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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44강-창 8장 6-12절(까마귀와 비둘기)160622-이 근호 목사자유게시판창세기

44강-창 8장 6-12절(까마귀와 비둘기)160622-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8장 6-12절입니다. 구약성경 9페이지입니다.

창 8:6-12

“사십일을 지나서 노아가 그 방주에 지은 창을 열고 까마귀를 내어 놓으매 까마귀가 물이 땅에서 마르기까지 날아 왕래하였더라 그가 또 비둘기를 내어 놓아 지면에 물이 감한 여부를 알고자 하매 온 지면에 물이 있으므로 비둘기가 접족할 곳을 찾지 못하고 방주로 돌아와 그에게로 오는지라 그가 손을 내밀어 방주 속 자기에게로 받아들이고 또 칠일을 기다려 다시 비둘기를 방주에서 내어놓으매 저녁때에 비둘기가 그에게로 돌아왔는데 그 입에 감람 새 잎사귀가 있는지라 이에 노아가 땅에 물이 감한 줄 알았으며 또 칠일을 기다려 비둘기를 내어 놓으매 다시는 그에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더라.”

노아의 이런 행위가 어디서부터 출발했느냐 하면, 방주에서부터 출발을 하지요. 그러면 방주에서부터 어디를 향하느냐? 조금 전까지도 물에 잠겼던, 심판이 일어났던 그 장소를 향하여 방주가 까마귀도 보내고, 비둘기도 보내고, 그렇게 하는 겁니다. 이것은, 노아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심판 속에 있다는 것을 지금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계란의 노른자는 항상 흰자 안에 놓여 있지요. 흰자가 심판이라면 노른자가 방주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방주라 하는 것이 뭐냐? 심판의 현상을 대변해주고 있는 물체, 공간, 그것이 바로 방주입니다. 종말을 표현하지요.

그렇다면 지금도 이런 방주 같은 기능을 하는 공간이 있느냐를 따져봐야 되거든요. 지금도 방주 같은 공간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지금도 심판하고 마지막 때 종말 속에 있다는 것이 확인 돼야 돼요. 세상은 저주와 심판으로 둘러쳐 있다는 것이 확인되고 난 다음에, 그렇다면 방주의 기능을 하는 곳은 어디냐, 순서가 그렇게 돼야 되거든요. 그런데 오늘날 현대를 보게 되면 세상의 마지막이라는 것을 찾을 증거들을 사람들이 갖고 있지를 않습니다.

성경에서는 물론 마지막 때라 하지요. 히브리서 1장에 보면, 마지막 때 아들을 통해서 이야기하셨다고 해서 마지막 때를 성경은 분명히 단정 짓고 있지만, 오늘날 현대인들이 살아가면서, 오늘날이 마지막 때라는 느낌을 전혀 받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우리가 현실을 분석하고 현실을 파악하는 가운데서 ‘그렇지. 그러니까 우리는 지금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것이 마땅해.’라는 증거를 찾아내지 못하는 식으로 현실관을 갖고 있다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엄마! 나 취직했어. 기뻐해!” 할 때 엄마가 “얘야! 이 지옥 같은 세상에서 심판받고 있는데 취직이 무슨 의미가 있어?” 이렇게 이야기하는 부모는 없는 거예요. 왜냐하면 우리의 현실관 구성, 종말, 마지막 결론부분이, “주여, 이 땅을 지옥같이 살게 하고 힘들게 하고 고통을 주고 괴롭게 하는 조치가 정말 합당합니다.” 이런 조로, “내 인생을 이렇게 꼴아 박게 만들고, 힘들게 만들고, 잔혹하게 하고, 허겁지겁하게 만드는 이런 하나님의 조치는 참으로 선합니다.”라는 결론을 내릴 수 없는 식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어요.

