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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유튜브(156강, 157강), 이론과 실제, 권력과 욕망 160607강의[신학]

유튜브(156강, 157강), 이론과 실제, 권력과 욕망 160607

이름 : 이근호(IP:119.18.94.40)

156강

157강

이미아(IP:122.♡.165.245)

16-06-10 00:05

156강-YouTube강의(이론과 실제)160607-이 근호 목사

이 시간에는 제 156강, 제목은 ‘이론과 실제’입니다. 보통 이론과 실제라는 것은 서로 맞아야 된다고 생각하죠. 내가 생각하는 대로, 내가 예상하는 대로 그게 현실과 딱딱 맞을 때, ‘아! 내 생각이 맞구나!’하는 확인하는 기쁨이, 즐거움이 있겠죠.

사람들의 이러한 버릇이 자기가 세운 가설이나 이론과 그리고 자기가 세운 계획과 딱딱 맞아 떨어질 때 자기 자신이 세상을 제대로 보고 있다고 그렇게 생각하기 마련입니다. 기도라는 것도 기도 내용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것은 자기 나름대로 이론이 펼쳐져 있는 겁니다. 그 이론대로 기도를 했으니 정말 하나님이 살아 계신지, 정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만드시고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이 맞는지를, 자기 이론을 담은 그 기도가 자기 뜻대로 딱 현실화될 때 무릎을 치면서,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이 맞는구나!’ 이렇게 하나님이 있음을 테스트하고 싶은 충동이, 그런 심정이 기도 속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생각하기를, 응답 없는 기도는 하지 않겠다. 그걸 달리 이야기해서 기도해서는 반드시 응답을 낚아챔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동시에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인정받는 존재가 자기 자신일 것이다.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한 번 정리해보면 인간은 쉴 새 없이 이론들을 펼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실제로 되는지 안 되는지를 늘 확인하고 싶어서 두리번거리죠.

근데 성경에 보면 그런 인간들의 생각과는 달리 인간들의 이론과 예상에 어긋맞게, 그것과 일치되지 않는 쪽으로 세상이 흘러가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자기가 구원받으리라고 예상한다고 해서 하나님께서는 그 예상하는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가 기대하고, 기대한대로 딱 맞아떨어질 때, 사람은 자기 스스로 자기를 신앙인이다. 구원받은 사람이다. 그렇게 확인하고 싶어 해요.

그러면 사람들이 평소에 성경을 보게 되는 목적과 이유도 내가 신자 맞는지를 실제로 이렇게 점검하는 가운데서 스스로 정립을 해보려고 하는 그러한 시도에 있습니다. 그렇게 돼버리면 이것은 하나님께서 일하는 것이 아니고, 성경 전체가 내가 예상한 대로 맞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 쉽게 말해서 내가 시키는 대로 하나님께서 움직이는가를 확인하기 위해서 성경을 애초부터 보게 되는 거죠.

그 중의 하나 예가 요한삼서 1장 2절에 보면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 본문을 누구든지 보는 순간 자기 자신을 무엇에다 집어넣느냐 하면, 나는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간주를 하고, 그 다음에 과연 사랑하는 사람인지 아닌지를 어디서 확인하느냐 하면,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그 육신이 건강할 때, 나는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의 범주에 속한다. 이렇게 테스트하고 싶은 거예요.

이렇게 보면 성경은 하나의 이론을 제시했고, 그 다음에 그게 실제로 되는지 안 되는지는 내가 이론에 부합되도록 실제를 내 쪽에서 확인이 돼서, 그게 확인이 되는 사람은 성도고 확인이 되지 않는 사람은 성도가 아니다. 그렇게 스스로 판정내리고 싶어 해요. 그런데 여기서 이야기하는 사랑하는 자라는 것은, 요한일서와 요한이서를 거쳐서 온 요한삼서입니다.

사도요한이 말하기를 사랑하는 자라는 것은, 예수그리스도의 성령을 받아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자기 영광과 자기의 건강을 본인이 확인 할 필요조차 이미 없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이라 하는 것은, 모든 인간이 자기를 사랑하잖아요. 모든 인간은 자기를 사랑하는데 요한일서에서 말하는 사랑은, 물론 요한삼서에서 말하는 사랑도, 인간들이 자기 사랑을 하는 그 사랑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는 스스로 사랑한다는 그 자체가 죄가 된다는 것을 확인한 사람을 사랑하는 자라고 말합니다.

