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만한 친절 (사무엘상 3:1-5) 대전-(사무엘13강)
거만한 친절 (사무엘상 3:1-5) 대전-(사무엘13강)
이름 : 주향(IP:211.231.24.139)
거만한 친절 (사무엘상 3:1-5) 대전-(사무엘13강)
이근호
2016년 4월26일 본문말씀: 사무엘 상 3:1-5
(삼상3:1)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
(삼상3:2) 엘리의 눈이 점점 어두워 가서 잘 보지 못하는 그 때에 그가 자기 처소에 누웠고
(삼상3:3) 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아니하였으며 사무엘은 하나님의 궤 있는 여호와의 전 안에 누웠더니
(삼상3:4) 여호와께서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그가 대답하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고
(삼상3:5) 엘리에게로 달려가서 이르되 당신이 나를 부르셨기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그가 이르되 나는 부르지 아니하였으니 다시 누우라 하는지라 그가 가서 누웠더니
사무엘상 3장1절 봅시다.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희귀하다라는 것은 점점 옅어진다. 드물게 나타난다, 사라진다.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 그렇게 되어 있지요. 성경을 이해하실 때 간단하게 이해하는 방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외부세계와 현실세계를 나누어서 경계선을 찾아내면 성경 해석 끝입니다. 굉장히 간단하지요. 외부세계를 ‘투입’이라고 합니다. 사무엘이 등장하지요. 사무엘상 3장에서의 현실세계, 우리가 사는 현실세계에의 등장인물은 엘리 제사장이 되는 겁니다. (두 세계가) 만나지 않으면 복음이 나타나지 않아요. 숨겨진 복음이라는 것은 사실은 신약에서의 이야기이고 구약까지 같이 합치면 (언약=약속= 의) 성경해석 끝, 굉장히 간단하지요?
그러면 이것을 여러분이 이해했다 치고 물어보겠습니다. (두 세계 사이의 경계선) 외부세계를 엘리의 세계(현실세계)에다가 집어넣는 것을 요구할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없습니다. 그리고 현실세계를 외부세계로 집어넣을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역시 없습니다. 방금 제가 얘기 했듯이 경계선에서 (복음)이 나온다고 했잖아요? 경계선이 중요합니다. 두 개의 평지가 있는데 그것이 맞닿은 곳에서 갑자기 솟아 올라오면 그 부분이 중요한데 이 돌출된 부분이 언약이고 약속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붙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약속의 하나님이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은 숨겨진 하나님이다. 또는 숨어 계시는 하나님, 이사야 45장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자! 하나님이 숨어있는 하나님이라면 이것은 두 지점판의 만남에서 돌출된 거지요. 그렇다면 이쪽(현실세계)에서 신을 믿을까요? 안 믿을까요? 믿지요? 요거 엉터리입니다. 여기서 교회도 만들까요? 안 만들까요? 만들지요. 요거 엉터리 교회, 이건 인간들의 친목단체입니다.
의견 조절해서 신과 접촉(Contact) 할 수 있는 종교적 장치를 인간들의 아이디어로 만들어 낸 거에요. 그게 교회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교회 안되면 구원 받습니까? 교회가 되나 안되나 어차피 교회는 하나의 기업체로 만들은 거니까 기업체를 다녀도 또는 안 다녀도 맨 그 자리에 있는 것처럼 기업체가 등장하냐 안하냐 와는 관계없고 중요한 것은 그 기업체, 또는 그 교회가 깨어질 때,
깨어 질 때 뭐로 깨지느냐? 숨겨진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복음에 의해서 두 동강, 세 동강 날 때 깨어질 때 그 깨진 판을 뚫고 숨겨진 단층 층이 올라올 때 그것이 바로 숨겨진 교회가 되는 거에요. 반드시 충돌과 깨어짐, 사무엘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아요. 사무엘이라는 것은 하나가 기도하기 전에 존재하지 않는 겁니다. 없는 거에요. 사무엘이 등장하나 안하나 현실세계는 무고한 역사를 가지고 그냥 흘러갑니다.
강물처럼, 제 3 한강교에서 보면 한강은 흘러갑니다. 그냥 흘러가지요. 흘러가는데 괴물이 등장하게 되면 갑자기 물이 출렁이면서 괴물이 자기의 몸체를 드러내잖아요. 드러내지만 괴물은 한강엔 살지 않고 다시 첨벙하고 드러냈다가 “괴물이 어디 있어?”하고 구경가게 되면 그 괴물은 물속으로 사라져 버리지요. “어디 있어? 어디?” 인간이 사진을 찍거나 포착할 수 없어요.
