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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안양20160513a히11장 35절(표백)-이 근호 목사자유게시판히브리서

안양20160513a히11장 35절(표백)-이 근호 목사

이름 : 충성모(IP:211.34.67.174)

안양20160513a히11장 35절(표백)-이 근호 목사

시작하겠습니다. 히브리서 11장 35절할 차례입니다. 제가 한 번 읽어볼게요.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며”라고 되어 있지요. 히브리서를 보게 되면 여기에 등장하는 사람들이 구원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분명히 천국에 간 사람들이에요. 12장 1절에 보면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라고 되어 있지요. 천국에 간 사람들의 공통점이 있어요. 그들은 예수님을 증거하면서 살아온 사람들입니다.

정리가 되지요. 성도란 이 땅에 살면서 예수님을 증거한 사람들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증거했다는 말을 다른 말로 하면 자기를 증거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나의 잘났음을 증거하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형편이 잘 되면 자기를 자랑하고 싶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걸 아시고 (여기에 나오는 예수님을 증거한 사람들의 특징들처럼) 당사자도 참 당황스러운 인생을 살 수밖에 없다는 거에요. 본인이 의도하지 않고 본인이 기대하지 않은 인생으로 하나님이 자꾸 몰아붙이는 겁니다. 그러면서 ‘이건 내가 결심했는데.. 이건 내가 기대했는데..’라는 것이 자꾸 틀어지는 거지요. 그러면 다른 사람이 “왜 당신 인생은 당신 마음대로 안 돼?”라고 물으면 그제사 이 사람들이 하는 말이 “나의 인생은 나를 증거하는 인생이 아니고 주님(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이렇게 나를 몰아세웠어.” 이런 고백이 저절로 나오는 거지요. 훈련을 시켜서 그런 것이 아니고 저절로 그 고백이 터져나오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우리가 이렇게 정리가 됩니다. 항상 정리하는 것을 염두해두셔야 됩니다. 한 번 써볼게요. 나의 증인이 아니다. (나의 증인을 가위표하겠습니다.) 그러면 나의 증인이 아니라는 말은 세상 모든 사람은 자기의 증인이 된다. 자기의 잘난 맛에 살아가는 거에요. 이게 대부분의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성도다 마찬가지고 틈만 나면 자기의 잘난 맛에 살고 싶어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증인이 되게 한 거에요. (예수님의 증인은 공표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증인이 되게 하신 것은 나의 증인에서 강제로 예수님의 증인이 되도록 조치가 일어난 것입니다. 여기에 예수님의 개입한 거에요. 노아는 취미 생활로 방주를 만든 게 아닙니다. 커다란 배 만드는 게 취미인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건 아니거든요.

예수님께서 그렇게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게 하고 아브라함이 자기의 아들을 바치는 게 취미나 즐거움이 아니에요. 이것은 얼토당토않은 획기적인 사건이 개입이 된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증인이 된 사람이 있을 때 그 사람의 인생을 전부 통합해버리면 어떤 인생이 됩니다. 아브라함의 인생, 이삭의 인생, 모세의 인생, 노아, 에녹의 인생을 다 끌어모으면 하나의 꽃다발, 부케처럼 이 땅에 태어나서 십자가에 죽어서 부활하시기까지의 예수님의 공생애가 나옵니다. 이해가 되시지요? 모든 성도들의 일을 전부 조합하면 예수님의 공생애가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가?

