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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가짜다 ( 마 21:9 ) 대전- 76강자유게시판마태복음

가짜다 ( 마 21:9 ) 대전- 76강

이근호

2016년 5월 31일 본문말씀: 마태복음 21:9

마태복음 21장 9절을 보게 되면 이거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사람들이 아주 요란을 떨죠. 그런데 여기에 예수님보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 용어 자체가 오늘날 우리 이방인들한테는 잘 안 쓰는 용어죠. ‘호산나’ 용어보다 더 어려운 게 ‘다윗의 자손’ 이예요. ‘다윗의 자손’ 앞에 붙는 게 뭐냐, 호산나를 붙이죠. 호산나 다윗의 자손! 이렇게 돼 있어요. 호산나 이걸 차라리 번역해서 하지 않고 호산나를 그냥 붙인 것은 그만큼 이 사람들이 이것이 하나의 준비된 이벤트로 돼 있다 이렇게 보면 돼요. 틀 잡힌. 하나님을 찬양할 때 바리새인들에서 훈련된 겁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할 때는 시편에 의해서, 또는 구약에 의해서 이러한 식으로 표현을 하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신다. 이것이 틀 잡혀 있는 겁니다. 호산나라는 것은 구원하소서, 여호수아에 주로 많은데 ‘나’라고 부르는 것은 +지금, now, 지금 구원 하소서, 그 다음에 나온 용어가 다윗의 자손이여, 라고 이렇게 돼 있어요.

그렇다면 이것은 예수님께서 필리핀 오신 것도 아니고 중국에 온 게 아니고 한국 고조선에 온 게 아니고 이미 요 구원의 형식이 갖추어진 그 환경 속에 들어오는 게 되죠. 호산나도 기다리고 있고 다윗의 자손도 이미 부를 만반의 준비가 돼 있죠. 그러면 요 구조부터 먼저 알아야 되죠. 요 구조가 뭐냐 하면 구약을 문자적으로 해석을 하게 되면 나타나는 결과물로서의 구조라 보시면 됩니다. 구약 성경을 문자적으로!

방금 제가 ‘문자적으로’ 했죠. 문자적으로, 라는 말을 그 당시 유대인보고 제가 직접 쓰게 되면 그 사람들 그냥 용서하지 않습니다. 나한테 달려들 거예요. 왜냐 하면 문자적이란 말은 반드시 대비되는 게 있어요. 뭐가 대비되느냐 하면 영적인 해석이 따로 있을 경우에만 문자적 해석이라는 게 성립되지, 그냥 영적 자체가 없을 때는 문자적이 뭐냐 하면 이게 곧 영적 이예요.

‘언약의 흐름’이라고 제가 십자가마을에 올려져 있는 게 있죠. 이상현 목사님하고 사무실 하나 빌려서 혜화동 특강한 게 있잖아요. 기억이 안 나십니까? 거기 보면 첫 강의 6개 했는데 6시간 한 강의인데 강의 초반에 뭐가 나오느냐 하면 유대인들은 구약을 어떻게 해석했는가, 라는 것을 제가 설명을 했어요.

오늘날 우리 한국 사람들은 성경을 보면 한글로 돼 있으니까 유대인은 성경을 어떻게 봤는가는 생각을 안 하고 아, 성질도 급해, 성경 해석을 들어가면서 자신의 선입감들을 그대로 가지고 들어가는 겁니다. 그것을 가지고 인식론이라 하고, 인식론이라 할 때 지금 우리는 제대로 된 믿음으로 정신 바짝 차려서 순수하고 고귀한 마음가짐을 가지고 깔끔하게 어떤 죄도 짓지 않고 바로 해석을 들어간다고 생각하지만 이거는 우리 인식자체가, 쉽게 말하면 선입견, 또는 선입감, 선입견 자체가 뭐냐 하면 역사의 지평에서 골라낸 거예요. 역사의 지평이라는 것은 인간은 환경의 산물이라는 거예요. 환경의 산물로서 주어졌기 때문에 우리가 듣고 본 것은 환경에 의해서 주어졌고 거기서 인간은 욕구와 욕망에 의해서 욕망이 마주쳐서 나왔던 의미가 역사를 이뤘고 이 환경 자체가 역사니까, 그 역사에서 나온 인식 가지고 지금 성경을 보죠.

그럼 뭐가 빠져버립니까? 그 당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봤느냐가 완전히 빠져버립니다. 예를 들면 요한복음 11장에서 마르다가 자기 오빠 죽고 난 뒤에 예수님을 마중 나와서 뭐라고 했습니까? “분명히 전갈이 갔는데 왜 죽고 난 뒤에 이제 오셨습니까?“라고 할 때 예수님 하시는 말씀이 ”너희 오빠는 살리라“ 하니까 ”네, 그런 식의 산다는 것은 우리도 압니다. 마지막 때에 다윗의 자손이 오시면 모든 인간이 동시에 산다는 것은 우리가 압니다. 그러면 특별한 게 없지 않습니까? “라고 나간 거예요.

그러니까 그것은 그때 유대인들의 역사의 지평 이예요. 고대하고 있습니다. 누구를? 메시아를! 어떤 식으로? 다윗의 자손으로! 그러면 우리는 메시아가 온다. 이렇게 할 수 있는데 왜 다윗의 자손이라 했느냐 하면 다윗의 + 자손은 다윗에게 약속한 모든 것이 자손이라는 그러한 출현한 존재로서 다윗의 약속은 이분 등장하면 다윗의 약속은 다 등장한 것이라고 결합돼 있는 거예요.

