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0장 30절(가락-내 안에서)160517b-이 근호 목사
요한복음 10장 30절(가락-내 안에서)160517b-이 근호 목사
이름 : 충성모(IP:222.99.181.154)
요한복음 10장 30절(가락-내 안에서)160517b-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을 시작하겠습니다. 여기 오늘 10장 34절~36절에 보면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율법에 기록한 바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 하물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가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는 것으로 너희가 어찌 참람하다 하느냐”라고 되어 있지요. 주석책에 보면 이것을 사람들은 이렇게 해석하고 있어요. ‘아, 인간은 인간이 아니고 신이구나. 성경에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사람들을 신이라 했기 때문에 말씀만 받으면 신이구나.’ 그러니까 김신, 박신, 최신이 되겠지요. 장신이고 황신이고 총신이고.. 하여튼 신들의 파티, 전부 다 신들처럼 행사한다. 이렇게 주석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주석을 하면서 여기에서 더 큰 문제가 생겨요. 비록 우리가 인간이었지만 결국 하나님이 말씀을 준 것은 인간의 위치에서 신격화시키기 위해서 말씀을 주었다고 결론을 내려요. 목표가 생겨버렸어요. 인간에서 출발해서 절대자가 되기까지 신이 되는 그것이 기독교의 이 복음을 주신 이유이고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이것이 목적이 되니까 신이 되는 조건이 궁금하겠지요. 신이 되는 조건은 신의 형상을 입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의 형상을 닮으면 닮을수록 점점 더 신이 된다. 이렇게 결론을 내립니다.
신이 된다고 했는데 그러면 신의 모습이 어디 있느냐 ‘에베소서 5장에 “거룩하라”라고 했고 베드로전서 2장에 보면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라고 했으니까 경건과 거룩과 선한 일을 극대로 보이게 되면 어떤 신의 경지에 들어서는구나.’ 이렇게 되어 버려요. 그런데 신의 경지에 들어섰다고 치고 약간 곁눈질해서 밑을 바라보다보면 헉헉거리고 아직까지 올라오려고 애를 쓰는 사람이 있잖아요. 그러면 그 자체에 계급이 발생되는 겁니다. 높은 경지에 있는 사람과 낮은 경지에 있는 사람, 내신 성적이 차이가 나요. 그러면 교회에 계급이 발생되겠지요.
그 발생된 계급을 구체적으로 표시한다면 목사가 제일 높고 목사 밑에는 장로, 부교역자는 목에서 삐져나와야 되겠지요. 흔히 목사에서 장로로 내려가는데 그 사이 목에서 삐져나와서 부목사, 부목사 밑에 전도사(총리직할)가 있고요 그 다음에 장로 밑에 장립집사, 집사이고요, 장로에서 따로 삐져나와서 권사인데 권사는 보통 집사에서 올라오고 집사 밑에는 보통 세례 받은 성도이고 그 밑에는 학습 받은 성도이고 그 밑에는 초신자라든지 드문드문 오는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조직도를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면 교회에 나오는 목표는 뭡니까?
처음에 1단계는 9급 공무원이고 2단계는 7급 공무원으로 계속 승진을 해야 되는데 올라갈 때마다 십일조와 돈을 요구하는 거에요. 십일조는 기본이고 증축을 한다든지 주차장을 넓힌다든지 목사관 사택을 넓혀준다든지 자가용을 바꿔준다든지 어떤 선교 단체를 도와준다고 하면서 또 목돈을 내게 하는 겁니다. 이단에서는 장로급에 숫자까지 집어넣어요. 14만 4천이 되게 해야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1년에 전도는 몇 번 해야 되고 (14만 4천이라는 티오가 정해져 있으니까) 또 몇 명이 탈락해야 돼요. 14만 3920명이 되면 80명의 티오가 생기잖아요. 그러면 전국에서, 세계에서 또 뽑아들여서 마지막 80명을 마저 채우면 또 14만 4천이 되는 거에요.
