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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내 것 (사무엘상 3: 8-14) 대전-(사무엘14강)자유게시판사무엘상

내 것 (사무엘상 3: 8-14) 대전-(사무엘14강) 이근호 2016년 5월31일 본문말씀: 사무엘 상 3:8-14 (삼상3:8) 여호와께서 세 번째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그가 일어나 엘리에게로 가서 이르되 당신이 나를 부르셨기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엘리가 여호와께서 이 아이를 부르신 줄을 깨닫고 (삼상3:9) 엘리가 사무엘에게 이르되 가서 누웠다가 그가 너를 부르시거든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하라 하니 이에 사무엘이 가서 자기 처소에 누우니라 (삼상3:10) 여호와께서 임하여 서서 전과 같이 사무엘아 사무엘아 부르시는지라 사무엘이 이르되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하니 (삼상3:11)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이스라엘 중에 한 일을 행하리니 그것을 듣는 자마다 두 귀가 울리리라 (삼상3:12) 내가 엘리의 집에 대하여 말한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그 날에 그에게 다 이루리라 (삼상3:13) 내가 그의 집을 영원토록 심판하겠다고 그에게 말한 것은 그가 아는 죄악 때문이니 이는 그가 자기의 아들들이 저주를 자청하되 금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삼상3:14) 그러므로 내가 엘리의 집에 대하여 맹세하기를 엘리 집의 죄악은 제물로나 예물로나 영원히 속죄함을 받지 못하리라 하였노라 하셨더라 사무엘상 3장 8절부터 보게 되면 “여호와께서 세 번째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어린 사무엘을 하나님께서 불러서 누구에게 보내냐 하면 엘리 제사장에게 보내는 대목입니다. 이 대목에서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부르지요. 사무엘을 부르게 되면 하나의 공식처럼 생각한다면 (사무엘=이름)이고 그러면 하나님께서 사무엘의 이름을 부르실 때에 하나님 쪽에서 메시지가 있을 거에요. 사무엘이 어리기 때문에 메시지의 내용을 몰라요. 그것은 사무엘이 어른 엘리를 만날 때 밝혀집니다. [ 메시지 → 코드 → 이름 → (원래의)메시지 ] ? 아담 — 선악과 ( 정녕 죽으리라 ) — 뱀(신의 메시지) 증인 어린 사무엘 메시지가 주어지게 되면 이것이 코드가 되고 코드가 다시 사무엘의 이름이 되고 (사무엘의)이름을 톡하고 깨뜨리면 여기서 원래에 있던 메시지가 펼쳐지게 됩니다. 그러면 중간에 (세번째)이름이 있지요. 이 설명이 어려우면 다시, (?)하나님께서 무슨 뜻에서인지 인간을 만들었습니다. (선택한)인간 안에 메시지가 들어가고 그것이 다시 코드가 되고 코드는 (이름 인)아담이 되고 아담이 살아가면서(깨지면서) 원래의 메시지가 펼쳐지지요. (이름) 아담에서 코드로 다시 코드에서 (원래)메시지라 해도 상관없습니다. [메시지→ 코드 → 이름(아담) → 코드→ (원래의)메시지] 여기서 아담의 창조 의미는 무엇과 결합이 되어 있냐 하면 선악과 과실과 결합이 되면서 그 안의 메시지는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가 나온다는 말이죠. 코드는 메시지의 덩어리 즉, 메시지가 뭉쳐진 것. 그래서 사물 하나하나 그것이 나무든 꽃이든 무의미 한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하늘의 별도 달도, 왜 이렇게 제가 이렇게 설명하냐 하면 사람이 살아가면서 내가 왜 태어났는지?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태와 사건들은 하나님께서 무슨 메시지를 가지고 나로 하여금 이 코드에 휘말리게 하는 지? 이런 것들이 총 정리가 되어요. 구약에선 아담이라고 하고 신약에선 증인이라고 되어 있어요. 사도행전 1:8에 성령이 임하면 땅 끝까지 증인이 되지요? 증인이 되면서 신약에선 뭐가 상실되냐 하면 이름이 날아가 버립니다. 이름이 날아가 버린다는 말은 만약 세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각자 이름이 다르겠지요. 달라서는 안된다는 이야기에요. 왜냐하면 이름이 다 달라지면 철수, 영희, 순이 이름이 다 다르면 그것은 하나의 교유의 개성이 되고 개성이 다르게 되면 코드도 다르게 되고 코드가 다르다는 말은 메시지가 달라져 버리면 신의 메시지는 하나인데 10명의 메시지가 다 다르다면 이건 아니잖아요. 신의 메시지가 하나라는 말은 각자 다 다른 메시지를 갖고 있다면 분명히 그중에 하나 빼놓고는 전부 우상입니다. 