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20160610b히12장 1절(재앙과 징계)-이 근호 목사
안양20160610b히12장 1절(재앙과 징계)-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시작합시다. 12장 2절 끝에 보게 되면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그 뒤에 뭐라고 되어 있어요?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고 했지요. 이게 바로 아까 첫째 시간에 이야기했던 그것이에요. 재림은 칸막이에 불과하다고요. 지금 주님이 어디에 계십니까?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계시지요? 그럼 이 세상 돌아가는 것을 아실까요, 모르실까요? 다 아시잖아요. 그러니까 주님이 어디에 갔다고 해서 주님과 우리 사이에 칸막이가 있다는 생각을 가지면 돼요, 안 돼요? 그런 생각을 가지면 안 돼요. 신선로를 다시 그려봅시다. 지금 주님이 중심에 있다 이 말이에요. 중심에 계신 분이 지금 어디에 계시다?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계십니다. 그렇다면 현재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은 예수님이 온전케 하시는 주요,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셔서 모든 것을 완성하셨으므로 지금 우리는 이미 믿음으로 연결이 되어 있는 겁니다. 이게 증인인 거에요. 그러니까 이렇게 보면 그 다음이 쉬운데 그 이유는 우리가 예수님의 증인이 되기 이전에 앞서서 예수님 본인(당사자)이 이 땅에서 증인의 모습은 이렇다는 것을 미리 다 보여주신 거에요. 그렇게 겁을 줘도 예수님께서 겁이 안 나는 이유가 오늘날 우리가 주님이 옆에 계시니까 겁이 안 나는 것처럼 그런 거에요. 예를 들어서 옆이 지금 방입니다. 방에서 예수님이 소곤소곤하면 다 들립니다. 다 들리게 되어 있어요. 재림이라는 것은 이 벽이 허물어지는 거에요. 야고보서 5장에 보면 “내가 문 밖에 서 있다”라고 했어요. 이것은 하나의 칸막이이고 이것은 의미가 없다는 거에요. 칸막이는 세상사람들이 마음대로 까불라고 해놓은 거에요. 주님이 안 보이니까 그저 눈에 보이는 자기의 세상이 가치가 있는 줄로 알고 전부 사는데 성도는 이 세상은 없는 세상이라는 것을 알거든요. 칸막이가 있을 뿐이고 칸막이 자체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아요. 왜냐하면 성령께서 직접 내통하고 있기 때문에 “예, 예?, 아, 예, 알겠습니다.” 지금 전화통화 하고 있는 입장이기 때문에 성도는 칸막이가 있으나 없으나 관계가 없이 주의 증인으로 그냥 살아가고 있는 중입니다. 그러니까 세상 사람이라면 (지금 이곳이 5평이라면) 5평 되는 이 안에 살지만 성도는 끝, 저 하늘나라까지 포함해서 세상을 보니까 세상을 느긋하고 여유만만하게 보는 거에요. 그래서 성경에 보면 “뇌물을 받지 마라. 거짓말 하지 마라.”고 하는데 이 말은 다른 말이 아니에요. 현실의 범위를 넓혀서 보라는 뜻입니다. 현실의 범위를 넓혀버리면 우리는 우리가 행해서 사는 게 아니고 사나 죽으나 주의 것으로서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지요. 내가 행한 만큼, 돈을 번 만큼 사는 게 아니라 죽는 것도 사는 것이라는 현실이 이 칸막이 너머에 통합이 되어 있으니까 그게 훅 들어온 거에요. 들어와야 우리가 주님의 증인이 되지요. 내가 무엇을 꼼지락꼼지락거리면 아무리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도 나의 증인이 되는데 성령께서 확 들어오셔서 성령을 받았으니까 주의 증인이 되는 겁니다. 주의 증인은 내가 새삼스럽게 행할 이유가 없습니다. 내 발걸음을 세는 것과 같은 모든 것을 주께서 행하시는 것이지 내가 따로 행할 필요가 없어요. 그래서 2절에 보면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라고 되어 있는데 그렇다면 우리 성도는 하나님 보좌 우편에 같이 있는 겁니까, 따로 있는 겁니까? 제 질문은 간단한데요. 주께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있다면 우리 성도는 앞으로 앉을 겁니까, 이미 와있는 겁니까, 어떻게 되는 겁니까? 이미 와있지요. 그게 에베소서 2장 6절에 나옵니다.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과거 완료로 되어 있어요. 