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단에 관한 글 모음(20년에서 10년 전의 글들) 20160527
[ 이단 판별 ]이단은 있다. 그런데 이단들이 변신에 변신들을 시도하기에 구별하기가 쉽지 않다. 이단들은 말씀 덩어리로 자신을 뚤뚤 감고 버티기 때문이다.예수님 당시에 귀신들려 고통 하던 병자들이 있었지만 진짜 이단들은 멀쩡하게 거리를 활보했고 정치를 했고 신을 경배했다. 말씀을 달고 다녔고 걸핏하면 ‘말씀의 생활화’를 외쳐대었다. 그들이 바로 악마를 아비로 두고 사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었다.(요 8:44) 이 평가는 예수님의 일방적 평가들이 그들이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어쨌든 전형적인 이단들이었다. 바로 이 바리새인들에 대한 예수님의 인식에 근거해서 오늘날 기독교식 이단들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그들은 성경에 나와 있는 말씀 실천에 열심이다. 십자가 믿으라면 십자가 믿고, 성령 법아라 면 자신을 성령 받은 자로 간주한다. 바르게 살아라 하면 바르게 살고, 이웃 사랑하고 이웃을 용서하라면 주저 없이 사랑하고 용서하며 산다. 새 생명 속에서 살라 하면 새 생명 속에 살 용의가 되어 있는 자들이다. 옛 육에 속한 악한 일을 하지 말라하면 단호히 모든 악한 일을 하지 않기 위해 정신을 집중시키면서 다음과 같이 외친다. “성령을 받아 예수 믿게 된 자들은 이제 예수님의 정신과 영과 마음으로 혼신의 힘을 다하여 선하고 착한 일에 나서서 하나님을 닮아서 하나님 같이 되어야 합니다.” 이게 전형적인 이단이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간음하지 말라”는 말씀은 벌써 우리가 간음자이다 는 것을 전제로 하신 하나님의 말씀인 것들은 그들은 모른다. 전 성경에서는 모든 인간이 이미 ‘간음자’라는 것을 선포하시면서 새삼 그 이유를 언급하시는 식으로 십자가 복음이 작렬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단들은 실제로 성령을 받은 적이 없는 이들이기에 이런 식으로 성경을 볼 줄 모른다. 기껏 다음과 같은 식이다. “아직은 간음 안했으니 앞으로도 성령님의 간섭과 도움 하에 간음 안해야지” 하는 식으로 나온다. 성경에서 “예수 믿으라”는 말은 그 누구도 ‘예수 믿는 자가 아니다’는 점을 전제로 한다는 사실을 모른다. 즉 인간이 아무리 예수 믿는다 고 우겨도 날마다 성령께서 믿게 하여 주시지 아니하면 안 믿을 자들이 인간인 것을 그들 이단들은 고백하지 못한다. 그들이 정작 지키고 싶었던 것이 무엇일까? 예수님도 아니고 하나님도 아니고 성령님도 아니다. 자신의 명예와 위신과 가치를 지키는 것을 곧 하나님의 위신과 명예와 위신을 지키는 것과 직결 된다고 여긴다. 당연히 십자가의 원수들이다.( 빌 2:18 ) 옛날 바리새인들이 율법을 지키는 방식을 그대로 사도들의 명령과 권면에다 적용시켜서 결국 건져내려는 것은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지키기’ 이다. 당연히 근원적인 회개가 뭔지도 모른다. 어디까지 내려가야 회개인 것도 모른다. 십자가에서 함께 죽었다 는 사도의 의미를 모른다.(갈 2:20) 그들은 죽는 척을 해서 다시 자기 자신의 가치를 건져내는데 늘 성공(?)하고 있다. 성령을 받아본 적이 없기에 십자가를 앞장세우고 자신은 죄로 인하여 죽어 있는 자로 뒤따르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자신이 뭘 해도 죄인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고백 못한다. 그들이 십자가 대신 앞장세우는 게 있다. 그것은 바리새인들이 주장하는 다음과 같은 주장이다. “말씀을 생활화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립시다. 바로 그들이 주장하는 그 하나님을 그들의 손으로 지금도 날마다 죽이고 있는 것이다. 기어이 자기 가치를 사수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한 때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었던 자가 예수님을 만났던 사도 바울은 정반대로 나오신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갈 6:14)이단의 판별은 따지고 보면 간단하다. 자신이 뭘 해도 죄인이다 는 점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성령으로 살면 죄가 나오게 되어 있다. 왜냐하면 성령은 책망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요 16:8)이단에게까지 베풀 자비는 하나님께 남아 있지 않다.