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강의(2016. 5. 27) 1강
광주 강의(2016. 5. 27) 1강
이름 : 서경수(IP:14.44.78.242)
광주 강의(2016. 5. 27) 27-1
마가복음 8장 11-13절을 보겠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나와서 예수께 힐난하며 그를 시험하여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구하거늘 예수께서 마음 속에 깊이 탄식하시며 가라사대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적을 구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세대에게 표적을 주시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저희를 떠나 다시 배에 올라 건너편으로 가시니라.”
여기 바리새인들은 인간 세계의 대표자들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이렇게 이야기했다는 것은 이 세대에 속한 어느 누구도 다 그렇게 이야기할 수밖에 없어요. ‘믿을만한 건더기를 주시면 믿겠습니다.’ 이게 바로 바리새인이 예수님께 한 이야기입니다. ‘내가 당신을 믿어줄 테니 우리를 설득시켜 보라.’는 것입니다. 그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은 ‘깊은 탄식’입니다.
이것은 두 개의 층(2층)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두 개의 층이 있습니다. 수학에 위상학이 있는데, 위상이란 말을 쓰는 취지를 알아야 해요. ‘시작과 끝은 의미 없다.’ 이런 내용이 포함되어 있어요. 시작과 끝이 있는 것은 ‘직선’입니다. 직선은 단층입니다. 이 세대 사람들은 항상 직선적인 단층만 생각합니다. 왜냐? 인간이 생각하는 모든 의미가 본인에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생각하는 의미란 자신의 변화에 대한 해석입니다. ‘내가 행동하고 생각하는 모든 것이 무슨 의미와 가치가 있는가?’를 물으면서 살아갑니다. 그래서 나에게 의미 없는 것은 밀쳐냅니다. 밀쳐내면 무엇이 발생되는가 하면, ‘바깥’이 발생됩니다. 찌꺼기들은 밖으로 나가야 합니다. 쓰레기는 집 밖에 버리지요.
사람들은 날마다 자기권역 밖으로 버리는 것이 있어요. 자신이 심사숙고해서 ‘이것은 내 의미를 구축하는데 불필요하다.’고 판단한 것들은 바깥에 내놓습니다. 찌꺼기고 배설물이죠. 이런 행동을 반복하면 자신은 보다 나은 인간이 될 가능성이 높아져요. 현재보다 더 나은 내가 되는 것이 삶의 목표고 인간의 의미입니다.
지금보다 더 나은 나를 만드는 것, 이것이 인간의 ‘의미’입니다. 여기에는 소유욕이 전제되어 있어요.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당신이 메시아라면 표적을 보여라.’고 했지요. 이때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하나의 ‘대상’으로 보았습니다. 대상으로 삼는 것은 존재한다고 다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나에게 의미가 될 것 같은 목표가 대상이 되고, 여기서 나에게 의미가 있는 것들은 나의 소유로 삼습니다. 바리새인이 예수님께 표적을 보여 달라고 했는데 이것은 모든 인간의 생각입니다. 제자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닌 이유가 뭡니까? 예수님을 따르면 지금보다 더 나은 자신을 만들 수 있다고 판단했기에 예수님을 따라 다니는 거예요.
사람들이 교회 다니는 이유가 뭡니까? 기도하면 하나님께 복을 받아서 내 소유가 많아질 것을 기대하기에 교회 다니는 겁니다. 사업이 망하고, 몸이 병들고 해서 원상회복 또는 과거보다 더 좋은 것을 얻고 싶을 때는 평소에 하지 않던 행동을 해요. 교회에 가고, 기도를 하고, 봉사도 합니다.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은 자신에게 의미가 있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즉 내 결핍을 채울 수 있고, 내가 손해 본 것을 만회할 수 있다는 기대감으로 행동에 나서는 겁니다. 여기에서 질문하겠습니다. “왜 당신은 원상복구 하려 합니까?” “나를 유지하기 위함입니다.” “왜 당신이 유지되어야 합니까?” 여기에서 말문이 막힙니다. 겨우 하는 말이 “너도 그렇잖아!”라고 공세를 펼칩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모릅니다. 스스로에게도 이런 근원적인 질문을 하며 살지 않았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사는 이유를 몰라요. 이것이 인간의 가장 큰 문제입니다. 자신이 망해야 될 이유를 본인이 평소에 찾지를 않아요. 남은 망해도 괜찮은데 본인은 절대 망해서는 안 된다는 터무니없는 전제가 깔려 있어요.
