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강-창 7장 6-12절(방주의 세계)160601-이 근호 목사
41강-창 7장 6-12절(방주의 세계)160601-이 근호 목사
이름 : 오용익(IP:125.136.25.28)
41강-창 7장 6-12절(방주의 세계)160601-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7장 6-12절입니다. 구약성경 9페이지입니다.
창 7:6-12
“홍수가 땅에 있을 때에 노아가 육백세라 노아가 아들들과 아내와 자부들과 함께 홍수를 피하여 방주에 들어갔고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과 새와 땅에 기는 모든 것이 하나님이 노아에게 명하신대로 암 수 둘씩 노아에게 나아와 방주로 들어갔더니 칠일 후에 홍수가 땅에 덮이니 노아 육백세 되던 해 이월 곧 그 달 십칠일이라 그 날에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들이 열려 사십 주야를 비가 땅에 쏟아졌더라.”
창세기 7장을 보게 되면, 그 때까지 있는 세상에 대해서 이렇게 생각합니다. 세상이 있고 그 안에 방주가 있다고. 누구라도 그렇게 보이지요. 그런데 홍수가 나서 땅이 물 위에 덮이게 되면 이렇게 수정해야 됩니다. 그 때는 방주만 있더라. 그 때 세상이라고 하는 것은 물이 있고 땅이 있다고 해서 세상이 아니에요. 세상이라 하는 것은 세상의 핵심부분만을 가지고 세상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흔히 말하기를, 예수님을 사대성자라고 해요. 이 말은 뭐냐? 예수 말고도 다른 위인들이 많다는 이야기에요. 그리고 그런 것들이 빠짐없이 모여야 그게 세상의 전부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 ‘예수 안’만 세상입니다. 예수 안에서 천국과 지옥이 만들어집니다. 그래서 결국 모든 것은 불에 타버립니다. 불에 타고 남는 것은 예수님이 계신, 어린양이 계신 천국과 어린양이 없는 곳, 지옥, 마귀가 갇혀 있는 곳, 그 둘밖에 없어요. 그 둘 합해서 그게 전부입니다.
성경이 이렇게 노아방주에 주목을 하는 것은 방주 그 시대 이후에 세상이 아무리 넓혀지고 사람이 아무리 번성하더라도 방주에서 번져 나왔다는 거예요. 방주가 발휘하고 있는 그 기능과 그 속성과 그 성질, 그것이 계속 확대가 되면 오늘날 우리가 보고 있는 이 세상입니다. 그래서 베드로후서 3장에 보면, ‘옛날에는 물로 심판받았지만 이제는 불로 심판 받는다.’라고 해서 하나님의 관점은 변한 것이 없어요.
옛날에도 방주중심으로 봤고 지금도 그 방주에서 확대된 세상이기에 역시 심판해야 하는 핵은 방주 안에 있었던 그 기능이 죽지 않고 여전히 유지되면서 그 방주 안에 있는 원리원칙가지고 불로 이 세상을 태워버립니다. 네가 생각했던 맨해튼, 그리고 시카고, 러시아, 북한, 그 모든 것은 불쏘시개에요. 불러 타버릴 겁니다. 달과 별도 마찬가지고. 세상에 살면서 세상을 볼 줄 모르고 세상이 어디 있는지 찾을 수 없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입니다.
성경은 바로 그것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세상이 나온 원래의 알, 세상이 처음에 나왔던 그 씨앗이 보고 싶은가, 그 모든 것이 방주에서 나왔다. ‘방주가 확대가 되면서 이것이 세상’이라는 말은, 방주 외의 다른 세계는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방주가 지금 하나님의 물 심판 안에 놓여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행동하시고 이렇게 하시는 취지는 뭐냐? 천국은 함부로 들어갈 수가 없는 곳입니다. 쉽게 말해서 천국은 없습니다. 천국은 방주의 원리로 만들어내야 되지 천국은 미리 있는 게 아니에요.