성경의 모든 말씀을 해석할 때는 예수님의 공생애를 터뜨리는 방식으로 해석을 하게 되면 OK이고 그렇지 않은 해석은 다 엉터리 해석이 되는 거에요. 야곱이 이삭에게 특별음식을 바쳐서 복을 받았다고 해석을 하면 이것이 엉터리 해석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문자로 보게 되면 그 말이 맞아요. 또 에베소서 5장에 “너희는 용서를 받은 것처럼 서로 용서하라”고 나와 있는데 이것을 “우리가 용서를 받았으니까 서로 용서하고 서로 사랑하자”라고 문자로 보면 맞기는 맞는데 무엇이 빠져버렸습니까? 예수님의 공생애가 빠져버렸지요. ‘내가 주 안에서 부모를 공경하자. 그래 공경하자.’라고 해버리면 예수님의 공생애가 빠져버린 겁니다. 어버이날 설교에 보게 되면은 “여러분들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보란 듯이 모범이 되어서 안 믿는 사람에게 본이 되기 위해서 부모께 효도해야 됩니다. 그래야 여러분들이 오래 삽니다.”라고 해버리면 무엇이 빠져버렸어요? 예수님의 공생애가 빠져버린 거에요. 내가 오래 살고 복을 받기 위한 수단이 되어 버린다 이 말이지요.

부모한테 효도한 것이 자기의 자랑이 되어 버리면 제가 가위표를 친 나의 증인이 아니었고 예수님의 증인이라는 예수님의 개입이 빠져버리는 겁니다. 다시 할게요. 모든 인간은 자기의 잘난 맛에 살아가요. 그런데 여기에 성경 말씀이 펼쳐져 있습니다. 그러면 해석 작업이 일어나는 겁니다. 지금 해석 작업이 잘못 되어 있다는 것을 제가 이야기하는 거에요. 나의 증인이 되고 싶은 그런 심보와 성격을 가지고 성경해석을 해버리는 겁니다. 그리고 나오는 게 ‘역시 나는 잘났어.’라는 말이라면 이 사람은 천국을 가는 사람들의 공통점에서 누락이 되어 버려요. 합세가 안 된다고요. 사실 그런 해석을 여러분 주위에서 많이 듣고 있습니다. 기존교회에서도 그렇고 심지어 같이 교회에 다니는 남편이나 자식의 해석에서도 많이 듣고 있어요.

그러면 우리는 복음을 알았으니까 ‘그게 아닌데..’라는 느낌은 있는데 도대체 논리적으로 말을 못하겠는 거에요. 뭔가 아닌데 어느 지점에서 틀어지는지를 모르거든요. 히브리서가 이걸 설명하는 거에요. 허다한 증인들이라는 것은 다들 자기의 증인이 되고 싶어서 환장했는데 강제 조치로 예수님의 증인이 되어서 주님과 만나는 자들로 그들이 성도라는 겁니다. 제가 이렇게 해도 이걸 잘 아는 사람은 ‘내가 내 해석을 제대로 해서 예수님의 증인하면 되잖아.’라고 우길 수가 있거든요. 그러면 예수님의 강제 조치가 빠져있고 그 다음에 그 모든 해석이 예수님의 조합에 포함이 되는 식, 다시 말해 예수님의 공생애로 마감이 되어야 되는데 예수님의 공생애로 마감이 되는 해석은 예수님의 영이 임해야 가능해요.

“이거 이거 예수님의 공생애에 넣어주세요.”라고 뇌물을 준다고 주께서 “그것도 괜찮네.” 하고 받아주지를 않습니다. 예수님의 성령에 의해서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의 증인이 되도록 조치가 되어 버리면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은 예수님의 공생애에 합류가 되는 같은 성질의 것이 되는 겁니다. 여기까지 이해가 되셨지요. 전체가 이렇게 된다고 하고 이제는 예수님의 증인에 대해서 언급하는 겁니다. 오늘 히브리서 11장도 마찬가지고요. 이렇게 된 것을 한꺼번에 이야기하면 이렇게 정리될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사적 역사는 없다.’입니다.

