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0장 40절(가락-본래적 죄)160607b-이근호 목사
요한복음 10장 40절(가락-본래적 죄)160607b-이근호 목사
이름 : 충성모(IP:211.34.67.154)
요한복음 10장 40절(가락-본래적 죄)160607b-이근호 목사
요한복음 11장 해봅시다. 요한복음 11장에 아버지와 예수님이 일하시는 것은 죽음 안에서 일하심, 다시 말해서 요한복음 11장의 내용은 죽음입니다. 죽음 안에 있지 아니하면 네가 하는 모든 말은 너의 가상적인 개념에 불과하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면 나사로의 여동생, 마르다와 마리아가 예수님을 사랑했었어요. 되게 사랑했지요.
그런데 지난 낮설교에 내가 그런 이야기를 했지요. 사랑이라는 것은 목에 가시와 같이 걸리면 넘어가지 않는다고요. ‘잊어야지, 잊어야지.’ 하지만 ‘잊어야지, 잊어야지.’ 할 때마다 더 생각이 나는데요. 괜히 잊으라고 해가지고 생각이 더 나네요. 사랑이라는 게 이럴 것 같았으면 차라리 만나지 말 것을.. 그런데 만났는데 어떻게 해요. 잊지를 못하는데요. 차라리 남남 같으면 그냥 상처만 되는데 사랑했다는 그 이유 때문에 앙금이 되어가지고.. 사람이라는 게..
정신분석학이라는 학문이 그래서 실제적인 학문이 되는 거에요. 원래 칼이라는 것은 쇠라는 물질로 되어 있고 에너지를 가지고 피부를 베어서 몸에 피가 나올 때 신경세포를 건드리면 “아야!”라고 하게 되어 있지요. 이게 우리가 아는 “아야!”입니다. 그런데 칼에도 안 베이고 몸이 깨끗한데 보고 싶은 사람이 연락도 없이 가만히 있으면 왜 가슴이 아프냐 말이지요. 그런데 가슴이 아프다는 말도 안 돼요. 가슴 어느 부분이 아픈 겁니까? 어느 부분도 아니에요. 마음이 왜 아프냐 이 말이에요.
마르다, 마리아, 나사로가 예수님을 사랑해요.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이 아픈 걸 경험해보지를 못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나사로 가족의 이야기만이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의 이야기하고 똑같아요. 구원이 기쁨에 대해서 이야기하잖아요. 구원의 기쁨을 알려면 구원의 슬픔을 먼저 경험해야 돼요. 구원 때문에 당한 수모와 아픔이 있어야 돼요. ‘미쳤지, 내가 괜히 이걸 믿어가지고..’ 이런 아픔이 있어야 돼요.
그런데 구원의 아픔은 어떻게 오느냐? 이렇게 와요. 복음을 알기 때문에 복을 줄 거라는 기대가 있었는데 개코로 복음 아는 교회가 망해버리고 복음 아는 집구석이 다 날아가고 복음만 빼고 나머지는 다 없어졌어요. 그러면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라는 찬송가를 부를 때 기쁘게 불러야 되는데 아까 집사님 말대로 왜 그렇게 눈물이 나는지, 장송곡처럼 왜 그렇게 서글퍼지는지요. 찬송가에 그런 것이 있지요. “내 주여 뜻대로..” 그 노래를 부를 때 좀 씩씩하게 부르고 감사하게 불러야 되지요. 언제 그 느낌이 생기느냐 하면은 꼭 망하고 난 뒤에 후회할 만한 일이 벌어졌을 때 그렇게 청승맞게도 부르지요.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스스로 자기를 위로한답시고 그렇게 부르잖아요.
요한복음 뒷부분에 이런 게 나옵니다. “너희들이 나를 사랑하느냐?” “예.” “나는 계명만 줄게.” “뭔데요?” “사랑, 한 계명만 줄게.” 그런데 그 사랑의 개념은 미움에서 나옵니다. 네 행실이 더러워서 미움 받는 것 말고 네가 나 때문에 미움을 받게 될 거야. 미움을 받게 될 그때 너는 사랑으로 기뻐하라 이 말입니다. 너는 그렇게 기뻐할 것이다.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는데 그때 너희에게 비로소 생각지도 못한 기쁨이 있을 것이다. 요한복음 14장 끝에 보면 나와요. “기뻐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그러면 우리는 뭐라고 합니까? “에이, 말로? 말로 누가 못해?”라고 하거든요. 우리는 자꾸 실적을 원해요. 이것은 나사로, 마리아, 마르다 가족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했잖아요. 사랑을 했다고 하는데 그러면 사랑에 대해서 생각해봅시다. 여기 두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있고 마르다(또는 마리아)가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합시다. 사람들이 보기에는 남녀관계로 생각이 되는데요. 사람이 사랑을 해요. 사랑을 하게 되면 인간은 행동을 하는데 행동은 마음에서 나오잖아요. 마음의 의도에서 나옵니다. 그런데 마음의 의도에서 나온 것은 반드시 뭘 결부시키느냐 하면은 예상 결과를 결부해서 의도하게 되어있어요.
