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1장 17절(가락-세계관)160621a-이근호 목사
요한복음 11장 17절(가락-세계관)160621a-이근호 목사시작하겠습니다. 요한복음 11장 17절부터 할 차례입니다. 예수님께서 드디어 나사로가 죽고 난 뒤에 움직이십니다. 그러니까 마르다와 마리아의 오빠가 이미 죽은 겁니다. 그런데 오빠가 죽었으니까 자기의 가정에 죽은 사람이 있지요. 죽은 사람이 있고 자기들은 살아 있게 되는 겁니다. 마르다와 마리아가 오빠를 어떻게 살려낼 것인가에 모든 관심이 있어요. 그래서 병든 오빠를 살려내는 것과 예수님이 방문하는 것을 연결시켰습니다. 그렇게 기대를 했어요. ‘오빠는 아프다. 죽어서는 안 돼. 그런데 우리 힘으로는 안 되니까 예수님께서 오셔서 죽어가는 오빠를 살려내 주셔야 돼.’ 그런데 오빠는 돌아가셨잖아요. 이미 죽었잖아요. 오빠가 죽고 난 뒤에 예수님이 오셔야 될 이유도 같이 날아가 버린 겁니다. 다시 이야기할 게요. 마리아와 마르다의 생각은 우리(마리아와 마르다)를 빼놓고 오빠를 살리는 것과 예수님과 관련이 되어 있어 있는 겁니다. 그래서 오빠가 이미 죽은 입장에서는 이제 와서 예수님이 오실 때는 그냥 위로 삼아 오시는 것 외에는 그다지 연관이 없다고 보는 거에요. 그러나 예수님은 반대로 본격적으로 할 일이 생긴 겁니다. 이 말의 뜻은 이렇습니다. 예수님의 예수님 됨이라는 것은 죽음이 완전히 바탕에 깔려있는 상황에서 예수님의 진가가 발휘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지금 나사로는 죽었잖아요. 우리의 생각에는 나사로만 죽었다고 생각되잖아요. 나사로가 죽었다와 더불어서 마르다와 마리아가 사실은 이미 죽은 존재라는 사실이 엮여져있다는 사실을 마르다와 마리아가 몰라요. 오빠만 죽었지 자기들은 안 죽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빠의 죽음을 통해서 살았다고 여기는 자도 너희가 생각하는 죽음 현상에 사실은 같이 묶여져 있다고 보는 겁니다. 숨을 쉰다고 산 게 아니고 숨이 끊어졌다고 죽은 게 아니라는 거지요. 예수님의 입장에서는. 그 이야기를 하려면 그들이 예상하고 있는 범주의 바깥까지 포함을 시켜서 예수님과 관련을 지어야 되는 겁니다. 이것은 말로 하는 것보다 그림으로 그리면 쉬운데요. 마리아와 마르다가 있고 오빠는 죽어서 누워 있습니다. (뿅 갔습니다.) 그리고 마리아와 마르다는 생각합니다. ‘우리 예수님은 죽은 사람과 관련이 되어 있다. 자기는 건강하니까 아플 때 오시면 되고..’ 그러면 마리아와 마르다 쪽은 삶이 되고 나사로는 죽음이 되겠지요. 이게 인간이 갖고 있는, 우리가 평소에 눈에 보이는 대로 살아가는 죽음과 삶의 구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고 난 뒤에 찾아오셨습니다. 이것은 죽음을 확산시켜서 살았다고 여기는 마리아와 마르다까지 포함시켜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전부 다 죽은 자가 되고 예수님만이 생명이 되는 겁니다. 죽은 자가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그들이 예수님 안에서 산 자가 되는 방식 외에 다른 영생을 얻는 방식은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 주위에 가족들, 예를 들어 오빠가 죽든지 남편이 죽든지 누가 죽어야 되지 않겠느냐 하는데 이 자리에 누가 들어가느냐 하면은 예수님이 돌아가시거든요. 그러니까 예수님의 죽음이 나와 관련이 있는 걸로 봐야 돼요. 그걸 성령께서 그렇게 조인트를 해주시는 겁니다. 성령이 오시기 전까지는 “이것 섬길까요, 십일조 낼까요, 복음 전할까요, 선교 할까요, 봉사 할까요?”라고 하다가 성령이 딱 와버리면 ‘죽은 놈이 뭘 해도 의미가 없어.’가 되는 거에요. ‘이미 죽은 자인데..’ 안 받습니다. 죽은 자든 뭐든 안 받아요. 주께서 필요한 것은 죽은 채로 그냥 바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죽은 채로 바치게 되면, 살고 안 살고는 누구의 소관이냐 하면은 이것은 어디까지나 예수님의 주도권 안에 있지, 우리가 죽어야 되는데 죽은 척을 하면서 한 쪽은 실눈을 뜨고 한 쪽은 눈을 감고서 ‘어떻게 주께서 나한테 어떤 조치를 하는지 한 번 구경해볼까?’라고 하면 안 돼요. 온전히 죽음 자체를 주께서 생명(산 자)로 바꿔줍니다. 그러고 난 뒤에 성령이 오게 되면 ‘내가 살았다고 여겼던 시절도 사실은 죽은 시절이구나.’ 하는 것을 소급해서 해석이 가능해지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창세 전부터까지 내려가요. 창세 전부터 우리는 산 자가 되는 겁니다. 창세 전부터 산 자라는 말 가운데에 사실은 뭘 넣어야 되는데 그것은 “예수 안에서”입니다. 그러니까 창세 전부터 “예수 안에서 택했다”가 돼요. 그게 에베소서 1장 4절입니다. 태초부터 주 안에서 산 자가 되기 위해서 우리가 주님 앞에 뭘 한 게 아니고 주님 쪽에서 계속 작업을 해오신 것이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방금 제가 해석을 해드렸는데 이렇게 해석을 하면 마리아와 마르다가 무엇을 놓치고 있고 무엇을 잘못 보고 있고 무엇을 빠뜨리고 있는지를 알게 되고 또 이것 때문에 그 다음에 마르다와 마리아의 만남의 이야기가 있어요.