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614a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34-니체
20160614a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34-니체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은 프리드리히 니체(1844~1900), 돌아가신 연도는 외우기 쉽지요. 1990년에 돌아가셨습니다. 19세기 사람이라 이야기할 수 있어요. 니체가 그렇게 유명한 이유가 있어요. 보통사람들은 입을 다물고 살아가요. 신이 어떠니, 세상은 어떻게 돌아가니, 우리의 미래, 우리 인생은 무엇이냐? 이런 것은 대부분 사람들이 말 안 해요. 너무 크기 때문에. 전문가가 될 자신이 없는 거예요. 세상이 워낙 크니까. 인간은 너무 작으니까.
그래서 전부 입 다물고 살아가는 거예요. 그것은 그냥 고정돼있는 것이 아니고. 홍수가 나면 냉장고나 돼지가 떠내려가잖아요. 세상 사람들은 그냥 세월 따라 떠내려가는 거예요. 떠내려가기 때문에 말을 할 수 없는 겁니다. 떠내려가는 주제에 우주가 어떠니, 신이 어떠니, 세상이 어떠니 이야기해봤자 자기가 안 떠내려갑니까? 안 떠내려간다고 보장받을 수 있어요? 브레이크를 걸 수 있습니까? 떠내려가는 강폭이 자기 신장보다 더 큰데.
이건 공부를 하나 안 하나 관계없이 공부한다고 해서 전체를 알았다고 할 수 없어요. 왜냐하면 내가 전부를 안다는 게 건방진 것임을 알 뿐이고. 또는 못 배운 사람은 못 배우고 뭐고 간에 자기 살 단도리에 바쁘지 그런 데까지 신경 씁니까.
한 마디로 말해서 인생이란, 방금 이야기했습니다. 떠내려가는 거예요. 떠내려가면서 누가 감히 나를 떠밀어, 라고 하면 안 돼요. 수동적인 사람이 어떤 능동적인 힘이 있을 때는 나는 내 식대로 살겠다고 해보겠지만 지금 자기 형편이 떠내려가는 입장에서 내 인생을 밀어붙이는 자가 누구인지 안 들, 그래서 알았다 칩시다. 그러면 떠내려가는 것이 중간에 스톱됩니까?
그래서 니체 말고 다른 모든 사람들은 사는 대로 그냥 삽시다. 그런 쪽이에요. 어떤 아이디어는 제시하겠지만, 인생은 이렇고, 세상은 이렇고, 우주는 이렇다고 하겠지만 그게 우리한테 힘이 안 되잖아요. 우리 인생을 바꾸는데 힘이 안 되고 더 중요한 것은 바꿔 봤자, 인생 바뀌면 살림살이 나아집니까? 아니지요. 백세 인생 하는데 왜 이백세는 안 되는데? 삼백세, 구백세는 왜 안 되는데? 아담은 백삼십에 셋을 낳고 낳은 후에 팔백 년을 살았더라. 합치면 아담은 구백삼십 년입니다. 게임이 안 돼요. 아담은 전부를 알았습니까? 마찬가지에요. 전부를 모르지요.
그래서 니체가 왜 유명하고 이슈가 되는지 보기 전에 우리 자신부터 보면, 우리는 입 다물고 그냥 떠밀리는 데로 살아가는 것이 모든 사람들의 보편적 삶입니다. 신이 천지를 만들었다. 만들었겠지.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그걸 안다고 해서 우리가 달라질 건 없어요. 그래서 신, 우주, 현실, 자연, 모든 것을 안다는 것은 인간에게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니체는 이걸 이야기한다고요. 알아봤자 브레이크도 걸리지 않고 인생은 떠밀려 내려감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들은 입을 다무는데 니체는 입을 열어요. 니체가 왜 입을 여느냐 하면, 미친 사람이거든요.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해운대에 이 시간에 사람들이 운동하러 가든지 살 빼러 가든지 장 보러 가든지 놀러 가든지 분주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길 가다가 쪼그려 앉아서 개미가 꽃잎에서 떨어진 걸 보고 애처롭다고 두세 시간 동안 앉아있다면 그 사람이 정상이에요? 미친 사람이죠. 개미 떨어진 걸 왜 그렇게 신경 써요? 저녁 식사 준비나 하지 왜 그러고 있는데? 한 곳에 집중해서 거기에 몰두해서 언급한다는 것은 이건 정상적인 사람이 아닙니다.
