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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39강-창 6장 14-22절(방주)160518-이 근호 목사자유게시판창세기

39강-창 6장 14-22절(방주)160518-이 근호 목사

이름 : 오용익(IP:125.136.25.28)

39강-창 6장 14-22절(방주)160518-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6장 14-22절입니다. 구약성경 5페이지입니다.

창 6:14-22

“너는 잣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짓되 그 안에 간들을 막고 역청으로 그 안팎에 칠하라 그 방주의 제도는 이러하니 장이 삼백 규빗, 광이 오십 규빗, 고가 삼십 규빗이며 거기 창을 내되 위에서부터 한 규빗에 내고 그 문은 옆으로 내고 상 중 하 삼층으로 할찌니라 내가 홍수를 땅에 일으켜 무릇 생명의 기식 있는 육체를 천하에서 멸절하리니 땅에 있는 자가 다 죽으리라 그러나 너와는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 너는 네 아들들과 네 아내와 네 자부들과 함께 그 방주로 들어가고 혈육 있는 모든 생물을 너는 각기 암 수 한쌍 씩 방주로 이끌어 들여 너와 함께 생명을 보존케 하되 새가 그 종류대로, 육축이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이 그 종류대로 각기 둘씩 네게로 나아오리니 그 생명을 보존케 하라 너는 먹을 모든 식물을 네게로 가져다가 저축하라 이것이 너와 그들의 식물이 되리라 노아가 그와 같이 하되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하나님께서 땅을 멸망시킨다고 하셨습니다. 12절에 보면, “하나님이 보신즉 땅이 패괴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패괴함이었더라.” 썩었더라, 라고 되어 있어요. 그래서 13절에 보면, 다 멸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땅 자체가 하나님의 분노와 심판의 대상으로 다 변하고 말았습니다. 땅에 있는 것을 다 멸망을 시키는 것이 합당한 조치라면 우리가 여기서 생각해야 할 것은 노아는 왜 살려주시는가, 하는 겁니다.

그리고 노아를 살려주신다면, 노아는 빼놓고 다 멸망을 시켜야 할 텐데 하나님께서는 노아마저 자신의 살던 고향에서 살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노아가 하나님이 땅을 심판할 때 면제될 수 있는 책임자가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죄가 있는 땅을 다 멸하리라. 아차, 노아가 있었지. 미안하다. 노아, 네가 알아서 잘 하게 되면 내가 너 봐서라도 땅을 살릴게. 그리고 심판하는 거 취소할게.” 이렇게 하는 것이 우리 논리로서는 맞는 이야기입니다.

노아는 의롭고 다른 사람이 의롭지 않다면 의로운 노아에게만큼은 홍수가 일어나지 않고 나머지에게만 홍수가 나거나 멸하는 조치를 해야 하는데 노아마저 물 위에 떠다니도록 조치를 했다는 말은, 이 땅은 사람이 책임자의 자리에 들어설 수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하시는 겁니다. 주제넘게 하나님이 심판하겠다는 것을 사람이 감히 막아서서 “하나님, 저를 봐서라도 봐주세요.”라고 할 수 있는 권리나 입장에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본격적으로 심판하겠다는 의지가 가득하다는 뜻인데 여기서 하나님의 속성을 새롭게 우리가 발견해야 돼요.

그것은 뭐냐? 창조하셨기에 부술 권리가 있다는 그 하나님으로 생각해야 됩니다. 창조하셨기에, 주신자도 하나님이기에 가져가시는 것도 하나님에게 권리가 있듯이 창조하셨기에 부셔버릴 수 있는 권리가 있습니다. 천국을 누가 창조했는가? 하나님이 창조했습니다. 그래서 천국을 창조하신 분이 하나님이기에 천국 가는 것은 하나님이 맘대로 하실 권리가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지옥을 누가 만들었는가? 지옥은 하나님이 만들었습니다. 따라서 지옥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들, 지옥에 가는 그런 분들도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보내시는 겁니다. 여호와증인께서 천국, 지옥 보내는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의 증인을 제가 왜 언급하는가? 맨날 깨어라, 하고 14만 4천을 들이대면서 지옥은 아예 없다고 하고, 그것은 그저 겁주려고 하는 것이고 다 천국 보낸다는 식으로 하는데 그들이 근본적으로 모르는 것이 뭐냐? 천국과 지옥은, 천국 가고 지옥 가는 것에 대해서는 인간은 일말의 권리가 없다는 겁니다. 권리만 없는 것이 아니에요. 더 중요한 것은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지옥 가는데 있어서 내가 책임지지 않는 겁니다. 내가 천국 가는데 있어서 내가 책임지지 않아요.