다른 신이에요. 하나의 신은 모든 것을 통합하거든요. 그런데 아담에게도 이름이 있었으니까 우리에게도 이름이 있어야 되지 않겠냐고 하는데 그건 잘못입니다. 아담의 이름을 교체한 이름은 마지막 아담밖에 없어요. 우리는 안돼요. 이름들은 좋지요. 하지만 안 됩니다. 이름으로 명함을 내밀면 안돼요. 우리의 이름은 아담이에요. 왜? 내 이름이 있는데 아담이라고 하나? 그래야 아담으로 결부되는 인생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코드와 연관되어야 되기 때문에 우리의 이름이 아담이어야 해요. 우리는 죽을 때 내 이름으로 죽는 것이 아니에요. 아담의 이름으로 죽기 때문에 모든 인간은 다 죽습니다. 코드가 같아요. 죄인은 살 수 없다. 죄 값을 치러야 한다. 이것을 우리가 요청한 것도 아니고 우리가 태어 날 때 부모하고 의논한 것이 아니에요. 타고난 운명입니다. 그리고 운명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 안을 쪼개보면 메시지가 있습니다. 중요하기 때문에 다시 해 봅시다. 지금 사무엘상 3장 8-9절하고 있습니다. 이 대목은 사무엘이라는 어린 아이가 엘리 제사장과 만나는 대목입니다. 그런데 사무엘이라는 이름은 누구에 의해서 유발된 것이야 하면 하나님에 의해서 유발된 것이죠. 그런데 우리는 이름을 가지기 때문에 어린 사무엘만 포착합니다. 엘리 제사장이 사무엘을 볼 때 처음에 배후에 하나님이 있는 것을 봤습니까? 못 봤습니까? 그냥 어린 아이로 봤지요. 그런데 어린 사무엘을 누가 보냈습니까? 아까 물음표를 해놨지요. 미지의 어떤 분이 계셔서 사무엘을 보내는데 엘리 입장에서는 그냥 사무엘만 보는 거에요. (이름)네가 밤중에 왜 날 찾아 왔느냐? “제사장님이 저를 불렀잖아요.” 세 번이나 부르지요. “아닌데, 나는 아닌데! 내가 안 불렀어, 가서 자! 또 불렀잖아요? 나 아닌데” 세 번 째 부르게 됩니다. 그러면 어기서 포착할 수 있는 것은 일리 제사장이 사무엘이라는 이름을 가진 어린애와 만나게 되는 거지요. 그런데 사무엘상에서는 중간에 끼어든 것이고 그것을 펼쳐보면 처음에는 어떤 분의 메시지(내용)로 시작해서 그 내용의 메시지가 (이름)사무엘에게 주어지고 즉, 메시지가 뭉쳐져서 사무엘(이름)이 되었다고 해도 되는데 왜 중간에 코드라는 메시지보다 더 응축된 것, 코드라 표현 했느냐하면 사무엘에게서 나중에 그냥 메시지가 펼쳐지는 것이 아니고 사무엘이 만나야 될 어떤 사람이 있어요. 이것이 오늘 본문에선 엘리가 됩니다. 만나게 되면서 엘리가 갖고 있던 코드가 있어요. 이 코드와 부딪치면서 나중에 (원래의)메시지가 쏟아져 나오는 거에요. 이러한 원리가 사무엘에게서 나오기 이전에 처음 아담에게서부터 있었다고 언급했어요. 아담의 이름을 지었을 때에 우리는 보통 이름을 지었을 때에 그 이름을 갖고 “이건 내 이름이야!” 하고 독자적으로 놀 생각을 해요. “야! 내 이름을 부여 받았어!” 그러니까 이름을 주신 분이 아담이라 할 때는 서로 끈끈한 관계가 있거든요. 그런 관계가 있는데 우리는 관계는 생각 안하고 이름을 소유 했다고 생각해요. 그런 대표적인 오류가 뭐냐하면 예수 믿으면 영생을 소유했다. 구원을 소유했다. 성령을 받으면 성령을 소유했다. 복 받으면 복을 소유했다. 모든 것이 소유 아니면 생각을 안하게 되요. 소유해요. 복 받았다. 믿음 받았다. 아심을 받았고 부르심을 받았고 거듭났고 구원의 여정 자체를 자꾸 소유로 생각하는 겁니다. 아담은 이름을 받았는데 그 이름이 코드 선악과와 부딪치면서 메시지가 나옵니다.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그러면 메시지를 성취하기 위해서 다음에 선악과와 더불어서 뱀이 등장하지요. 뱀은 어디에 속하냐 하면 피조세계에 속하고 피조세계 속에는 메시지가 들어있다고요. 그렇다면 뱀의 이름은 뭐냐하면 이름을 지은 자가 지음 받은 자에게 예속되면 안 되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아담에게 이름을 지어준 자가 누굽니까? 하나님이죠. 그러면 하나님의 말을 들어야 되는데 자기가 이름을 지어야할 대상인 뱀에게 말려들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준비한 뱀이라는 코드를 통해서 아담 속에 숨겨진 메시지를 끄집어내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아담이기 때문에 아담을 계속 확장시키게 되면 우리가 어떤 이름을 가진다 할지라도 우리가 만나는 모든 코드는 내가 기대하는 희망이나 꿈이 아니고 아담과 연결되어 있는, 아담에게 잠재되어 있던 하나님의 코드와 우리가 만나게 되어있습니다. 방금 이 코드가 뭐라고 했습니까? 선악과라고 했고 또 뱀이라고 했지요. 그렇다면 뱀을 오늘 날 뭐로 보냐하면 유혹이라 보면 되요. 산악과는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탐스러운 것들이 되겠지요. 우리가 아무리 믿음 좋고 신앙생활 바르게 한다 할지라도 항상 우리 곁에는 매일 부딪히는 것이 뭐냐하면 저것 같고 싶어! 