지난 오전 설교에서 부활 이야기 했잖아요. 부활의 특징은 사진으로 포착이 안된다는 거에요. 웃으세요. 주님! 치즈~하고 찍을 수가 없어요. 주님 김치~ 이렇게 찍을 수가 없어요. 그것을 주일 오전에 용어로 표현했잖아요. “보이셨느니라‘ 보이셨다라는 말은 이쪽에서 붙잡을 수 없다라는 말입니다. 보이실 때 나타나는 것이지 보여 주세요 한다고 해서 오야!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을 두 자로하면 출몰이라고 합니다. 성령의 나타남, 약속의 나타남, 부활의 나타남, 전부다 출몰입니다. 출물이라는 것은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지지요. 그것 때문에 누가 욕을 얻어먹나 하면 사도들이 욕을 많이 얻어먹습니다. “하나님을 보여줘! 네가 예수님을 믿는다는데 그 예수 어디 있어? 몇 번지에 살고 있어? 보여주면 믿을 께!” 얼마나 욕을 많이 얻어먹는지 모르겠어요.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을 때 다시 말해 충돌될 때 주님은 스데반 집사에게 나타났고 반대로 사울이라는 사람은 예수 믿는 사람들을 체포하려고 할 때에 그 때 주님을 만나요. 착한 일 한다고 해서 나타나는 게 아닙니다. 나쁜 짓을 해도 나타나려면 나타나는 겁니다. 사실 인간에겐 나쁜 짓이란 게 의미가 없어요. 나쁜 짓이 흉악한 짓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현실세계로 한계지어서 살아가는 것을 나쁜 짓이라고 합니다.
눈에 보이는 세계가 끝, 카테고리, 이 범위가 전부, 이것이 나쁜 짓이죠. 이 세계가 전부라면 안 들키며 살면 되요. 그런데 이 세계 (외부세계)로 경계를 넘어서 확장되게 되면 귀를 지으신 이가 듣지 아니하시랴 눈을 만드신 이가 보지 아니하시랴 (시 94:9) 듣고 계시고 보고 계시다는 거에요. 이 말은 뭐냐하면 아무리 과학이 발달해도 귀는 왜 있는지? 귀가 이렇게 생겼다는 것을 그릴수도 있고 귓병이 났을 때 세포조직을 떼서 고칠 수는 있지만 왜 귀가 있는 지 이유에 대해서는 인간은 도저히 모르지요.
귀가 있는 이유는 약속 때문에 눈이 있는 이유는 약속 때문에 다시 말해 인간은 왜 존재하는가? 주님의 언약 때문에 다른 말로 하면 언약의 하나님을 위해서 그렇게 있는 겁니다. 그러면 성도가 있는 것은 자기의 구원을 위해서? 아니요. 성도는 죄인을 의인되게 하신 분이 엄연히 계시다는 것을 증거 하기위해서 이 땅에서 욕 얻어먹을 각오를 하고 약속이 믿어지는 새 피조물로 이 땅에 등장하게 된 사람이 성도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성도는 출몰된 언약을 믿다보니까 본인의 존재도 출몰에 의존하게 되어 있어요. 이것은 이제부터 좀 어려운데요, ‘나’라고 하는 것은 나는 누구 누구이다라고 하는 것은 내 기억이 허락하는 한에서 임시적으로, 한시적으로 나에요. 만약에 치매에 걸리면 묻습니다. 내가 누구인지를 모르니까 네가 내가 누구인지를 알려줘! 이렇게 되는 거에요. “아들아! 난 아들이 최고야! 네가 내가 누구인지를 알려다오! 그러면 내가 동의함으로서 내가 누구인지 말할 께” 라고 하지요.
그런데 아들이 가고 사라진 자리에 딸이 오게 되면 또 묻는 거에요. 네가 나에게 누구라고 하게 되면 그게 나라고, 그러니 이건 뭐냐하면 나라는 것은 내 앞에 누가 등장하느냐에 따라서 내가 누군지 정해지겠지요. 이것은 뭐냐하면 내 앞에 누가 출몰하느냐에 따라서 그때 그때마다 다른 내가 출몰하는 겁니다. 연관 관계, 연결된 관계가 되는 겁니다. 내 앞에 누가 있느냐에 따라서 내가 달라지지요.
탈북하는 사람들 있잖아요. 탈북하기 전에 북한에서 그 사람들이 뭘 했겠습니까? 김정은이 앞에서 뭐 하겠어요? 충성을 약속 했겠지요. 그 사람들의 연관 관계는 김정은이 있고 그 앞에 내가 있고 충성해야 될 연관 관계였지요. 그러다가 그 사람이 중국에 갔다가 한국에 왔다 그러면 그 탈북자에겐 김정은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대신 그 앞엔 대한민국 국민들이 있지요.
그러면 그 앞에서 자신의 고백은 당연히 달라지겠지요. 잘 보여야 되니까, 아마 탈북자들은 새 누리당 찍었을 거에요. 살아야 되니까 예전엔 북한에서 김정은만 찍었듯이 이제는 자기의 권리행사도 그렇게 달라지는 겁니다. 이 말은 내가 누군지 모른다, 앞으로 어떤 입장이 될지 모른다는 거에요. 그래서 이걸 오후 설교에 이렇게 말했죠, 환경에 따라서 주체가 바뀐다고 했어요. 상황이 달라지면 주체가 달라지지요.
