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0장 30절(가락-내 안에서)160517a-이 근호 목사
요한복음 10장 30절(가락-내 안에서)160517a-이 근호 목사
이름 : 충성모(IP:14.35.214.15)
요한복음 10장 30절(가락-내 안에서)160517a-이 근호 목사
요한복음 10장 30절에 엄청나게 간결하게 축약된 말씀이 나옵니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이 말씀 자체가 성립이 안 됩니다. 하나라면 나와 아버지라는 말을 하지 말아야 돼요. 둘이 되니까요. “내가 아버지다.”라고 하면 말이 되겠지요. 숫자를 사물에 붙일 때 그 사물은 두 개가 되면 안 돼요. 달랑 하나가 될 때만 숫자 1을 붙일 수가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남북이 한 민족이다.’라고 할 때 1자가 들어가잖아요. 그때는 개인을 하나하나 세는 것이 아니고 이념적으로, 관념적으로 우리는 한 민족이라고 할 때는 하나(1)라는 말을 거기에다가 붙일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내 남편하고 하나다.”라고 하는 말은 부부, 아내와 남편 말고 더 높은 차원의 둘이 합쳐서 하나가 되는 가정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마련할 때 거기에다가 1자를 붙일 수가 있어요. 애까지 합해서 4명이지만 우리는 하나라고 하는 것처럼 개인을 떠나서 추상적인 가정을 생각할 때는 그렇게 할 수가 있는 거에요. 가정은 사람이 아니고 추상 관념이지요. 사람에 대해서 “나와 아버지는 하나”라고 했을 때에 여기 우리 인간들 세계에서 하나라고 하는 것은 아까도 얘기했지만 추상적인, 초월적인(이것을 메타라고 합니다.) 어떤 개념이 하나 있어야 되는데 여기 예수님께서 나와 아버지를 하나라고 하실 때 이것은 사물에 붙이는 1은 아닙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면 이것은 어디에다가 붙인 것인가? 행함에 대해서 하나라고 붙인 겁니다. 행함을 다른 말로 하면 기능적으로 하나가 된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행함과 기능이라는 것의 영역은 어디에 해당되는가 하면 이 세상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 아버지와 아들이 하는 일이 하나가 되는 겁니다. 그리고 하늘나라에 가면 하나가 아니지요. 아버지 따로, 아들이 따로 있어요. 그러나 이 인간 세상에서는 아버지의 일과 아들의 일이 하나가 되는 거지요. 그런데 이렇게 하나가 된다고 언급하시는 이유가 있어요.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한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걸 단일신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단일신이라는 말을 하지 말고 유일신이라고 하는 게 더 좋아요. 유일과 단일이라는 말이 좀 다른데, 신이 하나밖에 없다는 뜻에서 단일신이고 독보적이라는 뜻을 쓸 때는 유일신이라고 씁니다.
너희들이 생각하는 신을 초월해서 너희들이 생각하는 그 신이 아니고 월등하게 모든 것을 전부 통합해서 하나밖에 없다고 할 때는 유일신이라는 말을 써야 합니다. 유일신을 신약의 용어로 하게 되면 (구약에도 나옵니다만) 주가 돼요. 오, 나의 주여. 주라는 말은 전쟁이 다 끝나고 난 뒤에 전쟁의 최종승리자에게 붙는 개념입니다. 모든 것을 다 평정한 거에요. 그래서 주가 되기 위해서는 앞에 전쟁을 하는 기능이 있고 전쟁을 할 때는 네가 옳다, 내가 옳다고 하다가 전쟁이 끝나버리면 최종승리자가 무조건 옳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승리했다는 것은 전쟁을 일으키는 그 영역에서 통치자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프로야구의 결승전에서 두 팀, 두산하고 한화가 붙는다고 합시다. (지금 꼴찌하고 있어서 한화가 붙을 가능성이 없지만..) 두산은 현재 1등이고 한화는 10등(꼴찌)이지만 둘이 결승전을 하고 있다면 둘 중에 한 팀이 우승자가 되겠지요. 그런데 만약에 두산이라는 프로팀이 우승을 하게 되면 대구에 있는 모든 토지와 제주도에 있는 섬은 다 두산 그룹의 소유가 됩니까, 안 됩니까? 안 되지요. 그들이 야구에서 1등을 했다고 나머지는 손을 대면 안 되겠지요. 야구에서나 최고지 바둑이라든지 회사 브랜드 중에서 최고는 아니잖아요.