율법을 앞에 뭐를 붙입니까? 모세 율법이라 붙이죠. 모세 율법이라는 것은 율법을 해석할 때는 모세에게 준 약속을 이루는 수단으로서 율법이다. 율법 지키면 모세에게 약속한 것은 다 받는다는 거죠. 그러면 율법 속에 뭐냐 하면 니가 땅을 차지할 것이라 돼 있죠? 땅을 차지한다는 그 땅이 지금 어디냐 하면 가나안 땅이거든요. 팔레스타인 요르단 시리아 그 땅이다 말이죠. 그러니까 유대인들은 뭐를 생각하느냐 하면 율법 지키면 모세가 받았던 약속, 이 팔레스타인 부동산, 이 부동산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회복이라는 영화가 있어요. 이 영화가 뭐냐 하면 바로 구약 때 약속한 것이 예수 그리스도께 이루어지니까 우리는 어떻게 하든지 현재 이스라엘 전쟁, 아랍과 이스라엘 전쟁에 주목해야 된다. 왜 그게 요한계시록에 전7년, 3년 전, 3년 후에 모든 계시를 알려면 이 이스라엘과 그 기타에 있는 아랍권과의 전쟁하는 코드를 찾아내고 거기서 메시야를 뽑아내게 되면 이제는 언제쯤 돼서 예수님께서 감람산에 재림할 걸 아니까 요한계시록은 그렇게 실제 시사와 더불어서 같이 해석을 해줘야 된다. 라는 것이 미국뿐만 아니고 한국에도 완전히 퍼졌어요. 신천지도 그거고 신천지뿐만 아니고 요한계시록 좀 들먹인다는 사람은 전부 다 그런 해석합니다. 마곡이 어떻고 곡이 어떻고 지금 우크라이나 전쟁은 이건 뭐가 어떻게 되고 이게 마곡에 시편에 나오는 그 예언을 성취한 거고, 요한계시록을 그렇게 해석해요.

그러면 그 요한계시록 해석을 들은 사람은 할 일은 뭐만 할 뿐 이예요? 요거만 준비하면 돼요. 돈! 돈 가지고 뭐 하는대요? 벙커 만들어서 3차 대전, 아마겟돈 전쟁에서 살아남으면 되죠. 여기 생수 준비하고 비상식량, 건빵, 라면 준비하고, 요걸 개인으로 하면 돈 들기 때문에 요걸 계돈 모아서 투자해서 하겠다는 것이 안산홍 집단입니다. 그 집단이나 신천지나 다 마찬가지에요. 그래서 안산홍이 그만큼 돈을 거둬내니까 그 사람들은 돈을 낸 쪽이니까 못 빠져나오는 거예요. 왜, 투자한 게 있기 때문에. 요한계시록 말씀대로 3차 대전이 일어날 때 자기는 살아야 되니까. 인간의 타고난 공포, 멸망할 거란 공포심을 종교가 잘 이용한 거예요. 이걸 흔히 이단이라 하는데, 이단이라고 할 수가 없어요. 왜 한국 교회 다 그러니까. 모든 교회가 다 이것 가지고 계속해서 교회에 돈이 유입되도록 조치하기 때문에. 똑같아요.

그러니까 유대인들이 그 당시에 성경을 어떻게 해석했느냐 하는 그것을 요즘 우리는 유대인이 아니고 우리는 이방인이고 성령 받았는데 우리가 왜 해석해? 라고 하지만 소위 성령 받았다고 자처하면서 내놓는 모든 해석이 어쩌면 유대인들이 예수님 당시에 예수님을 죽였던 그 해석하고 똑같은 해석 이예요. 똑같은 해석이니까 예수님을 똑같이 계속해서 죽이는 거예요.

그러면 유대인 해석의 초점은 뭐냐? 살자, 누구 덕분에? 메시야 덕분에 살아 보자는 겁니다. 예수님의 12제자도 이런 식입니다. 예수님 12제자 중에 베드로가 배반했죠. 그것도 대표자로 딱 가서 남들은 다 도망쳤는데 혼자 가서 수제자 값한다고 혼자 가서 값 잘했죠, 뭐. 세 번씩이나 부인했잖아요. 닭이 울었습니다. 주일 낮 설교에 닭 울었어요. 닭이 울므로 말미암아 여기 위상 층이 두 개 생겼죠. 한 쪽은 무슨 층이냐 하면 바로 대신 할 수밖에 없는 층, 배반의 장미는 아니고, 배신할 수밖에 없는. 위층은 뭡니까? 그것에 대해서는 주께서는 이미 아시고 용서하기로 준비된 층, 이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그대로 둘 다 위상적으로 층이 있어요.

위층은 우리가 손 댈 게 없고, 아래 층은 열심히, 열심히 구원받으려고 애를 쓰는 층 이예요. ‘제가 목숨 바치겠습니다. 예수님.’ 베드로가 한 이야기에요. 돈 정도가 아니고 헌금 정도가 아니고 주일 성수가 아니고 아예 이 목숨을 주를 위해서 내놓겠습니다. “가져가라. 가져 가. 그 따위 필요 없어.” 왜, 그게 필요 없기 때문에 그래요. 주께서는 나를 구원한 게 아니고 새로운 나를 알아서 구원하거든요. 새로운 나. 내가 모르는 나를 구원한다고요. 그러면서 내 속에서 기존의 나와 차이 나면서 피어오르는 그런 나를 구원하는 겁니다. 기존의 나는 행함으로 의롭게 하던 나, 새로운 나는 행한 거 묻거나 따지지 않고 살려주시는 나.

