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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광주 강의(2016. 5. 27) 2강자유게시판-

광주 강의(2016. 5. 27) 27-2

개인 구원은 없습니다. 그러면 개인은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소속되어 있으면 권력이 작용합니다. 예수님이 바리새인을 상대할 때 개인을 상대한 것이 아니고 이 어두운 권력체에 대해서 하나님의 권력으로 주시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그것을 모르고 나에게 손해되지 않고 이익이 되는지를 생각하니까 비밀이 됩니다.

비밀이 공개되는 것은 비밀 자체를 위해서만 공개됩니다. 나 좋으라고 비밀을 알려주는 경우는 없어요. 비밀을 공개하는 순간 우리는 비밀에 잠식됩니다. 그래서 비밀에 대해서 알고싶어 하는 나 자신이 비밀 속에 등록이 되면 그 다음부터 주님이 귀신 들렸다는 소리를 들으면 예수 믿는 우리도 이 세대에서 귀신 들린 자로 잠식이 됩니다.

주님을 향해 미쳤다고 한다면 우리는 덩달아 미쳤다는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주님 하시는 말씀이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고 하셨어요.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구원을 받아도 개인 구원은 없다는 말입니다.

개인 구원이 없다는 것은 개인은 의미 없고 가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육신은 나의 유익을 생각하며 성경 말씀을 봅니다. 저는 “당신 소속은 어디입니까?”라고 묻는데 상대는 “저, 어때요?”라고 나오니 제가 뭐라고 해야 합니까? ‘당신은 누구십니까?’라고 물으면 ‘나는 ~입니다.’라고 하면 안 되고, ‘우리는 ~입니다.’라고 답해야 합니다. 소속을 밝히는 것이지요.

8장 16-17절을 봅시다. “제자들이 서로 의론하기를 이는 우리에게 떡이 없음이로다 하거늘 예수께서 아시고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 떡이 없음으로 의론하느냐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하실 때, 예수님은 이 어두운 세대를 대표하는 바리새인 집단을 두고 말씀하셨는데, 제자들은 ‘떡을 챙겼느냐?’는 말씀으로 들은 거예요. 누룩이 이 세대의 죄를 말씀하신 것이라면, 제자들이 말한 ‘우리’는 예수님이 하신 모든 말씀이 이 세대와 전혀 무관한 새로운 세대를 구성하기 위한 말씀으로 그들은 이해를 해야 돼요. 그런데 제자들의 해석은 여전히 이 세대에 속해 있는 식으로 대꾸를 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 8장 11절에 보면, 사람들이 예수님께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구했습니다. 왜 표적을 구했습니까? 예수님이 진정 믿을만한 분인지 알아보려고 한 것이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에게 표적을 주었습니까? 아니지요. 이것은 그들에게 표적을 안 준 것이 아니라 이 세대에 표적을 주지 않은 것입니다.

이 세대란 질소와 산소로 된 것이 아니고 수상한 기운이 흐르고 있어요. 이 세대는 이미 권력에 등록되어 있어요.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도 모르고 그냥 나만 잘 되면 그만이고, 내 인생은 내가 챙기면 된다고 여깁니다. 그것이 아님을 설명하기 위해서 제가 마태복음 2장을 언급하면서 설명해 드렸지요?

헤롯이 명령하니까 베들레헴에 있는 아이들이 다 죽었잖아요. 그것이 우리가 사는 형편입니다. 우리는 알 수 없는 권력에 종속되어 있습니다. 그저 자기 일을 할 때는 자기 일에 충실한 것 같지만 위에서 고함치면 우리는 꼼짝 못하고 순종하게 되어 있어요. 북한 주민들의 사고방식은, 굶어 죽어도 김정은 지도자 동지가 최고라고 높입니다. 다른 나라 사람들이 볼 때 이것은 어처구니없는 일입니다.

이런 일이 북쪽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신천지, 통일교, 안식교에 가면 볼 수 있습니다. 특히 노인들을 속이는 건강식품 판매원 주장을 들어보면 어이가 없습니다. 인간이 자기 의미를 구할 때 그 의미는 이미 기존의 욕망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남들이 좋다고 말하는 것 중에 골라서 저것은 내 것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의 모델은 타인입니다. 여러 사람 중에 내가 부러운 대상이 생기면 그 사람이 나의 모델이 됩니다. ‘당신이 가진 것 나도 갖고 싶다.’는 것이지요. 이 자체가 하나의 권력에 묶여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나만 잘 되면 그만이다.’ 라고 합니다. 사실 내가 잘 되겠다는 것은 이미 남이 가진 것을 나도 갖겠다는 것인데 이건 바로 우리가 이 세대에 등록되었다는 것입니다.