이미 하늘에 앉히셨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은 그걸 어떻게 압니까?” “칸막이만 없애면 된다니까요. 칸막이만.” 이쪽에 침실이 있는데 저걸 부숴버리면 그때 보고 아는 게 아니라 벽이 있더라도 침실이 있다는 것을 알아요. 투시인가? 투시라고 할 게 없어요. 요한계시록에 천군천사 이야기를 이미 현재성으로 보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칸막이가 있으나마나 지금 이 자리에 이 순간 같이 있어요. 지금 이 순간 함께 있는 거에요.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라고 했는데 그렇게 할 수밖에 없게 되어 있어요. 칸막이가 없는데요. 뭘. 주께서 지금 우편에 있고 우리도 같이 우편에 있기 때문에.. 그러면 다른 사람이 하는 말이, “우편에 있다고? 꼬라지 좋다. 우편에 있다고 하면서 지금 이렇게 사느냐?”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 옆에 있으면서 예수님의 나라 속, 천국에 함께 있다는 것을 예수님을 보면서도 못 봤어요. “예수님 이러시면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이야기했거든요. “내가 지금 십자가에 체포 되더라도 내 마음(뜻)만 먹으면 천군천사가 와서 풀어준다.” 제자들의 입장은 자기들의 눈으로 한 번 천군천사를 보고 싶다는 거에요. 그들은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보게 될 겁니다. 왜? 재림하실 때는 칸막이가 허물어지기 때문에 천군천사와 함께 있는 것을 보게 될 거에요. 그리고 정 그들이 보고 싶으면 우리가 죽으면 돼요. 우리가 몸을 떠나면 천군천사와 함께 영원히 삽니다. 지금 엘리야와 모세, 아브라함이 갔던 그곳에 삽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사적 죽음이 없어요. 오직 내세, 오는 세계만 있다고요. 오는 세계는 시간 끝에 오는 게 아니고 지금 이 세상과 오는 세계가 중첩, 같이 나란히 엮여져 있다니까요. 하나님의 보좌가 지금 있어요. 지금 구원 받은 거에요. 마귀는 지금 이 이야기를 가리는 거에요. 지금 있다고 하니까 그러면 내가 더 착해야 되지 않겠느냐고 하는데 “내 착한 행함과 상관없이 지금 있습니다.”라고 하려면 내 착함이 지금 있음의 근거가 되면 안 되고 내 행함 말고 다른 행함이 여기에서 근거가 돼야 돼요. 그 행함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이라는 말이지요. 예수님께서 어떤 행동을 해도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행동하듯이 예수님의 증인도 무엇을 하든 간에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가 이미 특채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빵을 주신 것도 주님의 십자가의 희생 덕분이고 방울 토마토도 십자가의 희생 덕분이고 전부 다 십자가의 희생 덕분에 오는 거에요. 우리는 사나 죽으나 주의 것입니다.그러면 십자가 안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십자가 안에는 두 가지 죽음이 있는데 하나는 육신의 죽음이 있고 하나는 십자가 죽음이 있습니다. 십자가 죽음은 생명이 돼요. 다른 말로 하면 영생이 됩니다. 그런데 육신의 죽음에 몰두하는 사람은 생명이 아니고 불멸적 존재를 생각하게 됩니다. 모든 이 세상의 인간들은 종교를 생각할 때 불멸적 존재로 생각을 해요. 그 불멸적 존재가 되는데 그 주체(주인공)가 누구겠어요? 지금 자기 자신을 두고 이야기하는 거에요. 그러니까 내가 천 년,만 년 오래 살면 그게 영생인 줄로 알고 착각을 하고 있어요. 그것은 창세기 3장에서 그게 아니라고 분명히 당부했어요. “네가 선악과를 따먹은 채로 생명나무를 따먹어 버리면 너는 영생의 존재가 아니고 불멸의 존재가 된다.” 불멸의 존재를 원해요? 해줍니다. 어디에서? 지옥에서. 십자가 죽음이 생명이라면 그 반대말은 지옥이 되는 겁니다. 지옥은 죽는 데가 아니고 불멸의 존재로 살되, 예수님의 저주를 받으면서 불멸의 존재가 되는 거에요. 그런데 여기에서 “예수님께 저주를 받으면서”라고 하는 것을 빼버립시다. 그러면 뭡니까? 불멸의 존재가 된다만 남지요? 그게 지옥이에요. 어떤 상태로? 지금 불멸의 존재를 원하는 이 상태로 오래 사는 게 지옥입니다. 지금도 사는데 더울 때는 덥다고 난리에요. 이게 재앙인데 이 재앙된 채 불멸의 존재로 계속 사는 거에요. 원래 세상은 물로 만들어서 물로 심판 받잖아요? 그러면 왜 두 번째는 물이 아니고 불이냐 하면 이게 지옥과 관련이 되어 있기 그렇습니다. 