저것 욕심나는데! 저것을 미래의 희망으로 삼고 싶어! 나는 앞으로 저 사람처럼 될거야! 이런 것들이 계속 생기는 이유가 우리는 개별적 존재가 아니고 아담에게 속해 있기 때문에 그래요. 아담이 경험했던 그 경험이 우리도 똑같이 계속 반복해서 우리에게 들이닥치는 거에요. 그러면 해결책은 뭡니까? 아담이 풀어냈던 그 메시지가 우리 안에 들어 올 때 그 해결책이 되는 겁니다. 그것을 증인이라고 하는 거에요. 첫 째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고 되어 있지요. 그러면 아담에게 일어났던 모든 일은 아담 자체로는 메시지가 해결되지 않고 예수님은 어떤 분이다라는 사실을 아담을 만들 때부터 이미 그 안에 내장되어 있다고 보면 되요. 부착되어 있어요. 장착되어 있고 탑재해 놓은 겁니다. 그러니까 아담은 예수님의 증인이 되는 겁니다. 아담이 증거하는 게 아니에요. 아담의 인생이 망가지고 깨어지고 해체되면서 그 안의 예수 그리스도가 사건화 되면서 튀어 나오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우리가 지금 아담의 삶을 아담이 처해 있던 환경을 마주 하면서 똑같이 반복하며 보여주는 어떤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면 천국 가는 사람이고 그렇지 않고 여자의 후손이 아닌 뱀의 후손을 보여 주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지옥 가기로 작정된 것입니다. 성경 구조가 굉장히 간단하지요. 성경을 복잡하게 보는 이유가 뭡니까? 내 이름부터 출발 하니까 복잡한 거에요. 나를 (엑스)치고 목사든 장로든 다 (가위표)를 하고 나는 하나의 아담이라고 시작해서 성경 속에 하나님이 마련 한 자리로부터 출발하면 되는데 바이올린을 하던 피아노를 치든 하나의 코드에요. 내 속에 있는 아담이 당했던 아담이 경험했던 하나님이 만들어 놓은 메시지를 뿜어내기 위해서 그런 식으로 추출해 내는 겁니다. 그래서 지난 낮 설교에서처럼 인간의 모든 행위는 살고자 하는 것으로 되어있다. 직업이라고 하고 뭐~뭐라고 하지만 그 끝에 가보면 왜 그러하냐? 밥 먹고 살아야 되지요. 그러면 제가 묻고 싶은 게 왜 살아야 되는데요? 그게 잘못이에요. 하나님은 죽으라고 만든 아담인데 우리는 뱀에게 유혹 받아서 죽어야할 존재가 되는 게 아니고 마땅히 살아야 될 존재라고 우기는 것부터가 잘못된 거지요. 이것을 소통이 아닌 ‘오 소통’이라 하지요. 이런 표현은 잘 안하지만 소통이 잘못된 것, 소통이 서로 안 되는 겁니다. 어디서부터 출발할 때? 나로부터 출발 할 때, ‘나’가 아담 안에 들어가야 하는데 아담은 이미 죽은 사람이고 “나는 나다.”라고 나부터 시작 할 때, 내가 어떻게 구원 받을 까? 로부터 시작 할 때 이것은 소통이 끊어지는 겁니다. 백 날 가도 마귀의 권세 아래에서 벗어 날 수 없는 겁니다. 우리는 사무엘을 보면서 사무엘이 등장 할 때 보통 사람은 어린 사무엘이 나오니까 사무엘을 뭘로 보냐하면 자기의 대응 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상호 감정을 전이시키려고 감정 이입하려고 하지요. 사무엘이 어릴 때부터 하나님께 순종했으니 나도 순종해야지! 보통으로 착각하는 게 아니에요. 사무엘은 해체돼야 되요. 사무엘의 껍데기를 보지 말고 껍데기를 보면 안돼요. 사무엘을 볼 때 그 안의 메시지가 뭐냐 알아야 해요.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뭘 집어넣어 주셨냐 이 말입니다. 이것을 거칠게 결론을 내리자면 사무엘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집어넣은 거에요. 이것을 더 압축해서 집어넣으면 그 안에 새 언약을 집어넣은 거에요. 새 언약은 다른 말로 부활이 새 언약이 아닙니다. 새 언약은 십자가에요. 십자가입니다. 부활을 믿는다고요? 부활은 바리새인도 믿었는데요. 부활 믿는다고 구원받는 게 아니에요. 승천도 바리새인도 다 알고 인자가 구름 타고 온다는 걸 다 아는 데요. 바리새인들이 아무리 알고자 해도 알 수 없는 것이 있어요. 그것이 뭐냐하면 메시야가 죽어야 된다는 사실. 이건 베드로도 몰랐어요. “그럴 수 없습니다.” 제자들도 몰랐어요. 실컷 잘 지내다가 왜 죽느냐는 말이죠. 분명히 누이를 살리려고 우리를 불러 놓고 스승이 혼자 죽어 버리면 우리는 도대체 따라 죽어야 되는지? 굉장히 당황스러운 거에요. 이것은 마치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약속의 땅으로 가자고 해 놓고 길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홍해 앞에서 스톱을 시키니, 혹시 홍해에서 누가 대리 운전이라도 해 주려고 오는 가? 홍해에 딱 세우니까 누가 기겁을 했냐하면 모세를 따라 온 사람들이 후회 막급했어요. “속았어요!~ 속았어요!~” 하는 거에요. 지금. 모세의 드라마에 속았어요. 항상 우리가 가는 구원의 길은 내 모든 희망이 좌절되는 사태를 반복시킵니다. 