그렇다면 사람들은 그 마지막을 어디서 찾는가? TV드라마에서 찾지요. 이것은 대타입니다. TV드라마에서 ‘아, 이젠 마지막이다. 절망이고 실패다.’ 하는데 조들호변호사가 나타나서 다 해결하고, 아메리칸 영웅들, 어벤져스가 등장할 때 어떤 쾌감이 느껴지죠. 그것은 영화고 드라마인겁니다. 영화드라마에서 마지막심판, 징벌, 이런 것을 자꾸 생각한다는 것은 현실은 그런 드라마와 달리 어떤 희망이 있을 것이라고 스스로 꾸미고 싶은 거예요. 힘들지만 희망이 있다고, 그것으로 현실을 굳히고 싶은 겁니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이 마땅히 파멸되어야 한다는 인식을 본인들은 절대로 끄집어낼 수가 없기 때문에 그래요. 드라마이야기는 남의 이야기잖아요. 그러나 현실은 자기 이야기거든요. 여러분이 진리, 진리, 복음, 복음 찾는다 하지만 그 복음을 찾아도 그게 엉터리고 진리를 찾아도 엉터리인 이유가 결국에는 나 좋은 쪽, 나 잘되는 쪽으로 해명하고 해석하기 마련이에요. 이런 반칙이 어디 있어요? 그것은 잘못된 겁니다.

어떤 경기에서 응원할 팀을 정했다. 응원할 팀을 정했다는 그 자체가 게임자체를 왜곡되게 만들어요. 예를 들어 농구경기 할 때 공을 주고받고 하는 모든 패스, 슛의 의미가 ‘결국 마지막 승리는 내가 응원하는 팀으로 돌아와야 돼.’라는 그것을 증명하기 위한 순서에 불과하다고, 생각들을 그렇게 하고 싶어요. 어쨌든지 간에 결국은 내 쪽이 잘되게 되어있어, 라는 생각으로 출발을 일방적으로 하고 있는 겁니다.

제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인간에게는 종말이 없다, 종말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마지막이라는 것을 인간은 생각할 수 없는 거예요. 그러면 “이 세상은 나와 같이 다 파멸되어야 되고 멸망되어야 해.”라는 것이 안 나온다면 우리의 현실관은 사기입니다. 이것은 거짓말이에요. 자기가 자기를 거짓말로 설득하면서 또 하루 용기를 주면서 살아가고 있어요. 거짓말로 설득하면서 그것을 용기로 장착한 채 보람찬 하루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사기 당했다, 하지 마세요. 본인도 사기꾼입니다. 본인자체가 이미 사기꾼이에요. 더 센 사기꾼에게 걸렸을 뿐입니다. 사기를 당한 사람은 이제부터 남을 사기 칠 수 있는 노하우가 하나 증강된 것뿐이에요. 전에는 어설프게 쳤는데 교묘하게 사기를 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을 뿐입니다. 왜? 사기를 체험했기 때문에. “너도 한 번 당해봐라.” 그렇게 되는 겁니다. 꼭 사기 당한 사람이 사기를 치거든요. 못 먹는 감 찔러나 본다고.

그런데 노아는 이미 심판을 기정사실화합니다. 노아가 있는 현실은 방주안의 현실이에요. 갇혀 있으니까. 그런데 노아는 정말 우리와 달리 이게 실재가 아니라고 믿었습니다. 왜냐하면 노아는 갇혀 있기 때문에, 바깥이 어떻게 돌아가고 주께서 어떻게 하시는지 손을 쓸 수가 없는 입장인 것을 본인이 인정을 해요. ‘하나님이여! 나의 팔자, 나의 운명, 나의 희망, 이런 것은 기껏 해봐야 내 희망사항일 뿐이지만, 그런 희망을 갖는다고 해서 주께서 도움을 주는 것은 아니고 우리는 그냥 바깥 상황에 대해서 종속될 뿐입니다.’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던 거예요.