등록된 자들이 요구하는 것은 바리새인들만의 요구가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 있는 제자들마저 기대하는 바입니다. 제자들도 세상 사람들이 다 갖기를 원하는 것을 예수님이 주시기를 원했어요. 이것이 바로 이 세대에 속한 악한 것들입니다. 이것을 구하는 이유는 자신이 의미 있는 존재가 되기 위함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육’이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 전체가 육입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어둠’이라고 했어요. 우리는 이 어둠 속에 등록되어 있습니다. 즉 관계성 속에 위치를 점한 것이지요. 달리 표현하면 이 세상은 장기판입니다. 장기 알은 각자 기능이 있지요. 포, 차, 마, 상, 졸 등. 자기 역할에 따라 기능을 발휘합니다.

우리는 마귀가 예수님과 전쟁하면서 부리는 차, 또는 포입니다. 그런데 포나 차가 움직이면서 자기가 움직이는 의미를 알까요? 모르지요. 그러나 나를 움직이는 마귀는 알아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리기 위해 온갖 수작을 다 부립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자기가 왜 사는지 이유도 모르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말을 제가 하고 있는 것입니다.

더우면 덥다고, 추우면 춥다고 불평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묻습니다. ‘왜 더운 것을 불평하느냐?’ ‘더우면 땀이 나잖아요.’ ‘왜 땀나면 안 되는데?’ ‘땀나면 귀찮잖아요.’ ‘네가 뭔데 안 귀찮아야 되는데?’ ‘그건 모릅니다.’ ‘그럼 너는 아무것도 몰라.’ 이렇게 되는 거예요.

나에 대해서 전혀 아는 바가 없다는 말입니다. 알려고 하지도 않아요. 왜? 그 누구도 아는 자가 없기 때문에. 제가 예전에 담양 대나무 숲에 간 적이 있어요. 그곳에는 대나무만 있어요. 똑같아요. 하나의 군집을 이루고 있어요. 그런데 자기들은 대나무인줄 몰라요. 왜? 자기는 현재 있는 세계 외에는 알지 못하기에 다른 나무가 있는지 조차 몰라요.

인문학을 하는 사람들이 이와 같습니다. 인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무조건 인간은 존엄하다고 합니다. 왜 존엄한지 물으면 답을 못합니다. 무조건 존엄하다고 우깁니다. 예수님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먹는 것, 입는 것 밖에는 몰라요. 주님은 이 세대의 누룩, 즉 죄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제자들은 떡을 생각했습니다.

예수님 말씀은 사적인 것이 아니고 예수님 중심의 집단을 고려해서 하신 말씀인데 제자들은 못 알아들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살던 습관이 있어서 예수님 말씀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17절을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아시고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 떡이 없음으로 의론하느냐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예수님이 무엇을 주의하라고 했습니까? 누룩을 주의하라고 했지요. 누룩은 뭣 하는 것입니까? 밀가루를 부풀리는 재료지요. 누룩과 연관된 것은 떡입니다.

예수님이 누룩을 말씀하실 때 제자들은 떡을 생각했습니다. 그런 제자들을 예수님이 책망하십니다. “너희들은 나를 포함해서 ‘우리’라고 하느냐, 나를 빼고 너희들끼리 ‘우리’라고 하느냐?” 물은 거예요. 그런데 제자들은 “물론 예수님을 포함해서 ‘우리’지요.”라고 하지만, 그들에게 예수님이 책망하신 것은 그들이 생각하는 ‘우리’와 예수님이 생각하는 ‘우리’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18절을 보겠습니다.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제자들이 잘못 말한 것에 대한 주님의 잔소리가 계속 이어집니다. 아무리 좋은 말도 계속 반복해서 들으면 짜증날 수밖에 없어요. 특히 아내들이 남편에게 잔소리 할 때, 처음에는 귀담아 듣는데, 두 번 세 번 반복하면 지배당한다는 느낌이 들어서 짜증이 나요. 남편으로써의 내 자리가 아내에게 잠식당하는 느낌이 들어서 본능적으로 내 자리를 찾고 싶어 해요. 그 때 자기 자리를 찾는 방법은 화를 내는 것입니다. “잔소리 그만 해!” 이런 식으로.