예수님이 십자가 지셨다는 것은 이 세대에서 궁극적으로 망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을 것을 어머니 마리아가 예상했습니까, 제자들이 예상했습니까? 아무도 예상 못했습니다. 왜 사람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는 것을 예상 못했고, 베드로는 그 일에 적극 반대했을까요? 그것이 망하는 길이기 때문이지요.
예수님은 망하는 길로 가셨지요. 그 이유는 본인의 죄 때문이 아니라 우리 죄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이 복음인데, 이것이 진리로 확정되면 우리 안에는 처음부터 망해야할 속성이 담겨있는 거예요. 따라서 복음을 안다는 것은 자신이 망해야 한다는 것을 아는 거예요.
그래서 복음을 아는 사람은 “주여, 언제 저를 망하게 하시렵니까? 의미도 가치도 없는 나를 왜 아직 살려 두십니까?”라고 질문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어느 누구도 자신이 망하는 것을 기정사실로 여기고, 망하는 이유를 탐색하며 살지 않아요. 남은 다 죽어도 나는 살아남을 궁리를 해요.
사람들은 무조건 살고자 하는 의지로 가득 차 있기에 예수님을 만나든 무엇을 만나든 자신을 살리는 쪽으로 이용하려 할 뿐입니다. 그래서 어떤 대상을 만나도 그를 이용해서 내가 더 많은 것을 소유해서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 합니다. 사람이 태어나면 처음 만나는 대상은 엄마, 아빠지요. 어릴 때는 엄마, 아빠를 대상으로 삼아요. 좀 더 커면 범위가 넓어집니다.
그러다가 교회에 가면 예수님을 대상으로 삼습니다. ‘내가 살 가치가 있고, 복 받을 자격이 있는 존재임을 예수님이 인정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복 주셔서 살려 주시옵소서.’ 이렇게 나오는 겁니다. 여기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은 간단해요. ‘살고자 하는 자는 죽는다. 너를 부인하고 나를 따라 오너라.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만 거기에 영생이 있다.’
이런 예수님의 말씀이 설교의 결론으로 나와야 하는데, ‘이것 알면 뭘 주십니까?’ 라는 식으로 결론이 아닌 과정으로 생각해요. “우리 다같이 예수님처럼 죽읍시다. 예수님과 함께 죽는 자가 주님과 함께 영생합니다.” 라고 설교를 끝내면 사람들은 수용하지 않습니다. 그것으로 끝내면 안 된다는 거예요. “그것을 믿으면 무엇을 주십니까?”라고 나와요.
층이 달라서 그래요. 두 개의 층이 있다는 것은 아래층과 위층이 연결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연결될 수 없도록 하기 위해 두 개의 층을 두신 겁니다. 아래층에서는 인간이 자기 의미를 고수하기 때문에 항상 끝에 희망을 가집니다. 그런데 위상적으로 보면 그 끝은 지금 여기입니다.
사람들은 성경을 보면서 밀실(비밀창고) 같은 것을 염두에 둡니다. TV드라마에 보면 회장님 사무실에 가면 책장 뒤에 금고가 숨겨져 있는 경우가 있잖아요. 사람들이 밀실을 꿈꾸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남들은 알지 못하는 것을 내가 알아서 그것을 통해 더 풍성한 삶을 살겠다는 것입니다.
이 세대가 이런 심보를 가지고 메시아를 기다린 거예요. 사람들이 메시아를 기다린 것은 망하기 위함이 아니라 흥하려 했기에 예수님 말씀에 대해 거부감이 일어나고 충돌이 발생한 겁니다.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끝까지 주를 버리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어요. 베드로는 ‘목숨 바쳐서라도 따라가겠습니다.’라고 했지요. 그러나 주님은 ‘내가 가는 곳에 너는 올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아직 처소가 마련되지 않았다는 것이었습니다.
