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강-창 7장 13-24절(심판안의 방주)160608-이 근호 목사
42강-창 7장 13-24절(심판안의 방주)160608-이 근호 목사
이름 : 오용익(IP:125.136.25.28)
42강-창 7장 13-24절(심판안의 방주)160608-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7장 13-24절입니다. 구약성경 9페이지입니다.
창 7:13-24
“곧 그 날에 노아와 그의 아들 셈, 함, 야벳과 노아의 처와 세자부가 다 방주로 들어갔고 그들과 모든 들짐승이 그 종류대로, 모든 육축이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이 그 종류대로, 모든 새 곧 각양의 새가 그 종류대로 무릇 기식이 있는 육체가 둘씩 노아에게 나아와 방주로 들어갔으니 들어간 것들은 모든 것의 암 수라 하나님이 그에게 명하신대로 들어가매 여호와께서 그를 닫아 넣으시니라 홍수가 땅에 사십일을 있었는지라 물이 많아져 방주가 땅에서 떠올랐고 물이 더 많아져 땅에 창일하매 방주가 물위에 떠 다녔으며 물이 땅에 더욱 창일하매 천하에 높은 산이 다 덮였더니 물이 불어서 십 오 규빗이 오르매 산들이 덮인지라 땅위에 움직이는 생물이 다 죽었으니 곧 새와 육축과 들짐승과 땅에 기는 모든 것과 모든 사람이라 육지에 있어 코로 생물의 기식을 호흡하는 것은 다 죽었더라 지면의 모든 생물을 쓸어버리시니 곧 사람과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라 이들은 땅에서 쓸어버림을 당하였으되 홀로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던 자만 남았더라 물이 일백 오십일을 땅에 창일하였더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서 방주 안에 있는, 사실은 있다고 할 수 없고 갇혀 있는 노아 입장에서는 어떤 수를 써 볼 새도 없습니다. 방주 안에서 아무리 통성기도를 해도 바깥 상황은 달라질 수가 없고 하나님의 계획대로 차질 없이 진행이 됩니다. 2월 10일에 방주에 들어갔고, 2월 17일에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3월 26일에 비가 멈췄고 7월 17일에 방주가 아라랏 산에 머물렀습니다. 그런 식으로 해서 노아방주는 1년 10일 만에 모든 것이 마감이 됩니다.
오늘 본문에 12절에 비가 40주야 땅에 쏟아졌다, 24절에 물이 150일을 땅에 창일했다, 이러한 시간에 입각한 스케줄은 방주 안에 있는 노아의 계획도 아니고, 기대했던 바도 아니고, 그냥 노아는 대책 없이 앉아 있는 겁니다. 이것은 나중에 노아가 새로운 세상, 방주 바깥에 나와서 이룩할 새로운 세계의 진리체계가 되고, 도덕이 되고, 윤리가 되는 겁니다. 아무것도 내가 할 것이 없다는 것, 꽉 짜인 바깥의 상황은 방주를 중심으로 뺑뺑 돌면서 이것은 방주 안에 있는 노아의 지시를 따르는 것이 아니고 방주에 있는, 구원받았다고 자처하는 그 구원받은 자가 명령하는 것이 아니고 그 명령은 바깥에서 이루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노아의 형편은 모든 자기의 생존과 운명과 팔자는 바깥의 조치에 따라서 결정된다는 사실을 본인들이 체험하고 있고 알고 있다는 사실이에요. 쉽게 말해서, 하나님은 저 위에 계시고, 그리고 하나님과 자기들 사이에 물이 둘려 채워져 있고 그리고 계란노른자처럼 방주 안에 들어 있습니다. 이 말은 노아 쪽에서 하나님을 직접 대면하거나 교제할 수 없는 처지에 있다는 거지요.