지옥은 불의 세계입니다. 불의 세계를 이 세상이라는 이름으로 미리 우리에게 맛을 보게 하신 겁니다. 그리고 이 세상이 끊어지면 칸막이가 없어지고 칸막이가 없어지면 원래 지옥이에요. 이 세상이 지옥인데 재림하실 때 두 개의 칸막이, 한 쪽은 천국에 가는 칸막이가 없어지고 한 쪽은 지옥에 가는 칸막이가 없어져 버리면 그냥 마귀가 지배했던 세상이기 때문에 마귀는 불못에 던지우지요. 그러면 마귀가 가는 곳에 우르르 따라가게 되어 있어요. 왜? 마귀의 종이니까요. 마귀의 종 아니면, 어린 양의 종이니까요. 요한계시록에 보면 어린 양을 졸졸 따라다니는 사람이 있어요. 그 사람은 천국에 가고 그 다음에 어린 양을 졸졸 안 따라다니고 그냥 가만히 있는 사람이 있는데 가만히 있다는 말의 뜻은 가만히 있는 그것이 짐승의 나라이기 때문에 따라 다닐 필요가 없다는 것이에요. 그냥 살던 대로 사시면 돼요. 막 살면 돼요. 막 살면 지옥에 갑니다. “하여튼 목사님 여기에서 또 딴 소리를 합니까?” 딴 소리를 하는 게 아니고 이 땅에서 막 살면 지옥에 갈 자는 지옥에 가고 천국에 갈 사람은 천국에 가니까 막 살자는 말입니다. 사는 대로 살면 돼요. 특채 되지 않으면 지옥에 갑니다. 마태복음 11장을 한 번 봅시다. 누가 한 번 읽어보세요.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이 본문에서 의미하는 것은 자기의 힘으로 아들을 아는 자가 없다는 말이거든요. 그렇다면 제가 질문을 하겠습니다. 아버지만 알면 왜 구원이 안 되고 아들이 꼭 끼어들어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왜 “아버지의 소원대로”로 충족하지 않고 아들이 자꾸 끼어드느냐 이 말이지요.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냥 건져주면 되지 않습니까? 아들이 왜 끼어듭니까?”라고 하는데 천국은 예수님이 몰고오기 때문에 그래요. 자꾸 하나님을 생각하지 마세요. 하나님에게는 하늘나라, 천국이 없어요. 천국은 아들의 나라에요. 그래서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고는 천국이라는 나라가 가짜가 되는 겁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인정하게 되면 내 인생이라는 게 없어요. 예수님께서 예수님의 인생이라고 이미 흡수, 통합을 시켜놓았기 때문에 내 인생이 아니고 예수님이 자기의 인생을 위해서 우리를 예수님에 맞도록 맞추어 가는 거에요. 그런데 우리는 자꾸 하나님에 맞추려고 하는데 하나님에게 맞추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은 예수님에게 맞추라는 겁니다. 예수님은 실제로 이 땅에 살았잖아요. 우리도 실제로 이 땅에 살잖아요. 그러니까 하나님에 맞추고 자꾸 상상해서 하나님을 생각하지 말고 예수님이 이 땅에 어떻게 사셨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살았습니까? 아버지께서 시키는 대로 살지요.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아버지가 시킨 것이 있는데 그것은 “네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증인이 되라고 내가 뽑아서 세웠다.” 거기에 조명발을 받고 그냥 살면 돼요. 이것도 저것도 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하나님을 믿어서 구원을 받는 게 아니고 예수님을 믿어서 구원을 받습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고 되어 있지 “하나님을 믿으라 구원을 받는다”라고 되어 있지 않아요.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다 믿는데요. 이슬람이 믿는 알라신도 번역하면 하나님이에요. 그들이 다 천국에 갑니까?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이라는 말은 부정형으로 “이렇게 하세요.” 가 아니고 “올 수 없다.”고 이야기하는 거에요. 올 수 없는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아버지께서 내게 보내지 않으면 아무도 올 수 없는 거에요. 내가 알고 있는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맺어가지고 갈 수 있는 나라가 천국이 아니라는 거에요. 그래서 예수님만을 증거해야 됩니다. 싫으면 말아야지 어떻게 하겠어요, 특채인데..?