진작 말씀해 주시지 이제 와서 처소가 마련되지 않았다고 하면 어쩌란 말입니까? 제자들 입장에서는 참 난감한 상황입니다.
두 층이 있는데, 이 층을 점선으로 표시해 보겠습니다. 사실 이 층은 없습니다. 없는 것이 예전부터 있었던 경우는 뭔가 교류가 되어야 합니다. 나의 의미가 삭제당할 때 비로소 보이는 것이 있습니다. 지금 여기에 천국이 있다는 것을 감잡지요.
제가 이런 말을 하면, 사람들은 ‘그렇다면 나는 나의 의미를 포기하겠습니다.’라고 나와요. 포기해야 본다고 하니까 포기하겠다는 거예요. 이것은 숨어있는 천국을 기어이 보겠다는 욕망이지요. 이건 꼼수입니다. 꼼수는 주님께 통하지 않습니다.
그럼 인간에 대한 의미는 언제 삭제되는가? 예수님은 유일하게 이 지상에서 하늘나라로 가신 분입니다. 예수님이 가실 때 예수님을 따라 간 사람이 있습니까? 아무도 없어요. 인간은 자기 의미를 추구하다 보니 자기 의미와 무관한 것은 바깥으로 밀어냅니다. 그 밀어냄에 의해서 예수님은 하나님께로 가셨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밀어내는 행위를 통해서 스스로 패쇄적 영역을 만듭니다. 예수님은 인간들에게 떠밀려 밖으로 나갔습니다. 바깥에서 보면 세상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을 밀어낸 세력이니까 그 전체가 쓸데없는 것이지요. 제자들이 예수님을 배반했기 때문에 배반을 받은 예수님은 배반의 장미로 가시같은 성령을 보냅니다. 괴테는 ‘십자가에 장미로 장식하지 말라’는 말을 했어요. 십자가는 낭만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이죠.
인간에게 낭만은 꿈과 이상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이 기도를 하면서 뭔가를 기대하는데 그 기대하는 바를 그림으로 그린다면 얼마나 화사하고 아름답겠습니까? 자신의 소망을 그리니까 검정색은 아니고 분홍색이 많을 거예요. 십자가가 아름다운 것입니까? 아니죠. 무섭고 두려운 곳이라 아무도 그쪽으로 얼굴을 향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십자가 지신 주님을 보기 싫어했고 외면했지요.
하여튼 인간이 전력을 다해 밀어낸 찌꺼기 중에 십자가가 섞여 있습니다. 밀어낸 이유는 나를 살리는데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기에 밀어냈고, 그렇게 해서 밀려난 예수님이 성령을 보냅니다. 성령은 십자가의 영이죠. 성령이 오면 세상 관점이 아닌 예수님 안목으로 모든 것을 보게 됩니다.
성령이 왔다면 내 안에 이질적인 요소가 들어온 거예요. 그 이질적인 것이 위상적으로 뭐냐 하면, 내가 싫어한 그분의 세계가 내 안에 들어 온 겁니다. 그러면 나의 육신은 계속 그분을 육신의 본성에 따라 끊임없이 밀어내려고 하겠지요? 우리의 밀어내는 힘과 우리를 버리지 않으려는 성령의 힘이 충돌을 일으키면서 발생하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그 십자가를 입으로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은 위상적으로 구원 받은 사람입니다. 그 모습이 보고 싶은 겁니다. ‘나는 이토록 예수님을 싫어하는데 주님은 싫어한 나를 기어이 구원하겠다고 십자가로 다 이루심을 증거케 하신다.’ 성도의 입에서는 이것이 자연스럽게 고백됩니다.
성령이 오면 내 쪽에서 다가가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 쪽에서 계속 밀어붙입니다. 예수님은 어린양이기 때문에 어린 양이 피 흘린 의미를 위해서 우리를 죄인으로 드러냅니다. 비밀은 자신의 의미와 가치를 위해서만 드러냅니다. 나를 위해서 복음이 비밀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주 되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에게 비밀을 알려주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생각하는 밀실을 보여주는 주님은 아닙니다. 우리가 왜 밀실에 대해 궁금해 합니까? 천국이 어떤 곳인지 왜 궁금하지요? 내가 알고 싶은 욕구 때문이지요. 거기에 장단 맞춰 비밀을 알려주시는 주님이 아닙니다.