왜냐하면 주변에 둘린 물이 그냥 물이 아니고 심판하기 위한 용도로 바깥에 둘려 쳐있기에 그렇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심판의 잠겨 있다, 심판에 둘러싸여 있다, 하나님의 저주와 조치로 하나님과 단절이 되어서 이 심판을 건너뛰어서 직접 하나님과 상대할 수 없는 처지에 있다고 보시면 되는 겁니다. 보통 성경을 시답지 않게 여기고 인간 속에 있는 양심에 기초해서, 또는 이성에 기초해서 신을 찾고, 조물주를 찾고, 천지신명을 찾고, 위대한 어떤 분 어떤 창조주를 찾는 것은 다 헛방입니다. 알라 신, 그건 ‘알라’(어린아이)만도 못한 신이에요. 무슨 그런 신이 다 있어요. 뭘 하나님과 직접 교제를 해요?
그런 것은 만화에서나 나오는 공상과학이라고 보시면 되는 겁니다. 인간이 깊이 생각해서 계속 몰두해서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그 개념의 끝, 그 끝의 또 끝, 그 개념의 끝, 그 다음에 뭐가 있느냐를 생각하는 것. 가락교회 갔더니 김중우 집사님이 저에게 그런 질문을 해요. “이간이 골똘하게, 깊게 생각할 때 끝까지 생각하는 그 끝 너머에 뭐가 있는 지 아십니까?” 그래서 제가 아는 대로 답했지요. “그 끝 너머의 끝에 가면 그 너머가 있고, 또 그 너머에 도착하면 또 도달하기 전에는 안보이던 너머가 또 있지요.”
그걸 강박증이라 합니다. 결핍을 메울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욕망하는 것, 인간의 욕망은 달성하면 안 되거든요. 계속 욕망을 유발할 수 있는 미끼가 그 현장에 갔을 때 새삼스럽게 발견되는 거예요. 특히 사업하는 사람들, 계속 뭘 벌이잖아요. 벌이고 또 벌이고, 이 쯤 하면 만족하겠지, 했던 것은 그 일을 벌이기 전에 했던 일방적 생각이고 일단 일을 벌이고 보면, 그래서 막상 어떤 위치에 있게 되면 그 자리에 왔기 때문에 비로소 새롭게 다가오는 욕망의 대상이 거기에 등장하는 겁니다.
이것은 사업뿐만 아니고 인간이 흔히 말하는 종교생활,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에요. 어디까지 선할 수 있고, 어디까지 착할 수가 있고, 어디까지 경건할 수 있고 거룩할 수 있는가? 이것은 치열한 예민함이 없으면 그것을 뚫을 수가 없어요. 뚫는 것은 결국 실패하겠지만 치열한 예민함, 선과 악에 대해서 치열하게 계속해서 파고 들어가려면 거기에 욕망이라는 부정적 요소가 거들어줘야 됩니다. 뒤에서 밀어줘야 돼요. 내 욕망이라는 죄가 밀어줘야 경건이라는 극치를 달릴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정신질환입니다. 정신병이에요.
‘저 산 너머에 하나님 계시겠지. 저 산 너머에서 예수님이 방긋 웃으시겠지.’ 그런 것은 없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의자에 교황처럼 앉아 계시겠지.’ 그런 것 없습니다. 삼위일체라는 아이디어가 바로 인간의 강박증에서 나온 거예요. 갇혔던 동굴의 벽화라고 보시면 됩니다. 동굴에 갇혀 있고 동굴 밖에는 하나님의 물 심판이 둘려 쳐 있고 그 너머에 하나님이 계시는데 어느 인간도 자력으로 그 심판의 폭과 두께를 통과할 수가 없어요.
그런데 자꾸 인간은 자기 영혼에 어떤 날개를 달아서, 훨훨 날아서 이 질곡과 고통이 있는 세계를 드론처럼 내다보면서 건너뛰기를 원하는 겁니다. ‘마법의 성’이라는 노래를 보면 나와요. 자기가 고대하는 공주가 잡혀있는 곳으로 달려가서 영웅이 되어서 공주를 건져내고 공주와 함께 행복하게 살겠다는 가사입니다. 그걸 위해서 간곡히 기도하면서. 이것이 인간의 역사 속에 온 벽화를 장식하는 낙서입니다. 그 낙서로 되어 있는 동화의 세계에요. 환상의 세계, 허구의 세계입니다.
