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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대구 10월 4일 교회를 넘어서 8 새 언약 6강의에스겔

대구 10월 4일 교회를 넘어서 8 새 언약 6

이름 : 이근호(IP:)

015 20041004

http://media.woorich.net/신학강의/2004대구/대구041004교회를넘어서8새언약6.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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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IP:220.♡.176.169)

09-05-27 15:53

대구041004교회를넘어서8새언약6

[04 대구강의 16] - 교회를 넘어서 8 - 새 언약(에스겔) 6

04,10,04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하나님은 왜 인간들에게 성전을 짓도록?

오늘은 교재 ‘교회를 넘어서’ 257페이지부터 살펴보자.

** 거룩을 만들어 내지도 못하는 성전을 인간들 손에 짓게 만들어서, 거기에 하나님의 거룩이 담겨버리면, 결국 인간은 그 거룩의 무게로 인해서 짓눌려 버리게 되고 망할 수밖에 없고, 또 화를 입어야 마땅한 존재로 드러난다(사 6:1-6).

여기에 보면 “거룩을 만들어 내지도 못하는 성전을” 이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거룩을 만들어낼 수가 있다는 말인가? 성전은 거룩을 만들어내어야 되고, 그 성전에 들어왔던 사람은 기도의 응답을 받게 되어있는데, 그 응답이 바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 그것이 곧 기도의 응답이 된다는 말이다.

우리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왜곡된 구원관과 축복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정작 기도를 하라고 하면 왜곡된 축복관과 인생관을 담아서 기도를 하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자기 자유겠지만, 그러나 정작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따로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바로 ‘거룩됨’ 인데, 그러면 사람들은 또 잔대가리를 굴려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거룩을 바치면 자기가 원하는 축복을 해주느냐고, 그렇게 흥정을 하려고 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인간은 이렇게 애초 태어날 때부터 그야말로 문제투성이인데, 자기가 원하는 것을 결코 포기하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이 얼마나 집요한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 하나님” 이라고 간절하게 불러도, 정작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외면해버리고, 그만 자기가 원하는 것을 달라고 때를 쓴다는 것이다.

◈ 교회는 목욕탕 ??

우리가 이렇게 모이는 ‘교회’ 라는 것은, 사실 사람을 끌어 모으는 곳이 아니고, 오히려 사람의 본질을 드러내는 곳인데, 그러니 일종의 목욕탕과 같은 구실을 한다는 말이다. 위선과 허위를 마치 때를 벗기듯이 그렇게 밀어서 벗겨내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신학적으로는 ‘종말론적 공동체’ 라고 부르는데, 이렇게 교회가 종말론적 공동체가 되어버리면, 마지막 심판대에 설 자기 자신의 모습을 미리 앞당겨서 들추어낸다는 것이다.

바로 그러한 일을 교회에서 하기 위해서, 지금 이 땅에 교회가 있다는 말이다. 그것을 구약에서 성전의 의미로 살펴보자면, 이 성전의 역할은 자기가 전혀 거룩하지 않음을 거룩 앞에서 드러내는 것인데, 그것은 오늘날 교회도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 잠시, 이혼문제에 대해서 !!

어제 낮에 이혼문제에 대해서 설교를 했는데, 내용이 좀 충격적이었는데 말이다. 인간들이 지금 헤어지지 않고 살아가는 것을, 마치 “하나님께서 짝지어준 것을 사람이 나누어주지 못한다” 라는 계명을 잘 지키는 것으로 착각을 하고 있는데, 하지만 그렇게 되면 어떤 일이 발생하는가?

자기가 그만 말씀을 지키는 자가 되는데, 그러니 그 말씀에 대해서는 자기에게 해당사항이 없게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는 신랑이나 마누라와 헤어지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렇게 되면, 그 말씀을 누가 지키느냐에 따라서 ‘자기 의’ 인지, ‘예수님의 의’ 인지 구별이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예수님의 의를 두 글자로 뭐라고 하는가? 그것이 바로 ‘복음’ 인데, 그렇다면 이러한 인간의 자기 의도 과연 복음이 되는가? 전혀 복음이 아닌데, 오히려 그것은 인간의 행함이 되면서 예수님의 의라고 할 수 있는 복음을 핍박하게 된다는 것이다.

실질적으로 부부가 이렇게 사이좋게 잘 살아가는데, 그런데 그것을 하나님이 짝지어준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한다고 하는 증거로 본다고 하면 어떻게 되는가? 그런 사람은 제 아무리 복음을 이야기해도 여전히 한 구석 믿는 것이 따로 있는데, 그것이 바로 자기의 행함이라는 것이다.

◈ 인간은 왜 변명을 하는가?

그래서 제가 이렇게 그것을 찌르고 들어가면 상대방에서는 움찔하면서 반박을 하지 싶은데, 즉 “제가 언제 하나님이 짝지어준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한다는 말씀을 지킨다고 했습니까?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로 지금 살아가고 있다고 했지 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은혜라고 말도 하지 못합니까” 라고 말이다. 그렇게 변명을 줄줄이 늘어놓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사람은 무엇을 모르는고 하니, 은혜라는 것은 ‘그저’ 주시는 것인데, 그러니 은혜는 반드시 다음과 같은 것이 전제가 되는데, “나는 왜 이 말씀을 지키지 못하는가?” 라는 것이 말이다. 그런데 “나도 내 힘으로 할 수 있는데” 라고 나오면 그것은 은혜가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이 잘하고 있는데 괜히 간섭한 결과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 은혜는 무엇이 전제되어야 하는가?

그러니 은혜가 은혜다우려면, 사도바울처럼 “나는 죄인 중에 괴수이다” 라는 것이 반드시 전제가 되고 난 다음의 일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인간은 그게 아니라는 말이다. 즉 “하나님이 짝지어준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한다” 라는 것을, 굳이 하나님이 도와주지 않아도 자기가 알아서 지킬 수가 있다고, 즉 자기 힘으로 서로 헤어지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고 여긴다고 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다시 말해서, 성경에서 그렇게 자기가 헤어지지 않고 살아가는 것도 은혜라고 하니, 그렇게 은혜라고 여기자는 식으로 나온다면, 즉 그 정도는 자기의 윤리의식으로도 버틸 수가 있다고 여긴다면 말이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가 가슴속에 전혀 스며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당신은 지금 살아가는 것이 정말 하나님의 은혜입니까?” 라고 하면, “예,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라고 겉으로 말은 하겠지만, 그러나 속으로는 뭐라고 하겠는가? “서로가 좋아서 같이 손잡고 한 집에서 살아가는데, 뭐 그런 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면서 감격을 하는가?”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 매일같이 싸우는 부부의 경우에 !!

그런데 둘이서 매일같이 싸우는 부부가 있다고 하면, 부부가 같이 식당을 하든지 하면 그렇게 되는데 말이다. 그렇게 하루가 멀다하고 갈라서자고 하는 부부에게 “아직도 서로 같이 삽니까?” 라고 하면, “예, 주님의 은혜로서 살아갑니다” 라고 한다면, 이 부부의 경우에 은혜라고 하는 것에 무엇을 전제로 깔았는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고 하면 우리는 벌써 째졌다” 라는 것을 전제로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서로 좋아서 살아가고 있는 첫째 부부의 경우에는, 서로 헤어지라고 하면 한강에 뛰어들 것만 같은 부부에게 그런 질문을 한다고 하면, 뭐라고 대답을 하겠는가? 그냥 지식적으로 답변을 하는데,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것이 어디 있습니까? 모두 은혜입니다” 라고 말이다. 하지만 내심으로는 별로 그렇게 은혜가 땡겨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 예, 하나님은 은혜입니다 ??