주님의 비밀 공개는 오직 주님의 모든 가치를 드러내기 위해서만 비밀을 알려주십니다. 따라서 비밀을 알게 된 사람은 고백이 한결같아요. ‘예수님만 나의 주님이시다.’ 이것만 고백해요. ‘주님 때문에 내가 이익을 봤습니다.’라는 말이 나올 수가 없고 주께만 영광 돌리게 됩니다.
내가 그동안 주님을 밀어내고, 앞으로도 밀어낼 수밖에 없는데, 이 모든 일이 예수님의 비밀 공개 작업에 엮여 들어갑니다. 내가 주님을 싫어하는 것마저 결국 예수님의 주 되심을 높이는데 활용됩니다. 우리는 엉망진창으로 사는데 주님은 그것을 통해 더욱 높임을 받게 됩니다.
내가 망한 것이 내가 잘못해서 망한 것이 아니고 망해야만 되기에 망한 거예요. 그래야만 주께 영광이 됩니다. 그러니 모든 것이 철저하게 하나님 하시는 일에 동원되고 하나님은 실수가 없습니다. 덩달아 내가 하는 일도 실수가 없어요. 그리고 책임도 없어요. 왜? 내가 잘했다, 잘못했다는 판정은 주님이 하시고, 주님은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이 성도를 보면 미쳤다고 할 수밖에 없어요. “네가 무엇을 근거로 네 행위를 자화자찬 하냐?”고 묻으면, “내가 한 행동이 십자가 앞에서 모두 죄로 드러났다는 사실이 내가 있어야 할 의미의 전부다. 그래서 나는 범사에 감사할 수밖에 없다.”라고 대답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아래층에 있는 바리새인들이 평소에 추구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자기 의’지요. 유대인들이 자기 의를 추구하잖아요. 자기 의를 다른 말로 하면 순수성, 순수함입니다. 오점이 없이 깨끗하고 투명한 삶을 사는 것이 그들의 목표입니다. 그런데 이 순수함이 하나님이 인정하는 순수함과 같은 것입니까? 다르죠. 다른 정도가 아니라 정 반대입니다.
이 순수함이 인간의 꿈이 됩니다. 꿈이 없는 사람은 없어요. 꿈을 꿀 필요 없어요. 인간은 누구나 꿈을 가지고 살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그 꿈이 이 세대에서 나온 꿈이에요. 꿈의 의미는 자신에게 누적이 됩니다. 인간의 모든 꿈은 하나님께는 적이 되고 원수가 될 수밖에 없는 내용뿐입니다. 경건, 거룩, 순수함을 아무리 표방해도 소용없습니다.
오늘 강의 제목을 ‘등록’으로 하겠습니다. 등록이란 나의 것이 나를 벗어나 어떤 구조나 체계 안에 한 자리를 차지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혼자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이 세대에 등록하면서 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뭐라고 하십니까? ‘이 세상에 등록하지 말라. 생명책에 네 이름이 등록되었다.’고 하십니다. ‘네 이름이 하늘나라 생명책에 등록되었다.’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지요.
예수님이 ‘이 세대’라고 하실 때 무엇을 의식하고 하신 말씀인가 하면, 인간 개인인을 따지는 것이 아니고 단체로 이 세대에 등록되었다는 안목으로 주님은 우리를 보십니다. 그래서 개인 구원은 성립이 안 됩니다. 구원은 집단 구원뿐입니다. 따라서 개인의 자질은 구원에 무관한 것입니다.
마태복음 2장 16절을 보겠습니다. “이에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 줄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 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본 그 때를 표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니”
이 죽은 아이들끼리 비교할 수 있는 자질의 차이가 있습니까? ‘어떤 아이는 아직 기저귀를 차고 있고, 어떤 아이는 안 찬다. 기저귀 차는 아이는 죽이라.’ 이런 것이 있습니까? 없지요. 이것이 뭐냐 하면, 이 세대가 권력 체제로 짜여 있는 거예요. 헤롯은 두 살 아래 아이를 다 죽였습니다.