자기가 상상해서 그려낸 드라마나 연극작품, 그걸 보면서 오늘도 희망으로 보람찬 하루를 보내고 있지요. 열심히 하게 되면 낙을 본다는 겁니다. 희망이 나를 살려낸다는 거예요. 그러나 오늘 본문 창세기 7장에 보면 희망 없습니다. 2월 10일, 2월 17일, 3월 26일, 7월 17일, 스케줄 쫙 짜인 것, 이 시간의 스케줄은 노아가 애써서 만들어낸 것이 아니에요. 이것은 노아와 전혀 상관없이 하나님의 계획 따라 움직이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시간은 어디에 있는가? 시간은 심판 안에 있고 심판 안의 성질, 성격, 심판의 질이 시간의 성분입니다.
그래서 인간중심의 시간 따로 있고요, 나 중심의 시간이 따로 있는데 그걸 가지고 기억이라고 합니다. 내 스케줄 따로 있고 원래 하나님의 시간과 공간은 인간이 생각하는 그런 내용을 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심판의 스케줄을 내용으로 품어서 시간이 흐르고 공간이 같이 병행해서 달라지고 있습니다. 다시 한 번 정리한다면, 하나님의 계획에 의하면 인간이 이 땅에서 무슨 짓을 해도 전혀 인간의 운명과 팔자는 달라지지 않는다, 그겁니다.
인간이 만든 법, 인간의 윤리와 도덕, 양심이라는 것, 그것은 인간이 자폐적 증세처럼 폐쇄된 공간을 영원한 자기 공간, 자기 현실이라고 우겨요. 공간이라는 것은 공간 바깥에 있는 심판이라는 공간과 교류하면서 그게 깨지게 되어 있는데 인간은 자기가 생각하는, 자기가 살아남기 위한 현실 바깥이 심판으로 둘러쳐 있다는 것, 빈틈없이 꽉 둘려 쳐져 있다는 것을 인정을 안 해요. 인정을 안 하니까 계속 자기 자신이 살고자 희망하는 그 공간을 상상해서 자꾸 넓혀보는 거예요.
개념이 어디 있는가? 개념이 어디 있는가, 라고 내뱉는 순간 자기가 생각하는 그 범주가 같은 속도로 점점 넓혀지니까 아무리 너머를 찾아도 그 너머를 찾는 내 노력으로 인하여 내가 생각하는 범위가 그만큼 넓어졌기 때문에 갇혀 있기는 마찬가지인거예요. 여러분이 대낮에 그림자가 따라온다고 그것이 싫어서 그림자를 떼 내면 그림자가 떨어져 나갑니까? ‘어딜 자꾸 따라와?’ 해도 그림자는 그런 몸짓조차 내 그림자가 돼요. 자기 그림자를 털어내려고 떨치는 그 모양까지 그림자가 따라하고 있는데?
이게 혈연관계입니다. 다른 것은 다 내 맘대로 뗄 수 있어도 한 번 혈연관계가 되면 어쩔 수가 없어요. 그러면 우리는 “질식해서 못살겠습니다. 그것이 현실이라고 성경에 나와 있지만 현실이라고 우리가 기쁨으로 받아들여지지가 않습니다. 그러면 너무 답답할 것 같고 못살 것 같습니다. 어떻게 뚫을 수가 없습니까?” 아, 참! 교회 나오면서 그런 마음을 갖는다는 것은 정말 성도 맞습니다. 세상 사람과 다릅니다. 세상 사람은 뚫을 생각을 안 하고 이 세상에 죽치고 살 생각을 하지요.
“답답해서 못살겠다. 뚫어보자.” 이것은 뭔가 감이 왔기에 뚫어보자는 거예요. 갇혀 있는 이게 다가 아니라는 거예요.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열심히 살아갑니다. 무엇 때문에? 그냥 눈에 보이는 세계 안에서 만족스럽게 살면 그걸로 행복이 되었다는 거예요. 그러면 물어요. “안 답답해?” “뭐가 답답해? 그냥 살다가 죽으면 그만이지.” 아니에요. 지금 심판으로 둘러쳐져 있고 심판을 통과해야 하나님을 만나요.