바깥의 심판의 수위조절에 따라서 방주에 일어난 일은 거기의 하나의 징후요 흔적일 뿐입니다. 쉽게 말해서 우리는 흔적이에요. 지난 월요일 대구강의에서 한 이야기입니다. 이삭의 이름이 이삭인데 그것은 아브라함의 불신앙이 덧붙여져 이삭입니다. 제가 질문하기를, 그렇다면 이삭이라는 이름의 불신앙이 덧붙여진 어리석은 이름이니 그것을 떼어내면 이삭의 이름이 뭡니까, 라고 물었더니 앞에 앉아계신 권사님이 놀라운 답변을 하셨어요. “이름이 없습니다.”

바로 성도는 이름이 없어요. 이름이 없다는 말은 성도의 존재가치, 존재의미는 외부에서 줄 경우에만 허락이 되고 본인의 인생, 본인의 기대, 희망은 허락되지를 않습니다. 기댈 이름이 없기에. 이름이 없으면 없는 존재에요. 성도는 자체적으로는 없는 존재고 성도가 있다는 것은 나로 인하여, 성도 본인에 의하여, 자아에 의하여, 이것은 에고인데, 그 자아에 의해서 본인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 말고 다른 쪽의 이유 때문에 존재하는 거예요.

남들은 나를 이름으로 불러주지요. 하지만 그것은 그들의 어리석음, 다시 말해서 사기꾼들이 나를 이용해먹으려고 붙인 이름들이에요. ‘근호’라는 이름의 뜻이 ‘뿌리가 깊고 넓어라.’ 하는 뜻이거든요. 그것은 우리 부모님이 지은 거예요. 일방적입니다. 뿌리가 깊다고요? 맨 날 흔들흔들 다니는데 무슨 뿌리가 깊어요? 이름 없어요. 이름은 임시방편으로 아버지가 지어줬지만 진짜 숨겨진 이름은 주님만 알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이름으로 구원받아요.

그래서 내 이름을 주장하지 않는다는 말은, “나는 본래 내 이름에 대한 가치를 내가 나에서 포기했습니다.” 하는 뜻이에요. 그게 믿음입니다. “내가 나를 위해서 하는 모든 것들은 주님이 허락하지 않음을 제가 인정합니다.” 이게 믿음이에요. “나 잘되기 위해서 천당 가고, 나 잘되기 위해서 구원받고, 이것은 애초부터 사기에 불과하다는 것을 제가 인정합니다.” 이게 믿음이라는 말이지요.

오늘 본문에서 노아의 행동은 노아의 자발적인 행동이 아닙니다. 바깥에서 일어나는 것과 동반이 되고 병행해서 일어나는 거예요. 바깥의 심판의 물이 약간 수위가 낮아지면 거기에 반응을 나타내는 식으로 까마귀를 보내고 비둘기는 세 번이나 보내요. 총 네 번을 보내는데 노아가 그렇게 바깥으로 내보내는 것은, 지금 하나님의 손길이 바깥에서 어떻게 조절하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다만 이 쪽 방주안의 일들은 그 바깥의 일들을 보여주는 징후고 징조에 불과한 거예요.

징조, 징후라는 말은 실재적이 아니라는, 자체적으로 실재를 구성할 수는 없다는 이야기에요. 상당히 어려운 이야기지만 이게 무슨 말인가? 요한계시록에 있어서 역사적으로 일치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요한계시록은 방주처럼 세상에 갇혀 있는 거기에 통용되는 언어고 개념이기 때문에 바깥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조치에 대한 흔적만 보여주는 거예요.

요한계시록을 자체적으로 역사적인 사실과 일치시키려고 한다면 그것은 방주 안에 있는 사람들이 자기역사인식에 문제가 없을 경우라면 할 수 있는데 이미 인간자체가 나 잘되고, 나 구원받으려고 하는 것, ‘요한계시록에 하늘에서 유황불이 떨어져도 나만 구원받으면 돼.’라는 자기의식으로 되돌아온 입장에서 일체적인 내용을 요한계시록에서 찾으려고 하니까 요한계시록 해석이 다 엉터리가 되는 거예요.