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23절에 보면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라고 할 때 마르다가 크게 오해한 게 뒤에 나옵니다. “마르다가 가로되” 그 다음에 뭐라고 되어 있지요? “마지막 날”. 마지막 날에 대한 개념 자체가 잘못 된 거에요.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라고 알았던 지식을 동원해서 예수님한테 내놓았더니만 예수님이 그걸 옳은 것으로 수용했습니까, 거부했습니까? “아니야, 아니야, 그게 아니야, 내가 지금 말 한 취지가 그게 아니야.”라고 하신 거에요. 그 예수님과 마르다와의 만남에서 이 마르다와 마리아는 아직도 (나사로의 죽음과 자신들의 죽음이) 예수님에게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이걸 끊어서 “내가 살아있기 때문에 나는 살아있는 나에 대해서 내가 알아서 주님한테 한 수 배우겠습니다.” 이렇게 나오는 거에요. “열심히 배워서 구원을 받는데 그 중에 배운 것이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라’예요. 이것 주님께서 평소에 설교 하셨잖아요. 저는 그 말씀을 믿나이다”라고 한 거에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너의 그 생각은 일방적 생각이고 그 생각이 잘못된 생각이기 때문에, 네가 오빠가 죽기 전에 예수님이 오셔야 된다는 고집을 부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르다와 마리아는 자기의 생각이 옳은지 그른지도 판정할 수 있는 판정의 기준이 없어요. 자기가 아는 것 전부가 그런 쪽으로 알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인간은 스스로 연구해서 구원을 받는 사람이 없어요. 아무리 연구해봐야 모든 게 헛돼요. 예수님의 조치가 주어져야 되지 본인이 연구해서 본인이 죄를 뚫어서 구출되는 그런 구원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마리아와 마르다의 세계관이 바뀌어져야 된다는 것을 아시겠지요? 바뀌어져야 된다는 것은 기존의 내 세계관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아유, 나는 뭔가 잘못되었어. 그러니까 예수님하고 서로 소통이 안 되지.. 뭔가 잘못되었어.’ 그런데 잘못되었다는 말을 할 거라면 어디에서 잘못되었는지를 알아야 되고, 더 나아가서 잘못된 데에서 달라져야 되는데 달라진 상태가 어떤 수준이 될 때 드디어 달라짐에 도착했음이 확인이 되느냐, 이 두 가지를 다 아셔야 되겠지요. 첫 번째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내가 무엇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아야 된다고 했지요. 한국 교회 교인들의 (제가 보기에는) 제일 근본 문제가 자기가 잘못된 줄을 본인은 모른다는 거에요. 그냥 옷을 입는 것처럼 위선의 껍데기만 자꾸 입는 거에요. 목욕을 할 생각은 안 하고 옷만 입게 되면 자기에게 때가 있는 것이 안 보이지요. 그걸로 안심을 하는 겁니다. 그걸로 된 줄로 알고 그걸로 하나님께서 기뻐함으로 받는 줄로 아는데 옷을 입을 게 아니라 반대로 옷을 벗어야 돼요. 그런데 옷을 벗으면 부끄럽잖아요. 그래서 성령께서 강제로 옷을 벗기십니다. 속살이 나오도록 벗겨요. 어디까지? 다윗까지. “제사를 원하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원하는 것은 상한 심령이고 내가 죄를 지은 게 아니고 태어나면서부터 죄 속에서부터 태어났습니다.” 그런 고백이 나올 때까지 강제로 옷을 벗기십니다. 그러면 또 안 벗으려고 굉장히 발악을 하는데요. 옷을 벗게 되면 어떤 상태에 놓여있고 그걸 고치게 된 이후의 상태는 어떤 세계관이냐에 관해서 이제부터 설명을 해드리겠습니다. 오늘 제목은 “세계관”입니다. 이 세계관의 이야기를 하려면 세계관이 변화된 실제의 예를 들어야 되겠습니다. 1665년이 무슨 해냐 하면은 (물리학자들에게는 중요한데요.) 뉴턴이 만유인력을 선포한 해가 되는 겁니다. 1665년 영국에서 뉴턴이 페스트라는 전염병 때문에 대학교를 못 다니고 자기 집에 있으면서 연구를 한 것을 발표했어요. 만유인력을 발견했는데요. 그러면 뉴턴이 있던 그 자연과 지금 2016년의 자연이 같은 자연일까요, 다른 자연일까요? 똑같은 자연, 똑같은 우주지요? 전혀 달라진 게 없지요. 전혀 달라진 게 없는데 뉴턴의 생각과 아인슈타인의 생각이 다르다는 게 문제에요. 뭐가 다른가 하면은 똑같은 대자연의 법칙에 의해 그냥 묵묵히 달은 돌아가고 해가 뜨는데 세계관이 다르니까 세상을 해석하는 해석이 완전히 다른 겁니다. 그런데 뉴턴 이전에 프톨레마이오스가 있는데 그 사람의 우주관도 달라요. 갈릴레이 갈릴레오 하고 또 다르고요. 