작은 것도 마찬가지지만 허황된 큰 것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우주가 뭐니, 신이 뭐니 하는 것도 심지어 니체는 신이 죽었다 했지요. 신이 죽고 안 죽고 이게 문제가 아니고 니체가 미친 사람인 이유는, 그걸 왜 그런 식으로 무슨 자신감에 근거해서 그런 이야기를 하느냐 말이죠. 그냥 사는 대로 살면 되지. 교수하든지 작가하든지 철학자하든 살면 되지 신이 죽었다고 왜 하느냐 말이죠.
제가 아까 강의 시작하면서 우리가 진리를 안다고 해서 우리 인생에 브레이크가 걸리지 않는다고 했지요. 그 이유가 뭐라고 했던가요? 그냥 떠내려가요. 홍수에 너도 나도 얼굴 마주보면서 떠내려가요. 부부도 마찬가지로 세월에 떠내려가고 있고, 경제 사정에 떠내려가고 있고. 거제도 보세요. 거제도가 바닷가거든요. 옥포조선소도 바닷가로 떠내려가게 생겼어요.
배 만드는 사람들이 나쁜 사람들이에요? 평소에 나쁜 짓을 많이 한 사람이에요? 아니지요. 떠밀렸잖아요. 세계 경제에. 이제는 자구책으로 안 하던 나쁜 짓을 만들어낼 거예요. 거짓말할 거예요. 집세 안 주고 떼먹을 거예요. 예의도 없고 도덕도 없을 거예요. 평소에 좋게 지내던 이웃 사이도 돈 떨어지면 이웃이 아니고 야반도주할 겁니다. 이렇게 틀리지 않는 예언은 얼마든지 할 수 있어요.
따라서 세상이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는 이야기입니다. 모르면 입 다물고 살면 되는데 니체가 왜 유명하냐? 미친 짓을 해본 거예요. 사실은 나중에 정신분열 일으켜 죽기도 하지만. 이 세상 전체를 아무도 말하지 않는 것을 내가 말하겠다고 나선 겁니다. 자칭 자라투스트라, 예언자에요. 예언자는 논리가 없어요. 예언자의 입에서는 예언만 나와요. 니체의 모든 문장들이 명령입니다. 이렇다, 또는 단정적이에요. 그렇다. 그걸 시적이라 해요. 논문이 아니고 시처럼 나온 거예요. 하나님 앞에 계시를 받은 것처럼 글을 씁니다. 마치 광야의 엘리야처럼.
그러면 예언적인 방식으로 말을 하고 글을 써도 시적으로 이야기한다는 것은 결국 뭘 의도하는 겁니까? 추종 세력을 의식해서 그런 발언들을 쏟아놓겠지요. 그런데 니체와 추종세력 간에 논리적인 것이 성립됩니까? 추종인데 무슨 논리가 있어요. 공감은 되지요. 제 말이 들리십니까? 논리를 따져서 믿겠다는 게 아니고 말 자체 내용을 분석하자는 게 아니라 말을 들으니까 평소에 입 다물고 있던 것을 니체가 대신 이야기해줄 때 공감하죠. 니체는 사람들이 공감할 만한 말만 예언자적 입장에서 내놓는데 그 이유가 뭐냐 하면, 니체는 세상에 대해서 모든 것을 알기 때문에 얼마든지 본인은 예언자적 발언을 쏟아내도 하자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니체의 이런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는가? 니체가 세 가지를 부정함으로 나옵니다. 첫 번째, 플라톤 사상을 거부합니다. 두 번째는 실용주의적 사상을 거부합니다. 실용주의적 사상=과학적 사상. 세 번째는 에피쿠로스 사상, 이건 불교와 생각이 똑같습니다. 에피쿠로스와 짝을 이루는 게 스토아 사상이에요. 사도 바울이 아테네에서 전도할 때 사도행전 17장 17절에 보면 나와 있습니다. “회당에서는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과 또 저자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하니 어떤 에비구레오와 스도이고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할새”
니체 입장에서 자신도 이런 논쟁을 벌일 수 있다고 생각하지요. 어디 불교 사상을 칩니까? 불교 사상은 모든 것의 모든 것을 포괄하고 있는, 인간의 모든 지혜를 다 끄집어내고 그걸 다 덮는 게 불교 사상이에요. 불교 사상은 브라만에서 나왔거든요. 브라만은 우주와 하나에요. 통합이 된 겁니다. 통합이란 전체를 말하거든요. 이미 모든 걸 포함해서 전체를 이야기했는데 거기서 빠질 게 뭐가 있어요. 그걸 보통 불교적으로 마음 넓은 사람을, 대승적 자질을 가졌다고 하지요. 모든 걸 용납하고 품어줄 수 있는 하해와 같이 넓은 마음을 가졌다는 거지요.
