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강-창 7장 1-5절(정결한 짐승)160525-이 근호 목사
40강-창 7장 1-5절(정결한 짐승)160525-이 근호 목사
이름 : 오용익(IP:125.136.25.28)
40강-창 7장 1-5절(정결한 짐승)160525-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7장 1-5절입니다. 구약성경 5페이지입니다.
창 7:1-5
“여호와께서 노아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 네가 이 세대에 내 앞에서 의로움을 내가 보았음이니라 너는 모든 정결한 짐승은 암 수 일곱씩, 부정한 것은 암 수 둘씩을 네게로 취하며 공중의 새도 암 수 일곱씩을 취하여 그 씨를 온 지면에 유전케 하라 지금부터 칠일이면 내가 사십 주야를 땅에 비를 내려 나의 지은 모든 생물을 지면에서 쓸어버리리라 노아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인간들은 자기가 있다는 것을 시작점으로 해서 ‘내가 어떻게 하면 살아날 수 있는가?’ 항상 그렇게 생각하는 반면에 우리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이 다 사라지고 난 뒤의 상황을 미리 아시기 때문에, 모든 것이 사라지고 난 뒤의 상황, 그 상황을 앞당겨서 노아에게, 노아를 중심으로, 또는 노아를 통해서 모든 심판이 끝난 그 다음의 상황을 미리 덮치게 하십니다. 그래서 노아입장에서는 내가 살아야겠다는 입장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보면 안 되지요. 이것은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믿고 내가 살아야 되겠다는 입장에서 예수님을 바라보게 되면 그것은 엉터리예수를 믿게 되는 겁니다. 모든 상황이 다 끝났을 때, 그러고 난 뒤에 이 세상은 어떤 세상이 되는가? 그것은 예수님 중심의 세상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 중심의 세상에서 예수님과 나는 어떤 사이인가, 어떤 관계인가, 어떤 교류를 하며 어떤 내용으로 주고받게 되는가, 그것을 미리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미래에 가지도 않고 이미 앞당겨서 미래에 있을 상황을 이 현재에 외부로 방출하고 보여주는, 증거 하는 새로운 피조물의 기능을 발휘하게 되어 있어요. 이렇게 되면 ‘내가 살겠다.’가 아니라 ‘주께서 나를 가지고 일하신다.’가 되는 겁니다. 내가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고 구원을 증거 하기 위해서 주님께서 나를 사용하시는 거예요. 그런데 제가 하는 이 말을 도저히 못 믿겠다는 사람이 있어요. 이 말을 못 믿겠다는 사람은 그 사람의 욕구와 욕망이 어디에 있느냐 하면, 무조건 나는 살아남아야 되겠다는 여기에 모든 것을 투자하는 거예요. 나는 살아남아야 되겠다는.
그러나 성도는 어떤 점이 다르냐 하면, ‘이 죄 많은 세상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사람은 우리 예수님밖에 없다. 우리는 마땅히 죽어야 돼.’라는 그것이 예수님이 성도에게만 알려주는 안목입니다. 성도에게 주어진 세상보기에요. 나는 마땅히 죽어야 되는데 예수님만이 탈출에 성공했음을 알리기 위해서 이렇게 이 땅에 모든 일이 실시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고 깨닫게 되는 그것은 자기 힘, 자기 능력이 아닙니다. 주께서 그렇게 하신 거예요.
그래서 신자와 신자 아닌 사람이 같이 있다고 해서 세상은 요란스럽게 전혀 달라질 것이 없어요. 두 사람이 밭을 가는데 신자는 호미질 할 때마다 자동적으로 로봇처럼 땅이 잘 파이고 불신자는 돌멩이만 나온다든지 그렇지가 않습니다. 두 사람이 밭을 갈 때 한 사람은 그냥 데려감을 당한다는 차이뿐이지 밭을 가는데 놀랍게도 요정들이 와서 도와준다든지 그런 일은 없습니다. 두 사람이 잠을 자는데 한 사람은 푹신한 침대에서 자고 나머지 한 사람은 땅바닥에서 자고 그렇지 않습니다. 둘 다 같이 잠을 자는데 한 사람을 데려감을 당하고 나머지 한 사람은 그냥 버려둠을 당할 뿐이에요.
