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강의(2016. 6. 24) 1강
광주 강의(2016. 6. 24) 28-1
마가복음 8장 27절입니다. “예수와 제자들이 가이사랴 빌립보 여러 마을로 나가실새 노중에서 제자들에게 물어 가라사대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는 이 예수님의 물음에는 상당히 깊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지금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물었지요? 그런데 예수님과 제자들 간에는 서로 교류될 수 있는 처지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속한 구조와 제자들이 속한 구조가 달라요. 그래서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실 때 제자들이 그 말뜻을 알아들을 수가 없어요.
예수님이 어떤 말씀을 하시면 그 말씀은 그분이 속한 구조에서 나온 말씀이거든요. 사람들도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구조 속에 놓여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예수님 말씀을 들을 때 구조적인 선입견으로 듣기에 자기식의 이해가 있을 뿐 예수님 의도와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예수님이 어떤 말씀을 하셔도 제자들은 오해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건 제가 일방적으로 우기는 것이 아니고 33절을 보세요.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가라사대”라고 했지요. 그러니까 이 말은, 사전에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이 있는데 그 말씀을 베드로가 제대로 못 알아들었기에 꾸짖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생각해 봅시다. 당신의 말을 제자들이 못 알아듣는다는 것을 뻔히 아시는 예수님이 왜 못 알아듣는다고 꾸짖으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무식해서 깨닫지 못한 것이 아니지요. 자신들은 판단력도 있고 지혜도 있어서 예수님의 말씀을 잘 알아듣는다고 여기지만 사실을 자신의 구조 속에서 이해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내가 이해 못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내가 빠져나올 수 없는 구조 때문에 예수님 말씀에 대해서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해요. 이런 상황을 아시고 주님은 “사단아 물러가라!”는 말씀을 하셨어요. 이 말씀은 베드로를 책망하는 것이지만 사실 베드로를 책망할 수 없어요. 왜냐? 베드로는 자신이 속한 구조를 대변해서 말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지요.
예수님이 꾸짖은 것은 베드로를 꾸짖은 것이 아니고 베드로가 속해 있는 구조를 꾸짖는데 그 구조가 ‘사단’입니다. 33절에서 “사단아 내 뒤로 몰러가라.”고 하신 후에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라고 했어요. 그러면 예수님이 속한 구조에서만 하나님의 일이 되고, 그 외에는 하나님의 일과 전혀 부합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당시 베드로를 꾸짖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오늘날 우리에게도 꾸짖고 계십니다. 그러면 다시 문제를 간추려 봅시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우리가 어떻게 알아듣는가 하는 문제, 우리 자신의 문제로 돌아옵니다. 베드로만 꾸짖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을 꾸짖기 위해 말씀하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럼 주님 말씀을 통해서 내가 속해 있는 구조의 정체가 악마적인지 아닌지를 파악을 해야 되겠지요. 그 파악하는 방법이 뭡니까? 예수님의 말씀 속에 들어있어요. “정신 차려!”라고 하실 때 “예, 정신 차려서 주님 말씀 잘 듣겠습니다.” 이러면 안 돼요. “정신 차려!”라는 꾸짖음 속에 우리가 해결할 수 없는 해결책이 주님 말씀 안에 이미 세트로 갖춰진 체 우리에게 말씀을 주십니다.
그럼 주님이 세트로 갖춰서 주신 말씀의 내용이 무엇인가? 이것이 오늘 공부해야 할 핵심입니다. 사람들이 서로 대화할 때는 상대를 잘 이해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보시기에는 서로 소통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어요. 왜냐? 피조물은 반드시 창조주를 거쳐야 연결이 되도록 만들어 놓았어요. 하나님을 거치지 않고 두 사람이 서로 소통한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피조물 사이의 관계는 예수님이 맺어줘야 됩니다. ‘주 안에서 부모를 공경하라.’고 했지요. 형제가 사랑할 때도 ‘주 안에서 서로 사랑하라.’ 주님을 거치지 않고 인간들끼리만 나누는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런 관계는 슬픔으로 끝이 납니다. 인간들의 사랑은 이미 슬픔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아쉬움과 결핍으로 끝나요.