그것은 목사를 목회를 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인데, 즉 “나 같은 인간이 어떻게 설교를 하지? 도대체 있을 수가 없는 일인데, 정말 하나님의 은혜로구나” 라고 말이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내가 아니면 설교를 제대로 할 놈이 누가 있겠는가?” 라고 한다면, 물론 그런 사람에게 동일한 질문을 해더라도 “예, 하나님은 은혜입니다” 라고 하겠지만 말이다.

그것을 사무적 용어라고 하는데, 구색용이라고 할까? 자기가 믿음이 있음을 보여주는 말이다. 그러나 여기에 대해서 사람은 몰라도 주님은 속아넘어가는 법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 의를 버리고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 라고 하는 이 간단한(?) 성경내용을, 우리는 우리의 한 평생동안을 두고두고 경험해야 한다는 말이다.

◈ 그 말씀은 헤어질 때 비로소 그 위력을 !!

제가 어제 설교를 마무리하면서, 우리가 “하나님께서 짝지어준 것을 사람이 나누어주지 못한다” 라는 말씀을 언제 적용시켜야 하는고 하니, 서로 헤어질 때인데, 비로소 그 의미를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아하, 우리는 서로 나누어질 수밖에 없는 자들이구나” 라고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갈라서는 연습을 일부러 할 필요는 없지만 말이다.

그러니 그 어떤 말씀이라고 해도 자기가 지켰다고 여기면 복음이 움푹 파이는 것인데, 예를 들어서,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성을 정복하고 나서 아이성을 아주 간단하게 여겼는데, 그러나 그것도 역시 오산이었다는 말이다. 그러니 우리는 그렇게 작은 아이성이라도 해도, 결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면 안 될 정도로, 우리는 우리 자신이 무능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 성전은 거룩과 의가 듬뿍 담겨서 !!

왜냐하면, 그러한 무능력의 기준이 바로 우리에는 ‘거룩’이 없다는 것인데, 물론 하나님이 원하시는 ‘의로움’도 없고 말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어디서 제공이 되는가? 성전을 통해서 제공이 되는데, 그래서 성전은 거룩과 의가 듬뿍 담겨서, 그렇게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성전을 성도의 몸이라고 하는 이유가 다 있는데, 왜냐하면 성도라는 것이 인간의 힘으로 될 방법이 완전히 차단이 되었기에 말이다. 참으로 간단한 이야기인데, 인간의 능력으로는 자기 자신을 성도로 만들 수가 없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이야기에 동의하는 사람이 많지 싶은데, 그러나 그것을 매일같이 체험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의 극소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대부분이 그냥 지식으로만 알고 있지 말이다.

◈ 0.03×0.03=0.009 ??

어떤 분이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하는데, 신학교 교수 한 분이 전국에 있는 100군데 교회를 표본조사를 했는데, 과연 복음대로 설교하는 교회가 얼마나 있는지 말이다. 유명한 교회도 있고, 시골에 있는 조그만 교회도 있고 말이다. 그래서 그 결과가 어떠한고 하니까, 무려 97퍼센트가 비복음적인 설교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저는 복음적인 교회라고 하는 그 3퍼센트의 교회도 다시금 조사하고 싶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선교나 구제를 강조하는 손봉호 교수가 장로로 있는 서울의 영동교회와 같은 곳도 다 들어있으니 말이다. 그러니 그러한 조사조차도 전혀 믿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정말로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자기들은 죄인일 수밖에 없다고 하는, 즉 자기가 자기를 성도를 만들 수 있는 능력은 눈꼽만큼도 없다고 하는 교회를 다시 그 3퍼센트에서 조사해서, 만약에 그 중에서도 3퍼센트가 나왔다고 하면 어떻게 되는가? 그것을 수학적으로 계산하면, “0.03×0.03=0.009” 라고 나오는데, 그렇게 되면 1000개의 교회 가운데서 무려(?) 9개나 나오는데, 지금 한국교회가 그 정도의 수준이라는 말이다.

◈ 손봉호 - 복음대로 전하면 교회에 올 사람이 없어 !!

손봉호 교수가 한국의 기독교를 진단하면서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복음대로 제대로 전하면 교회에 올 사람이 없다고 말이다(정말로?). 교회가 그야말로 복음대로 말씀을 전하면 모이는 숫자를 극복해야 하는데, 과연 지금 한국에 그런 교회가 있느냐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자기 의를 까버리는 교회에는 사람들이 모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기 존재의 정당성을 인정해줄 때 모이는 것이고, 그런 맛에 살아가는 용기를 얻으니 말이다. 그런데 복음은 인간 존재의 정당성을 까부수어버리는데, 어떻게 복음대로 설교하면 사람들이 모이겠느냐는 것이다. 인간은 자기 존재의 정당성이 확보되어야만, 즉 이 세상에서 자기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야만 살아가는 재미와 환희를 느낀다는 말이다.

◈ 인간은 왜 산을 정복하는가?

사람들이 왜 등산을 하고 산을 정복한다고 하는가?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걸고 말이다. 그래서 에베레스트에 오르다가 죽은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는 것이다. 물론 앞산에 오르다가도 죽는 것이 인간이지만 말이다. 사실 산은 가만히 있는데, 그런데 사람들이 자기들끼리 산을 정복한다고 하면서 생쇼를 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인간들이 그렇게 목숨까지도 걸고서 산을 정복하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그 산을 정복함으로서 그 산이 이제 자기 아래에 있다고 하는 자기 정당성이라는 것이다. 즉 자기는 이러 이러한 산을 정복할 수가 있는 위대한 인간이라고 하는, 자기 정당성을 알려주기 위해서 그렇게 한다는 말이다.

장애자들이 결혼을 하고 싶어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데, 자기들도 얼마든지 결혼을 해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휠체어를 타고 높은 산에 올라가기도 하고 말이다. 장애자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도 교통사고가 나면 그 자리에서 장애자가 되고 병신이 되는데,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을 두고 놀린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야말로 누워서 하늘을 보고 침을 뱉는 꼴인데, 우리가 이러한 짓을 얼마나 자주 잘 하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육신이 멀쩡해도 병신이라는 것이다. 왜 그런가? 수영을 못하는 인간은 물 속에서는 병신이 아닌가? 남들은 헤엄을 치는데, 자기는 맥주병이 되어서 가라앉으니 말이다.

◈ 나는 ‘거룩’을 소유하고 있는가?