우리는 자기구원을 너무 우선시하다보니 내가 예수 믿고 난 뒤에 내가 기대하는 식으로 세상이 확 달라질 것을 자꾸 요구하는 경향이 있는데 사실은 세상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신자의 마음이 ‘지금 내가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너무 과도한 축복이다.’라는 생각이 들게 만들어요. 왜냐하면 예수님은 이것보다 더 고생했기 때문에. 예수님은 죄도 없으면서 나보다 더 힘든 인생을 살았는데 나는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면서도 왜 이런 혜택을 공짜로 누리고 있는지 미안스럽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고, 때로는 뻔뻔하기도 하고, 그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을 정도로. 그걸 성경에서는 자숙하듯이 살아간다고 해요.
잘못한 것이 있는데 주어진 혜택은 내 죄와 비교해서 너무 과분한 선물을 받는 식으로 살아가는 겁니다. 그럴 때 이러한 선물은 나를 위해서 준 선물이 아니고 나를 구원하신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려주기 위해서 이러한 선물을 주는 겁니다. 성도에게만 주어지는 그 선물이 뭐냐? 죽고 난 뒤에 사람이 어떻게 됩니까, 라는 정보와 비밀입니다. 저에게 그렇게 묻는 사람이 참 많이 있어요. “사람이 죽고 나면 어떻게 됩니까?” 그것은 저에게 물을 것이 아니고 노아에게 물어봐야 돼요.
“죽고 나면 그만이지.”가 아니라 노아는 하나님이 특별한 혜택을 입어서 죽음체험을 산체로 한 최초의 인물입니다. 사람이 죽고 난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을 살아있는 채로 한껏 경험한 사람이 노아입니다. 사람이 죽고 난 뒤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궁금하지 않습니까? 궁금하지요. 사람이 죽고 난 뒤에 잠을 잔다고 하니까 그냥 집에서 잠을 자듯이 자는 것인지, 사도바울이 죽고 난 뒤에 주와 함께 있었다고 하는데 주와 함께 있는 상태가 어떤 상태인지, 엘리야와 모세가 주님과 함께 변화 산에 나타났는데 엘리야와 모세, 선배격인 그런 분들이 지금 뭐하고 있는지, 굉장히 여러분이 궁금해 하지요.
사실은 그런 것을 궁금해 하는 이유도 있습니다. 사람은 알면 정복해요. 알면 그것이 나의 세계로 전환이 되거든요. 죽음 이후의 세계를 미리 알아서 그 세계마저 내가 장악하려는 이런 심보들이 있어서 ‘죽고 난 뒤에 괜찮으면 예수 믿고 별 도움 안 되면 안 믿으련다.’ 자기에 대한 결정을 스스로 하려는 의도가 있는데 어쨌든 하나님께서 오늘 본문을 통해서 죽고 난 뒤에는 이런 상황이 주어진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노아가 죽고 난 뒤의 상황은 노아를 통해서 2절과 3절을 보면, “너는 모든 정결한 짐승은 암 수 일곱씩, 부정한 것은 암 수 둘씩을 네게로 취하며.”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게 뭐냐? 죽고 난 뒤의 상황은 거룩과 세속의 격돌상태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거룩과 더러움이 격돌, 충돌하는 상태를. 사실은 모든 땅에 속한 사람은 다 죽어야 됩니다. 짐승뿐만 아니고 다 죽는데 노아도 마땅히 죽어야 됩니다. 죽어야 되는데 노아는 죽어야 마땅한 자로서 하나님이 동행함으로 죽음을 산채로 경험할 수 있는 새로운 공간이 마련되는데 그 공간이 방주입니다. 방주는 이렇게 생각하면 쉬워요. 방주는 축소된 우주라고 보시면 제일 좋습니다. 축소된 우주., 또는 모든 것이 심판 안에서 새롭게 만들어진 우주. 커다란 알이라고 보면 되지요. 총 길이 135미터짜리 알, 높이 13.5미터짜리 큰 계란, 알 속에 우주의 모든 것이 축약되어 있습니다.
4절에 보면, “지금부터 칠일이면” 여기 ‘칠일’이 나오지요. 천지창조가 7일 만에 되었습니다. “사십 주야를 땅에 비를 내려” ‘40주야라는 것은 7이 7이 되기 위해서 창조에 부합되지 않는 것을 심판해서 모조리 싹쓸이 하는데 걸리는 기간이 40일이에요. 40일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생각해놓은 진짜 제대로 된 새로운 우주적 창조를 드러내기 위해서 모든 것을 제거하는데 소모되는 기간이 40일이에요. 예수님의 공생애를 3년이라고 하는데 사실 정확하게 말해서 40일에 예수님의 생애의 전부였습니다.