방금 이야기한 이러한 하나님의 권리로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계시로 등장한다는 이야기는 창조 안에 뭐가 이미 삽입되고 깔려 있는가 하면, 심판의 요소가 깔린 채 이미 창조된 거예요. 송편의 겉모양을 보게 되면, 참기름이 발려 있어서 반들반들 윤기가 나고 하얀 것이 예쁘지요. 그런데 그 안에 시커먼 팥이 들어 있습니다. 송편을 한 번도 구경한 적이 없는 외국인에게는 속까지 하얀 줄 알지만 깨보면 까만 팥이 들어 있잖아요.

창조 안에 저주가 들어 있고, 창조 안에 심판이 들어 있고, 창조 안에 하나님의 분노가 들어 있다는 것은 창조 받은 인간의 입장에서는 생각하고 싶지도 않아요. 부모가 자식을 낳았습니다. 그런데 자식이 말을 안 들어요. 좀 컸다고 까붑니다. 그래서 엄마가 회초리로 때립니다. 잠언 서에 보면 “초달을 차마 못하는 자는 그 자식을 미워함이라.”(잠 13:24)라고 되어 있어요. 그러면 부모가 자기 딴엔 잠언서대로 회초리를 들고 때릴 때 “어머니에게는 마땅히 그럴 권리가 있습니다.” 이렇게 나오면 얼마나 죽이 맞아요? ‘그래, 너나 나나 다 말씀대로 산다.’ 그렇게 되는데, 엄마가 때리니 자식이 하는 말이 “부모면 다입니까?”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부모는 다냐는 거예요. 자식을 이렇게 때려도 되느냐고 나오는 거예요. 그러면 부모가 설득을 하지요. “내가 너를 만들었기에 때릴 권리가 있다. 너도 억울하면 네 자식 낳아서 때려라.” 이렇게 이야기해도 “그런 권리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맞는 내 마음은 아프잖아요. 내가 아프면 엄마가 좋아요?” 보통 엄마 같으면 “그래 좋다!” 이렇게 나올 엄마는 없어요. 같이 껴안고 눈물을 흘리지요. “그래. 엄마가 잘못했다. 내가 성질이 급해서 때렸구나. 이렇게 착한 자식을. 미안해. 호, 해줄까?” 이렇게 약하게 나오는 겁니다. 처음부터 말씀대로 했으면 일관되게 말씀대로 가는 것인데. 하여튼 부모가 되어서 자식을 버려놓아요.

사람들은 창조했다는 그 속에, 그게 없어지고 심판받는다는 요소가 있음을 창조자체에서 생각을 안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창조한 것을 사람들이 뭘 로 이해하는가? 창조했다, 그것을 한국말로 ‘있다’고 합니다. 한자로는 ‘존재(存在)’라고 생각해요. ‘나는 여기 있다.’로 모든 것을 생각합니다. 특히 아담이 죄 짓고 난 뒤에는 모든 것이 있다, 존재 한다, 이것만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없다’와 함께 있는데 그 ‘없다’를 잘라버려요. 무슨 이런 반칙이 있습니까? 창조에는 ‘있다’만 있는 게 아니에요. ‘없다’도 있는 겁니다. 생명만 있는 게 아닙니다. 죽음도 같이 있어요.

