거든요. 마르다는 잡채한다고 바쁘고 마리아는 예수님 앞에서 꼬지 말라고 해도 다리를 꼬고 앉아서 성경을 듣고 있고.. 그 정도로 섬겼는데 오빠가 아프니까 이제는 예수님께서 스케줄 만사를 다 제쳐두고 오셔가지고 “아이구 내 새끼 아팠어요? 어디 한 번 보자.” 이렇게 해줄 줄 알았는데 오빠가 죽고 난 뒤에 왔다는 거지요. 이게 고치기 전의 마리아와 마르다의 세계관이에요. 예수님 때문에 뭔가 좋은 것을 얻을 것이라는 기대감, 목적과 목표가 있다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그 목표와 목적은 누구를 기쁘게 하는 겁니까? 본인이지요. 본인의 세계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해서 해되신 예수님을 본인이 달이 되어서 가린 거에요. 구원을 안 받을 사람이라면 그냥 놔둬버려요. “니 맘대로 하세요.”라고 놔둬버리는데 마르다가 주님을 사랑한 게 아니고 사실은 주님이 나사로 가정을 더 사랑해요. “내 사랑하는 나사로가 병이 들었다”라고 나오거든요. 그러니까 주님이 더 사랑하기 때문에 모가지를 꺾습니다. 손을 댑니다. 한 번 당해보라고요. 저한테 그런 질문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목사님, 복음도 알고 예수도 믿는데 왜 일이 잘 안 됩니까?” 그 사람은 지금 “어디에서 감히 달이, 달 주제에 해를 가려? 비켜.”라고 치우는 과정입니다. 치우실 때 우리는 막 안 치워지려고 하지요. 왜 그런가 하면은 나름대로 음흉하게 노리는 목적이 있어요. 복음을 알아서 나중에 사회에서 내가 인간답게 산다는 것을 과시하려는 희망이에요. “나도 봐. 인간이잖아. 나도 잘났잖아.” 그걸 은근히 노리는 수가 있어요. 그래서 주님께서 그 사람을 치워버립니다. 망해야 비로소 보이는 게 십자가입니다. 나는 목적과 희망을 가질 자격조차 없음을 알 때, 우리는 비로소 죄 속에서 태어난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지요. “그럼 목사님 진짜 망해야 됩니까?” 우리가 생각하는 망한다는 말을 하게 되면은 제가 말을 실수한 거에요. 망한다는 것은 그게 아니고 사도 바울의 경우에는 망하는 것이 기세등등이었습니다. 뭐를 하는 데에 기세가 등등했습니까? 예수를 믿는 사람을 잡아 죽일 정도의 권력자로서 기세가 등등한 그 순간이 망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래서 손만 대면 황금이 들어오고 돈이 잘 벌리고 자식은 “공부가 제일 쉬웠어요.”라고 하면서 밤 새지 말라고 그렇게 말려도 공부를 해서 전교 2등을 하니, 전교 3등을 하니 이게 바로 망하는 순간입니다. “그러면 공부를 못해야 됩니까?” “아니요. 잘하세요. 잘하시고 돈 버세요.” 그리고 이것만 알면 됩니다. “이게 망하는 거구나.” 이걸 하나 추가하시면 되는 겁니다. 참 쉽지요. 공부 잘하고 가정에 아무 문제가 없고 하는 일마다 잘되고 또 미장원에 가면 머리는 왜 그리 잘 나오는지 몰라요. 젊어보이고요. 그러니까 그럴수록 점점 더 ‘다 이게 예수님 믿고 복음을 아는 댓가로 오는 것이구나. 복음의 댓가가 행운이구나.’라고 하면서 새로운 목표를 계속해서 창출하고 만들어내요. 그 다음에 ‘드디어 높이뛰기의 수준을 한 번 올려봐?’ 그러면서 바를 1m 50cm까지 올리지요. 계속 올려나갑니다. 그것 하나하나가 망하는 순간이에요. 우리 가락교회 성도들은 전부 다 망하고 있는 중이에요. 전부 얼굴이 너무 좋아요. 사도 바울은 기세가 등등할 때 그게 망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왜? 주님이 찾아오실 때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라고 하셨습니다. 핍박이라는 말은 못 살게 구는 거에요. 