예수님에게 성령이 임해서 40일 동안 금식하사 광야에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았습니다. 이 말은 예수님의 평생이 테스트 받는, 악마에게 시달리는 기간이지요. 우리보기에는 3년이냐, 3년 반이냐, 서른 세 살이냐, 서른 두 살이냐, 이렇게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인간의 수명 가지고 시간을 환산하고 해독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 중심으로 세상의 시간이 정리 정돈되거든요.
예수님의 생애자체가 ‘마귀가 지배하는 이 세상은 필히 망해야 돼.’라는 것을 보여주는 기간은 40일 외에 더는 필요 없어요. 40일만 달랑 필요했습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백성들이 40일을 하루로 계산해서 40년 동안 다 몰살당합니다. 40년, 다른 말로 하면 정탐했던 40일, 그 40일을 하루로 계산했기 때문에 결국 우주, 하나님의 창조라 하는 것은 축복과 저주의 격돌, 그게 마지막으로 완료하시려는 하나님의 세계의 두 질서, 두 속성입니다. 두 본질이라고 보면 돼요.
천국과 지옥이지요. 천국과 지옥으로 구분되면 끝났습니다. 모든 하나님의 계획은 끝나버려요. 노아가 살았다 하지만 사실은 방주 안에서 살았던 거예요. 방주 안에서 살았다는 말은 방주 전에 노아가 ‘나는 살았다.’ 했던 그 모든 개념은 끊어지고 달리 바뀌어야 되는 겁니다.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기 전에 살았다고 하는 것은 넓은 대지, 초창기우주속에서 노아가 살았다면 노아가 노아답게 새로운 피조물로 살려면 이제는 방주 안에서 노아가 새롭게 만들어져야 되는 겁니다.
전에 살던 그 노아 말고 뭔가 방주 안에 있는 것으로 새롭게 살려지는, 방주 안에 있는 내용가지고 새롭게 살려지는 그 노아이어야 한다는 말이지요. 계란이 있다면 계란이 하나 있다고 하지 그 안에 닭이 들었다고 하지는 않지요. 그러나 계란이 부화되면 그 안에서 병아리가 나오잖아요. 그래서 ‘아, 이 안에 병아리가 들어있었구나.’ 하고 알듯이 우리는 방주 안에서만 심판에서 살아남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방주 안에서 뭐가 잉태되는가 하면, 새로운 노아 상, 새로운 노아이미지가 형성이 돼요. 그런데 새롭게 형성된 노아이미지는 방주 들어가기 전의 그 노아가 아닙니다. 창세기 6장 21절에 보면, “너는 먹을 모든 식물을 네게로 가져다가 저축하라 이것이 너와 그들의 식물이 되리라.” 음식물이란 여기에 있는 각종 생물들이지요. 그런데 7장에 보게 되면, “너는 모든 정결한 짐승은 암 수 일곱씩, 부정한 것은 암 수 둘씩을 네게로 취하며.”라고 되어 있어요.
이것은 뭐냐 하면, 전의 노아 같으면 ‘음식물 하루 세끼 먹고 살면 그 노아가 노아’라고 판정을 받게 되는데 방주 안에 들어가게 되면 이제는 정결한 것과 더러운 것과의 격돌, 마찰, 충돌, 그것으로 인하여 형성된 노아 방주 안만의 새로운 세계, 축소된 우주의 비밀을 알지 못하면 노아는 거기서 나올 수가 없어요. 새로운 노아가 되지를 못하는 겁니다. 노아가 방주 안에서 나올 때는 노아에게 뭐가 장착되어야 되는가? 그 더러움을 거룩이 삼켰다는 의미가 장착된 채, 내장된 채 방주에서 튀어나와야 그게 하나님이 원하는 미래형 노아가 되는 겁니다.
전에 숨 쉬던 노아가 그냥 숨 쉰다고 해서 노아가 그 노아가 되는 것이 아니에요. 노아를 둘러싼 환경이 노아를 새롭게 배양하는 거예요. 계란 속의 배양액이 병아리를 새롭게 만들 듯이 노아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노아를 둘러싼 그 환경이 새로운 노아를 창조하는 거예요. 그 환경이 뭐냐? 어떻게 죄를 거룩이 이겨냈느냐 하는 겁니다. 창세기 2장 19절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어떻게 이름을 짓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이르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일컫는 바가 곧 그 이름이라.”