평교사일 때 학교를 보는 것과 교감이나 교장일 때 학교를 보는 관점이 달라져요. 평교사들은 자기 월급만 받으면 그만이지만 교장이 되면 학교 전체를 위해서 봐야 되고, 교사 자리까지 내칠 수 있는 그런 용기를 가져야 되요. 학교 전체를 살리기 위해서 미움 받을 수 있다라는 각오가 되어 있어야 되지요. 모든 사람을 좋게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의견 차이가 난다면 어느 한 편엔 서야 되지요. 객관적 정당성이 있어야 되니까.
교장이 훌륭하다는 말이 아니에요. 절대 오해 하시면 안되고 교장 자리가 의미가 있다는 말이에요. 나는 훌륭한 교장이기 때문에 교장 자리를 유지 한다고 설득하면 안되요. 교장 자리가 나로 하여금 나를 만들었으니까 나한테 끽소리하지 말고 낸 명령대로 지시에 따라, 이렇게 되는 겁니다. 자리라는 게, 이것을 두자로 이야기하자면 연극이라고 이야기 하고 싶어요. 저는 연극을 안 좋아합니다.
제가 연극을 안 좋아하는 이유가 뭐냐하면 세상 자체가 연극인데 이 세상 자체가 사기거든요, 연극이다라는 말이죠. 어떤 역할을 맡는데 그 역할이 곧 나 인 것처럼 확정짓고 역할을 해보니까 몇 달 지나고 몇 년 지나니까 그때 그 역할을 한 내가 나의 진심이 아니였었어요. 그것은 그 상황이 나를 윽박질러서 그럴 수밖에 없었어요. 그리고 내가 누구인지 종잡을 수 없는 입장에서는 그때그때 주변의 시선, 남들의 요구에 의해서 따를 수밖에 없으니,
나의 역할을 앞으로 다음 달 되면 어떻게 될지 나도 장담 못해요. 그것을 어느 장단에 박자 맞출지 장담 못해요. 사는 게 뭐냐하면 지금 주어지는 환경의 박자 소리에 맞춰 사는 것, 그게 제일 속 편하다고 하잖아요. 둘러 싼 사람들의 시선에 맞추어서 튀지 않게 사는 것, 그것을 노래로 ‘내겐 강 같은 평화’ 튀지 않고 버티면 산다는 겁니다.
그런데 강 같은 평화가 가사처럼 그냥 주어지는 게 아니고 사실은 내가 그것에 맞춰나갈라고 열심히 노력하고 있는 겁니다. 오리처럼 물위에 떠 있는 것만 보면 평화인데 물속을 보면 발버둥 치고 있어요. 교회에 목사가 바뀌면 교인들도 바뀌어요. 시키는 대로 하니까 목사가 바뀌면 거기에 맞춰서 물장구치고 있는 거에요. 세상이 이렇게 생생한 연극인데 또 무슨 연극이 필요해요. 연극을 보러 가게 되면 마치 이 세상이 연극이 아닌 것처럼 오해하게 되잖아요.
진실은 이쪽에 있는 것처럼, 연극만 가짜에요? 아니에요. 돈 벌기 위한 연극은 죽을 때까지 쉼이 없습니다. 계속해서 연극하고 있는 거에요. 교회에 다니는 것도 연극이에요. 교회에 다니면 마치 예수님이 나를 내려다보는 것 같아요. 주님 앞에서 안 하던 짓을 해야되요. “주여!” 갑자기 안하던 짓을 하고 찬양 할 때는 은혜 받은 것처럼 손을 올리면서 갓바위 불교신자들이 하는 것처럼 똑같이 “오! 찬양을 받으소서!” 하는 거에요.
청년들이 가스펠송 부르면서 드럼치고 밴드 동원해서 하는 짓 보세요. 그 나이 20대까지 얼마나 아빠, 엄마의 눈치를 봤으면 눈치가 완전히 연극배우 저리가라 할 정도로 연기에 능한, 어른들의 눈에 맞춰 사는 것에 얼마나 능했으면 효자일수록 더 하겠지요. 반항하지 않는 착한 아들, 효자 이미지를 이제는 찬양으로, 어디서 봤는지 눈을 들어 위를 쳐다보면서 옛날에 버스 안에 붙은 그림속의 기도하는 소녀의 모습처럼 (오늘도 무사히) 그것을 흉내 내고 모방하는 거에요.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이야기했습니다. 교육의 시작은 모방이라고 했는데 솔직하게 말해서 세뇌입니다. 교육의 시작은 세뇌이고 이 세뇌가 버릇되니까 또 다시 세뇌해 줄 것을 기다리고 있는 거에요. 누가? 어른이 아이를, 이 아이가 아이의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사무엘 상 3장에 누구에게도 세뇌 받지 않은 아이로 등장합니다. 여기서 어른의 세계의 엘리는 놀래버립니다.
이미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세뇌를 했었는데 어린 애라면 마땅히 어른에게 한 수 배워야 하는데 돌발 사태가 일어나요. 출몰하니까 현실 세계는 위기에 놓입니다. 그래서 복음은 위기이고 언약도 위기입니다. 우리에게 귀가 있고 눈이 있는 것은 그 위기를 느끼라고 주신 것입니다. 내가 잘못한 게 아니에요. 절대로 개인적인 잘못과 실수와 죄를 하나님 앞에 내놓지 마세요.