그러면 인간 대 인간의 만남이라는 것은 결국 무슨 싸움이에요? 세계관, 이 우주를 어떻게 보느냐 그 관점이 다른 거에요. 이것은 오늘 요한복음 11장도 마찬가지입니다. 마르다와 마리아가 오빠가 죽을 때도 햇빛, 공기, 물을 하나님께 다 받았잖아요. 오빠가 죽기 전이나 죽은 때나 예수님을 만날 때나 똑같아요. 그런데 전에는 예수님이 이야기를 하시면 “아멘. 아멘.” 하면서 이야기가 서로 통한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어떤 계기가 일어나면서, 다시 말해서 오빠가 죽고 난 뒤에 그렇게 사랑했던, 내 사랑을 받아줄 줄 알았던 예수님으로부터 티박이 와버린 거에요. 정면으로 충돌이 되었어요.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은 네 세계관을 바꿔야 된다는 하나의 신호를 준 거에요. 다른 말로 해서 너희, 마르다와 마리아의 세계관을 바꾸게 하기 위해서 네 말대로 오빠가 아플 때 온 게 아니고 다 죽고 난 뒤에 왔고 이것을 계기로 해서 살아있다고 우기는 너희, 마르다와 마리아의 세계관을 바꾸어 주기 위해서 주께서 일부러 오빠를 병들어 죽게 하신 겁니다. 그래야 예수님하고 이야기가 통하니까요.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은 인간이 자기가 이쯤 했으면 예수님의 말을 알아듣는다고 생각하는 그 우리의 생각 있잖아요. 그 세계관이 과연 예수님의 세계관과 일치가 되는지를 우리는 요한복음 11장을 통해서 확인을 해볼 수가 있는 겁니다. 그것을 하기 전에 저는 그것을 확인하는 방법에 있어서 뉴턴과 아인슈타인이 보는 세계관에 대해서 지금 설명해주려고 하는 거에요.뉴턴의 세계관과 기존의 세계관하고 어떤 차이가 있느냐 하면은 이런 차이가 있습니다. 사과가 떨어지잖아요. 사과는 뉴턴 이전에도 많이 떨어졌어요. 그런데 뉴턴의 생각은 ‘떨어진다는 게 뭐냐?’ 하는 거에요. 떨어지는 게 뭐냐를 생각한 거에요. 정말 이것은 천재적인 발상입니다. 사과가 떨어지면 주워 먹으면 되는데 그걸 왜 따지냐 이 말이지요. 이 사람이 지금 사과가 왜 떨어지느냐를 묻는 게 아니고 (그것은 초등학생들이 잘못 알고 있는 거에요.) 떨어진다는 게 뭐냐는 거에요. 뉴턴이 생각하기를 ‘왜 사과는 떨어지는데 달은 안 떨어지지?’ 이게 포인트입니다. 저 둥근 달은 왜 안 떨어지느냐 말이지요. 뉴턴은 드디어 이걸 풀어나갑니다. 왜 안 떨어지는가를요. 뉴턴이 떨어지는 것은 무엇이고 사과는 떨어지는데 왜 달은 안 떨어지느냐에 대한 힌트를 어디에서 얻느냐 하면은 선배인 갈릴레이 갈릴레이한테 얻어요. 갈릴레이가 뭐라고 했느냐 하면은 “움직이는 것은 계속 움직이려 하고 정지된 것은 계속 정지되려고 한다”고 했는데 이걸 관성의 법칙이라고 합니다. 그럼 갈릴레이 이전에 누가 있었는가 하면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있어요.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세상에는 하늘의 법칙이 “따로” 있고 땅의 법칙이 “따로” 있다. 하늘의 법칙은 완벽하고 안전하다. 그래서 모든 해와 달이 규칙대로 돌아가지만 땅은 완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충돌하고 변화가 일어나고 모든 길도 삐딱하게 가고 자기 맘대로다. 그러나 하늘을 봐라. 달은 늘 그 자리에, 별은 늘 제 자리를 찾아오니까 원리가 다르다고 본 거에요. 그러니까 하늘의 원리와 땅의 원리가 서로 다르다 이 말이지요. 이 하늘을 (성경에서 말하는 하늘이 아니고) 천체라고 합니다. 천체의 원리하고 인간이 사는 지상의 땅의 원리가 다른 거에요. 그게 갈릴레오까지 계속 이어져 온 거에요. 그러니까 중세에 뭘 믿습니까? 하나님을 믿지요. 그러니까 하늘나라의 이데아 세계는 완벽하고 인간은 부족하니까 어서 죽어서 하늘나라에 가자라고 하는 거에요. 그런데 하늘나라에 가자고 하니까 문제가 돼요. 이건 천체에 가는 게 되어 버려요. 성경에서는 어디에 갑니까? 높은 천체에 올라갑니까, 아니면 천국에 갑니까? 천국에 가지요. 그러니까 옛날 사람들은 천국이 하늘에 있다고 본 거에요. 왜? 하늘 자체에 완벽한 원리(perfect principle)가 흐르고 있으니까요. 구약도 마찬가지겠지요.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땅은 모든 것이 무조건 혼돈스럽고 무질서한가?’ 그게 아니라 땅에서 하늘의 원리처럼 변동없이 완벽한 것들이 남아있든데 그게 물, 불, 공기, 흙이라는 겁니다. 이런 것들은 이 땅에서 완벽하게 있다는 겁니다. 사람이 죽으면 어디로 간다? 흙으로 돌아간다. 왜? 흙이 모든 걸 받아주잖아요. 그러니까 안정적이지요. 공기도 마찬가지고요. 인간이 아무리 설쳐도 여전히 새벽공기는 차갑게 오잖아요. 물도 마찬가지고. 불도 마찬가지인 것이 작대기를 가지고 헤쳐봐야 불은 그대로 아래에서 위로 피어오르잖아요. 불이 끊어지면 재가 없어지고요. 이 자체는 일관성 있게 벌어지더라는 거지요. 이게 이 세상의 구성원리입니다. 이게 바로 그리스, 헬라 철학입니다. B.C. 500년 경에 탈레스가 물이 기본이라고 했지요. 동양에서는 금속이 또 하나 붙어요. (토, 말고) 금이 붙는다고요. 