내가 사랑을 하게 되면 주님은 내 사랑을 알아줄 것이고 그러면 그 사랑을 상상해볼 때 나는 무척 기뻐할 것이므로 기쁘다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인간의 주체는 주체에서 나오는 대상과 주체가 일치될 것을 기대하면서 행동하게 되어 있습니다. 어떤 행동도 마찬가지에요. 반드시 행동을 하면 그 결과가 나오기를 바래요.
부모님께 효도할 때도 효도한다고 백숙을 해서 드렸는데 백숙을 발로 차버리린다든지 그런 것을 예상하지 않아요. “야야, 이 어려운데 이 귀한 것을 해서 줬구나. 이제부터는 내가 네 말 잘 들을게.” 이걸 기대하고 백숙을 해서 드렸는데 거기에 대해서 고맙다는 소리도 안 하고 막 짜증을 낼 때 효도할 마음이 나겠어요, 안 나겠어요? 효도할 마음이 안 나지요.
그게 바로 육의 열매에요. 그러니까 인간에게는 의로운 게 없어요. 인간은 너무 일방적이에요. 자기가 신도 아니면서 너무 일방적이에요. 예수님을 사랑하고 이 관계가 돈독하니까 이제는 예수님이 우리가 시키는 대로 다 할 거라는 생각을 갖고 있어요. 이것은 남녀관계도 마찬가지에요. 부부가 사귀다가 결혼을 했잖아요. 내가 언젠가 주례를 하게 되면 이런 이야기를 넣을 거에요. 부부가 사귀어서 결혼을 하게 되면 이제는 본격적으로 사귀어야 되는데 사귀어서 결혼했다고 그 다음부터는 안 사귀어요. 투자를 안 하는 거에요.
그러니까 사귈 때만 행복하고 결혼을 하면 행복하지 않아요. 더 사귀어야지요. 연애할 때 남자가 여자를 꺄 하고 웃게 했잖아요. 그러면 결혼을 하고 난 다음에는 배나 더 꺄르르 웃도록 만들어야지요. 직장에 가서 연구해야 돼요. ‘오늘 집에 가서 뭘 가지고 웃길까?’를 가지고 연구해야 되는데 “왔다, 애는 자나? 밥 줘.”로 끝나버린다 말이지요. ‘이제는 결혼해서 빼도박도 못할 건데 뭐..’ 이런 식으로 생각해가지고요. 그런데 여자 쪽에서는 실망을 하지요. 웃는 조건을 남편이 안 주니까 다른 데서 찾지요. 맨날 애하고 꺄르르 하면서 “아빠 밉지? 그지? 아빠 떼찌 해.” 아빠만 혼자이고 전부 엄마 편 같아요.
내가 하는 사랑을 동일성이라고 하는데 사랑은 초과입니다. 예상못한 초과.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할 때 내 범위 안에서만 사랑하기 때문에 결과도 너무나 유치하고 그래서 내가 생각하는 예상은 나의 변화를 이끌어내지를 못해요. ‘내가 지금 있는 그것으로 예수님을 사랑하면 현재 나다운 것으로 만족한다.’ 이렇게 돼요. 그러나 예수님에게서 초과적인 것이 왔을 때, 다시 말해서 예상 밖의 것이 왔을 때 그것은 나를 보고 달라져야 한다는 요구하고 똑같은 이야기입니다.
“네가 나를 사랑해? 너는 달라질 필요가 있어.” 이렇게 되는 거에요. 그렇게 해놓고 예수님이 “나는 너희를 사랑한다.”라고 이야기하는 거에요. 예수님이 보는 그 사랑의 질의 폭과 우리가 사랑하는 그 사랑의 폭이 달라요. 폭의 양이 다른 정도가 아니라 질이 달라요. 왜 그렇냐 하면은 예수님은 누구까지 아느냐 하면 아버지를 알아요. 이런 식으로 해가지고는 아버지하고 못 산다는 것을 예수님이 알아요.