하여튼 꿈이란 꿈, 비전이란 비전 다 묵살해버려요. 지금 잘되고 있는 거에요. 지금 아주 코스 잘 잡은 거에요. 모든 꿈들이 박살 날 때 일 잘되고 있는 겁니다. 넓은 길로 안 가고 있는 거에요. 좁은 길을 가고 있습니다. 사무엘이 등장하면서 사무엘은 해체돼야 되고 해체돼는 방식이 사무엘은 메시지가 코드가 되고 코드는 이름이 되고 이름은 코드가 해체되면서 메시지가 되고 그래서 이러한 모든 이 세상의 인간들은 이름이 있는 좌우편에 이런 식으로 이런 경로로 끼어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하다 내가는 없습니다. 내가 없고 나를 대신한 ‘나’가 자리 잡고 있어요. 이것은 내 안에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이 사실은 잠복되어 있고 잠복되어 있는 이름이 내 이름을 날마다 찢어 버리지요. 그러면 아까도 말했지만 내 뜻대로 안되면서 해체되고 풀어지면서 밀가루를 저어 풀어지듯이 그러면 내 형체가 자꾸 없어져요. 나라는 것이 자꾸 없어지면서 언듯 언듯 하늘의 구름 사이로 푸른 하늘이 보이지요. 내 인생이 찢어지면서 푸른 하늘로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의 역할이, 증인의 기능이, 주님의 활동이 언뜻 언뜻 보여요. 우리는 맑은 날처럼 늘 보이면 좋겠습니다만은 언뜻 언뜻 보여요. 내 뜻이 좌절될 때 보입니다. 내 뜻이 좌절되게 되면 그동안의 먹구름은 나였고 주님께서 비춰준 따스한 햇볕을 내가 가로막고 방해한 거에요. 제가 주일 낮에 일본말 하나를 썼지요. 겐세이, 당구 칠 때의 용어. 내가 방해 놓은 거에요. 내 자신은 어떻게 됩니까? 이러면 앞으로 나는 못 삽니다. 이런 것으로 주님이 주신 모든 계획을 방해 놓는 거에요. 겐세이 놓는 거에요. 언뜻 언뜻 구름이 풀어지면서 푸른 하늘이 보일 때 내가 괜한 걱정을 하고 있다라는 말이죠. 어차피 내 이름을 위한 인생이 아닌데 마치 내 명예, 내 가치, 내 자존심, 내 자랑거리, 내가 여기 있단 말이야 과시하기위한 용도로 주께서 마치 모든 것을 펼치신 것처럼 그렇게 혼동해 왔던 겁니다. 목사가 목회를 하게 되면 그 목회는 내 이름과 명예와 관련되어 있어요. “그거 봐라! 내가 이렇게 목회를 잘 하니까 내가 신자 맞잖아! 주의 종 맞잖아! 주의 사자 맞잖아!” 이렇게 자랑하고 싶은 식으로 주의 말씀과 성경 구절을 인용한 거에요. 그래서 목사들이 제일 못하는 게 뭐냐 본인의 신앙생활을 못해요. 목회는 잘하는데 본인의 신앙생활은 잘 안돼요. 가르치려고 공부는 하는데 내가 왜 죄인인가를 알기 위해서 성경을 보진 않아요. 얼마나 잘 가르쳐야 내 팬들이 많아질까? 그것만 생각하지 주여! 내가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을 정도로 지금껏 살아온 것도 겨우 겨우 주께서 억지로 살아오게 할 정도로 저는 죄인입니다라는 것을 알기위한 이것을 다른 말로하면 인간은 자신이 망해야하는 이유를 안 찾으려 해요. 이게 문제에요. 당연히 성공해야하는 것이 자기의 권리나 되는 것처럼 착각하는 거에요. 질문을 하려면 이렇게 해야되요. “주여! 왜 저를 안 망하게 하십니까? 정말 미치겠습니다. 하는 것마다 죄인데 왜 저주를 안 주십니까? 와야 되는데 왜 저주가 안 옵니까?” 그러면 주께서 “니 인생인가? 저주를 주게! 저주 받고 싶다고? 너는 지옥 구경 다 했어! 가고 싶어도 못가!” 너 인생 아니고 나의 인생이니까 나의 증인되라고 합당한 사태들이 일어나는 것이지 내가 저주 받는다고 할 필요도 없고 복, 구원 받으려고 할 필요도 없습니다. 사무엘이 바로 그걸 보여줍니다. 그러면 사무엘 맞은편의 엘리는 뭐겠어요? 그 다음 구절 저절로 풀립니다. 엘리는 뭘하겠습니까? 내 것, 오늘 강의 제목을 내 것으로 하고 싶은데요. 13절을 한번 보겠어요. 왜 자기의 아들들이 저주를 자청하는데 금지하지 않았지요? 이유가 뭡니까? 제목에 보면 나오지요. 그 자식이 누구의 자식이기 때문에? 내 자식이기 때문에. (삼상3:13) 내가 그의 집을 영원토록 심판하겠다고 그에게 말한 것은 그가 아는 죄악 때문이니 이는 그가 자기의 아들들이 저주를 자청하되 금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그러면 엘리 제사장이 평소에 하는 일은 뭐에요? “여러분! 말씀대로 살아야 됩니다.” 그 이야기 했지요. 제사장이 그 이야기를 하는 거에요. 왜 이스라엘의 모든 남자들은 일 년에 세 번씩 제사장을 만나게 되어 있어요. 성전에서 절기 때마다 와서 잔소리를 들어야 되요. 율법을 가르침 받아야 되고 가르침을 받은 가장들은 집에 돌아가서 가장 노릇을 해줘야 되요. 그건 왜냐하면 어린 양의 피로 바를 때 이미 규칙입니다. 살아남은 장자가 그 집안을 책임지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해야 되는 거에요. 그래서 십계명에 누구를 공경하라고 했습니까?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했어요. 계속해서 전수돼야 될 하나님의 언약적 계시를 아버지가 사실은 제사장이에요 가정에서는 아버지로부터 자식들에게 계속 주어져야 되요. 