무슨 말인고 하면 테스트를 내 쪽에서 새삼스럽게 해내가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화목제물, 십자가를 통해서 이미 테스트가 끝난 상태인 것을, 그것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십자가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알다시피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확실히 하는 사건이 십자가입니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사랑한 적이 없다는 것을 확실히 드러낸 것이 십자가입니다.

그 십자가 앞에서 더 이상 자기 자신을 사랑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확정이 된 사람에게는, 자기가 나서서 자기 영혼 관리하고, 자기가 나서서 자기 강건을 챙겨서, 새삼스럽게 구원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한다는 것, 이거는 성립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과연 구원받았는지, 안 받았는지는 이미 성경을 통해서 확정된, 새삼스럽게 확인할 필요 없이 성경에 확정된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되는 겁니다.

예를 들면 빌립보서 4장 4절에 보면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주 안에 있는 사람은 어떤 경우라도 기뻐하라는 겁니다. 니가 나서서 이론과 실제가 맞는지, 맞으면 기뻐하고 안 맞으면 슬퍼하라는 그런 뜻이 아니고 이미 성도는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항상 기뻐하게 되어 있어요. 기뻐하는 이유는 3절에 보면 “저 부녀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 이 땅에서 건강하든 안 하든, 이 땅에서 사업이 잘되든, 안 되든, 이 땅에서 자기 계획대로 되던 안 되든지 간에,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어 있으면 항상 이 땅에서 살아가면서 예상 밖의 기쁨이 계속 쏟아져 나오는 자, 그런 자가 바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성도에 해당되는 사람입니다.

자기 이름이 생명책에 있기 때문에, 덜렁 이름만 생명책에 있는 것이 아니에요. 생명책에 있는 사람은 어떤 현상을 보이느냐 하면 무슨 일을 당해도 항상 기뻐하는 현상이 일어나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게 빌립보서 4장 4절에서 하는 이야기입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기뻐할 것만 기뻐하는 것이 아니고 항상 기뻐하라. 모든 사람에게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5절에 보면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주께서 가까이 함께 계시니라.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이론과 실제에서의 내용은 간단합니다. 내가 내 스스로 내 것 챙기는데서 기뻐하는 것이 아니고 나 말고 주님이 함께 있음으로 인하여 어떤 일들이 일어나던지 간에 항상 기뻐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내 곁에 있고 항상 함께 있다는 것을 알려면 나의 것은 늘 찢어져야 되고, 깨져야 되고, 구멍이 나야 되고, 나의 이론이 어설픈 이론이고 이것은 현실에 맞지 않는 허구에 불과하다는 것이 늘 깨우쳐질 때, 이 현실은 내 요구와 내 욕망과 내 희망과 전혀 상관없이 돌아간다는 것을 깨달을 때, 그리고 모든 현실이 말씀대로, 이 빌립보서 4장의 말씀대로, 항상 기뻐하라, 생명책에 있다, 라는 이런 쪽으로 흘러가는 현실인 것을.

내 인생이 계획대로 안 되고, 찢어지는 가운데서, 비로소 그 틈 사이에서 나타나는 기쁨, 그것이 바로 항상 기뻐하는 기쁨, 성도로서 기뻐하는,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사람의 기쁨입니다.

이미아(IP:122.♡.165.245)

16-06-10 00:34

157강-YouTube강의(권력과 욕망)160607-이 근호 목사

제 157강, 제목은 ‘권력과 욕망’입니다. 사람이 권력을 안 좋아한다고 하지만 어떤 움직임이 되면 거기서 권력이 행사됩니다. 마치 배에 탄 사람은 배가 가만히 있는 것 같지만 뱃전에 나나와서 앞에 보게 되면 물살이 갈라지죠. 사람이 움직이게 된다는 것은 그 선에, 그 현장에 있는 권력이라는 바다를 한 척의 배가 되어서 쫙쫙 쪼개는 그러한 모습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보다 못난 사람한테는 어깨에 힘이 들어가고 큰소리 치고 싶고, 딱 초반에 보자마자 잘 살고, 힘깨나 있고, 많이 배웠고, 말해봐야 말빨이 안 선다 싶으면 은근히 움츠려지죠. 말에 힘이 빠지고, 주춤주춤하게 되고, 더듬거리게 되고, 이미 우리는 권력의 현장에 와있습니다. 특히 남자끼리 있을 때는 큰소리치다가 예상 밖의 아름다운 미인이 앞에 오게 되면 갑자기 벙어리가 되든지, 졸지에 말더듬이가 되죠.

