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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20160603b울산강의-출애굽기 40장 : 사람과 아들자유게시판출애굽기

20160603b울산강의-출애굽기 40장 : 사람과 아들

이름 : 한윤범(IP:221.147.126.31)

20160603b울산강의-출애굽기 40장 : 사람과 아들

(강의:이근호 목사)

첫째 시간 마지막에 이런 이야기했습니다. 하나님의 성막에서 요한계시록 11장에 나오는 말씀대로 우레와 지진과 번개, 우박이 쏟아진다 했습니다. 언약궤에서 나온다는 겁니다. 언약궤는 하나님의 일의 완료고 완성입니다. 하나님께선 눈에 안 보이잖아요. 보면 인간은 죽어요. 그러면 뭐로 보느냐 하면, 말 또는 말씀으로 주십니다.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난 뒤에 말의 내용과 자기 자신이 일치되기 위해서 인간 쪽에서 행동에 나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말만 주시는 게 아니고 그 말씀에 합당한 행동이 나옵니다.

행위가 나오는 모습이 이 세상이 어두운 죄악이기 때문에 심판의 형식으로 주어지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행동과 심판으로 주어졌다면 구원은 어디 있고 축복은 어디서 나오느냐? 말씀에서 행동으로, 행동에서 심판으로. 심판에서 복이 나오고 구원이 나오는 게 아니고 심판 받아 마땅하다는 자에게 구원이 되고 복이 된다 이 말입니다.

원망해서 불 뱀이 왔습니다. 불 뱀 저리 가라고 하면 되잖아요.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고 불 뱀의 형상을 만든 놋 뱀을 쳐다보는 자에게만 불 뱀에 물린 병에서 낫게 하셨어요. 불 뱀을 불 뱀으로 치료하는 거예요. 어떻게? 뱀에 물려도 우리가 합당한 존재입니다. 불 뱀을 보낸 하나님의 조치가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기 위한 행위적인 조치인 것을 제가 믿습니다, 하고 받아들이면 구원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바로 구원받은 자는 말씀의 실현태, 말씀의 현실 상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 말씀의 결과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심판받는다고 하니까 너무 억울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죄도 없으신 예수님이 십자가 지신 이유가 뭡니까? 죄도 없는데 왜 아버지한테 저주받았어요? 그것은 우리 죄를 대신 가져갔기 때문에 예수님이 저주받았잖아요. 아버지로부터 저주받을 때 예수님은 죄인이 된 거예요. 억울한 죄인이죠. 죄도 없으면서도 남의 죄를 자기 것으로 삼았기 때문에 그 죄가 있는 곳에 저주가 퍼부어지기 때문에 그 저주를 받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구원은 어디서 이뤄집니까? 그 저주, 그 심판에서 예수님의 구원이 일어나는 거예요. 저주받으신 분이 아버지로부터 사흘 만에 부활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어느 누구도 예수님이 받으신 저주에 합류하지 않으면 구원은 물 건너갔습니다. 구원은 없습니다. “그러면 죄 지을까요? 우리가 죄 지으면 되겠네요.” 아니에요. 가만있어요. 십자가 영이 우리에게 찾아오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아무리 착하고 경건하고 십자가 앞에서 예수님을 죽게 한 죄인으로 일괄적으로 다뤄지게 돼요. 우리가 이 땅에서 뭘 해도 우리끼리는 내가 잘나 보이지만 나쁜 짓하지 않고 바람피운 적도 없고 살인한 적도 없고 뭐든지 깨끗해 보이지만 주님과 비교할 때는 마땅히 저주받아야 할 죄인입니다. 주님이 내 죄를 가져가서 저주받았기 때문에 나한테 뭐가 있는지 몰랐는데 주님께서 내 것을 가져가니까 아버지로부터 저주받은 거예요.

우리는 가상적인 아버지만 생각하고 가상적인 하나님만 생각해서 이렇게 건전하면 하나님이 복 줄줄 알았는데 진짜 살아계신 하나님은 우리가 몰랐어요. 오직 예수님만 알아요. 만약에 내 볼펜을 예수님이 가져갔다면, 내 볼펜을 주님이 차고 있으니까 내 볼펜이기 때문에 주님이 벼락 맞는 겁니다.

