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20160513b히11장 35절(표백)-이 근호 목사
안양20160513b히11장 35절(표백)-이 근호 목사
이름 : 충성모(IP:61.77.84.159)
안양20160513b히11장 35절(표백)-이 근호 목사
봅시다. 열왕기하 4장에 보면 이번에는 엘리사가 등장합니다. 그가 수넴 여인을 만납니다. 아까 엘리야의 경우에는 아들이 있었는데 그 아들이 죽었지요. 그런데 이 수넴 여인은 남편이 있고 아들이 없어요. 그래서 부부가 엘리사에게 대접을 하고 난 뒤에 엘리사가 예언을 하기를 16절에 “돐이 되면 네가 아들을 안으리라”라고 나와 있지요. 그런데 그 있는 아들이 죽었어요. 죽을 때 “내 머리야 내 머리야” 하더니만 “낮까지 어미의 무릎에 앉았다가 죽”었습니다. 죽고 난 뒤에 사환을 데리고 엘리사를 찾아왔어요. 그런데 엘리사가 무엇 때문에 저 여인이 찾아왔는지를 뻔히 압니다. 그래서 “숨기지 말고 네 고민을 이야기해보라.”라고 말하니까 “아들이 죽었습니다.”라고 했어요.
29절에 “엘리사가 게하시(자기 사환)에게 이르되 너는 사람에게 인사도 하지 말고 그냥 그 여인의 집에 가라”라고 하지요. 그리고 난 뒤에 32절~34절에 보니까 “엘리사가 집에 들어가 보니 아이가 죽었는데 자기의 침상에 눕혔는지라 들어가서는 문을 닫으니 두 사람뿐이라 엘리사가 여호와께 기도하고 아이의 위에 올라 엎드려 자기 입을 그 입에, 자기 눈을 그 눈에, 자기 손을 그 손에 대고 그 몸에 엎드리니” 아이가 드디어 살아났습니다. 아까 보았던 엘리야의 경우하고 비슷한 것도 있고 다른 것도 있고 하지요. 열왕기상 17장에서 아이 위에 엎드리는 것은 유사한 겁니다.
이것을 설명할 때 이렇게 설명해요. 보통 세상에서는 A라는 하나의 일이 벌어지고 연속해서 B, C, D, 이렇게 미래를 향하여 일이 진행되잖아요. 해석을 할 때 D로부터 해석을 해서 C, B, A 순서로 해석을 해나가요. 그 한 예는 제가 아까 예를 든 것처럼 어떤 사람이 만약에 몸이 아파서 기도를 하니까 몸이 나았다라고 합시다. 그러면 ‘야, 기도하니까 몸이 나았네.’라고 되어 버려요. 그러니까 A: 몸이 아프다. B: 기도했다. C: 몸이 나았다. 가 되어서 내가 의도했던 대로 A(병이 나음)가 되어 버리면 이것은 잘못된 거에요. D로 가야 되지요. ‘내가 이렇게 몸이 아픈데 기도해서 병이 낫겠다는 이것이 바로 십자가 앞에서 내 죄구나. 야, 나는 죄인이 맞구나. 주님(하나님)의 능력인 예수님을 사적인 내 병 낫는 데다가 도용할 정도로 나는 내 위주로 살았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될 때 이것이 바른 것입니다.
몸이 아파서 기도할 때는 자기가 죄인인 줄을 모르지요. 성도로서 당연히 해야 할, 착한 일, 의로운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다가 기도의 응답이 십자가로 드러날 때 내가 처음부터 그런 식으로 생각했다는 것 자체가 죄가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겁니다. 예수님만이 산 자가 될 때 앞에 있는 모든 사람은 죽은 자가 되는 거에요. 죽은 자가 병에 걸렸을 때 기도를 했다는 말은 죽음(죄)이 살아있다고 표현을 해도 무방(가능)합니다. 살아 있는데 내가 살아있는 게 아니고 죄가 나를 가지고 살아 있는 셈이 되니까 죄가 살아 있는 거에요.
그런데 우리는 오해하기를 내가 살아있다고 자꾸 우기는 거에요. 살아있는 내가 어떻게 기도해서 어떻게 헌금해서 어떻게 착한 일을 해서 복을 더 받아볼까, 살아 있는 내가 어떻게 하면 더 넉넉하게 살아볼까 해서 교회에 다니고 하나님께 기도를 한다 이 말이지요. 그런데 십자가 앞에서 진짜 살아있을 권리를 가진 분은 예수님밖에 없지 다른 사람은 살 권리조차 없었어요. 이왕에 이미 죽은 잡니다. 죽은 자 안에 죄가 살아있고 저주가 살아있고 심판이 살아있었던 거지요. 이것을 오늘 나온 엘리야나 엘리사의 이야기를 통해가지고 결합이라고 하시면 돼요. 인간이 홀로 자기의 생각을 할 때는 자기의 주제 파악도 안 되고 자기의 존재 의미가 뭔지를 몰라요. 하나님이 나를 볼 때에 나를 어떻게 보는지 내가 홀로 있을 때는 몰라요. 중보자와 같이 있을 때, 중보자와 결합이 될 때, 중보자에게 일어난 일을 통해서 그 의미가 나의 의미가 될 때 그게 내 의미로 확정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죽어 돌아가심으로써 죄인인 내가 의인이 되어 버리는 거에요.