천국을 주께서 만들 거예요. 방주의 원리를 가지고 새롭게 만들 겁니다. 그래서 방주의 원리를 모르는 사람이 생각하는 천국은 천국이 아니지요. 자기가 오래살고 싶고 가고 싶어 하는 그런 천국은 만화 그리듯이 자기가 만들어낸 거지요. 지난 주일저녁에 이야기했듯이 천국은 뭐냐? 율법대로 완성될 경우를 천국이라고 했습니다. 율법대로 완성된 것이 천국이기 때문에 천국은 있다, 없다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율법대로 다 살 자신이 없거든 천국도 없는 거예요.
율법대로 살지도 못하면서 어딜 넘봐요? 뭘 천국을 넘봅니까? 천국은 완전한 의만 인정하는 곳인데 너덜너덜한 죄 덩어리를 가지고 어딜 감히? 넘본다는 그 자체가 벌써 수상하기 짝이 없는 죄악을 방출하고 있는 거예요. 죄인이면서 “천국 좀 주세요.” 이 자체가 지금 가짜천국을 남발하고 있는 겁니다. 천국이 완전한 의라면 그 천국을 만들어내는 완전한 의가 방주 안에서 나온다는 이야기에요.
그런데 그 완전한 의를 만들어내는 그 환경이 뭐냐? 물로써 심판받는 작업과 병행해서 일어나요. 방주 밖에서는 물로 심판하고 있고 방주 안에는 정결한 짐승 일곱 쌍과 부정한 짐승 두 쌍, 그 나머지는 한 쌍씩 들어가는 겁니다. 이미 몇 쌍이 들어간다는 그 수를 셋으로 나누었다는 말은, 정결한 것과 부정한 것이 다른 모든 피조물과 관련된 대표제물이 된다는 거지요. 일곱 쌍의 정결한 것과 두 쌍의 부정한 것, 열네 마리와 네 마리가 구성해내는, 열여덟 마리가 구성해내는 그것에 다른 피조물들은 그냥 멀쩡하게 쳐다볼 수밖에 없어요.
왜? 자기의 대표니까. 방주 바깥은 물로써 심판합니다. 심판한다는 것은 이미 창세기 6장 끝에서 죄지어서 심판한다고 했어요. 그러면 ‘죄와 벌’, 죄가 있는 곳에 벌이 있거든요. 우리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벌을 받는가, 할 때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팔고” 이것을 벌 받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그래서 벌 받고 있는 거예요. 그것을 다른 말로 하면, 인간은 태어나서 살아가면서 ‘아, 내가 망해야 될 이유를 한번 찾아보자.’ 이런 식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내가 태어난 것은 벌 받기 위해서 태어났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그러나 아담이 이미 범죄 함으로 아담이 살아가는 것이 벌이고, 아담후손이 태어나는 그것도 벌이고, 아담에서 태어난 그것도 아담에게 주어진 벌의 일부로서 출생된 겁니다. 한통속으로. 죄와 벌에서, 죄를 알고 벌을 준다는 것이 우리 생각이지만 하나님 생각은 그것이 아니고 벌을 먼저 알고 죄를 찾아가는 거예요. 그런데, 벌 받고 있다고 인정해줘야 벌을 찾아가는데 ‘그냥 살아가는 이것이 무슨 벌인데? 이것은 벌 아니야. 이것은 정상적인거야. 나쁜 짓을 해야 벌을 받지. 이것은 벌이 아니고 그냥 살아가는 거야.’라고 여기는 사람에게는 경로가 죄를 발견한 경로에서 이미 이탈이 되어 있어요.