개인적 역사의 고리, 역사의 연결은 의미가 없다, 사적 역사는 의미가 없다는 뜻입니다. 결혼을 하셔가지고 성인이 되어서 다른 동네에 살다가 우연한 기회에 옛날 국민학교 때에 물장구 하고 수영하고 놀고 공차고 했던 고향을 지나가게 되면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것이 있어요. 그 광경과 더불어 중첩되어서 그때 있었던 일들이 한꺼번에 확 추억으로 밀려오듯 기억이 납니다. 옛날에 옆집에는 누가 살았고 옆집 개는 무슨 개였고 옆집의 할아버지는 언제 어떻게 친절을 베풀었고 했던 장면들이 겹쳐서 막 나오지요. 그게 사적 역사가 돼요. 또 그때가 그리울 수가 있어요. 그때를 그리워해요. 그리고 그리운 동시에 지금의 나의 현재의 위치와 그때 어릴 때의 내 치가 연결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걸 가지고 역사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아까 히브리서를 보시면서 느낀 점은 이것은 결코 그들의 역사가 아니라는 거에요. 개인적인 역사가 아닙니다. 오히려 개인적인 역사를 용납하지 않는 사건에 대해서 언급하는 거에요. 제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냐 하면 우리는 괜찮은 나의 역사, 교회를 잘 다니는 나의 역사를 그대로 쟁반에 담아서 “하나님 은혜로 이렇게 살았습니다.”라면서 드리고 싶은데, 하나님은 그 쟁반을 엎어버리지요. 그런 것을 역사로 안 받고, 그때 있었던 사건 있잖아요. 돌발적인 사건만 추려서 받아버립니다. 주께서 유발한 사건만 회수하듯이 가져가버려요.

아브라함의 인생, 노아의 인생 전부를 이야기하는 게 아니에요. 노아의 인생 전부라고 하면 노아가 어릴 때는 어떻게 살았고 밥은 하루에 몇 끼를 먹고.. 그런 것은 성경에 안 나옵니다. 안 나오지요? 중요한 것은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방향을 틀게 만드는 것입니다. 하란 지역에서 떠나게 만드는 것, 갈대아 우르 지방에서 떠나게 만드는 것, 그런 사건들이 중요한 거에요. 내가 내 인생 중에서 괜찮은 걸 뽑는 게 아니고 주께서 알아서 뽑는데 그 뽑는 것의 근거는 예수님의 공생애가 된다 이 말입니다. 예수님의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았는가를 미리 앞당겨서 (노래의 전주처럼) 그냥 끼어들면서 우리를 사용했던 그 사건들만 주께서 회수하는 거에요.

우리는 내가 잘한 것, 괜찮은 것, 십일조 바치고 하는데 그런 것을 안 받아요. 내 인생이 와장창 구겨지는 것, 내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백날 엮어봐야 하나님께서는 그걸 다 배타시하시고 그걸 보이콧하시고 그걸 아니라고 하면서 내팽개치는 역사임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그 계기들만 뽑아세워요. 그래서 사도 바울이나 성도나 죽을 때까지 예수님의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게 없다는 말이 계속 유효한 겁니다.

분명히 제가 이렇게 히브리서 11장에 근거해서 언급한 겁니다. 천국 가는 사람들은 이렇게 자기의 인생의 잘난 맛을 보는 게 아니고 주께서 채택해서 중요 사건을 뽑아내는 겁니다. 분명히 성경에서 그런데, 막상 평소에 우리의 인생을 바라보게 되면 성경의 이야기는 왔다가 사라지는 바람 같은 것인가 몰라도 그냥 왔다가 그냥 가버리고 다시 돌아서면 개인적 역사에 대한 의미 부여에 또 매진합니다. ‘내가 이렇게 함으로써 내 인생을 얼마나 고귀한 인생으로 아직까지 유지하고 있느냐.. 지금껏 제대로 살아왔듯이 오늘도 제대로 살고 이것이 모아져서 내일도 제대로 살아서 내일 주께서 오신다면 “그것 참 잘 살았네. 훌륭하게 살았네.”라고 칭찬을 받야야지..’ 하는 사적 역사를 또 속에 콱 형성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하는 말이 매일같이 예수님의 간섭과 관여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적 역사가 나의 증인이 되거든요. 나는 이렇게 해서 이렇게 살았습니다.라고 하는 나의 증인, 겸손한 것 같은데 사실은 겸손하지 않고 자기의 역사 속에 자기가 파묻혀서 거기에 매료가 되는 거에요. 그걸 나르시시즘이라고 해요. 나르시시즘이라는 것은 자기애라고 하는 거든요. 물속을 보다가 물속에 비친 자기의 모습이 너무 이뻐가지고, 다른 여자가 아닌 자기의 모습에 매료가 되었어요. 그래서 자기 자신을 만나기 위해서 물속에 뛰어들어서 죽어버렸다는 신화가 있어요. 그래서 거기에서 피어난 꽃이 있었으니 그 꽃의 이름은 수선화입니다. 영어로 수선화를 나르시스라고 합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 아무리 다른 사람과 사귀더라도 결국은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온다는 인간의 속성을 그렇게 신화로 표현한 겁니다. 그러면 자기 자신을 끌어낼 수가 없지요.