그리고 그 집안의 모든 여자들은 아버지가 받은 계시에 복종해야 되요. 이것은 아브라함도 마찬가지고 이삭도 마찬가지고 야곱도 마찬가지고. (벧전3:1) 아내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라 이는 혹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실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니 (벧전3:2) 너희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실을 봄이라 (벧전3:3) 너희의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베드로 전서 3장을 보면 3절 외모로 하지 말라는 것은 신경써야 되는 것이 외모가 아니라는 말이죠. 자기의 남편을 통해서 구원이 주어지게 되면 어디를 들어갈 준비를 해야 됩니까? 천국을 들어갈 준비를 하려면 외모가 아니고 마음의 준비가 돼야 되요 천국에 가서 살 수 있는 마음이 돼야 하는데 돈이 들지 않아요. 비싼 보석으로 할 필요 없다는 말이죠. 보석 살 돈 있으면 (재테크)포토폴리오 투자 많이 하세요. 이건 성경에 없는 말이고 안 들은 것으로 하시고, 껍데기를 치장하지 말라는 말은 진짜 신경 쓸 것은 마음이라는 말이죠. 준비 할 마음이 뭐냐하면 남편에게 복종하는 게 마음이 아니고 남편에게 흘러들어오는 하나님의 구원의 소식을 듣는 베드로 전서에 보면 아내들아 남편에게, 가장에게 배우라는 말이에요. 그러면 여자들을 구박하려는 내용이 아니고 이 내용 자체가 가장된 남편들에게 엄청 부담으로 다가 오지요. 남편들은 뭘 해야 되요? 아내들은 “당신 덕에 구원 받아 보자!”고 들이 밀기 때문에 남편들은 노래방에 가고 술 먹을 여유 없어요. 왜냐 말씀에 대해 질문을 해오면 남편은 답변을 해 줘야 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어야 된다고요. 왜 남자들은 교회에서 집중적으로 말씀을 가정을 대표해서 받아야 되기 때문에 그래서 이 본문에 의해 복음 모르는 남편에겐 순종하지 말라는 이야기로 아주 간단한 결론을 내릴 수 있어요. 그리고 헤어지려 할 때 아주 가뿐히 헤어질 수 있어요. 복음도 모르는데 어디서 같이 살려고 하는지, 하여튼 성경 전체를 까보게 되면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면 사람도 아니에요. 성경 내용이 그래요. 하나님 아는 것으론 지옥 갑니다. 하나님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면 이건 사람 아닙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과 예수님을 아는 것의 차이점을 어떻게 보는 가? 하나님을 안다는 것으로 (내가)해체 될 필요 없어요. 그냥 내 존재로만 됩니다. 엘리도 하나님을 알고 있잖아요. 그러니까 제사장도 했지요. 그러나 엘리는 뭘 모르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거에요. 예수 그리스도는 장차 올 분이지만 이미 어린 사무엘 안에 내장되어 있다라는 사실이에요. 내장 되어 있는 코드와 엘리가 만나면서 충돌이 일어나고 둘 중 하나가 깨지겠지요. 둘 다 깨질 수도 있고 사실 둘 다 깨지는 게 맞는 건데 코드가 여기서 코드가 무슨 뜻이냐 하면 속에 들어 있는 것을 코드로 보고 그게 해체된 것이 메시지가 된다고 보면 됩니다. 나는 제사장이다, 이런 것은 코드가 아니고 코드란 깨어지지 않으면 드러나지 않는 것. 계시로 인하여, 계시라는 망치로 탁! 깨어지지 않으면 드러나지 않는 코드. 그 코드는 깬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에 의해서 계속해서 풀어져야만 메시지가 나오지요. 그래서 메시지는 어디에 집결되어 있는 가? 예수님의 새 언약, 십자가 복음과 관련되어 있고 코드는 십자가 되기 이전에 주께서 만들어 놓으신 장치, 무대 장치라 보시면 되는 겁니다. 제 말이 어려워지는데 쉽게 하자면 이렇습니다. 요나가 삐져서 자기의 업무를 안하고 다시스로 가지요. 호박 넝쿨로 인해 화가 나지요. 이 모든 것을 하나의 코드로 보면 되요. 무대 장치라 보면 되요. 메시지는 아니에요. 메시지는 뭐냐하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이라고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고 은혜를 아는 자만 이스라엘이다. 이게 메시지가 되는 겁니다. 어렵지 않지요. 그래서 코드 없이는 메시지가 안 나타나요. 지금 우리가 빵을 먹고 있다. 이런 것이 전부 다 코드에요. 우리는 뭐냐? 그냥 이름이에요. 우리의 이름 속에는 독자적으로 “나는 이런 인간이다.”라고 독자적으로 구축하는 자기만의 이름이 따로 있어요. 자기만의 이름은 뭐로 구축되느냐하면 기억의 누적으로 되요. 인간 안에 뭐가 들어 있냐하면 기억의 누적이라 했지요. 