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서산에 가게 되면 개불잡이인지 개불인지 요새는 예를 들어도 자꾸 엉터리 예를 들어서 돌아서서 녹취를 자꾸 바꿔야 돼요. 상하이 홍구 공원에 투척한 사람이 윤봉길인데 이봉창이라고 했거든요. 이봉창은 천황에게 수류탄 두 개를 던진 사람이에요. 녹취를 고쳐놨는데요. 그것을 모른다고 교육을 잘 못했다고 했는데 나중에 보니까 내가 교육을 잘 못 했어요. 하여튼 제가 서해 바닷가에 보니까 그냥 모래사장에 구멍만 나 있고 안에 뭐가 안 나와 있어요. 그런데 젓가락에다가 소금을 묻혀서 쏙 집어넣으니까 안에서 개불인지 뭔지 네모난 조개가 나오는데 (맛살이라고 합니까?) 개불은 치우고 맛살 조개가 튀어나오더라 말이지요. 이게 우리가 했던 요한계시록에 나왔던 우물파기에요. 세상은 아무 일이 없어요. 주님이 자기 새끼에게만 복음이라는 소금을 집어넣어서 빼내주는 겁니다. 빼내보니까 그제서야 나는 죄인이었는데 특채를 받은 것을 아는 거에요. 칸막이가 없이 주님이 보좌에 앉으시고 나도 보좌에 앉았기 때문에 성령이 오게 되어 있어요. 주께서 보좌에 앉아계시지 않으면 성령이 안 오게 되어 있어요. 성령은 우리가 찾아가서 받아내는 게 아니고 우리 마음에 도달하게 되어 있다고요. 주께서 스파이더맨처럼 쭉 뿌린 거에요. 뿌리셨으니까 온 겁니다. 그래서 그것을 끄집어내니까 나의 이러한 세상보기, 이러한 현실보기는 시킨다고 시키는 대로 되는 것이 아니고 이걸 말릴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마태복음 11장에 보면 “아버지와 아들이 계시 외에 아버지를 아는 사람이 없다”라고 부정적으로 이야기해요. “하라.”고 한다면 행함에 대해서 이미 긍정을 해준 것입니다. “제대로 해. 똑바로 해.” 이게 아니고 올 수 없다고 이야기하는 거에요. 그러면 인간의 행함 자리에 주님이 침범해서 일을 하는 거에요. 그런데 왜 하나님이 침범을 해서 일을 하는 게 아니고 예수님입니까? 예수님의 일은 십자가로 규정이 되어 있어요. 하나님의 일은 모호해요. 비오는 것도 하나님의 일이니까 “비오는 것을 믿으라. 구원 받았다.”라고 하면 안 되잖아요. “파도 치는 것을 믿으라.” 이게 아니고 십자가가 복음이지 (비가 오는 것은 물론 하나님의 뜻 맞는데요.) 비가 온다고 구원을 받는 게 아니고 파도가 친다고 구원을 받는 게 아니고 몸이 아프니까 안수를 받아서 건강한 게 구원을 받는 게 아니고 전도해서 천 명을 데려왔다고 구원을 받는 게 아니에요. 십자가라니까요. 십자가 앞에서 구원을 받은 사람은 죄인이 되어야 되거든요. 그 죄가 뭐냐 하면은 “나는 내 행함으로 나만의 권력을 행사하는 식으로 살아오고 있습니다.” 하는 것을 고백하는 거에요. ‘예수를 믿으나 안 믿으나 나는 내 행함에 대해서 잊을 수가 없고 나는 그것을 귀히 여기고 내가 준 사랑은 귀하고 남이 준 사랑은 개떡 같고.. 이게 접니다.’ 부부가 맨날 그것 때문에 싸우잖아요. “네가 나한테 뭘 해줬는데?” 싸워도 한 쪽이 입 다물고 있으면 싸움이 될 수가 없어요. 한 쪽이 입을 다물고 있는데 어떻게 싸움이 됩니까? “예, 예, 예, 예. 아이고 이뻐라.” 이렇게 하면 끝이 날 문제를 가지고 잘났다, 못났다고 하는 거에요. 그 다음에 3절을 봅시다.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 이게 중국 무협 영화에 나오는 모습입니다. 그것도 옛날 정통 무협 영화 말입니다. 강호의 고수들이 등장하는 것 있잖아요. 거기에 보면 회전하는 무술, 태극 몇 권인지는 모르겠는데 이런 게 있어요. 여자 무술사가 있습니다. 그 주위에 건장한 남자들이 여자라고 무시하고 “누가 더 쎄냐?”라고 합니다. 대나무 숲에서 많이 싸우지요. 그때 여자가 어떻게 하냐 하면은 장풍을 한다고 손을 내밀면서 자체적으로 회전을 해버려요. 그리고는 팽이처럼 막 돌면서 슉 올라가지요. 예수님께서 팽 돌아버리면 뭐가 나오느냐 하면은 “십자가에 참으사”가 막 나와요. 그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지금 신약의 이야기가 전부 다 십자가를 이야기하는 거에요. 십자가 안에 이런 내용들이 들어있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십자가 안에서 예수님이 돌아줘야 이러한 내용들이 바깥으로 나오는데 인간들은 자꾸 십자가를 믿으려고 하는 거에요. 그런데 십자가를 믿으려고 하면 자기의 선입견을 가지고 믿어요. ‘주님은 저렇게 인내했구나. 우리도 인내해야지.’ 그런데 인내를 해봐요. 어디까지 가는지.. 어디 인내가 됩니까? 사람이 자기가 행할 만해서 지켰다고 이야기하지, 행하지 않은 것은 중간에 반칙이라고 다 뺐어요. 다 뺀 거에요. “나는 이웃을 사랑했습니다.” “어떻게?” “구제 헌금 5만원 냈습니다.” “5만원 내지 말고 심장 떼주지.” “그건 안 됩니다. 이것은 부모한테 받았는데 모르는 사람에게 왜 떼어 줍니까? 