주님이 제자들에게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고 했어요. 이것은 잔소리가 아니고 ‘이것이 너희의 실체다.’라고 알려주신 말씀입니다. 이사야 6장 말씀을 인용하신 것이지요. 인간은 스스로 자신이 ‘보아도 모르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자’라고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뽑아 세운 것입니다. 주님이 모든 말씀을 홀로 다 성취하실 분임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무능한 제자들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한다.’ 그 현장에 우리가 있었다면 주님 말씀은 너무 심한 말로 오버한 것이라고 여길 것입니다.

차라리 이렇게 이야기해야지요. “사실 내가 말한 것은 떡의 누룩이 아니고 바리새인들의 죄에 대해 이야기한 것이다.” 이렇게 얼마든지 친절하게 설명해 줄 수 있잖아요. 그런데 왜 눈, 귀를 거론하면서 모욕을 주느냔 말이지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면 이것은 괴물입니다.

제자들은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는 괴물인데, 그들에게 예수님이 말씀을 주신 것은 주님만이 진정한 구원자임을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조건이 있어요. 제자들 하나하나를 살리는 것이 아니고 그들이 등록되었기 때문에 이 사람들을 집단적으로 구원하시는 겁니다.

집단적으로 구원한다는 말은 개인적인 자질이나 능력을 본인이 뽑아낼 생각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 믿습니까? 그렇다면 자신의 실수나 무능력 때문에 내 인생 망쳤다는 소리는 절대 하지 마세요. 우리 몸은 내가 조성한 것이 아닙니다. 그냥 배급 받은 거예요. 내 요구사항을 듣고 나를 만든 것이 아니라 주님 뜻대로 만든 거예요.

그러니 이 몸도 내 것이 아닙니다. 내 것도 아닌데 왜 내가 걱정합니까? 주님 말씀은 ‘걱정을 해도 내가 한다.’는 겁니다. 죄인이 벌 받지 않겠다는 생각을 하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죄인은 죄 값을 받는 것이 마땅하잖아요. 우리는 죄인이라 죄 값을 받아야 하는데 이정도 숨 쉬고 산다는 것에 대해서 감사해야지요.

인간은 왜 몸에 집착을 하는가? 이것은 불순한 이 세대에 등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적으로 알아보는 것은 마귀뿐입니다. 마귀에 소속된 인간은 예수님을 적으로 보지 않습니다. 그냥 마귀의 권력에 순종할 뿐입니다. 그 순종하는 모습이 예수님과 관계없는 자기 존재의 의미를 찾으며 자아도취에 빠져 살아가는 것입니다.

제가 지난 주일 오후 설교에서 어려운 이야기를 했어요. 보편성과 일반성을 구분했습니다. 뿌리가 다른데 결국 하나가 되면 그것은 보편성이고, 뿌리는 같은데 나중에 다양하게 되면 그건 일반성입니다. 인간은 보편성이 아닌 일반성입니다. 인간은 얼굴이 다 다르지요. 처음 태어날 때는 다 비슷합니다. 아기 사진을 보면 다 비슷합니다. 그런데 성정하면 전혀 다른 얼굴을 가집니다.

우리는 인간이란 종, 호모 사피엔스라고 하는데, 종이란 같은 부류라는 것입니다. 종에서 존엄성이 나와요. 인간이니까 서로 사랑하자. 평등, 박애, 자유 이것이 1789년 프랑스 시민혁명의 모토인데, 평등은 사람들이 싫어합니다. 왜냐? 인간은 개인적인 존재이기에 남과 평등하면 약이 올라서 못삽니다. 똑같은 것은 참을 수 없습니다. 뭔가 달라야 합니다. 다른 만큼 행복해요. 새 옷을 입고 나갔는데 자기와 똑같은 옷을 입을 사람을 만나면 기분 나빠요.

주님은 인간을 똑같이 만들었어요. 그러니 주님 앞에 개인의 자질이나 행함을 거론할 수 없어요. 그런 인간은 천국에 못 들어갑니다. 마태복음 7장 22-23절을 봅시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각자 주의 일을 해도 주님은 불법이냐, 아니냐를 따집니다. 주와 함께 영원히 살 사람은 예외 없이 전부 법을 다 지킨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율법을 패하러 온 것이 아니고 완전케 하려 함이다(마5:17)’고 하셨고,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고 하셨어요.