하나님 앞에 내놓을 죄는 개인적 죄가 아니고 총체적 내가 짓지도 않은 지옥 같은 죄의 성향 속에서 내가 못 빠져 나오는 처지, 그 자체를 주님 앞에 내놓아야 됩니다. 그것을 두자로 하면 ‘세대’라고 합니다. “이 세대를 본 받지 말라”의 세대, 우리가 주님 앞에 이 악한 어두운 세대를 드릴 때 꼭! 잊지 말고 누구를 포함시키나 하면 이 악한 세대에 독생자도 포함이 되었잖아요라는 그것에 대한 인정함, 그것을 동의하는 마음을 가지고 이 세대를 드리세요.
그냥 드리면 아무 소용없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했던 세대에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알게 된 이 악한 세대 속에 내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세대를 주 앞에 드러내세요. 이 세대를 드러냄으로서 우리는 무엇과 연관되어 있냐하면 현실세계와 연관된 사람이 아니고 주님이 주신 경계선, 숨겨진 세계와 연관되어 있는 새로운 피조물인 것을, 새로운 존재로서 그때그때마다 들추어지는 겁니다.
사무엘을 생각할 때 사무엘이 훌륭하다고 하지 마세요. 이렇게 하세요. 사무엘의 조정자가 그때마다 배후자가 있다고 생각하세요.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나는 이렇게 결심했다, 나는 헌금하기로 결심했다, 나는 기도하기로 했다. 이렇게 하지 마시고 그것, 주께서 안 받습니다. 주께서 기도하게 하셨고 전도 하도록 하셨고 숨 쉬도록 하셨다고 하세요. 주께 조정 받는 것에 감사히 여기시기 바랍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에게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만 왔다” 주께서 내가 조정할 인물은 하나님의 자녀에게만 왔다, 그 여인이 하는 말이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진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그러면 그 연결 고리를 개를 조정하시는 주님의 같이 나도 끼어들게 하옵소서. 나는 자식의 레벨은 안 되더라도 개의 레벨이라도 연결되면 저는 족합니다. 그 연결을 믿음이라고 하는 겁니다.
“네 믿음이 크도다” 이런 믿음을 보지 못했다. 이런 연결고리는 처음 봤다는 거에요. 연결이 되었을 경우에는 자기가 개이던 자기가 어떻다는 것에 자기가 독자적으로 나의 가치는 어떻습니까? 하고 물을 이유가 없어요. 연결이 되어 있기 때문에, 악한 역할을 하는 탈렌트가 자기 역이 나쁘다고 탓하지 마세요. 연극의 연기에 두 종류가 있어요. 하나는 대본대로 연기하는 것이 있는 반면에 다른 하나는 그 배우가 갖고 있는 개성을 돋보이게 하는 연기가 있어요. 그것을 메소드 연기라고 해요.
메소드 연기를 잘 하는 배우 김명민 이라든지 과도하게 그 역의 인물과 하나 되는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 했던 시키면 겁이 날 정도로 저러다 배우 잡겠다 할 정도로 몰입하는 것을 메소드 연기라고 합니다. 그러면 초점이 시나리오보다도 연기하는 배우에게 시선이 가겠지요. 관객들이, 그것을 노리고 하는 것이 메소드 연기입니다. 그렇다면 사무엘은 사무엘이 착하다, 훌륭하다 이러지 마세요.
사무엘은 강아지처럼 그냥 주인이 방에 있던 개를 사람들에게 보여주려고 거실로 데려와도 자기 역할을 할 뿐이에요. 그렇게 되는 이유가 있어요. 뭐냐하면 외부 세계, 하나님이 있는 세계에서 사무엘은 주님이 움직이시는 거에요. 어린아이처럼, 그런데 기존의 세계는 본인이 본인의 미래를 결정하는 독자적인 세계입니다. 어른들의 세계지요. 이럴 경우 누구에게 관섭 받지 않고 자기 앞가림은 본인이 결정지어서 본인의 행동에 나서게 됩니다.
그러니까 현실 세계 속의 어린 애라는 것은 어른에게 꼭두각시처럼 부림을 당하는 어차피 너는 어른되니까 네가 내 세계 속에 포함이 되니까 일찍부터 어른의 세계의 정보를 아이에게 뒤집어씌우는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양육이라는 이름으로 활발히 이루어지는 거에요. 그런데 생뚱맞게 어린 사무엘이 등장해버리니까 어른 세계의 판이 깨져버리는 겁니다. 장기판 깨지듯이, 바둑판 두 쪽 나듯이, 바둑을 누가 이기든지 상관없어요. 판 자체가 깨져버리니까.
누가 재벌 3세이냐 누가 잘사느냐, 가난하냐? 이것을 도끼로 깨버려요. 교인 몇 명이야 헌금 얼마나 나오냐? 자체를 깨버린다니까요. 복음이 바로 도끼입니다. 세례 요한이 이야기 한 거에요. 복음 들고 왔다고 해놓고 도끼 들고 올 줄 누가 알았겠어요. 모든 가치 판 자체를 완전히 부정해 버리는 거에요. 찍어 버립니다. 이것을 상쾌함, 네 자로는 속 시원함, 또는 존재의 가벼움.