그런데 18절을 보면 죽은 자식의 어미가 통곡을 합니다. 왜 통곡합니까? 자기 자식이 죽었기에 통곡하지요. 그러면 이 부모들이 나서서 헤롯에게 시위를 해야 하잖아요? “네가 뭔데 내 자식을 죽이냐?”고 항변해야 되잖아요. 그런데 대항할 수 있나요? 없어요. 왜냐? 헤롯이나 죽은 아이의 부모나 다 한 통속이기 때문입니다.
헤롯은 왕입니다. 그런데 죽은 자식은 각자 부모의 자식입니다. 권력 아래 있는 사람은 뭐든지 자기 개인적 가치가 있으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그런데 개인적 가치를 추구하는 그것으로 인하여 집단적인 테러를 당하고 횡포를 당할 때 그들은 그 이유도 모르고 원인도 모르면서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세월호에 타고 있다가 배가 침몰해서 배에 탄 대부분의 학생들이 죽었습니다. 그러나 몇 명은 구조되어 살았습니다. 그런데 자식이 안 죽은 부모들은 자식이 죽은 부모만큼 슬퍼하지 않습니다. 만약 이 상황을 보면서 영적으로 깨어있는 사람이라면 자식을 잃어버릴 때 어떤 생각을 해야 하는가 하면, 물에 빠져 죽지 않고 멀쩡하게 학교 잘 다니고 있는 자식이 사실은 나의 자식이 아니고 이 어두운 세상에 소속된 자식일 수 있다는 것을 감 잡아야 됩니다.
이 말은, 내가 이 세대에서 빠져나오려야 빠져나올 수 없는 자라는 것입니다. 왜냐? 지금은 내 자식 안 죽었다고 좋아하지만 앞으로 어떤 사고가 나서 내 자식이 죽게 되면 슬퍼하고 분노할 수밖에 없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왜 헤롯에게 대들지 않습니까? 정답은 간단해요. 대들어봐야 계란으로 바위치기입니다. 헤롯은 권력이 있고 불쌍한 여인들에게는 권력이 없습니다. 권력이 왜 없습니까? 그동안 살아온 것은 헤롯의 통치 덕분에 산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는 기존의 권력에 의해서 살아왔으니까 왕이 죽이는데 내가 어찌할 수 없습니다. 자식이 죽은 것은 가슴 아픈 일이지만 어쩔 수가 없어요.
이것이 뭐냐? 주님 없이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마태복음 2장 16-18절에서 보여주는 겁니다. 당하면 당하는 대로 아무소리 못하고 ‘세상이 그런데 뭐. 재수 없어서 그렇게 되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아무리 권력의 횡포에 당해도 ‘내 새끼는 내 새끼다.’라는 그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우리 모두는 이 어둠의 자식들입니다.
만약 이 중 성도가 있었다면 어떻게 나왔겠어요? “주님이여, 참 잘 하셨습니다.”라고 했을 거예요. 왜냐? 예레미야의 예언을 이루기 위해서 된 일이기 때문이지요. 예수님이 오신 효과로 내 것은 없고 예수님의 새로운 권력에 소속된 자는 모든 일이난 일이 예수님을 위하여 반드시 일어나야만 하는 일이기에 거기에 엮여진 것에 대해서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이런 고백을 하게 되겠지요.
빌립보서 3장 7-8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그 안에서 (새롭게) 발견되려 함이니’라고 했는데, 이 말은 예전에는 세상 권력 속에 있었는데 이제 예수님의 권력 속에 놓여 있음을 새롭게 발견하게 되었기에 세상의 모든 것은 배설물로 여기게 된 것입니다.