그런데 이 세 가지를 니체가 다 쳐버려요. 첫 번째 봅시다. 플라톤 사상은 간단합니다. 진실, 실제 같은 말입니다. 진실 또는 진리. 진리를 죽어봐야 압니다. 지금은 알 수 없어요. 그러면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은 가상 세계에요. 허상, 허구, 환상. 왜 그러냐 하면, 플라톤은 이야기하기를 여기는 고정돼있지 않고 변화하기 때문에 그래요. 변화한다는 것은 어지러운 거예요. 왔다리 갔다리. 가만히 좀 있어라. 가만있을 때 비로소 실체, 본모습이 등장하고 그 주변에 뭐가 있지요? 식당에서 아이들이 왔다 갔다 할 때 어지럽잖아요. 거기에 허공, 비어있지요.
실체, 인간이나 탁자, 돌, 산이 있으면 실체로 고정돼있어야 이 사이에 공간이 만들어지는 거예요. 그런데 왔다 갔다 하면 공간이 없지요. 빈 공간이 있을 때 없음이 된단 말이죠. 그런데 사람이나 물건이 있을 때 있음이 되겠지요. 그러면 있음은 없음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면 없음이 우선이죠. 그런 사고방식이 플라톤 사고방식입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한 게 플라톤 사고방식이에요.
플라톤은 기원전 5세기경 아닙니까. 기독교 사상이 들어오기 전에 이미 플라톤 사상이 있었잖아요. 유대교 사상의 연장선에서 소위 그리스도가 들어옴으로 말미암아, 그러니까 그리스도를 유대교의 일파로 보는 거죠. 유대교 사상은, 모세가 언급했고 그걸 책으로 남긴 구약성경 창세기 1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태초에 천지를 창조했단 말이죠. 잘 들으셔야 돼요. 창조했다는 것은 일반사람들이 듣기에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설명이 안 되는 모든 원인들을 한꺼번에 깔끔하게 설명할 수 있는 최초의 매듭이 돼요. 육체적으로 왔다 갔다 하는 것도 어지러운데 정신적으로 그런 것도 어지러울 것 아닙니까.
엄마, 난 누가 만들었어? 내가 만들었어. 그럼 엄마가 누가 만들었어? 이렇게 질문하면 짜증나잖아요. 죽으면 어떻게 돼? 사후 세계는 어떻게 되는데? 죽기 전에 그걸 걱정한다는 것은 본인이 하고 있는 것에 방해가 될 수 있어요. 어지럽단 말이죠. 깔끔하게 정리하려면 우리는 누가 만들었다? 신이 만들었지요. 그러면 죽으면 어디로 가겠어요? 신으로 가겠지요. 그러면 인생이란, 신으로 시작해서 신으로 말미암아 신께로 가는 거예요. 로마서 11장 36절,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아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깔끔하게 정리됐지요.
니체는 이게 바로 기독교라는 거예요. 없는 데서 만들어서 모든 있는 것을 하나님 자기 품 안으로 수용하는 것, 이게 기독교라는 겁니다. 그러면 큰 덩어리는 해결됐습니다. 어디서 만들어졌습니까? 하나님이 만들었고, 가기는 어디로 갑니까? 하나님 품 안으로 간다. 큰 덩어리는 마련됐는데 일상생활에서 행복하십니까? 도둑놈이 와서 유리창 깰 때 마음이 편하던가요? 오만 원 날아갔네. 그렇게 생각하면 행복해지던가요. 내일 되면 또 깨질 가능성 있는데.