핛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런 신체적으로 병신이지 아니면 멀쩡한지, 전혀 그런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면 무엇인가? 우리 인간으로서 도저히 만들 수가 없는 ‘거룩’을 소유하고 있는지, 그것을 물어보시는데, 그러니 교회에 나올 때 엉뚱한 것에 신경을 쓰지 말라는 것이다. 과연 주님이 주신 의로움이 자기에게 있는지, 그것만을 살펴보라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자기가 병신인지, 가난한지, 얼굴이 못생겼는지, 몸이 뚱뚱한지, 이혼을 했는지, 그러한 쓸데없는 그런 것에 전혀 신경을 쓰지 말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것들은 모두가 다 자기 존재의 정당성을 이야기하는 것이니 말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무엇인가? 예수님의 의이고, 거룩이고, 복음이지, 결단코 우리 인간의 정당성이고 의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 아까 말한 처음에 0.03퍼센트의 교회에 들어있는, 바르게 살기나 구제 등을 강조하는 교회가 정말 교회가 맞느냐는 것이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교회가 말이다.

◈ 하나님이 친히 만드신 자기의 의 !!

이제 여기서 조금 어려워지는데, “목사님, 그렇다면 어떻게 성전이 거룩을 만들어냅니까?” 라고 질문할 수가 있는데, 우리는 바로 여기에서 새롭게 출발해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의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만들어내시는 자기의 의, 바로 그것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그런데 신학교에서는 뭐라고 가르치는가? 성령이 임해야 성전인데, 솔로몬 성전은 아니고, 또한 신약시대는 우리의 몸이 성전이고,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려야 되고, 또한 메시야가 와야 된다고 하고 말이다. 그리고 예배는 교제와 봉사이고, 또한 교회에는 무형적 교회와 유형적 교회가 있고, 또 전투적인 교회도 있고 말이다.

그렇게 신학교에서 온갖 것을 다 가르치는데, 그런데 나중에 보니 그런 것들은 다 의미가 없고, 중요한 것은 오직 복음인데, 즉 하나님의 의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그것 하나만 남더라는 것이다. 다른 것은 전혀 남을 것이 없다는 말이다.

◈ 나는 피해자이니, 당연히 천사 ??

아까 이야기한 인간의 의 가운데서 하나만 더 추가한다면, 즉 자기가 남에게 피해를 입힌 가해자라고 했을 때, 그것도 참으로 부끄러운 일임에 분명하지만, 그러나 자기가 남에게 피해서 당해서 천사라고 한다면, 그것도 역시 잘못된 사고방식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전혀 교회를 근처에 가지도 않았는데 자식들을 똑똑하게 잘 키운 엄마들의 경우에, 물론 요즘이 아닌 옛날 엄마들의 경우인데, 그런 사람들에게 이런 의식이 엄청나게 강하다는 것이다. 자기는 교회에 가지 않아도 자식을 키운다고 반티장사(물건을 광주리에 담아서 파는 일종의 노점장사?)를 해가면서 고생을 하고, 또한 영하 10도가 넘는 날씨에 새벽에 일어나서 시장바닥에서 콩나물을 하나라도 더 팔려고 얼어붙은 손을 불어가면서 그렇게 애를 썼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것이 도대체 무엇이 잘못되었느냐는 것인데, 즉 자기는 자식에 대한 일종의 피해자라는 말이다. 그러니 피해자는 당연히 의롭고, 천당에도 그냥 넣어주어야 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러니 그런 논리구조에 무슨 문제가 있느냐는 말이다.

◈ 항상 자기 고생담을 !!

그런 사람들이 의외로 많은데, 사실은 다 그렇지만 말이다. 즉 자기가 고생을 했다는 것이 그만 자기 의로 축적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명절이 되어서 누구를 만나면 하는 이야기가 무엇인가? 자기가 자식 때문에 고생한 것을 털어놓는다는 것이다.

그러면 자식들은 당연히 그런 소리가 듣기 싫어서, “저를 낳기는 왜 낳았어요?” 라고 하면서 삐치고 말이다. 그러면 부모는 또 뭐라고 하는가? “니가 자식이 되어서 그것이 부모에게 어디 할 소리인가?” 라고 하면서 서로 싸운다는 것이다.

◈ 제사는 누구 아이디어인가?

그렇게 모여서 제사를 드리는데, 그런데 이 ‘제사’ 라는 것이 곧 조상에 대한 은덕인데, 그렇게 조상에 대한 은덕을 기리자는 것이 유치원생 아이디어에서 나온 것인가? 분명히 기성세대에서 나온 것인데, 왜냐하면 자기가 그런 은덕을 받을 만한 위치에 있으니 말이다. 그러니 사실 비겁한 짓이란 말이다.

그래서 어른들이 하는 말이 “아니, 자기 뿌리인 조상님도 모르면서 무슨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가?” 라고 하면서 화를 내는데, 그래서 명절이 되면 집집마다 얼마나 시끄러운지 모르는데 말이다. 정종을 한잔하고는 취해서 그러한 소리를 하는데, 가만히 계시는 하나님을 들먹이면서 욕을 말이다. 그런데 사실 그 말은 바꾸어서 이야기하면, “하나님 말고, 그냥 나를 좀 섬겨라” 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그리고 또 산소에 가서 벌초를 했느냐고 하면서 시비를 걸고 하는데, 무슨 천하에 불효자식처럼 여기면서 말이다. 그러면 아예 묘를 파서 흔적도 없이 없애버리면 된다는 말이다. 그러면 아무런 문제도 없는데, 묘를 이장하고 없애버린다고 어디 지옥에 가는가?

그리고 추도예배 때문에도 그렇게 고민을 하고 염려를 하는데,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그것은 바로 사람에게는 도저히 나올 수가 없는, 즉 제 아무리 사람들이 찾고 만들려고 해도 도저히 불가능한, 하나님 자신의 거룩과 의를 주시기 위해서 오셨다는 것이다.

◈ 하나님의 의는, 인간의 죄 속에서 피어나기에 !!

그렇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자기 자신의 거룩과 자신의 의를 우리에게 어떻게 주시는가? 이것이 바로 복음의 핵심이라면 핵심인데 말이다. 그것이 인간의 죄 속에서 피어나기 때문에, 우리는 이해하기가 너무 어렵다는 것이다. 우리 인간의 죄에서 말이다.

다시 말해서, 이러한 하나님의 의가 시장바닥에 펴놓고 파는 물건이라면, 그래서 서로 사고 팔고 하면 편한데, 그런데 그것이 구원을 받고자 하는 인간의 죄악 된 본심 속에서 피어나니까, 그것이 문제가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렵고 말이다.

◈ 한국교회를 개혁하자 ??

흔히들 한국교회를 개혁해야 한다고 하는데, 즉 지금 한국교회는 썩었기 때문에 새롭게 다시 시작을 해야 한다고 비판을 많이 한다는 것이다. 물론 장사를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는 철없는 젊은 목사들이 하는 소리이지만 말이다. 물론 자기 이미지를 보다 더 높이려고 하는 인간들도 있고 말이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어서 구원을 받고자 하는 그 죄악 속에서, 오히려 그런 구원의 욕심으로 인해서, 즉 죽어서 좋은 곳에 가겠다고 하는 그 욕심으로 인해서 짓밟힌, 바로 그 안에서 예수님이 자기 의를 가지고 기다리고 계신다는 것이다. 그러한 사실을 성령을 받지 않으면 누가 알겠는가? 아니, 어떻게 알 수가 있느냐는 말이다.

◈ 아하, 그렇구나 !!