그러나 이쪽 현실 세계에서 보면 작살나는 거지요. 작살난 인생이에요. 나에게서 품위라든지 예의, 그런 것은 찾지 말아요. 나는 착함, 윤리, 도덕 찾다가 작살 나버렸다. 그 윤리 도덕이 얼마나 겹겹이 쌓인 무거운 짊이었던가를, “이러면 안돼되! 내가 어떤 인간인데 이러면 안되지!” 나의 나됨은 이것을 유지 할 때만 나됨이라고 여겼던 그것이 작살 나버렸어요. 아까도 이야기 했지만 바둑판을 작살내버리는 거에요.
바둑 두고 있는 데 그것을 작살 내 버리는 거에요. 바둑 두는데 애를 많이 쓰거든요, 한 두시간 정도 두면 마누라가 와서 확 엎어버려요. 이것들이! 하면서, 기센 마누라가 길을 덜 들였구만 하면서 판 자체를 엎어 버립니다. 아주 상쾌해요. 그러면 사무엘이 외부 세계에서 왔다는 것을 사무엘을 만나면서 이쪽 현실 세계에서 엘리가 사무엘을 통한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 어떤 모습으로 대처 하느냐?
간단히 용어로 하면 거만한 친절입니다. 거만한 친절을 주로 누가 많이 하지요? 조직 사회에서 갑이 을에게 하지요. 미워 죽겠어요. 친절한 데 이상하게 느낌이 거만해요. 앞에선 위한답시고 하는 데 느낌 좋지 않아요. 엘 리가 사무엘에게 아주 거만한 친절을 베풉니다. “사무엘아!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내가 네게 들으마! 나는 너의 소리를 네 소리로 듣지 않는다. 나는 하나님이 우리 이스라엘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겠어.”
굉장히 친절하고 겸손해 보여요. 고단수의 거만함이고 오만입니다. 요한복음 1장을 보고 난 뒤에 질문하나 할께요. 1장 47절 누가 한번 읽어 보세요. 참 이스라엘, 이 사람은 참기름도 그냥 참기름이 아니고 참 참기름, ( 참 이스라엘 = 간사한 것이 없다 )가 되잖아요. 그러면 간사한 것이 없는 것이 참 이스라엘이라면 거짓 이스라엘, 가짜 이스라엘, 인간들로부터 교육된, 양육된 그런 이스라엘은 뭐냐하면 간사한 이스라엘이 되겠지요.
(요 1:47)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이르시되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그러면 간사한 이스라엘이 자체적으로 간사하게 보이겠습니까? 겸손하게 보이겠습니까? 되게 겸손하게 보이는 거에요. 나다나엘에게 네가 간사한 것이 없다라는 말은 하나님의 심판 기준에서 나온 품성입니다. 마지막 심판 할 때, 마지막 심판이 제일 중요해요. 심판자가 제일 중요해요. 아무리 변호사, 검사가 옳은 소릴 해도 판사가 판결을 내리는 기준이 최고지요. 그게 최종적이잖아요. 그 이상 뭐가 필요해요.
그런데 나다나엘 같은 경우에는 순회 재판이에요. 나중에 가서 재판을 받는 것이 아니고 심판주가 미리 댕겨서 단독으로 판결 받은 거에요. “자! 이제부터 피고 나다나엘에게 판결을 내린다. 네가 간사한 것이 없구나!” 이렇게 판정이 나버렸어요. 일단 판정을 받고 시작해요. 최종 구원을 이미 확보하고 나다나엘은 살아갑니다. 이것을 땡 잡았다! 이렇게 이야기해요. 나다나엘이 일 년에 재산세를 얼마 내느냐는 아무 상관없어요.
나다나엘에게 자식이 있는데 그 아이가 자기 반에서 석차가 몇 등이냐? 전혀 상관없습니다. 나다나엘이 대장암에 걸려서 수술 받다가 아픈 것도 전혀 상관없어요. 나다나엘의 시력이 얼마냐 관계없습니다. 나다나엘의 집이 태풍 불어서 담이 무너지고 안방에 있는 자기 아내가 다쳐도 관계없어요. 평가는 하나 밖에 없습니다. 간사한 것이 없을 경우에만 천국에 가는 참 이스라엘이다라고 평가를 내리는 거에요.
그래서 나다나엘은 구원 받았다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나다나엘은 구원 받은 자의 관계를 드러내는 연극인으로서 이 땅에 출몰된 겁니다. 그러면 나다나엘이 예수님에게 이런 이야기를 듣고 그의 인생사는 뭐겠습니까? 어떤 인생관이겠어요? 내가 얼마나 재산을 모아야 되고 얼마나 오래 살고 하는 인생관이겠습니까? 뭐겠습니까? 간사한 것이 없어야 된다. 이것이 인생관이 되겠지요.