“너를 처음 보았던 그 느낌 그대로 내 가슴속에 머물길 원했었지만 서로 다른 사랑을 꿈꾸었었기에 난 너의 마음 가까이 갈 수 없었네.” 전유나가 부른 [너를 사랑하고도]의 가사입니다. 인간들의 사랑은 처음 봤을 때 그 느낌 그대로 간직하고 싶어요. 그러나 서로 다른 사랑을 꿈꾸고 있어요. 정말 잘 지적했어요.
나는 당신을 사랑하지만 이것은 일방적입니다. 상대방을 이해할 수 있는 여력이 우리에게 남아 있지 않습니다. 왜냐? 자기 사랑에 빠져있기 때문에. 자기 사랑에 몰두하다 보니 상대에게 맞춰주지 않아요. 상대를 처음 보았을 때 느낌이 너무 좋았어요. 그런데 이것은 나의 일방적인 느낌입니다. 그리고 이 느낌 그대로를 간직하길 원해요.
처음 보았을 때 그가 아름다웠다면 계속 그 아름다움을 유지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 속에 있는 구조이고, 예수님 말씀을 이해 못하는 선입감이에요.
남녀가 서로 사귀지요. 남자들은 사귐의 결말이 결혼하는 것입니다. 남자가 결혼 전에는 여자에게 친절하고 잘합니다. 여자는 그 따뜻한 친절이 결혼 후에도 계속될 것으로 믿고 결혼을 허락합니다. 그러나 남자는 결혼에 성공하면 목적을 달성했기에 더 이상 친절을 베풀지 않습니다. 결혼 전에는 사귐이 있었지만 결혼하면 더 이상 사귐이 필요치 않다고 여깁니다. 결혼을 위해 헌신하고 투자한 것은 결혼 후에 뽑아 먹겠다는 생각으로 했기에 결혼을 하면 지시하고 명령하지 친절을 베풀지 않습니다.
인간은 자기 사랑의 범위에서 못 벗어납니다. 남을 사랑한 적이 없습니다. 상대와 사귀면서도 자기 사랑을 한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이 중재할 수 있는 자리가 없어요. 인간들이 다 이렇다는 것을 예수님이 아시기에 자기 사랑으로부터 분리시키는 작업을 주님이 하십니다. 분리시키면 빈자리가 생기는데 그 빈자리에 주님이 들어갑니다.
들어가면서 “너는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어요. 본문(29절)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이 질문을 하신 거예요. 이것은 ‘너’에서 ‘너’를 때내야 돼요. 인간은 자신이 너무 소중하기 때문에 자신에게 실망하지 않는 한 자신에게서 때내어지지 않아요. 사람은 자신에게 실망하지 않아요. 왜? 너무 좋아하기 때문에.
너무 좋은 것을 때놓기 위해서는 자신에 대해 깜짝 놀랄만한 일이 있어야 돼요. ‘내가 그것밖에 안 돼!’ 이렇게 되려면 베드로가 상상도 못한 뒤통수치는 이야기가 나와야겠지요? 그게 바로 “사단아 물러가라.”는 말입니다.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이런 과격한 말을 해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은 자기에 대한 애착의 강도가 너무 심해 절대 자신에 대해 실망하지 않아요.
예수님께서 그 자리에서 십자가 이야기를 하십니다. 그것을 통해 제자들의 구조 자체에 복음이 없다는 것, 예수님이 끼어들 자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동안 제자들은 뭘 했는가? 예수님을 하나의 대상으로 본 거예요. 자기 사랑을 아낌없이 주님께 퍼붓는 겁니다. ‘이 정도 성의를 표했으면 주님이 섭섭지 않게 보답해 주시겠지?’ 이런 생각으로 주님을 대한 거예요.
오늘날 교인들과 똑같아요. ‘이 정도로 주님을 사랑한다고 했으면 주님께서 날 인정해 주겠지.’ 라고 생각합니다. 서로 다른 사랑을 꿈꾼 거예요. 사람들은 천국에 가도 자신이 주인공이고 본인이 대단한 존재이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천국은 예수님만 높여지는 세계입니다. 그러니 서로 다른 사랑을 꿈꾼 거예요.