니체가 보기에 이런 겁니다. 오늘 중요한 것 나옵니다. 해결이 실제적이지 아니면서 이론상 억지를 부리고 있다는 거예요. 신이 태어났다는 걸 언제 이야기합니까? 어른 돼서 이야기하지요. 그럼 신이 불러서 죽는다는 말을 죽고 난 뒤에 이야기합니까? 살아있을 때 이야기하지요. 이것은 근거 없는 어떤 자체 내에서 아등바등 애를 쓴다는 느낌이 안 듭니까? 억지를 부리고 이 세상 살면서 뭔가 정리가 안 되고 불안하고 공포고 늘 염려되고 걱정스럽기 때문에 약간이라도 누그러뜨리고 싶은 몸부림, 다 해결은 안 되겠지만, 죽고 난 뒤에 문제가 아니고 한 달 뒤가 문제거든요.
거제도에 아는 사람들, 친척들이 있어서 하는 거예요. 거제도 사람들에게 사람은 태어나고 죽을 때 죽습니다. 기도합시다. 그러면 거제도 문제가 해결됩니까? 구조조정해서 잘릴 판인데. 대부분 계약직이에요. 오도 갈 데가 없어요. 전부 나와야 돼요. 가까운 목사님이 가서 주께로 돌아갑니다, 하면 전부 다 만만세 찬미하고 그렇습니까?
니체는 말합니다. 실제로 도움도 안 되는데 그런 억지를 부르느냐 말이죠. 도움도 안 되는 이야기를. 죽고 싶어 환장했나? 살고 싶은데. 사람들의 관심사가 죽는데 있는 게 아니에요. 사는 데 있는 이왕 사는 것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고 싶은데 관심이 있단 말이죠. 니체는 묻습니다. 왜 인간은 건강하고 행복해지고 싶어 하는지를 기독교가 해결책을 낸 적이 있느냐 말입니다.
정신과 의사의 한계가 그거에요. 원인은 몰라요. 약으로 그 순간순간 억지를 부려서 뇌를 마비시켜서 살아있는 뇌를 죽은 뇌로 만들어서 잠시 발작을 진정시키는 것밖에 못해요. 약 떨어지면 또 마찬가지 된다니까. 원인을 몰라요. 다른 것은 원인을 아는데 정신과는 원인이 없어요. 한쪽을 수술했을 때 뇌가 하나로 돼있기 때문에 다른 쪽이 손상이 갔는지 어떤지 확인할 길이 없어요. 피부는 수술하면 그 부위는 낫잖아요. 그런데 뇌세포는 피부세포와 달라서 한쪽이 고장 나면 다른 쪽이 이상할 가능성이 농후해요. 하나로 움직이기 때문에.
니체가 지금 살아있으면 이렇게 이야기할 거예요. 사람이 정신과에 가는 이유가 뭐냐? 자식이 불쌍해서 고치기 위해서 간다. 니체는 솔직하게 이야기하자. 가족 중에 누구 하나 병들고 발작을 일으키면 누가 힘들어요? 본인이 힘들어요. 그래서 사람은 본인이 힘들면 움직이게끔 되게 돼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할까요? 니체, 당신 이론에 의하면 우리가 늘 행복하고 기분 좋게 살 수 있는 묘수가 있느냐고 할 때 니체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고통에 대해서 나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그동안 불행은 나쁜 것이라는 인식을 기독교 사상에서 들어왔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고통을 이상스럽게 생각하게끔 세뇌 받아온 게 문제가 된다는 거예요. 사람들이 고통이 나쁘다, 악한 것으로 생각하니까 플라톤 철학과 그에 연관된 기독교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사람이 고통 받는 것은 죄 때문에 그렇다는 거예요.
그래서 니체 철학의 시발점이 이거에요. 과연 죄라는 게 있는지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죄는 원래 없는 건데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인간의 자유의지를 내세웠기 때문에 죄가 생긴다는 겁니다. 너는 착할 수도 있는 왜 나쁜 짓을 해. 따라서 너는 책임을 져야 돼. 그러니 넌 벌 받아야 돼. 그래서 신은 벌주고 있는 중이야. 빨리 회개할수록 그 책벌에서 벗어나서 행복할 수 있을 거야, 라고 그런 식으로 기독교부터 모든 사상이 사회를 통제했고 질서 잡아왔고 훈계해왔다는 겁니다.