그러면 천국 가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모든 율법을 완전히 지킴을 받은 자에 한해서 천국에 갑니다. 그렇다면 개인적인 역량이나 자질이나 노력으로 성립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혜택을 입은 집단이 주님의 능력으로 천국 갑니다. 이런 혜택을 입은 사람은 ‘내가 잘 해서 구원 받았다.’는 소리를 하지 않습니다.

‘나는 주님 공로로 구원 받았습니다.’라고 할 수밖에 없어요. 그러면 주님 공로라는 근거가 있어야 하잖아요. 주님의 공로가 되려면 자기는 죄인이 되어야 합니다. 자기가 잘났다면 잘만 부분만큼 주님이 안 보입니다. 아이가 야구를 하다가 유리창을 깼습니다. 조금 깨지나 왕창 깨지나 주인의 입장에서는 차이가 없습니다. 여기에서는 어떤 것이 더 나은가를 물을 수 없어요.

율법은 일점일획이라도 다 지켜야 합니다. 그래서 구원 받은 사람은 일점일획이 뭡니까? ‘어느 것 하나도 지킨 것이 없습니다.’ 라는 말이 나와야 해요. ‘성경의 어느 구절도 제가 지킬 수도 없고 하나도 지킨 적이 없습니다.’이것이 정답입니다. 이것을 색깔로 표현하면 검정입니다.

구원 받은 사람의 색깔이 뭡니까? 다 검정입니다. 그래서 헤겔이 이런 말을 했어요. “밤중의 모든 새는 까맣다.” 정확히 말하면 스피노자가 말한 것을 헤겔이 인용한 것입니다. 밤에는 젖소, 들소 구분 없이 다 검정색으로 보입니다. 성도는 다 시꺼먼 사람들입니다. 시꺼먼 사람의 배경은 너무나 하얗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리새인이 예수님께 어떤 말을 했습니까? ‘당신이 메시아라면 메시아인 표적을 보여 달라’고 했지요. 그것이 시꺼먼 거예요. 주님은 어떤 차원에서 봅니까? ‘제자들아, 너희들이 시꺼먼 속에 같이 있었다.’ 이런 차원에서 ‘너희들이 누룩을 주의해라.’ 즉 ‘너희들은 바리새인과 같은 소리를 해서는 안 된다.’고 하신 거예요.

그런데 제자들 반응은 어떻습니까? “주님, 우리는 죄인입니다.” 이렇게 나온 것이 아니고, “떡 챙겼냐는 말씀이지요?” “누룩을 주의하라.”는 말을, ‘떡 잘 챙겨라.’는 말로 이해한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은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둔하냐?”라고 하신 거예요. 그리고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라고 계속 잔소리를 하신 거예요.

20절을 보면, 떡 일곱 개를 4,000명이 먹고 남았지요. 그러면 4,000명은 4,000이 아니고 하나가 되겠지요. 그리고 떡 일곱은 7이 아니고 한 분에게서 나온 하나지요. 즉 집단 대 집단으로 보는 거예요. 집단을 위한 예수님 한 분이란 말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볼 때 예수님 한분 나 한 사람, 이렇게 보면 안 되고, 예수님이 새로운 집단을 만들 사람이 바로 나라는 고백을 가지고 예수님을 쳐다봐야 된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볼 때 우리를 제외한 저쪽 집단은 개인의 자질과 상관없이 통째로 누룩이 됩니다. 사단의 지배를 받는 지옥 갈 집단이 되는 겁니다. 그 중에서 너희 집단은 빼내 주신 겁니다. 예수님이 친히 개입하셔서 뽑아내어 새롭게 ‘우리’를 만드신 거예요.

예수님이 하신 모든 말씀은 개인을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고 집단화, 즉 하늘나라에 등록시키는 것입니다. 예수님 손에는 큰 담요가 있는데, 이것은 1인용이 아닙니다. 이 담요는 여러 명을 덮을 수 있는 것으로, 예수님과 함께 이 담요에 덮인 사람은 천국 갈 자들입니다. 이런 담요를 가지고 왔다는 것은 위상적으로 천국과 지옥이 지금 같이 있는 것입니다.