‘서로 다른 사랑을 꿈꾸었기에 나는 너에게 다가 갈 수 없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갈라서야지요. 예수님이 떠나는 것은 제자들 입장에서는 준비 없는 이별이 됩니다. 그래서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우리가 주님을 핍박해야 됩니다. 주님을 핍박하지 않으면 예수님과 제자들 노선에 있지 않은 거예요.
제자들은 본의 아니게 예수님과 헤어질 수밖에 없고, 그것이 주님에게는 핍박이 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우리가 그 노선에 들어가야 됩니다. 이게 바로 죄인이 되는 노선이죠. 제가 단언합니다. 죄 짓지 않는 사람은 천국에 못 갑니다. 그런데 예수 믿고 난 후 죄를 안 지으려고 하니까 역시 천국에 못 갑니다.
예수 믿으면 본격적으로 자신이 죄 짓고 있다는 감이 와야 돼요. 죄를 지음으로 예수님을 핍박합니다. 그러나 그 자리가 제자들이 구원 받은 자리입니다. 예수님을 떠나고, 예수님을 핍박했기에 구원 받은 것입니다. 왜? 그런 자가 구원되어야 천국에서 자기 가치를 외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제 천국이 어떤 동네인지 아시겠습니까? 미워했기에 구원받은 것은 오직 주님의 공로로 드러납니다. 그래야 구원의 의미가 살아납니다. 조금이라도 구원받은 자의 공로가 포함되면 그 노선은 지옥 가는 길입니다. 갈라디아서 1장 10절에 나오지요. 사도 바울이 하는 말이 ‘내가 사람을 기쁘게 하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다.’
베드로가 꾸중을 들었으면 우리도 마땅히 꾸중을 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천국 가는 노선에 탄 거예요. “당신은 주님께 꾸중 들었습니까?” “예, 꾸중 들었어요.” 천국 노선입니다. 어떤 사람은 “나는 꾸중 안 들었는데요.” 이런 사람은 천국과 다른 노선에 있는 사람입니다.
꾸중을 들어야 해요. 본인의 근본이 폭로가 될 경우에만 꾸중을 들은 것입니다. 꾸중의 계기가 뭔가? 29절에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여기서 ‘너희’는 이미 구원 받은 사람이에요. 가룟 유다는 제외하고. “제자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이 말씀을 하시는 순간 주님의 구원 능력이 작동합니다.
전유나 노래 가사를 보면 ‘너를 사랑하고도 목이 메인다.’고 합니다. 사랑이 슬픈 이유는 일방적이기 때문입니다. 서로 다른 사랑을 꿈꾸기에 만족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중재되지 않으면 서로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부부는 그냥 결혼하면 안 돼요. 주 안에서 사랑해야 됩니다. 불신자에게는 이런 말이 의미 없습니다. 그래서 서로 이용만 할 뿐이지요.
출애굽기 4장을 보면 모세와 십보라 부부가 나옵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죽이려 했습니다. 모세의 아내가 해야 될 일이 뭡니까? ‘왜 하나님은 내 앞에서 남편을 죽어가게 하는가?’ 십보라는 하나님을 개입시켰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자기 백성이라도 언약에 어긋나면 제거하시는 하나님이란 것을 십보라는 알고 있어요.
아브라함의 이야기가 이미 소문으로 퍼졌어요. ‘내게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고, 내게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 아브라함이 갖고 있던 그 위상 속에 들어 있는 하나님의 언약이 저주와 축복을 결정합니다. 그것을 십보라가 알고 있었습니다. 남편 모세를 하나님이 죽이려 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 하나님의 언약을 개입시켰습니다. 피 언약, 할례 언약이죠.
할례를 행치 않은 아들에게 할례를 행해서 그 자른 부분을 (원문에 의하면) 모세에게 닿게 했어요. 이것은 출애굽기 12장에 보면 유월절에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발랐다는 것과 관련 있다고 주장하는 신학자가 있는데 일리 있는 주장입니다. 할례를 행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 피를 가지고 모세에게 닿게 하니까 모세가 살았습니다.