그게 플라톤 사상에서 그렇다는 거예요. 디오니소스는 그게 아닌데. 플라톤 사상이 왜 그렇게 이야기하느냐 하면, 변화하는 것은 진실이 아니고 실제가 아니고 진리가 아니라는 거예요. 나쁜 사람 플라톤이 그렇게 이야기한 거예요. 그러니까 이 땅에서 변화하더라도 나중에 죽고 나면 편안히 쉰다는 거예요. 그러면 진실의 세계관은 움직이지 않는 거예요. 신의 세계니까. 고정된 거고 세상은 변화되니까 종잡을 수가 없는 거예요. 어느 것이 너냐, 할 때 몰라요. 이십 년 전 내가 그 나인지. 물론 나는 맞아요. 안에 있는 내용물이 다르지요. 내용물이 다르면 내가 다른 건 맞아요.
똑같은 인간인데 어느 날 아내가 굉장히 아름답게 보일 때가 있어요. 그건 여자가 달라진 게 아니고 내가 달라진 거예요. 실망 없는 부부생활은 없거든요. 그 실망의 원인을 그동안 아내 탓으로 돌린 거예요. 남편들이. 너는 내 기대치에 부합되지 않다고 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나한테 문제가 있다고 달라졌다면 그때 나와 지금 내가 동일할 수 없어요. 거듭났는지 모르겠지만.
그동안 기독교 세계에서는 변화하는 것, 잡을 수 없는 것을 포기하고 변화를 죄와 착함과 악함에 의해서 밀고 당기는 가운데서 변하지 않는 세계, 신께서 쥐었다 놨다하면서 인간을 선한 세계, 이데아 세계 또는 형상의 세계로 보내기 위해서 선은 장려하고 악은 나쁘게 하기 위해서 움직이는 세상을 나쁜 행위와 착한 행위로 의도적으로 구분했다는 겁니다. 구분하다보니까 인간에게 자유의지란 게 있고 그 의지를 어떻게 쓰기 나름이라는 거죠.
같은 샘물이라도 소가 마시면 젖이 되고 뱀이 마시면 독이 된다고 하지요. 사극에 보면 그런 이야기 많이 나와요. 도둑이 쓰는 칼은 죽이는 칼이지만 횟집에서 쓰면 맛있는 회가 된다는. 이게 바로 플라톤 사상이죠. 너의 행위에 따라서 있기 때문에 네가 착하고 착하지 않고는 네가 지금 행복하냐, 행복하지 않느냐로 판가름된다는.
니체는 말하기를 인간은 신체뿐인데 문제는 잘못된 정신으로 덧입혀져서 문제가 된다는 거예요. 그러면 니체 당신 주장은 뭐냐? 진짜 실제를 밑으로 내려 보자는 말이죠. 가상 세계를 진짜 실제 하는 세계로 보면 문제는 깔끔하게 해결되는 거예요. 지금은 고생하지만 참다보면 저쪽 나라에 가겠지요. 저쪽 하늘, 저쪽 세계 없어요. 이 세계뿐이라는 거예요.
당신은 무슨 근거로 이천 년 기독교 철학을 뭉개느냐고 하지만 니체는 말하기를, 너는 무슨 근거로 보이지 않는 세계가 있다고 하느냐? 아무 근거 없어요. 양쪽 다 근거 없어요. 보이지 않는 세계를 근거 잡으면 보이는 게 되니까 그건 안 되지요. 보이지 않는 세계는 철저하게 은폐돼있어야 돼요. 숨어있어야 돼요.
아까 제가 떠내려간다고 했지요. 떠내려가는 건 뭘 알아도 그냥 떠내려간다고 했지요. 떠내려가는 걸 실제로 보는 거예요. 떠내려가면 안 된다는 것은 플라톤 사상에서 나왔고 기독교에서 나왔다는 거예요. 내가 이 직업, 저 직업, 온갖 직업 해보고 안정되게 살아야지 할 때 안정되게 사는 것이 선이고 떠돌이 생활은 나쁜 것이라는 인식 자체가 세뇌 받은 기독교 사상이고 플라톤 사상이고 이게 우리 본래 신체와 다른 수상하게 잘못된 정신세계가 귀신 붙듯이 들어붙어서 그런 현상이 일어난 거예요. 그걸 떼버리란 말이죠.