벌이 아니라고 여기는 동시에 죄가 뭔지도 모르게 되어버립니다. 자기 자신이 벌 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있다면 이것은 자기가 자기의 주도권을 쥐고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나는 누가 나를 향하여 벌을 주고 있고 나는 그분이 내리시는 벌은 이런 종류의 죄 때문에 내린 벌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하나의 재료로서 삽니다.” 이런 관점을 가져야 되거든요. “나는 벌 받는 것이 아니야. 먹고 마시면서 사는 이것이 왜 벌이야? 당연한 거지.” 라고 하는 사람은 무엇을 도려내고 잘라내는 것인가 하면, “나는 독자적으로 내 힘으로 살 거야.” 그것을 전제로 하는 사람이에요. “내가 앞으로 잘 살면 되잖아. 내가 조심스럽게 인생 살면 되잖아.” 이렇게 나와요.
그렇게 나오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이 모든 것에 대해서, 도무지 왜 그런 일이 일어나는지를 감 잡을 수가 없지요. 하나님은 벌을 통해서 죄를 찾아가는데 인간들은 생각하기를, “그러면 저의 가치는 어떻게 됩니까? 저의 존엄성은 어떻게 됩니까?” 그렇게 나오더라는 말이지요. 많은 사람들이 성경공부에 나오고 교회 참석하면서 이런 전제를 하는 모습들을 보게 되면, 하나님이 괜찮은 나를 건져달라는 겁니다. 복주시고 건져달라는 거예요. 최선을 다해 바르게 살 테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건져달라는 겁니다.
그러면 그것은 그 독자적인 세계가 따로 있고 거기에 하나님을 강제로 끼워 넣는 거예요. 그런데 방주의 안의 주인공이 있는데 일곱 쌍의 정결한 제물과 두 쌍의 부정한 제물, 그것이 주도권을 갖고 있습니다. 바깥에는 심판이 벌어지고 있고 방주 안에서는 지금 사람 여덟 명과 짐승들이 두 쌍씩 숨 쉬고 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생각을 바꿔야 돼요. 왜 우리는 같이 안 망하는가, 시작을 그렇게 해야 돼요. 왜 우리는 이 맹렬한 물의 심판, 하나님의 분노에 같이 망하지 않았는가의 그 원인을 찾아보게 되면, 하나님께서 다른 짐승과 달리 유난히도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이라는 이것, 하나님께서 독특하게 부각시킨 것, 주목을 유발하는 것, 좀 쳐다보라는 것, 정결한 것과 부정한 것을 왜 집어넣었는지 관심 좀 가지라고 방주 안에 동승시킨 그 동승의 관계가 나머지 모든 사람을 대신해서 방주 안에 있는 동승한 피조물들을 살려내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이것은 뭐냐? 그 안에 있는 노아는 주인공이 아니고 외부에서 벌어지는 일의 주인공은 따로 있고 그 주인공이 하시는 일에 대해서 결과로 대상이 되는 존재가 뭐냐? 노아와 그 가족과 그리고 여러 가지 동승했던 짐승들이 되는 겁니다. 비둘기나 까마귀 등. 제가 지금 이렇게 이야기하는 그 취지를 여러분이 잘 이해가 안 되실 것인데 쉬운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보통 사람들이 ‘아름다운 사람’이라고 하잖아요. ‘아름다운’, 그 뒤에 ‘사람’이라고 붙여요. 아름다운 사람.
그러나 성경에서는 아름다운 사람을 만들지 않습니다. 뭘 만드는가? ‘아름다움’을 만들어요. 어떤 경우에는 또 ‘죽어가는 사람’이 있다고 하는 거예요. 하나님은 죽어가는 사람을 지목해서 일하시는 것이 아니고 죽음 자체를 끄집어내기 위해서 사람을 죽이는 거예요. 죽음 자체. 또 어떤 사람은 “내가 생명을 얻었다.”고 하는데 내가 생명을 얻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관심사는 그게 아니에요. 하나님은 생명이 무엇인가를 위해서 그 사람을 이용하고 활용할 뿐이지요.