따라서 성령이 오게 되면 우리가 울산 바닥, 대구 바닥에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기적입니다. 감사할 일이죠. 마땅히 살아야 할 권리가 없습니다. 오늘밤에 우리 영혼 데려가도 우리는 할 말이 없어요. 아들 장가 둘 다 보내고 이제 할 일 다했다는, 전도사님 기도가 이제는 종을 편히 쉬게 하옵소서, 이렇게 되겠는데 만약에 아들이 내일 장가간다고 생각해보세요. 그런 기도 나오겠습니까? 서른 살까지 키웠는데 아들 장가가는 건 보고 죽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요새 수요일에 그런 설교합니다만 노아 보세요.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이게 뭐가 나쁩니까? 이게 나빠요, 안 나빠요? 안 나쁜데 벌 내릴 일이 있습니까? 이게 나쁘니까 벌 내리잖아요. 그래서 이것에 대해서 지난주일 낮에 이것을 자기 동질성이라 했어요.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거예요.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하는 것은 사실을 주께서 우리를 살려내는 거잖아요. 동질성은 예수님만 동질성이에요. 왜 그러냐 하면, 예수님만 아들이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이 아들 되기 위해서 매일같이 살려냄을 당하고 있는 겁니다. 참새를 키우고 들풀을 키우듯이 예수님이 자기 명예를 걸고 우리를 계속 살려내는 거예요. 우리가 살아있어야 하나님의 의가 살아나기 때문에 그러는 겁니다.

따라서 애굽에 있던 히브리인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따라 나왔어요. 모세가 좋은데 간다고 하니까 그냥 따라 나온 거예요. 애굽보다는 더 좋겠다고 생각하고 따라 나온 겁니다. 오늘날 교인들이 교회 오는 것과 똑같아요. 멋도 모르고 따라 온 거예요. 그런데 그건 사람이지 하나님이 원하시는 아들은 아니에요. 아들이 되려면 하나님의 계약서가 붙어 있어야 돼요. 피를 내야 돼요. 죽어야 돼요. 본인이 자살하면 안 되고 장차오실 메시아의 죽음에 합류될 경우에만 그것이 아들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정된 성막 안에 양을 잡는 지점이 있어요. 제단 뜰에서 양을 잡아요. 양이 죽을 양이 아니지요. 양이 무슨 잘못했습니까. 양에다 백성들의 죄를 얹어주니까 양이 죽는 거예요. 양이 대신 죽었다는 말이 뭔 뜻이냐 하면, 진즉에 죽어야 될 자는 양이 아니고 누구다? 양을 바친 그 인간들이 하나님의 제단에서 저주의 심판을 받아야 되는 겁니다.

다시 묻습니다. 하나님의 저주는 어디서 온다 했어요? 아까 요한계시록 11장에서 언약궤에서 오지요. 하나님의 궤가 완성된 게 예수님이죠. 예수님에 비교해볼 때 우리는 죽어 마땅한 죄인이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죽이고, 그럼 우릴 죽이면 구원 못 받잖아요, 하지 마세요. 우리가 예수님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는 그 자리에서 뭐가 나오느냐? 그 죽음을 이긴 사망을 이기고 부활의 능력으로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죽는 자리가 우리의 구원의 자리에요. 그걸 피해 도망치면 안 돼요.

그러면 지금도 우릴 죽입니까? 죽여요. 어떻게 죽입니까? 한 달에 오백만 원 정도 나와서 죽이고, 가게 세 한 달에 60만원 나와서 죽이고, 아들 몸 튼튼해서 죽이고. 보너스 타서 죽이고, 계 모아서 일본에 놀러 가면서 죽이고, 놀러가는 자체가 죽이고, 온천에서 뜨시다는 그 자체로 죽이는 거예요. 우리는 날마다 죽노라. 우리의 죄를 만끽하면서 죄 안에서 즐거워하며 죽고 있습니다. 죄 지어서 죽는 게 아니고 죽은 자기 때문에 그렇게 죄가 즐거운 거예요. 무슨 말인지 알아들어야지 이야기하지.

우리가 이미 죽은 티를 낸다 이 말입니다. 주님도 성경 보기도 싫어요. 그러나 제주도 놀러가자 하면 성경 덮고 놀러가는 거예요. 이게 죽은 티를 내는 거니까. 좁은 길로 가면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그러다 갑자기 땅값 올라가면 할렐루야 하고 있습니다. 그게 원래 내 욕망이고 내 몸이 원하는 바기 때문에. 뭐든지 주께서 원하지 않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에 완전히 매료되게 하신 그것이 내 죽은 몸이라는 것을 성령을 통해서 인식할 때 그 죽은 몸을 통해서 십자가를 바라보게 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런 식으로 구원받는 겁니다.