창세기 처음에 아담이 죄 짓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이끌어서 모든 짐승들의 이름을 짓게 했어요. 이름을 지었다는 말은 이름을 지은 아담이 이름을 지으면서 자기 존재의 의미를 거기에 담아내는 겁니다. 이름을 받은 쪽은 이름을 짓는 쪽에 예속되고 종속이 돼요. 이름을 부여받은 모든 피조물들은 그 운명을 아담의 운명과 같이 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초창기의 우주였고 아담이 사는 세계였습니다.
그런데 노아 때에 와서는 이제는 이름이 중요하지 않아요. 이름에 담겨 있는 모든 의미는 싹 지워집니다. 이제는 무슨 이름이냐가 아니라 ‘거룩한 쪽이냐, 안 그러면 더러운 쪽이냐? 거룩이냐, 아니면 더러움이냐? 성과 속’ 이것으로 모든 이름은 묻히게 됩니다. 모든 피조물의 이름은 다 물속에, 심판의 홍수 속에 다 싹 소멸되어 버려요. 심지어 이웃집 아줌마 아저씨까지. 인간은 없습니다. 인간이 없다는 말은 이제는 인간에게 의미 있는 세계는 두 번 다시 오지 않습니다.
처음에 아담이 피조물의 이름을 지을 때는 이 세상은 아담을 위해서 필요한 것들이었어요. 그러나 그것은 아담이 죄를 지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세상은 아담의 죄와 같이 동반해서, 아담의 운명에 휩싸여서 싹 다 없어지는 겁니다. 이제는 아담을 위해서 노아를 위해서 세상의 피조물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인간을 위해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만 새로운 노아에게 부착되는, 장착되는, 노아내부에 심겨지는 거룩의 희생물을 위한 것과 연계되어 있는 새로운 우주가 펼쳐질 거예요.
하늘의 별, 달, 그리고 모든 생물은 인간을 위함이 아니라 죄 있는 인간을 의롭게 전환시키는 동행하시는 어떤 분의 이름을 위하여, 인간과 더불어 인간주변에 많은 동식물들이 펼쳐질 것입니다. 아담을 위한 동식물이 아니고 아담과 함께 있으면서 아담의 죄를 용서하시고 그걸 거룩하고, 심판에서도 견뎌낼 수 있고 빠져나올 수 있고, 심판도 이겨내고 극복할 수 있는 동행하시는 어떤 분을 위해서 모든 피조물은 배치가 될 겁니다.
그것을 함축해서 미리 보여주는 작업이 이루어지는 공간이 뭐냐, 그 응축된 공간이 방주에요. 7장 1절에, “여호와께서 노아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 들어가라는 말은 뭐냐 하면, 더 이상 너는 피할 곳이 없다는 겁니다. 몰아넣는 거예요. 들어가라고.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유가 뭐냐? 영원히 내가 쉴 수 있는 어떤 장소, 틀을 찾기 위해서 지금 노력하고 있습니다. 영원히.
그래서 요새 노인파산이 문제가 되잖아요. 나이 늙어서도 거할 수 있는 장소 찾는 이것은 죽을 때까지 심각한 문제로 다가오는 거예요. 사람이 자살하는 이유는 뭐냐 하면, 딱히 자기를 던질 곳이 없어서 한강에 던져요. 이 짐 되고 귀찮은 것을 처리할 곳이 없어요. 처음에는 내가 살고 싶었는데 나중에는 세상이 자기 뜻대로 안되니까 자기가 자기한테 짐이 돼요. 이렇게 무거운 짐이 없어요. 차라리 눈 감아서 내가 사라졌으면 싶지만 눈만 뜨면 다시 최종 남은 내가 여기 턱 하니 존재하고 있으니까 감당을 못하지요.
때 되면 밥 달라, 목마르면 물 달라, 피곤하면 이불 펴라, 층간 소음 때문에 시끄러우면 좀 좋은 아파트로 가자, 이것은 찡얼찡얼, 내 몸이 자아를 향하여 계속해서 칭얼대고 짜증내면서 내 몸이 나에게 자꾸 요구를 하는 거예요. 그러니 내가 내 몸에 치어서 감당이 안 된다니까요. 젊을 때는 잘 몰라요. 나이가 들면 어깨 아프다고 주무르고 두드려달라고 해서 두드려 줘. 허리 아프다, 좌골신경통에 ……, 도대체! 젊을 때는 내 맘대로 한다고 하는데 나이가 들면 몸이 나를 갖고 놀아요. 어쩌라고, 아픈데 어쩌라고!