그냥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안 만나져요. 심판을 통과한 자만 하나님을 만나는데 어느 누구도 심판을 통과할 수가 없기에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습니다. 만날 수가 없으니까 여기는 우상만 들썩거려요. 가짜 신만 “풍문으로 들었소.” 하는 그 가짜 신들만 성경이용하고, 경전이용해서, 코란 이용해서 그저 신들만 우글우글 거려요. 어떤 것을 해도 못 빠져나오기는 마찬가지에요.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면 이 세상을 뚫고 우주선 타고 심판까지 통과해서 하나님 계시는 그 나라에 갈 수 있습니까, 라고 묻게 되면 그 질문 자체가 성립될 수 없는 질문입니다. 우리 쪽에서 뚫어가는 것이 아니에요. 저쪽에서 뚫어요. 저쪽에서 뚫는데 저쪽에서 뚫는 방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심판은 멈추고 우리는 그 안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고 심판과 우리가 교류하고 있습니다. 이게 방법이에요. 교류하는 거예요.
노아와 그 바깥의 물, 물과 방주가 서로 주고받고 교류를 하기 위한 심판이에요. 그냥 멈추고 있는 심판이 아닙니다. 왜 우리가 멈추고 있는 심판을 생각하느냐 하면, 우리가 과학적 사고방식을 배웠기 때문에 뭐든지 나는 주관이고 내 바깥에 있는 것을 객관화시킵니다. 객관적인 것은 멈춰있고 주관은 객관적인 것을 해석하고 이해해서 적용해서 살아간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교류한다는 생각을 별로 안 해봤어요.
나는 안 달라질 테니까 너는 달라지라고 하는데 같이 달라지는 겁니다. 집안 식구도 마찬가지에요. 부모가 애를 키우는 게 아니에요. 애가 커나가는 동안 함께 하는 가족도 그 애 때문에 엄청 달라질걸요? 그렇게 에헴, 하면서 체면만 차리는 가장행세를 해도 애가 이유식 먹으려고 입 벌리는 것을 보면 막 예뻐 죽지요. 에헴, 에헴, 하다가도 애만 보면 절로 입이 벌어져서 웃음이 나온다는 말은 이미 영향을 받고 있는 겁니다. 서로 교류하고 있는 거예요. 언제까지 점잖은 체 할 수 없고.
교도소 안에서도 의리가 있어요. 그렇게 악한 인간들이 모인 곳인데 거기서도 의리가 있고, 질서가 있고 “양심대로 해.” 그렇게 합니다. 교도소 바깥에서 양심대로 안 해놓고 저희들끼리 양심대로 하래요. 서로가 영향을 받습니다. 예수님은 객관적이고 우리가 믿는 게 아니에요. 예수님 살아 있고 우리도 살아 있습니다. 그 살아 있는 두 대상이 서로 교류하면서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겁니다.
자, 그러면 문제는 어떻게 교류하느냐, 하는 겁니다. 교류 하는 방법이 뭐냐? 교류하는 방법은 우리의 본질을 다시 한 번 돌아보도록 바깥의 심판 층에서 우리에게 작용을 하는 겁니다. 그게 베드로후서 3장 5절에 나옵니다. 베드로후서 3장 5절을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저희가 부러 잊으려 함이로다.”
여기서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과학과는 전혀 딴판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물로 만들어졌다는 거예요. 물론 인체의 70퍼센트가 물이고 진화론에서는, 물에서 플랑크톤이 나오고 우주에 있는 아미노산이 결합이 되어서 단백질이 되고 단백질이 결합해서 DNA가 되고 그 DNA의 자기복제의 의해서 생명체로 진화하는데 57억년이 걸렸고 지구의 역사가 57억년라고 설명해요. 아미노산의 죽 같은 상태에 방전이나 전기에너지가 들어오면 거기서 예상 밖의 단백질이 등장한다고도 하고. 그래서 수조 원을 써가면서 화성에 물이 있는지 찾고 있어요. 아주 난리에요. 물이 있으면 생명이 있을 것이라고 보는 거예요.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에요.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는 것은, 처음부터 인간은 내가 어디에서 만들어졌고, 왜 만들어졌고, 재료가 무엇인지도 모른다는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하는가? 교류가 되어야 돼요. 인간이 있는 곳과 인간의 바깥을 형성하는 상황이 교류하는데 그 교류하는 포인트가, 교류하게 하는 시한폭탄, 어떤 시발 점 같은 것이 선악과였고, 선악과 따먹음으로 죄를 지었고, 죄로 말미암아 땅이 저주를 받게 되었으며 그 저주받는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물 심판을 준비했고 그 물 심판으로 말미암아 세상을 전부 다 물로 전멸시킴으로서 물로 만들어졌다는 거예요.