마태복음 다윗의 자손 하기 전에 성경 잠시 봅시다. 고린도전서 13장 한 번 봅시다. 이건 안 봐도 다 외우시는데 13장 7,8절에 보면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 됐습니다.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리며 모든 것을 견딜 수 있는 인간은 없어요. 그런데 그게 위층에서 보게 되면 베드로가 배신한 것도 이게 견딘 게 되게 있어요. 왜, 사랑은 니가 어떤 행위와 관계없이 계속 주어지기 때문에. 베드로에게 이미 그런 암시를 해줬어요. 어디서 오느냐 하면 발 씻을 때 줬습니다. ”발 씻어야 깨끗해진다.“ 하니까 그럼 발 말고 나머지 모두 다 씻겨 달라. 주님이 맛사지사도 아니고 …발만 씻어도 이미 온전해진다. 그래서 이 말은 뭐냐 하면 너가 너에 대해서 다룰 수 있는 입장이 아니고 내가 너를 다룬다. 왜 택했기 때문에, 사랑하기 때문에. 그래서 고린도전서 13장 사랑이라 하는 것은 우리가 행하려고 한다면 이건 실패할 수밖에 없는 그 사랑입니다.

여기서 다시 해봅시다. 유대인들은 어떻게 해석했는가? 우리는 문자로 해석했는데 유대인들은 문자란 자체가 영적 이예요. 그게 유일한 문자고 영적 이예요. 자, 그렇다면 그들은 어떻게 해석했느냐 하면 이 사람들은 굉장히 믿음이 좋아요. 하나님께서 말씀대로 율법대로 시행하신다. 그 결과가 뭐냐 이스라엘 유대 나라죠. 율법과 유대 나라 사이에 아주 매끈하게 연결됩니다.

그런데 성령 받은 스데반집사 같은 경우에는 중간에 뭐가 들어가느냐 하면 이게 들어가요. 십자가가 들어갑니다. 십자가! 그런데 유대인들은 뭐가 빠졌습니까? 십자가가 빠졌죠. 그러면 예수님을 못 박아 죽였던 그 유대인의 잘못된 사고방식, 그게 마귀 적 해석인데, 악마적 해석은 뭐냐, 악마적 해석과 성령의 해석의 차이점이 뭐냐, 달랑 하나밖에 없어요. 뭐냐, 성경 해석에 십자가를 넣느냐, 아니면 중간에 십자가 없이 해석되느냐, 그 차이 밖에 없어요.

기도하니까 복 받더라. 뭐가 빠졌습니까? 지금 십자가가 빠진 거예요.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렇게 이야기하면 도리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시편을 봐라. 내 귀 쥐고 내 목 쥐고 시편 펼칠 거예요. 자, 너 이리 와, 시편 1편 읽어봐.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길을 좇지 않고” 거기 어디 십자가 나와요? 거기 어디 십자가 나옵니까? 십자가가 어디 나와요? 왜 당신은 성경에 없는 이야기를 왜 덧 붙여서 해석을 해요? 우리가 분명히 따질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대로 해, 성경대로. 성경대로, 선배가 누구냐? 바리새인이고 사두개인입니다. 심지어 바리새인들은 말씀을 실천화해야 된다. 말씀은 머리로만 하지 말고 행위로 실천에 옮겨야 된다. 그렇게 이야기했어요.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이 마귀새끼야, 마귀 자식아. 너희들은 밖에서 들어가는 게 더러운 게 아니고 니 속에서 기어 나오는 게 더 더럽다.” 니가 전도한답시고 천하에 모든 사람을 전도한다 했는데 배나 지옥 백성을 만들죠. 율법에 흠이 없는 사람이 하는 짓이 뭐냐, 빌립보서 3장을 보게 되면 아는 이야기지만 이런 기회에 다시 한 번 보게 되면 율법에 흠이 없는 사람이 나와요. 빌립보서 3장 6절에 보면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율법에 흠이 없는 것이 뭘 한다? 교회를 핍박할 수밖에 없죠.

그러면 그것을 예수님은 뭐라 했습니까?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핍박하느냐” 했죠. 교회를 핍박하는 게 아니에요. 교회 핍박하는 게 뭐다? 예수님을 핍박하는 관계가 되려면 교회는 어떻게 돼야 돼요? 이 세상에서 핍박을 계속 받아야 되는 거예요. 누구한테만? 바리새인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에게 계속 핍박을 받아야 되고 계속 오해를 받아야 돼요. 니같이 믿어서 몇 명 구원 받겠냐 이 말입니다. 니 말이 맞을 거 같으면 왜 하나님께서 숫자를 많게 해야 되는데 니 교회 숫자 얼마 안 되잖아. 아까 몇 명 안 된다 했죠. 하나님이 살아있으면 숫자가 많아야 되는데 왜 많은 사람들이 니가 틀려먹었다는 그 교회에 지금 수천 명 가요. 그러면 그 교회는 반만 갔다 하고 신천지는 왜 그리 많이 가는지. 불교는 더 많죠. 불교는 1년에 한 번씩 이름 올려도 다 신도에요.

정답은 이겁니다. 어떻게 행해서 그러면 십자가 믿을까요? 가 아니라 십자가 믿는 것도 수상해, 믿는 가짜가 한 둘이 아니니까. 십자가 믿어도 소용없어요. 이걸 알아야 돼요. 현실을 친히 만드신다. 바로 호산나 외치는 사람들이 이걸 몰랐어요. 예수님이 오실 때 좀 기다렸어요. “하나 둘 셋, 호산나 다윗의 자손” 이렇게 이미 알고 있는 대로 불렀는데 그들은 현실 속에 예수님이 들어온다고 본 거예요. 그러니 저들은 뭐만 부르면 돼요? “호산나 우리를 구원하소서. ” 자 메시아 왔으니까 구원하소서. 하게 되면 “아이고 기다렸어요? 아이고, 내 새끼”하고 구원할 줄 알았어요.

있는 현실을 주께서는 기존의 자기가 인정하는 현실 속에 주께서 같이 이렇게 결합만 되면 된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게 아니고 주님은 현실을 없는 현실을 새로 만듭니다. 새로 만드는 방법 아까 이야기했어요. 모든 것을 빈 거로 만들어요. 우리도 이 정도로 주님이 오시기를 만반의 준비를 했습니다. 이러는 거예요. 마치 사장님이나 높은 사람 생일 축하 해주려고 일부러 사무실에 불 끄고 여자 직원들이 준비해서 “하나 둘 셋, 생일 축하합니다.”하면서 빵빵 터뜨리고 노래 부르고 하잖아요. 그런데 사장님은 딴 데 가는 거와 똑같은 거예요.