또 흔한 질문 중에 “의로운 사람이 되려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 하는데 의로운 사람을 만들지 않습니다. 의로움을 나타내도록 하지요. 수십 년 죽을 때까지 교회를 다니는데 이것을 알고 죽더라도 죽어야 돼요. 고린도후서 5장 21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우리 자신이 의인이 되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의가 되는 거예요. 로마서 3장에 26절에 보면,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지금 이것을 노아방주라고 봅시다. 노아방주에서 우리를 노아라고 봅시다. 그러면 노아가 의롭다고 되는 것은 …… 방주 안에서도 그렇고 노아가 방주 밖으로 나와서도 마찬가지에요. 노아가 당대의 의인이 된 것은 노아와 동행한 분의 작용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 작용이 평소에 사람 눈에는 노아 혼자만 보이지만 노아가 방주 안에 들어가고 방주 밖에는 맹렬한 홍수가 일어났을 때 노아의 관심사는 자기 자신이 잘났다는 것이 아니라 자기와 동승했음에도 불구하고 유난히도 함께 의미 있게 동승하게 된 것, 일곱 쌍의 정결한 짐승과 두 쌍의 불결한 짐승, 더러운 짐승의 동승에 주도권을 주는 거예요. 이것은 종속입니다. 그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의 관계에 노아가 종속되는 조건하에서만 노아는 의인이 되는 거예요.
이걸 가지고 언약이라고 합니다. 그 언약을 위해서 노아방주에서 나와서 지금까지 세상은 확장되고 번진 거예요. 세상이 확장된 모든 것은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확장된 거예요. 그리고 그 언약의 확장된 넓은 범주 끝가지 네 명의 천사가 와서 끝까지 개입한다는 것이 스가랴에 나오고 요한계시록에 예언되어 있습니다. 독수리라는 생물로도 끝까지 가지요. “화 화 화가 있으리로다.”(계 8:13) 하지요.
그렇다면 우리 인간은 뭡니까? 그렇다면 인간은 아무것도 아닌가? 이렇게 되는데 인간은 로마서 15장 16절에 보면,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군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무를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그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심직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방인 자체를 제물과 일치시키는 작업을 하고 있어요. 누가? 성령이. 어디 안에서? 예수님 안에서.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인간을 제키고 오직 예수님만 참된 인간으로 삼으시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거예요. 참된 인간, 다른 말로는 참된 아담, 다른 말로는 마지막 아담, 두 번째 아담이라고 하는 거예요. 왜 예수님만 인간이냐 하면, 하나님의 언약을 완성시킬 유일한 대상자가 예수님이기 때문에 그래요. 예수님이 대표자가 되는 겁니다. 주도권을 예수님이 갖고 있어요. 그래서 ‘주 예수님’입니다.
방주 안에서의 주도권은 노아가 아니에요.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사이의 관계, 그 관계를 가지고 여호와하나님이 자기를 그렇게 드러내신 거예요. 여호와 하나님께서 방주 안에까지 들어오신 거예요.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의 관계의 모습으로 들어오신 거예요. 그래서 아름다운 사람이 아니라 아름다움 그 자체, 그리고 의로운 사람이 아니라 의로움 그 자체, 생명을 얻은 사람이 아니라 생명 그 자체, 죽는 사람이 아니라 죽음 그 자체를 드러내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겁니다.
아름다움, 의로움, 생명, 죽음, 이것은 예수님의 속성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속성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속성. 피조물은 하나님의 속성으로 완전히 덮여버려요. 모든 것을 덮어버리지요. 이삭에게 쌍둥이 아들들이 있어요. 에서와 야곱입니다. 야곱이 어떻게 행동하는가는 문제꺼리가 되지 않아요. 그들이 태어나기 전부터 하나님에게 있는 두 속성을 그냥 할당한 겁니다. 배당한 거지요.