그게 뭐냐 하면 에스더에 나오는 아름다움, 미모의 힘이 온 천하를, 아하수에로 왕, 바사나라를 총괄하는 그 왕마저도 그 에스더의 미모에 주눅 들게 만드는, 그게 바로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리는 이미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의 필드, 힘의 장場 속에 놓여있습니다. 그래서 사람과 사람이 만날 때는 몸체, 두 개 달랑 만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휘하에 있는, 그 사람이 거느리고 데리고 오는 그 배경에 있는 힘과, 그 사람을 마주하고 있는 내가 구축하고 있는 힘과 이게 보이지 않는 쟁취, 또는 쟁탈전, 또는 싸움장, 투쟁장으로써 현실이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가장된 사람이 직장에서는 스트레스로 바짝 긴장을 하죠. 그곳은 자기가 대장이 아닌 권력의 장이기 때문에. 그러다 퇴근해서 집에 오게 되면 큰소리 치고 그냥 푹 퍼집니다. 퍼져도 전혀 스트레스 받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가정에서는 가장이 대장이니까. 따라서 사람들은 어떤 사람을 볼 때, 저 사람 한 사람이 간다고 하지만 사실은 그 배후에 권력을 몰고 다니고 있다. 이렇게 보셔야 됩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할 때, 사람들은 달랑 이 육신이 어떤 결심을 해서 믿는다곤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실은 그런 게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생각하고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도 내가 가지고 있는 휘하의 모든 힘들을 총동원해서 예수님에게 다가섭니다.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니까, 예수님에게마저 자기 가치를 유지하려는 심보가, 권력을 그동안 모으면서 한 심보와 동일한 심보가 그 현장에서 튀어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예수님 저는 지금껏 이렇게 살아왔습니다.” 앞에 하나 붙인다면 “지금껏 나는 이렇게 잘난 존재로 살아왔습니다.” 교인들이 교회 갈 때, 하나님도 만나지만 목사님도 만나고 같은 교인들도 만나죠. 그 만났을 때, 그냥 빈 몸으로 만나지 않습니다. ‘나 이정도로 괜찮은 존재입니다.’ 라는 것을 앞장세우면서 교인들을 만나게 되어 있어요.

그렇다면 목사, 장로, 장립집사, 집사라는 그것이 권력을 지탱하는 그러한 형틀, 틀로써, 교회에서 자기 자존심의 명함으로서 권력을 부각시키는 기능을 발휘하게 되어 있습니다. 자, 그렇다면 이러한 인간들의 본심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왔을 때도 그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유감없이 발휘되었습니다. 그 중의 대표자들이 누구냐 하면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에게 나올 때 빈손으로 나오지 않았습니다. 권력을 동원해서 나왔습니다.

쉬운 말로 그걸 자기 의라고 합니다. 조금 보태면 가치, 자기 존재감. 인간인 이상 다 그런 것이 있죠.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세상군, 인간그룹을 의식하시고 항상 일하시고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누가복음 7장에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한 어떤 세리들과 식사를 한 적이 있습니다. 7장 36절에 한 바리새인이 예수께 자기와 함께 잡수시기를 청해서, 식사 초대받아서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갔습니다.

갔는데, 거기에 바리새인만 있었던 것이 아니고, 누가 거기에 끼어들었느냐 하면 37절에 “그 동네에 죄인인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으셨음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38절,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 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누가복음 7장에서 그 광경을 우리가 이렇게 상상할 수 있습니다. 초대한 사람은 바리새인이고 초대받은 사람은 예수님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주인공이고 그 예수님과 관련 있는 사람은 바리새인 그 사람뿐이라고 그렇게 생각할 겁니다. 그런데 이 장면에서 누구하나 끼어듭니다. 여인이 하나 끼어드는데, 그 여인은 그 마을에서 이미 죄지은 여인이라고 소문이 파다한 그러한 여인이 끼어들었습니다.