죽음을 통해서 첫 번째 부활하신 주님이 계속해서 중심 지주, 중심 말뚝으로 우리는 그 변두리에 등장한 양자로써 그 관계가 돈독해지는 겁니다. 그래서 일부러 죄 짓진 마시고 하던 대로 사세요. 시장에서 새 이불 사서 덮어보세요. 가볍고 얼마나 좋은지. 뜨뜻하고 좋지요. 초막 셋을 짓고 여기가 좋사오니 하잖아요. 이불 덮고 살겠다는 거예요. 그게 바로 또 우리가 주님의 십자가 아니면 구원 못 받는 티를 팍팍 내고 있는 겁니다. 그게 바른 인간 된 거예요. 이것 때문에 돌아가셨구나. 새 이불이 좋아서 탐욕해서 하늘나라는 없고 이불 여기가 좋사오니, 이것 때문에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거예요.

그래서 성도의 특징은 성령이 임하게 되면 항상 온유와 화평과 자비와 양선과 형제우애가 만끽해서 발산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게 온유한 거거든요. 나, 죄인입니다. 나, 주님 아니면 인간 안 됩니다. 이게 온유에요. 아무리 세상이 험하고 악하고 사람이 온유지게 되면 충분하게 선교사, 전도자 역할을 다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마음을 낮추면.

17절 보면, “제 이 년 정월 곧 그 달 초일일에 성막을 세우니라 모세가 성막을 세우되 그 받침들을 놓고 그 널판들을 세우고 그 띠를 띠우고 그 기둥들을 세우고” 이렇게 합니다. 일차적으로 성막을 세웠다고 했습니다. 성막 안에서 성소가 있고 양을 바치는 제단이 있다. 그러면 그런 장치로 자동적으로 복을 받느냐, 용서되느냐? 아닙니다. 여기에 누가 들어가야 되느냐 하면, 40장 12절에 보면, “너는 또 아론과 그 아들들을 회막문으로 데려다가 물로 씻기고 아론에게 거룩한 옷을 입히고 그 에게 기름을 부어 거룩하게 하여 그로 내게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하라”

물질적 장치만 갖추면 되는 게 아니고 여기에 인간이 등장해요. 그 인간 앞에 뭔가 붙어요. 거룩한 인간 종류가 들어가요. 이게 바로 아론 계통의 제사장입니다. 제사장이 양을 잡고 1년에 한 번씩 지성소에 들어가고 관리도 하고 하는데 이게 좀 어려워요. 여기서 설명이 난해질 겁니다.

애굽이란 어떤 지형적 장소가 있지요. 문답으로 해봅시다. 애굽에서 나오면 구원입니까? 아니지요. 뭐가 문제에요? 애굽에서 나와서 지정된 장소에 들어가면 애굽에 살던 그 인간이 옮긴 셈이 되기 때문에 하나님이 받아주질 않습니다. 장소가 중요한 게 아니고 인간 자체가 바뀌어야 되겠지요. 그러면 이동식으로 설치돼있는 장막의 기구들과 특정 장소가 중요합니까, 여기서 활동하는 제사장이 중요할까요?

결국 제사장 앞에 거룩하다 할 때 어떤 물건이 거룩한 그것을 구체화시키면 어떤 인물이 거룩한 거예요. 인물이 거룩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계시는 이곳에서 같이 활동해도 멀쩡하게 살아있다는 것이 어느 정도 해야 그렇게 되겠느냐? 하나님의 거룩이 인물과 결합이 되는 그것을 모델케이스로서 제사장이 있는 겁니다.

금으로 만든 시계와 금박 시계와 다르지요. 금박 입힌 시계는 벗기면 스텐이 나오지만 금으로 만든 시계는 아무리 벗겨도 금 나오잖아요. 거룩으로 치장하면 어설퍼요. 인간 자체가 거룩해져야 한단 말이죠. 그래서 하나님께서 물질이란 장치에다 제사장을 결합시켜서 활동시킨 것은 물질도 한시적이고 임시적이지만 제사장도 완료된 거룩한 성도가 아니다. 가짜고 어설프고 제사하는 죄인으로 제사장을 세운 겁니다. 이게 히브리서에 나와요. 그리고 그 이야기는 지난 시간에 했습니다. 제사장이 있는 이유는 그들로 하여금 죄 짓기 위함이라고 했지요.

