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의존교회160513a,b (핍박)―이 근호 목사
서울 의존교회160513a,b (핍박)―이 근호 목사
이름 : 김창길(IP:118.91.121.36)
서울 의존교회160513a (핍박)―이 근호 목사
디모데후서 3장 10절부터 보시겠습니다.
10 나의 교훈과 행실과 의향과 믿음과 오래 참음과 사랑과 인내와
11 박해를 받음과 고난과 또한 안디옥과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에서 당한 일과 어떠한 박해를 받은 것을 네가 과연 보고 알았거니와 주께서 이 모든 것 가운데서 나를 건지셨느니라
복음을 전하는 일이 참 좋은 일인데 왜 핍박을 받죠? 이것은 그 전제가 되어 있는 것이 거짓이 전제로 되어 있어요. 거짓말이 지배층에 유통되는 세계에서 성령 받은 주의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 거짓에다가 진리를 전하니까 여기서 나오는 반응들이 있는데 그 반응을 사도 바울이 소개하고 있는 겁니다. 그것을 핍박이라고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진리가 거짓을 만나서 핍박을 나눈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 우리가 무엇을 테스트하고 싶으냐 하면 나도 과연 진리에 속했느냐? 구원받았느냐를 테스트를 하고 싶어서 이 거짓된 세상을 향하여 진리를 한번 전파해 보는 거예요. 전파해 보면 이 핍박이 나옵니까? 안 나옵니까? 고난이 나와요? 안 나와요? 뭐 별 핍박이 안 나와요. 별 고난도 안 받아요.
사도 바울은 돌로 침을 당하고 쫓겨나고 막 이런 현상이 있는데 우리가 같은 성령 받은 성도라고 자부하면서 복음을 전하니까 저 쪽에서 세상쪽, 안 믿는 쪽에서는 별 관심을 보이지 않을 때 야, 내가 뭐 잘못 전한 것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죠. 거기서부터 우려하는 상황이 벌어져요. 진리를 전할 생각은 안 하고 핍박 받을 아이디어만 자꾸 끄집어내는 겁니다.
그래서 자기가 예상한 핍박이 왔을 때 “그러면 그렇지 역시 나는 성도 맞구나!”라고 스스로 자기를 위로하고 확정 짓고자하는 시험이 유발될 수가 있습니다. 상당히 주위 해야겠죠. 핍박 자체를 자기가 성도됐는가 안 됐는가의 결정하는 기준으로 삼고자 하는 그러한 일이 일어날 수가 있어요. ccc에 있는 선교단체에 있는 애들이 일부로 거지꼴을 해서 돈도 없이 복음 전하면서 내 쫓김을 당하고 소금을 뿌리고 그럴 때 마다 어떤 개인적 기쁨을 느끼면서 주여! 할렐루야! 감사합니다. 저와 같은 동일한 고난을 받은 것을 감사합니다. 라고 하는 것, 자학적인 쾌락의 일종이에요.
그런 식으로 자신의 믿음을 시험하는 것은 마귀적인 술책, 전략에 불과합니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방금 이야기한 것이 어디서 문제가 되느냐 하면 복음의 내용에 대해서 무엇으로 확인하려고 하느냐 하면 형식을 통해서 내용이 진짜인 것을 확인하고 싶은 유혹을 우리 인간이 받게 됩니다.
예를 들어서 핍박받는다는 것이 형식적인 핍박을 받게 되면 그래, 내가 복음을 제대로 전했기 때문에 이런 핍박을 받는 거야! 하고 스스로 자위하는 현상이 일어난다 말이죠. 그런데 이 핍박이라는 것이 어떤 형식화 될 수 있느냐 하는 이 문제가 등장하겠죠. 몇 대를 맞아야 핍박이고 슬쩍 건드리면 그것은 핍박 아니고 그런 식으로 양적으로 정해 질수 있겠습니까? 가해지는 에너지 양, 또는 고통의 양으로 이것이 핍박이고 핍박 아닌 것을 결정지을 수 있느냐 이 말입니다.
욕설을 언제까지 들어야 욕설이고 어디까지 들어야 욕설이 아닌 것을 스스로 판정해 버리면 벌써 기준 자체가 자기가 끄집어낸 것이 기 때문에 옳은 것이 아닌 것이 됩니다. 그래서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내용은 형식을 부정함으로서 내용이 주어지는 겁니다. 형식이 깨지는 거예요. 형식이라는 말은 여기 있으나 저기 있으나 동일한 양적인 모양새를 유지하는 것을 형식이라 합니다. 여기서 복음전하다가 세대 맞은 것이 이쪽에 가서 세대 맞으면 똑같은 복음을 전한 것이 될까요? 이것은 아니죠.