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요일 5:16) ['이단'과 '이단 아님'의 차이 ]십자가 사건을 기준으로 정해진다. 십자가를 바라볼 수 있는 본인이 그대로 남아 있는 위치에 그대로 있으면 이단이다. 십자가를 관찰과 분석과 해석과 이해와 평가의 대상으로 보는 위치에 자신이 따로 정립되는 있는 것이 이단의 특징이다. 반면에 '이단이 아닌 사람(성령을 받은 사람)은 십자가 사건으로부터 온 성령을 받았기에 십자가 내부에 들어가 있다. 십자가에서 쏟아지는 예수님 아버지의 저주를 온 몸으로 다 받게 된다, 그리고 그 저주를 받고서는 다시 십자가 바깥으로 뛰쳐 나갈 수 없다, 예수님 아버지의 저주를 홀로 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더불어 받는다. 동시에 예수님의 아버지로부터 예수님이 받으셨던 부활의 능력(=의의 능력)도 같이 받는다. 예수님 아버지께서는 이 십자가 사건을 모든 말씀(모든 언약)의 완성으로 간주하시기에 그것을 영원한 고정성으로 정착시켜 버리신다. (역사적이 흐름에 의해서 변하는 것이 아니라 묵시적으로 고정) 이런 묵시(역사에 대해 초월함) 속에서는 성도가 세상살이하게 되는데 여전히 십자가 사건 밖으로 뛰쳐나와서 독자적으로 생활할 수는 없고 바깥의 시간 세계에 자신이 속해 있는 묵시성을 다 보여주고 다 발산하게 된다. 즉 말씀의 저주 아래 있는 세상에 섞여 살면서 예수님께서 아버지에게 받았던 저주성을 발산하게 되고 동시에 용서와 사랑도 같이 발산하게 된다. 그래서 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받았던 그 저주가 세상에 대한 일괄 저주인 것을 성도의 몸을 통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즉 인간이 무얼해도 저주인 것이다. 자기 몸 위주로 살기에 저주요, 자기 구원 위주이기에 저주요, 자기 축복 위주이기에 이기에 저주요, 자기 중심적이기에 저주다. 세상살이 모든 것이 저주의 이유가 되는 것이다. 동시에 성도만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도달되어 그 피 안에서만 생명이 발생됨을 증거하게 된다. 예수님의 피만이 유일하게 하나님부터의 용서가 된다, 이 성도가 존재하는 것은 더이상 자기의 것으로 환원될 수 있는 자기 행함의 진원지를 갖고 있지 않다. 그는 독자적인 자기만의 자리가 없다. 그는 항상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이 받았던 저주를 함께 느끼고 예수님이 받았던 의로움으로 인해 제공받은 축복도 함께 받는다. 반면에 이단들은 자기는 항상 고정되어 있고 자신의 눈 앞에 예수님 십자가가 있기에, 장바구니를 듣고, 진열된 물품 고르듯이 진열대에 순서대로 고정된 자아의 자리에 담아 넣고 쓸어 넣기 바쁘다. 십자가 사건을 장바구니에 담고, 그 다음에 부활 사건도 담는다. 그 다음에 성령도 담는다. 그 다음에 회개도 담고, 믿음도 담고, 소망도 담고, 사랑도 담는다. 거듭남도 담고, 칭의도 담고, 양자됨도 담고, 성화됨도 담고, 영광스러움도 담는다. 선한 사람을 구원하신다는 예수님의 재림 사건도 담는다. 특히 성화를 담는 과정에서 단계별로 정렬해서 시간적 여지를 두면서 담는다. 즉 맨 처음에는 초보 거룩함을 담다가 날이 갈수록 고난도의 착함의 경지까지 레벨을 높여나가면서 달성하는 재미를 만끽한다. 높은 경지의 착함은 '자아'라는 장바구니에 담고서는 어느 새에 말씀에 합당한 뿌듯한 인간 승리를 맛본다. 자기 나름대로의 역사성을 구축하게 된 것이다. 그들은 성경에 나와 있는 묵시적 말씀을 자기고 자기 위주의 자기만이 고수하는 역사성을 장바구니 안에서 구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악마의 숨겨진 모양새다. 이런 자들의 장바구니를 걷어차 보라! 그들이 역사성을 걷어차 보라! 그들은 발작한다. "나의 공들었던 신앙 경력을 누가 함부로 얕보는가!"라고 발작한다. 그들에게 있어 십자가 사건은 그들 내부에 흐르고 있는 시간의식으로 인해 이미 순서상 과거일로 넘겨져 있다. 그리고 그들이 현재은 결코 십자가 지점이 아니다. 사수하고자 하는 것은 온갖 좋은 것들을 다 담고 있는 자아라는 이름의 '자기 만의 장바구니'다. 궁극적으로 그들은 악마와 한패라는 사실이 이로서 밝혀진다. 그리고 이들은 큰 소리친다. "어차피 인간은 자기 잘난 맛에 사니 다들 우리 쪽으로 오게 되어 있어!" 그들의 말이 맞다. 성경 말씀대로, 인간들은 모두 악마들 손에 잡혀서 놀아난다. 그렇다면 과연 성령 받은 자는 뭐냐? 참으로 불가능한 기적을 받은 사람들뿐이다. [ 이단들의 사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