심판의 재료가 처음부터 창조의 재료가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 뜻이에요. 베드로후서 3장 5절의 말씀이. 그러니까 네가 심판의 자리에 있지 않으면 네가 어떻게 만들어졌으며 누굴 위해 만들어졌으며 재료가 무엇인지를 모른다는 겁니다. 창세기 2장에 보면 인간은 흙으로 만들었어요. 그래서 흙에서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해버리면 뭐가 문제냐 하면, 왜 흙으로 만든 것이 영원하지 않은가, 하는 그 문제가 풀리지를 않아요.
흙에서 만들었기에 영원히 죽지 않는다, 라는 논리는 성립되지 않아요. 그러면, 흙에서 만들었으면 도로 흙으로 죽는 수가 있어, 라고 만약에 하나님이 이야기한다면 “그럴 것 같으면 애초부터 흙에서 만들지도 말지 왜 만들어놓고 도로 흙으로 돌아갑니까?”라는 질문이 또 성립이 돼요. 내 질문이 더 어렵다. 제가 하는 말은 이런 뜻이에요. 뭔가 되어진 것으로 완료라고 보지 마시고 어디에서 무슨 의미로 만들어졌는가를 알려면 그냥 아는 방법은 없고 반드시 죄를 지어야 된다는 겁니다.
빵꾸가 나야 돼요. 우리 존재가 찢어져야 되고 구멍이 나야 돼요. 해체 돼야 돼요. 사람은 죽기 위해서 태어났습니다. 그 구멍을 십자가리벳으로 막을 때 비로소 우리는 본래 나의 재료를 찾았고 본래 나의 의미를 찾았습니다. 골로새서 1장 16절의 말씀,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모든 만물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님을 위해서 만들었어요.
그런데 그 사실은 우리가 지식으로 아는 게 아닙니다. 그 사실이 우리 바깥에서 외부를 차지한다면 그 외부는 “내가 믿어줄게요.”라는 객관적사실로 있는 것이 아니고 그것이 우리와 교류가 되면서 나의 주관은 객관이라 여겼던 하나님의 진리에 의해서 파 먹히고 잠식되고 덮쳐지게 되는 겁니다. 십자가로 구원받는다. 굉장히 간단하죠. 어느 교회나 다 그렇게 이야기해요. 다 지붕위에 십자가 있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생각합니다. 십자가를 객관화해서 대상으로 만들고 나는 주관이고, 믿어주면 되지, 그렇게 하거든요.
그런데 그게 아니에요. 그 십자가가 나를 삼키고 결국에는 나를 죽여 버립니다.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게 하는 그 교류작용, 심판과 그 안에 잠식되어 있는 교류작용이 바로 십자가의 능력이에요. 주님에 의해서 잠식되어서 이제는 십자가에 의미로서 새롭게 창조되고 십자가가 우리의 재료가 되는 겁니다. 물로써 심판이 철저하고 빈틈없이 짜인 채로 노아방주를 둘러쳐 있습니다. 시간은 어디를 흐르는가? 물속에 흐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방주는 시간이 흐르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할 게 없어요. 이 말은 극단적이지만 아주 단편적으로 확고하게 알아야 돼요. 그게 뭐냐? 인간이 방주 안에서 거짓말하고 간음하고 죄 짓는 것, 전혀 방주안의 운명과 팔자와 무관합니다. 방주 안에서 춤추고 노래하고, 방주를 노래방으로 삼아서 열곡 내질러도 천국 가는데 아무 지장 없어요. 방주 안에서 그렇게 맘대로 해도 되는데 왜 그렇게 잠잠하게 있는가? 사실은 이렇게 됩니다. 교류라는 것이 그만큼 중요해요.