그런데 신이 거론될 때는 그게 아닙니다. 옛날에 싸움을 할 때 신을 앞장세웠거든요. 네 쪽 신하고 내 쪽 신 중 누가 이기느냐에 따라서 “그래, 네 쪽 신이 이겼다.”라고 하면서 끝이 나는 게 아닙니다. 이긴 신이 저쪽의 신을 앞장세웠던 그 기존의 모든 것을 접수합니다. 신을 앞장세워서 모든 것을 가져가요. 출애굽기 잠깐 한 번 봅시다. 출애굽기 17장 16절에 보면 아말렉하고 전쟁하는 것이 나옵니다. 지팡이를 든 모세의 손이 올라가면 이기고 내려가면 지는 거에요. 모세의 손이 내려오지 말라고 옆에 아론과 훌이 손을 받쳐주었고 그래서 승리합니다. 이 대목은 교회에 좀 다닌 사람은 다 아는 유명한 대목이지요. 장로가 목사를 도와줘야 되지 장로가 이렇게 힘을 안 써주면 목사가 무슨 기분이 나서 하겠느냐. 목사는 모세고 장로는 아론과 훌이니까 장로가 옆에서 받쳐줘야 된다고 하거든요. 이번에 북한에 17차 전당대회할 때 35살 먹은 김정은이라는 애(?)를 60살 먹은 영감쟁이가 옆에 앉아서 아론처럼 받치는 모습이 나오잖아요. 이건 출애굽기 17장도 아니고..
모세를 받치는 게 아니고 지팡이를 받쳐올리는 겁니다. 그런데 15절에 보니까 싸움이 끝났습니다. 그리고 난 뒤에 그 이름을 여호와 닛시라고 했지요. 여호와 닛시라는 말은 여호와의 깃발이라는 뜻입니다. 깃발이라는 것은 (신의 표상처럼) 신이 계시면 그 신이 어떤 신이냐가 깃발로 상징이 되는데 그 깃발화된 단체가 지금 이스라엘, 우리 자신이라는 겁니다. 요즘 말로 하면 성도가 전부 다 주님의 깃발이에요. 우리 깃발을 막 날립시다. 여호와께서 전쟁을 하는데 이미 승리가 결정이 되고 난 뒤에 주님 쪽에서 자랑질을 하고 싶어서 흔들어 대는 깃발입니다. “보람찬..” 이런 노래를 부르면서 깃발을 흔들 듯이 우리의 모가지를 쥐고 흔드는 거에요. 이런 자도 아무것도 행한 것 없이 구원을 받았다고 깃발로 흔드는 거에요. 이게 여호와 닛시이고 이것은 전쟁이 끝났을 때 벌어지는 일입니다.
구약에서는 그 전쟁이 계속 있는 게 아니고 전쟁이 출몰해요. 그러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은 누구하고 전쟁을 해야 될지를 몰라요. 그때그때 달라요. 어떤 때는 블레셋이 쳐들어오다가 어떤 때는 아람이 쳐들어오다가 합니다. 어릴 때 물방개를 가지고 게임을 한 적이 있는데 (우리가 한 게 아니고 야마꾼들이요) 숫자를 만들어 놓고 돈을 걸고 물방개를 던지면 물방개가 자기 맘대로 가듯이 주님께서 옆에 있는 아람, 모압 등을 사용해서 물방개처럼 딱 떨어뜨리면 이들이 와서 전쟁을 해야 됩니다. ‘이번에는 블레셋을 한 번 집어넣어봐?’ 이렇게 하나님께서 적재적소에 전쟁을 하게 해서 잃어버렸던 여호와에 대해서, 하나님의 법의 약속에 대해서 되새기고 깨우치게 하는 기능을 하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실패의 반복을 통해서 장벽을 확장시키는 겁니다. 인생은 실패를 함으로써 내 힘으로 구원이 되지 않았다는 것을 성도에게 확인시켜 주는 겁니다. 그 실패는 성도 본인의 실패입니다. 성도는 매일같이 실패를 안 한 날이 없어요. 늘 실패해야 돼요. 사람이 실패를 안 하게 되면 이 사람은 하나님을 잊어버려요. 실패를 안 함으로써 하나님의 구원방식을 잊어버려요. 따라서 실패를 안 하게 되면 내가 생각하는 구원의 방식을 밀어부칠 가능성이 많습니다. ‘내가 이 정도로 착하니 누가 뭐래도 구원을 받겠지.’ 그것을 실패해야 됩니다. 그게 실패의 근거가 돼요. 그게 실패로 끝나야 돼요. 착하다고 자부하고 완벽하다고 자부했는데 그 완벽이 우연히 들이닥친 상황을(구약에서는 전쟁이지요.) 통해서 자신의 뻔뻔스러움과 위선적이고 가증스러운 면이 남들은 모르지만 본인은 그것을 얼굴이 뜨겁도록 느끼는 겁니다. 그럴 때 ‘아, 구원이라는 것은 내 손으로 달성되는 게 아니구나.’ 다시 되새기게 되는 겁니다.
이걸 제가 방금 실패라고 했지요. 그런데 실패라는 말보다 더 확실한 단어를 쓴다면 그것은 창피입니다. 누가 누구한테 창피하느냐 이 말입니다. 내가 나한테 창피스러워요. ‘이런 인간도 산다고..’ 하면서 자기가 자기한테 쥐어박는 겁니다. ‘아이고, 인간아. 너 왜 사니?’ 그런 생각이 드는 거지요. 표정들을 보니까 그런 경우가 거의 없습니까? 다들 지금 대범하시네요. 다이어트 한다고 그렇게 관리했는데 맛있는 피자를 한 판 먹고는 ‘인간아, 왜 사니?’라고 하면서 체중계에 또 올라가봐요. 그런데 몸무게는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몸무게는 주신 대로 다 보여주지요. 날마다 자기에 대해서 창피스러워야 됩니다.