같이 있다는 것은 시작과 끝을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면 내가 있는 곳이 끝이요, 또 이곳이 시작입니다. 내가 사나 죽으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겁니다. 그러면 개인적으로 ‘내 인생은 어떻게 끝날까? 치매 걸려서 죽을까, 아니면 평안하게 죽을까?’ 이런 고민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람의 추억은 기억 속에 있는 것을 조립해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이것을 꿈이라고 합니다. 꿈은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재배열하는 것뿐 전혀 새로운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것을 기대해서는 아니 됩니다. 이대로 살다가 죽을 거예요. 별 다른 것이 없습니다. 단, 내가 이렇게 살아도 이것이 하늘나라를 증거하는 용도로 사용됨을 깨닫는 것입니다.

왜 식탁 위에 사과는 없고 참외만 있는가? 주께서 이렇게 허락하신 거예요. 현재의 내 몸이 내 몸이 아닙니다. 왜 아픈가? 주께서 아프게 하신 거예요. 그러니 남 탓하지 마세요. 주신 자도 하나님, 취하신 자도 하나님입니다. 제발 우리 뒤에 붙어있는 라벨을 떼지 마세요. 라벨은 처음부터 있었는데 성령 받은 후에 보니까 라벨이 보입니다. 라벨은 보면 사이즈가 얼마인지 재질이 무엇인지 다 기록되어 있어요. 우리의 모든 것이 이미 다 기록되어 있어요.

이것을 모르면 오늘 본문처럼 예수님의 잔소리를 계속 듣게 됩니다. 21절에 보면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고 했지요. 주님이 오버하시는 것 같아요. “누룩을 주의해라.”는 예수님 말씀에 대해 제자들은 “예, 떡 챙겼습니다.” 이 말 밖에 안 했어요. 이 말 했다고 예수님은 연속적으로 잔소리를 퍼붓습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담요로 덮입니다. 주님과 함께 있다는 것은 우리가 상상도 못하는 세계가 준비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음이 구원이라는 사실을 나중에 성령 받고 난 뒤에는 알게 됩니다. ‘주님 보고 싶어요.’ 라고 울 필요 없어요. 성령 받으면 끝난 문제입니다. 보아도 알지 못하는 눈 가지고 보면 뭣합니까?

22-26절을 보겠습니다. “벳새다에 이르매 사람들이 소경 하나를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손 대시기를 구하거늘 예수께서 소경의 손을 붙드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사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시니 우러러 보며 가로되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의 걸어가는 것을 보나이다 하거늘 이에 그 눈에 다시 안수하시매 저가 주목하여 보더니 나아서 만물을 밝히 보는지라 예수께서 그 사람을 집으로 보내시며 가라사대 마을에도 들어가지 말라 하시니라.”

사람들이 소경을 예수님께 데려왔지요. 그러면 소경을 데려온 사람은 소경이 아니지요? 보편성도 아니고 일반성도 아니고 차이가 난다는 거예요. 한 사람은 소경이고 그를 데리고 온 사람은 소경이 아닌데, 이 소경을 예수님께 맡겼습니다. 그러면서 기대한 것이 뭐예요? 소경을 보게 해서 우리 있는 곳에 복귀시켜 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소경을 보게 하신 후 그에게 당부하시기를 “마을에도 들어가지 말라.”고 하셨어요. 사람 대 사람의 차이를 개인 대 개인의 차이로 인식합니다. 주위에 소경이 있다면 나는 소경 아닌 자가 됩니다. 어느 누구도 소경을 보면서 ‘나도 소경인데’라고 할 자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나는 왜 망해야 합니까?’라고 주님께 묻는 사람이 없어요. 자신은 멀쩡하지 않아도 멀쩡할 자격이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남들은 어려움이 와도 나는 어려움이 오면 안 되고, 남들은 불행해도 나는 행복해야 되고. 왜 그래야 됩니까? 왜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합니까?

저는 북한에 살지 않고 남한에 사는 것을 천만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 배급도 없고, 힘들게 일해도 배고프고, 모든 삶에 통제를 받기에 자유를 누리려만 탈북을 해야 됩니다. 그런데 태어날 때부터 남한에 태어나서 탈북 할 필요가 없잖아요. 모차르트를 부러워한 작곡가 살리에르가 있는데, 이 사람은 늘 ‘나는 왜 모차르트처럼 천재가 되지 못하는가?’ 불만이 많았어요. 그러면 모차르트는 젊어서 죽었는데 그건 왜 안 부러워합니까?

