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강-YouTube강의(권력과 욕망)160607-이 근호 목사
157강-YouTube강의(권력과 욕망)160607-이 근호 목사
이름 : 이미아(IP:122.43.165.245)
157강-YouTube강의(권력과 욕망)160607-이 근호 목사
제 157강, 제목은 ‘권력과 욕망’입니다. 사람이 권력을 안 좋아한다고 하지만 어떤 움직임이 되면 거기서 권력이 행사됩니다. 마치 배에 탄 사람은 배가 가만히 있는 것 같지만 뱃전에 나와서 앞에 보게 되면 물살이 갈라지죠. 사람이 움직이게 된다는 것은 그 선에, 그 현장에 있는 권력이라는 바다를 한 척의 배가 되어서 쫙쫙 쪼개는 그러한 모습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보다 못난 사람한테는 어깨에 힘이 들어가고 큰소리 치고 싶고, 딱 초반에 보자마자 잘 살고, 힘깨나 있고, 많이 배웠고, 말해봐야 말빨이 안 선다 싶으면 은근히 움츠려지죠. 말에 힘이 빠지고, 주춤주춤하게 되고, 더듬거리게 되고, 이미 우리는 권력의 현장에 와있습니다. 특히 남자끼리 있을 때는 큰소리치다가 예상 밖의 아름다운 미인이 앞에 오게 되면 갑자기 벙어리가 되든지, 졸지에 말더듬이가 되죠.
그게 뭐냐 하면 에스더에 나오는 아름다움, 미모의 힘이 온 천하를, 아하수에로 왕, 바사나라를 총괄하는 그 왕마저도 그 에스더의 미모에 주눅 들게 만드는, 그게 바로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리는 이미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의 필드, 힘의 장場 속에 놓여있습니다. 그래서 사람과 사람이 만날 때는 몸체, 두 개 달랑 만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휘하에 있는, 그 사람이 거느리고 데리고 오는 그 배경에 있는 힘과, 그 사람을 마주하고 있는 내가 구축하고 있는 힘과 이게 보이지 않는 쟁취, 또는 쟁탈전, 또는 싸움장, 투쟁장으로써 현실이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가장된 사람이 직장에서는 스트레스로 바짝 긴장을 하죠. 그곳은 자기가 대장이 아닌 권력의 장이기 때문에. 그러다 퇴근해서 집에 오게 되면 큰소리 치고 그냥 푹 퍼집니다. 퍼져도 전혀 스트레스 받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가정에서는 가장이 대장이니까. 따라서 사람들은 어떤 사람을 볼 때, 저 사람 한 사람이 간다고 하지만 사실은 그 배후에 권력을 몰고 다니고 있다. 이렇게 보셔야 됩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할 때, 사람들은 달랑 이 육신이 어떤 결심을 해서 믿는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실은 그런 게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생각하고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도 내가 가지고 있는 휘하의 모든 힘들을 총동원해서 예수님에게 다가섭니다.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니까, 예수님에게마저 자기 가치를 유지하려는 심보가, 권력을 그동안 모으면서 한 심보와 동일한 심보가 그 현장에서 튀어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예수님 저는 지금껏 이렇게 살아왔습니다.” 앞에 하나 붙인다면 “지금껏 나는 이렇게 잘난 존재로 살아왔습니다.” 교인들이 교회 갈 때, 하나님도 만나지만 목사님도 만나고 같은 교인들도 만나죠. 만났을 때, 그냥 빈 몸으로 만나지 않습니다. ‘나 이정도로 괜찮은 존재입니다.’ 라는 것을 앞장세우면서 교인들을 만나게 되어 있어요.
그렇다면 목사, 장로, 장립집사, 집사라는 그것이 권력을 지탱하는 그러한 형틀, 틀로써, 교회에서 자기 자존심의 명함으로서 권력을 부각시키는 기능을 발휘하게 되어 있습니다. 자, 그렇다면 이러한 인간들의 본심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왔을 때도 그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유감없이 발휘되었습니다. 그 중의 대표자들이 누구냐 하면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인데, 예수님에게 나올 때 빈손으로 나오지 않았습니다. 권력을 동원해서 나왔습니다.
쉬운 말로 그걸 자기 의라고 합니다. 조금 보태면 가치, 자기 존재감. 인간인 이상 다 그런 것이 있죠.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세상군, 인간그룹을 의식하시고 항상 일하시고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누가복음 7장에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한 어떤 세리들과 식사를 한 적이 있습니다. 7장 36절에 한 바리새인이 예수께 자기와 함께 잡수시기를 청해서, 식사 초대받아서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갔습니다.