자, 그 뒤에 스토리는 어떻게 되겠느냐 하면, 바리새인도 나름대로 예수님 섬기고 있고, 그리고 이 여인도 나름대로 예수 섬기고 있는데, 정말 하나님보시기에, 천국에 가서도, 하늘나라에서 심판할 때에, 하나님이 판정을 내릴 때에, 둘 중에 누가 천국에 합당한가를, 그걸 벌써 미리 와서 판가름하시는 대목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바리새인은 그냥 보통 사람입니다. 보통 사람은 누가 자기보고 죄인이라고 하면 기분나빠합니다. 항상, 평소에 나는 죄인하고 관계없는 의인으로 살아갑니다. 그 의인중의 하나가 예수님을 존중해서, 존경해서 예수님께 식사대접 할 정도로, 이 정도로 괜찮은 존재로 자기 자신을 내세우는 것. 아까 이야기한대로 인간은 그냥 홀로 있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이정도로 괜찮은 존재라는 것에 둘러싸인 채 예수 앞에 나온 사람이 바리새인입니다.

그렇다면 이 바리새인을 제가 아까 보통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 보통사람 중에 우리도 항상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되죠. 우리가 그냥 무심코 “예수님 존경합니다. 식사대접 할게요.” 이거는 하등의 문제가 없다고 생각할 겁니다. 그러나 여기서 이 본문을 주의해야 합니다. 예수님과 일치되는 심성을 가진 사람은 바리새인이 아닙니다.

예수님과 일치되는 심성을 가진 사람, 또는 달리 이야기해서 예수님이 갖고 있는 마음이 어떤 마음인가를 어떤 여인을 통해서, 우리에게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으로 예수님의 심성을 드러내는 사람은 바로 죄 많은 여인입니다. 그래서 이 성경 본문은 우리가 이정도하면 괜찮은 존재라고 하는 나의 존재를 무엇으로 바꿔야 할 필요가 있는가 하면 바로 죄 많은 여인의 심정으로 바꿔주지 아니하면 그것은 예수의 심정을 품지 않은 사람이라고 단정 내려도 좋습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마음을 털어놓는데 죄 많은 연인을 통해서 털어놓습니다. 여인은 권력을 포기했습니다. 자기가 가진 귀한 것, 향유라는 것은 그 당시에 귀한 것입니다. 귀한 것을 소유하면 귀한 존재가 되는 것은 뻔한 거죠. 그 귀한 것을 가지면 귀한 존재인데, 그것을 주님한테 내놓으면서 생글생글 웃지를 않습니다. 방글방글 웃지를 않습니다.

어떻게 내놓으냐 하면 울면서 향유로 예수님의 발에 그것을 적시고, 그 향유에 자기 눈물을 섞어 넣는 겁니다. 자기 머리털로 입 맞추면서 주님의 더러운 발을 씻깁니다. 자기를 깨끗하게 하는 향수가 주님 만나고 난 뒤에, “이 향수는 나를 위해서 씻을 향수가 아니고 주님을 향기롭게 해야 될, 주님을 깨끗하게 해야 할 향수에 불과합니다. 내 몸을 던져서 주님만 깨끗하게 된다면 저는 여한이 없습니다.” 하는 식이죠.

이 심정은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보다 더 죄인 되셔서 무가치한 우리를 씻기시는 그 모습을 이 여인을 통해서 예수님의 본질과 예수님의 마음의 뜻을 우리에게 이렇게 전달했습니다. 권력을 포기하세요. 휘하에 데리고 다니는 잘난 것, 자기 가치 버리시고, 차라리 그 죄를 가지고 그대로 주님 앞에, 주님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 자기 죄를 다 주님 발 앞에 쏟으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내 향수를 가진 이것이 나의 죄가 된다면, 이 죄를 위해서 주께서 십자가에 해결했습니다.” 라는 이 고백, 이것이 오늘날 성도가 가진 마음입니다.