사람이 몰라도 너무 몰라요. 예수님만 세상에 대해서 알지 인간은 본인에 대해서도 아는 바 없고, 세상에 대해서도 몰라요. 그래서 주님이 무슨 말씀을 해도 못 알아듣고, 주님이 내 모습에 대해 정확히 지적하셔도 우리는 인정하지 않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소경을 예수님께 데려 왔습니다. 우리는 보는데 소경은 저주 받아서 보지 못하니까 예수님이 우리처럼 소경을 보게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소경에게 보게 하시는 정도가 아니라 2중으로 보게 하십니다. 23절을 보면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고 물으셨지요. 제자들 보기에 예수님이 소경 눈에 침을 뱉으시고 곧바로 보게 되면 얼마나 좋겠어요. 예수님은 침 뱉으신 후에 “무엇이 보이느냐?”고 물었지요. 왜 사람 감질나게 만듭니까?

첫 번째 봤을 때 만물이 보였습니까? 아니죠. 뭔가 미진한 것이 있습니다. 소경은 어디에서 나왔습니까? 마을에서 나왔지요. 마을이라는 집단에서 나왔기 때문에 소경에서 눈을 떴을 때 그 모든 과정을 마을 사람들이 알아야 하는데 전혀 모른다는 것은 그들 모두가 소경이란 점을 보여주는 겁니다.

나는 마땅히 눈 떠야 된다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에 의해서 단계별로, 다시 말하면 예수님이 허락한 범위 내에서 볼 수밖에 없는 예수님께 종속된 자라는 점을 마을 사람들은 알지 못합니다. 눈이 보이니까 다 볼 수 있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내가 정당해서 보는 것이 아닙니다. 죄인인데 눈이 보이니까 죄인 아닌 의인으로 착각을 합니다. 그들은 주께서 보게 한 만큼만 본다는 이 놀라운 주님의 은총이 삭제된 체 하나의 집단을 이룬 거예요. 우리는 그 마을에 살고 있습니다. 아무것도 모른 체 그냥 살아가고 있습니다.

보이는 것은 같은 대나무뿐입니다. “너는 좋겠다. 키도 커고 몸통도 굵고.” 그래봐야 같은 대나무입니다. 키 커고 몸통 튼튼한 것은 대나무 집단이지 천국이 아닙니다. 천국은 인간이 못 들어갑니다. 그럼 누가 들어가는가? 예수님처럼 된 사람만 들어가요. 예수님처럼 된다는 것은 의를 갖춰야 합니다. 우리는 죄인이기에 율법을 지켜 의롭게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문제를 출제하고 또 답도 냅니다. 3+2=5 참 잘했어요. 이것은 자기 세계지 주님의 세계가 아닙니다. 불교는 우리 모두가 부처가 될 수 있다고 가능성을 제시합니다. 이것은 부처의 세계지 예수님의 세계가 아닙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는 전부 부처의 세계가 되었어요. “목사님, 어떻게 할까요?” 목사님처럼 되어서 될 문제가 아닙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성령을 받았을 때 시몬이 뭐라고 했습니까? “내가 어떻게 하면 당신들처럼 될 수 있습니까?” 베드로, 요한은 미안해요. 왜냐? 본인이 원해서 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데 시몬은 돈을 주며 “이 능력을 내게도 주소서.”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돈 한 푼도 안 받고 소경을 보게 했습니다. 처음에는 희미한 정도로만 보게 했습니다. 그 후에 다시 밝히 보게 하셨습니다. 이 때 소경이 뭘 생각하겠어요? “나는 처음부터 만물을 보아야 했는데”라고 생각했습니까? 아니죠. “나에게 만물을 밝히 보게 하신 당신은 누구십니까?” 라며 예수님을 보겠지요. 이게 십자가만 증거하는 말이 되는 거예요.

십자가 지지 않은 사람은 절대로 옹호해서는 안 돼요. 오직 십자가 지신 주님만 옹호해야 돼요. 이게 십자가의 보편성입니다. 내 개인의 보편성에서 예수님이 간섭하셔서 십자가마을을 형성해요. 이 사람들은 자신이 살았던 마을에 들어가서는 아니 됩니다. 새롭게 눈을 뜬 사람은 과거 마을 사람들에게 아무리 자신이 눈 뜬 것을 설명해도 (예수님 덕분에 보게 되었다는 것을) 그들은 알아듣지 못합니다.