그러면 이 부부 사이에는 인간적으로 서로 사랑한다는 것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중재가 있을 때 둘이 하나가 되는 겁니다. 이게 사랑이에요. 주님의 사랑은 피 없이는 안 됩니다. 이 말은, 모세가 하나님 앞에 죽임을 당하는 경우가 발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세가 스스로 죽으려 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멀쩡한 모세를 죽이려 했어요. 시작이 하나님에 의해 시작되었습니다. 시작할 때 모세가 죽음에 직면하게 되고, 거기에 대해서 십보라가 아브라함 언약(할례 언약)을 생각해서 아들의 할례를 행해서 양피를 던지니까 모세가 멀쩡하게 되었지요.
죽어야 될 모세가 죽어야 될 이유를 몰랐어요. 그런데 아내의 처방전을 통해서 죽어야 될 이유가 밝혀졌어요.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십자가 믿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에요. 구원 받는 이유는 천국의 즐거움을 누리라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증거하라고 구원 한 것입니다. 기독교 2,000년 역사에서 이것이 빠졌어요.
[교황의 역사]라는 책을 보면 기가 찹니다. 권력의 역사이지 복음과는 아무 상관이 없어요. 주님의 구원을 가시화 하겠다는 것입니다. 큰 예배당, 교회화 된 국가, 큰 권력. 이것은 주님께 영광이 안 됩니다. 주님은 십자가 증거하라고 구원한 거예요.
이미 구원 받았다는 말은, 하나님이 모세 인생에 관여를 하신 거예요. 따라서 구원받은 성도는 자기 인생이 없어요. 예수님의 중재를 통해서 성도와 성도의 만남, 하나님과 성도의 만남을 구성하는 것, 이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모세만 구원 받으면 안 되고, 이스라엘 전체가 구원 받아야 하지 않나요? 출애굽기 1장 17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나 산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애굽 왕의 명을 어기고 남자를 살린지라.” 20절에 “하나님이 그 산파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니라 백성은 생육이 번성하고 심히 강대하며”
애굽 왕이 히브리인들의 번성을 막기 위해 남자 아이가 태어나면 죽이라고 했습니다. 산파는 아기를 받으면서 목숨을 걸어야 할 상황이 왔습니다. 제가 지금 하는 이야기는,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는데 우리 목숨 자체를 내놓으라는 식으로 과격하게 찾아오시면서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집단적으로. 이스라엘 전체를 완전히 괴멸시키기 위해서.
그런데 출애굽기 1장에 의하면 산파가 하나님을 두려워했지요. 이게 무슨 뜻입니까? 히브리인 남자 아이가 태어나면 죽이라는 명령이 바로 왕의 명령이 아니고 원천적으로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바로 왕이 설치는 것은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히브리인들을 구원하기 위한 과정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산파는 하나님을 두려워해서 목숨을 걸고 바로 왕의 명령을 어기고 아이를 살린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산파에게 은혜를 주셔서 그들의 목숨을 살려주셨지요. 제가 지금 말하려고 하는 것은 ‘무엇을 거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뭔가? 자기 스스로 자신을 지탱하려는 세속적 상황에서 손을 놓게 되는 상황이 찾아옵니다.
그런 환경에서 모세가 태어납니다. 여러 여인의 도움을 받아 죽지 않고 삽니다. 산파, 누나, 바로 공주의 딸, 엄마. 특히 누나는 갈대 상자에 떠내려가는 동생 모세를 따라가면서 보살피지요. 미가(6장 4절)에 보면 모세와 아론과 누나(미리암)가 동급으로 나옵니다. 세 사람의 지도자에 의해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여튼 누나가 많은 역할을 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출애굽 한 후 여호와를 찬양하는 노래도 했지요(출15:20-21절).
나중에는 모세를 비난하다가 문둥병에 걸리기도 했지만, 백성들은 미리암을 지도자로 여겼기에 그가 문둥병에서 나을 때까지(7일간) 이스라엘 진영은 전진하지 않습니다(민 12:10-16 참조). 그를 두고 가지를 않아요. 그와 합류해서 가기를 원했어요.