만약에 그것을 알았다면 무릎을 치면서 탄성이 저절로 나오는데, “아하, 그렇구나!” 라고 말이다. 너무 좋아서 아마도 다윗처럼 춤을 추지 싶다는 것이다. 그렇게 한국교회가 썩었다고 비판을 하던 자기가, 바로 그런 자기 자신이 참된 하나님의 의를 가리고 짓밟고 있었다는 것이다. 자기 구원욕심이 말이다. 그렇게 자기 자신을 제대로 알게 될 때, 그것이야말로 진정 ‘유레카!’ 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이것을 성전중심으로 이야기한다면, 즉 하나님의 의가 어디에 계시는고 하니, 성전에서 하나님의 의와 거룩이 나온다고 할 수 있는데, 그렇다면 왜 하필이면 성전에서 나오는가? 그것은 바로 성전은 인간들의 소망이라는 것이다. 즉 인간들이 짓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거부하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 ‘인간은 왜 행동하게 되는가?’ 라는 글에 대한 변명 ??

그것을 좀 어려운 철학적인 용어로 ‘존재의 소유권(ownership)’ 이라고 하는데, 이것과 대비가 되는 것이 ‘존재의 자체권(ownship)’ 이고 말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인간은 왜 행동하게 되는가?’ 라는 글에 보면 나오는데, 제가 그것을 십자가마을에 올렸는데, 그런 글을 올릴 때마다 저에게 사람들이 짜증을 내곤 하는데, 그냥 간단하게 쓰면 되는데, A4용지로 50장이 넘어가니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렇게 쉬운 글도 전혀 아니고 말이다.

화장실에서 가서 읽으면 그냥 줄줄 내려가는 글을 쓰면 되는데, 무슨 변비에 걸리라고 주문을 하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그런 굵은(?) 글을 읽으라고 하니 어떻게 짜증이 나지 않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렇다고 깊은(?) 의미가 있는 것 같아서 함부로 진도를 뺄 수도 없고 말이다.

그런데 그 글은 20권도 넘는 책을 함축을 시켜서 그러한데, 그러니 알고 보면 그것은 쉽게 쓴 글이라는 것이다. 철학과 학생들이 30년 동안을 공부할 내용이 거기에 다 담겨있는데, 진리에 대해서 알고 싶어하는 모든 것이 다 들어있다는 것이다. 물론 세상에서 말하는 진리이지만 말이다.

◈ 존재의 소유권과 존재의 자체권 !!

제가 방금 존재의 소유권과 존재의 자체권을 말했는데, 그것이 무슨 의미인고 하니, 존재가 그냥 존재하면 되는데, 그런데 꼭 무엇인가를 소유하면서 존재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즉 ‘나’ 라는 존재를 보여주기 위해서 ‘나’의 것으로 삼는 것이 있는데, 그렇게 자기 것으로 끌어 모아서 자기 존재를 보여주려고 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이 존재의 특성이 마치 불가사리와 같아서 무엇인가를 계속해서 삼키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곧 소유의식인데, 존재는 그런 소유의식을 통해서 자기의 존재됨을 드러내려고 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존재의 이 소유권과 자체권 두 가지가 서로 싸우는데, 그것을 백두선생(?)인 화이트헤드가 지적을 했다는 것이다.

이 ‘인간은 왜 행동하게 되는가?’ 라는 글은, 부제가 ‘스토아 학파와 라이프니쯔와 화이트헤드의 철학을 고찰하면서’ 라고 되어있는데, 즉 스토아 학파와 라이프니찌와 화이트헤드, 그 세 가지의 철학을 무지무지하게 알기 쉽게(?) 쓴 것이 그 정도라는 것이다.

누군가가 그 글에 대해서 말하기를, 더 이상 알기 쉽게 쓰면 거짓말이 된다고 할 정도로 쉽게 쓴 글이라고 하는데, 물론 저도 동의하는데 말이다. 물론 다루고자 하는 내용자체는 어렵지만, 그러나 결코 어렵게 쓴 글이 아니라는 것이다. 스토아 철학은 내용이 그렇게 어렵지 않고 말이다. 그리고 이정우 씨의 책에서도 도움을 많이 받았는데, 돈은 좀 들지만 그분의 동영상 철학강의도 괜찮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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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은 왜 행동하게 되는가?’ 중에서

폴 틸리히가 신을 '존재자체'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 있다. 여기서 존재가 안고 있는 개념적 딜레마를 존재의 '소유권'과 '자체권' 문제와 결부해서 생각해 봐야 한다. 한문의 경우 존재를 의미하는 유(有)는 '있다(being)'는 뜻과 동시에 '갖는다(possessing)'는 두 가지 뜻을 함께 지닌다. 즉 존재권과 소유권을 동시에 지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있는 것'을 존재의 '자체권(ownship)'이라 한다면, 그 있음을 소유하는 것은 '소유권(ownership)'이라고 할 수 있다. 전선의 경우를 예를 들면, 전류는 전선을 통해 흐른다. 그러나 전선은 자신의 소유권에 해당되는 쇠붙이로서의 몫이 있기 때문에 이러한 몫 때문에 동시에 전류의 흐름을 방해한다. 그러나 고무와 같은 부도체는 자기 소유권이 너무 커서 전류가 전혀 흐르지 못하게 한다. 소유권이 자체권을 완전히 차단시킨 결과이다. '조용히 해'란 말 자체가 시끄러워지는 이유는 바로 그 말이 지니고 있는 소유권 때문이다. 전선이 전류를 흐르게도 하지만 방해도 하는 것같이, '조용히 해'란 말 자체가 조용하게도 하지만 시끄럽게도 만든다. 자체권과 소유권은 ‘전체’와 '부분'의 관계와도 같다. 소유권은 자체권에 대한 부분이다. 그러나 부분은 항상 전체에 대하여 반역적이다. 전선에 만약 녹이 생기면 전류를 흐르지 못한다. 이런 판국에 온전히 신을 회복하고자 하는 노력이 그 뒤에 이어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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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나’ 된 것은?

이것을 성경적으로 이야기해보면, ‘나’ 라는 존재가 소유권이 없으면, 즉 ‘나’ 라는 존재가 자체적으로 존재할 바탕을 없애버린다고 하면 어떻게 되는가? 그렇게 되면 그 존재자체는 그냥 하늘에서 내려온 은혜가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고린도전서 15장 10절에 나오는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다” 라는 것이고 말이다.

(고전 15:10)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 역시 ‘나’는 특별해 !!

그런데 사람들은 이 은혜라는 말을 쓰기는 하지만 돌아서서 당장에 떼서 버리고는, 그 다음부터는 “나의 나 된 것은 내가 나의 존재함을 끌어 모은 것들이다” 라고 주장하게 되는데, 그렇게 되니 그것은 자기의 소유가 되고, 타인의 것과는 전혀 다르다는 말이다. 그래서 자기에 대해서만은 타인과는 다른 특별대우를 하게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가 가지고 있는 그 소유로 인해서 말이다.

◈ 내 새끼, 빨리 달려야 !!

쉽게 말해서, 유치원에서 달리기 대회를 하는데, 누가 어떻게 공기의 저항을 이기고 빨리 잘 달리는지, 그런 식으로 아이들이 달리기를 하는 것을 보는 엄마는 없다는 것이다. 도대체 자기 아이가 몇 등을 하는지, 그렇게 자기 아이가 중요하지 말이다.