그런데 사람들은, 재수가 없어서 죽음이 왔다는 거예요. 아담이 선악과 따먹어서 죽음이 왔다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그 책임자가 누가 되는가 하면, 하나님이 책임자에요. 죽음에 대한 일말의 어떤 건더기도 다 치워버려야 될 것인데 하나님께서 잠시 딴 생각을 했는지, 죽을 수 밖에 없는 나무를 그것도 중앙에 보란 듯이 심어놓았어요. 그것도 먹어라, 먹어라, 하는 식으로 심어놓고는 이제 와서 먹었다고 닦달내시는 것, 대체 인간의 입장에서는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릴 길이 없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에요. 창세기 6장의 이 말씀은 교회 안다니는 사람들도 다 알아요. 얼마나 유명한 말씀인지. 이 유명한 말씀을 그동안 백번, 천 번은 봤을 거예요. 그런데 아무리 봐도 무슨 뜻이 담겨 있는지를 모르는데요? 어떤 사람은 말합니다. 노아를 하나님께서 살리기 위해서 방주를 만들었다고. 방주를 만들어서 살리지 말로 노아가 사는 집근처에만 비가 안 오고 나머지를 홍수로 쓸어버려서 살려야지요. 왜 그런 식으로 안 살립니까? “노아야! 너는 쌍안경으로 먼발치에서 구경이나 해라. 다른 사람 물에 쓸려가는 것 보면서 박수나 치고 찬양이나 해라.” 왜 이렇게 구원 안합니까? 살리려면?

노아가 살던 그 고향에도 물이 들어왔어요. 비가 하늘에서 쏟아졌고 홍수가 났습니다. 우리가 만약 노아 입장이라면, 하나님과 동행했고 당대에 의인이라면, 우리 사고방식 같으면 노아는 우산조차 준비 안했을 거예요. ‘홍수가 내린다 해도 비 안 맞을 거잖아. 왜? 나는 의인이니까. 당대에 의인이고 하나님과 동행하니까 비가 나에게는 안 올 거야.’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절에 다니다가 큰 우환을 당했으니 이제 교회 가게 되면 전에 잃어버린 것들 보상해주고 인생 만회해주고 앞으로 아무 문제없이 하나님이 준비하신 핵우산, 북한의 핵을 막을 수 있는 핵우산처럼 하나님께서 우산처럼 나의 있음을 계속해서 풍성하게 있게 하실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이제부터 교회 다녔으니 복 받을 준비나 하자.’라고 나옵니다.

관심, 출발점이 나의 있음으로부터 시작해요. 존재로부터 시작하는 겁니다. 그런데 존재만 있는 것이 아니고 ‘부재’ 존재의 반대말인 부재, 없는 것, 있음, 없음이 다 합쳐져야 돼요. 그것을 왜 알아야 되는가? 인간을 창조한 그 바닥, 바탕, 그 원본, 이미 아담이 범죄하고 난 뒤에 그 원본에서 이미 아담은 떠나버렸습니다. 그 원본이 있었던 곳이 에덴동산이었는데 에덴에서 추방되고 난 뒤에 아담과 그 후손들은, 아담은 알았겠지만 아담의 후손들은 더 이상 우리가 어디서 창조되고 어떤 것을 밑그림으로 해서 창조되었는지를 놓쳐버렸어요.

놓친 것에 대해서 오늘 본문에서 그 평가가 뭐냐? 땅이 범죄 했다고 되어 있고, 지난 시간에 했듯이 하나님의 신이 함께 하지 않는 이유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했어요. 육체가 되니 육체가 육체를 낳고 육체가 육체를 낳으니까 백날 낳아봐야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원리에 위배되고, 위배되는 그것이 뭐냐? 썩었다, 패괴했다, 그리고 악이 관영했다, 내가 너희를 지은 것을 후회하고 한탄한다, 이렇게 계속 이어지는 겁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노아마저 홍수에 시달리게 하는 이유가 뭐냐?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는 없음에서부터 창조가 되거든요. 다 없애버리는 거예요. 홍수가 일어나서 없어지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초반에 홍수 났을 때 물에 빠져서 죽은 경우고 노아의 경우에는 방주 안에서 방주와 가족들이 없어지는 경험을 해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창조의 원리 안을 관통하는 체험 속에서 우리가 어디서부터 창조되었는가를 경험해야 될 사람으로서 노아와 그 식구가 방주와 더불어 지금 경과한다, 통과한다, 관통하는 체험을 갖게 되는 겁니다. 어디를 관통하는가? 하나님의 심판을 관통하고 저주를 관통하는 거예요.