그러니까 이 말은 더 극단적으로 말해서 주님의 의가 되기 위해서 (우리는 죄를 더 짓는 게 아니고) 죄인이 되어야 돼요. 죄를 더 짓는 것하고 죄인인 것하고는 다릅니다.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지을 수밖에 없지만 핵심은 우리가 죄인이라는 데에 있지, 죄를 더 지어서 죄인으로 만들자고 하는 데에 있는 건 아니에요. 모르면 녹음해놓은 것을 다시 들으면 되고.. 예수님과의 결합을 통해서 인간이라는 피조물은 결국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한 예수님 증거용이지, 따로 “내가 이만큼 잘났습니다.”를 증거하기 위해서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는 건 아니다 이 말이지요.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에 남의 것을 신경쓰지 않고 그냥 나만 신경쓰는 거에요. 이번에 울산에서 공부를 하기 전에 피자를 같이 먹으면서 식사를 했어요. 그런데 제가 이번에 대전에서 요한계시록을 강의할 때 첫째 시간에 연대기를 했잖아요. 그것을 보면서 ‘목사님 자기가 연대기 외운 것 자랑하는 건가? 왜 기존의 성경책에도 안 나오는 연대기를 외우느냐?’라고 생각을 했다는 겁니다. 약간 짜증이 났다고 솔직하게 이야기를 하셨어요. 그런데 그런 분이 한두 분입니까? 다들 그렇게 느끼셨을 건데요.
제가 요한계시록을 하면서 큰 연대기와 작은 연대기를 나누었잖아요. 이 작은 연대기가 우리의 사적 역사입니다. 제가 왜 첫째 시간에 세계의 역사에 대해서 이 연대기를 이야기했느냐 하면은 우리가 너무나 나한테 가장 밀착이 되고 가까운 것만 자꾸 기억 속에 담아요. 거기에 몰두한다고요. 이렇게 자기의 일에 몰두해버리면 우리같이 자기의 사적인 가정사만 생각하는 사람이 아닌 큰 것을 생각하는 사람에게 잡아먹히게 되어 있어요.
큰 것을 생각하는 사람이 누구냐 하면 정치가들입니다. 정치가라는 말의 어감이 약간 나쁘면 조금 더 고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독립투사들 어떻습니까? 안중근, 윤봉길 같은 사람들이지요. 그 사람들은 개인의 일에 몰두하지 않습니다. 계백 장군도 전쟁에 나갈 때 자기의 마누라를 치고 말을 치고 했다는데요. 독립투사 안중근 의사가 아버지한테 “아버지, 내가 돈을 많이 벌어와서 편하게 살게 해드릴 게요.”라는 소리를 한 것은 아니거든요. 이 독립투사들, 민족을 생각하는 이 사람들이 뭐를 생각하겠어요? 작은 연대기를 생각하겠습니까, 큰 연대기를 생각하겠습니까? 큰 연대기를 생각하겠지요.
큰 연대기를 생각한다는 말은 결국 사적인 이 사람들을 우러러 보고 존경해마지 않아요. 그런데 ‘나폴레옹은 나를 위해서 전쟁을 벌이고 영웅이 되었구나. 우리 징기스칸은 저렇게 고생하면서 대영토를 키웠구나.’라고 생각하는 사적인 역사를 갖고 있는 사람은 이 사람들의 밥이 되는 거에요. 그래서 제가 큰 연대기부터 외우는 것은 악마의 목을 치는 거에요. 이렇게 위대한 영웅들을 다 치는 겁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 끝부분에 이런 이야기가 있어요. 당나라가 618년 세워졌거든요. 그리고 618년에 세워진 당나라와 우리는 아무 상관도 없는 거에요. 그런데 618년 당나라의 이야기를 했거든요. 그러면서 하는 말이 여러분들이 만약 당나라 사람이라면 그때 당나라 임금 태종한테 굴복하겠어요, 굴복하지 않겠어요? 굴복할 수밖에 없지요. 그게 자기들의 운명이에요. 지금 마치 북한 주민들이 김정은이 무슨 짓을 해도 충성한다고 설치는 것처럼 말이에요. 그런데 우리 남쪽에 있는 사람들은 참 같잖지요, 참 불쌍하지요. 김정은은 돈 다 빼먹고 지금 돈을 날리고 있는데 자기는 배급도 못 받으면서 그저 이 나라는 행복한 나라라고 하고 있잖아요.