처치 할 데가 없어요. 그래서 에라, 모르겠다! 없애버리는 것이 자살이에요. 세상이 짐입니다. 이 우주가 짐이에요. 그 중에 내 몸 포함해서. 아담이 죄짓고 난 뒤에 모든 인간은 세상 살아가는 것이 짐이 돼요. 그래서 자꾸 도망치는 식으로 삶을 꾸려갑니다. 내 몸 하나 편히 쉴 데 없는가? 우리나라가 일본 따라가는데 노인인구가 전체의 23퍼센트인데 노인에게 요새 유행하는 것이 있어요. 셀프교도소. 죄지어서 어떻게라도 교도소에 들어가려고. 왜? 이 몸 뉘일 곳이 교도소밖에 없어서. 이게 사회문제에요. 아무도 받아주지 않고 자식도 안 받아주니 교도소밖에 없어요. 세끼 먹고 이 몸 뉘일 곳이 교도소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보고 방주에 들어가라고 한 거예요. 이것은 빼도 박도 못해요. 그냥 몰아넣어버려요. 그러면 거기는 새로운 조화, 새로운 질서, 새로운 체계, 새로운 구조, 새로운 생명, 새로운 세상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까 이야기한대로 “사람이 죽고 난 뒤에 어떤 세계가 펼쳐집니까?” 그게 궁금한 거예요. 노아는 본인이 원치 않는, 주께서 미리 만들어놓은 응축된, 완전히 축소된 세계 속에 초대받아서 그 속에 들어가게 되는 겁니다.
들어가게 될 때 같이 들어가게 된 것이 정결한 짐승과 부정결한 짐승, 더럽고 부정한 짐승과 동반해서 들어간 거예요. 그러면 거기서 노아는 주인공인가? 노아는 주인공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정결한 짐승 일곱과 부정결한 짐승 암수 둘씩, 그리고 그 외 나머지에요. 그러면 세 종류지요. 정결한 것, 부정한 것, 그 외 나머지는 한 쌍씩. 이 말은 뭐냐? 노아를 포함해서 모든 피조세계에서 주도권은 누가 쥐는가? 방주라는 축소된 작은 우주, 그 우주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노아도 아니고 나머지도 아니고 더러운 짐승과 깨끗한 짐승의 관계 속에서 거룩함이 거룩함으로 그것의 본질과 속성이 발휘되게 되면 새로운 세계가 펼쳐지는 그날이 옵니다. 대략 방주 안에서 1년 걸려요.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노아는 자기음식물을 주변의 짐승에서 찾을 거예요. 방주 들어오기 전의 노아라면 단순한 음식물이라면 이제 노아는 단순한 음식물을 먹어서는 안 됩니다. 거룩한 것과 불결한 것의 그 격돌의 결과물로서 자기가 오히려 날마다 살려짐을 당하고 생명을 얻고 목숨을 부지하는 식으로 큰 심판 안에 있는 동동 떠 있는 작은 소우주에 모든 것을 의지해야 돼요. 이 말은 한마디로 말해서 아무것도 믿지 말라는 겁니다. “노아야! 아무것도 믿지 말라.” 너도 믿지 못하고 아무것도 믿을 필요 없어요. 사람은 물론 제 식구밖에 없으니 믿을 사람도 없고.
이게 믿어서 구원될 사항이 아니에요. 그냥 시키는 대로 할 뿐이지 믿어야 될 문제가 아닙니다. 그 상황은 하나님이 조성했지 노아가 아이디어 끄집어낸 것이 아니에요. 쉽게 예를 들면, 요새 도시락에 이런 것이 있답니다. 밥 없는 도시락이 나온답니다. 밥이 없는 도시락, 반찬과 샐러리만 들어 있는 도시락이 나왔어요. 건강식이지요. 아침에 바쁜데 탄수화물 많이 먹으면 온갖 성인병 걸린다고 밥 없는 도시락이 나오니까 그 뒤를 이어서 나온 것이 면 없는 짬뽕이 나왔습니다. 해물과 국물만 있고 면은 없는 거예요. 탄수화물이기 때문에.