물이 있는, 방주를 둘러치고 있는 심판은 방주 안의 사건과 관계없이 계속 둘러치고 있어요. 노아가 방주 안에서 퉁퉁 층간소음을 일으킨다고 해서 물 쪽에서 갑자기 “너 조용히 하라고 했지?” 그런 것이 없습니다. 어떤 짓을 해도 무관해요. 포위되어 있을 뿐이지 포위되어 있는 그 안에서 어떤 짓을 해도 주께서 물을 다루는 것과 아무 관계없습니다. 그런데 물로써 만들어진 그 방주 바깥의 상황, 점점 더 물이 차다가 물이 빠지고, 다시 마른 땅이 나오고, 방주에서 비둘기 보내고, 또 한 번 더 보내자 다시 돌아오지 않는 사태가 일어나는 이것은, 인간내부를 향하여 주님 쪽에서 방주 쪽으로 뭔가 목적을 겨냥해서 찾아오고 있는 어떤 경로를 설정하고 있는 거예요.
두 번의 설교에서 분명히 이야기했습니다. 방주 안에 뭐가 있는가 하면, 정결한 짐승이 있어요. 그 방주 안에 정결한 짐승을 바깥으로 끄집어내서 그동안 방주와 그 바깥의 심판의 물과 교류했던 것을 총 정리하는 이벤트를 방주바깥으로 나오면서 1년 10일후에 벌어야 돼요. 그게 뭐냐? 정결한 짐승을 제단 만들어서 하나님 앞에 드려야 되는 겁니다. 노아가 직접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습니다. 노아가 직접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다는 이 말은 노아가 무슨 짓을 해도 하나님 만날 수가 없다는 거예요. 좋은 짓이든 나쁜 짓이든 어떤 짓을 해도 하나님 만날 수 있는 방편은 없습니다.
자 그렇다면 하나님 물로써 심판한 이유가 심판 가운데서 소급해서 알려지게 됩니다. 왜냐하면, 방주 말고 그 바깥에 뭐가 있는가? 7장 21절에 보니까, “땅위에 움직이는 생물이 다 죽었으니 곧 새와 육축과 들짐승과 땅에 기는 모든 것과 모든 사람이라 육지에 있어 코로 생물의 기식을 호흡하는 것은 다 죽었더라.” 자, 그렇다면 하나님의 물 심판은 방주와 직접 상관하는 것이 아닙니다. 방주에서 떠들든지 말든지 가만 놔둬요.
지금 물이 채워진 장소가 어디냐 하면, 옛날에 땅이었던 장소입니다. 그 땅에 누가 사는가? 호흡이 있는 자들이 살았었어요. 그 호흡이 있는 자들의 호흡이 어디서 왔느냐 하면, 창세기 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만드시고 호흡을 넣어주시니까 산 사람이 되었어요. 그렇다면 사람들은 살아 있다. 그 자체로서 내가 살아 있으니까, ‘내가 여기 존재하고 생생하게 살아 있는 것으로 창조의 목적이 다 이루어진 것’으로 착각하면서 나름대로 여깁니다.
선악과가 왜 있는지 생명나무가 왜 있는지 그런 것은 관심이 없고 나만 잘되면 그만이라는 거예요.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한 그것을 따먹으면 그만이라는 거예요. 그런데 그렇게 살았던 그들이 하는 행동이 뭐냐?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팔고’였습니다. 이것들은 그들이 호흡을 하기에 그런 활동을 한 거예요. 활동하고 있는 자신이 스스로 고개를 숙여서 활동하고 있는 나를 보면서 ‘이것이 벌 받을 짓’이라고 깨달을 사람 누가 있는가? 아무도 없어요. 이것은 노아도 마찬가지입니다. 노아도 그렇게 노아의 식구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이게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방주 안에 있는 사람 달랑 여덟 명, 그리고 물 아래 잠겨 있는, 수몰지역에 함께 살았던 많은 짐승들과 사람들과 비교해 보라는 말이지요. 한쪽은 방주에서 여전히 호흡하고 있고 한 쪽은 호흡했었는데 지금 호흡이 멈춰 있고. 그러면 주님은 무슨 기준으로 일방적으로 “너는 호흡해. 그리고 너는 호흡하지 마.” 이렇게 어떤 기준으로 결정짓는가, 그 말입니다. 그 기준이 어디서 나왔는가? 그것은 물 심판 안에 그 내막이 들어 있습니다.