못 살게 군다는 것은 필요치 않다는 거에요. ‘나는 뭐 그렇게 주님이 필요하다고 생각이 안 듭니다.’ 이 순간, 만사가 잘 될 때, 남이 나를 우습게 보지 않고 나한테 겁을 집어먹을 때, 사회적으로 내가 갑이 되고 을이 되지 않을 때, 주님이 그다지 좋아보이지 않고 없어도 살 것 같아요. 내 힘으로 살 것 같아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마르다와 마리아는 반대입니다. “오빠가 없이는 못 살겠습니다.”예요. 오빠가 있는 자리를 없애버렸습니다. 그리고 없어버린 그 오빠의 자리를 누가 차지했습니까? 주님이 들어와 버렸어요. 나중에 알게 돼요. 오빠가 아파서 죽은 것이 아니고 주님이 의도적으로 죽이셨다는 사실을요. 그러니까 원인 제공자가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말이에요. 이유는 간단해요. 사랑하기 때문에 죽여버립니다. 뭘 바꾸기 위해서입니까? 네가 아는 기존의 세계관을 완전히 바꾸기 위해서 마지막 날 부활의 이야기가 마르다의 입에서 나오도록 유도했습니다.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 여기에서 산다는 개념을 마지막 날로 가져가는 것이 아니고 지금으로 바꿉니다. “(누구든지)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라는 말씀은 지금 누구를 보고 이야기하는가 하면은 죽은 오빠 나사로를 보고 이야기하는 거에요. “네 눈에는 지금 나사로가 죽은 것으로 보이느냐? 저게 사는 거다.” 살고 죽음에 구애를 받지 않는 것이 사는 거에요. 누가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은 예수님의 그물망, 예수님의 관계망이기 때문에. 그 앞에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은 25절에 나옵니다. 오늘 본문의 핵심 포인트에 접어들었습니다.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영어로 “I AM”이라고 하지요. “나는 부활이요” 그 다음에 뭡니까? “생명”이지요. 부활이 되려면 전제 조건이 뭡니까? 죽어야 되지요. “나는 부활이요”라는 말의 뜻은 “나의 부활 안에 나의 죽음을 전제로 한다.”는 거에요. 이 죽음을 전제로 하는데 이 죽음이 곧 부활을 이루는 장이 되는 거에요. 하나의 알갱이가 되고 핵심이 되는 거에요. 부활을 이루는 중심 액기스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오빠 나사로가 어쩜 그렇게 예수님의 가는 길을 빼다박았는지, 미리 앞당겨서 오빠가 죽고 오빠가 죽은 그 상태가 부활된 상태이고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이것을 설명해주는 것이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입니다. 이제 제가 차근차근 설명해드리겠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의 세계관 안에 산다, 죽는다는 개념들이 있어요. 그리고 그 개념의 중심은 현재 자기 자신을 살아 있다고 여기면서 나온 개념이에요. 그런데 오빠는 숨을 거두었잖아요. 그리고 나는 아직까지 숨을 쉬고 있잖아요. 숨을 쉬고 있는 나는 살았고 오빠는 그 반대로 숨이 끊어졌으니까 죽은 것이지요. 그런데 이러한 개념에 대해서 이의를 건 다른 사람이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아무도 없지요. 전부 다 한 통속이기 때문입니다. 이걸 아까 2차원의, 바람이 들어가기 전의 풍선이라고 했지요. 똑같아요. 바람이 들어가기 전에 풍선 안에 옥수수 알멩이가 들어온다고 해도 별 의미가 없어요. 