그래서 오행설이에요. 이 오행설이 한의학의 기초가 되는 겁니다. 이제 옛날 사람들을 이해하시겠지요? 변화하지 않는 완벽한 원리는 저 하늘에 있고 우리의 영혼은 죽으면 어디로 가느냐 하면 올라간다고 믿었어요. 영혼은 올라가고 내려가면 흙이 있잖아요. 그러니까 공기는 위로 올라가고 흙은 내려가니까 이 완벽한 체제 안에서 인간이 죽으면 땅에 묻잖아요. 그러니까 죽음으로 비로소 완벽한 질서 안에 참여가 된다고 보는 겁니다. 귀신이 죽으면 구천을 떠도니까 49제 해가지고 빨리 하늘로 보내야 돼요. 이게 그 당시 뉴턴 이전의 세계관이었습니다. 뉴턴을 몰라도 해피했어요. 몰라도 굉장히 행복했어요. 여러분 방금 이야기한 것을 이해하시겠지요? 그러니까 물, 불, 공기, 흙은 이 땅에 있으면서도 하늘처럼 완벽한 원리를 일부 보여주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것이 신이 내려주신 원리이고 이 원리대로 무거운 것은 내려오고 가벼운 것은 뜬다는 것을 우리의 심성으로 삼아버리면 이것이 동양의 주자학이 돼요. 동양철학이 되는 겁니다. 이게 불교가 되면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 되고, 그저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것, 그저 순리대로 사는 것이 인간의 이치다.라고 뉴턴이 나오기 전에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사과가 떨어지는 것은 절대적인 원리이기 때문에 떨어지는 게 뭐냐를 묻는 것은 하나님(신)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여긴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높은 자리에 앉았다면 그건 하나님이 주신 질서이기 때문에 밑에 있는 백정이라든지 못난 사람들은 그 갑에 대해서 이의를 걸면 안 돼요. ‘자기는 을이 팔자다.’라고 생각하고 수그러야 되고 굴복해야 되는 겁니다. 남자는 하늘, 여자는 땅이니까 여자는 무조건 그냥 참고 남자는 백수 짓을 해도 자기가 돈을 벌어가지고 받들어 모셔야 되는 겁니다. 남편을 하늘처럼 섬기는 것이 여자가 해야 될 일이고 이것을 대들면 칠거지악에 걸려서 안 됩니다. 이게 이미자의 여자의 일생에 나오는 겁니다. 달은 완벽한 곳일 수가 있어요. 사과는 썪으니까 이건 불완정한 거지만 달은 항상 그 자리에 있잖아요. 완벽하잖아요. 신을 닮았지요. 그런데 뉴턴에 와서는 이걸 뭘로 다 바꾸느냐 하면은 질점으로 봐요. 에너지 덩어리로 보는 겁니다. 여기에는 달은 인자하다. 해는 온화하다.가 없어요. 다 빼버리고 하나의 물체 덩어리로 여기는 겁니다. 물체의 덩어리이기 때문에 어디에 속하느냐 하면은 갈릴레이의 관성의 법칙에 똑같이 적용이 됩니다. 그래서 관성의 법칙에 의하면 이렇게 되는 거에요. (오늘 성경공부를 하는지 물리학 공부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이 세계관이 어떻게 바뀌는지를 한 번 보세요. 우리가 하는 이 이야기가 우주가 돌아가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어떤 속임수가 없어요.)높은 곳에서 공이나 사과를 던지게 되면 반드시 이렇게 (‿) 원상태로 갑니다. 이게 관성의 법칙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만약에 늘어뜨린다면 계속 떨어져서 마지막 올라가는 데까지 올라가는 거에요. 그러면 만약 이것이 계속 펴지지 않고 간다면 그 사과는 계속 굴러가면서 계속 올라가려고 할 거에요. (단, 마찰력이 없는 진공상태인 경우에는 관성의 법칙에 의해서 원상태로 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지구가 있고 사과가 하나 있다고 합시다. 그리고 사과를 떨어뜨리게 되면 사과가 떨어지는데 (직선이라면 계속 아래로 가겠지만) 지구가 원모양이고 사과가 그 궤도를 따라 가니까 계속 원으로 그리면서 떨어지는 거에요. 지구가 둥그니까 계속 따라도는 거에요. 이게 떨어지는 방법이에요. 인공위성을 생각하면 딱 맞아요. 지구가 평지로 되어 있는 게 아니고 둥그니까 그것을 따라서 계속 도는 거에요. 지구의 궤도와 인공위성의 궤도 사이에 힘이 있다고 생각하면 그 힘에 의해서 계속 가는 거에요. (F=m¹m²/r²) 이것은 달도 마찬가지고 사과도 마찬가지고 모든 것이 마찬가지에요. 그런데 사과는 지구의 궤도와 너무 가까워서 (힘이 거리에 반비례하니까) 딱 갖다 붙어버리는 거에요. 지구는 당기지요, 사과는 안 밀리려고 하다가 대번에 떨어지는 거에요. 그런데 떨어진다는 말은 인간(지구) 자체를 하나의 질점으로 보지를 않고 너무나 인간 중심으로 생각해서 그런 것입니다. 감정이고 이성이고 착함이고 윤리와 같은 그런 계급 같은 것을 다 떼고 생각하자는 것입니다. 완전히 복면가왕입니다. 다 떼고 딱 두 개의 물질로 봤을 때 이 세상은 인간의 양심도 아니고 기도도 아니고 헌금과 전도도 아니고 성경을 읽는 것도 아니고 순교도 아니고, 오직 아무 가치가 주어지지 않는 힘에 의해서만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양심대로 살면 복이 온다는 그런 망발(생각)은 하지 마라. 