인간과 사물에 비춘 거룩이 전부 실패로 끝납니다. 그래서 특정 장소에 있다고 해서 거룩해지는 것도 아니고 제사장처럼 된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도 아니고 이러나저러나 실패하기는 마찬가지에요. 그러면 구약의 율법을 통해서 제사장 세우고 성전 준 건 뭐냐? 율법을 준 것은 더욱더 죄를 죄 되게 함이라. 왜 그러냐 하면, 인간에서 거룩한 인간 되려면 사람들이 연속성을 설정하게 마련이에요. 이렇게 하면 돼요, 이렇게 하면 돼요? 점점 더 거룩해지고 점점 더 거룩한 거예요. 점점 더 거룩해지려면 점점 더 센 바람을 받아서 자기가 자신에 대해서 가혹해야 되는 겁니다. 착한 짓들을 아예 안 해본 사람은 이해 못해요. 바르게 살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아주 미미한 것조차도 하찮은 것조차도 분석해서 물을 이쪽으로 마시면 거룩할까, 요쪽으로 마시면 거룩할까, 이런 것까지 다 따진다고요.

소위 배운 뼈대 있는 집안과 상견례 할 때 조심해야 돼요. 수준이 맞아야 결혼하지. 사랑과 전쟁 등에 나오는 드라마에서 수준 안 맞아서 혼사가 깨지는 경우가 있어요. 상견례 할 때는 상대방이 어느 정도 교양이 있는 사람인지 고상한 사람인지 그걸 탐색하는데 집중합니다. 옷 입은 것, 저건 얼마짜리고, 어느 백화점에서 산 것이고, 아니면 서문시장에서 샀는지 이리 보고 저리 보고 살피고, 모자 테가 60년대, 70년 대 유행한 것인지 최신 물 건너 온 것인지 따지고 밥 먹을 때 보고. 상견례 할 때 사람이 긴장해서 교양 있는 척하다 진이 다 빠져요. 그게 연속성이에요. 집에선 츄리닝 입고 돌아다니지만 상견례 할 때는 무슨 가방 온갖 것 끄집어내서 치장하고 우리 집안 이 정도라고 기 안 죽으려고 하거든요.

그러나 집에 있는 그 인간이나 식당에서 한식집에서 상견례 하는 그 인간이나 맨 똑같습니다. 중간에 끊어짐이 없어요. 하나님께서는 삑- 어떤 인간도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너희들이 추구하는 것이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최고의 경건과 거룩과 고상함을 떨면 복 주시겠지, 라는 그들의 기대감을 한껏 높이기 위해서 율법을 줘버려요. 율법을 주니까 제사장들은 한껏 기대에 부풀어서 깨끗하게 하려하고 백성들은 성막하고 십일조 꼬박꼬박 내고 온갖 율법, 십계명 다 지키려하고 하지만 그 모든 것이 허세로 끝나고 허무로 끝나요. 그게 안 돼요. 왜? 인간은 자기가 다루려기 때문에 실패로 끝납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다루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께서는 우리에게 말씀을 줘서 말씀으로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말씀 주셔서 행위로 주셨어요. 십자가로 우리를 구원하실 분을 따로 보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산상설교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우리 자신을 포기해야 된다는 것을 늘 상기시켜야 돼요. 말씀을 안 보게 되면 자기 잘난 체해요. 어떻게 잘난 체하느냐 하면, “하나님이여 나름대로 열심히 했는데 왜 저한테 안 좋은 일이 자꾸 생깁니까?” 그러면 하나님께서, “네가 무슨 기준에 의해서 열심히 했는지 네 기준이 뭐야?” “저는 이웃을 사랑하고 헌금도 했고 교회 청소도 다하고 열심히 주님 섬기려고 애를 썼습니다.” 성경 어디에 그런 대목이 있느냐고 물어요. “하나님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 했잖아요.” “그게 그런 뜻이야?”

우리는 성경을 보면서 우릴 죄인 되게 하는 것이지 우릴 정당화하기 위해서 성경이 있는 게 아닙니다. 성경에 이런 말씀들이 있거든요. 네가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느냐? 하나님께선 말씀하시고 그 다음에 행동하신다고 했지요. 그럼 우리가 믿음이 있으면 행동을 주께서 요구합니다. “네가 믿음이 얼마큼 있느냐?” “호박씨만큼 있습니다.” “겨자씨만큼 있느냐?” “그 정도는 있지요.” “그럼 산을 옮겨봐라.” 산을 못 옮깁니다.

중국 고사에 우공이산(愚公移山)이라고 있습니다. 어떤 할아버지가 친구 집에 왕래하는데 불편하니까 산을 옮기려고 작정했습니다. 어떻게 하느냐? 삽으로 산을 파는 거예요. 그 사람의 아이디어가 조금씩 파 들어가면 산이 없어질 것이라는 겁니다. 자기 때에 못하면 후대에 파면 되고. 이게 믿음 있는 겁니까? 그냥 열심히 하면 산이 옮겨지는 거예요?