예전에 나에게 유익이 된다고 생각했던 것을 이제는 배설물로 여깁니다. 그러면 배설물을 왜 그동안 챙겨왔습니까? 배설물마저 예수님의 입장에서는 필요한 것이었기에 내게 있었습니다. 말썽부리는 자식도 다 주님이 필요하셔서 두신 것입니다. 내가 주님과 연관되어 있는 것처럼 자식들도 예수님과 관련되어 내 몸을 통해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믿음도 없으면서 괜히 믿음 있는 척, 아이에게 믿음 없다고 미워하고 욕하지 마세요. ‘아이고, 귀한 내 새끼, 고맙다.’라고 하세요. 이렇게 하되 내 새끼라서가 아니고 주님을 경유해야 됩니다. 그런 눈이 있어야 내가 주님과 정상적인 관계라는 것이 표가 나는 거예요. 내게 있는 모든 것이 내게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 의미가 있는 것처럼, 내 눈에 보이는 자식과 남편, 아내도 주님께 의미가 있어서 같이 살게 하신 겁니다.
주께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기 위해 차별 없이 모든 것이 진행되는데 내가 거기에 대해서 가타부타 할 이유가 없지요. 그것이 ‘등록’입니다. 제가 등록이란 말을 쓴 이유는, 현실은 개인이 개인을 책임질 위상학적인, 입체적 모양새가 아니에요. 내 개인은 홀로 있는 것이 아니고 어떤 체제가 전제되어 있고, 나는 체제의 의미를 보여주는 지점으로 있을 때 그것을 ‘등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 와서 도 닦으면 불교 신자가 됩니다. ‘끝을 보고 싶다.’ 끝은 이미 석가모니가 이야기했어요.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고. 니체는 ‘신은 죽었다.’고 했어요. 이 말의 의미는 ‘너 자신이 신이다.’라는 것입니다. ‘네가 신인데 왜 신은 믿느냐?’는 것이지요. ‘네 속에 잠재되어 있는 창조성을 발휘해라. 그러면 되지 왜 엉뚱한 상상력을 발휘해서 너 아닌 다른 신을 찾는가?’ 라고 했어요.
‘인간이 얼마나 무지했기에 자신이 신인 줄도 모르고 엉뚱한 신을 찾는가?’ 라고 기독교에 대해 욕을 한 것입니다. 다음 부산 강의에서 니체를 공부할 생각입니다.
‘포이에르 바하’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신이란 인간의 펼침이다.’ 신을 펼치면 인간의 속성이 가득 담겨 있어요. 인간을 쥐포 만드는 기계 속에 넣으면 납작하게 되겠지요. 그 쥐포 된 것이 바로 신입니다. 왜냐? 내가 생각한 나의 신이라야 내가 납득이 되니까 그렇습니다. 나에게 의미 있다고 해줘야 그 신을 믿을 용의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마가복음 8장 12절에 나오는 ‘표적 구하기’입니다. 자기가 믿을 만한 것을 찾기 위해 표적을 구하는 거예요. ‘내가 믿어줄 테니 납득할 만한 증거를 제시해 달라.’고 한 겁니다. 그에 대해 주님은 ‘등록’으로 대꾸했지요. ‘그런 소리 하는 것을 보니 너는 이 세대에 등록되어 있다.’ 이것은 개인적으로 좋아서 그런 것이 아니고 한 통속으로 묶여 있는 겁니다.
이런 바리새인들에게 밀려서 죽임을 당하시고 이 세대에서 빠져 나온 분이 예수님입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 바깥에 천국이 있습니다. 우리가 믿었던 바깥 세계가 위상학 적으로는 지금 이 자리에 함께 있습니다.
그러면 한 통속이 되어 있는 자들에게 예수님이 주실 표적은 뭡니까? 십자가지요.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나를 메시아로 볼 표적이 뭐냐? 이것은 너희들이 ‘나는 아무 문제가 없다. 나는 안 망해야 돼.’ 라고 생각하는 그 자체가 결국 너희를 망하게 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이미 우리를 구원했다는 증거는 뭡니까? ‘나는 진작 망해야 될 자인데 왜 저를 구원하십니까?’ 라는 고백이 성령 받은 사람의 보편적인 특성입니다. 직업, 성별, 나이와 관계없이.
성령이 오기 전에는 아무도 그런 생각을 할 수 없어요. 성령이 와야 비로소 이것이 성립됩니다.
10분 쉽시다.
(2016. 6. 2. 08:45 녹취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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