사람 없는, 노아 없는 방주 나옵니다. 이것은 거룩함과 불결한 것들의 다툼의 현장에서 그 결과물로서 노아식구가 살아나는 겁니다. 방주 외곽에서 벌어지고 있는 하나님의 심판의 그 정당성, 그 당연함을 하나님께서는 방주에서 노아를 건지는 것이 아니고 정결한 짐승이 보여줄 그 기능을 하나님께서는 구원하시는 거예요. 쉽게 말해서 예수님을 구원하시는 거예요. 예수님과 노아가 동행하면서 주님께서는 예수님을 구원하면서 구원하는 과정에서 같이 엮여서 당겨져 나온 결과가 노아가 구원받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모습이 소우주 안에서는 정결한 짐승의 모습으로 노아와 함께 동행하고 있는 겁니다. 그게 여호와와 동행하는 노아, 방주 이전에 있었던 그 노아와 방주의 관계가 방주 안으로 그대로 들어가는 거예요. 방주 안으로 들어가라. 왜? 동행의 의미, 동행이라는 의미가 뿜어내고 있는 새로운 의미가 어떤 의미인지가 방주 안에서 새롭게 부각될 것이라는 겁니다. 노아가 동식물의 이름들, 코끼리, 독수리, 코스모스, 다 알지요. 하지만 노아가 불렀던, 아담이 지었던 이름들은 다 의미 없어요.
노아가 중심이고 그 중심선에서 뿜어져 나왔던 내 새끼, 내 짐승이라는 의미는 없어졌습니다. 정결한 짐승을 왜 실었는가? 왜 심판 받는데 정결한 짐승을 실었는가? 그리고 더 놀라운 사실은 더러운 짐승마저 실었는가? 더러운 짐승은 빼내서 저 바깥의 물 심판을 실 것 받도록 해야지요. 지금 방주에 들어온 짐승들은 한 쌍씩이에요. 그러면 방주 밖에서 홍수를 받아서 몰살당한 그 짐승들은 뭐예요?
그 짐승들은 어떤 혜택을 못 받는가 하면, 그 방주에서 일 년 새에 이루어지는 그 혜택과 무관하게 몰살당한 겁니다. 그 안에 있는 엔진기능, 부르릉 하는 그 엔진기능이 뭐냐 하면, 어떻게 이 더러운 것들이 어떻게 정결한 것들의 혜택을 입어서 무사히 심판을 통과하는가, 그 말이지요. 더 쉽게 이야기해서, 죽고 난 뒤에 천국과 지옥으로 나눠지는데 놀라는 것은 지옥에 간 사람이 놀라는 것이 아니고 천국에 온 사람이 더 놀라는 거예요.
거지 나사로 같은 사람. “나는 거지고, 아는 것도 없고, 그런데 내가 어떻게 이렇게 천국에 왔습니까? 어떻게 이런 희한한 일이 다 생겼습니까? 왜 저를 천국에 넣어주십니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동행, 예수님과의 관계 때문에 그 사람은 천국에 온 거예요. 이게 하나의 논리가 아니고 노아심판이라는 대 우주의 격변과 관련되어 있어요.
자, 그렇다면 정결한 짐승은 뭐고 부정결한 짐승은 뭐냐? 전에 우리가 한 적이 있는데 레위기 11장에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고하여 그들에게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육지 모든 짐승 중 너희의 먹을 만한 생물은 이러하니 짐승 중 무릇 굽이 갈라져 쪽발이 되고 새김질하는 것은 너희가 먹되 새김질하는 것이나 굽이 갈라진 짐승 중에도 너희가 먹지 못할 것은 이러하니.” 이렇게 해서 정결한 짐승과 더러운 짐승의 항목이 나옵니다.
이게 레위기 11장에 나와요. 레위기 11장에 나온다는 말은 정결한 짐승과 부정결한 짐승에 대해서 제가 아까 새로운 의미를 준다고 했지요. 아담은 아담중심으로 이름을 짓지만 방주 안에서는 아담 중심이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계속되는 기능중심으로 새로운 의미들이 부여가 돼요. 그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더러운 것은 가! 난 깨끗한 것만 보듬을게.”라는 식으로 한 것이 아니고 깨끗한 것과 더러운 것을 견주면서 그 틈새사이에서 의미를 끄집어내요.
이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예수님께서 자기백성을 구원할 때 하늘나라에서 이 땅에 오지도 않으면서 낚시하듯이 “저 깨끗한 노아 올라와. 욥도 올라오고, 엘리야도 올라와.” 이렇게 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죄인으로 오셔서 의인으로 부활 승천하셨거든요. 그 과정, 죄인으로 오셔서 부활되었다는 그 과정은 죄인이 있어야 되고 심지어 마귀가 있어야 돼요. 사탄이 있어줘야 예수님의 십자가죽음이라는 의미가 의미대로 실행이 되는 겁니다.