야곱은 사랑받기로 작장 되었기 때문에 야곱을 만들어놓았고 에서는 저주받기로 작정되었기 때문에 저주라는 속성으로 에서를 그렇게 만들어놓은 겁니다. 그리고 그 속성을 구체화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야곱과 에서를 이 땅에 태어나게 하사 야곱과 에서가 그 시대에 여호와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증거하는 기능을 발휘하게 하는 거예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심판, 하나님의 구원은 반드시 저항세력, 적대세력의 관계 속에서만 나온다는 겁니다. 전에도 이야기했는데 우리 생각에는, 방주 안에는 깨끗한 것만 들어가서 깨끗한 방주 안에 깨끗한 짐승만 들어 있는 것이 얼마나 어울립니까? 방주는 깨끗하다. 뜯어보니 깨끗하고 정결한 짐승만 있어요. 그리고 그 정결한 짐승이 대표가 되어서 나머지는 그 혜택을 입는다. 모든 것이 깔끔한 논리가 되겠지요.
그런데 방주 안에는 놀랍게도 부정결한, 더러운 짐승도 두 쌍 들어가 있습니다. 그게 왜 들어가 있느냐는 말이지요. 그게 오물인데. 그게 흠집이 될 수 있는데 그게 왜 들어가는가 말이지요. 인간들은 생각하기를, 내가 깨끗하다고 여긴다면 내 안에 깨끗한 것만 있어야 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렇게 되어버리면 나는 나로 인하여 깨끗한 자가 돼요. ‘깨끗함’이 아니고 ‘의로움’이 아니라 ‘의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 우리의 목표가 되고 말았습니다. 의로운 사람이 되려면 재료가 있어야 되고 그 재료가 자기 자신이 된다는 거지요.
이것은 실은 하나님의 속성을 빙자한 ‘나 잘났다.’가 되어버려요. “나 잘났다. 나 무시하지 마라. 하나님이 나를 인정해서 나를 구원한다. 봐라. 내가 예수 믿게 하셨잖아. 그것도 은혜로.” 말은 좋아요. 은혜로 예수 믿게 했다는 그 바닥에는 뭐냐? “하나님께서 나를 아주 귀하게 보신다.”가 밑에 깔려 있어요. 그러면 결국 증거 하는 것이 뭐냐? 예수님의 의를 증거 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의인되었음을 증거 하는 사람이 되어버려요.
이러한 원리가 십자가마을초장기에, 20년 전에 주고받는 질문 답변 속에 다 들어 있어요. 복음에 대드는 사람은 이해가 안 되는 거예요. 예수 믿어서 의인되었는데 그게 뭐가 나쁘냐는 거예요. 성경대로 믿는데. 내가 보기에 뭐가 빠졌다는 겁니다. 뭐가 빠졌는가 하면, 내가 주인이 되고, 뭘 이용하면 의인될까 하는 것을 먼저 깔아놓고, ‘옳지. 성경에 보니 예수 믿는 자는 의인이 된다고 하니 예수 믿지 뭐. 믿어주지 뭐.’ 이렇게 된 거예요.
여전히 자기로부터 시작해서 자기가 주도권을 갖고 있는 거예요. 자기는 제물이 아니에요. 주님을 이용한 겁니다. 아까 본 로마서 15장 16절에 보면, 하나님이 복음의 제사장 직무를 하게 하사 제물이 되게 하신 것은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라고 되어 있어요. 성령 안이라는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인간의 모든 조작과 인간의 모든 행함은 더 이상 끼어들지 말라는 겁니다. 이게 바로 방주 바깥에서 맹렬하게 쏟아지고 있는 빛줄기에요. 인간의 모든 행함, 인간은 마땅히 벌 받아야 되는데 그것은 인간이 생각하는 선악적 입장에서는, 내가 받는 벌과 결합이 될 수 있는 적당량의 죄가 되는지를 찾을 길이 없어요.
벌을 받으면서 구원을 기대한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모독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저항이에요. 그게 바로 방주 안에 들어가는 더러운 짐승, 부정한 짐승의 저항이에요. 다른 쌍은 전부 한 쌍씩인데 특히 부정결한 짐승은 두 쌍씩 들어간다는 말은, 이 일곱 쌍과 두 쌍의 대결구조가 앞으로 온 세상을 구성하는 원리가 되었다는 겁니다. 그 원리가 창세기 3장 15절에 나옵니다.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의 대결장, 이게 승부에요. 이것은 전쟁입니다.