갔는데, 거기에 바리새인만 있었던 것이 아니고, 누가 거기에 끼어들었느냐 하면 37절에 “그 동네에 죄인인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으셨음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38절,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 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누가복음 7장에서 그 광경을 우리가 이렇게 상상할 수 있습니다. 초대한 사람은 바리새인이고 초대받은 사람은 예수님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주인공이고 그 예수님과 관련 있는 사람은 바리새인 그 사람뿐이라고 그렇게 생각할 겁니다. 그런데 이 장면에서 누구하나 끼어듭니다. 여인이 하나 끼어드는데, 그 여인은 그 마을에서 이미 죄지은 여인이라고 소문이 파다한 그러한 여인이 끼어들었습니다.
자, 그 뒤에 스토리는 어떻게 되겠느냐 하면, 바리새인도 나름대로 예수님 섬기고 있고, 그리고 이 여인도 나름대로 예수 섬기고 있는데, 정말 하나님보시기에, 천국에 가서도, 하늘나라에서 심판할 때에, 하나님이 판정을 내릴 때에, 둘 중에 누가 천국에 합당한가를, 그걸 벌써 미리 와서 판가름하시는 대목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바리새인은 그냥 보통 사람입니다. 보통 사람은 누가 자기보고 죄인이라고 하면 기분나빠합니다. 항상, 평소에 나는 죄인하고 관계없는 의인으로 살아갑니다. 그 의인중의 하나가 예수님을 존중해서, 존경해서 예수님께 식사대접 할 정도로, 이 정도로 괜찮은 존재로 자기 자신을 내세우는 것. 아까 이야기한대로 인간은 그냥 홀로 있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이정도로 괜찮은 존재라는 것에 둘러싸인 채 예수 앞에 나온 사람이 바리새인입니다.
그렇다면 이 바리새인을 제가 아까 보통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 보통사람 중에 우리도 항상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되죠. 우리가 그냥 무심코 “예수님 존경합니다. 식사대접 할게요.” 이거는 하등의 문제가 없다고 생각할 겁니다. 그러나 여기서 이 본문을 주의해야 합니다. 예수님과 일치되는 심성을 가진 사람은 바리새인이 아닙니다.
예수님과 일치되는 심성을 가진 사람, 또는 달리 이야기해서 예수님이 갖고 있는 마음이 어떤 마음인가를 어떤 여인을 통해서, 우리에게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으로 예수님의 심성을 드러내는 사람은 바로 죄 많은 여인입니다. 그래서 이 성경 본문은 우리가 이정도하면 괜찮은 존재라고 하는 나의 존재를 무엇으로 바꿔야 할 필요가 있는가 하면 바로 죄 많은 여인의 심정으로 바꿔주지 아니하면 그것은 예수의 심정을 품지 않은 사람이라고 단정 내려도 좋습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마음을 털어놓는데 죄 많은 연인을 통해서 털어놓습니다. 여인은 권력을 포기했습니다. 자기가 가진 귀한 것, 향유라는 것은 그 당시에 귀한 것입니다. 귀한 것을 소유하면 귀한 존재가 되는 것은 뻔한 거죠. 그 귀한 것을 가지면 귀한 존재인데, 그것을 주님한테 내놓으면서 생글생글 웃지를 않습니다. 방글방글 웃지를 않습니다.
어떻게 내놓으냐 하면 울면서 향유로 예수님의 발에 그것을 적시고, 그 향유에 자기 눈물을 섞어 넣는 겁니다. 자기 머리털로 입 맞추면서 주님의 더러운 발을 씻깁니다. 자기를 깨끗하게 하는 향수가 주님 만나고 난 뒤에, “이 향수는 나를 위해서 씻을 향수가 아니고 주님을 향기롭게 해야 될, 주님을 깨끗하게 해야 할 향수에 불과합니다. 내 몸을 던져서 주님만 깨끗하게 된다면 저는 여한이 없습니다.” 하는 식이죠.
이 심정은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보다 더 죄인 되셔서 무가치한 우리를 씻기시는 그 모습을 이 여인을 통해서 예수님의 본질과 예수님의 마음의 뜻을 우리에게 이렇게 전달했습니다. 권력을 포기하세요. 휘하에 데리고 다니는 잘난 것, 자기 가치 버리시고, 차라리 그 죄를 가지고 그대로 주님 앞에, 주님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 자기 죄를 다 주님 발 앞에 쏟으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내 향수를 가진 이것이 나의 죄가 된다면, 이 죄를 위해서 주께서 십자가에 해결했습니다.” 라는 이 고백, 이것이 오늘날 성도가 가진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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