그러면 간사한 것이 없다라는 말은 다른 말로 하면 솔직하다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시편 51편에 다윗이 솔직하게 간사한 것이 없이 성령 받았으니까 성신을 받고 다윗이 하나님 앞에 기도드릴 때 솔직하게 기도 했어요. 솔직하게 기도하니까 기도 안에 내용이 뭐가 들어가있냐 하면 자기 자신의 평가가 솔직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시편 51: 17에 보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내가 드리는 것(제사)가 아니고 나 자체, 상한 심령이지요.
(시 51:17)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그러면 이것은 주님 시선에 갔다가 온, 주님 시선을 경유하고 온 시선을 자기의 시선으로 본 거에요. 주님의 평가를 이제는 나의 평가로 받는 거지요. 주님을 조명을 비취면 그 조명 이 나에게 비취는 조명으로 이미 합치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간사한 것이 없다라는 것은 노출되어 있다. 주님 앞에 환하게 노출된 사무엘은 주님 앞에 가려져 있는 엘리의 세계, 엉터리 이스라엘 앞에 투입이 된거에요.
한 쪽은 훤해요. 상쾌해요. 왜? 간사한 것이 없으니까. 어차피 상한 심령이니까. 주님을 속일 이유가 없다니까요. 주님 앞에 꾸밀 이유가 없어요. 주님, 기도 할 때는 주 손을 모을까요? 꿇어앉을까요? 이렇게요? 저렇게 할까요? 그럴 필요가 없어요. 왜냐하면 주님도 역시 우리 앞에서는 타인이거든요. 그 타인의 시선을 이미 공유했으니까 주님의 시선은 하나 밖에 없어요. 간사한 것이 없다.
이미 확정이 된 상태에서는 양반 다리로 앉아서 기도하든 꿇어 앉아 기도 하든지 도무지 그것을 보지 않는다는 사실이에요. 십 만원을 했는지 이십 만원을 했는지 도무지 보지 않아요. 주께서 원하시는 것은 상한 심령 자체를 꾸미지 않고 상한 심령 자체를 간사함 없이 노출시킬 때 그것이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가 되는 거잖아요. 형식이라는 것이 이토록 그동안 인간을 힘들게 만들었어요.
기도 할 때는 몇 분을 해야 되고 전도 할 때는 몇 명을 해야 되고 이런, 전도 할 때는 어떻게 해야 되고 내가 나를 겸손하게 하나님 앞에 나올 때는 어떤 마음가짐으로 나와야 하는지 이런 법적인 형식 같은 것이 우리로 하여금 참 힘들게 만들었어요. 어떤 분이 저에게 질문을 했는데 뭐냐하면 질문이 있어요, 천국에 가려면 본성이 바뀌어야 합니까? 답변은 지상에서 자신이 바뀌는 것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는데
과거의 자기와 차이를 내면서 현재의 자기를 바꾸려고 하는 것은 기억에 의존하는 것이다. 진짜 변화는 십자가 앞에서 처음부터 소급해서 태어나기 전부터 죄인인 것을 발견하는 것이 이게 변화이다. 십자가 앞에서의 변화란 사실 변화가 아니고 처음부터 참 그랬지! 라고 하지 새삼스럽게 변화했다고 할 필요가 없어요. 안 달라진 체 구원 받는다. 이게 정답이죠. 다만 그것을 인식 하는데 있어서 자꾸 잊어버리니까
잊어버리는 것을 안 잊으려고 다시 본래 모습을 찾았다는 의미에서의 변화이지 내 자체가 달라진 것은 없어요. 전에도 죄인이었고 지금도 죄인이고 앞으로도 죄인이고 똑같아요. 그런데 인간은 기억의 존재가 되어 노니까 전에 과거와 다른 내가 되게 되면 거듭났다고 착각하게 되는 겁니다. 이 목사님이 진짜 중요한 질문을 하신 거에요. 이 목사님의 이 질문 이전의 것들을 십자가 마을에 스마트 폰의 질문과 답변해서 서른 개를 어제 올려놓았잖아요.
간사한 것이 없다는 평가는 신약의 요한복음에 나오는 이야기이죠. 우리는 지금 사무엘 3장을 보고 있습니다. 그러면 사무엘 상은 구약이잖아요. 사무엘 상과 요한복음 1장 사이에 어떤 내용이 들어가겠어요? 이미 정답은 나와 있어요. 간사한 것이 없다라고 나왔잖아요. 그러면 사무엘 상에 아이 사무엘이 등장 한 것은 이 정답이 왜 정답일 수밖에 없는가? 주변 상황에 따라서 점차 점차 정답에 접근해가는 변화의 조짐을 구약 성경이라는 판 위에서 쫘악 펼쳐지겠지요?
펼치면 되는 겁니다. 가을철에 고추 널듯이 쭈~욱 펼쳐 놓는 거에요. 펼쳐 놓는다는 것은 우리가 위에서 보면 되요. “아~하! 사무엘 상 4장, 5장...이렇게 변화되는 구나!” 그러나 우리는 이미 정답을 알았습니다. 요한복음 1장을 통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마음은 간사한 것이 없다라는 것, 다시 말해서 네가 나에게 작업 걸지 마라! 네가 새 사람 되려고 네가 인간답게 살려고 네가 자꾸 어떤 짓을 하지 마라는 겁니다. 처음부터 상한 심령을 그대로 노출 시키면 되겠지요.