요한계시록 어디를 봐도 “그러니까 제가 구원받는 것 맞지요?” 이런 식으로 자기 챙기는 것부터 시작하니 해석이 될 리가 있습니까? 안되지요. 내가 지난 설교들에게 계속해서 방주 안에서 노아가 주인공이 아니고 정결한 짐승이 주인공이라고 했지요. 역사의 주인공은 십자가지신 예수님이지 구경하고 있는 사람들이나 옆에 있는 제자들이나 우리들이 아니에요. 세상 역사라 하는 것은, 오직 예수님만 아버지와 교류해서 이 세상 운명은 결정하는 겁니다.

우리는 그냥 겉절이에요. 김장 할 때 정식 김장 말고 바로 먹을 수 있게 담그는 겉절이. 바로 버무려서 삶은 고기하고 먹는 겉절이, 삼겹살 구워먹을 때 내놓는 겉절이, 그냥 아무것도 아니에요. 주요리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냥 반찬정도? 반찬만 돼도 얼마나 귀한 신분인지 모르지만. 반찬이라는 것은 본래 주요리가 따로 있는데 그 주 요리를 빛내기 위해서 반찬이 있는 거예요. 향신료로 뿌리는 후추정도, 소금정도.

방주는 바깥에서 일어나는 종말현상과 연결되어 있는 내용물입니다. 어렵게 할 것 없어요. 쉽게 이야기하면 이런 겁니다. 노아도 인간인 이상 희망을 갖게 되잖아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노아의 희망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은 희망이 아니라 새로움이에요. 지금 한국교회는 희망과 새로움을 구분 못하고 있어요. 하나님이 희망을 인정해주지 않습니다. 희망을 인정해주면 ‘그렇지! 내가 예상한 대로 하나님께서 일이 척척 되게 하는구먼.’ 이렇게 돼요.

기도할 때 다 희망 갖고 기도해요. 그러나 기도의 응답은 희망이 아니고 새로움이에요. “이럴 줄 몰랐습니다.” 이게 기도의 응답이에요. “세상에! 이런 경우가!” 이게 응답이에요. 기도 따로 있고 하나님의 응답이 따로 있다는 말이 맞는 말이지만 사실은 정확한 말은 아니에요. 이렇게 해야 돼요. 우리의 기도자체가 주께서 준비된 응답 안에 과정으로 포함되어 있다, 이것이 정답입니다. ‘우리가 기도해도 응답이 안 될 건데?’ 이게 정답이 아니고 응답이 되든지 안 되든지 우리가 신경 뚝, 신경 쓰지 말아야 할 이유는 그 엉터리 기도든 뭐든 간에 그 기도자체가 주께서 준비한 결과를 이끌어내는 과정으로 이미 편입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쉬지 말고, 그것도 무시로 기도하라고 했어요. 무시로, 시도 때도 없이 기도하라는 겁니다. 준비된 응답이 우리의 요구대로가 아니라 낯설게 준비된 새로움으로 우리에게 주어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희망과 새로움의 차이점이 뭐냐 하면, 희망을 갖게 되면, 미리 희망을 갖고 예상했기에 우리는 개선되고 수정할 필요가 없어요. 그러나 새로움이 주어지게 되면, ‘아마 이것이 하나님의 뜻일 거야.’라고 여겼던 내 생각이 수정되어야 되는 겁니다.