말도 안 되지요.” “그러면 요한일서 3장 16절, ‘형제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이 마땅하니라’는 왜 되는데?” “그건 믿음이 좋은 사람보고 하라고 그러세요. 나는 믿음이 안 좋으니까 나는 빼주세요.” 이렇게 나온다 말이지요. 자기가 되도 않을 강호의 고수인양 흔들어 봐야 여기에서 뭐가 나옵니까? 그냥 죄만 나와요. 썩은 냄새만 나오지요. 이래가지고는 안 되고 예수님께서 자체적으로 십자가를 흔들어버리면 이 땅에서 십자가의 효과를 받아요. 왜? 이 세상은 십자가 지신 그 환경이기 때문이에요. 십자가 지신 것이 이 세상이기 때문이에요. (이쯤하면 또 잊어버릴까봐 내가 걱정이 된다마는)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을 다시 한 번 정리해봅시다. 이 칸막이가 남들 보기에는 다 있어요. 세상 사람한테는 눈에 보이는 이 우주가 전부에요. 그러나 성령을 받은 사람한테는 우주라는 게 없고 이 칸막이가 없고 재림하느냐, 안 하느냐에 관계없이 이미 예수님의 세계와 다 통하게 되어 있어요. “사나 죽으나” 죽어도 괜찮고 살아도 괜찮아요. 왜냐하면 우리 자체가 이미 생명이기 때문에 그냥 인간의 육신의 죽음은 여기에 적용이 안 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2장에 죽기를 무서워 종노릇한 사람을 예수님께서 오셔서 빼내줬다는 거에요. 그러면 빼내주고 난 뒤에 상황이 뭡니까? 무엇을 무서워하지 않겠어요? 죽기를 무서워하지 않겠지요? 왜? 죽기를 무서워한 그곳에서 빼내줬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인간의 모든 행동에는 무엇이 담겨 있습니까? ‘혹시 죽을까 봐.’라는 공포를 가지고 행동을 조심스럽게 하잖아요. 그러면 그것은 결국 마귀로부터 놀림감이 될 뿐이에요. “예수 믿는다고 해놓고 꼴 좋다, 얼레리 꼴레리.” 하고 마구 놀리는 거에요. 그때 다시 한 번 주님께서 어떻게 합니까? 후닥닥 무술(십자가)을 또 사용해버려요. 그렇게 사용하면 어떻게 되는데요? 사용하면 5절이 나옵니다. 5절을 누가 한 번 읽어보세요. 4절부터 봅시다.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치 아니하고” 예. 피흘리기까지는 대항치 않았습니다. 그러면 지옥에 갑니까? 아니지요. 드디어 예수님께서 요술을 부리는 상태입니다. 5절을 보세요. “또 아들들에게 권면하는 것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라고 되어 있지요. 왜 주님께 타이밍을 맞춰서 징계가 와야 됩니까? 누구의 자식이기 때문에 그렇습니까? 남의 자식이 아니고 진짜 내 자식이기 때문에 그렇게 요술을 부리는 겁니다. 7절에 보세요.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징계하시면서 그것을 대우한다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라고 오히려 반문하시지요. “너무나 당연한 사실을 너는 몰랐었어?”라는 식으로 반문하시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뭡니까? 우리는 주님과 칸막이가 터져서 성령을 받았으니까 주님과 늘 함께 있는 거에요. 아까 이야기하던 것을 다시 이야기해봅시다. 열두 제자가 예수님과 함께 있을 때, 예수님을 어떻게 봤습니까? 예수님은 저기에 있고 자기는 예수님 옆에 붙어있다고 생각했지요. 자기 딴에 그걸 함께 있는 걸로 봤는데 예수님이 돌아가실 때 제자들이 함께 했습니까, 다 도망갔습니까? 다 도망갔지요. 도망갔다는 말은 평소에도 사실 함께 있었던 게 아니고 따로따로였다는 말이지요. 개인적인 생각을 한 거에요. “예수님, 하늘나라에서는 누가 높겠습니까?” 이런 질문이 나온다는 것은 따로 놀았다는 뜻이에요. 그런데 봅시다. 사도행전 2장에 성령을 받고 난 뒤에 어떻게 됐습니까? 사도들이 뭉쳐서 돌아다니지 않았지요? 전부 각자 흩어졌지만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몸도 하나요, 주도 하나요, 성령 안에서 하나요”라고 했어요. 백지영의 노래에서도 나오잖아요. “같은 하늘에 있다” 지금 몸은 헤어졌지만 같은 하늘에 있다는 말이에요. “잊지 말아요.” 그게 하나밖에 없는 교회에요. 캐나다에 가나, 미국에 가나, 복음을 아는 사람은 같은 하늘에 있어요. 주님이 신선로 아닙니까? 아까 시간은 직선이 아니고 이미 중심이 확정되어 있는 원이라고 했지요. 원에서는 동일한 시간에 다 저촉을 받아요. 천 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 년 같아요. 옛날이 지금이에요. 