그런 세상관은 바뀌어야 된다.”는 거죠. 내가 착하게 살면 복을 준다는 그런 생각은 뉴턴에는 없습니다. 여기에서부터 돈의 힘, 물질의 힘이 신을 능가하는 시대가 된 거에요. 그리고 이것이 현실을 제대로 본 겁니다. 이것을 가지고 모든 인간관계에 다 적용시켜 버린 것이 인문학이라는 겁니다. 자연과학에 기초해서 인문학을 해버리면 형과 동생 사이, 부모와 자식 사이의 땡기고 미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돈의 힘입니다. 얼마나 많은 자본을 가지고 있는가, 용돈을 많이 주는 자식을 배나 사랑하고 세배 받고도 돈을 안 내는 자식은 내쫓아버리는 겁니다. 모든 것, 인간의 양심이나 착함이나 기도나 믿음, 소망, 사랑이라는 것을 다 떼고 네가 남들을 유인할 만한 그런 자본을 네가 소유하고 있느냐는 것이 자연과학적인 사고방식으로 드디어 17c에 경제학으로 넘어오게 되어 있습니다. 인간? 사람으로 안 봐요. 돈을 갖고 있는 하나의 대상자로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아요. 뉴턴은 뭘 몰랐느냐 하면은 왜 서로 당기는지를 몰랐아요. 왜 지구하고 사과하고, 왜 지구하고 달하고 서로 당기느냐 말이지요. 왜 힘만 이야기하는가 말이지요. 물론 달도 지구로 끌려와야 되는데 원심력(바깥으로 나가려는 힘) 때문에 균형을 맞추어서 떨어지지 않는 거에요.달이 당기는 힘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라고 하면 간단해요. 밀물과 썰물로 대번에 증명이 되잖아요. 그러니까 옛날(뉴턴 이전)에는 맨날 해변가에 가가지고 밀물을 봐도 저것이 왜 저런지를 몰랐거든요. 그런데 뉴턴이 달과 지구의 인력 때문에 당기니까, 쭈뼛쭈뼛 살갗에 소름이 돋듯이, 당기면 털 같은 것이 일어나잖아요. 이처럼 일어나다 보니까 해변가에 물이 이만큼 빠지는 거에요. 몰랐어요? 우리는 알잖아요. 그런데 세종대왕은 몰랐다니까요. 그 천재적인 똑똑한 세종대왕도, 강감찬도 몰랐어요. 그것 몰라도 행복해요. 그러나 뭐가 다르지요? 세계관이 달라요. 지금 마르다와 마리아가 예수님이 있으나 없으나 나름대로 행복했을 거에요. 그런 데에다 예수님은 “네가 행복하냐?”를 묻는 게 아니고 지금 예수님의 세계가 무슨 세계입니까? 천국이지요. 천국의 이야기를 하는데 마르다와 마리아가 자기의 세계관을 고수하다 보니까 어떻게 돼요? 세계관이 다르니까 이야기가 안 통하는 거에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나사로를 죽임으로써 지금 세계관을 바꾸려고 하는 겁니다. 그러다 보니까 되지도 않는 물리학까지 언급을 하는데요. 이게 맞는 이야기인데 아까 뭘 모른다고 했어요? 왜 당기는지를 모른다고 했지요. 누구 아는 사람이 있습니까? 왜 달하고 지구하고 서로 당기는지를 누가 아십니까? 아까 이야기하기를 사과가 떨어지는 이유는 서로서로 당기니까 그렇다고 했지요. 그 다음 문제에요. 왜 당깁니까? 이런 질문을 아인슈타인이 한 거에요. 이 사람들이 희한하지요. 그런 걸 몰라도 행복할 수 있는데 밥이나 먹고 장사나 잘하고 하면서 살면 되는데 이걸 질문을 하는 거에요. 왜 당길까? 에딩턴이라는 사람이 있어요. 에딩턴이라는 사람이 일식을 보기 위해서 아프리카에 갔습니다. 가서 보니까 태양이 있고 달이 있고 지구가 있어요. 그리고 태양 뒤에 별이 있어요. 그런데 달이 태양을 가려버리면 이걸 일식이라고 해요. 달이 태양을 가려버리면 우리의 눈에 보기에는 시커멓게 되어 버려요. 그리고 태양의 주위(모서리)는 약간 빛이 나겠지요. 이걸 금환일식이라고 해요. 그때 안 보여야 되는, 태양의 뒤에 있는 별이 우리의 눈에 보이더라는 겁니다. 원래는 태양의 뒤에 있어서 별이 안 보이는데 이게 보이더라는 거지요. 이게 무슨 원리냐 하면은 (아까 내가 당긴다고 했잖아요. 사과가 떨어진다고 했잖아요.) 이건 당기는 것도 아니고 떨어지는 것도 아니라는 말이지요. 이 세상이. 우리가 뭔가 너무나 무지몽매하가지고 표현을 그렇게 한 거에요. 뉴턴은 그걸 몰랐다는 거에요. 서로 당긴다고 하니까 문제는 해결이 되었는데 왜 당기는지가 해결이 안 되는 겁니다. 그런데 아인슈타인은 말하기를 이건 당기는 게 아니라는 거지요. 하나의 예를 들면요. 산에 약간의 언덕이 있고 밑에 사람이 있는데 공을 굴립니다. 그러니까 아래에 있는 사람(A)에게 굴린다고 했는데 굴려놓고 보니까 그 사람의 앞 지점(B)에 공이 온 거에요. 그러니까 사람들은 ‘아, 공을 굴리니까 (A라는 지점에 와야 되는데) B라는 지점에 오는구나.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구나.’ 이렇게 생각하는데, 어떤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왜 A지점에 오지 않고 B지점에 오지? 공이 막 굴러서 왜 B지점에 오는가?’라고 한 거에요. 보통 사람들이 흔히 이야기하기를 공이 무거워서 내려온다고 하잖아요. 시장에서 장사하는 아주머니에게 “왜 공이 왜 높은 데서 아래로 내려옵니까?”라고 물어보면 “그게 무거우니까 아래로 내려오지.”라고 해요. 이게 아리스토텔레스의 이야기에요. 이걸 몰라도 얼마든지 장사하고 잘 먹고 잘 살고 애 교육 잘 시키고 해요. 