성경에서 소위 믿음 있다는 사람한테 이야기합니다. 네가 믿음 있느냐? 있으면 옮겨봐라 이 말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은 행위로 현실화 되거든요. 네가 내뱉은 믿음이 진짜 현실이고 정답이라면 산을 옮길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돼요. 인간에게 그런 능력이 있습니까? 없지요. 없다고 끝나는 게 아니에요. 그러면 심판을 받아야 돼요.

아까 공식이 뭐였지요? 말씀을 하시고 행동, 그 다음에 심판하시고, 마지막 방정식이 뭐였던가요? 심판 속에서 구원이 거기 있잖아요. 사람들은 구원받는 것을 뷔페식당에 온 것처럼 뭘 먹지? 이러고 있다고. 뭘 먹는 제삼의 자리를 우리한테 허용한 적이 없습니다. 우리 자신이 주의 말씀 안에 들어있어요. 주께서 말하고 행동하고 심판할 때 우리가 여기 있어서 “그래 나는 이 행동을 믿어.” 이래서 구원받는 게 아니에요. 우리는 이 안에 이미 포함돼있단 말이지요. 이미 심판받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받고 안 받고는 하나님이 실시할 나름이지 우리가 시도한다고 구원되는 건 아닙니다.

아까 제가 이야기했지요. 죄도 없는 분을 우리에게 주심은, 모든 시작을 주님부터 시작한 거예요. 주님부터 시작하면 난 놀면 되겠네. 이렇게 답변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아요. 우리 동네는 없지만 다른 동네. 주께서 시작했다는 말은 뭐냐? 지금 내가 있는 것이 주님의 행위의 결과기 때문에 이게 바로 산을 옮긴 내가 나를 변환시킬 수 없는, 변화되지 않는 나를 이토록 변화시킨 결과물이 지금의 나다, 이 말입니다. 이게 얼마나 큰 믿음이에요. 큰 믿음 아닌가?

홍해 갈라진다고 구원받는 게 아니에요. 여리고 무너졌다고 구원받는 게 아니거든요. 신약의 어린애가 구약의 선지자보다 더 큰 자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산을 옮기고 뭘 할지라도 내가 구원받아야 될 나로 바뀐 것은 순전히 주님의 솜씨라고 그게 믿어진다는 이것이 대단한 결과물이라는 된 거예요. 주님의 솜씨물, 주님의 작업 결과물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편하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냥 막 사시라고.

여러분 잔치국수, 막국수 보세요. 그릇이 있고 돌돌 만 국수가 있지요. 그리고 고명을 얹잖아요. 막국수를 맛있게 먹어주시는 분이 따로 있는 거예요. 그런데 막국수가 답답하다고 혼자 비틀고 그러면 안 되지요. 그냥 잡수시는 분이 잡숫게 맛있는 국수로써 족하잖아요. 우리가 어떤 형편에 있던지 간에 그 자체가 주님의 맛있는 막국수가 되는 겁니다. 우리의 미래는 10년 뒤에도 맨 막국수에요. 20년 뒤에도 마찬가지에요. 우리 자신이 수입이 많다고 해서 착한 막국수 되는 법은 없습니다.

우리 자신이 지금 성도라면 사후적으로 이미 구원받았기에 지금도 우리는 구원받고 있는 겁니다. 그걸 지금 상태에서 되돌아보면서 과거까지 다 하나님의 손길이었고 하나님의 개입에 의해서 우리는 이 길을 갈 수밖에 없고 앞으로도 그렇게 될 거예요. 그런데 믿음이 없는 사람은 복음, 이게 진짠가? 내가 지금 홀린 게 아닌가? 내가 알아서 살아야지. 자기가 알아서 살면 동질성, 연속성이 된다고요. 내가 뭔가 해보겠다는 것은 아무리 해도 율법에 가로막혀 단절이 일어나서 주께서 원하시는 아들이 안 돼요. 끊어진다고. 가봐야 십자가로 가로막히게 됩니다.

이 책에 제일 앞에 머리말이 나오는데 이렇게 돼있어요. [복음의 경계선에는 늘 초조하게 서성이는 가짜들이 있다. 죽음의 언저리에 가서야 십자가를 포기하는 이탈자들을 보게 된다.] 자기가 죽음의 언저리에 갔을 때 죽을 뻔했을 때 그래 예수도 다 헛짓이었어, 라고 비로소 본색을 드러낸 자들이 있는 거예요. 지금 약간 배부르니까 교회에 충성하고 하지만 막상 집안 거덜 나고 죽게 돼보세요. 예수가 무슨 소용 있어, 하나님이 어디 있어, 라고 솔직하게 자기의 본색을 드러낼 자들이 있단 말이죠.