제가 그래서 이 성경전체, 이 세상전체에서 하나님의 최종목적이 뭐냐고 누가 묻는다면 간단하게 “십자가중심입니다.”라고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러면 다른 사람이 이해를 못하고 “내가 알기에는 성경은 예수님 중심이지 어떻게 십자가중심입니까?” 하거든요. 예수님 중심이 되어버리면 예수님은 하나의 존재자가 되기에 그 존재자를 볼 때, 인간인 나는 여기 있고 저분은 날 구원할 분이라고 해서 나의 존재부터 시작해서 예수님을 타인으로 생각해서 저 사람을 자꾸 기억해서 의지하면 구원받는다고 되어버려요.
그러면 뭐가 빠지는가 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죄인으로 죽어야 되고 의를 위해서 살았다는 이 기능이 완전히 빠져버립니다. 그게 빠져버리면 누가 좋아하는가하면, 사탄이 좋아해요. 왜? 사탄은 종교를 만들었기 때문에. “너는 부족하다. 예수 믿어라. 구원받는다.” 이게 사탄이 하는 소리에요. 사탄의 목소리입니다. 예수님의 존재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십자가가 중요하다는 이것이 왜 중요하냐 하면, 십자가 앞에서 모든 인간은 구원받을 자격이 없음이 원천적으로 되어버려요. 이 땅이 홍수의 하나의 사실이 되는 겁니다. 홍수에 다 죽어버리면 어느 누구도 손들고 구원받겠다고 나올 자격자가 없어요.
그러면 의미가 나에게서 안 나옵니다. 의미는 예수님 홀로 이루신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에서 새롭게 의미가 나와야 되지요. 그게 맞는데 ‘나 고생 많은 이 세상, 생로병사의 이 세상에서 탈출해서 죽어서 좋은데 가야 되는데 내가 뭘 하면 되지? 옳지. 예수 믿어야지.’ 이렇게 되어버리면 이것은 예전의 나, 그러니까 노아 때 나와 방주안의 나와 동일한 노아가 되어서 이런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차리라 그럴 것 같으면 노아로 하여금 방주 만들지 말고 노아 발목까지만 물이 차고 나머지는 물에 빠져서 노아는 쌍안경 들고 보면 박수나 치고 그러면 되지 무엇 때문에 노아가 살던 고향까지 물이 왜 덮치게 했습니까? 방주에 들어가라는 말은 방주 안으로 들어가는 즉시 노아도 죽은 존재고 노아도 심판 안에 있는 존재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노아에게 어떤 구원의 주도권이나 의미는 없어요.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오직 예수님이고 예수님의 존재를 구원하는 게 아니에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었다가 부활하는 그 십자가의 ‘언약적완성’을 구원하는 겁니다. 그걸 건져내는 거예요. 우리는 십자가의 증인일 뿐이에요. 계속 새로운 십자가의 기능이 되풀이 될 뿐이에요. 우리는 좀 뻔뻔해야 돼요. “나 같은 죄인이 어디 있어? 그렇지만 구원받았어.” 이런 뻔뻔함이 나와야 됩니다. 그럴수록 우리는, 그럴수록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증거되기 때문에 그래요.
정결한 것과 부정한 것의 차이는 노아가 정한 것이 아닙니다. 동행하시는 하나님이 노아에게 그런 지혜를 준 거예요. 노아는 정결한 것과 부정한 것의 기준도 몰랐지요. 하지만 노아는 몰라도 괜찮아요. 그 정결한 것과 부정한 것을 결정하는 최종적인 기준은 예수님 오실 때 십자가로 마감될 거예요. 그 전에 레위기 11장을 경과할 겁니다.
레위기 11장에 보면, 하늘의 짐승도 아니고 땅의 짐승도 아닌 그 애매한 것, 바다의 짐승도 아니고 땅의 짐승도 아닌 애매모호한 것, 다시 말해서 온전한 거룩이면 온전한 거룩이든지, 더러운 것이면 온전히 더럽든지 해야 되는데, 다시 말해서 땅에 살든지 바다에 살든지 그래야 되는데 뭔가 애매모호한, 정체가 불분명한 것들을 더럽다고, 불결하다고 결정을 내렸습니다. 그런 결정을 내린 이유에 대해서는 레위 당시의 사람들로서는 온전하게 그 정답을 알지를 못해요.