이미아(IP:122.♡.165.245)

16-06-10 00:59

157강-YouTube강의(권력과 욕망)160607-이 근호 목사

제 157강, 제목은 ‘권력과 욕망’입니다. 사람이 권력을 안 좋아한다고 하지만 어떤 움직임이 되면 거기서 권력이 행사됩니다. 마치 배에 탄 사람은 배가 가만히 있는 것 같지만 뱃전에 나와서 앞에 보게 되면 물살이 갈라지죠. 사람이 움직이게 된다는 것은 그 선에, 그 현장에 있는 권력이라는 바다를 한 척의 배가 되어서 쫙쫙 쪼개는 그러한 모습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보다 못난 사람한테는 어깨에 힘이 들어가고 큰소리 치고 싶고, 딱 초반에 보자마자 잘 살고, 힘깨나 있고, 많이 배웠고, 말해봐야 말빨이 안 선다 싶으면 은근히 움츠려지죠. 말에 힘이 빠지고, 주춤주춤하게 되고, 더듬거리게 되고, 이미 우리는 권력의 현장에 와있습니다. 특히 남자끼리 있을 때는 큰소리치다가 예상 밖의 아름다운 미인이 앞에 오게 되면 갑자기 벙어리가 되든지, 졸지에 말더듬이가 되죠.

그게 뭐냐 하면 에스더에 나오는 아름다움, 미모의 힘이 온 천하를, 아하수에로 왕, 바사나라를 총괄하는 그 왕마저도 그 에스더의 미모에 주눅 들게 만드는, 그게 바로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리는 이미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의 필드, 힘의 장場 속에 놓여있습니다. 그래서 사람과 사람이 만날 때는 몸체, 두 개 달랑 만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휘하에 있는, 그 사람이 거느리고 데리고 오는 그 배경에 있는 힘과, 그 사람을 마주하고 있는 내가 구축하고 있는 힘과 이게 보이지 않는 쟁취, 또는 쟁탈전, 또는 싸움장, 투쟁장으로써 현실이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가장된 사람이 직장에서는 스트레스로 바짝 긴장을 하죠. 그곳은 자기가 대장이 아닌 권력의 장이기 때문에. 그러다 퇴근해서 집에 오게 되면 큰소리 치고 그냥 푹 퍼집니다. 퍼져도 전혀 스트레스 받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가정에서는 가장이 대장이니까. 따라서 사람들은 어떤 사람을 볼 때, 저 사람 한 사람이 간다고 하지만 사실은 그 배후에 권력을 몰고 다니고 있다. 이렇게 보셔야 됩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할 때, 사람들은 달랑 이 육신이 어떤 결심을 해서 믿는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실은 그런 게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생각하고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도 내가 가지고 있는 휘하의 모든 힘들을 총동원해서 예수님에게 다가섭니다.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니까, 예수님에게마저 자기 가치를 유지하려는 심보가, 권력을 그동안 모으면서 한 심보와 동일한 심보가 그 현장에서 튀어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예수님 저는 지금껏 이렇게 살아왔습니다.” 앞에 하나 붙인다면 “지금껏 나는 이렇게 잘난 존재로 살아왔습니다.” 교인들이 교회 갈 때, 하나님도 만나지만 목사님도 만나고 같은 교인들도 만나죠. 만났을 때, 그냥 빈 몸으로 만나지 않습니다. ‘나 이정도로 괜찮은 존재입니다.’ 라는 것을 앞장세우면서 교인들을 만나게 되어 있어요.

그렇다면 목사, 장로, 장립집사, 집사라는 그것이 권력을 지탱하는 그러한 형틀, 틀로써, 교회에서 자기 자존심의 명함으로서 권력을 부각시키는 기능을 발휘하게 되어 있습니다. 자, 그렇다면 이러한 인간들의 본심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왔을 때도 그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유감없이 발휘되었습니다. 그 중의 대표자들이 누구냐 하면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인데, 예수님에게 나올 때 빈손으로 나오지 않았습니다. 권력을 동원해서 나왔습니다.

쉬운 말로 그걸 자기 의라고 합니다. 조금 보태면 가치, 자기 존재감. 인간인 이상 다 그런 것이 있죠.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세상군, 인간그룹을 의식하시고 항상 일하시고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누가복음 7장에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한 어떤 세리들과 식사를 한 적이 있습니다. 7장 36절에 한 바리새인이 예수께 자기와 함께 잡수시기를 청해서, 식사 초대받아서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갔습니다.