인간의 행함을 제켜놓고, 인간을 제외하고 벌이는 전쟁이에요. 그런데 평소에 인간들이 살아가는 일상을 보게 되면, 자기가치를 위한, 자기명예를 위한 전쟁을 계속 벌이고 있어요. 전쟁 없는 일상은 없어요. 자기자존심을 걸고 벌이는 전쟁들입니다. 예를 들면 오늘 밤 11시에 한국과 스페인이 축구를 하는데 스페인이 5대 0으로 이기라고 하는 한국 사람은 없을 거예요. 그런데 생각해보세요. 왜 한국이 이겨야 되고 스페인이 져야 기분 좋습니까? 왜 그게 기분 좋을까요?
주도권, 나의 가치와 나의 명예와 자존심이 이 현실의 주도권으로 버티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게 저항이에요. 나의 가치를 내가 스스로 알아주지 않으면 누가 알아주겠어요? 그러니 이것으로 버티는 겁니다. 이 주도권 버팀으로 말미암아, 그런 역할이 예수 그리스도가 피 흘려야 될, 십자가에 피를 흘려야 될 이유로서 들어가는 거예요. 우리가 내 자존심과 가치, 내가 응원하는 쪽, 내가 좋아하는 쪽이 늘 승리하게 될 때 우리는 살맛난다, 라는 그것이 우리가 미처 몰랐던, 이 세상 자체가 벌 받고 있는 것에 합당한 그 죄를, 우리가 그 사실로 인하여 그 죄를 찾아갈 수가 없어요.
우리가 그렇게 자기자존심만 챙기고 어느 누구도 자기만 생각하거든요. 벌금 안 낸다고 좋다고 하고, 전부 나만 생각한다는 말이에요. 모든 게 나만 생각하는 그것으로 인하여 아무 죄도 없으신 분이 나 때문에 대신 죽었다는 그분만이 진정한 죄를 찾아낼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낚시하듯 자기백성을 건지는 것이 아니고, 야곱 올라와, 아브라함 올라와, 그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아브라함과 이삭으로 말미암아 희생당하는 희생물로 오시는 거예요. 오늘날 우리의 희생물로. 대신 죽으심으로.
그래서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은 존재 자체가 하나님이 아니고 실제로 죽어야 되고, 그것도 아버지로부터 저주받아 죽어야 되고, 죄인으로 취급받아 저주받아 죽고 사흘 만에 부활하는 그 과정을 통해서 잃어버렸던 우리의 이런 벌, 아담이 받아야 될 이 벌, 그리고 대대로 받아야 될 이 벌에 합당한 죄가 뭐냐? 그것을 승부로서 이뤄내는데 그게 악마에 대한 승리, 뱀에 대한 승리, 여자의 후손의 뱀의 후손에 대한 승리로 약속을 구현해내시는 겁니다. 그게 언약 안에 담겨 있는 거예요.
사람이 살아가는 것이, 가만 보게 되면 항상 생각하는 것이, ‘나는 패배자가 아니야. 내가 이 정도라도 승리했어.’ 자꾸만 어떤 승부의 장으로 자기주변을 만들어요. 학교시험이 그렇지요. 내신 성적도 그렇지요. 노동자들의 임금투쟁, 시위하는 것도 마찬가지지요. 기업가들이 주식투자하는 것도 마찬가지고. 내 역량, 내 능력이 어느 정도 되는가? 그것을 시험하는데 시험하는 그 모토가 뭐냐 하면, 내가 어디까지 승리할 수 있는가? 어디까지 내가 성공 자가 될 수 있는가? 오직 자기를 위한 전쟁만 치르고 있습니다.