성경에서 연약한 여인을 개입시키는 이유가 있습니다. 모세도 아내가 아니면 죽었어요. 이것은 지극히 작은 권력이 큰 권력에 갇혀 못 나오는 우리를 건져내는 더 큰 권력으로 작용한다는 겁니다. 우리는 큰 권력을 놓쳤다고 실망을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우리 자신으로부터 분리시켜 그 틈새에 주님의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서 우리를 실망시키는 것입니다.
“내가 진짜 못난 놈이구나.” 이런 소리가 나오도록 주님이 유도하십니다. 주님이 유도하심을 느끼는 자는 이미 구원 받은 자입니다. 십자가가 무엇인지를 증거하기 위해서 특채 된 사람입니다.
출애굽을 언급한 것은, 제자들이 당했던 낭패가 구약 때부터 구원의 절차로, 하나님이 개입했다는 신호로 그런 현상이 이미 일어났어요. 그런데 인간의 입장에서는 낭패 당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인간은 자신이 완벽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인간 속에 있는 일탈의 욕망이 올라옵니다.
일탈의 종류가 사람마다 다른데 [파리의 마지막 탱고]라는 영화를 보면, 남자와 여자가 나오는데, 중년의 남자는 완벽한 자기 방어를 하는 사람입니다. 자기 관리가 철저한 사람이지요. 그런데 젊은 아가씨는 정 반대입니다. 이 사람은 의도적으로 자신을 함부로 굴려서 허무의 끝을 맛보려고 합니다.
남자는 모든 것이 완벽한데 젊은 아가씨를 만난 순간 그 여자를 차지하고 싶은 생각이 들어요. 그 아가씨의 몸을 원해요. 그런데 아가씨는 모든 허무 속에서 진리를 터득하기를 원합니다. “나는 이 나이에 허무 속에서 진리를 알았어.” 허무는 자기 파탄이에요. 의도적으로 무질서와 파탄에 몸을 던져 진리를 찾으려고 합니다.
어떤 남자가 안산에서 강릉까지 걸어서 왕복을 했어요. 20대에. 2주가 걸렸답니다. 일부러 돈도 없이 걸어가는데, 가다가 배가 고프면 구걸해서 먹었답니다. 고생을 통해서 자신의 의지도 시험해 보고 세상을 파악하겠다는 거지요. 이 사람이 누구냐 하면 가수 하현우. [복면가왕]에서 9승을 한 사람입니다. 고생을 사서 하는 거예요.
남자와 여자가 만나요. 그런데 만나는 이유가 서로 달라요. 남자는 완벽한 사람인데 아가씨를 보는 순간 그녀를 차지하고 싶은 욕망을 어찌할 수가 없어요. 감당이 안 돼요. 자기 몸에 있는 기생충은 나가라고 해도 나가지 않습니다. 나는 내가 관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기생충이 나에게 들어와서 나갈 생각을 하지 않아요.
나는 완벽한 자라고 여겼는데 우연히 만난 아기씨 때문에 자기 통제가 되지 않고 보고 싶어서 미치는 거예요. 이것은 본인의 능력 밖의 문제입니다. 아가씨는 저 남자에게 내가 몸을 바쳐서 세상에서 금기로 설정해 놓은 선을 넘어보는 거예요. 선을 넘으면 무엇이 있는지 알고 싶어 선을 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자가 묻습니다. “아저씨, 이름이 뭐예요?”라고 하면서, 여자는 자신의 모든 것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남자는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습니다. 이것이 영화의 주제입니다. 이름 없는 것과 이름 있는 것의 만남은 비극입니다. 남자가 왜 이름을 이야기하지 않는가? 남자는 알아요. 이름을 밝히는 순간 그 여자와 동질이 됩니다.