옥수수 알맹이가 들어오든, 모래가 들어오든 관계가 없어요. 똑같아요. 그런데 주님이 오셔서 이 풍선을 불어버립니다. 훅 하고 불어버려서 여기에서 주님의 십자가의 효과가 거대한 풍선이 되어버리면 그 안에 있는 사람은 “나는 부활이요 나는 생명이니”의 효과 안에 들어오는 겁니다. 이렇게 설명을 하면 좋습니다. 이해가 안 돼도 조금 참으세요.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산다, 죽는다는 개념은 어디에서 나왔느냐 하면은 개체(본인)에서 나왔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말씀하신 부활, 생명이라는 것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라고 했으니까 예수님 개인에게서 나와요. 예수님 개인에게서 바람을 불어버리니까 개체에서 나오는 의미는 이 개인에 “종속”되어야 된다는 겁니다. 믿는다는 것은 “나는 믿습니다.”가 아니라, “이 예수님의 관계망 안에 이미 포함되어 있습니다.”를 수용하는 것을 의미하는 겁니다. 아까 배웠던 뉴턴을 해봅시다. 뉴턴은 뭐라고 했느냐 하면은 달이 있고 지구가 있고 이 둘이 서로 당긴다고 했지요. 지금 뉴턴이 억지를 쓰는 게 아닙니다. 왜? 밀물과 썰물을 봐서 알 수가 있잖아요. “아이구, 목사님 나는 물리학을 몰라요.” 지금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이 물리학을 알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당신은 밀물, 썰물의 이치를 아십니까?”를 묻는 거에요. 지금 뉴턴이 새로운 어떤 미신이나 희한한 이론을 억지를 부려가면서 집어넣은 게 아니고, “당신이 돈 벌고 밥 먹고 살려고 바쁘다 보니까 지금 이 전체를 모르잖아요?” 그런데 뉴턴은 전체를 알아요. 뉴턴이 이걸 알고 난 뒤에 형편이 나아진 것도 별로 없어요. 하여튼 사과가 떨어진 게 아니었다는 거에요. 지구가 사과를 당긴 것이지 떨어진 게 아니에요. 다이빙 선수가 떨어지는 게 아니고 지구가 다이빙 선수를 당기는 거에요. 이렇게 말하니까 “이 말이나 저 말이나 마찬가지 아닙니까?”라고 하는데 이것이 마찬가지가 아닌 이유가 있어요. 같은 게 아니기 때문에 신분제도에서 시민사회로 바뀐 겁니다. 옛날에는 당신은 임금하고 나는 종을 하는 것이 팔자라고 생각을 한 겁니다. 뉴턴의 발견 이후에 과학적 사고방식이 바뀌면서 너나 나나 똑같은 질점이고 둘 다 하나의 물체에 불과하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누구나 돈을 많이 가지면 귀족이 될 수 있어요. 귀족이 누리는 문화를 바로크 문화라고 합니다. 바로크 문화를 누리던 그것을 이제는 평민도 돈만 가지면 귀족들의 삶을 살 수가 있게 되었고, 그 때부터 바로크 문화가 발달되기 시작했습니다. 바로크라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고급스러운 서양풍 장식이 된 의자 같은 것을 말하거든요. 돈깨나 있다고 티를 냈을 때의 문화잖아요. 우리가 살면서 그런 것을 다 하잖아요. “대통령 당신 월급 얼마입니까?”라고 나온다니까요. 대통령은 훌륭하신 분이 아닙니다. 지금은 “교사는 참 보람있다.”라고 하는데 옛날에 우리 나이 때 젊은 교사들은 교사를 하지 않았습니다. 왜? 삼성, 현대에 사원을 모집하는데 교사의 월급하고 다섯 배 이상 차이가 났어요. 그래서 사우디에 가고 이랬어요. 돈을 많이 버니까요. 그렇게 돈을 버는 것이 물리학이라니까요. 물리학이에요. 뉴턴은 두 물체가 서로 당긴다고 봤는데 아인슈타인은 그게 당기는 게 아니고 관계, 중력이 만들어내는 곡률, 또는 관계망, 중력의 철렁거리는 (써커스 할 때) 그물망 가운데 우리는 그냥 이 정점(교차점)에 놓여있는 거에요. 