수정되어야 할 이유가, 우리의 희망과 소망이 결국 쪼개보면 그 안에 뭐가 있는가 하면, 나 좋은 대로, 나의 기쁨을 위해서, 내가 잘되는 쪽으로, 그것이 꼭 들어있어요. 그것은 소망에서는 바뀌지 않지만 새로움이 주어지면 그것이 다 바뀌게 되어 있어요. “주여, 잘못했습니다. 제가 엉터리희망을 품은 것을 용서하옵소서.” 이렇게 바뀌게 되는 거예요. 사람이 그렇게 달라 지게 되는 겁니다. 우리는 실체가 아니고, 본체가 아니고 계시의 징후기 때문에. 바깥의 수위변경에 따라서 우리도 같이 달라져야 돼요. 그래야 우리가 예수님의 증인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새로움이라는 것은 어떻게 주어집니까? 하나님이 공식이 있는데 새로움이라는 것은 심판을 먼저 덮쳐놓고 그 심판의 폭을 하나님이 열어주는 공간만큼만 새로움이 보이게 되어 있어요. 심판은 먼저 덮치는데 심판 받는 입장에서 심판을 강제로 열어 제치지를 못해요. 우리는 완전히 심판받아야 돼요. 받아야 되는데 심판이 조금씩 열리게 됩니다. 열리는 그것을 통해서 심판 이후의 세계를 우리가 맛보게 되는 혜택을 입지요. 심판 이후의 세계를.

먹구름이 먼저 덮이고 난 뒤에 먹구름이 조금씩 열리는데 그것은 우리소관이 아니고 주님께서 하실 거예요. 조금씩 열리면서 새 하늘과 새 땅을 맛보게 되는 겁니다. 심판에 속한 자가 심판 이후를 그냥 내다보면 그것은 우리의 희망이 되지 새로움이 안돼요. 주께서 열어주는 그 범위에서만 새 하늘과 새 땅을 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지 않는가? 여기서 중요한 거예요. 노아가 까마귀와 비둘기를 내놓는데 까마귀와 비둘기는 노아와 같이 방주 안에 들어 있는 내용물입니다. 방주 안에 들어 있는 내용물이라는 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심판현상, 종말현상을 보이기 위한 내용물이 되는 거예요. 일종의 창자, 내장입니다. 그 내장을 노아가 끄집어내는 겁니다. 그걸 바깥으로 끄집어내면서, 종말 이후의 세계와 그 바깥으로 끄집어내는 이 비둘기와 까마귀는 뭐가 되는가 하면, 전령사가 돼요.

요단강에서 성령이 임할 때 비둘기같이 임한 것을 감안해 보세요. 심판이후에, 종말 이후에 준비된 새 세상, 그 새 세상과, 심판 안에 놓여 있는, 방주의 증거물로 같이 갇혀 있는 우리가 사는 이 삶의 공간과 연결되어 있는 거예요. 내장으로 연결되어 있든지 하여간에 그 노선이 연결되어 있어요. 연결되어 있다는 말은 노아가 주도권을 갖고 있지 않고 노아가 내어보낸 그 비둘기가 물고 오는, 또는 그 비둘기의 행태에 노아는 완전히 종속된 겁니다.

이것은, 심판 이후의 새 하늘과, 심판수위를 조절하는 하나님과 방주, 그 안에 갇혀 있는 인간 사이는 완전히 단절된 것이 아니고 방주 안에 있는 내용물을 가지고 이미 연결고리가 형성되어 있다고 생각하시면 되는 겁니다. 이걸 아주 알기 쉽게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제모파스 붙였다. 다리에 제모파스 붙였다가 확, 뜯어내면 그 붙은 자리의 털은 다 떼어집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이 보입니다. 아프지요.