그런데 남자는 스스로 완벽한 자입니다. 저 더러운 여자가 내 괜찮은 인생이 끼어들면 안 돼요. 그래서 이름을 절대 밝히지 않습니다. 이름은 숨긴 채 몸만 원해요. 둘의 만남은 어울리지 않는 만남이죠. 나중에는 결국 헤어집니다. 남은 것인 빈 아파트입니다. 아파트에서 격렬하게 성관계를 할 때 남자는 여자의 몸을 탐닉하고, 여자는 금지 된 선을 넘어보는 겁니다.
남자는 끝까지 이름을 밝히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네가 넘어섰다는 그 자리가 내 영역이 아니고 확대된 너의 일탈의 연장에 불과하다.’는 것이지요. 분명히 인간이 할 수 없는 것까지 했는데도 불구하고 남은 것은 더 넓어진 허무의 영역입니다. 여자에게는 이것이 남고, 남자는 자기가 자기를 지키겠다는 테두리를 폭파하는 것이 바깥에 있는 여자의 유혹이 아니고 자기 내부에 있는, 내가 통제하고 있다고 생각한 내가, 내 통제에 눌리지 않고 폭발해 버린, 어디 있는지도 몰랐는데 젊은 여인이 오는 순간 발짝을 일으키는 욕구, 욕망. 그것에 완전히 폭파당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파리의 마지막 탱고]라는 영화입니다.
오늘날의 모든 인간관계는 서로 안 맞는 층이 만나 같다고 착각하며 서로 어우러지는 것일 뿐입니다. 부부, 친구, 동창 등 모든 관계가 안 맞는 관계입니다. 처음 보았던 느낌 그대로 가슴에 간직하려 했는데 나중에 보니까 서로 사랑하는 대상이 달랐어요. [파리의 마지막 탱고]에서는 사랑의 대상이 뭡니까? 어떤 인간도 자기 분리가 안 되었어요. 자기만을 사랑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름이 없어요.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예수님은 인간들과 층이 달라 인간들이 알아 챌 수 없습니다. ‘인자’는 이름이 아닙니다. ‘인자는 ~다.’라고 할 때 그 빈자리를 제자들에게 채워보라는 거예요. 베드로가 뭐라고 했습니까?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라고 했지요.
베드로가 정답을 말했는데 이것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알려주신 것일 뿐, 베드로는 아직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상태에 있습니다. ‘인자’는 예수님의 이름이 아닙니다. 인자는 비어있고, 그 공백은 예수님이 십자가 지심으로 채워집니다. 예수님이 질문하시기를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인자’의 자리가 공백이라면 이 공백은 예수님에 의해서만 채워질 공백입니다. 이제 제자들을 이 자리에 집어넣을 거예요. 집어넣으려면 이름 없는 분이 이름 있다고 우기는 제자들을 위해서 그들의 이름을 삭제하는 작업을 해요. 이름을 삭제한다는 것은 존재를 삭제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아버지로부터 버림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아버지로부터 버림 받았다는 말은, 인간들이 버림받은 거예요. 버림받은 자에게는 아버지가 인정하는 이름도 이미 끊어진 겁니다. 인간이 이름을 거론해도 소용없어요. 아브람의 경우는 그 이름이 끊어져도 아브라함이 주어졌지요. 이삭은 원래 이름이 없고. 이삭 이름은 아브라함이 불신하는 이름이고. 야곱의 이름은 삭제하고 이스라엘이 되지요.
하나님의 이름은 이스라엘과 이삭, 아브람이 아닌 아브라함. 이런 이름을 모아놓게 되면 이 이름은 누구 이름이냐 하면 우리 이름이 아니고, 아브람과 이삭 이름이 아니고 예수의 이름이에요. 예수의 이름은 그 이름 자체가 우리의 모든 이름을 삭제함으로 아버지와 우리 사이에 중재를 하시는 겁니다.
주님이 중재자가 되어 만나게 해 주십니다. 십자가 안에서 만나게 해 주십니다. 만남이 성사되면 우리 이름으로 나가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 이름으로 주님 앞에 나서게 됩니다. 이런 최종 결과를 이미 아는 자는 주의 이름을 부르게 되어 있고,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습니다.
10분 쉽시다.
(2016. 6. 30. 19:27 녹취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