그런데 노출 시킬 때에도 계기가 있어야 하는데 이 현실 세계에 외부의 세계의 사무엘이 들어오니까, 우리는 구약을 보면서 어떤 자가 하나님의 꼭두각시로서 인간세계에 침투되어 있는가? 그것을 찾아내서 그 경계선에서 나타나는 충돌을 파악하게 되면 이것이 바로 구약 성경의 이해, 해답이 되겠습니다. 제가 첫째 시간에 이야기 했잖아요. 성경 해석은 어떻게 하느냐고?
서로 이질적인 두 판을 지진처럼 충돌을 일으키면 거기에 경계선이 생기고 거기서 숨어있던 단층 판이 올라온다고, 이번에 일본의 규슈 지역에서 일어난 지진이 보통 단층은 죽은 단층인데 활단층(활성단층)이 일어났다는 겁니다. 살아있어요. 규슈 지역은 좌측이 나가사키현(대마도)이고 활단층은 도쿄 쪽으로 되어 있어요. 이 말은 바깥에 드러난 해안선과 땅과 바다의 경계선이 이렇게 되어 있지요.
그 부근에 사는 사람들은 아침에 눈만 뜨면 해안선을 바라보고 산과 숲과 나무들을 바라보며 살았습니다. 어느 누구도 땅 속의 활단층이 이렇게 되어 있는 줄은 아무도 못 봤어요. 그들이 본 기억 속에는 태어나서 어릴 때 물장구치고 다람쥐 쫓던 그 기억은 자기가 그리던 고향엔 바다가 있고 땅이 있고 숲이 있던 아름다운 고향,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 골~ 복숭아 꽃, 살구 꽃, 아기 진달래. 이런 것 밖에 기억에 없어요.
숨어있는 활단층은 기억에도 없었어요. 그런데 이것이 현실인줄은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것이 집을 무너뜨리고 고향 마을을 완전히 박살 낸 사실을 누가 알았겠어요. 이 고향이 사실은 껍데기이고 가짜 고향인 것을, 이 가짜 고향의 특징이 뭐냐하면 돌아갈 곳이 없어요. 날라가 버려요. 이것을 정리해 보면 이렇습니다. 성도가 살아있다는 것은 단순히 살아있는 것이 아니고 죽음을 말하기 위해서 한시적으로 살아있는 거에요.
그런데 그 죽음을 만드는 자가 누구냐 바로 내가 나로 인하여 나의 죽음을 만든다는 것을 남에게 알려주는 겁니다. 보통은 “너 때문에 못 살겠다”고 하잖아요. 사실 정답은 나는 나 때문에 못 살아요. 여름에 태양이 뜨거워서 못 사는 게 아니고 내가 땀이 나기 때문에 못 살겠어요. 내가 여기 있음에 내가 나에게 짊이 되는 거에요. 젊은 애들은 짊이 아니에요. 왜 세상은 자기 꺼니까. 나이가 많으면 처치하기 곤란해요. 누가 나를 갖다 버려 줄 사람 없는가? 하고,
그래서 지옥이라 하는 것은 저기, 천국이나 지옥은 저기 있는 것이 아니고 이 땅에서 지금 지옥을 만들고 있는 것을 발견해야 됩니다. 노래 중에 (Home Sweet Home) 즐거운 나의 집이 있잖아요. 그게 지옥 모임이에요. 그게 모여서 지옥 만드는 거에요. 그것이 천국 되려면 거기에 식구가 네 명이 있다면 간사한 것이 없으면 천국이에요. 지옥 만들기 동시에 천국 만들기,
천국은 어디에 있는가? 지옥 만들기가 깨어지면서 그 속에서 활단층처럼 천국이 올라오는 거에요. 천국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지옥 안에 천국이 있어요. 지옥임을 인정 할 때 천국입니다. 네 식구가 우리는 나 때문에 지옥이지! 아니야! 엄마는 나 때문에 지옥이지! 아니야! 아빠는 나 때문에 지옥이지! 아니야! (동생은) 나 때문에 지옥이지! 다 스스로 자기 자신이 상한 심령임을 인정 할 때 그 네 식구가 천국을 만들어 내는 거에요.
천국의 특징은 죄인들이 가는 곳이에요. 자꾸 의인되려 하지 마세요. 그것은 반대편으로 가요. 거지 나사로가 앞집에 있던 부자는 자기가 잘났기 때문에 복 받았다는 거에요. 자기는 착하니까 복 받고 너는 못 났으니까 거지된 거에요. 그러던 착한 나가 어디 갔습니까? 지옥 갔어요. 지옥에 가서도 갑 질하고 있는 거에요. 거지 나사로에게 물 한 방울 택배로 보내 달라고, 그 버릇이 어디 갑니까? 그 버릇이 본인을 지옥가게 만든 버릇이에요.