심판이라는 파스를 붙이지 아니하면, 십자가에 동참하지 아니하면,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나이까.” 우리는 천국 갈 입장이 안 되고 심판받는 것이 당연하다는 그 심판의 제모파스가 덮치지 아니하면 새 하늘과 새 땅도 접촉할 수 있는 기회가 없는 겁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희생이 우리에게 덮침으로서, 제모파스가 덮침으로서 그 제모파스와 함께 죽고 함께 사는 자에게만 준비된 새하늘과 새 땅에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그 연결고리가 되는 것이 오늘 설교제목인 ‘까마귀와 비둘기’에요. 그렇다면 방주에는 많은 짐승들이 있고 새들이 있는데 까마귀와 비둘기가 하는 기능이 뭐냐? 그 기능과 노아는 어떤 연관성이 있는가? 까마귀를 보냈더니 까마귀는 자꾸 돌아와요. 비둘기도 처음에 나갔다가 돌아오지만 까마귀는 돌아오지요. 까마귀가 돌아온다는 말은, 새 하늘과 새 땅이 아직까지 열리지 않았다는 징후로서 노아가 판정을 하는 겁니다.

이걸 좀 설명해야 되는데, 지금 방주는 심판에 둘러쳐 있습니다. 노른자가 흰자에 완벽하게 둘러쳐 있듯이. 그러면 이걸 뚫어야 되는데 뚫을 수가 없어요. 심판으로 완벽하게 갇혀 있으니까. 마가복음 1장 10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요단강에서 예수님이 세례 받는 대목입니다. “곧 물에서 올라 오실쌔 하늘이 갈라짐과” 하늘이 갈라진다. 원어로는 하늘이 찢어진다고 되어 있습니다. 하늘이 찢어지고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

하늘이 갈라졌다. 찢어졌다, 갈라졌다는 것이 같은 말인데 무슨 뜻이냐 하면, 닫혔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거예요. 닫혀 있다는 것은 인간들이 무슨 수를 써도 인간은 자기현실 관을 바꿀 수 있는 어떤 기회도 가질 수 없다. ‘이 세상은 아니야. 다른 세상을 상상해야 돼. 이 세상 말고 천국을 상상해야 돼.’ 백날 상상하고 백날 좋은 세상 꿈꿔 봐도 그것은 자기 자신의 희망의 이미지일 뿐이지 하늘이 실제로 찢어지지 않는 이상은 다 헛꿈입니다.

실제로 우리의 현실은 찢어져야 돼요. 그런데 우리의 현실이라 하는 것은 내가 나 잘되기 위한, 나를 위한 현실관을 말합니다. 쉽게 말해서 ‘나는 이대로 살면 행복해.’라는 그 현실 관안에 안주하려는 우리의 현실관이 사정없이 찢어져야 되고 거기에 구멍이 나야 돼요. 한번 뚫린 구멍은 다시 메워지지 않고 더 커지기 마련입니다. 흙에다 구멍을 파보세요. 점점 더 구멍이 커져요. 찢어져야 돼요. 찢어진다는 것은 인위적으로 할 수가 없고 주님의 심판과 구원, 일방적으로 심판에서 구원하려는 주님의 조치에 의하지 않으면 우리의 자기위주의 현실관은 찢어지지 않습니다.

아프지요. 그동안 그 현실관 믿고 그 안에서 우리는 비닐하우스처럼 포근하게 살았는데 그동안 나를 안심하게 만들고 그나마도 나를 행복하게 만들었던 그 현실관이 찢어져 보세요. 여러분이 마트에 가서 물건 샀는데 봉투 안에 날카로운 것이 들어 있어서 그걸 들고 오다가 다 찢어져 보세요. 감당불가입니다. 그처럼 그동안 내가 나를 모시고, 그동안 내 자랑 질을 하면서, 나는 이런 인생을 살아왔다고 했는데 그것이 어떤 못이나 바늘에 찔려서 찢겨보세요. 한번 찢기면 점점 더 찢어져요. 스타킹 올 가는 것처럼. 한번 사단나면 쫙 다 사단 나요.