심판, 저주는 죄 지어서 오는 것이 아니고 원래 창조할 때부터 그것이 들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있음으로서 손 털고 끝나는 것이 아니에요. 있음 안에 뭐가 들어있는가? 있는 것도 없애버리는, 하나님이 축복한 것도 저주해버리는 하나님의 고유권한의 바탕위에서 인간이, 만물이 창조되었습니다. 그래서 죽음과 연관된 선악과가 에덴동산에 심겨 있었거든요.

그런데 인간들은 ‘있음’으로 출발하는 거예요. ‘없다’로 출발해야 될 것을 ‘있음’으로 출발하니까 있는 것을 두고 하나님이 창조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그걸 새롭게 규정해버려요. “그것은 네가 육체로 있는 것이다.” 육체로 있는 것에는 하나님의 신이 함께 있지 않아요. 창세기 6장 3절에,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육체가 된 이상은 하나님이 원하는 하나님의 의와 영광을 얻어낼 수가 없습니다. 노아의 경우에는 하나님과 동행해서 의인이 되었지만 다른 사람은 마땅히 없어져야 되지요. 하나님이 자기가 만든 것을 자기가 없애는데 그걸 누가 탓합니까? 우리는 탓할 권한이 없어요. 그러면 방주의 의미가 뭐냐? 방주는 노아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에요. 저는 교회 2천년 역사에서 방주가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는데 방주가 뭐냐? 방주는 운구차입니다. 셀프장례식을 하고 있는 거예요. 운구차입니다.

어떤 상태에서? 죽은 상태에서. 죽은 상태를 어떻게 연출하는가? 물의 심판, 홍수 속, 노아는 지금 본인의 무덤 속에서 가득 주위를 포위하고 있는 하나님의 무서운 저주와 심판을 마음껏 느끼면서 심판 속을 지금 통과하고 있는 중이에요. 오늘 논리가 상당히 어려운데 결론을 미리 말씀드리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하나님의 창조가 신약에 오게 되면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창조했습니다. 그리고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잠시 나타났다가 제자들로부터 분리되어 떠나버렸어요.

그러면 제자들은 뭘 믿는가? 자기가 있음, 자기가 육신으로 있음과 동일하게 있음, 일정한 시간과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방식으로 예수님이 있는 것을 믿으면 안돼요. 예수님은 떠나버렸으니까. 떠나도 있음이 되는 그 있음을 믿어야 되는데 그것은 뭐냐? 그것은 사건을 믿는 겁니다. 인간이 있음으로 만들어낸 문명의 세계가 아니고 하나님의 사건, 말씀의 사건에 의해서 늘 일이 벌어지고 하나님의 작업이 계속 병렬적으로 이어져서 연달아서 사건, 사건, 사건이 터지는 사건, 자동차 타이어가 펑크 나는 이런 식의, 계속 터지는 사건 속에서 사건의 본류, 사건의 원천을 추적하고 바라보는 겁니다.

그러면 내가 있음이 아니고 나의 있음 이전에 주님의 먼저 있음이 있고, 그 주님의 있음에 대한 매일의 결과물이 나의 있음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나의 있음에 어떤 주도권을 갖고 있을 수가 없어요. 있다가도 없어지고 가졌다가도 빼앗아버리면 그만인 겁니다. 이게 바로 창조 안에 들어 있는 사람의 특징입니다. 그 창조 안에 들어 있는 것을 가지고 신약성경에서는 ‘예수 안’에 있다고 하는 겁니다.

제가 어제 가락강의에서 객관식문제를 냈어요. 우리가 마음이 심난 할 때 우리는 어디로 피해야 됩니까? 1번, 과거로. 2번, 추억의 공간으로. 3번, 수다 떨기. 4번, 예배당. 정답은 거기 없어요. 정답은 예수 안으로. 원천적인 사건 안으로 들어가야 됩니다. 사건 안으로 들어가면 어떻게 됩니까? 그 주님의 있음으로 인해서 내가 여기 존재하고 있다는 것. 사건의 새로운 관계성속에 들어가야 되는 겁니다. 새로운 사건 속에.