그리고 피아노 경연대회를 해도, 소유가 아니라 음악자체에 대해서 관심이 있다고 하면, 자기 아이든 남의 아이든 상관없이 누가 피아노를 잘 치는지 보면 되는데, “야, 저 아이는 참 피아노에 소질이 있구나”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엄마들은 그런 것이 아니라 자기 아이가 몇 등을 하는지, 거기에만 관심이 있다는 것이다. 실수를 하지 않고 잘하면 짜장면 한 그릇을 사주고 말이다.

◈ 이 놈아, 빨리 결혼해 !!

그것이 바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나’ 라고 하는 것은, 현재 자기에게 소속된 소유가 없으면 자기의 기쁨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른들이 자식이 결혼을 하지 않으면 하라고 자꾸만 닥달을 한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결혼은 존재에 대한 소유권의 확보이니 말이다.

그러므로 “니는 누고?” 라고 하면, “나는 나다” 라고 하면 괜찮은데,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당신은 결혼을 했는가?” 라고 한다는 것이다. 아니, 그것을 왜 묻느냐는 말이다. 그렇게 존재를 소유로 둘러 씌워버린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무엇이 감추어지는가? 존재의 자체권이 사라지게 되는데, 여기서 존재의 자체권이라는 것은, 즉 소유도 없는데 존재하게 된 것을 의미하는데, 그러므로 그것은 결코 ‘나’의 공로가 아니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자기가 전혀 끌어다 모은 것도 없는데 여기에 이렇게 있다고 하는 것은, 결코 자기 공로가 아니고, 그래서 자기 존재에게 영광을 돌린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이 어디서 나왔는가? 주님의 은혜라는 말이다. 물론 철학에서는 이 존재의 자체권을 주님의 은혜라고 이야기하지를 않지만 말이다.

◈ 백두선생 - 신(神)은 창조성의 피조물이다 !!

화이트헤드의 경우에 이 주님 자체를 존재의 소유권으로 보는데, 하나님도 역시 소유권이고 말이다. 화이트헤드는 아무튼 이러한 소유권은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이것을 ‘창조성’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자기가 굳이 끌어 모으지 않아도 이렇게 존재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만물은 스스로 창조를 해나가는데, 그렇게 해서 생긴 것이 바로 ‘신(神)’ 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 양반이 “신은 창조성의 피조물이다” 라고 아주 유명한 말을 했는데, 즉 신은 그런 창조성으로 인해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신을 믿지 않는 사람을 굉장히 싫어한다는 말이다.

이러한 신이 없으면 존재의 자체권에 대한 근거가 사라지는데, 왜냐하면 존재의 자체권을 신을 중심으로 하는 것인데, 신을 믿지 않으니 말이다. 그렇게 되면 신이 아니라 자기가 중심이 되는데, 그런 건방진 일이 어디에 있느냐는 것이다. 아무튼 그에 의하면 신을 믿어야 하는데, 신을 믿지 않는다면 뿌리가 없고, 모든 것은 자기가 끌어다 모은 소유권밖에 되지 않으니 말이다.

그런데 화이트헤드가 이러한 철학을 주장하는 이유는 ‘자기 되먹임’ 때문에 그러한데, 만약에 존재의 소유권을 인정하게 되면, “내가 누구인가?” 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이 없어진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만 자기 정체성이 없어지기 때문에, 그야말로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 존재의 소유권은 인간의 정체성을 설명하지 못해 !!

이것이 무슨 말인고 하니, 예를 들어서, 자기가 딸을 낳았다고 했을 때, “내가 누구인가?” 라는 질문을 하게 되면, “나는 저 딸의 아버지이다” 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저 딸은 누구인가?” 라고 하면, 뭐라고 하겠는가? “내가 그의 아버지이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존재의 소유권이 있으면, 그것을 매일같이 객관화하기 때문에 답변이 성립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즉 자기가 누구인지를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니 신을 일단 설정을 해놓아야, “나는 누구인가” 라는 문제가 해결이 되는데, 즉 “나는 신으로부터 왔다” 라고 하면 된다는 것이다.

화이트헤드, 니 때문에 내가 죽었다 !!

여기서 제가 하는 싶은 말이 무엇인고 하니, 화이트헤드의 이러한 유신론으로 인해서, 즉 “신이 있어야만 한다” 라고 하는 말이다. 바로 그것 때문에 돌아가신 분이 계시는데,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그러니 “인간은 누구이며, 신은 어떠하다” 라고 하는 주장 자체가 바로, 언약 속에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 전혀 아니라, 인간들이 태어날 때부터 잘못되게 가지고 있던 인간의 왜곡된 ‘신 의식’ 이라는 말이다.

◈ 로마서 1장 21절 ‘하나님을 알되’ !!

지금부터 조금 어려운 이야기를 하겠는데(지금도 어려운데, ㅋㅋ), 로마서 1장 21절에 보면,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라고 하는데, 여기서 분명하게 하나님을 안다고 말씀하고 있다는 것이다.

(롬 1:21)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그렇다면 여기서 이렇게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게, 도대체 어느 정도로 아는 것이냐는 말이다. 이렇게 안다고 하는 것이 어느 정도의 깊이로 아는 것인지, 즉 약간이라도 신과 일치가 되고 걸치는 부분이라도 점유가 되는 앎인지, 아니라면 전혀 동떨어진 앎인지 말이다. 그런 문제를 얼마든지 제기할 수가 있다는 말이다.

이러한 ‘하나님을 알되’ 라는 것을 기존의 조직신학에서는 무엇이라고 하는가? 이것을 일반은총, 혹은 자연은총이라고 하는데 말이다. 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그것이 전혀 잘못인데, 즉 ‘하나님을 알되’ 라는 것에다가, 새로이 하늘에서 예수님이 오셨는데, 그렇게 해서 이제는 제대로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고 하는 주장이 성경말씀과 맞지 않다는 것이다.

기존의 신학에서는 주장하기를, 그렇게 과거에는 하나님을 껍데기만 알다가, 즉 하나님이라는 존재성을 알고 있엇지만 그 내용성은 없는데 말이다. 그런데 이제는 예수님이 오셔서 그 내용까지도 모두 다 채워서 알게되었다고 한다는 것이다.

◈ 하나님을 아는데, 왜 영화롭게도 감사치도 않는가?

그렇다면 여기에서 문제는 무엇인가? 그런 하나님이 과연 제대로 된 온전한 하나님일 수가 있느냐는 말이다. 지금 전세계의 신학이 이 정도수준밖에 되지 않는데, 하지만 사도바울은 뭐라고 주장하는가? 서로가 서로를 퉁기는 속성들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서로가 결합되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라고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을 아는데 왜 영화롭게 하지 않고 감사하지도 않느냐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신학자들은 무엇이라고 하는가? 그것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잘 몰라서 그렇게 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하나님을 제대로 알기만 하면 영화롭게도 하고 감사도 한다는 것이다.

◈ 하지만, 인간 속에는 악마가 있기에 !!