그 다음에 [자신들이 고백했던 것을 스스로 회수하고, 얼굴에는 면포로 두르고, 그제야 염치없는 고백들을 닫는다.] 나 이제는 예수 안 믿는다. 그동안 사람들이 믿은 건 예수를 믿은 게 아니고 자기 미래의 연대기를 믿었지요. 하나님을 믿으면 더 나은 미래가 있을까 싶어서. 그게 바로 애굽이란 장소에서만 나오면 세상과 결별되면 곧 그게 구원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거예요. 맨 그 인간이 나왔을 뿐인데. 인간은 스스로 달라질 수 없어요. 자아는 자아 스스로 다른 자아가 될 수 없습니다. 스스로 자아를 비자아로 고백할 사람 없어요. 자기를 부인할 사람 없습니다. 자기를 백날 부인해도 부인된 자신을 자기라고 우기기 때문에.

베드로 자기 목숨 바쳐도 주께서 안 받아준 이유를 알겠지요. 네가 목숨 바쳐도 그 목숨 자랑할 건데 그 목숨을 왜 천국까지 가져갑니까? 천국 갈 때는 천국에 들어와서는 안 될 모든 것이 세관에서 걸려서 다 폐기처분 돼버려요. 철저하게 검열해서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건 다 빼버립니다. 시계, 스마트폰, 옛날 아름다운 추억이고 뭐고 다 없애버려요. 빠짝 마른 뼈가 되는 겁니다. 우리는 빠짝 마른 뼈인데 보기에는 머리하고 색깔 잘 나왔잖아요. 얼마나 감사합니까? 진짜 빠짝 마른 뼈라 해서 [채식주의자]처럼 있지 않고 빠짝 말라서 있지 않고 바짝 마른 뼈인데 왜 밥맛이 있고 얼굴이 통통하고. 어딜 봐서 바짝 말랐어요. 다이어트 합니까? 빠짝 마르게.

주께서 우릴 죽은 자로 봐요. 이 말은 제발 죽은 자를 네가 손댄다고 산 자 되는 게 아니니까 주께서 십자가에 죽은 것을 안다면 너의 자리가 구원이 되는 바탕이 되는 심판의 자리에요. 우리는 죽고 우리와 함께 있는 주님이 같이 살아남으로 주와 함께 살아나리라. 이게 로마서 6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는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라. 반드시 그리스도가 들어가야 돼요. 내가 주인공이 아니고 주님이 중심 지주가 되고 우리는 변두리, 결과물이 돼야 돼요. 솜사탕처럼 앞에는 싣고 뒤에는 결과물이 나오는 것처럼 우리는 주님의 작품이에요. 쉽게 말해서 주님의 것이에요. 주님의 것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모습을 성막을 통해서 보여주지요. 그 당시 백성들이 얼마나 감격했겠어요. 자기가 아는 수준에 있어서는 물질로 만든 지정된 터에 거기에다 금박을 입힌 아카시아 나무 재료로 성막을 만들고, 40장 34절 보세요. 누가 읽어보세요. “그 후에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매” 보세요. 얼마나 폼 납니까? 이렇게 신비할 수가 어디 있어요. 참 신비하지요. 분명히 나무 조각으로 만들고 금으로 만들었는데 갑자기 아우라가 퍼지면서 하나님 영광이 드러나니까.

새순교회 합기도도장 할 때 갑자기 아우라 남겨놨습니까? 만약에 남겨놨으면 얼마나 놀라겠습니까? 만약에 그것으로 놀란다면 그것이 올무가 되는 거예요. 왜? 만약에 이 책상에 천사가 나타났다면 이 책상 못 치웁니다. 아까워서. 어떤 책상인데. 세상에 어떤 작품도 천사를 유도하는 작품이 없잖아요. 천사가 앉았던 그거잖아요. 놋 뱀을 음란이 섬기고 기드온의 에봇을 섬기고 언약궤를 섬기고, 그게 다 물질이죠. 그게 다 우상이에요. 예배당을 섬기고. 큰 예배당 파이프오르간을 섬기고.

그 당시 수준이 이 정도 수준밖에 안 됐어요. 우리 제사장 멋있다고, 제사장은 대단하다고. 그런데 하나님은 제사장, 나답과 아비후를 죽여 버렸는데. 그게 뭐냐 하면, 고정된 성막은 맞아요. 그런데 고정된 성막은 진짜 고정된 언약궤, 영원한 성전을 향하여 그들은 멈추지 않고 이동해야 됩니다.