갔는데, 거기에 바리새인만 있었던 것이 아니고, 누가 거기에 끼어들었느냐 하면 37절에 “그 동네에 죄인인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으셨음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38절,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 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누가복음 7장에서 그 광경을 우리가 이렇게 상상할 수 있습니다. 초대한 사람은 바리새인이고 초대받은 사람은 예수님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주인공이고 그 예수님과 관련 있는 사람은 바리새인 그 사람뿐이라고 그렇게 생각할 겁니다. 그런데 이 장면에서 누구하나 끼어듭니다. 여인이 하나 끼어드는데, 그 여인은 그 마을에서 이미 죄지은 여인이라고 소문이 파다한 그러한 여인이 끼어들었습니다.

자, 그 뒤에 스토리는 어떻게 되겠느냐 하면, 바리새인도 나름대로 예수님 섬기고 있고, 그리고 이 여인도 나름대로 예수 섬기고 있는데, 정말 하나님보시기에, 천국에 가서도, 하늘나라에서 심판할 때에, 하나님이 판정을 내릴 때에, 둘 중에 누가 천국에 합당한가를, 그걸 벌써 미리 와서 판가름하시는 대목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바리새인은 그냥 보통 사람입니다. 보통 사람은 누가 자기보고 죄인이라고 하면 기분나빠합니다. 항상, 평소에 나는 죄인하고 관계없는 의인으로 살아갑니다. 그 의인중의 하나가 예수님을 존중해서, 존경해서 예수님께 식사대접 할 정도로, 이 정도로 괜찮은 존재로 자기 자신을 내세우는 것. 아까 이야기한대로 인간은 그냥 홀로 있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이정도로 괜찮은 존재라는 것에 둘러싸인 채 예수 앞에 나온 사람이 바리새인입니다.

그렇다면 이 바리새인을 제가 아까 보통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 보통사람 중에 우리도 항상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되죠. 우리가 그냥 무심코 “예수님 존경합니다. 식사대접 할게요.” 이거는 하등의 문제가 없다고 생각할 겁니다. 그러나 여기서 이 본문을 주의해야 합니다. 예수님과 일치되는 심성을 가진 사람은 바리새인이 아닙니다.

예수님과 일치되는 심성을 가진 사람, 또는 달리 이야기해서 예수님이 갖고 있는 마음이 어떤 마음인가를 어떤 여인을 통해서, 우리에게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으로 예수님의 심성을 드러내는 사람은 바로 죄 많은 여인입니다. 그래서 이 성경 본문은 우리가 이정도하면 괜찮은 존재라고 하는 나의 존재를 무엇으로 바꿔야 할 필요가 있는가 하면 바로 죄 많은 여인의 심정으로 바꿔주지 아니하면 그것은 예수의 심정을 품지 않은 사람이라고 단정 내려도 좋습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마음을 털어놓는데 죄 많은 연인을 통해서 털어놓습니다. 여인은 권력을 포기했습니다. 자기가 가진 귀한 것, 향유라는 것은 그 당시에 귀한 것입니다. 귀한 것을 소유하면 귀한 존재가 되는 것은 뻔한 거죠. 그 귀한 것을 가지면 귀한 존재인데, 그것을 주님한테 내놓으면서 생글생글 웃지를 않습니다. 방글방글 웃지를 않습니다.

어떻게 내놓으냐 하면 울면서 향유로 예수님의 발에 그것을 적시고, 그 향유에 자기 눈물을 섞어 넣는 겁니다. 자기 머리털로 입 맞추면서 주님의 더러운 발을 씻깁니다. 자기를 깨끗하게 하는 향수가 주님 만나고 난 뒤에, “이 향수는 나를 위해서 씻을 향수가 아니고 주님을 향기롭게 해야 될, 주님을 깨끗하게 해야 할 향수에 불과합니다. 내 몸을 던져서 주님만 깨끗하게 된다면 저는 여한이 없습니다.” 하는 식이죠.

이 심정은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보다 더 죄인 되셔서 무가치한 우리를 씻기시는 그 모습을 이 여인을 통해서 예수님의 본질과 예수님의 마음의 뜻을 우리에게 이렇게 전달했습니다. 권력을 포기하세요. 휘하에 데리고 다니는 잘난 것, 자기 가치 버리시고, 차라리 그 죄를 가지고 그대로 주님 앞에, 주님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 자기 죄를 다 주님 발 앞에 쏟으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내 향수를 가진 이것이 나의 죄가 된다면, 이 죄를 위해서 주께서 십자가에 해결했습니다.” 라는 이 고백, 이것이 오늘날 성도가 가진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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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