기존의 축하 잔치를 안 받습니다. 그때 사장님이 이야기해요. “니들이 나를 알아?”이겁니다. 요한복음에 나오는 말이죠. 땅에 속한 자는 땅에 속했기 때문에 나를 모르게 돼 있다. 그러면 결론은 간단해요. 모르는 자를 알게 만들어서 구원하시는 업무를 홀로 담당하신 분, 그게 바로 메시아입니다.

자, 그러면 이제 우리가 남은 문제는 이거에요. 도대체 다윗의 자손이 뭐냐? 아까 공식을 다시 해봅시다. 자, 아브라함의 자손은 아브라함의 언약이 그대로 대대로 여기 담기게 돼요. 그러면 아담의 아들이 누굽니까? 이삭에게 아브라함의 약속이 넘어갑니다. 맞죠? 그런데 뭐가 빠진 게 있어요. 아까 이런 해석하면 안 된다 했죠? 뭐가 빠졌어요? 십자가를 집어넣어야 되죠.

그러면 이삭의 언약에 이삭이 아버지 뜻이 온다면 아브라함은 어떻게 되는가? 아브라함은 이삭을 이미 죽은 자로 간주해 버려요. 어디서? 모리아 산에서 자기 아들을 죽였잖아요. 그러면 이삭 현실은 누가 만드는가? 아브라함이 기대하지 않는 아브라함을 이미 죽은 자로 만들어 놓고 아브라함이 생각한 이삭은 아브라함이 죽을 때 같이 아브라함이 제사를 바친다는 것은 아브라함이 죄란 뜻 이예요. 죄, 죄인이 생각하는 기대하는 이삭이 아니고 죄인에게 제물로 들어간 그 제물에 의해서 여호와 이레죠. 준비된 제물에 의해서 새롭게 파악되는 이삭이 되는 겁니다. 이삭은 복은 누구한테 주려고 했죠? 본인은 누구한테 주려고 했죠? 에서입니까? 야곱입니까? 에서한테 몰방하려고 했죠. 몰방하려고 했는데 주께서는 어떻게 했습니까? 야곱이 거짓말해서 이삭이 주는 복이 야곱에게 오게 했죠. 그 과정 속에서 이삭은 뭘 경험해야 되느냐, 십자가를 경험해야 되는 거예요. “주여 나의 결정은 헛방입니다. 내가 고대한 메시야는 내가 만들어 낸, 조작된 마귀적인 메시야를 내가 그토록 기다렸군요.”이게 우상숭배잖아요. 예수라는 이름의 우상숭배, 삼위일체라는 이름의 우상숭배.

항상 성령을 받게 되면 항상 자기 부인이 돼야 돼요. “나는 죄인입니다. 죄인이기 때문에 내 구원에 대해서 집착을 보이는 것이 당연한데 주여, 내가 원한 식의 구원은 아니겠지요?“라고 기도를 해주셔야 돼요. 그러면 그 구원은 뭐냐, 나로 하여금 죄인인 것을 더욱 더 죄인으로 들추어내시면서 나를 의인 만드는 구원.

이것은 무슨 몫이냐 하면 성령의 몫입니다. 이건 사도바울도 마찬가지에요. 자기가 몸이 아파요. 자기는 분명히 이거는 사단의 가시라고 본 겁니다. 자, 1번, 바울이 참았다. 2번, 꾹 참았다. 3번, 완전히 참았다. 4번, 못 참았다. 몇 번입니까? 4번, 못 참았어요. 그것도 한번 만 참고 포기했다. 아닙니다. 무려 세 번이나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언제까지, 세 번, 네 번 계속 기도할 수밖에 없는데 언제 스톱이 되었어요? “내 은혜가 족하다”이 은혜가 무슨 은혜냐 하면 내가 못난데서 은혜가 생긴다는 걸 알 때. 내가 깨지고 좌절함으로써 주께서는 뭘 건져간다? 나를 통해서 주께서 주신 은혜를 나는 망하고 주께서는 건져가는 것에 대해서 내가 동의할 때 그 기도는 스톱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우겨쌈을 당해도 싸이지 않고“ 하는 겁니다. 나는 살았다 하나 죽은 자요. 내가 아무것도 가지지 않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이게 성령 받았을 때에 나타나죠.

이거는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차를 평소에 교회에 대고 아무 일 없었는데 딱 그 길에 대니까. 우리교회도 그런 분 있어요. 진짜 천하에 천사 같은 분이 계시는데 그분 이름은 안 밝히겠어요. 이름은 아담입니다. 천사 같은 분이 계신데 그분한테 과속이 나왔어요. 80인데 94로 나왔답니다. 보니까 차종도 같고 차번호도 자기 차번호고, 놀라운 사실은 이게 안강인데 안강은 대구에서 포항가는 중간에 안강이 있어요. 안강댐인데 안강 사거리인데 본인이 그날에 안강 간 적이 없어요. 본인 차는 본인의 빌라 주차장에 cctv 있는데 그 앞에 그대로 있었어요. 그런데 나왔던 과속이 나왔던 거예요. 그래서 그분이 말하기를 “이게 바로 곡성이다.” 이거는 이상한 일이고 알아보라 했고.

문제는 우리가 평소에 잘 댔는데 주차 딱지를 끊겼을 때 뭘 느낍니까? “아, 주신 자도 하나님이요.” 고 순간만큼은 “주신 자도 하나님이요. 가져가시는 분도 하나님이요.” 기껏 3만 원 끊겼다고 다 안 날라 가도“주여 나는 모든 것을 가진 자군요.”이런다니까요. 기껏 3만 원 가져갔는데 마치 다 가져 간 것처럼 화가 난 상태에서 “ 주여 다 가져가. 아무것도 없습니다. 주신 자도 하나님이요.” 이렇게 한다고요. 조금, 우리는 가시도 아니고 종기가 나서 고약 있으면 낫는 걸 가지고 “주여” 세 번씩 기도하고 엄살이 대단한 엄살이죠.