그 내막이 뭔데? 그 내막은 결국 방주 안에서 주께서 길을 만들어서 비둘기 따라서, 비둘기가 나왔던 그 길을 따라서 나와야 될 주인공이 있습니다. 그것은 노아가 아닙니다. 정결한 짐승이 비둘기가 나온 그 길을 따라서, 시간의 경로, 시간의 성분, 시간의 스케줄을 따라서 나와야 될 그 정결한 짐승, 마치 예수님에게 비둘기가 온 것처럼, 그 정결한 짐승을 뽑아내서 그 정결한 짐승을 받음으로써 노아의 방주 안에 있는 사람들이 방주 바깥에서 정상적인 일상생활을, 호흡을 유지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세계는 소급해서 보게 되면 모든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 피, 십자가 희생 때문에 천지창조는 만들어졌습니다. 이걸 천지창조 할 그 때는 몰랐지요. 죄지은 적이 없으니까. 선악과를 따먹기 전이니까 몰랐지요. 따먹고 나서도 몰랐지요. 홍수심판이 벌어져도 그들은 제대로 몰랐어요. 다만 그들이 아는 그 분량만큼만 알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이 주신, 허락하신 언약만큼만 알게 되어 있어요.
어쨌든 인간은 하나님을 직접 만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창조주와 피조물간의 원칙이에요. 그 원칙은 하나님이 세웠습니다. 어떤 인간도 그리스도 앞까지는 오지만 그 다음부터는 갈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과 아버지의 그 길을 인간이 타넘고 갈 수는 없습니다. 이 설교내용은 전체로 한마디로 한다면 지옥이든, 악마든, 인간이든, 천사든, 천국이든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한 용도로 만들어졌다, 골로새서 1장 16절을 그대로 되풀이해서 말씀드린 겁니다.
“목사님! 믿겠습니다.” 하지 마세요. 믿어지도록 그렇게 주께서 쉬지 않고 “아버지가 일하니 나도 일한다.” 했거든요. 가락교회에서 그런 이야기했습니다만, 우리는 일 안해요. 예수님만 일하는 겁니다. 아까 우리 어머니 교회 오셔서 한 이야기가 있어요. 깜짝 놀랐어요. “내가 안 오려고 했는데 오늘 주께서 보내셨다. 주의 뜻이다.” 하셨어요. 제 어머니뿐 아니라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주께서 보내셨지요. 주께서 보내셨다는 데에 이런 의미를 담으세요. 내가 이 땅에서 무슨 짓을 해도 내 팔자와 전혀 무관하다는 것을 포함해서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인간이 호흡한다고 살아 있다고 자기중심으로 생각해서 뭉쳐버리면 거기서 뭐가 나오는가? 거기서 윤리와 도덕이 나와요. 이게 바로 바리새인의 윤리와 도덕입니다. 이게 악마가 만든 거예요. 인간이 자체적으로 법을 만듦으로서 심판이라는 것을 삭제하고, 예수님의 희생이라는 것을 삭제해서 우리끼리 희망을 품고 살자는 것, 그게 진화론이거든요, 우리끼리 갈 때 까지 가보자는 것, 그것이 개혁주의신학입니다, 갈 때까지 가보자는 거예요. ‘점점 진리에 접근하겠지. 왜? 우린 똑똑하니까. 그만큼 똑똑함이 쌓였으니까.’