베드로가 자기의 목숨을 바쳐가면서 “목숨을 바쳐서 따라가겠습니다.”라고 할 때 예수님께서 뭐라고 합니까? 베드로는 올 수 없는 거에요. 왜? 네가 보기에 너는 최선을 다한 것 같지만 내가 아는 아버지의 입장에서 볼 때 너는 천국에 들어갈 자리가 없어요. “내가 처소를 마련하게 되면 다시 올게.” 그 처소를 마련하고 오는 게 뭐냐 하면은 성령이 함께 하는 거거든요. 성령이 함께 오게 되면 베드로는 이 땅에서 원치 않는 죽음으로 가야 돼요.
그래서 자기가 원치 않는 인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고생 되게 할 거에요. 또 했고요. 누구 때문에, 누구의 이름으로 고생합니까? 예수의 이름으로 고생하는 거에요. 이 세상이 아예 정나미가 뚝 떨어지도록 만들었어요. 내가 지난 낮설교에 그런 것을 했잖아요. 이 세상에 죽치고 있을 생각을 하지 말고 이 세상을 그냥 통과하라고요. 통과하고 관통해야 되지 자꾸 이 세상에 죽 치고 살 생각을 하면서 “아파트 주세요, 아니면 장사하게 수리 좀 하게 하여주시옵소서.”라고 하는 거에요. 그냥 지나가라고 준 것을 가지고 죽 치고 퍼져가지고 앉을 생각만 한다 말이지요.
예수님이 가는 코스가 공생애지요. 그 코스대로 갑니다. 주님이 죽 치고 앉으셨습니까, 아니면 통과했습니까? 주님이 통과했다면 우리도 같이 통과하는 거에요. “세상 구경 한 번 잘했네. 지옥 구경 한 번 잘했네.” 하고 그냥 통과하면 됩니다. 왜? 나그네니까요. 우리의 본향은 따로 있어요. 거기에는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가게 하십니다. 주님이 우리를 사랑했다는 말은 우리가 주님을 붙잡는 그 완력의 힘은 늘 미약하고 환경이 바뀌면 언제든지 손을 놓아 버려요.
그런데 우리가 손을 놓았지만 우리의 멱살을 쥐고 있는 손은 절대 놓지 않거든요. 주님이 우리를 쥐고 있는 이 완력이 얼마나 강한지 로마서 8장에 보면 “환난이나 핍박이나 곤고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협이나 칼이나 어떤 권세자, 마귀나 어떤 정치적인, 북한이냐 남한이냐 어떤 것이라도 너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그걸 어떻게 아는가?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서 죽고 사흘 만에 살아난 것의 의미를 네가 수용한다면 너는 끊어지지 않는 사람이란 말입니다.
그걸 안다는 것을 인식론이라고 하는데요. 주님에 대한 인식은 두 가지가 겸비되어야 돼요. 예수님이 주신 인식과 내가 주님을 사랑해서 내가 이익을 보겠다고 하는 인식, 둘 다를 항상 갖고 있어야 돼요. 만약에 하나를 갖고 있어버리면 이게 내 욕심인지 주의 뜻인지를 몰라요. 둘 다가 있어 병행되어서 죽을 때까지 계속 가면서 서로 다투어야 되고 서로 싸워야 돼요. 내부적인 투쟁이 일어나야 됩니다. 태어날 때부터 금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나야 되는데..
어떤 데에 보니까 돌잔치를 하는데 애가 기어이 잡겠다는 것을 못 잡게 책상까지 옮겨가면서 (잡겠다는 것은 따로 있는데) 마이크를 잡으라는 거에요. 마이크를 잡으라는 것은 아나운서가 되라는 거에요. 놀라운 것은 애가 그 역경과 고난을 딛고 기어이 골프공을 잡았어요. 그걸 무를 수도 없어요. 많은 증인들이 있거든요. 그렇다고 애를 때려가지고 할 수도 없고요. 꼭 우리가 신앙생활하는 것과 똑같아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로마서 8장에 이야기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마이크를 쥐게 하겠다고 하는 거에요. 그러면서 “내가 주님을 사랑하잖아요.”라고 하는 거에요. “주님 사랑해서 헌금을 많이 했으니까 이번에는 눈 감고 내 뜻대로 해주세요.” 초과를 하기 위해서 우리는 울어야 됩니다. 울어야 웃음이 나와요. 그렇게 우리가 잡겠다는 것은 무엇을 피하기 위한 것이냐 하면은 요한복음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