하지만 사도바울의 주장은 그것이 아니라, 인간들이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만, 그러나 인간 속에 무엇이 들어있는고 하니, 악마가 들어있어서 그 악마가 가로막고 있다는 것이다. 복음이 들어오지를 못하도록 말이다. 그래서 인간들이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하지 않고 감사치도 않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것 자체가 자기 의로 구축이 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여기서 말하는 것은, 그냥 하나님의 의가 아니라 인간의 자기 의를 공격하는 하나님의 의라는 말이다. 그렇게 공격성을 띠고서 인간에게 접근하는데, 그것이 바로 ‘복음의 걸림돌’ 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걸림돌이 없는 복음은 복음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 서로가 그야말로 물과 기름 사이인데, 즉 전혀 섞일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도둑이 와서는 주인을 꽁꽁 묶어놓고 살림살이를 털어 가는데, 그렇게 전투를 한바탕 벌려야 한다는 것이다. 전혀 사이좋게 지내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이것이 바로 창세기 3장 15절에 나오는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의 관계이고, 그들이 각각 가지고 있는 속성이라는 것이다.

(창 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 악마가 가르쳐 준 ‘하나님을 알되’ !!

그렇다고 하면, 여기서 좀 더 깊이 들어가면, 여기서 ‘하나님을 알되’ 라는 것을 복음을 알고 있다면 그것을 긍정적으로 보겠는가? 아니면 부정적으로 보겠는가? 당연히 부정적으로 보는데, 그런데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긍정적으로 본다는 것이다. 즉 “니가 하나님을 알기는 아니까 일단 바탕은 되었는데, 그러니 이제는 미처 다 모르는 내용만 채우면 되겠네” 라고 말이다.

하지만 복음적으로는, 이렇게 하나님을 안다는 것 자체가 악마가 가르쳐준, 즉 이 로마서 1장 21절의 ‘하나님을 알되’ 라는 것은 악마가 알려주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요한복음 8장에 보면, 예수님이 유대인들을 보고서 “너희들의 애비는 마귀이다” 라고 했는데, 즉 “너희들은 마귀새끼이다” 라는 것이다.

(요 8: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 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 니들이 하나님을 알어?

이렇게 악마가 하나님을 알려주었으니까, 인간은 당연히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그 앎은 당연히 왜곡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악마가 어디 미쳤다고 하나님을 제대로 알려주겠는가? 그러한 악마가 가르쳐준 하나님을 알고 있으니, 인간들이 당연히 하나님을 영광스럽게도 하지 않고 감사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 하나님을 긍정하게 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고 하니까, 하나님을 안다는 것도 괜찮은 것인데, 즉 바탕을 깔고 거죽을 까는 것이니 나름대로의 괜찮은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그렇게 하나님을 안 상태에서 또한 나름대로의 무엇이 추가되는고 하니, “우리가 이제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자” 라고 하는 요소가 더 붙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이렇게 붙는 자체가 바로 악마의 속임수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그러니 인간들이 제 아무리 하나님을 찬양하고 무슨 짓을 하든지 간에 그것이 결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왜곡된 하나님을 통해서 어떻게 영광을 돌려드리느냐는 것이다. 오히려 그런 것 자체가 인간의 ‘자기 의’를 양산하는 결과를 낳게 되는데, 그러니 뒤에서 마귀가 ‘짝짝’ 하면서 박수를 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렇게 하나님을 아는 것은 괜찮은 것인데, 즉 하나님께서 주신 ‘신 의식’ 인데, 그러니 그것을 가지고 시비를 걸면 안 된다는 말이다. 단지 우리 인간이 믿음이 없어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못하고, 감사하지도 못하는 그것을 가지고 비판하고, 그렇게 해서 이제는 제대로 영광과 감사를 돌려드리도록 하면 된다고, 그렇게 기존 신학에서는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신 의식’은 반틸이 주장한 것이고 말이다.

◈ 모든 것을 다 쓰레기통으로 !!

그러므로 이렇게 탁탁 잘라서 이야기하는 것은, 즉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신을 알려주었으니, 이제는 우리가 그렇게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신 의식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 된다고 하는, 또한 모자라는 것은 채우고 말이다. 그렇게 고기를 자르듯이 자를 수가 있는 문제가 전혀 아닌데, 오히려 하나님은 안다고 하는 것부터 해서 모든 것을 다 쓰레기통에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십자가로 정죄를 받아야 할 문제이고 말이다.

아무튼 이렇게 신학을 한다는 것 자체가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닌데, 그렇다면 이러한 것을 우리가 알고서 우리는 무엇을 느껴야 하겠는가? “아하, 그래서 내가 나 자신을 구원시킬 수가 없구나” 라는 것을 더욱 더 분명하게 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피의 공로뿐임을 말이다.

이제 교재 257페이지를 보자.

** 새 성전에서의 성신의 넘침은 거룩의 넘침이다. 따라서 이 거룩으로 인해서 새 성전으로 만들어진 새 세상 안에서는 그 누구도 이 거룩 앞에서 자기 공로를 자랑하지 못하게 된다.

이왕 어려운 것 계속해서 어렵게 해보겠는데, 즉 어려움의 깊이와 넓이를 제대로 한번 알아보자는 것이다. 이해가 잘 되지 않으면 이 강의를 녹음해서 올릴 테니 다시 들어보시고, 아마 미래에 누군가가 녹취도 하지 싶은데, 그때까지 기다리던지 말이다(ㅋㅋ).

◈ 하나님을 알아서, 영화롭게 하겠다 !!

여기에 보면 “새 성전에서의 성신의 넘침은 거룩의 넘침이다” 라고 하는데, 이것을 말하기에 앞서서, 먼저 인간들은 “하나님을 알아서, 영화롭게 하겠다” 라고 하는데, 그런데 이것을 철학적으로 보자면 ‘과잉존재(?)’ 라는 것이다. 다른 말로는 ‘초과존재’ 라고 하는데, ‘바디우’ 라는 학자에 의하면 말이다.

이것이 무슨 말인고 하니, 인간의 관심사는 항상 “내가 누구인가?” 라는 것인데, ‘인간은 왜 행동하게 되는가?’ 라는 글에서 서론이 끝나고 바로 ‘스토아 학파에서 본 인간 행위양식’ 이라는 대목에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는 것이다.

즉 “인간이 자기 정체성을 구축하는 방식에는 두 가지의 흐름이 있고 이것이 상호중첩이 되어 왔다. 첫째는, 자기 정체성을 인간 바깥에서 찾는 방식이다. … 그런데 언제부턴가 인간들은 자기의 정체성을 안에서부터 찾게 되었다” 라고 말이다.

◈ 내가 누구인가?

다시 말해서, 자기 정체성을 찾는 문제인데, 즉 아이텐티티, “내가 누구인가?” 라는 존재의 중심점이 없는데, 그것을 ‘공백’ 이라고 하는데 말이다. 존재는 반드시 소유권이 붙는데, 이런 존재의 소유권에 있어서 “내가 누구인가?” 라는 것은 “내가 무엇을 가졌는가?” 라는 것을 반추해서 내다본다는 것이다. 자기가 기타를 잘 치면 “아하, 내가 기타를 잘 치는구나” 라고 하면서 말이다. 기타가 재미가 없어서 바이올린을 배우면 “아하, 나는 바이올린을 잘 연주하는구나” 라고 하고 말이다.

그것을 샤르트르에 의하면 ‘대자즉(對自卽) 존재’ 라고 하는데, 즉 자기의 바깥에 있는 대상을 통해서 자기를 다시 한번 더 규정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대자즉 존재’는, 먼저 19세기 피히테 이후에 독일에는 낭만주의 경향과 관념주의 경향이 있었는데, 아무튼 그런 것이 있었다는 말이다.