배고프면 먹으면 되고 먹을 것 없으면 안 먹으면 되고 안 먹으면 죽으면 되고. 이러면 되는데 왜 자꾸 지금 아픈 것은 신에게 벌 받아서 그런 것이다. 내가 배불러야 만족하다. 그거야 알지요. 신체는 쾌감이 있기 때문에. 그건 어디까지나 쾌감이라니까요. 쾌감이기 때문에 선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기독교, 플라톤 다 날아갔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의지로 책임을 져야만 형편이 나아진다고 생각하는데 인간에게 책임이란 게 없다는 겁니다. 죄가 없는데 무슨 책임이 있어요. 그럼 뭐가 있느냐? 책임 의식이 있는데(어렵지요^^) 그 책임은 진실 세계, 신의 세계, 천국, 실재 여기에 대한 책임이 아니고, 이건 칸트를 의식한 거예요. 칸트는 인간에게 의지가 있는 이유가, 네 속에 도덕적 원리가 있어서 무조건적으로 책임을 요구한다.
칸트가 왜 그런 이야기한다고 했어요? 당신 속에 있는 신을 믿어라. 신의 계명이 성경책에 나오는 게 아니고 당신 속에 신의 계명이 있는데 이웃을 내 몸 같이 사랑하라. 신도 이웃이니까 신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 거기에 대해서 우리 양심이 받쳐주면 이 사회는 아주 좋은 사회가 된다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문제가 뭐냐 하면, 항상 내 의지가 제대로 쓰이는지 내가 나를 관찰해야 되겠지요. 내가 나한테 벌 줘야 되고 그렇게 해야 된다는 겁니다. 좋게 이야기하면 자기 자제, 자기 절제, 자기 통제가 되는 사회가 좋은 나라가 된다는 이게 칸트의 윤리도덕입니다. 누가 시키기 전에 네 속의 양심에 따라 행동하란 말이죠. 그것은 무조건, 조건 없이 따라줘야 된다는 겁니다. 들어보니 더러 기억이 나지요.
그런데 니체는 그게 아니고 신에게 책임지는 게 아니고 네 자신에게 책임져라. 이 말은 네 욕망을 긍정하란 말입니다. 아주 나쁜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해운대에 80층 되는 고급 아파트에 보석을 훔치려고 스파이더맨처럼 올라가는데 76층에서 미끄러져 실패했어요. 그러면 그 사람이 포기하겠어요? 니체의 주장은 절대로 포기하지 말라는 거예요. 도둑질이 나쁜지, 좋은지 이게 문제가 아니고 처음에 뭘 시도했어요? 80층에 있는 귀금속을 내 것으로 만들겠다는 욕망이 있었잖아요. 그 욕망에 충실하란 말입니다. 이건 귀금속이 탐이 나는 게 아니에요.
니체에 의하면 도둑질은 죄가 아니에요. 나쁜 짓도 아니고. 80층에 있다고 가상되는 귀금속을 갖고 싶다는 욕망이 있잖아요. 그 욕망에 책임을 다해야 돼요. 그런데 갑자기 도둑이 로또 40억에 당첨됐다. 80층 아파트를 살 돈이 있어도 그 사람은 40억 은행에 저축해놓고 80층에 기어 올라가야 돼요. 니체에 의하면.
우리나라 유명한 등산가 엄홍길이 있죠. 엄홍길이 에베레스트에 올라가면 산신령 있어요? 없지요. 그런데 왜 올라갑니까? 산이 거기 있으니까. 전용렬 목사님이 암벽 타는 이유가 뭡니까? 자기 욕망에 충실한 거예요. 자기 욕망에 책임을 다하는 겁니다. 남자가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베야지. 이게 바로 니체 철학이에요. 이건 먹고 사는 문제가 아닙니다. 굶어죽으면 그만이지. 굶어죽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힘에 대한 의지다. 니체 철학을 한 마디로 하면, 힘을 향한 힘에 의한 의지. 그 힘에 의한 의지에 충실한 사람을 위버멘쉬, 다시 말해서 초인.
니체는 인간을 두 종류로 봅니다. 초인과 비속한 사람. 비속한 사람은 비겁한 사람이에요. 용감한 사람은 뭐냐? 니체 철학은 설명을 잘 들어야 돼요. 용감한 사람은 이기는 사람이 아니에요. 어떤 마라톤 선수가 마라톤 경기에서 버스 타고 2등한 사람이 있어요. 나중에 걸려서 2등 취소되고 선수자격 박탈된 사람이 있는데, 마라톤은 옆길로 새면 안 돼요. 가는 궤도가 있어야 돼요. 그걸 코드라 해요.