이건 뭐냐하면 내 안에, 나는 ᷰ 입니다. 그 네모 안에 들어가는 내용은 기억의 창고에서 끄집어내서 네모라 한다 말이죠. 회사에 가면 [당신은 ᷰ 누구입니까?] 할 때 나는 아버지입니다라고 하면 안되고 나는 [과장]입니다. 이렇게 해야 되잖아요. 집에 간다면 나는 과장이다하면 안되고 [나는 아버지입니다] 그렇게 기억 중에 적당한 것을 뽑아서 나는~ 무엇이라 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것이 전부 틀렸다, 기억이 다 틀인 거에요. 이건 다 거짓말이에요. 이 거짓말을 다른 말로 가짜이다. 왜 가짜이냐? 가짜 코드와 가짜 메시지를 자기 쪽으로 회수하기 때문에 그래요. “나는 과장이야! 따라서 과장 대우해줘! 네가 대리이면서 왜 내게 이렇게 해?” 대리는 자기에게 하나의 코드가 되고 대리가 자기에게 잘 보이려는 것은 메시지가 뭐냐하면 나는 과장 대우를 받아야 돼!라는 게 자기 안에 있는 메시지가 된 거에요. 이 메시지를 오늘 본문에서는 뭐로 보여주냐? 엘리 제사장이 보여주는 겁니다. “나 제사장이야!”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제사장보다 더 센 분을 보내신 게 아니고 어린 사무엘을 보내요. 그런데 그 어린 사무엘이 어떻게 했습니까? “아저씨! 저를 꾸중할거에요?” 이렇게 합니까? 어린 사무엘은 정말 어려요. 아무것도 몰라요. 그래서 사람을 깨는 방법은 비난하고 저주하고 공격한다고 해서 깨어지는 게 아닙니다. 순진무구한 것이 우리 자신을 깨버려요. 임진왜란 때 선조가 도망치면서 백성들에게 욕 많이 얻어먹었거든요. 임금인데 도망치면서 먹을 게 없어요. 때를 굶는다고요. 그때 누가 요새 말로 건빵, 도넛 하나를 줘도 고마운 거에요. 평소에 임금이 아니에요. 그런 건 애들이 먹는 거지요. 바로 어린 사무엘의 역할이 그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을 때에 예수님을 상상하게 됩니다. 어떤 상상이냐 하면 멋있어 보이고 키도 훤칠하고, 예수님이 못 생기면 안 믿을 거에요? 멋있어 보이고 안수하면 병도 다 낫고 이렇게 보는데 예수님이 우리에게 오실 때는 우리가 무시할만한 소자, 어린 애 같은 모습으로 코드가 돼서 나타날 때 우리는 어린 애라고 개무시 하잖아요. 그것을 지금 우리에게 메시지로 풀어주는 겁니다. 어떤 교회에 교인이 한 오백 명이 된다. 교인이 하루아침에 다 나가 버렸다. 목사는 다 나가도 주님만 있으면 저는 만족합니다. 이렇게 나와줘야 되지요. 그것을 속으로만 생각지 말고 설교 시간에도 나와줘야 되지요. 우리 교회는 불타도 괜찮고 오백 명 다 나가도 괜찮고 이렇게 나와야 되지요. 그렇게 나올 때 교인들은 목사의 모습에서 어린 사무엘을 그러면 그것이 교회가 되는 겁니다. 왜 자기들은 다 잘난 엘리이기 때문에, 교회가 하나의 코드가 되고 거기서 십자가의 메시지가 울려 나와야 될 게 아닙니까! 하여튼 교회에 문제 있다고 해서 칭얼대는 장로님들 붙들고 상담을 하면 하는 얘기마다 괜찮은 목사 소개 해달라고 해요. 그들이 정말 성도 같았으면 복음을 잘 아는 목사님 소개시켜 달라고 해야지요. 괜찮은 목사가 “교회 크게 키우겠습니다.”이런 소리 밖에 더 하겠습니까? 그 교회가 누구 겁니까? 교회 부동산은 어디서 생긴 거에요? 그 장로들이 대를 이어서 자기 아버지 대에 집을 팔아서 된 부동산을 그 자식이 장로가 되서 그것을 우리 집안 교회라고 버티잖아요. 전부다 뭐냐하면 내 것, 나의 소유 때문에 그래요. 교회가 커진다고 좋아해선 안돼요. 크면 커질수록 그 소유에서 포기하기 더 힘든 거에요. 교회에서 그냥 집사이고 목돈 낸 적도 없는 교인 같으면 삐져서 안 나와도 되는 데 30년 동안 십일조 내보세요. 십일조 낸 거 한번 계산해 보세요. 돈이 얼마인지, 거기다가 축의금이며 다 내놓았는데 한 달 뒤에 딸이 결혼식 앞두고 있는데 지금 나오면 축의금 어디서 받습니까? 못 받잖아요. 마귀가 교회를 지은 이유가 마귀의 덫이에요. 악마의 덫이에요. 덫에 걸린 거에요. 교회 단체에 그래서 제가 하는 말이 교회는 다니되 돈은 내지 마라는 말이죠. 교회는 다녀도 돈은 안내야 되요. 돈을 내게 되면 사람이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알게 되어 있어요. 사람은 돈 낸 만큼 대우를 요구하게 되어 있어요. 감사 헌금 봉투 액수에 따라서 목사가 누굴 더 사랑 하는지 그것을 측정하게 되어 있어요. 창세기 3장 봅시다. 3장에 보면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의 전쟁터입니다. 이건 성경이야기에요. 그런데 사람이 자기 이름을 갖고 있으면 이 터는 어떤 터냐 하면 역시 전쟁터에요. 내가 성공하는지 패배하는지를 보여주는 전쟁터가 되고 말았어요. 이게 엘리에요. 엘리의 내 것, 내 몸도 내 것이고 내 인생도 내 것이고 내 가족도 내 것이고 전부 앞에 ‘나’가 붙어요. 내 것이라 붙여요. 그러나 내 것이라 하는 것은 현실이 아니고 현실 중에서 자기 욕망에서 필요한 것만 뽑아 낸 기억의 창고에 저축된 겁니다. 자기가 죽으면 허사가 되는 거에요. 