먼저 낭만주의 경향은 무엇인고 하니까, 인간에게 있어서 최고의 진리는 이성으로 따지는 것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의 아름다움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칸트의 실천이성비판에 있어서, 그 실천이성비판은 두 가지가 있는데, 무조건적으로 해야 하는 윤리적 문제와 무조건적으로 아름다움 추구해야 하는 미적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미적 문제는 낭만주의로 흐르게 되고, 윤리적 문제는 관념주의로 가게 된다는 것이다.

◈ 인간은, 행동하기에 앞서서 먼저 반성을 !!

이것에 나중에 셀링과 헤겔과 리츨과 같은 철학자로 연결이 되는데, 아무튼 칸트는 주장하기를, 인간에게는 실천이성에 있어서 무조건적으로 행한다고 했는데, 그런데 그렇게 하기에 앞서서 먼저 ‘반성’을 한다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반성이 무지무지하게 중요한 문제인데, 이것이 헤겔에게 ‘정반합’으로 나타나고 말이다.

다시 말해서, “내가 누구인가?” 라는 것은, 오늘 이렇게 “내가 누구인가?” 라는 문제에 있어서, 아침에 그 문제가 과연 저녁까지 가느냐는 것이다. 그렇게 가지 않는다는 말이다. “즉 내가 누구인가?” 라는 것이 아침에 다르고 저녁에 달라지는데, 그런데 그냥 달라지는 게 아니라, 반드시 자기에 대한 반성을 거친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사람이 저녁에 어떻게 생각을 하는고 하니, “아침에 내가 그렇게 생각을 했는데, 어떻게 그런 생각을 다 했지? 그렇게 하면 안 되는데, 내가 잘못 생각했어” 라고, 그렇게 좋은 방향이든 나쁜 방향이든 간에 자기 생각을 반성하고 나서, 또 다시 자기 자아가 그만 구축이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곧 ‘반성철학’ 이라는 말이다.

◈ 셀링 - 신이 내 안에, 내가 신 안에 있다 !!

이런 반성철학에 의해서 두 가지로 갈라지는데, 먼저 하나는 결국 인간은 신에게로 도달한다고 하는, 즉 절대이성으로 말이다. 그것이 셀링과 헤겔이고 말이다. 셀링은 주장하기를, “내가 신과 만남으로서 신이 내 안에 내가 신 안에 있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아무리 보아도 요한복음 14장 말씀을 표절한 것 같은데 말이다.

그러니 지금 신학교에서 하는 이야기들이 이미 독일의 관념론 철학에서 모두 다룬 것들이라는 말이다. 즉 인간의 주체성은 윤리인데, 그 윤리는 행위라는 것이다. 그렇게 인간의 주체성이 확립이 되어야, 그렇게 확립이 된 가운데서 정통적인 행위가 나오고, 그 행위가 윤리가 되고, 그 윤리 안에 선이 들어있고, 그 선의 최종점이 신이 된다는 것이다.

◈ 성화론은 이미 19세기 관념론에서 !!

그래서 인간이 괜찮은 주체를 가지고서 이성을 발휘하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그러면 “신 안에 내가 있고, 신도 내 안에 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요즘에 성화론자들이 떠들고 있는 성화주의는 이미 19세기 철학에서 다 다룬 것들이라는 말이다.

제가 이러한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이 뭐라고 하는가? “이 목사는 철학만 알고, 신학은 모르나?” 라는 따위의 소리를 지껄이는데 말이다. 그렇다고 제가 철학을 제대로 안다고 하기는 좀 그렇지만, 하지만 성경을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철학을 이 정도는 공부해주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아하, 하나님은 복음을 좋아하지 철학은 결코 좋아하지도 않고, 받지도 않는구나” 라는 사실 정도는 알지만 말이다.

◈ 목사님, 제가 무엇을 할까요?

아무튼 성화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왜 자꾸만 주체를 강조하는고 하니까, 사람의 행동이라는 것은, 그 사람 존재의 확립에서 나오기에 그렇다는 말이다. 즉 “내가 누구인가?” 라는 것이 확립이 될 때, 비로소 자기에게서 어떤 행동이 나온다는 말이다.

그러니 “목사님, 제가 무엇을 할까요?” 라는 질문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까, “내가 누구입니까?” 라는 것이 확립이 된 상태에서, 그것으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즉 “나는 이러 이러한 인간이니, 이러 이러한 행위를 해야 당연하지 않습니까?”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즉 ‘존재’ 다음에는 반드시 ‘행위’가 나온다는 말이다.

◈ 칸트 - 인간은 경험과 오성에 의해서 주체의식이 !!

그래서 칸트가 뭐라고 했는고 하니, “인간은 누구인가?” 라고 했을 때, 인간은 바깥에서 오는 경험과 자기 속에 있는 하나님이 주신 형상인 ‘오성’, 즉 다른 말로 하자면 ‘이성’ 인데 말이다. 물론 오성은 이성에 비해서 조금 더 감각적이고 원초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아무튼 인간은 경험과 오성에 의해서 주체의식이 생긴다는 것이다.

그런데 칸트는 이 주체의식을 마지막에 무엇으로 보았는고 하니, 즉 모든 이성을 다 부인한다고 해도 마지막에 부인할 수 없는 게 있는데, 그것이 바로 윤리적 실천이성이라는 말이다. 그것은 신에 의해서 무조건적으로 행하도록 되어있다는 것이다.

◈ 거짓말을 하지 말라 !!

예를 들어서, “거짓말을 하지 말라” 라는 것은 가르쳐서 될 문제가 아니라, 많이 배우든 전혀 배우지 못했던 간에 이런 거짓말이 나쁘다는 것을 양심적으로 다 안다는 것이다. 그것이 신이 인간에게 넣어준 신의 모습인데, 그것을 이성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실천이성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말 그대로 이성 앞에 실천이 붙는데, 그러니 실천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체가 확립이 되고 난 다음에 그 주체에 대해서 행위가 나오고, 그 행위를 통해서 신을 영화롭게 하는 윤리와 도덕이 나오고, 그렇게 해서 신이 기뻐하는 ‘최고선’에 도달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 마지막 부분은 셀링과 헤겔이 주장한 것이지만, 아무튼 그렇다는 말이다.

그런데 여기에 대해서 “그렇다면 주체를 어떻게 확립하는가?” 라고 물었는데, 그런데 여기에 대해서 답변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까 말했지만, 주체는 자기를 반성함으로서 그때 그 순간의 주체로서 새로이 정립이 되고, 또 부수어지고 정립이 된다는 것이다.

서유석 씨가 부른 노래 중에서 “장난감을 바꾸어 그것을 바라보고 기뻐서 얼싸안다가, 벌써 그것을 잊어버리고 부수어 버리고 또 새로운 장난감을 원하고” 라는 것이 있는데, 혹시 들어보셨나요? 원래 이것이 팝송가사인데, 유명한 외국의 시(詩)라는 말이다.

교수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 학문을 자기 장난감으로 여기서 가지고 놀다가 부수어 버리는, 물론 그런 것으로 밥벌이를 하고 말이다. 나중에는 골프를 치러 다니고 말이다. 진리가 아니라 그냥 밥벌이라는 것이다. 물론 인간에게는 밥벌이가 진리일 수도 있지만 말이다.