제가 얼마 전에 설교할 때 그런 이야기했지요. 아브라함이 318명 가지고 다섯 왕의 연합군을 이겼을 때 아브라함이 느꼈던 것은 그겁니다. ‘이것은 말이 안 돼. 분명히 이 승리는 내 승리가 아니야.’ 그래서 나온 것이 십일조거든요. 이것은 나의 승리가 아니야. 나는 멜기세덱이 대장이 되어서 벌인 그 전쟁에서 나는 전리품이라는 거예요. 그 전리품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십일조를 낸 겁니다. “내 모든 것은 승리로 인한 부산물로서 오늘도 이렇게 살아갑니다. 예수님이 승리하셔서, 죄에 대해서 의로 승리한 그 결과로 제가 이렇게 의인으로 살아갑니다.”
이걸 한데 묶어버리면 이게 ‘방주 안’이 돼요. 이 방주 안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는 어떤 경우라도 방주 밖의 세계는 없음을 명백히 해야 됩니다. 방주 밖의 세계는 없어요. 다시 말하면, 언약 밖의 그런 세계는 없습니다. 모든 것이 언약이 관여하고 개입하는 세상 속에 우리가 살고 있어요. 그 세계 속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아담의 본성을 지니고 나만 승리자가 되면 행복한 삶이라는 그것을 목표로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 옆에서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의 투쟁은 계속해서 같은 방주 안에서 진행되고 있어요. 우리에게 남은 것은 뭐냐? 쳐다보면 돼요. 정결한 짐승이신 예수님이 누구를 상대하는가? 부정결한 짐승과 제물과 상대하거든요. 그러면 우리는 그냥 구경꾼이에요. 아무것도 할 것이 못돼요. 예수님이 상대하는 것은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악마입니다. 뱀의 후손, 악마입니다. 우리는 뱀의 졸개이고. 뱀, 마귀가 뭡니까?
마귀는 언약을 저항할 때만 마귀가 드러나요. 사람들은 자기를 패배자로 만들고 자기를 해코지 하면 그걸 마귀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마귀가 아니고 마귀라 하는 것은 예수님이 등장해야 알 수 있는 것이 마귀에요.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오셨나이까.”(마 8:29) 이게 귀신의 입에서 나온 소리거든요.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방해하는 것 그게 마귀의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향하여 “너희는 이미 어둠속에 갇혀 있기에 뭘 해도 죄가 된다.”는 식의 이야기를 하고 마귀는 우리를 부추겨서 “그런 되도 않는 소리 듣지도 말고 믿지도 말아라.” 이런 식으로 하고 있어요. “네가 어때서? 네가 얼마나 잘난 존재인데. 네가 왜 죄인 되어야 되는데?”
십자가마을 비난하는 것 보면 “십자가마을은 맨날 죄인이래.” 하잖아요. “죄밖에 모르나?” 이렇게 하는 거예요. 왜 자꾸 부정적으로 보느냐고 해요. 참 복음을 잘 전하게 하셨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제물로 들어갈 때 단독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 안에서 제물로 들어가 버립니다. 예수님도 아버지 앞에 산 제물이 되셨거든요. 예수님이 갖고 있는 제물의 위상이 뭐냐? 그것은 죄인이기 때문에 더러운 제물과 그리고 아버지께서 받으시기 때문에 의로운 제물, 두 가지 요소를 다 갖고 있습니다.