소경이 눈 떤 것을 보고 “나는 망해야 마땅한 죄인입니다.” 이런 고백이 나올 수가 없어요. “그래, 당신도 나처럼 되었구나.” 마치 예수님 빠진 쪽이 얼마나 엄청난 차이인지 모르고 그냥 ‘너도 볼 수 있는 정상적인 사람이 되어구나.’ 라고 생각해요. 눈만 뜨면 다 정상인입니까? 아니죠.

여기에 비밀이 있습니다. 예수님 자체가 비밀이고 이것이 천국에 속합니다. 그러면 눈 뜬 사람과 같이 섞여 있어도 위상적으로 하나는 지옥에 속한 자이고, 한쪽은 천국에 속한 자입니다. 저는 이 새롭게 눈 뜬 사람을 ‘스파이’라고 말하고 싶어요. 비밀스런 사람. 특징이 뭔가? 아무에게도 자신이 어떤 일을 한다는 것을 설명할 수가 없어요. 그냥 옆에 계시는 주께서 나를 새로운 집단에 등록된 사람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하신 일이 이미 등록된 사람에게만 등록된 사람의 면면을 드러내는 일에 저희들이 동원된 것을 감사합니다. 이 차이를 감사하고 귀하게 여기게 하옵소서.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이 귀한 신분을 더욱 더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6. 6. 22. 09:44 녹취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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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222 페이지

번호 구분 제목 분류 날짜
15,617 묻고답하기 살려주는 영 고린도전서 최고관리자 16-06-26
15,616 자유게시판 가짜다 ( 마 21:9 ) 대전- 76강 마태복음 최고관리자 16-06-24
15,615 자유게시판 44강-창 8장 6-12절(까마귀와 비둘기)160622-이 근호 목사 창세기 최고관리자 16-06-23
15,614 묻고답하기 외계인 - 최고관리자 16-06-23
15,613 자유게시판 159강-YouTube강의(미신)160621-이 근호 목사 시편 최고관리자 16-06-23
15,612 자유게시판 158강-YouTube강의(유혹)160621-이 근호 목사 창세기 최고관리자 16-06-23
15,611 자유게시판 88강-신 15장 19-23절(첫 번째 것)160619-이 근호 목사 신명기 최고관리자 16-06-23
열람 ➜ 자유게시판 광주 강의(2016. 5. 27) 2강 - 최고관리자 16-06-22
15,609 자유게시판 안양20160610a히12장 1절(재앙과 징계)-이 근호 목사 - 최고관리자 16-06-21
15,608 자유게시판 여름 수련회 교재 - 최고관리자 16-06-21
15,607 자유게시판 194강-고전 15장 42-44(죽은 자의 부활)160619-이 근호목사 고린도전서 최고관리자 16-06-19
15,606 묻고답하기 첫 사람과 마지막 사람 고린도전서 최고관리자 16-06-19
15,605 강의 [16 대구강의] 잠언속의 그리스도 57 - 좁은 현실 - 최고관리자 16-06-17
15,604 자유게시판 20160614b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34-니체 - 최고관리자 16-06-17
15,603 자유게시판 20160614a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34-니체 - 최고관리자 16-06-17
15,602 자유게시판 43강-창 8장 1-5절(심판의 목격자)160615-이 근호 목사 창세기 최고관리자 16-06-16
15,601 자유게시판 요한복음 10장 40절(가락-본래적 죄)160607b-이근호 목사 요한복음 최고관리자 16-06-14
15,600 자유게시판 87강-신 15장 12-18절(6년과 7년)160612-이 근호 목사 신명기 최고관리자 16-06-12
15,599 자유게시판 193강-고전 15장 35-41(부활에 대한 반박)160612-이 근호목사 고린도전서 최고관리자 16-06-12
15,598 우리교회 6년과 7년 160612 신명기 최고관리자 16-06-12
15,597 묻고답하기 죽은 자의 부활 - 최고관리자 16-06-12
15,596 우리교회 부활에 대한 반박 160612 고린도전서 최고관리자 16-06-12
15,595 우리교회 베드로와 함께 하심 160612 - 최고관리자 16-06-12
15,594 자유게시판 요한복음 10장 40절(가락-본래적 죄)160607a-이근호 목사 요한복음 최고관리자 16-06-12
15,593 자유게시판 여름수련회 안내 마태복음 최고관리자 16-06-10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