그런데 성경 말씀에 보게 되면 우리가 어느 것도 지킬 수 없어요. 뭐냐 하면 데살로니가 후서에 보면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고 했죠. ”방금 뭐 드셨어요?”그럼 그걸 왜 안 지키죠? 우리의 소망은 뭐냐, 놀면서도 먹을 수 있는 투자로 은행에 이자만 받아서. 우리는 연금에 희망을 겁니다. 놋 지팡이를 바라보는 게 아니고 연금을 바라보면서. 따박따박 나오는 연금 때문에.

다윗의 자손이라는 것은 현실을 새로 만드는 거예요. 그러니까 다윗의 + 자손입니다. 자, 다윗의 아들 이름이 뭡니까? 솔로몬, 르호보암, 이렇게 나오죠. 이것이 다윗의 자손이냐 하는 이야기에요. 그들은 그것을 다윗의 자손으로 믿었습니다. 믿었는데 보이죠. 보이는 것을 믿어서는 안 돼요. 그러면 다윗의 자손은 어디 있느냐? 없느냐? 보이는 것에 의해서 핍박을 받는 그 자리가 다윗의 자손과 연계돼 있는 자리에요. 다윗의 자손은 아니고 연계돼 있는 자리에요.

그들이 뭐냐 하면 바로 선지자입니다. 어떤 선지자냐? 핍박 받는 선지자에요. 그들의 공통점이 있어요. 하나님의 성신이 임했습니다. 그래서 신약에 있어서 성령 받았다 할 때는 반드시 어디를 가느냐? 구약의 성신을 경유해서 성령을 해석해줘야 돼요. 구약의 성신을 경유해서 그 다음에 성령 받은 예수님을 경유해서 십자가를 경유해서 그 다음에 성령이 와야 돼요. 그러면 이 성령 받은 그 모든 증거물은 구약의 고난 받는 선지자 삶의 반복입니다.

만약에 그렇게 해석을 안 하면 어떻게 되느냐, 해석을 안 하게 되면 어떤 오류가 발생되느냐 하면 오늘 본문 같은 오류가 발생돼요. 어떤 오류냐, 예수님이 하나의 다윗의 자손이 되고 이 백성들은 그냥 믿기만 하면 돼요. 이래서 구원이 안 되거든요. 믿기만 한다는 말은 뭐냐 하면 이게 지식이 돼요. “저 사람 저기 있네. 나는 당신을 메시아로 인정합니다.”이렇게 돼요.

문제는 이것이 자기가 이해하는 증거물로 눈에 보인다는 게 문제에요. 베드로에게 성령이 안 오면 구원이 됩니까? 안 됩니까? 구원이 안 되죠. 베드로가 믿잖아요? 그러나 뭐가 와야 돼요? 성령이 와야 돼요. 물론 베드로 같은 경우에, 예수님 제자 같은 경우에 성령을 예상하고 믿었지만 어쨌든 간에 인간인 우리가 “믿습니다.” 하는 것은 성령의 선물로서 믿어야 되지, 기존의 내가 믿는다는 것은 이거는 가짜죠. 이 “호산나”한 사람들이 예수님이 십자가 질 때 어떤 역할을 했습니까? 나와서 방패 막을 만들어서 “이분은 호산나”하면서 적극 나섰습니까? 아니면 죽이라 했는지 모르겠습니다마는 그냥 예수님 가실 때 아무도 거기에 울고 애석하다 뿐이지, 적극 나서서 남은 사람 이 세상에 아무도 없어요. “목자를 치니”그 다음에 뭐가 일어나야 돼요? 양들이 흩어져야 돼요. 흩어진 양들이어야 돼요. 그래야 스가랴13장에 “제 갈 길로 갔거늘”그 양들을 위해서 속죄 제물로 대신 질 때 주님만 우뚝 증거 되는 겁니다.

그래서 믿음이라는 것은 우리가 평소에 믿음이라는 것이 주님한테는 증인이 안 됩니다. 그 믿음에 우리가 실패해야 됩니다. 오죽했으면 겨자씨만한 믿음이라 했을까요? 이 말은 믿음이 없다는 이야깁니다. 제자들이 그렇게 쫓아다녀도 안 되는 이유를 귀신 들린 아버지가 이야기해요. “제자들은 안 됩니까?”믿음이 없거든요. 믿음이 없어 그런 거예요. 제자인데 왜 믿음이 없습니까? 아직 성령이 안 왔어요. 성령이 오게 되면 믿음이 있습니까? 아니 성령이 오게 되면 더욱 더 자신이 믿음으로 해내질 못해요. 왜 내가 하는 게 아니고 내 안에서 주님이 알아서 하기 때문에 내가 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기적이라 하는 것은 질적인 문제지, 양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병자를 몇 명이나 했느냐가 아니라 십자가 앞에서 니가 죄인이냐, 이것이 믿음이 내용이지. 양적으로 얼마나 많은 업적과 실적을 키우느냐, 이거는 전혀 믿음의 증거가 아닙니다. 기생 라합의 믿음의 증거는 뭐였습니까? 거짓말하는 거죠. 야곱의 믿음의 증거는 뭐에요? 거짓말하는 거예요. 그래서 윤리 도덕으로 나서는 사람은 이거는 믿는 자가 아니에요. 그것은 자기를 커버하는 거예요.