여러분은 이동이라 할 때 뭘 생각합니까? 이동이란 반드시 공간 이동, 장소 이동을 말하지요. 그런데 시간 이동을 생각해봤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시간을 통해서 이동시킵니다. 이게 어렵다는 것이 뭐냐 하면, 우리는 시간이 있다고 생각하잖아요. 오늘이 6월 3일이죠. 우리는 내일 되면 6월 4일이 있다고 생각하잖아요. 그러나 이건 성경적이 아닙니다. 시간은 미리 있는 게 아니고 그때그때마다 예수님이 시간을 만들어요. 왜냐하면 예수님은 시간의 주가 되시기 때문에, 역사의 주가 되시기 때문에.

내일에 일어날 어떤 일도 예수님의 허락 없이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내일에 일어날 모든 일은 주의 허락이 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에요. 어떤 것도. 그래서 발걸음을 세시고 참새를 키우시는 머리카락을 세시는 이유가, 네가 키를 한 자나 자라게 할 수 있느냐?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라. 그건 네가 걱정할 권한이 있지 않다. 내일은 내가 만드는데 네가 주제넘게 왜 끼어드느냐 하는 거죠.

자살하는 사람이 어리석은 이유가, 내일 희망이 없다고 자살하거든요. 그런데 사람이 오늘까지 있었던 것도 자기 힘이 아니었어요. 성령이 안 받다보니까 악령이 달렸으니까 악마한테 시달린 거예요. 지금껏 네가 이룬 게 뭐가 되는지 봐라. 다 소용없잖아. 살아야 뭐하나. 차라리 죽어라. 네가 이래서 인간 대우받고 살겠어? 공무원시험에 또 떨어졌지. 그래서 아파트 옥상에서 떨어져서 곡성 공무원을 덮쳐서 같이 죽었어요. 그 공무원이 타이밍 1초만 어긋났으면 안 죽었어요. 그런데 아이는 살고 아내는 뒤에서 그 광경을 보고 남편은 죽어버렸어요.

세월호도 마찬가지고 참새도 하나님 뜻이 아니면 떨어지지 않습니다. 참새가 아직 안 떨어진 것은 주님의 허락이 없기 때문에 그래요. 어젯밤에 영혼을 안 데려가서 지금 계신 거예요. 데려가서 이 모든 것이 누구 것이 되겠습니까? 그 말은 평소에 잘하라는 말이 아니고 지금 있는 이것이 나 때문에 내가 있는 게 아니고 주님 자기 숙제한다고 우리가 만들어지고 지금까지 살려온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내 걱정은 내가 왜 합니까? 참 말은 쉽다. 이론은 쉽네요. 내 걱정을 내가 왜 하지. 집값 내려갔다고 왜 걱정합니까? 말은 굉장히 쉬운데 우리는 그건 이론이고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거예요.

애굽에서 나왔던 사람들에게 성막이나 제사장 같은 수준을 내세우는 이유가 그들은 보지 않고는 못 믿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들은 모세가 산 위에 올라갔을 때 모세가 안 보이지요. 아무것도 안 들고 가서 한 이틀 만에 내려올 줄 알았어요. 일주일 지나도 안 내려와요. 골든타임 지났어요. 72시간 지났어요. 죽었어요. 어떻게 해야 됩니까? 애굽에서 나왔을 때 알았던 상식들은 다 끌어 모아야 돼. 모세가 말하기를 여호와란 분이 우리를 애굽에서 끄집어냈데. 홍해를 갈라지게 하고 어린양 피 바르라고 했데. 그렇다면 그들이 할 일은 딱 하나밖에 없어요. 여호와란 신을 나름대로 섬기면 돼요.

섬기는 방식은 뭐냐? 애굽에서 하던 그 방식을 그대로 하면 돼요. 애굽에서 신을 어떻게 섬겼습니까? 중간 매개물 없이는 안 섬겼거든요. 귀한 것을 드리지 않고 신을 섬기는 법은 없다고 느꼈거든요. 그래서 그들은 금가락지를 뺀 겁니다. 귀한 패물을 빼서 녹이니까 아론 말로는 불 속에서 금송아지 나왔다고 하지만 그건 너무 과장되고, 녹여서 뭔가 형체를 만들었을 것 아닙니까. 자비로운 형상, 그 형상은 인간의 뇌리에 기억하고 있는 것 중에서 괜찮은 형상을 모방해서 만들었단 말이죠. 그게 뭐냐? 금송아지에요. 금송아지를 우상이라 해요.