왜 부모는 날 낳았습니까? 아인슈타인은 말합니다. 부모가 있는 지점의 관계망(결혼)에서 네가 그 지점에 있었기 때문에 그래요. 왜 그 지점에 있었습니까? 그것은 그 질서 자체가 그렇게 되어 있으니까 그렇고요. 이것은 문제를 없애버리면서 저절로 해답이 되어 버렸어요. 모든 것이 얽히고섥힌 것이니 어쩔 수 없는 거지요. 어쩔 수 없으니까 이제는 개인적이 신분의 차이는 없는 거지요. 밀고 당기는 게 아니고 그냥 철렁거리는 거기에 그냥 태어났다가 다시 사라질 뿐이다 이 말이지요. 그러니까 뉴턴의 사고방식이 똑같은데, 아까도 했잖아요. 뉴턴 때 세상이 바뀐 게 아니고 아인슈타인 때에 세상이 바뀐 게 아니고 맨 똑같은 세상인데 세상을 보는 눈이 바뀌고 안 바뀌다 보니까 사회에 대한, 구성의 질서 자체가 또 바뀌는 거에요. 조선 시대 양반 상놈하고 과학 시대인 우리 나라가 차이가 나잖아요. 그 이유가 뭔데요? 이 과학적 사고방식 때문에 그래요. 지금 제가 대단한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닙니다. 그것처럼 어떻게 마르다와 마리아는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까? 이들의 세계관이 예수님의 세계관으로 바뀐 거에요. 뉴턴은 대상인 너와 나가 있는데 아인슈타인은 너와 나가 없어요. 쌍둥이라도, 있는 지점에 따라서 같은 쌍둥이인데 한쪽은 달나라 가고 우주에 갔다 와가지고 젊었는데 한쪽은 할아버지가 된 거에요. 아인슈타인이 그런 이야기를 하니까 사람들이 거짓말이라고 했습니다. 아인슈타인은 논리를 따져서 빈틈이 없이 이야기를 하는데 거짓말을 한다는 거에요. 거짓말이 아니에요. 진짜입니다. 빛의 속도가 일정하면 시간이 바뀌게 되어 있어요. 한쪽은 다른 데에 가니까 시간이 빨리 가고 한쪽은 늦게 가는 거에요. 그리고 시간이 늦게 가니까 (동생은 하루를 살아도 빨리 늙고 형은 그냥 늦게 늙으니까) 형님, 동생 하던 사이가 나중에는 동생이 더 늙었어요. 이게 드라마가 아니고 실제 상황입니다. 우리 있는 세계가 그런 세계에요. 물리학이 어렵기 때문에 물리학이 많이 전도가 안 되어서 살던 대로 사는 것이지, 만약에 물리학이 많이 전도가 되어서 살아버리면 (참, 세상 말로) 세상은 정말 자기 요령대로 살다가 완전범죄해서 안 들키면 되고, 이런 식으로 그냥 막 가는 세상이 될 거에요. 다시 이야기합니다마는 예수님의 세계는 “내가 믿는다.”는 것은 없습니다. 그냥 예수님의 관계망이 믿음의 세계에요. 그래서 (제일 중요한 겁니다.) 거기에 나는 없어요. 나는 예수님이 새로 만들어냅니다. 나만 만들어내는 게 아니고 예수님의 세계관에서 만들어낸(조성된) ‘나’가 새롭게 등장하는 겁니다. 이것을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하지요. 제가 대구 공부에서 그렇게 이야기했는데 이삭의 이름이 뭐지요? 웃음이지요. 그래서 제가 앞에 있는 권사님한테 물었어요. “이삭이라는 이름은 무엇 때문에 생겼습니까? 아버지가 안 믿고 비웃어서 이삭이 생겼지요? “아이고,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라고 하면서 웃어서 이름이 이삭이란 말이지요. 그러면 아브라함의 웃음을 가져가게 되면 이삭의 이름이 뭡니까?” 이렇게 물었어요. 나는 권사님이 모를 줄 알았어요. 70세 가까이 되신 분이신데요. “이삭의 이름은 없지요.”라고 하거든요. 그게 정답이에요. 왜 없습니까? 개체가 없으니까 없는 거에요. 독자적인 게 없으니까 없는 거에요. 독자적이 있다는 것은 누구밖에 없습니까? 예수님밖에 없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원을 받는 겁니다. 개인으로 믿어서 구원을 받는 게 아니고 예수님께서 선물로 믿음을 줘버려요. 