지금 우리 속에는 간사한 것이 없어야 되는데 우리는 내가 나를 살려 보려는 천국까지 가려는 그 간사한 짓이 계속 나와요. 이게 어른들의 세계이고 남에게 비치지 않고 남에게 안 졌다는 것을 뽐내려고 하는데 어린 사무엘을 만나 보세요. 우리는 오만한 친절을 베풀지 마시고요. 완전히 바둑 두고 있는데 판 깨시는 하나님이 사무엘을 도끼로 삼고 “매일 예수님이여! 이 행복한 가정을 두 조각내게 하옵소서!”
그래서 내가 기대한, 이 기대함이 문제인데 내가 기대한 자체를 중간에 끊게 하게하는, 기대하지 말고 주신 것에나 감사하게 하옵소서! 내가 뭔데 기대를 해요. 기대할 권리도 자격도 없어요. 절에 가는 것이나 교회 가는 것이나 똑 같습니다. 기대의 충족을 위해 가잖아요. 그러면 목사나 사기꾼들은 얼씨구나! 하고 돈 빼먹는 장치를 배치하지요. 본문 3-4절 다시봅시다.
(삼상3:3) 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아니하였으며 사무엘은 하나님의 궤 있는 여호와의 전 안에 누웠더니
(삼상3:4) 여호와께서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그가 대답하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고
하나님이 (사무엘을) 어디서 불렀습니까? 하나님의 언약궤 있는 전에서 불렀지요.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구원하기 위한 용도로 부른 것이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사무엘을 구원하기 위해 성경책이 있는 것이 아니고 사무엘을 부르는 음성이 어느 장소에서 뭐가 있는데서 언약이 있는 곳에서 사무엘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지금 언약궤의 관리자가 누구냐 하면 엘리에요.
엘리가 아무리 상자, 물체인 사물적인 언약궤를 관리해도 언약궤 자체에서 나오는 숨겨진 주의 음성은, 3장 1절에 보면 말씀이 끊어진 상태에서 이미 희귀하다고 했으니까 말씀이 없는 거에요. “당신이 말씀이 없다는 것을 어떻게 압니까?” 언약궤에서 나와야 말씀이고 아니면 말씀이 아니에요. “지금 언약궤가 어디 있는데?”하면 바로 십자가의 반복성이 언약이다. 왜? 언약의 완성을 새 언약이라고 하거든요.
항상 우리가 행동하는 것이 새 언약으로 이끌리게 한다면 그것이 신의 음성이고 (보이스 오브 갓) 하나님의 음성이에요. 나로 하여금 십자가를 다시 바라보게 하고 십자가 앞에서 우리가 노출될 때, 간사함이 없어야 되요. 그게 이스라엘이에요. 십자가는 희생이에요. 너희가 밥 먹고 일하고 숨 쉬는 것은 희생의 바탕위에서 나온 혜택이라는 겁니다. 주님의 희생 없이 어느 하나도 네가 숨 쉬고 밥 먹고 물 마시는 모든 것이 주의 희생을 그동안 밟고 지나 온 거에요.
더러운 죄로 주의 희생을 밟고 겁 없이 까불까불 살아 온 겁니다. 그래서 사무엘의 등장은 이질적인 겁니다. 5절에서 “너 왜 왔는데?” 너 왜 왔어? 이 말, 어린 사무엘은 어느 정도 간사함이 없냐하면 “제사장님이 불렀잖아요.” 얼마나 사무엘이 껍데기만 남았어요. 당신이 부르셨잖아요라는 이야기는 사무엘이 스스로 자기의 정신적 무게나 어떠한 중량감이 없다는 거에요. 본인에게. 껍데기라는 거에요.
일체 사무엘은 중량감이 없어요. 이 말은 시키는 대로 사는 거에요.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나는 결과물이다. 하나님 음성의 결과물이다. 주님의 소리 그 자체에요. 세례 요한처럼 쟁반 위에 담겨 목이 달아나도 괜찮아요. 나는 그냥 결과물이기 때문에, 소리의 결과물이니까, 소리는 원래 흔적이 없어요. 이 흔적 없음을 히브리서에서 세 자로 말하면 그림자라고 합니다. 성도는 그림자에요.
이것을 골로새서 3장에서는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우리는 이미 땅에서 죽었고 우리의 생명은 하늘에 있는 것이다. “그럼 땅에 있는 것은 뭡니까?” 그건 그림자에요. 이것을 히브서에서는 옛날 구약의 제사장을 그림자로 봅니다. 또는 모형이라고 하고 그 모형이라는 것이 신약의 히브리서 8장5절에서 나왔지만 구약의 제사장들이 미리 그것을 알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야! 내가 제사장이다. 내가 제사 드린다. 나에게 까불지마!” 이런 것은 중량감이 있어요.
정치적이고 권위적이에요. 그러면 안돼요. 여러분! 나는 그림자입니다. 실체는 따로 있어요. “당신은 왜 그림자라고 합니까?” 그냥 자리, 주께서 주신 자리가 나로 하여금 자리에 맞는 역할을 하게 하신 거에요. 교장이 훌륭해서 교장 되는 게 아니고 교장의 자리 때문에 하는 것처럼 성도라는 자리, 주의 증인이라는 자리를 성령이 주셨기에 잘나서가 아니라 주의 자리에 합당하도록 우리는 오늘도 이끌림을 받고 있습니다.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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