그래서 어떤 사람은 몸이 아프니까 지금 죽이면 안 됩니다. 곧 내 자식이 사법 고시 시험처서 합격을 앞두고 있는 데 지금 눈을 감으면 한이 맺힙니다. 그러니 자식 잘 될 때 까지만 살게 해달라고 기도하잖아요. “지금 죽으면 너무 억울합니다.” 억울하다는 말은 본인이 엘리라는 말이에요. 이 세상이 자기를 위한 전쟁터에요. 그러니까 실제 메시지는 뭐냐하면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악마지요. 악마의 전쟁터에요. 그러면 주님께서 성도를 어떻게 만듭니까? 누구나 엘리니까 성도로 하여금 복음을 통해서 깨어지게 되면 아하! 이 자리가 나를 위한 자리가 아니고 주님을 위한 자리라는 것을 언듯언듯 보이는 푸른 하늘처럼 잠간 보이다가 다시 구름이 와요. “주여! 주의 세계군요!” 하는 동안 어느새 먹구름 가리듯 요번 금요일까지 검찰청에 출두하세요! 하면 소환 당하느냐 신경써야 되고 누가 실례지만 주차 해놓은 차 빼주세요 하면 차 빼는 동안에 언듯언듯 다 날라가 버리지요. 왜? 내 차이기 때문에 안 빼면 벌금 물을 수 있거든요. 주차위반 딱지 붙이거든요. 우리의 일상은 오직 나로부터 시작해서 나로 되돌아와요. 그래서 여자의 후손은 우리가 믿어서는 안돼요. 그 분이 우리를 목회하시고 전도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쉬지 않고 내가 다가가는 것은 다 가짜고 내가 다가가지 않더라도 지금도 주께서 살아계셔서 부활의 영으로 우리에게 십자가 앞장세우면서 다가오시는 이것이 언듯언 듯 다가오는 것이 발견될 때 그것을 우리가 주의 ‘증인’ 이라고 하는 거에요. 증인은 내가 스스로 될 수 없어요. 주께서 나를 매일같이 증인되게 하십니다. 아팠는데 병이 나서 증인되는 것이 아니고 아픈 그 자체, 돈 없는 그 자체, 그냥 실수하고 죄 지은 그 자체가 증인이 되요. 교도소에 가도 증인되고 다 되요. 교도소 나와서 증인되는 게 아니고 교도소에 있으면서도 증인되는 겁니다. 그래서 14절에 봅시다. 속함을 얻지 못한다. (삼상3:14) 그러므로 내가 엘리의 집에 대하여 맹세하기를 엘리 집의 죄악은 제물로나 예물로나 영원히 속죄함을 받지 못하리라 하였노라 하셨더라 지금 여러분들이 이것을 아셔야 되요 이 설명하기 전에 요한계시록 책이 이미 나와 있는데 범주, 범위를 넓히면 (의→죄) 의도 죄로 발각되게 되어 있어요. 인간은 자기 안에서 최선을 다해서 누가 뭐래도 나는 의롭다고 생각하지요. 범위를 넓혀 버리면 아하! 이게 배려하지 않고 고려하지 않은 변수들이 있어서 그 관계를 놓친 것이 남에게 피해를 주고 있는 체 내가 평소에 내 것만 잘되면 된다 생각하고 있는 거에요. 그것을 제가 연대기라는 것을 설명했지요. 요한계시록 할 때 설명했어요. 연대기가 작은 연대기 말고 큰 연대기로 들어가면 모든 역사 속에 있는 존재는 그 안에 갇혀 있다. 이렇게 되지요. 그래서 엘리 입장에서는 자기 범주에서 최선을 다하면 죄 용서가 된다고 생각하는 거에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엘리 제사장을, 제사장은 무엇을 대표 하냐하면 이스라엘 전체를 대표자에요. 이스라엘 전체는 엘리의 말을 듣습니다. 왜? 제사장이기 때문에 제사장의 말을 듣고 엘리가 구원하는 방식에 지금 구하는 방식과 일치된다고 성경에 했는데 여기에 난대 없이 사무엘도 어린 사무엘이 등장해서 새로운 속죄 방법이 여기에 침입이 되요. 투입이 돼 버립니다. 현재 기존의 엘리 방식은 죄 속함이 된다? 안 된다? 죄 사함이 안된다. 죄 사람이 안되면 저주는 당연한 거고 나라는 망해야 되요. 이스라엘 나라를 누가 망하게 하느냐? 하나님이 자기의 나라를 망하게 하시는 겁니다. 누구를 데리고? 주변 이방 나라로 망하게 하시는 겁니다. 망하게 될 때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그게 구원의 경로에요. 뭐든지 항상 우리는 내 뜻대로 실패자로 남아요. 사람이 실패자로 느낄 때 그것처럼 행복한 순간이 없습니다. 최고로 행복한 순간은 내가 있는 것 자체가 실패자고 내 쪽에서 성공 할 어떤 건덕지가 전혀 없음을 알 때 구름 가마 위에서 살아가는 느낌을 받을 겁니다. “세상에 이런 복이 다 있나?” 갑자기 가벼워지지요? 존재의 가벼움. 밀란 쿤데라 작가의 존재의 가벼움. 굉장히 존재가 가벼워지는 거에요. 스스로 가볍게 하려면 안 됩니다. 채식주의가 돼야 되지요. 그건 스스로 망합니다. 자기 학대에요. 자기 학대를 프로이드는 죽음 충동이라고 하는데 인간 속에는 뜻대로 안되면 자살하고 싶은 충동이 계속 올라와요. 차암~ 눈 꽉! 감고 죽을 난다 하지만 꼭 들어가는 게 뭐냐? 콱! 그냥 안 죽어요. “콱! 죽을 란다!” 길에서 쭉 벌리고 죽고 싶어 하고 한강에서 뛰어 내려 죽고 싶어 하고 누가? 김혜자가 드라마에 보면 나와요. 그냥 콱 죽고 싶다는 말은 아직도 자기가 자기 명예를 못 놓겠다는 거에요. 내 인생이 너무 아깝다는 거에요. 그런데 내 인생이라는 게 없는 거에요. 내 인생은 나를 포위한 인간들이 나한테 그렇게 계속 강요하는 오류에요. 그 오류가 어린 양이 비치지 않도록 커버 한 겁니다. 마귀가 한 짓이 무슨 짓인지 알아요?