믿음만 선물로 주는 게 아니고 예수님의 관계망,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그 그물망이 (몽땅 다 우리에게 새롭게 주어지는 게 아니고 원래부터 있었던 거에요. 창세 전부터. 우리가 몰라서 그렇지요.) 이미 그렇게 짜여져 있음을, 돌아보니까 그렇게 된 거에요. 그래서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선물)다.” 내가 여기에 있음 자체가 누구의 선물이다? 주님의 자기 선물이고 주님의 자기 작품이라는 뜻이에요. 그래서 요한복음 5장에 보면 “자기 구원할 자”를 누가 만든다? “예수님 본인이 만들고 본인이 정한다”고 하잖아요. 내가 지금 이걸 이야기하면서도 “도대체 누가 이걸 믿었으리요”라는 생각이 드는데 이걸 누가 믿겠어요. 진짜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라는 말밖에 못하겠어요. 왜? 개체를 없애버리니까요. 평생동안 나는 나를 위해서 살아오잖아요. 나밖에 없다고요. 이건 이기주의지만요. 어쨌든 간에 모든 것을 나만 챙기고 살아가는데, 글쎄 그 나가 주님의 나임을 증거하기 위해서 임시땜방으로 나라는 것이 주어진 거에요. 여기에서 자기와 자아를 구분해야 됩니다. 이 말은 너무 어렵기 때문에 내가 그냥 말만 하고 넘어가겠습니다만요. 자아라는 것은 자기에서 파생된 것입니다. 자아는 ego이고 자기는 self, 주체라고 하는 겁니다. 자아는 착각이에요. 왜냐하면 내가 나를 안다고 하지만 나는 주워모을 것을 대충 주워모은 것을 가지고 자아를 만들어요.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기타를 좀 치면 자기가 자기 동네에서 기타를 제일 잘 치는 줄로 압니다. 그래서 “너는 뭐야?”라고 물으면 “기타 잘 치는 나.”라고 대답한다고요. 그런데 기타를 잘 치는 큰 동네에 가보니까 자기가 치는 기타는 아무것도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너 뭐야?”라고 물으니까 “나 기타 못 치는 거.” 이렇게 된다고요. 이렇게 자기의 내용이 바뀌지요. 그러니까 자기의 내용이 바뀌면 자아가 또 바뀌어요. 그러면서도 주체는 그대로 있어요. 아침에 양복을 입고 아들이 출근을 했다가 퇴근할 때 츄리닝을 입고 퇴근하면 자식입니까, 자식이 아닙니까? 자식이지요. 양복을 입으나 뭐를 입으나 자식이잖아요. 주체는 같은데 그 놈의 주체를 자아가 알아챌 수 있는 기회가 없어요. 이상하지요. 아무리 해도 제 2의 자아, 제 3의 자아, 엉터리 자아든지 뭐든지 계속해서 내 욕망이 요구하는 대로 위선적으로 꾸며나가는 자아만 계속해서 죽을 때까지 반복될 뿐이지 진정한 주체는 영원히 우리가 모르게 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나는 나를 영원히 몰라요. “나는 저러고 싶어.”, “나는 저 사람이고 싶어.” 이런 것만 있지 영원히 몰라요. 엄마는 착한 엄마, 그런데 착한 엄마면 뭐 합니까? 나중에 죽을 때가 되어가지고 엉뚱한 소리를 하는데요. 이 착한 엄마가 언제까지 갈 지를 몰라요. 그러니까 인간은 아무것도 몰라요. 나도 모르고 세상도 모르고 아무것도 몰라요. 그럼 뭡니까? 아메바에요. 그냥 본능대로 배고프면 밥을 먹을 줄 알고 또 돈이 떨어지면 돈 벌줄 알고 아프면 돈을 써서 병원에 갈 줄 알고 그것도 돈이 없으면 보험(15억)에 들어가지고 남편 실종신고해서 돈을 타내서 유흥비로 쓸 것이 있고..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메바가 할 수 있는 그것이 다 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왜 우리에게 위기적으로 안 다가오느냐? 전부 다 같은 아메바이기 때문에 너나 나나 사는 게 똑같거든요. 