그런데 그렇게 생각해버리면 그 세계관은 제한된 세계관이에요. “아이고, 모를 건 모르고 내가 아는 것만 챙겨서 애들이랑 밥이나 먹고 살면 되지..” 이렇게 되는 거에요. 사실 인생은 그렇게 살면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천국에서는 세계관 자체가 바뀌어야 되기 때문에 “아는 범위 안에서 예수님하고 좋게 지내지..” 이건 아니에요. 이러면 천국에 못 가요. 우리가 안다고 여기는 것, 여기에서 행복하면 된다고 하는 그 세계관 자체가 완전히 뒤집어져야 돼요. 여기 책상을 확 엎듯이 완전히 뒤집어져야 된다는 말이지요. 이 세계관이 안 뒤집어지니까 마리아와 마르다가 예수님을 보고 “우리 오빠가 아플 때 오시지 죽고 난 뒤에 옵니까?”라고 하는 거에요. 다시 말해서 이야기의 핀트가 안 맞는 거에요. 핀트가 안 맞다는 말은 주님의 천국에 적절하지 않는 지금의 사고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겁니다. 이게 왜 그런가 하고 아까 산에 있는 언덕을 자세히 보니까 거기에 홈이 파여 있어요. 그러니까 이것은 공한테 어떤 인격이 있어서 가는 게 아니고 그냥 파인 홈대로 갈 뿐이에요. 뉴턴은 생각하기를 여기에 달이 있고 또 지구가 있고 그 가운데에 힘(이걸 중력이라고 합니다.)이 있어서 이 두 대상이 서로 당겼다고 했잖아요. 그러나 아인슈타인은 힘이라는 게 있는 게 아니고 지구와 달 사이가 구부러져 있으니까 구부러진 만큼 달이 와서 지구 주위를 뱅뱅 돌게 되어 있다고 본 거에요. 구부려져 있으니까요. 이게 뭐냐 하면은 관계에요. (이걸 일반 상대성 원리라고 합니다.) 보이는 별에서 빛이 올 때, 우리는 빛이 생각하기를 빛이 똑바로 간다고 생각하는데 아인슈타인은 그게 아니고 빛은 우리가 보기에 최단거리로 가지만 사실은, 빛은 짧은 거리가 아니고 파인 홈을 따라, 이걸 어렵게 말하면 곡률의 비(구부러진 비율)에 따라 자기 딴에는 최단거리로 오는데 그게 휘어져 오는 거에요. 이게 직선이라면 몰라도 구가 되게 되면은요 최단거리를 펴보게 되면은 이게 구부러져요. 칼기를 타고 미국에 갈 때 보면은 미국에서 북극으로 가잖아요. 우리가 보기에는 왜 북극으로 돌아서 가느냐 하는데 그게 돌아가는 게 아니고 최단거리로 가고 있는 거에요. 이게 세계관이 다른 겁니다. 이제 결론을 내립니다. “이 세상의 세계관은 중력이라는 힘의 구조다.” 이게 아인슈타인의 생각이에요. 그러면 인간이 산다는 것은 없지요. 왜냐하면 인간이라는 것은 질점이고 질점이라는 것은 에너지 뭉치에요. 그래서 인간의 양심, 윤리, 도덕 같은 것은 일단 배가 부른 자들의 희망사항이고 가장 원초적인 것은 인간은 에너지이기 때문에 뭐만 주면 되느냐 하면은 에너지만 채워주면 돼요. 에너지는 세 가지로 되어 있습니다. 탄수화물, 단백질, 지방입니다. 그것은 어디에서 나오느냐 하면은 곡물, 양고기, 돼지고기에서 나오지요. 그러면 그것을 사려면 무엇이 필요합니까? 돈이 필요하지요. 그러면 에너지 덩어리를 활용해서 돈을 챙기고 돈을 챙긴 것을 가지고 또 에너지를 집어넣으면 그걸 사람들이 흔히 이야기하기를 사는 것이라고 이야기해요. 그걸 사는 것이라고 하는 거에요. 북한 평양에 엘리트들이 지금 행복합니까, 행복하지 않습니까? 되게 행복해요. 왜? 평양을 빼놓고 못 살거든요. 사람은 자기보다 못 사는 자들이 있고 자기에게 많은 것이 있을 때 되게 행복해해요. 부부 사이에 산다 못 산다고 다투어도 연예인 누구 하나가 이혼했다고 하는 소리를 들으면 그렇게 행복해요. 꼭 남이 아프고 망하고 할 때 건강한 사람들은 덤으로 얻는 행복감을 만끽하고 있습니다. 가난한 자가 행복한 순간은 언제냐 하면은 자기보다 더 가난한 사람을 만났을 때뿐이에요. 그러면 돈이 한 20억 원 있는 사람이 불행할 때는 언제입니까? 돈 5000억 원이 있는 사람을 만났을 때에요. ‘내가 차라리 죽는 게 낫지, 이게 사는 것인가?’라고 생각해요. 따라서 이 세상의 세계관은 뭔가 하면은 인간의 윤리, 도덕, 행복은 껍데기에 불과하고 그 밑바닥은 세포의 움직거림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어요. 그리고 그 세포라고 하는 것은 생물학에 속하거든요. 생물학 밑에 물리학이 있고 그 물리학 밑에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가 있습니다. 이 우주가 있어요. 그래서 이 물리학에 기초한 세계관은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살다가 살다가~~· 그래서 제가 주일날 제가 입구하고 출구밖에 없는 아메바 이야기를 했지요. 안에 에너지에 의하면 에너지는 튜브밖에 없다고요. 인생을 사는 것은, 이거에요. 아메바를 생물(생명)이라고 하지 무생물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아메바의 생명은 어디에서 나왔어요? 입구에 들어온 에너지원에 의해서 잠시 진동할 때 사람들은 이걸 생명이라고 하는(보는) 거에요. 그러니까 우리가 사는 것은 오늘 저녁에 밥을 먹었다는 말이거든요. 밥을 먹었으니까 에너지원, 단백질과 탄수화물이 들어왔지요? 세포는 그걸 원하고 있습니다. 그 단백질을 분해하고 거기에서 atp라는 에너지가 나오면서 그 에너지를 세포에게 공급을 하게 되면 세포는 각자 자기가 맡은 기능을 하면서 우리 몸이 돌아가는 거에요. 