얼마나 돈을 갖다 바치고 얼마나 충성을 해야 이것이 되는 겁니까? 그런데 이것이 다 천주교에서 배운 거잖어요. 이게 교회이고 또 옆에 있는 교회에는 주교가 있고 주교 다음에 카디널(추기경), 그 다음에 밀실에서 투표해가지고 교황을 뽑지요. 이게 뭡니까? 이게.. 아까 첫째 시간에 이걸 퇴행이라고 이라고 했지요. 어린 시절, 장군놀이, 딱지따먹기를 하는 거에요. “펼쳐놔.” “별 두 개.” “별 한 개. 아이, 졌다.” 그 다음에 또 별 세고요. “너는 상사.”, “나는 중사.” 딱기 따먹기하는 것과 똑같은 거에요.
주 안에 있어야 되는데 과거로 가는 거에요. 과거로. 과거의 어떤 지위에서 우러름을 받고 사랑을 받는 그 아름다운 추억에 잠길 그때, 정신적으로 유쾌해지는 거에요. 자기의 기분이 좋았던 겁니다. 그 기분이 좋은 것을 축복의 상태로 보는 겁니다. 이런 짓거리를 한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죽였거든요. 예수님께서는 그걸 지금 빙자합니다. 이렇게 나와요. 요한복음 10장 34절에 보면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율법에 기록된 바”라고 나오거든요. “너희 율법”이라고 했는데 이 말을 설명하자면 율법을 누가 주었습니까? 예수님이 주셨지요. 그러면 율법의 진수(본질)는 누구만 알고 있습니까? 출제위원이 정답을 알잖아요. 그렇지 않습니까?
천국에서 교회에 다니나 안 다니나를 기준으로 삼아 그렇게 문제를 출제했습니까? 사도 바울이 교회에 나오면 구원을 받고 교회에 안 나오면 구원을 안 받는다고 이야기했습니까? 이게 사도 바울이 이야기한 구원의 기준이었습니까? 아니지요. 사도 바울은 무엇이라고 이야기했습니까? “너희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와 죽은 것 외에는 알지 않기를 원한다” 이미 그 기준은 십자가로 확정이 되었습니다. 교회가 아니고 십자가에요.
그 이유가 뭡니까? 사도 바울이 계속 교회를 보고 지적을 하는데 지적을 하면서 “너희들이 내가 주는 십자가를 욕되게 하느냐”라고 이야기를 해요. 그러니까 “어이구 기특하구나. 천당 가거라.”라고 하는 게 아니고 교회를 보고 이야기하기를 “너희들은 십자가의 원수로 행동하고 있다.”라고 본 겁니다. 빌립보서 한 번 봅시다. 평생을 교회를 다녀도 도대체 천당에 가는 기준도 모르면서 수십 년 교회에 다닌 사람들이 한두 명이 아니에요.
빌립보서 3장 18절을 누가 한 번 읽어보세요. 다른 분이 읽어보세요.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여기에 “원수”라고 하였는데 원수는 적이지요. 하나님의 적은 하나님의 적이 아니고 하나님이 이 땅에 뭔가를 제시하고 무엇의 적이 곧 하나님의 적이라고 하셨습니까?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가 곧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거에요.
오늘 요한복음 10장에서 “아버지와 내가 하나”라는 말은 자꾸 “하나님, 하나님.”이라고 하는데 그러지 말고 지금 내가 아버지하고 동일한 기능을 하고 있다는 거에요. 그런데 “너희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하면서 왜 같은 기능을 갖고 있는 나를 믿지 않느냐”라고 하시는 거에요. 그런데 유대인들(그 당시 바리새인들)은 그렇기 때문에 믿을 수가 없는 거에요. 바로 그렇기 때문에 믿을 수가 없는 거에요. 자기들이 지금 잘하고 있는데 구태여 중간에 누가 끼어든다는 것을 상당히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거라고 생각하는 거에요. 그럴 필요가 없는 일, 쓸데 없는 일이라고 지금 보는 거에요.