똑같으니까 따라잡을 일만 있지 대단한 사람은 없어요. “부처(석가모니), 소크라테스, 공자, 예수는 4대 성인이에요. 그래도 난 스티브 잡스, 그 사람이 부럽지 다른 사람은 안 부러워요.” 이런 식으로 간다고요. 모든 게. 중국이고 북한이고 한국이고.. 그런데 그 중에 누가 있습니까? 마르다와 마리아도 똑같아요. “저는 믿습니다.”라고 하지만 자아가 믿는 것은 안 받아준다니까요. 그러면 믿음은 어디에 있느냐? 주님이 알고 있는, 새로운 주체를 만들어놓았는데 이 주체는 단독적으로 따로 뗄 수가 없어요. 주님과 관련이 된 주체에요. 살든지 죽이든지 먹든지 마시든지 누구의 것이다? 주님의 것이에요. 이 자아가 그런데요. 아까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자아라고 하는 것은 아무것도 모른다고 했지요. 그런데 자아의 내용은 뭐냐 하면 자기가 소유한 것을 집어넣고 자아라고 하는 겁니다. 여성분들은 어릴 때 인형을 많이 갖고 놀잖아요. 껍데기는 사람의 모습인데 뜯어보면 솜이 나오지요. 그런데 그걸 솜이라고 하지 않아요. 애들은 무조건 그게 인형이라고 보지 “이, 솜덩어리야.”라고 보지를 않는다니까요. 나는 “나.”라고 하지 나는 “돈덩어리.”라고 하지를 않는다니까요. 나는 무조건 “나.”라는 거에요. “나”가 있고 내가 잘되기 위해서 공부도 하고 판사도 되고 의사도 된다고 이야기하는 거에요. 그런데 이 껍데기는 진짜 돼지 껍데기하고 똑같이 아무것도 아니에요. 이 소유가 모여서 자아가 되어 버렸다고 한다면 소유가 끊어지면 이 사람은 자살한다니까요. 자살해요. 내가 장담하건데 김성수 목사님은 힘들어서 자살했어요. 왜 힘이 드느냐? 자아가 따로 있고 자아에 합당한 내용을 그때그때 채우려고 하니까 그래요. 설교를 한 시간 반씩 하려면 공부(조사)를 얼마나 해야 돼요? 그걸 계속 요구하고 있지, 그걸 채우려고 하면 사람이 미치는 거에요. 밑천은 떨어지지요. 뺏기면 되는데 뺏기지도 않고 물론 다 뺏겼지만.. 힘들어 죽는 거에요. 그러니까 편히 쉴 곳은 뭐밖에 없습니까? 자살밖에 없지요. 이 자아를 쉬기 위해서. 그런데 자아가 없어요. 이건 피부 세포지 자아라는 게 없어요. 인간은 자아를 몰라요. 정답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인간은 자아가 날 살린 게 아니고 주님께서 그때그때마다 살려주고 있어요. 그런데 이 주님의 은혜를 누가 막는다? 달 행세를 하는 우리가 자아라는 걸 만들어가지고 “지금껏 내가 힘들게 살아왔습니다.” 하고 금환(개기)일식처럼 완전히 주님을 다 가리고 있는 거에요. 그게 바로 사울입니다. 자기 기세가 등등해서 가려버린 거에요. “어디 핍박을 하느냐?” 하고 차버리니까, “주여, 누구십니까?” 돌아본 거에요. 그때 살았어요. 그때 살았다고요. 오늘 본문에 마르다와 마리아는 언제 살았습니까? 자기가 그렇게 기대하고 목표로 잡고 행복하게 살았던 그 오빠를 주께서 죽여버렸을 때 찬스가 온 겁니다. 네가 알고 있던 믿음의 세계관을 완전히 바꾸어라. 네가 믿는 게 아니고 내가 바로 부활이고 생명이다. 내가 줘야 받는 것이다. 내가 주는 것이다. 그러면 주님이 주셔다는 것을 어떻게 압니까? 나사로가 죽었잖아요. 죽었는데 뭐다? “죽어도 살리라” 죽지만 나사로가 살았다는 말은 나사로의 삶은 나사로 본인이 애써서 얻은 게 아니고 “사나 죽으나 주의 것입니다.” 하는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지금 나사로가 죽은 거에요. 그래서 처음부터 나사로는 아파본 적도 없었고 처음부터 나사로는 죽어본 적도 없었던 거에요. 창세 전부터 나사로는 아파본 적도 없고 죽어본 적도 없었는데 누가 애를 태우고 있느냐 하면은 믿음이 없는 마르다와 마리아가 닦달을 내고 애를 태우고 난리를 한 겁니다. 그냥 잠을 자고 있었는데요. 