그래서 우리교회에도 하나의 제도라고 해야 할까, 그런 것이 있는데 그것은 오후예배 때에 돌아가면서 기도하는 거에요. 그런데 대부분 안 합니다. 대부분 제가 혼자 기도 제목을 드리는데요. 웃지 마세요. 여러분들도 우리교회에 오시면 전부 다 안 할 겁니다. 그런데 왜 안 하느냐 하면은 공중 기도를 하게 되면 자신의 일대기가 나와요. 내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았는지가 나와요. 물론 이것을 안 들키게 다들 골라서 합니다마는 교회에 오래 다닌 귀신들이 귀신같이 알아내요. ‘고생 많이 했구나. 가정 사정이 안 좋구나. 오늘 남편하고 싸우고 왔구나. 자식이 말을 안 듣다가 사고쳤구나.’ 이런 것들이 나와요. 어떻게요? 억양을 통해서. 단어 선정을 무심코 하거든요.
그래서 일반 교회에서는 자기의 일대기를 감추기 위해서 틀에 잡힌 기도를 해버려요. 남북통일부터 해가지고 당회와 어린아이까지, 그저 대통령이 정치를 잘하고 세월호 아이들로 인해 걱정하는 부모들은 위로를 받게 해달라고 (착한 일 다한다고 거기까지 신경을 쓰고요) 하지요. 일대기로 하는 거에요. “우리 교회 부흥되게 해주시고 하늘나라를 확장시켜 주시고 전부 다 성령이 충만케 하시고”라고 하지요. 그런데 만약에 어떤 분이 우리교회에 와가지고 남북통일과 국제 평화를 이야기하고 그저 반기문 총장이 빨리 우리나라의 대통령이 되게 해달라는 식으로 기도한다면 아멘은 안 나오고 속으로 우우우.. 하겠지요. 왜냐하면 뻔히 알거든요.
그러면 자기의 이야기를 해야 되는데 자기의 이야기를 하게 되면 단어의 강조점이 다르고 자칫하면 울컥하는 수가 있어요. ‘저 사람은 또 뭐지? 집에 일이 있구나.’ 그렇게 되면 다 들킨 거잖아요. 그러면 결국 창피하잖아요. 그런데 창피해야 돼요. 창피하라고 그 제도를 만들어놨는데 전부 다 이 창피의 올가미에 안 말려들려고 하는 거에요. 인간의 모든 행동과 그 사람의 과거사가 다 드러나게 되어 있어요. 인간의 무심코 하는 행동 이런 것들이요. 다시 말해서 나는 무엇에 더 관심이 있고 무엇에 신경을 바짝 쓰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들통이 난다고요. 다른 것에는 내가 관심이 없는데 이것에 대해서는 내가 유난을 떨면서 거기에다가 바짝 신경을 쓴다는 것이 다 드러납니다.
그게 왜 창피스러우냐 하면은 예수님이 성경을 보는 관점과 다르기 때문에 그래요. 아까 기도할 때 자기의 일대기가 나온다고 했잖아요. 정답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성도의 일대기에는 본인의 일대기가 나오면 안 돼요. 예수님의 일대기가 나와야 됩니다. 이순신 장군의 귀신이 들린 사람은 무슨 일대기가 나오겠습니까? 이순신의 일대기가 나오고 안중근을 모시는 무당은 안중근이 나올 거란 말이지요. “어이, 일본아 물러가라.” 이런 식으로 할 거다 말이지요. 예수님의 일대기에는 이미..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늦게 오신 분이 있어서 다시 하겠습니다.) 지금까지 한 것을 다시 해보겠습니다. 하다 보면 자꾸 잊어버릴 것 같아서 내가 걱정이 돼서 말합니다.
“나와 아버지가 하나”라는 것은 존재론적으로 하나가 아니고 기능적으로 하나에요. 그런데 그 기능은 하늘나라, 아버지와 아들이 계시는 곳이 아니고 이 땅에서 하나에요. 하나라는 것은 기능적으로 하나가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기능적으로 전체가 하나가 되려면 이것은 최종적으로 하나가 될 경우입니다. 최종적이란 말은 그 전에 전쟁을 치뤘고 전쟁을 하고 난 뒤에 전쟁이 끝났을 때 제대로 최종 승리는 이분이다라고 할 때 그가 주님이 되고 그 주님에 의해서 발생 된 것이 여호와 닛시라는 뜻이에요. 논리가 그렇게 되는 겁니다. 지금 논리가 정리정돈이 좀 되었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여호와의 깃발이라고 할 때 그 깃발은 자기 힘으로 승리해서 얻은 게 아니잖아요. 한 번 쓸게요. 오늘 제목을 이것으로 할까.. 아니잖아요. 뭐가 아니라는 말입니까? 내가 아말렉을 이긴 게 아니잖아요. 아까 출애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