만약에 하나님이 예수님을 중보자로 보냈다면(그들 생각에 그럴 일이 없지만) 지금 하나님께서 앞뒤가 안 맞는 일을 하신 거에요. 왜? 말씀을 주시고 율법을 주시고 “너희들은 하나님의 신이니까 신처럼 살아라”라고 하셔서 “예.” 하고 지금 잘살고 있는데 거기에 또 중간에 끼어들었다는 말은 “네가 백날 해봐야 실패야.” 그런 뜻으로 이해가 되잖아요. 그런데 본인이 아무리 검토를 해봐도 자기들이 추구하는 방향이나 목적성에 문제나 하자가 있다고 생각이 안 드는데 어떻게 합니까? 이게 문제인 거에요.
나한테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안 든다 이 말이지요. 사도 바울도 자기 자신에 대해서 뭐라고 표현했느냐 하면은 “나는 율법에 흠이 없다”라고 했어요. 그러면 한 번 생각해봅시다. 율법에 흠이 없다고 자부하는 사람이 율법으로 죄를 알겠어요, 모르겠어요? 제 말이 어려운 말이 아닌데요. 율법에 흠이 없으면 100점 만점에 100점인데 무슨 틀린 게 나와요? 안 나오지요. 율법에 흠이 없으면 율법에 흠이 없는 거지요. 그러면 율법으로써 죄를 안다, 모른다? 모르는 거에요.
같은 논리인데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일단 율법을 가지고 죄를 알고 그 다음에 ‘내가 죄인이구나. 나는 어찌 할고?’ 그럴 때에 십자가를 들이대면 “아이고, 감사합니다.” 하고 믿는다는 거에요. 이것은 지금 사도 바울의 말을 완전히 곡해한 겁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이미 십자가 안, 예수 안에 있기 때문에 율법의 기능은 내가 생각지도 못한 모든 것이 죄가 된다는 것을 소급해서 까발려주는 것이라고 하는 거에요. 갑자기 어려워져버렸지요.
지금 아버지와 내가 기능적으로 하나라고 했는데 이 하나라는 말은 시간의 요소가 삭제되어 없다는 뜻이에요. 더 어렵게 이야기해서 죄송합니다만 할 수 없어요. 기능이 하나가 되면 시간의 요소가 없어요. 여기 요한복음 10장 27절~28절에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라고 했잖아요. 이것이 언제 유효합니까? 5월 17일(오늘)만 유효합니까? 어제로 sale이 끝났어요? 시간의 요소가 들어갑니까, 안 들어갑니까? 시간의 요소가 안 들어가지요.
예수님의 기능은 그 자체로써 알파요 오메가이기 때문에 이천 년 뒤에도 이 원칙을 유지하고요, 이천 년 전에도 이 원칙이 유지되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의 모든 행동은 시간의 요소가 가미되어 있어요. 왜냐하면 인간의 모든 행동은 전에 했던 행위의 기억에 준해서 일어나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오늘 이런 행동을 했다면 다시는 안 그래야지가 깔린 채 행동을 한다고요. 왜냐하면 인간은 모든 것을 실수의 반복을 통해서 개선하는 쪽으로 자기의 행동을 조절하기 때문에 그래요. ‘아침에 연속극을 보고 나오니까 차가 딱 지나가는구나. 다음에는 연속극을 덜 보고 해야 차가 오는구나.’ 이렇게 실패를 해보고 그 다음에 실패를 수정해서 시간에 딱 맞추어서 나가는 거에요. 그러니까 그 전에 기억이 된 게 있어야 돼요.
인간의 시간요소는 이렇습니다. 만약 인간의 시간요소를 수직선이라고 하고 가운데 지점을 A라고 한다면 사람들은 A라는 지점을 현재라고 합니다. 그런데 현재가 지금 나타난 현재만 현재가 아니고 현재라는 시간 밑에 사선으로 얼마 전에 있었던 과거가 과거 1으로 기어들어 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