자, 그러면 다시 오늘 본문 마태복음 들어가 봅시다. 이제부터 약간 어렵습니다. 마태복음 21장 예수님께서 “호산나” 할 때 “얘들아 이러지 마. 너희들이 생각하는 그런 호산나 아니야.” 왜 이렇게 안 하느냐 말이죠. 아까 이야기한 현실은 누가 만든다? 있는 현실에 맞춰 들어가는 게 아니고 현실을 누가 만든다? 예수님이 현실을 만들어 나가죠. 그러면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할 때 이 현실은 예수님 입장에서 부합되는 거예요? 부합되지 않는 거예요? 부합되는 거예요. 만약에 그들이 호산나 하지 않으면 이 돌들이 주님보고 호산나 해야 될 거예요.

그래서 저는 그런 생각을 해봐요. 이들이 안 했으면 돌들이 짹짹짹짹 입을 벌려서 호산나, 어떻게 돌이 어디 쪽이 입 쪽이고 어디 쪽이 항문 쪽인지 이게 자꾸 궁금한 거예요. 문자적 해석이지만.

여기서 두 번째 강의 제목을 하겠습니다. 배우, 이게 뭔 뜻이냐 하면 이렇게 설명하면 돼요. 교도 수나 수용 수, 이것이 굉장히 심리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고통스러운 이유가 뭐냐 하면 전부 다 그 공간이 노출을 위한 공간 이예요. 교도소 같은 경우. 그런데 개인 집은 교도소나 수용소보다 덜 고통스러워요. 왜냐 하면 내 방이 있어요. 내 방을 문 잠가버리면 노출되지 않고 자기만의 공간을 꾸밀 수 있죠. 그러면 나만의 공간에서 사람들은 뭘 하느냐 하면 자기를 꾸미는 연출과 연극이 가능한 공간입니다. 꾸미고 밖으로 나와요. 특히 여자들을 남자들이 이해 못하는 점은 여자들은 시장만 가고 애들 학교 데려다 줘도 바쁘면 입술 립스틱만 이렇게 바르고도 나와요. 그걸 왜 바르느냐 말이죠. 남자한테 잘 보이기 위함이 아니고 여자를 의식해서 바르는 거예요. 니가 이쁘냐, 내가 이쁘냐, 한번 해볼까.

어떤 드라마에 이런 대사가 있어요. “나는 모든 여자가 나 빼놓고 다 죽었으면 좋겠어.“ 또 오해영인가 하는 데 나와요. 이게 뭐냐 하면 나의 이쁨은 비교되는 상대가 있음으로써 이게 반대급부로 충족되는 거거든요. 제가 어느 설교 때 그런 예를 들었잖아요. 촌에서 고만고만한 인물끼리는 그렇게 화장을 짙게 할 필요가 없어요. 촌스러워도 그 자체가 촌인데 그 자체가 그들의 현실이기 때문에 촌스럽다는 말이 성립이 안 되는데, 그러다가 자기는 그냥 무심코 하는데 서울의 압구정동에 이사를 갔다. 오지랖 넓은 사는 사모님들은 ”그 너무 촌스러운데 화장을 바꿔보죠.“ 이런 식으로 간섭하죠. 그럴 때 울컥하고 울화가 치밀죠. 그쪽 현실 따라가게 돼 있어요.

배우공간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바로 나를 연출하기 위해서 따로 마련된 공간을 말합니다. 이 말은 나는 남들 앞에 나갈 때 남들이 원하는 모습으로 나가야 나는 내 존재의 의미가 비로소 획득이 되는 거예요. “보기에 어때? 어때? 이 원피스 어때? 새로 산 건데 어때?”그럴 때 “아이구, 괜찮아.” 마구마구 찍어서 sns 올리고 할 때 셀카 이리 찍고 저리 찍고 해서 각도 맞춰서 할 때 그게 뭐냐 하면 자기가 자기를 연출하는 공간 이예요. 그런데 이게 배우공간이거든요. 자기 연출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다 배우공간을 따로 만들어요. 그러면 배우공간을 만든다는 말은 그들이 원했던 거 말고 아버지가 원하는 새로운 천국을 따로 만들어요. 이 사람들은 뭐냐, 천국은 이렇게 있고 예수 믿으면 천국 간다고 하잖아요. 그 천국은 없어요. 천국은 현실 만들기와 작업과 더불어서 예수님에 의해서 새롭게 뻗어 나와요. 예수님으로부터 새롭게 나와요.

천국은 율법이 완성되는 게 천국입니다. 율법이 완성되게 되면 의가 되고 그 의의 나라가 천국 이예요. 그런데 사람들은 율법을 지키지도 못하면서 천구을 내다보고 있으니까 이게 참 건방지기 짝이 없어요.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가 말씀을 내뱉으면서 말씀만 내뱉는 게 아니고 내뱉은 말씀대로 본인이 나서서 그걸 현실로 바꿔버리면 그게 천국이 되는 겁니다.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니가 이혼증서 써준다고 그것이 간음죄 아닌 것이 아니다.“ 이렇게 이야기할 때 기존의 천국 가려고 준비된 사람은 전부 다 가짜로 들통났죠. 그러면 오른손이 하는 걸 왼손이 모르게 한 자만 뭐가 된다? 의가 되고 이 사람은 어디 간다? 천국 가요. 그러면 오른손이 하는 걸 왼손이 모르게 하는 거 어떻게 합니까? 그럼 두뇌 수술할까요?

우리 인간의 방법은 그거에요. 중간에 수술해 버리면 오른손하고 왼손하고 완전히 정신적으로 장애자로 만들어야 돼요. 오른손이 뭘 해도 왼손이 모르게 된다. 요게 우리 방법인데, 주님은 그 방법이 아니에요. 주님의 방법은 뭐냐 하면 요거에요. 십자가 지게 되면 그거 다 이룬 거예요. 참 쉽죠? 십자가 안에서 모든 산상설교는 다 이룬 게 돼요. 왜 그러느냐, 십자가 안에서 바꿔치기가 성립됩니다. 어린양과 자기 집안의 맏이와 십자가 피 발렸던 어린양과 내 맏이하고 유월절 날 바꿔치기가 성립되듯이, 세상 죄를 지고 갔다는 말은 바꿔치기를 하러 오신 거예요. 바꿔치기 하면서 예수님은 세상 지를 지고 가는 분으로 바꿔치기 하는 거예요.