왜? 옛날 있었던 일이 반복이 되니까요. 그때 주님을 싫어했던 것처럼 지금도 싫어해요. 또 반복돼요. 그러니까 인간의 연대기는 이렇게 직선으로 달립니다. 연대기가 아니라고 했지요. 연대기가 아니고 성령 안에서는 항상 반복이 된다. 이게 요한계시록의 해석법이라고 했습니다. 『생명의 신호』라는 책에 보면 나와 있어요. 주께서 우리를 아들로 여기시고 함께 살지만 제자들이 성령을 받기 전에는 따로 놀았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성도는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따로 노는 게 아니고 늘 징계가 와야 돼요. 어떤 징계? 내 솜씨를 부려서 주의 일을 할 때마다 이것이 실패작으로 끝이 나도록 하는 겁니다. 말(발)을 잘해서 성도를 시키고 뭘 해서 기쁘게 하고 이것이 전부 다 실패로 끝이 나게 해요. 그러면 실패가 아닌 경우는 무엇입니까? 실패 다음에 성공이 오는 게 아니고 실패가 곧 성공인 거에요. 그래서 저는 실패와 성공이라는 말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그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가 죄인인 것이 드러나는 현장에서 비로소 발견된다.” 오늘 아침에 어떤 분이 저한테 이런 질문을 했어요. “옛사람을 지나서 새사람이 되었는데 옛사람을 생각할 필요가 뭐가 있습니까?” 모든 사람이 궁금하면서도 체면을 차린다고 차마 이야기를 못 하고 있는 질문이 그 질문이에요. “새사람이 된 입장에서 옛사람을 신경 쓸 필요가 없고 생각하지 않아야 되는데 왜 생각해야 됩니까?”라는 질문이에요. 새사람이 되었는데 왜 자꾸 옛사람의 모습이 나오느냐는 식으로 고린도후서에도 그렇게 되어 있어요. “옛사람을 버려라”라는 그런 잔소리를 할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옛사람을 버리라는 말이 나왔다는 말은 지금 늘상 옛사람이 생겨난다는 뜻이거든요. 그러면 새사람 값이 안 되잖아요. 새사람이 되었으면 옛사람을 버리고 이제는 빠이빠이해야 되는데 왜 자꾸 빠이빠이 하지 않고 계속 나오느냐 이런 질문을 한 거에요. 그래서 제가 답변했어요. 새사람은 소유하는 대상이 아니고 옛사람이 등장하면서 새사람이 함께 등장한다고요. 나는 이미 새사람이라고 하지만 어느새 보면 옛사람이 되어 있고 그 옛사람 속에서 새사람과 옛사람 사이에 십자가 복음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주께서 반복해서 옛사람과 새사람을 계속해서 감응(try)시키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뭐라고 했습니까? “나는 날마다 죽노라” 이게 말이 안 되잖아요. 날마다 죽다니요. 어제 죽었으면 끝나는 이야기잖아요. 그러니까 오늘 살아났으면 이제는 날마다 사는 게 아니고 계속 사는 것인데 계속 사는 사람에게 날마다 죽는다는 것은 말이 안 되잖아요. 그런데 날마다 죽는다는 말은 날마다 죽었다가 살아나고 죽었다가 살아나고가 계속 되는 거에요. 왜? 그 작업이, 시간을 초월한 묵시 세계에 우리가 놓여있기 때문에, 지나간 모든 것이 지금 현재가 되어서 날마다 반복하는 거에요. 한 10년 전에 처음에 교회에 다닐 때 술을 끊는다고 애를 먹었다. 술을 안 끊으면 상급이 없다고 해서 술을 끊었다, 그리고 나서 그때부터 술을 안 먹게 되었지요. 그런데 10년이 지났는데 누가 술을 권해요. “예수도 포도주를 잡쉈는데 한 번 잡숴봐요. 십자가로 구원 받는 거지 포도주 먹는다고 죄를 짓는 거 아니잖아요. 포도주를 안 먹는 것도 당신의 자기 의 아닙니까? 자기 의를 너무 내세우지 맙시다. 자기 의는 주께서 싫어하십니다. 술 먹으라고 권하는 것도 주의 일입니다. 지금 주께서 시키는 거니까 한 번 잡숴보세요.” 그럴 때 “술을 저는 안 먹습니다.” “왜 안 먹어요?” “새사람이 되었으니까 술을 안 먹습니다.” 이렇게 되면 “새사람이 된 근거가 술을 안 먹는 것에 있습니까?”라고 차고 들어올 수가 있는 겁니다. 그럴 경우에 술을 먹어야 됩니까, 안 마셔야 됩니까? 그런데 그 질문에 대해서 제 답변은 벌써 나와 있어요. “막 사세요.”거든요. 이 말은 “하고 싶은 대로 하세요.” 먹기 싫으면 안 먹으면 되고 먹고 싶으면 먹으면 되는데 다만 이것을 예수님하고 빗대지 마세요. 이걸 예수님이 시켰다는 소리를 하지 말고 우리는 어차피 막 살게 되기 때문에 내 본성을 들추어내기 위해서 옆에서 술을 권하게 된 거에요. 그러면 내가 술을 안 먹게 된 것은 내 본성에 안 맞아서 안 먹게 된 거에요. 여기에서 주의할 것이 있어요. 10년 후에 누가 유혹을 했는데 술을 안 마셨다면 그것이 15년 뒤에도 유효하냐 이 말입니다. 