윤 무슨 교수가 아무리 새를 사랑해서 연구한다고 해도, 그러나 새는 어디까지나 자기 장난감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신학교 교수에게는 성경이 자기 장난감인데, 그러니 헬라어와 히브리어도 자기 생계를 위한 장난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무리 말씀이 어쩌고 저쩌고 해도 말이다.

◈ ‘존재의 이유(?)’가 아닌, ‘존재의 공백’ !!

지금 제가 무엇을 설명하려고 장난감을 등장시키고 부르지도 못하는 노래를 흥얼거렸는고 하니, 바로 ‘존재의 공백’을 이야기하려고 그랬다는 것이다. 즉 ‘빈칸’을 말이다. 그것이 현상학에서 모두 들통이 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음 중에서 빈칸을 채우세요” 라고 하면, 그 빈칸에 무엇이 등장하다가 미끄러지고, 또 미끄러지고 하는데, 이 미끄러짐은 데리다가 주장한 것인데, ‘차연(?)’ 이라고 말이다. 즉 들어갔다가 그만 빠지고, 또 들어갔다가 빠지고 한다는 것이다.

◈ 라이프니찌 - 인간의 마음은 기억뿐이다 !!

그래서 드마마를 보면서 자기가 주인공이 되는데, 돈도 쥐뿔도 없으면서 파리의 연인을 흉내내고 말이다. 어디 “야, 이제 가자” 라고 한다고 되는가? 돈이 있어야지 말이다. 그렇게 드라마를 보면서 잠시 꿈을 꾸는데, 이렇게 꿈을 꾸는 상상을 가지고 라이프니찌가 예리하게 지적을 했는데, “인간의 마음은 기억뿐이다” 라고 말이다. 즉 인간의 마음은 기억뿐이고, 이 기억은 상상을 낳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상상은 존재에 있는 것인가? 물론 없는 것인데, 그런데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로 이것을 ‘초과존재’ 라고 한다는 것이다. 즉 존재는 비어있는데, 그렇게 만들어내는 것을 초과존재라고 한다는 말이다. 다른 말로는 ‘잉여존재’ 라고 하는데, 즉 존재가 넘쳐서 그렇다는 말이다. 정말로 철학자들이 제법 똑똑하지요?

◈ 아, 금강산에 가고 싶다 !!

예를 들어서, “아, 금강산에 가고 싶다” 라고 하면, 지금 우리 눈앞에 금강산이 있는가? 물론 없다는 것이다. 팔공산만 똥폼을 잡고 있지 말이다. 산에 가고 싶으면 그냥 눈앞에 있는 팔공산에 가면 되는데, 그런데 왜 금강산에 가고 싶은가? 그것은 바로 금강산의 일만이천봉의 풍경을 본 적이 있기 때문인데, 그것이 곧 기억이고 말이다.

그러니 기억에서 현재 있지도 않은 금강산을 끄집어내는데, 그러나 당장에 금강산에 갈 수는 없다는 것이다. 별로 바쁘지는 않지만, 아무튼 못 간다는 것이다. 그렇게 가지 못하면 여기에서 ‘무(無)’ 라는 것이 발생하는데, 그렇게 없음인데, 그런데 가고 싶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왜 없는 것을 원하는가? 있는 것을 원하든지 하지 않고 말이다. 그런데도 왜 하필이면 없는 것을 달라고 하느냐는 것이다. 그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현재 자기 존재의 공백이 비어있기 때문에, 그렇게 비어있는 것을 상상력을 동원해서 메우려고 하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 자기 존재의 공백을 계속해서 메우는 것이 인간 !!

예를 들어서, “야, 교인이 백 명 정도 되었으면 참 좋겠다” 라고 하는데, 물론 지금은 한 명도 없지만, 그러나 앞으로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왜 좋은가? 이유는 잘 몰라도 아무튼 간에 백 명이 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그 이유를 잘 모를 때는, 그것이 바로 자기 존재의 공백을 계속해서 메우는 것이 바로 인간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아까 인간은 소유권을 가지고 있다고 했는데, 즉 인간의 자기 존재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소유권으로 꽉꽉 채워야 비로소 ‘나’ 라는 존재를 자기가 알겠다는 것이다. 이것을 가지고서 ‘주체’ 라고 하는데, 혹은 ‘정체성’ 이라고도 하고 말이다.

이렇게 소유권이 있는데, 교인이 백 명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한다면, 그런 소유권으로 그 백 명으로 메운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교인이 백 명이 없다는 것인데, 그래서 그 다음에 돌출이 되는 것이 바로 ‘돌출존재’ 라는 것이다. 이 돌출존재가 곧 신이고 말이다. 즉, 신, 교회, 학교, 회사, 가정 등등, 그렇게 나간다는 것이다.

◈ 손성식 - 한국교회의 십자가는 아비타와 같다 !!

그러니 한마디로 쉽게 말해서, 그냥 ‘허구’ 라는 것이다. 손성식 목사님의 글에 보면 다음과 같은 표현이 있는데, “현재 한국교회의 십자가는 아비타와 같다” 라고 말이다. ‘아비타’ 라고 알지요? 컴퓨터에 있는 가상적이고 허구적인 인물 말이다.

그러니 우리가 이러한 공부를 조금 어려워도 반드시 해주어야만 하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까, 언뜻 보면 이런 공부와 복음이 아무런 상관이 없어 보이는데, 그러나 그렇지 않다는 말이다. 하지만 우리가 알다시피 이 복음은 어디에서 피어나는가?

그것은 바로 우리가 평소에 살아가면서 하는 죄악 된 짓들이 뭉치고 뭉쳐져서, 이렇게 벌써 나이가 50이 되고 60이 되어서 죽어가고 있는데, 바로 그런 가운데 복음이 따로 피어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결코 복음을 소유해서 구원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복음이 우리를 장악한다는 말이다.

◈ 복음만은 소유가 안 돼 !!

제가 안산에서 그런 강의를 했는데, 모든 것은 자기가 소유할 수 있는 문제이지만, 그러나 복음만은 소유를 할 수 없고, 오히려 소유를 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자기가 복음을 소유했다면, 그것은 자기 존재의 공백을 메우기 위한 자기의 돌출과잉존재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그러니 그런 복음은 다 가짜이고, 그런 복음을 전한다면 엉터리 교회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진짜 복음인가? 오히려 자기가 하나님의 은혜에 잠식을 당하고 붙잡힘 바가 되고, 자기가 이렇게 살아가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즉 은혜가 자기 위에 있고, 자기는 은혜의 한 부분으로 작용하는 경우에만, 그것이 진짜 복음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복음을 알아서 구원을 받겠다고 하는 것은, 그것은 자기 존재의 소유권의 공백을 메우기 위한 것에 지나지 않는데, 그야말로 아무 것도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 사람은 전혀 신앙인이 아닌데, 그런 사람은 복음보다 더 좋은 것이 있으면 얼른 그쪽으로 가고 만다는 것이다.

◈ 하나님, 제가 하나님께 집을 지어드릴까요 ??

그런데 방금 제가 이렇게 지루하게 강의한 철학 이야기가, 성경에 보면 성전중심으로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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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794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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