그런데 뭐가 우상이에요? 사실은 금으로 만든 게 우상이 아니고 그런 게 나왔던 출처, 우리 자체가 보이지 않는 모세가 보기에 우상이 되는 겁니다. 보이지 않는 모세가 세상에 40일 만에 살아 내려옵니다. 세상 신기록인데 아직 누구도 깨지 못했어요. 40일 만에 물도 안 마시고 잠도 안 자고 멀쩡하게 뭔가 들고 나올 힘이 있었으니까 대단한 에너지지요. 내려오면서 돌 판을 깼습니다. 너희들은 계약을 모른다.

결국 그들은 모든 인간들은 하나님의 언약을 모르는 거예요. 그러니까 언약을 대체해서 애굽에서 익히 들었던 들은풍월로 신을 기쁘게 할 만한 것들, 십일조 바치고 주일성수하고 이런 것들 끌어 모으면 그걸 하나님이 받아 줄줄 알았어요. 뭘 몰라요? 하나님의 언약을 몰라요. 새 언약을 몰라요. 새 언약은 우리가 바치는 게 아니고 예수님이 흘린 피,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그 언약을 몰라요.

그러면 십자가 피라 하면 그들이 믿습니까? 안 믿어요. 이렇게 합니다. 피 믿어줄게, 합니다. 피는 믿어주는 게 아닙니다. 그건 옛날에 바쳐서 구원받는 똑같은 방식으로 피를 믿는 것밖에 안 돼요. 피를 믿어주는 게 아니고 우리 자신이 피로 인하여 현재 존재하는 전부가 주님의 피의 작품이다. 그걸 다른 말로 죄인의 모습으로 살아간다는 겁니다. 죄와 피의 만남, 거기서 감사가 나오고 모든 것에 대해서 고마움이 나오죠. 이게 영원히 고정돼있는 성전입니다. 언약궤가 고정돼있기 때문에. 언약이 완성된 그것이 발현된 것이 우리의 모습이기 때문에 고정된 거예요.

그래서 이건 뭐냐? 이동된 시간과 공간은 고정된 장소에 응집이 돼요. 초점이 됩니다. 그 초점이 뭐냐? 시간과 공간을 친히 만들어내시는 분에게 초점을 맞추는데 독생자 예수님에게 맞춰집니다. 예수님의 성전이 완성됩니다. 예수님이 영원한 성전입니다. 예수의 영원한 성전에서 성령이 와버리면, 예수님이 성령을 보냈다는 말은 월남치마를 입었단 말입니다.

여자들이 큰 치마를 입고 앉으면 치마가 면적을 많이 차지합니다. 화투 칠 때 조심해야 됩니다. 속임수를 쓸 수 있습니다. 치마가 성령입니다. 성령이 멈추는 범위 안에서는 모든 성전은 하나의 성전으로 고정됩니다. 그 안에 예수님의 십자가가 반복해서 발현되지요. 그게 능력을 행사하게 되는 겁니다. 그 지점을 향하여 지금 성막은 시작된 겁니다. 1월 1일에. 그리고 7월 10일이 하이라이트지요. 성전에서 전체 모든 백성의 죄를 용서받고, 1월 1일이 되면 시간이 다시 처음으로 돌아오죠.

이 시간은 그냥 목적 없는 시간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가 등장하면 시간도, 공간도 날아가고. 그래서 예수님이 오시면 지구에 모든 공간, 지점들은 몽땅 다 사라집니다. 마치 노아홍수 때 눈에 보이는 것은 다 사라지는 것처럼 예수님 오시면 이 세상은 불타서 다 사라집니다. 그리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주어지게 됩니다. 주어지는 게 중요한 게 아니고 그걸 믿는다고 구원되는 게 아니고 그 새 하늘과 새 땅에 누가 들어가는지 알아야 돼요.

누가 들어가느냐? 이미 그전에 예수님에 의해서 작품화된 사람만 들어가죠. 주님의 성령의 인치심을 받아서 너는 네 것이 아니고 예수의 것임을 알아챈 사람만 “주여, 어서 날 데리려 오시옵소서.” 그래서 앞으로는 빨리 죽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마시고 아예 날 데리러 오라고 하세요. 그 말은 뭐냐 하면, 공중에서 불 떨어질 때 밑을 보면 얼마나 아찔하겠나, 재미있겠나, 그런 뜻이 아니고 나는 땅에 있으나 공중에 붕 뜨는 주의 것이라는 고백이죠. 범사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의 성막을 생각하면서 지정된 장소와 시간이 있었던 그 시절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음을 이제는 알았습니다. 예수님 오실 때까지 모형과 그림자로서 주어졌던 그것임을 깨닫고 오늘날 우리도 이 땅에서 주의 증인으로 모형으로 산다는 것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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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223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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