예를 들면 장기 말에 차, 포, 마, 상, 졸이 있는데 니체가 장기 이야기했는데 장기에는 글자에 따라서 코드화돼있어요. 니체 철학은 코드화를 없애버린 겁니다. 동양 쪽으로 이야기하면 장기가 아니고 바둑이에요. 장기는 가는 길이 규칙화돼있지만 바둑은 놓는 순간 그 자체에 의미가 생기는 거예요. 놓는 순간 저쪽과 새로운 인과관계가 형성된다고. 그래서 바둑은 존재가 전략적 존재에요. 하나 둘 때마다 전체를 다시 살펴야 되니까.
인간은 바둑알이지 장기알이 아니에요. 누가 너한테 이 길로 가라, 저 길로 가라고 지시하는 그 사람, 권력도 나쁘고, 따라가는 순종하는 너도 나쁘고. 너는 왜 자신을 장기알로 어떻게 살지 묻느냐 말이죠. 네 속의 욕망, 힘에 의한 의지가 충천하고 있는데. 신은 죽었어. 신이 안 죽으면 네가 신이 안 돼. 신은 절대 개념이기 때문에 존재적 의미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너에게 명령하는 자가 없다는 말입니다. 네가 신이기 때문에.
보통 인간들이 신을 이야기할 때 신은 누가 만들었느냐고 말 안 하지요. 신은 없어졌다고 이야기하지 않아요. 그 이유가, 인간이 눈에 보이는 자연세계를 통해서 신의 의미를 규명하기 때문에 그래요. 자연아, 너는 어디서 왔니? 어디로 사라지니? 자연에게는 그렇게 물을 수 있지만 그 자연을 만든 최종 원인자한테 물을 수 없잖아요. 원인도 없고 결과도 없는 게 신의 개념이라면 그 신의 개념은 죽었다는 겁니다. 왜? 이미 인간들이 신에 의해서 학살당하고 매장됐기 때문에 자기가 신인 줄 모르고 스스로 자기를 죽이다보니까 신이 따로 있어서 그쪽에서 명령하고 그쪽만 영원하다고 그동안 플라톤에 의해서 오해해왔다는 거예요.
내가 춤춘다면 이야기하지 말고 내 안에 신이 춤춘다고 이야기하면 될 걸 왜 복잡하게 내가 춤추는데 그렇게 생각하느냐 말이에요. 또 니체는 이야기합니다. 10분 전에 내가 물을 마셨지. 그렇게 생각하지 말라는 거예요. 과거는 이미 지나간 거고 미래는 오지 않았다고 생각하면 안 되고, 지금 내가 과거를 만들고 미래를 새롭게 만들어낸다고 생각하라는 거예요. 10분 전에 물을 마셨다고 하지 말고 10분 전에 물을 마신 것은 지금 내가 있기 위해서 있어야 했다고 생각하란 겁니다.
내가 신이라고 생각하면 하나도 어렵지 않아요. 모든 만물은 신을 위해서 있잖아요. 그 신 자리가 내 자리라니까. 화산이 터져서 밑에 살던 이층집이 불타버리고 없다. 그렇게 생각하지 말고 지금 집 없는 나를 위해서 화산은 터져야 했다고 보라는 겁니다.
이걸 다시 정리하면, 철저하게 무슨 세계? 나는 비리비리하고 나는 아무것도 아니고 진짜 좋은 것은 다른 곳에 있다는 생각을 아예 하지 마시란 그 말이에요. 지금 내가 가장 좋은 건데 자꾸 다른 좋다는 걸 찾게 되면 나는 부족한 게 되잖아요. 그러면 죄의식을 느끼는 거예요. 니체에 의하면. 그럼 이것이 다냐? 다가 아니죠. 내 속에 욕망이 움직이죠. 그게 힘에 의지에요. 힘에 의지가 움직이면 그게 내게 주어진 과제요, 숙제가 되는 겁니다. 그냥 자기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충실하란 말이죠.
그리고 니체는 말합니다. 자꾸 신, 신, 하나님 찾지 마라. 내가 보기에는 너희들이 그렇게 살아가고 있잖아. 본인은 그렇게 살고 있으면서 뒤늦게 벌받을까봐 신을 끌어당기는 그런 비겁한 짓을 하지 말고 네 자신에 충실해. 신이란 위선의 껍데기를 벗어버리면 네가 신이야. 바로 그거야. 이 이야기 공감 안 돼, 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그건 불교잖아요, 하는데 나중에 또 불교 깹니다.
10분 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