그 점을 잘 이용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누구든지 지옥에 가기 싫거든 오른손이 범죄하거든 찍어버려라.” 존재하지 않는 자만이 지옥에 빠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천국에 간다는 말을 하지 않아요. 예수님께서. 지옥에 빠지지 않는다고 이야기하는 이유가 “벌써 너희들에게는 지옥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능력이 없다.”라는 이야기입니다.

12일날 개봉하는 영화에 ‘곡성’이라는 영화가 있지요. 전에 제가 곡성이라는 곳에 한 번인가 가본 일이 있어요. 곡성에 광주 모임에 오시는 조집사님이라는 분이 있어가지고 곡성에서 공부를 한 차례인가 두 차례인가 한 적이 있어요. 그래서 굉장히 반가워가지고 그 영화를 봤어요. 곡성이라는 곳이 광주 근처에 있는데 그곳이 아마 유명해질 거에요. 그 영화를 보게 되면 마지막에 실패로 끝나요. 그 곡성 지역에 마귀(악마)가 덮쳤는데 그 악마를 쫓아나기 위해서 일광이라는 이름의 박수(남자)무당부터 해가지고 일본에서 건너온 무당까지 다 합쳐서 여기의 귀신을 쫓아내려고 했는데 마지막의 결론은 다 실패로 끝났다는 거에요. 그러니까 인간은 자기 내면의 공포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게 그 영화의 주제에요.

그러면 그 영화를 보고 이런 복음적인 내용을 십자가 마을에 올리시면 참 좋겠습니다.라고 하는데 스릴러 영화를 줄거리를 다해가지고 올려버리면 다음부터 보고싶은 마음이 없어요. 끝은 남겨놔야 된다는데 그건 내가 싫거든요. 마지막까지 다 해놓아야지.. 결국 성공하지 못하는데 공포영화 같은 공포를 직접 보고 들어야지 말로 때울 수는 없고요. 그런데 인간의 내면에 있는 공포는 어디에서부터 오느냐 하는 겁니다. 그리고 이 공포가 인간의 행복을 방해하잖아요. 행복하고 싶은데 뭔가 불안 요소와 공포가 방해를 하잖아요. 그러면 인간의 모든 행위는 자기의 공포를 벗아나고 그걸 떼내는 그런 분투와 노력이 인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방법이 돈을 많이 벌게 되면 넉넉하니까 공포가 조금 없어지고 대신 애가 갑자기 아프다든지 집에 불이 나든지 부도가 나게 되면 그 불안의 진원지에 가까이 가게 됩니다.

이걸 인간이 경험상 압니다. 어릴 때 아버지가 부도가 나가지고 잘사는 집인데 보증을 잘못 서가지고 나는 고등학교도 못나오고 하는 이런 이야기가 하도 많기 때문에 소원이 뭐냐 하면 그것은 “나는 보란 듯이 부자가 되어가지고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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