구원받는 것 딴 것 아닙니다. 성도가 거듭나는 것 딴 거 아니에요. 내 인생 찢어진 거예요. 어떻게 내 힘으로 감당이 안 됩니다. 메울 수가 없어요. “나는 그럼 누굴 믿고 살라는 말인가?” 한탄과 좌절을 경험해야 돼요. 내가 믿던 게 찢어져야 돼요. 제가 어제 가락교회에서 어떤 분에게 이야기를 들었는데 자기시아버지장례를 치렀답니다. 물론 안 믿는 가정이에요. 제가 물었지요. “장례 치르면서 싸우지 않던가요?” 믿는 가정도 그렇지만 싸우기 마련이거든요. “왜요? 저는 장례식에서 악마를 보았습니다.”

<악마를 보았다> 이병헌이 주연한 영화가 있어요. 장례식 둘째 날 형이 소화기 들고 죽인다고 쫒아 다니고, 동생은 형에게 주먹질 하고, 음식상 난장판 되고, 장례식장 화환 다 쓰러지고, 형제간에 난리도 아니었답니다. 그 분이 하는 말이 “정말 나는 악마를 보았습니다.” 딱 그 한마디에요. 설명은 나주에 해줬지만 그 한마디, “악마를 보았습니다. 불신세계가 이럴 줄 몰랐습니다.” 이유는 단 한 가지, 돈!

형제고 뭐고 손자까지 다 엉망진창, 시어머니하고 손자와 싸우고, 아들과 싸우고, 서로가 서로의 적이 되어 싸운 거예요. 나중에 돈 300백만 원 쥐어주니 입 씻고 간 거예요. 형이라는 작자가. 자기 아버지 아플 때는 오지도 않더니 장례식장에 나타나서 돈 300만원 챙겨서 간 거예요. “나는 악마를 보았습니다.” 하는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내가 이전에 알던 현실, 그 비닐봉지가 찢어졌습니다.”

이렇게 찢어져야 돼요. 찢어져야 이 세상에 귀한 것은 없다는 것이 새롭게 인정돼요. 그런 사람의 마음을 징후라고 하고 심판의 징조라고 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의 증인되는 겁니다. 누가복음 9장 59절부터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참 섭섭한 이야기를 해요.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시고.” 하니까 그 사람이 또 우기기를, 그러면 가족하고 인사만 하게 허락해 달라고 했어요.

그러자 예수님께서 62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하나님나라는 심판 건너에 있는 나라, 주께서 친히 준비한 나라에요. 그러면 심판 속에 있는 사람은 노아와 같아야 돼요. 노아는 자기가 주인공 되면 안 됩니다. 자기현실 관, 자기비닐봉투가 당당하다고 우기면 안 됩니다. 찢어지고 자기 속에 있는 내용물을 바깥으로 보내야 돼요. 그리고 연락을 취해야 돼요.

그리고 자기는 주도권을 쥐면 안 됩니다. 까마귀가 날다가 자기에게 돌아오는 것은 아직 멀었어요. 절대로 나에게 돌아오면 안돼요.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로 가야되기에 나에게 좋은 쪽으로 오면 안돼요. 갈라디아서 1장 10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어요. 내가 사람을 좋게 하면 그리스도 종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가락교회 동영상설교에서 이런 이야기했습니다. 159강인가에서, 전도는 딴 게 아니다. 천국 안갈 사람 틀어버리는 것이 전도다. 어차피 천국에 못갈 사람, 그런 사람 모아서 뭐할 거냐는 말이지요.

다 틀어버려야 돼요. 가라, 좀 가라. 가라고 하는 방법은 뭐냐? 복음만 전하면 돼요. 복음이 천국의 기준이거든요. 십자가복음 전해서 못 알아듣겠다고 하면, 그게 전도 잘한 거예요. 그게 선교 잘한 거예요. 저절로 다 떨어져 나가요. 툴툴 다 털면 돼요. “더운데 좀 기어 붙지 말고 오지 마세요.” 이게 전도라니까요. 끌어 모으려고 하면 안 됩니다. 총동원주일 하면 안돼요. 괜한 밥값만 들어가요.