그러면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하는 말은 어디서 나왔습니까? 그 바꿔치기 하시는 예수님 입에서 처음으로 나왔잖아요. 최초로 나오신 분이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그 현실을 그분의 십자가로서 그걸 완성을 해버린다 말이죠. 완성한 그 세계에 십자가 가지고 들어가 보면 이미 거기에 산상설교는 완성된 채로 우리가 맘껏 누리기만 하면 되는 겁니다.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 갈 것이 아니요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천국 간다“고 마태복음 산상설교 끝에 나와 있잖아요. 그 뜻대로 하는 자가 누구겠습니까? 예수님 안에 있는 사람들이 이미 뜻대로 된 사람 이예요. 왜냐 그 뜻은 우리 쪽에서 시작한 뜻이 아니고 주님 쪽에서 아버지하고 이미 이야기가 끝난 게 돼요.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의를 주러 의를 소유하러 오신 분이 아니에요. 우리가 의가 되게 하신 분이예요. 우리가 있고 의를 가져라가 아니라 우리자신이 의가 되는 현실의 일부를 만들기 위해서 새로운 피조물로서 의인되기 위해서 주께서 이렇게 일하신 거예요. 그걸 우리가 소급해서 우리가 그걸 수용해버린 겁니다. “내가 나 된 것은 주님께서 그렇게 하신 거 맞잖아, 내가 다 아는데”이렇게 돼 버리면 그 사람은 의인의 관계가 돼 버려요. 사도바울의 모든 말씀이나 이 모든 말씀이 다 그거와 관련돼 있습니다.

호산나라고 부르면서 호산나 이름은 뭐냐, 지금 구원하소서. 라고 하잖아요. 이 말씀을 그들이 이야기할 때 이 말씀을 예수님이 자기 것으로 가져가 버립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실제로 성령이 와 버리면 호산나가 이미 현재화되고 말았어요. 이미 다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면 호산나를 불러야 되지 않습니까? 아니 그러지 마세요. 호산나 부르지 마시고 우리가 호산나가 돼요. 우리가. 우리가 구원의 일부가 된다니까요. 주님의 작품이 돼요. 주님은 조각가고 우리는 주님이 다듬어 놓은 작품이 돼요. 생각하는 사람 이런 거. 우리가 하나의 로댕의 작품이 되듯이 우리가 작품이 된다니까요. 조영남이가 그린 건 송기창씨가 이렇게 꼼꼼하게 화투를 대신 그렸지만 우리는 모든 그림은 주께서 친히 만드신 거예요.

자, 그 다음에 봅시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다윗의 자손이라 하는 것은 다윗에게 약속한 것을 실제로 현실로 이루어내신 분. 그러면 그 과정 속에서 다윗의 자손이라고 여겼던 모든 그 현실은 전부 다 죄로, 가짜로 들통내시는 기능을 예수님은 해내십니다. 다윗의 자손이라고 한 중에서 가장 가까운 이야기가 다니엘 7장에 보면 나오죠. 다니엘 7장에 보면 다윗의 자손을 두 자로 이야기했습니다. 인자! 인자가 아버지 우편에 계시다가 지상으로 내려온다는 겁니다. 그러면 유대인들은 문자적으로, 그 다음은 문자적이 아니고 영적으로 그들은 해석하기를 구름 타고 오시기만 기다리면 되는 거죠.

그래서 바리새인이 예수님보고 뭐라 합니까? “니 구름 타고 오냐? 니가 메시야인 걸 증거를 대봐라.” 증거 대란 말은 예수님에게서 증거가 나오면 그들이 알고 있는 구약 성경과 맞는지 지금 대조해보려는 거예요. 이 말은 그들이 구약 성경을 나름대로의 지금 하자 없이 제대로 해석하고 있다고 자부심을 갖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유대인 보고 “모세 자꾸 거론하지 마라.” 모세가 살아있었으면 너희들이 모세를 위반한 저주 받을 자라고 요한복음에서 그렇게 지적하거든요. 오늘날 교회도 마찬가지에요. 성경 해석에서 뭐를 빼느냐? 십자가로 모아져야 되는데 십자가를 빼버려요. 십자가가 필요치 않다니까요. 그들은 이렇게 이야기해요. “우리가 십자가 믿고 십자가 믿으면 용서 받고 십자가 믿고 난 뒤에는 우리는 이제는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말씀대로 지키면 하나님의 형상대로 변해서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이렇게 이야기해요.

그러면 여기서 보세요. 전부 잘못됐어요. 십자가를 어떻게 한다? 믿을 때 자기 현실은 바뀝니까? 안 바뀝니까? 전혀 안 바뀌죠. 기존에 있는 자기가 생각하는 현실 속에 그냥 십자가 하나 덜렁 들어온 것뿐이죠. 이미 내가 알고 있는 것 +(플러스) 알파, 내가 이만큼 알고 있는데 거기에다 십자가 하나 더 추가해서 믿게 되면 구원받는다는 거예요. 그러나 그건 아니에요. 예수님의 십자가는 기존에 있는 모든 것이 가짜로 드러나요. 가짜로. 그러니까 제목을 배우 공간 하지 말고 가짜라 합시다. 가짜다. 노골적으로 해버려요. 예수님은 숨어있는 공간이 따로 있어요. 하지만 그걸 사람들은 못 알아보는 겁니다.