그걸 빼앗아 먹는 암세포도 있지만 어쨌든 간에 돌아간단 말이에요. 배가 좀 부르니까 하나님이고 예수고 그런 거에요. 배가 부르니까 ‘착한 일 좀 해볼까? 부모한테, 시어머니한테 효도를 좀 해볼까?’ 이게 지금 자기가 배가 부르다는 이야기거든요. 배가 부르다는 이야기를 그렇게 한 거에요. 지금 자기 몸이 아파서 고시반에 돈도 못 내고 있는 판에 엄마가 어디 있고 아버지가 죽은 게 어디 있어요. 아버지가 아프다고? 자기 몸이 빚을 져가지고 있는데 거기에 왜 오는데요? 노숙자들이 그렇게 돈이 없다고 하면서도 담배값은 어디에서 나오고 술값은 어디에서 나오는지 몰라요. 그것은 스트레스를 받아서 그래요. 이것이 아니면 자기를 달랠 길이 없잖아요. 달랠 길이 없다는 게 아니고 그게 배가 고프다는 이야기에요. 그렇다면 뉴턴에게서 확인된 세계관은 간단합니다. 이 세상에 우연은 없는 거지요. 필연밖에 없어요. 좀 냉혹하고 냉정하지만. 그러면 어떤 사람이 뉴턴이든, 아인슈타인의 멱살을 잡고 “네가 어디 있지도 않은 거짓말을 어디서 해?” 하고 흔들 수 있어요, 없어요? “이게 어디 사람을 현혹하려고 있지도 않은 원리를 말하느냐?” 하고 흔들 수가 없어요. 개기일식 때면 안 보이던 별이 보이니까요. 별빛은 직선으로 가는 것이 아니고 중력의 패인 홈에 따라서 우회해오는 거에요. 그렇게 우회해오는데 왜 우회해오느냐 하는 것은 우리의 잘못된 세계관 때문에 그래요. 왜? 우리가 빛의 세계관으로 바꾸면 되는데 우리는 뭐든지 빛은 똑바로 온다고 자꾸 고집스럽게 우기다 보니까 ‘별은 왜 자꾸 휘어져서 오지?’라고 하는 거에요. 그러니까 인간들이 “나는 똑바르다.”라고 하는 것, 그것도 사실은 똑바른 것이 아니고 중력이 쳐놓은 관계망의 담요, 푹신푹신한 담요에 그냥 한 지점을 차지했을 뿐이에요. 이걸 아인슈타인의 일방 상대성원리에서 그렇게 이야기했거든요. 일방 상대성원리라고 하는 것은 중력에 관한 것이고 특수 상대성원리는 빛의 속도는 변함이 없다는 것이거든요. 빛의 속도가 변함이 없으니까 뭐가 조종되어야 하느냐 하면은 시간과 공간이 줄었다 늘었다, 줄었다 늘었다 하는 거에요. 그러니까 100년을 산다고 하지만 100년을 살아봐도 또 다른 데에 가면 1000년을 더 살 것을 우리는 지금 1/10로 손해를 보고 있는 거에요. 우리가 다른 나라에 가면 1000년을 살아요. 괜히 운이 없어서 지구에 살아가지고 100년밖에 못 산다고요. 이러한 뉴턴의 주장을 가지고 화가 난다고 뉴턴의 멱살을 잡고 “어디에서 남을 미혹하느냐, 이 비현실적인 이야기를 어디에서 끄집어 내?” 하면서 그 사람을 보고 따질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모든 게 맞아들어가거든요. 그래서 사람들은 뉴턴을 보고 따지지를 못하고 “그냥, 내가 아는 대로 살래.” 이렇게 나오거든요. 그냥 나는 이 세계관에 대해서.. (그 세계관을 받아들이기에는 자기 자신이 허무해도 너무나 허무하지요.)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억지를 부려서 “인간은 바르게 살면 하나님께서 행운을 주신대.” 이게 옛날부터 쭉 인습적으로 왔던 거잖아요. “역시 자식이 효도를 하면 자식 대대에 복을 받는다.” 이걸 계속 붙들고 싶은 거에요. 윤리, 도덕이라는 것은 물리학 위에 서있던 하나의 헛개비 같은 것인데요. 그러면 부모한테 잘하면 복을 받는다는 것이 증명이 되었습니까, 안 되었습니까? 증명이 안 되지요. 그런데 지금 아인슈타인을 통해서 증명이 되었잖아요. 그러니까 아인슈타인이라는 인간을 받아들인 게 아니고 억지를 부려서 옛날에 해왔던 것을 받아들이는 거에요. 묻습니다. “그러면 누가 미신입니까?” 아인슈타인이 미신이에요, 아니면 그냥 이렇게 이야기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물리학에는 문외한이야. 나는 물리학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라. 사는 대로 살래.” 어느 게 비현실적입니까? 기존을 답습하는 게 비현실적이지요. 그냥 답습하는 사람이요. 그것이 그냥 이 세상에서 끝날 문제라면 제가 여기에서 이 물리학을 끄집어내지를 않습니다. 지금 문제는 예수님이 찾아왔다는 거에요. 그러면 예수님이 보는 현실이 옳습니까, 마르다와 마리아가 보는 현실이 옳습니까? 분명히 우리는 상식적으로 예수님이 옳다고 하거든요. 그런데 어느 쪽이 마음에 드느냐 하면은 예수님이 하는 말은 도통 무슨 말인지를, (마르다와 마리아도 못 알아들었지만) 오늘 우리가 그냥 “편하게 살래,”라고 하는 세계관에서는 예수님의 세계관이 무슨 말인지가 먹히지가 않아요. 그런데 먹히지 않는다는 것에서 문제가 끝이 나는 게 아니고 문제는 그런 마음가짐과 그런 자세로서 천국에 합류를 못해요. 이게 문제라니까요. 오늘 본문에 한 번 봅시다. 요한복음 11장 23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라고 했잖아요. 이때 24절 답변에 “마르다가 가로되”라고 나와 있지만 그렇게 하지 말고 우리 각자의 이름을 집어넣어 봅시다. 우리의 친오빠가 죽었습니다. 남자라면 친누나가 죽었습니다. 누가 죽었습니다. 