절대 유효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15년 뒤에 “만약 내가 시키는 대로 술만 먹어주게 되면 나는 너와 결혼해줄게.”라든지 “너에게 많은 유산을 남겨줄게.”라는 유혹이 왔을 때 “그 까짓 술 한 잔, 그게 뭐라고.”라고 하면서 술을 홀딱 마실 수 있는 상황이 언제든지 벌어질 수 있다는 거지요. 그건 유혹도 아니에요. 그때 술을 안 마시게 했을 뿐이지 그런 상황이 언제든지 벌어질 수 있기 때문에 “나는 안 마셔도 괜찮은 사람이야.”라는 식으로 오도하지 마시라 이 말입니다. 그렇게 자기를 자신하지 말라는 겁니다. 내가 나를 자신해버리면 이 사람은 예수님을 믿는 게 아니고 내가 나를 믿는 게 돼요. 이 사람은 나의 증인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살면 됩니까? 사는 것 자체를 징계로 보면 돼요. 징계로 본다는 말은 징계하는 자가 따로 있고 징계를 받는 자가 따로 있는데 징계를 받는 자는 나고 징계를 하시는 분은 칸막이를 쳐놓고 지금도 지켜보고 징계를 하시는 거라는 거에요. “그런데 징계를 하면 아프잖아요?” 아프기는 뭐가 아파요. 안 아프지요. 왜 안 아프지요? 참 아들이기 때문에 징계한다는 이 말씀이, 잃어버린 특채를 받은 기쁨을 다시 새롭게 느끼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 크게 기쁨이 왔다거나 크게 슬픔이 왔을 때 이것이 성도가 다시 한 번 성도인 것을 만끽하는 기쁨의 찬스가 되는 겁니다. ‘아이구, 슬퍼라.’ 하더라도 ‘슬퍼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지? 그러면 원래 내 것이었어? 주의 것인데..’ 이렇게 하면서 주께 감사하게 되지요. 또 좋은 일을 했다고 좋다고 그램그램(상호명)에 가서 소고기를 사먹어봤자, ‘이걸 좋아한다는 것은 내가 이걸 은근히 기대했다는 말이 되고 이것은 예수님보다도 이걸 더 원했다는 것인데 이게 하나님 앞에 징계구나.’라고 하면서 자기 자신이 평소에 얼마나 부끄럽게 살아가는지 티를 내는 거에요. 그 다음에 5절을 봅시다. 이것이 잠언서 3장 11, 12절의 말씀입니다.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잠언서는 대구 강의를 할 때 늘 하고 있습니다. 인천 녹매교회 목사님께서 고맙게도 녹취를 해주시는데 잠언서 3장 11절, 12절에 나오는 그 말씀이거든요. 여기에서 이것을 한 번 설명해봐야 되겠습니다. 잠언서 이야기는 솔로몬의 이야기입니다. 솔로몬 때에 하는 이야기가 여기 히브리서 12장에 나왔다는 말은 아까 이야기한 직선적 시간관이 아니고 신선로처럼 그때나 지금이나 주님이 중심인, 같은 시간대의 삶의 현장이라는 뜻으로 보면 돼요. 그렇다면 제가 물어볼게요. 잠언서가 여기에 적용되었잖아요. 그러면 시편은 적용이 안 됩니까? 적용이 되지요. 그러면 창세기 1장은 적용이 안 됩니까? 적용이 되지요. “보기에 심히 좋았더라” 적용이 되는 겁니다. 그렇게 보면 우리는 말씀의 풀장에 속해있는 거에요. 이게 중요합니다. 내가 말씀을 지키는 겁니까, 아니면 내가 말씀의 늪 속에 풍덩 빠져있는 겁니까? 풍덩 빠져있지요. 그러면 성경 말씀을 본다는 말의 뜻은 “하나 지켰다, 두 개 지켰다.” 이게 아니라 전체 말씀 속에 포함이 되어 있으니까 이 말씀이 여기 검뎅이처럼 또 여기에서 나를 통해서 오늘은 이 말씀이 튕겨 나오고 내일은 저 말씀이 또 등장되는 거에요. 그래서 제가 이 말씀을 하는 것은 우리가 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말씀의 실재성을 우리를 통해서 드러내게 하는 것, 이것이 하나님 아들의 존재 이유라는 것입니다. 금붕어가 어항 속에서 헤엄치는 겁니까, 사는 겁니까? 사는 거지요. 그렇지요? 그런데 어떤 사람이 어항에 빠졌다면 헤엄을 쳐야 돼요, 살아야 돼요? 큰 어항 속에는 인간이 사는 게 아니고 그냥 헤엄을 쳐서 나와야 되겠지요. 우리는 말씀을 지키는 자가 아니고 말씀이 지켜진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그 안에 이미 푹 잠겨버린 거에요. 어항 속의 금붕어처럼 꼬불꼬불 하면서 사는 거에요. 그러면 한 번 물어봅시다. 어린애가 엄마와 같이 살아요, 엄마 품 안에 사는 겁니까? 갓난 어린애는 엄마 품 안에 놓여 있지요. 애를 보고 “야, 돈 벌고 살아라.”라고 하지는 않잖아요. 품 안에 품어주잖아요. 그게 시편 131편에 나오는데 우리 하나님께서 품어주게 되면 성도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우리 주님이 다 품어주셨지요?”라고 하면서 시선을 마주칠 때 그게 바로 성도의 삶이 된다는 말이지요. 그러니까 말씀을 지키는 게 아니에요. 