안 갈 사람은 아예 기어 붙지도 말라는 거지요. ‘당신도 구원받아요?’ 괜히 착각하게 만들잖아요. ‘혹시 저 사람도 천국?’ 이렇게 된다는 말이지요. 그런 착각을 하지 않으려면 복음만 전해버려야 돼요. “실례지만 자신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그 하나님의 가짜 비닐봉지가 찢어졌습니까?” 물어봐야 돼요. “나 좋으라고 하나님이 계시고, 나 좋으라고 삼위일체 하나님이 있다고 믿는 그 어설픈, 그 가짜 봉지가 사정없이 하나님에 의해서, 십자가에서 다 찢어졌습니까?” 그걸 물어봐야 돼요.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연락책이 있어야 됩니다. 그게 연락책인지 아닌지, 전령사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아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심판의 수위에 같이 동반해서 기능을 발휘하게 되면 그것이 바로 제대로 된 심판 속에 있는 우리가, 그리고 심판 이후에 있는 천국과 제대로 된 연결고리가 형성되었다, 장착되었다고 볼 수 있어요.

그러면 그 일은 누가 하시는가? 우리 현실은 사기꾼이고 우리는 나 좋다는 식으로만 하기 때문에 내가 선택한 사람은 절대로 그렇게 될 수가 없어요. 따라서 성령이 비둘기같이 우리 속에 오는 겁니다. 그 비둘기의 기능 속에서 마지막 세 번째 비둘기는 고맙게도 나에게로 돌아오지 않아요. 오늘 설교제목이 ‘까마귀와 비둘기’지만 사실 주제는 뭡니까? ‘나에게로 돌아오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는 이름이 없는 존재니까, 나는 없어져야 될 존재기 때문에.

내가 있는 자리는 내가 포기해야 될 덩어리, 이 몸을 내가 지금 살아가고 있습니다. 포기할 것을 가지고 우리는 이 땅에 태어났습니다. 그 태어난 날을 생일이라고 합니다. 포기하라고 주신 몸이에요. 그런데 이 세상이 대단히 수상해요. 심판 없다, 모든 것을 네 좋은 쪽으로 해석하면 된다, 라고 우리를 단단히 단결시키는 힘이 있는데 그게 악마의 힘입니다. 무슨 수로 벗어납니까? 서로서로 내가 나한테 가짜고 너도 가짜인데, 가짜에서 나오는 것은 가짜 현실밖에 없는데.

그것 가지고 단단하다고 우기지만, 십자가에서 너는 하나님께 버림받아야 해, 라고 해서 우리의 비닐봉지가 찢어져야 돼요. 하늘이 찢어지면서 성령께서 이 땅에 비둘기같이 오신 것처럼 성령이 비둘기같이 우리에게 오게 되면 우리는 그 비둘기를 따라가야 됩니다. 그분이 우리를 인도하는 그곳은 바로 심판 그 이후의 세계, 심판을 벗어난 세계, 내려다보면 먹구름이 보이고, 이제는 그 시커먼 장막구름 위에서 비행기가 날 때, 거기는 찬란한 햇빛이 비치잖아요.

아주 자유로운 비행, 밑에서 폭풍우가 치고 벼락이 쳐도 관계없는 그 세계, 이사야 30장에 나오는, 또 65장에 나오는 천국의 비유들, 어린아이와 사자와 함께 하는 에덴의 낙원 같은 그 세계, 그 세계는 심판을 반드시 통과해야 됩니다. 그 심판을 위해서 이 사기꾼 같은 나를 위한 안일한 현실관, 안일한 신앙관, 안일한 소망과 사랑, 그거 다 찢어버리는 그 새로움을 성령께서 매일같이 반복해서 허락해 주시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속에 새로움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안일한 소망과 믿음, 사랑마저 다 찢어버리게 하옵소서. 그리고 그 찢는 능력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구름 사이로 새 하늘과 새 땅, 그 푸른 하늘이 보이는 삶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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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222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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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