죽었을 때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오빠가 다시 살리라”라고 하실 때 그 다음에 괄호를 열고 우리가 주관식으로 문장을 한 번 넣어보세요. “예수님, 마지막 날에 우리 오빠(누나)가 다시 살 줄을 믿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잖아요. 이게 바로 세계관이 안 맞다는 이야기에요. 지금 그 이야기를 요한복음 11장에서 하고 있는 겁니다. (하유, 지금 이 이야기를 하는 데에 시간이 이렇게 오래 걸리네요.) 지금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에요. 그러면 “예수님 뜻이 무엇입니까?”라고 우리가 묻기도 싫어요. 왜? 그걸 만약 예수님이 수정하려면 우릴 어느 정도로 해야 하느냐 하면은 “오빠 잘 죽었어. 그래, 주의 뜻이야.” 그게 선뜻 동의가 되어야 되는데 문제는 머리에는 억지로 박혀도 마음은 동의가 안 된다 이 말입니다. 이 말에 동의가 안 되면 내가 불행해진다니까요. 많은 사람들에게 이 복음을 이야기를 하면 “우리 교회는 복음을 몰라도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데?” 이러고 말아요. “지금 그게 옳습니까?”를 묻는 게 아니고 “숫자가 많이 모이면 되잖아. 예배당 크고. 그러니까 예배당이 크다는 것은 하나님이 인정해주는 교회다.” 그런 뜻으로 우기는 거에요. 그런데 예수님 당시에 예수님하고 합해 먹은 사람이 몇 명입니까? 끝에는 12명인데 12명이 다 떠났잖아요. 그러면 예수님을 반대하는 편은 몇 명이에요? 엄청나지요. 그러면 그 사람들이 구원을 받았습니까? 지식은 알아요. 메시아가 온다고 다들 알았습니다. 그런데 예수의 마음을 누가 알랴? 아무도 몰랐어요. 성령이 임해야 알아요. 성령이 임해야 압니다. 그러니까, “성령이 임하려면 성령을 주시면 되겠네요?” 라고 하는데 성령을 줄 때 그냥 주는 게 아니고 우리의 세계관을 바꾸기 위한 작업으로써 성령이 와요. “그러면 성령이 오면 바꾸어지겠네?” 천만에 바꾸어질 때는 내 세계관이 무엇이 문제인지를 알려주는 작업과 병행을 해서 바꿔준다 이 말입니다. 이걸 제가 강의 제일 처음에 했잖아요. 우리는 내가 알고 있는 데다가 덤으로 하나를 더 붙이면 가지고 있는 것에 하나가 더 붙어있는 식으로 알고 있는데 그게 아니고 예수님 쪽에서 왔다는 말은 내 쪽에서 생각하는 게 다 엉터리라는 뜻입니다. 내가 생각하는 게 다 엉터리다. 왜 엉터리냐? 나는 나의 행복만 있으면 돼요. 그 행복이라는 것이 인습이고 풍습이고 관습이거든요. 그걸 관성의 법칙이라고 하는 거에요. “내가 하던 대로 그냥 살래.” 주께서는 그 가운데에 내가 사랑하는 오빠를 죽이듯이 (제가 아까 늦게 온 사람을 보고 이야기했는데 그 오빠의 죽음에 누가 들어간다고 했습니까?) 예수님의 죽음을 집어넣어가지고 (그게 보편화되니까요.) ‘저렇게 훌륭하신 분이 왜 죽었지?’ ‘이렇게 훌륭한 오빠를 예수님이 왜 죽이지?’ (둘의 죽음이) 마찬가지에요. ‘하나님이 이렇게 훌륭한 오빠를 왜 죽이지? 하나님은 예수님이 저렇게 착한 일을 했는데 왜 죽이지?’ 그것은 “네 인생관은 죽음의 힘, 악마의 힘에 근거해서 그저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그까짓 것, 대충 그냥 몸 편한 대로만 살아왔을 뿐이다.”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빠를 죽여서까지 마르다와 마리아의 인생관을 바꾸려는 시도를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마르다와 마리아가 요구한 대로 오빠가 아플 때 찾아가지 않고 오빠가 죽고 난 뒤에 찾아간 겁니다. 오빠가 문제가 아니고 살아 있는 두 누이동생에게 뜯어고칠 게 많아요. 그걸 고치기 위해서 가장 사랑하는 오빠를 죽인 겁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고 했지요. 이게 이삭의 문제가 아니고 아브라함 본인의 사고방식을 뜯어고치는 겁니다. 그래서 현재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은 바로 새로운 세계관에서 일어난 거에요. 이것을 하고 첫째 시간을 쉽시다.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원리에서 이 세계는 중력의 바다요, 중력의 세계입니다. 모든 게 중력에 관계망이고 그 관계망 속에서 누구도 빠져나갈 수 없어요. 그렇다면 이 중력을 예수님은 무엇으로 바꾸느냐 하면은 예수님 중심으로 바꿔놓아버려요. 어떤 것도 예수님의 관계망 속에서 빠져나갈 수 없어요. 오빠가 죽든 살든, 너희들이 나한테 잘못 되었다는 것, 등등 전부 다가 그리스도 중심으로 일어납니다. 그 세계로 바뀐 세계관을 두 자로 천국이라고 합니다. 예수님 중심, 아들의 나라.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에서 이걸 이야기하는 거에요. 모든 것이 예수님의 뜻대로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입니다. 아시겠지요? 10분 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