여기서 침 뱉음을 당했는데 똑같이 저쪽에 가서도 침 뱉음을 당해야만 그게 복음을 전한 것이 됩니까? 아니죠. 이런 것이 사도가 핍박받고 고난 받았다고 하니까 소위 흉내 내는 것, 형식화시켜서 나도 사도 같은 부류에 속한 것을 스스로 성급하게 주려고 하는 것은 어디서 잘못 되었느냐 하면 반복되는 예수님의 사건에는 형식이라는 것은 용납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사건을 반복할 때, 갈라디아서 3장 1절에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할 때 그 십자가를 주께서 반복할 때 동일한 형식으로 주어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마다 환경마다 다 다르고 시간마다 세월마다 처한 상황이 다르기 때문에 똑같은 양의 고통을 받았기 때문에 고난 받는다는 생각은 하지 말아야 되는 겁니다.
이것은 남에게 고통을 받는다 하기 전에 먼저 전제할 것이 있어요. 그것은 바로 내가 내 자신에 대해서 따로 내 자아 성을 형성하려고 했늘 때는 어떤 핍박도 거짓말입니다. 내 자신이 따로 형성이 되어 있을 때 나는 이렇게 복음을 전하면서 핍박을 받으니까 나는 성도 맞다고 따로 이렇게 자아 정체성을 구축하려고 시도 하게 되면 어떠한 주님의 핍박도 그것으로 표현해 낼 수가 없습니다. 가짜입니다. 거짓입니다.
분명히 사도 바울은 이 거짓된 세계에 복음을 전하니까 핍박이 왔잖아요. 그런데 사람들은 거짓된 세계에서 자기는 빠져 있다고 선입관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단들아 물러가라 하면서 본인은 이단인지 아닌지 생각하지 않고 자기는 당연히 이단이 아닌 것으로 생각하고 이단들아! 물러가라! 너는 나를 핍박하고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이렇게 나온다 이 말이죠.
사단아 물러가라! 네가 남을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이렇게 하는데 네가 거짓됨에서 벗어난다는 그 기준은 누가 정한 거예요? 그것은 본인이 그렇게 정하고 싶은 거예요. 자기 자신은 여기서 빠지고 싶은 겁니다.
자아를 만들 때 자아의 내용을 채워야 되는데 형식 가지고 자아를 구축해 버리는 거예요. 형식가지고 자아를 구축하는 방법은 간단한데 기억입니다. 옛날에 내가 이렇게 핍박을 받았기 때문에 내가 이렇게 기도하가 응답 받았기 때문에 그 과거의 기억들을 주워 모으면 이것은 나한테 스스로 생각하기에 형식화 되어 있는 나의 주체성이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이 말입니다.
그러나 이 자아라고 하는 것은 그것이 있는 한 항상 십자가의 복음의 가리게 되어 있고 훼방하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아가 있는 이상은 복음을 어떻게 설명해도 그 복음은 나한테 유리하고 나를 정당화 시키고 나 잘남을 인정해 주는 복음이라고 왜곡되게 내가 자꾸 강요하게 됩니다. 내가 여기 있는 보람으로 살아가도록 주께서는 나에게 경려 해 준다는 생각을 지울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복음에 의한 핍박은 나는 세상이 핍박했다 하지 말고 내가 나를 복음으로 인하여 핍박을 하고 있는지 아닌 지를 스스로 확인해 봐야 합니다. 내가 복음을 전했으니까 이만한 대우를 받아야 된다는 그것이 곧 내가 주님의 복음을 훼방하고 가리는 짓이 되는 겁니다. 복음을 이만큼 전했으니까 이만한 대우를 받아도 된다는 그 사고방식이 결국은 주님을 위한 걸까요? 자신의 정당성을 위한 것일까요? 자신의 정당성을 위한 거죠. 나는 오래 살아야 돼! 나는 안 아파야 하고 나는 안 죽어야 돼! 나는 힘든 일이 없어야 돼! 왜? 이것은 이유가 없죠. 왜? 나니까 여기에 무슨 이유가 있어야 돼? 나는 불편함이 없어야 되고 나는 유쾌해야 되고 행복해야 된다. 남들이 묻습니다. 왜 그래야 되는데? 그 이유를 나한테 물으면 안 되지! 너는 안 그래? 왜? 나니까 그게 해답이에요.