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하는 마귀의 목적이 거기 있습니다. 고린도 후서 4장4절. 어쨌든 간에 우리는 실패자인데 오늘도 달빛도 받고 있고 실패자인데 별빛도 받고 있고 모든 태양 에너지를 실패자인데도 불구하고 은혜로 받고 있다는 것, 햇빛과 공기와 따듯한 모든 것이 실패자에게 주시는데 이것을 마귀는 중간에 가로막기 하는 거에요. 이것을 못 느끼게 만든다는 말이죠. 참새가 아니게 하고 우리를 들풀이 아니게 만들어요. 우리의 영광이 있어요. 하지만 들풀에 피어있는 잠시잠깐 있는 풀의 꽃 같아서 나중에 말씀이 오게 되면 그건 다 비참하게 허무하게 져야 되는 겁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혹시 여러분들의 가정에 가훈을 학교에서 적어 오라고 하면 제가 적어 드리겠습니다. 돈 안 받고 적어 드리겠습니다. ‘아무 것도 아니다’ 식사 시간마다 한번 씩 제창하고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다’ 밥 묵자!~ 교회 입구에 붙이려면 이런 것을 붙여야 되요. 엘리가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겁니다. 그런데 어린 사무엘이 새로운 속죄의 방법을 이야기 하면서 기존의 속죄의 방법을 거부해 버립니다. 엘리 집의 죄악은 제물로나 예물로나 영원히 속죄함을 받지 못한다. 그러면 제물과 예물이 정기적으로 있었지요. 그런데 그것이 다 헛방이에요. 십일조, 주일 성수, 예배 참석하기, 전도, 헌금하기, 선교하기, 선교 헌금내기, 성경 공부, 전부 다 헛방이에요. 다 엉터리에요. 왜냐하면 그 모든 짓들이 내 것을 강화했기 때문에 내 것을 키워왔기 때문에 내 교회, 우리 종교 기독교, 내 집안, 내 인생, 나의 미래, 전부 다 앞에 뭐가 붙어 있습니까? 내 것입니다. 결국 이건 뭐냐하면 주님의 증인이 아니고 나의 증인이 되는 거에요. 우리는 꼼수를 부립니다. 나의 증인이 잘 돼서 주께 영광 돌리겠다고 이렇게 해요. 그런 길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해체되지 않으면 메시지가 나 잘났다는 메시지만 나오기 때문에 그런 메시지는 예수님의 메시지를 겐세이 놓는 해방 놓는 메시지가 되기 때문에 그건 잘못 된 거에요.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이 주신 희망이 뭐냐하면 뭔가 부숴버렸다는 말은 빈자리가 되었다는 말이에요. 빈자리라는 말은 이것은 채워지기를 고대하게 되겠지요. 그 빈자리에 뭔가 드러내고 그 빈자리에 새로운 속죄 방식이 들어가는 겁니다. 그러면 이 속죄의 방식을 이해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에게 해당 됩니까? 하나님에 의해서 가득 차 있는 자기 자리가 빈자리로, 껍데기로 거지꼴이 난 사람에게만 뭐가 보인다? 새로운 속죄 방법이 보이겠지요. 이게 누가 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마음입니다. 천국에서의 마음은 달랑 이 마음 밖에 없어요. “네가 이 마음을 품어라” 탕자가 되는 거에요. 탕자는 가득 죄를 지었잖아요. 그 가득 죄 지은 것을 통해서 마음껏, 가득 주님을 증거 할 수 있게 된 거에요. 그런데 맏이는 아무리 생각해도 자기가 죄 지은 것이 없어요. 왜? 평생 동안 아버지 옆에서 돌봤기 때문에 지옥 갑니다. 왜 지옥에 가느냐? 빈자리가 될 수 있는 기회를 놓친 거에요. 기회가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빈자리가 내 자리라고 거부하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질 때 자기를 부인하라고 했잖아요. 그러면 예수님의 십자가 자리가 무슨 자리입니까? 예수님의 자리인 동시에 우리의 자리에요. 그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무슨 자리? 죄인의 자리에요. 내 가치나 의미는 없어요. 그런 의미에서 빈자리에요. 그냥 내 죄만 있는 자리입니다. 그럴 때 탕자 즉 잃어버린 양을 구원하러 오시는 주님의 고마움, 무한한 엄청난 자비가 가득 나에게 오면서 우리에게 그 순간 먹구름은 없어지고 햇빛 쨍쨍 비취는 푸른 하늘이 주어지면서 우리는 이미 예수님의 증인으로서 살아가는 것을 소급해서 다시 한번 감사드리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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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221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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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