쉽게 말해서 개혁주의 이단이나 이런 일방종교이단의 특징이 뭐냐 하면, 내 앞의 내 미래는 나하기 나름이라는 거예요. 남자는 여자하기 나름이라고요? 하기 나름이 아니에요. 우리는 무능합니다. 결국 무능함을 깨닫도록 주께서 조치를 하신다면 우리는 언약 안에 있는 사람이고 노아의 후손입니다. 이사야 2장 22절에 보면,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라고 했거든요. 이 말은 그 앞의 말을 설명하는 거예요. 그 앞의 말이 뭐냐?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는 겁니다.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 인생에 누가 포함되어 있느냐 하면, 우리 자신의 착한 행함도 포함됩니다. 내가 착하다고 해서 세상이 달라지지 않습니다. 제가 가락교회 강의 전에 동영상설교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세상이 뭔가 슬퍼지고 좀 짜증이 나는 이유는 지금 본인이 착한 일을 하고 있다고 여기기에 그렇습니다. 사람이 착한 일을 하게 되면 반드시 대가를 기대하게 되어 있어요. 분명히 주님을 위해서 온갖 것 희생을 했는데 막상 내가 원하는 대가를 기적적으로 안줄 때 우리는 부아가 나고 짜증이 나는 겁니다.
그래서 향유를 부으면서 울면서 예수님 발을 씻었던 그 여인이야기를 동영상에 담은 거예요. 그 여인은 자기가 갖고 있던 둘러친 권력을 다 포기한 거예요.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에게 점심을 대접했지만 그 여인은 자신의 향유, 모든 것을 다 내놓았습니다. “이것은 내가 가질 팔자, 내가 갖고 있을 것이 아니고, 내 인생, 내 팔자, 내 미래는 원래 주님 것이지 내 것이 아닌데, 나는 그동안 내 것이라고 갖고 있었던 것에 대해서 후회하고 반성합니다.” 하고 모든 것을 던진 거예요.
얼마나 바리새인과 달라졌어요. 바리새인은 우리가 하는데 따라서, 우리가 하는 것을 봐서 주께서 천국이든 지옥이든 결정한다는 겁니다. 이것은 심판의 띠, 둘러친 심판의 띠,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십자가라는 띠, 다시 말해서 정결한 짐승이 희생한다는 방주바깥에 있는 그 띠, 결국 그 띠가 등장하는데 심판을 이긴 것은 노아가 방주에서 노저어서 이긴 것이 아니고 정결한 짐승을 기어이 끄집어내기 위해서라도 방주는 심판 속에서 보호되어야 되고 살아남아야 했던 겁니다.
십자가만 살아남기 위해서, 십자가만 증거하는 사람 되기 위해서 우리를 천하에 죄인 만드는 거예요. 그게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입니다. 내가 죄인 중에 괴수라고 말하는 이것은 주께서 그렇게 몰아넣어요. 왜? 그래야 심판의 띠, 불 심판의 띠 속에서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용도로서, 언약의 백성으로서 예수님과 연결되어 있거든요. 주님의 스케줄의 일부로서 살아 있는 겁니다. 이게 유일하게 뚫린 거예요.
그거면 지금은? 지금은 주께서 우리의 시간조절하시고 세상 멸망 날 스케줄 다 조종하고 있습니다. 아무 염려하지 마시고 특히 주의할 것은 우리 자신의 행동여하에 따라서 내가 복 받고 저주받는다는 악마의 사기에 넘어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차사고 난 것 주의 뜻입니다. 내 몸 아픈 것, 주의 스케줄대로 아파야 할 때 아픈 겁니다. 그렇다면 끝으로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십자가 증거 한다면 이 땅의 수몰지역은 어떻게 됩니까? 수몰지역이 많은데. 수몰지역의 그들은 좀비입니다. 그들은 좀비의 도덕을 가져와요. 개혁주의의 도덕이죠. 좀비들의 도덕, 좀비들의 윤리. 개미떼처럼 몰려옵니다. 주께서 그렇게 유도하셔요. 차이점을 보기 위해서.
믿음으로 구원된다는 그 좀비들의 희망찬 기대, 그게 바로 수몰지역, 방주를 제외한 수몰지역의 호흡이 끊어진 귀신들이 그렇게 마귀에게 부림을 당하면서 택한 백성까지 넘어뜨리려고 달려들어요. 그냥 우리는 막살면 돼요. 그런 느긋함이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있음 자체가 예수님의 경로 속에 이미 섞여 있다는 것을 우리가 잊었습니다. 우리가 몰랐습니다. 이제 이 자리가 내 인생이 팔자 펴는 자리가 아니고 주님을 활짝 열어놓는 자리인 것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42강-창 7장 13-24절(심판안의 방주)160608-이 근호 목사.hwp (64.0K), Down: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