나는 나니까 내가 그러고 싶으니까 아무 이유 없어요. 그게 전부에요. 복음을 위하고 주님의 영광을 위한다고 하지만 그 안을 다 뜯어보면 그 내용이 뭐냐 하면 나는 나답게 살고 싶다! 그것만 달랑 들어있고 복음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의 핑계에 지나지 않습니다. 로마서 5장에 보면 환란과 핍박과 고난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주신 그 고난이라고 하는 것은 너의 생애가 아니고 예수님의 생애에 참여하고 동참하는 그러한 능력으로 들어가게 되어 있어요.
우리 신직수 성도님 계시는데 예를 들어 주님이여! 저에게 주님의 복음을 주시옵소서! 그래서 나라는 인생을 버리고 신직수 성도님의 인생에 합류하게 하옵소서! 하는 말이 우리 입에서 나올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이게 우리 힘으로 안 돼요. 왜냐하면 나는 나니까, 나는 나다워야 되니까 나 빼놓고 나를 포기하고 다른 사람 속에 들어간다는 것은 우리가 허용이 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나를 나답게 하기 위해서 하는 모든 애쓰는 수고는 고난이 아니고 고생한 거예요. 마음 고생한 거예요. 불안과 근심을 떨쳐버리고 행복을 향하여 그야말로 아주 치열한 투쟁을 하고 있는 겁니다. 심적으로 정신적으로 신체적으로 투쟁을 하고 있는 겁니다. 이거 가짜입니다.
복음은 예수그리스도의 생애입니다. 예수님의 일생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느냐 하면 우리는 아니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그 세계에 참여하려면 하나만 알면 됩니다. 내가 나답게 나만 챙긴다는 사실이 이게 허구라는 것을 감잡아야 됩니다. 이게 분명히 헛빵이라는 겁니다. 어디에 비해서? 세상 돌아가는 것 하고 내가 지금 소망하는 것, 내가 잘되는 것 하고는 분명히 헛바퀴가 도는 거예요. 안 맞는 겁니다.
예를 들면 안 믿는 사람들이 제사를 지낼 때 진짜 귀신이 옵니까? 진짜 귀신이 와서 식사를 해서 절 한번 하고 나니까 사과에 이빨 자국 나고 그럽니까? 아니죠. 아무리 절을 해도 사과는 멀쩡이 있다 이 말이죠. 이것처럼 아무리 하나님이여! 저를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 주께서 구원을 주셨죠! 아무리 해도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에요. 없는 귀신이 자꾸 헛바퀴 도는 짓인 거예요. 아무리 그렇게 소원하고 기도해 봤자 모든 만사는 주님의 뜻대로 돌아가는 것이지 내 뜻대로 돌아가지 않는 거예요.
심지어 앙탈 부리고 주님께서 은혜를 안 주시면 저는 예배당 유리창 깹니다. 해도 유리창 깨 봤자 주님은 간단해요. 그거 네가 깬 게 아니고 내가 너보고 깨게 했다. 이러면 끝나는 문제에요. 어떤 경우라도 내가 이 세상에서 주인공처럼 행세하는 것은 주님께서는 허락한 적도 없고 인정한적도 없고 그런 일도 없었습니다. 다만 우리가 헛꿈을 꾼거예요. 세상은 내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헛꿈을 꾼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하는 것은 핍박도 아니고 뭐냐 하면 전부 다 이것은 고생하는 겁니다.
무슨 고생? 나의 가치를 포기 못하겠다는 그런 악바리 같은 그런 고집 때문에 생긴 헛짓이 헛짓이 아니고 그게 마치 목숨을 걸 일인 것처럼 착각에서 온 고생담입니다. 결국은 죽게 되면 자기의 손을 놓게 될 것을 진작 손을 놓지 그 무슨 낙을 보겠다고 결국 죽을 인생을 안 죽을 것처럼 그렇게 아등바등하는 겁니까? 죽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주께서 죽이신다고 생각하시면 문제는 간단하게 해결되는 거예요.
주께서 매일같이 조금씩 죽이시는 거예요. 어쩌면 갑자기 죽을 수도 있지만 죽어가면서 죽음의 흔적을 들어내는 것은 당연한 거고요. 주님의 안목으로 볼 때는 우리한테 문제가 없습니다. 문제없다는 노래 있잖아요. 아무 문제없어요. 물론 그 뒤에 말이 좀 수상하지만 나는 할 수 있다 이렇게 나오면 곤란한데 우리는 아무 문제없어요. 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사고의 발상입니다. 발상의 전환이죠.
아무 문제없는데 왜 자꾸 본인이 문제를 유발합니까? 아기가 태어날 때 피부가 참 곱잖아요. 아무 문제없어요. 피부가 아주 고와요. 토실토실 그런데 애가 손톱을 길어서 자기의 다리를 긁는다면 자기가 자기의 피부를 긁게 되면 여기에 상처가 붉어져 오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