하여튼 오빠가 잠도 못 자고 고생하게 만들었어요. “이제 깨우러 가자.” 깨우러 가잖아요. 이 본문을 보면서 제가 이렇게 복잡하게 이야기하는 이유가 있어요. 사람들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요한복음 11장을 보고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목사님 저도 예수를 믿겠습니다.” 그게 아니라고요. 왜 아니냐 하면은 자기의 세계관이 안 바뀌었잖아요. 자기는 지금 뉴턴이에요. 예수님을 대상으로 세우고 나는 여기에 있고 구원을 받으려고 하면 뭐를 하면 된다? 내 앞에 있는 예수님을 믿으면 된다는 거에요. 이것은 주고받는 힘이지, 하나의 중력의 관계망이 아니잖아요. “예수를 믿겠습니다.” 제발 그러지 마세요. 예수님을 믿는다는 게 없다고요. 예수님을 믿으려면 주체가 누구여야 됩니까? 자연적으로 누구를 등장시켜야 돼요? “나. 내가 믿었습니다.”가 등장돼야 돼요. 내가. “오빠가 마지막 날에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믿나이다)” 이게 마르다의 한계에요. 사도 바울은 네가 주 안에서 먹고 마신다고 했어요. 이 말은 먹고 마시고 까불고 찧는 것이 주 안에서 이루어지면 그 안이 뭐가 되느냐? 생명이 되고 부활이 되고 의가 된다는 겁니다. 할 게 없다니까요. 풍선 안에서 하나의 강냉이 알처럼 누리면 되는 거에요. 발걸음도 세시잖아요. 머리카락이 아침에 빗으면 빠지는데 그 머리카락이 빠지는 것부터 해가지고 우리가 늙어서 숨이 끊어지는 것까지 전부 다 주께서 그렇게 하시는데 우리는 머리 손질을 안 해서 그렇다는 거에요. 그게 아니고 주께서 머리 손질할 시간을 안 준 거지요. 돈 번다고요. 모든 발자국과 모든 행세가 주님께서 손을 안 댄 곳이 없습니다. 아이구 내가 정말 목이 쉬려고 하는데요. 목이 쉬는 것도 주의 뜻이라니까요. 왜냐하면 내 것이 아니거든요. 주의 것을 목이 쉬게 한들, 숨이 넘어가게 한들 주님의 것이지 내 것이 없는데 그것은 내가 없기 때문에 내 것이 없는 거에요. 그런데 주체는 있잖아요? 주체는 있는데 모르지요. 예수님께서 자기가 원하는 사람을 이 땅에 만들어내십니다. (그런데 나는) 만들어낸 자가 만들어낸 내 모습을 몰라요. 다만 육신이 있기 때문에 남들을 보면서 “나, 저 사람처럼 될래.”하고 자아가 생긴다니까요. 그 자아는 본인이 어릴 때부터 부모가 그렇게 강요한 거에요. “너는 나중에 판사가 되어라. 어는 것 집을래? 마이크 집어. 그래, 아나운서 돼.” 돌잔치 할 때부터 이미 공작이 가해집니다. 실을 잡아야 오래 살고 성경책은 아예 처음부터 치워버려요. ‘그건 알아서 예정대로 구원 받겠지..’ 하고요. 이 부모로부터 “너는 우리 집안에 일원이 되어야 돼.”라고 하는데 그 부모의 가정 자체가 하나의 통합적이고 유기적인 자아처럼 행세를 하는 거에요. 우리 가정은, 우리 가문은.. 거기에 말려든 겁니다. 우리 엄마가 보기에 부끄럽구나. 아빠가 보기에 부끄럽구나. 그런데 거기에 뭐는 안 들어갑니까? 우리 주님이 보기에.. 이것은 안 들어가요. 그저 당장은 내 동생 보기에, 오빠가 보기에, 내 누이(누나)가 보기에, 내 자식이 보기에 부끄럽구나. 이게 더 급한 거에요. 이게 해를 가리는 달입니다. 그런데 고맙게도 성령께서 찾아오셔서 주님을 믿고자 하는 그걸 다 치워버리지요.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날마다 우리라는, 자아라는 덩치를 좀 치워주시길 바랍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그렇게 가려놓으면서도 복을 안 준다고 닦달하고 짜증을 내는 우리들, 엉터리 자아 대신에 주님이 우리의 자아의 자리를 차지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