그런데 왜 자꾸 말씀을 지키라고 하느냐? 그것은 생활이 어렵다 보니까 ‘야, 징계 받는 모양이다. 성경을 안 본다고 주께서 또 봐줄 수도 있는데 그걸 때리는구나. 에잇.’ 성경을 지켜가지고 전에 손해본 것을 빨리 만회해가지고 다시 원상복귀시키려는 마음을 갖고 그렇게 하고 있는 거에요. 그런데 그것을 누가 간파하느냐 하면 목사들이 간파해가지고 이참에 헌금 그 동안에 밀린 것을 다 뽑아내고 봉사 뽑아내고 충성 뽑아내 가지고 “여러분 저주 받으려고 환장했습니까? 주님께서 살아계신데 그렇게 믿음이 없습니까? 이제 믿음대로 사시길 바랍니다. 어린 애 같은 믿음으로 사셔가지고 빨리 하나님의 복을 받아가지고 여러분이 그리워하는 그 미래상을 찾으시기 바랍니다.”라고 해놓고 그냥 있지 않아요. 그 다음부터 간증집회 들어갑니다. “내가 옛날에 이렇게 살아서 애를 먹었는데 이렇게 잘 되었습니다.” 그게 설교 끝이에요. 설교는 그게 끝이에요. 마지막에 설교를 듣고 난 뒤에 그 다음부터 ‘그래, 지켜야지.’ 인간은 지킬 만한 것만 골라잡아요. 뷔페에서 음식을 다 먹는 그런 배불뚝이(배뿔레기)는 없습니다. 음식을 골라먹듯이 성경도 골라 먹으면서 자기는 먹었다고 치지요. 어떤 드라마에 보니까 그런 게 나오던데요. 뷔페에 가면서 친구가 속였어요. 쟁반을 주면서 “이 뷔페는 딱 한 번만 먹어야 된다.”라고 장난삼아 얘기하니까 애가 욕심을 내가지고 쟁반에다가 음식을 산만큼 담았습니다. 그 말을 곧이곧대로 들어가지고요. 여러 번 가져가도 되는데 한 번에 가져갈 욕심으로 말이지요. 예수를 믿고 난 뒤에 보통 욕심을 내요. 성경을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한 번 읽어본다고요. 그런데 성경을 한 번 읽었다고 그걸 다 먹습니까? 성경은 지키는 게 아니고요, 주님 쪽에서 우리한테 실습을 시키는 거에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지킨다고 지켜지는 게 아닙니다. 내가 지킨 그 말씀이 어떤 상황이 되면 ‘내가 지켰다고 여기는 그 뜻이 아니고 이런 뜻이구나.’ 하는 것을 실감나게 해요. 그렇게 하면서 항상 그 결과로 이미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십자가로 구원을 받은 상태라는 것을 알게 해요. 왜?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에요. 이 죄에 대한 해결은 이미 끝났다. 주님의 피로써 끝났고 그럼으로써 우리가 아들로 특채되었음을 깨닫게 하는 식으로 항상 우리에게 주어지게 되면 그것이 말씀이 말씀대로 드러난 지킴이 돼요. 나는 못 지키는 죄인으로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이 보시기에 여전히 말씀 안에서 아예 사는 존재인 것을 확인케 했으니까 얼마나 감사합니까? 지킬 게 없어요. 우리가 따로 골라잡아서 ‘이건 나중에 지키고 이건 지키고..’ 이렇게 되면 이건 자기 의가 되잖아요. 살아가는 것이 다 지킨 분의 혜택으로, 죄 많은 우리를 위해서 죄 없는 분의 혜택으로 오늘도 목련화는 앞에 피고 햇빛은 비춥니다. 전부 다 죄인인 나는 감당할 수 없는 복인데 내 대신 남이 지켜가지고 은혜의 선물로 주시니 우리는 그냥 감지덕지로 받아챙기기만 하면 되는 거에요. 욕심을 내니까 “저것 주세요. 저것 주세요.”라고 하는데 그렇게 되어 버리면 이것은 주님의 말씀을 지키겠다는 것밖에 안 되는 거에요. 말씀과 기도로 거룩해진다는 대목이 디모데전서에 보면 나와요. 그런데 이걸 사람들은 두 바퀴가 있다로 보는 거에요. 여기에서 두 바퀴 이론이 나왔어요. 말씀만 지켜도 안 되고 기도와 합해서 나란히 두 바퀴가 가야 된다고 하는 거에요. 그러니까 어떤 사람은 네 바퀴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여덟 바퀴라고 하고 난리가 났어요. 그 말씀의 뜻은 말씀대로 하지 않는 기도는 응답되지 않는다는 뜻이에요. 말씀대로 모든 게 되어간다는 것을 네가 믿게 되면 그게 말씀을 지킨 게 된다는 거에요. 말씀을 어차피 우리는 못 지킵니다. 그러나 다 지킨 분이 우리를 이렇게 결과물로 만들어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지금 이 자리가 말씀의 현장화가 되고 실현된 상황이 되는 거에요. 그걸 주 앞에 감사와 찬양으로 올리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매일같이 징계 받는 즐거움이 있게 하옵소서. 주와 함께 있는 즐거움이 그런 즐거움이오니 늘 주님과 시선을 맞대면서 주님과 우리 사이에 담이 허물어지면서 주께서 시키는 대로, 은혜를 준 대로 움직인다는 것을 나타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