그런데 만약 우리가 북한에 살면 마찬가지다 이 말이지요. 정체를 드러내기 위해서 큰 연대기를 이야기한 겁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월급 100, 200만원 받았다고 하지만 만약에 한 달 수입이 1000만원이 넘는 대기업의 사장이라고 한다면 당신들은 분명히 국회의원이나 지방의원에 나가려고 생각할 겁니다. 작은 연대기에서 ‘내가 나가는 것은 이 주민들을 살리기 위해서야.’라고 큰 연대기를 들이댈 거란 말이지요. 그러면 ‘성경에서 뭐라고 해도 역시 이 세상은 훌륭한 정치를 하는 사람들이 최고야. 나는 그런 데에 관심이 있지 성경에는 관심이 없어.’라고 나올 가능성이 많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제가 연대기를 크게 이야기한 겁니다.
요한계시록은 우리로 하여금 천국의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지, 이 세상에서 훌륭한 교인이 되는 것, 훌륭한 국민이 되고 훌륭한 시민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그렇게 연대기를 한 거에요. 일할 때는 정신도 없었고 자기의 밥벌이를 하느라고 바빠가지고 그런 생각이 없지만, 조금 여유가 있으면요 국가가 어떠니 민족이 어떠니라고 하잖아요. 사람은 나이 60이 되어서 퇴직을 하고 70 가까이 되면 맨날 탑골 공원에 모여서 하는 소리가 (죽었지만) 김대중이 어떻고 박근혜가 어떻고 남자라고 큰 정치 연대기만 이야기해요. 그런데 할머니들은 그런 이야기하는 것을 못 봤어요. 꼭 할어버지가 국가 정세를 다 이야기해요. 들어보면 전부 케이블 방송 설전에 다 나오는 이야기들을 외워가지고 하는 거에요. 그리고 집에 가면 늦게 왔다고 할머니한테 꾸중듣지만요. 그러나 밖에 나오면 민족을 살리는 독립투사가 다 되고요.
결합이 중요합니다. 결합이라는 것은, 아까 이야기했지만, “살아있다고 하지만 사실은 이미 나는 죽은 사람이다. 나는 좀비와 같다.”라고 보면 돼요. 살아있는 좀비에요. 예수님과 결합이 되지 않으면 진짜 사람으로 인정이 되지 못합니다. 열왕기상이나 여기 열왕기하나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가물다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가물다는 것은 이스라엘에게 우상숭배의 죄가 있다는 말이고 죄에 대한 심판으로 하나님께서 가물게 하셨습니다. 이제부터 두 번째 시간 본격적으로 해보겠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저는 자연의 횡포라고 생각하는데요, 한 번 물어봅시다. 여기는 지금 4층이 없어서 마음 놓고 떠들어도 되는데 만약에 3층에 신혼부부가 사는데 4층에서 애들이 떠들어서 시끄럽게 한다면 층간 소음이 나지요. 그러면 층간 소음은 윗층의 횡포가 되는 겁니다. 그런 경우에 애들을 조용히 시켜달라든지 바닥에 뭘 깔아서 소음을 완화시킨다든지 해가지고 (시끄럽게 하면 말썽이 생기니까) 좋게 일을 무마할 수가 있지요. 그런데 만약에 태풍이 불어서 유리창이 깨졌다면 이것은 누구한테 보상을 받아야 되지요? 보상을 받을 수가 없지요. 그리고 맨날 팩을 발라도 짜글짜글 주름이 낄 때 이것은 누구한테 보상을 받아야 됩니까? 이게 자연의 횡포에요.
사람은 인간들의 횡포에 대해서는 이렇게 참지를 못하면서 자연의 횡포에 대해서는 운명이려니 하면서 그냥 참아요. 왜 제가 이걸 거론하느냐 하면은 사실 자연의 횡포라는 것은 없어요. 누구의 횡포냐 하면은 하나님의 횡포입니다. 하나님께서 쉬지도 않고 우리에게 말씀을 주시고 있습니다. 어떤 식으로? 횡포를 부리면서요. 절대로 우리의 뜻대로 안 해주고 우리가 뜻하지 않는 대로 계속 횡포를 부리지요.
그런데 우리는 그 탓을 누구의 탓으로 하느냐 하면은 악마의 탓으로 돌립니다. “이 마귀가, 이 귀신이 나를 해롭게 한다. 어이 귀신아 물렀거라.” 하면서 칼을 들고 막 뛰고 하지요. 가만히 보니까 마귀만 억울해요. 인도네시아에서 21만 명이 쓰나미로 죽었잖아요. 그때 분명히 예수를 믿든 안 믿든 관계없이 힌두교고 뭐고 다 쓸었어요. 거기에 신혼 여행 와가지고 같이 행복하게 살자라고 하는 사람들과 애들 데리고 가족끼리 단란하게 휴양을 왔던 사람들이 몽창 다 죽었습니다. 몽창 다 죽은 것보다 더 심한 것이 누구는 죽고 누구는 살아 있는 거에요. 그게 더 외로운 거에요. 죽으려면 다 죽든지 하지 살아있으니까.. 보세요. 세월호 침몰해서 아이들이 죽었다고 2년째 버티면서 데모하고 있잖아요. 하나님께 대들어야 되는데 마귀가 그렇게 했고 박근혜 대통령이 잘못해서 세월호가 침몰했고 아이들이 그렇게 빠져죽었다는 거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