그 다음에 12절에 보니까 성전에 가서 매매를 하잖아요. 이게 다윗의 자손으로서의 마땅히 할 도리입니다. 달리 할 수 없어요.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렇게 생각하죠. 우리는 환영을 했으니까 이제 성전이 있으니까 성전에 나와서 예수님께서 예복 입고 “아버지” 이렇게 하든지 예물을 드릴 줄 알았죠. 그런데 “어디서” 하고 채찍을 만들어서 폭력을 행사할 줄이야. 그런 예수님은 “성내지 마라” 하고 본인은 성 다 내놓고 “칼로 싸우는 자는 칼로 망한다“ 해놓고 이건 칼은 아니지만 폭력으로 엎어놓고. 그렇게 예수님 말씀을 윤리 도덕으로 지켜서 내가 의가 되려는 이 모든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에 원수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만을 증거 하고 남기기 위해서 우리 인생에 개입하셔서 우리를 이 모양 이 꼴로 이렇게 만드신 거예요. 지금까지 예수님만 귀하고. 내 인생이라고 내 앞에 나를 붙이지 마. 내 인생이 아니고 예수님 인생인데 자꾸 우리는 오해하기를 내 인생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내 인생 따로 있으면 다른 형제들하고 사랑이 될 수 없어요. 니가 잘났나, 내가 잘났나. 이렇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다 같은 죄인이기 때문에 주님만 부러워해야지, 딴 거 부러워할 필요가 없거든요. 주님만 부러워한다는 그것이 바로 이웃사랑이라는 겁니다. “아유, 당신은 당신을 저렇게 만들었군요. 아이구, 주님께 감사해야 됩니다.” 이것은 꼭 부자한테만 하지 말고 가난한 사람도 할 수 있어야 되는데 부자는 이걸 마음대로 해요. “내가 돈 많다고 부러워하나?”“돈 하고는 관계없고 돈 있는 것이 바로 저주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시니 그것 때문에 이야기합니다.” 항상 마음을 낮추고 이렇게 해야 돼요.

그래서 성전을 이렇게 강도의 굴혈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면 그 현장에 우리가 예수님 제자로 있다고 합시다. 뭐라고 묻겠습니까? “예수님이여, 참된 성전은 어떻게 절차를 진행시키면 참된 예배가 되고 참된 진리가 되겠습니까?” 이걸 묻고 싶어서 하겠죠. 왜냐 하면 이걸 치워버렸으니까. 성전 있고, 이건 아니다. 이게 아니면 그럼 옳은 게 뭐냐? 아닌 것 자리, 빈자리에 옳은 것을 채워야 되지 않습니까? 왜, 그래야 우리가 시키는 대로 예수님께 행하고 싶어 하는 거예요. 그러면 안 된다는 거예요. 주께서 치웠다는 말은 앞으로 바른 제사라는 게 아예 없는 거예요.

바른 제사, 바른 예배, 바른 기도는 없습니다. 없어요. 기도하면서 십자가 바라보면서 죄인인 걸 알면 그게 바른 기도에요. 바른 기도라 하는 것은 항상 예수님의 주도적인 개입과 손길을 염두에 두고 기도를 생각해야 그게 바른 기도가 돼요. 단독적으로 어떻게 행합시다. 하면 안 되고 주께서 저를 어떻게 이끄십니까? 하고 주도권을 누구한테 맡겨야 돼요? 주님의 개입을 인정해 주면 그것이 바른 성도의 삶입니다. 늘 우리는 회개만 하면 되죠. 쭉 회개만 하는 게 아니고 그냥 돌아보면 다 회개가 되게 돼 있어요. 인생에 개입하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지금 향씨 머리가 스트레이트로 쫙 돼 있잖아요. 그렇게 개입하신 거예요. 강아지를 품에 안고 있잖아요. 강아지를 이렇게 하신 거예요. 모든 일에 범사에 감사하는 거예요. 이게 주님의 개입의 여파라는 거예요. 내가 예배드린다는 것은 따로 순서, 사도신경부터 하고 교독문 하고 뭐 어떻게 하고 이걸 예배라 하면 안 돼요. 이걸 예배라 하면 안 된다 하니까 어떤 분은 말하기를 우리교회, 당신 교회는 사도신경을 왜 하고 교독문 하고 순서대로 하고 10시도 아니고 11시에 예배드리고 이건 왜 하느냐? 그럼 제가 “그럼 그거 안 하면 예배입니까?”그걸 아예 없애버리면. 그걸 한다는 것은 여기에 구애받지 말라고 하는 거예요. 구애받지 말라고.

벌거벗지 옷은 왜 입는데? 벌거벗으면 영광입니까? 벌거벗어도 영광이 안 돼요. 뭘 입어도 괜찮아요. 괜찮기 때문에 우리는 마음대로 이걸 하는 거예요. 당신은 뭘 해도 죄다. 뭘 해도 죄인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뭐든지 하는 거예요. 그게 뭐 어려워요?

조금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여기에 “소경과 저는 자들과 성전에서 예수께 나아오매 고쳐주시니” 이게 바로 고쳐준다는 말은 그들이 올 때 어떻게 왔습니까? 그냥 왔어요. 그냥. 성전의 예배는 주님이 새롭게 시작해요. 어떻게? 아무것도 가진 게 없고 내세울 게 없는 저주받았다고 소문 난 그들. 저주받았으니까 소경 된 게 아니에요? 저주받았다고 여기는 그런 사람들에게 무상으로 은혜를 제공하면서 부숴버린 성전의 예배를 대신하고 있는 겁니다. 대체하는 것. 모든 것이 가짜인 것을 까발리면서 주께서 그 가짜인 것을 까발리는 작업 하나가 진짜가 내게 임했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호산나 찬양할 때 범사에 모든 것이 호산나가 되어 있음을 저희들이 미처 몰랐습니다. 이 현실이 내가 만든 현실이라고 우겼는데 이제부터는 주께서 만들어가는 현실인 것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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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222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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