다시 말해서 우리 하나님이 거룩하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 왜 거룩한지 그 이유를 이스라엘은 제대로 몰라요. 다만 먹지 말라고 하니 안 먹고 먹으라고 하니 먹을 뿐이지요. 그러면 그것이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의 음식이 돼요. 음식이 되면 사람이 음식을 먹는 것이 아니고 그 음식이 새로운 사람을 만들어내는 겁니다. 노아의 음식물은 방주 안에 있고 방주 안에 있는 새로운 노아이미지는 거룩과 불결한 것의 투쟁을 바라보면서, 그걸 목격하면서 나중에 방주에서 나올 때 노아는 정결한 것을 잡아서 희생을 드림으로서 같이 동승했던 불결한 짐승들도 그 정결한 짐승의 희생의 혜택을 입는다는 하나님의 언약 적인 내용이 장착되어 있으면 그것이 노아가 영원히 먹고 살 영원한 영생을 얻는 양식이 되는 겁니다. 그게 하늘에서 내려온 만나에요.
먹어도 그냥 살기만 하는 그런 음식이 아니라 주께서 “나를 먹어라. 내 살과 피를 먹어라.” 이것은 “십자가 사건을 증거 하는 존재가 되어라.” 그런 뜻이에요. 이 세상 우리에게 보이는 하늘과 땅 이 모든 것은 인간중심이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와 함께 계시는 예수님중심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 중심이라고 하면 모호하니까 십자가사건중심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어요.
거기서 인간이 해내지 못한 일, 오직 하나님만이 해내신 일, 다시 말해서 더러운 것, 그 죄를 예수님에 의해서 의로 바뀌게 한 그 예수님을 높임으로서, 그 분이 주되심을 찬양함으로써 새로운 세계, 완전한 세계의 중심인물로 예수님이 등장하는 겁니다. 에베소서 1장 10절에 보면,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모든 만물은 예수님 중심으로 통일된다. 모든 것이 예수님 중심으로 통일 돼요.
통일 된다는 말이 그냥 되는 것이 아니고 늘 들끓는 것이 뭐냐? 십자가의 능력으로 끓고 있어요. 끓으면서 통일되는 거예요. 태양의 에너지가 어디서 나옵니까? 태양의 에너지가 수소이온, 또는 수소원자가 다 타면서 나오는 에너지거든요. 태양이 안에만 뜨겁고 바깥은 차가운 게 아니에요. 온 태양덩어리가 그 에너지가 순환하면서 들끓듯이 이 세상은 풀 한포기, 새가 짹짹거리는 것이 다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에 의해서 짹짹거리고 들풀도 잡초도 그렇게 해서 지금도 자라나고 있습니다.
비가 오고 가뭄이 들고, 전부 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관련되어 있어요. 하물며 우리가 죽고 사는 것, 다 십자가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예수님을 위해서 죽어라. 죽으면 예수님 때문에 죽게 된 사람은 예수님과 더불어서 함께 살 것이다. 목 베인 영혼은 함께 살 것이다.” 이게 첫째 부활입니다.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년 동안 왕노릇 하니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계 20:4-5)
방주 이전에 세상을 내 중심으로 생각했기에 우리는 자신의 목숨에 자꾸 연연해요. 이 목숨 부지해야 되는데, 이 목숨 부지해야 되는데, 밥을 먹어야 되는데, 래시피는 뭐로 하고, 이런 식으로 하는데 이 몸은 옛 몸이에요. 옛 사람입니다. 이제 새로운 몸은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했던 그 몸으로 유니폼이 바뀌게 돼요. 주님의 해같이 빛나는 영광으로 새로운 몸을 받게 됩니다.
받게 될 때, 해같이 빛나게 될 때, 다니엘 세친구가 불에 타지 않는 몸을 받을 때 얼마나 기뻤겠어요. 이처럼 우리는 우리 안에 십자가능력이 태양의 에너지처럼 들끓으면 그 사람만이 해보다 더 빛나는 주님의 영광의 옷을 입을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 중심이 주신 십자가의 혜택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거룩과 속됨이 우리의 육신을 가운데 두고 방주처럼 격돌하고 있는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머리로서는 십자가를 알지만 몸으로서는, 육으로서는 더러운 심판받을 세상과 같이 합세해서 그 유행에 따르고 그들의 기분에 맞춰 살아가는 감각적이고 쾌락적인 저희들의 모습을 봅니다. 이것이 바로 주께서 이야기하는 죄가 되고 십자가의 의가 이 죄를 용서하는 과정인 것을, 주의 십자가를 드러내는 과정인 것을 한시도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이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40강-창 7장 1-5절(정결한 짐승)160525-이 근호 목사.hwp (64.0K), Down: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