죄인이면서도 의인되시는 분이 예수님이에요. 하나님의 속성에 둘 다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누구를 미워할지, 누구를 사랑할지의 권한을 다 갖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손들고 “이제부터 우리가 주님의 제물 됩시다. 모든 것을 바칩시다.” 그런 식의 제물 안받아줍니다. 제물이 되려면 우리가 예수 안에서 가만있어도 제물이에요. “주여, 저의 모든 것이 죄인입니다.” 이럴 때 이게 제물이에요. ‘이제 깨끗하게 되었으니 깨끗하게 드려야지.’ 우리의 깨끗한 것 안 받습니다. 주께서는 영원토록 우리 예수님만 받습니다. 다른 것은 안 받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예수 안에 들어가서 예수 안의 그 제물 됨에 합류하게 만들어요. 그러면 내가 제물이 아니라 ‘제물 됨’으로 우리를 한통속으로 만들어버립니다. 왜 같은 언약 안에, 같은 방주 안에 있기 때문에. 그래서 방주 안에 있는 모든 피조물들은 전부 다 하나님의 제물 됨, 정결한 짐승의 희생, 나중에 방주 안에서 밖으로 나왔을 때 정결한 짐승의 희생을 받습니다, 그 정결한 짐승의 차후적인 작업을 위해서 일단 그 방주 안은 제물의 세계가 됩니다. 그 제물의 세계가 나중에 예수 그리스도로 초점이 모아지지요. 예수님 안에 모든 세계가 들어 있고 예수님은 하나님께 바쳐지는 제물이 되고 그 제물이 확대되면 지옥과 천국, 천국과 지옥, 두 부분으로 세상은 깔끔하게 정비가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오늘 본문을 보면서 생각해야 할 것은, 주목을 해야 돼요. 나를 주목하면 안 됩니다. 우리는 덤으로 사는 것이고 전리품이에요. 나의 싸움을 하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모든 우리 일상의 행동은 전부 다 나의 싸움이거든요. 나의 승부. 내가 얼마나 잘났는지 스스로 테스트해보는 그 싸움을 늘 해요. 한시도 안할 때가 없고. 이런 것은 말보다도 일기장을 써 보세요. 저도 20대에 일기를 썼는데요. 복음을 알고서는 안 씁니다만.
그 이십대 시절의 일기장을 지금도 갖고 있어요. 구구절절 한 열심 하고, 바르게 살려고 얼마나 애쓰는지. 일기 시작할 때는 날씨 좋다고 하다가 나중에는 기도문으로 되었어요. “하나님, 저의 미래를 인도해주소서. 바른 길로 인도하소서.” 그 당시는 완벽한 기도라고 착각한 거예요. 그렇게 일기를 쓴다는 것은 결국 계속해서 자기 자신이 왜 처음부터 망해야 되는지 생각 안하고, 내가 못할 경우에만 망하고 잘만 하게 되면 나는 내가 생각한 전쟁터에서 나는 최종승리자로 우뚝 설 것이다, 그렇게 희망을 갖고 있었던 거예요.
아무리 예수, 예수, 했지만 실상 주목하는 것은 나의 찬란한 나의 이미지고 그것이 내가 주목하는 마지막목표의 이미지가 된 거예요. 세상에 그런 꼼수를 썼습니다. 또 주변에서 그걸 잘한다, 잘한다, 이야기들 하고. “이 선생은 참 열심히 봉사해요.” 그러다가 나중에는 “이 집사가 참 훌륭합니다.” 그 말은 뭐냐? 네가 나중에는 장립집사감이고 장로감이라는 소리를 한 거지요. 큰일 날 뻔 했어요.
제가 왜 한국교회를 이단이라고 합니까? 나쁜 짓을 해서 이단이 아니고 처음부터 모든 인간은 이단이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나는 이단입니다.”라는 고백을 한다는 것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제물로 들어가는 거예요. 주께서 이단 되게 하심으로써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 그리스도의 정결한 제물의 완성을 위해서 우리는 아담의 자손으로서 이 땅에 산다는 언약적관계를 보여주기 위해서, 성령 안에서 그런 고백이 나올 때 그것이 성령에 의해서 주께 바쳐진 이방인의 제물이 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내가 기뻐하고 좋아하는 쪽이 조금이라도 손해나고, 결핍되고, 내가 소중히 여기는 것에 대해서 손실이 되면 그렇게 화가 나고, 살맛 안 나고, 짜증내는 저희들, 여전히 우리는 누구의 전쟁을 벌이고 있는지, 아니면 이미 벌어진 전쟁의 전리품으로서 감사하고 있는지 저희들 돌아보게 해주시고, 하나님의 언약, 십자가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로 살아간다는 것을 더욱 더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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