그래서 가락강의에서 이야기했어요. 그런데 젊은 사람들은 철이 없지요. 뭔가 힘든 일이 있으면 술 먹고, 담배피고, 스마트폰으로 수다 떨고, 안 그러면 “pick me pick me pick me up……” 요새 그런 게 있어요. 101명의 소녀들, 그저 자극적이고 감각적인 노래 부르면서 뭔가 해소를 하려고 하는 것. 그게 이 세상 전부의 문화로 모든 것으로 우리 곁을 둘러싸고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팔고, 거기다 더 보태라면 노래방에 가고, 술집에 가고, 그런 식으로.

우리가 바라는 현실이라는 것, 우리가 바라는 세상이라 하는 것은 내 존재를 어떻게 행복하게 자극적으로 계속해서 버티고 살아보려고 장치되어 있는, 구비되어 있는 그 모든 것이잖아요. 이 말은 뭐냐? 없음을 무서워하는 거예요. 없음을 두려워하고 없음을 겁내는 거예요. 없음을 언급하면 마귀가 와서 그런 소리 하는 줄 알고 있어요. 자기를 힘들게 하면 그것은 횡포를 부린다고 하고. 그렇다면 오늘 본문의 제목은 간단해요. 하나님의 횡포입니다. 인간을 못살게 굴어버립니다.

우리가 왜 구원받아야 되는데요? 구원이라는 것은 처음부터 없습니다. 구원은 뭐냐? 우리의 본류, 창조의 그 본바탕과 관계가 이어지는 그것이 구원이에요. 따라서 우리가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구원에 삼킴을 당하도록 하지요. 우리의 죽음은 주님의 부활에 삼켜진다. 고린도전서 15장에 나옵니다.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고전 15:54)

생명이 죽음을 삼켜버린다. 사망의 부활의 능력에 의해서 삼켜지는 거예요. 그 삼켜지는 현장이 뭐냐? 창조는 사랑과 저주, 축복과 저주와 심판, 다 함께 있어야 됩니다. 어느 한쪽만이 아니라 둘 다가 있어야 돼요. 그 둘 다를 보여주는 사건이 뭐냐? 고린도전서에 나오는 십자가사건입니다. 천지창조는 예수님의 십자가사건을 염두에 두고, 십자가사건을 최종적인 원판으로 두고 십자가사건의 긴 모형과 그림자로서 창세기 1장에 천지창조가 된 겁니다. 세상 만물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위하여, 주님으로 인하여, 주님으로 말미암아 만들어졌습니다.

주라는 것은, 십자가사건을 통해서 예수님이 주가 되지 십자가 빠진 예수님은 주가 아닙니다. 죽음을 통해서 아버지의 저주와 그리고 부활을 통해서 주님의 사랑, 이 모든 것이 함께 있는 것, 처음부터 지옥은 있었고 처음부터 천국은 있었던 거예요. 하나님께서 인간 만들어놓고 죄 안 지을 줄 알았는데 인간이 죄를 짓자 하나님께서 머리 긁적이면서 ‘아이고, 죄를 안 지을 줄 알았는데 누가 그랬지? 뱀이 그랬구나. 저 못된 것 집어넣어야 되겠네. 뱀 집어넣는 방법이 뭐가 있을까? 옳지 지옥을 만들자.’

일 저질러지자 나중에 그 뱀 집어넣으려고 지옥과 천국을 만든다면 처음부터 하나님께서는 뱀이, 마귀가 그런 일을 할 줄 모르는 분이 되고, 처음부터 인간이 죄 지을 줄을 몰랐던 분이 되어버려요. 그렇게 되면 의도적으로 선악과를 심어놓은 하나님의 취지가 날아가 버립니다. 에덴동산에는 일체 죄 지어서 죽음을 유발할 어떤 위험 적 요소도 얼씬도 하지 말아야 되는데 하나님은 의도적으로 선악과와 생명나무를 심었습니다.

그리고 선악과를 따먹었다고 해도 사람으로 하면 한 번 봐줄 만도 한데 따먹었다는 이유 때문에 생명나무 근처도 못 가게 만드는 것, 이 모든 것은, 창조는 그냥 있음 그 자체로 목적이 되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서 이 땅의 모든 것이 창조되었습니다. 심지어 마귀까지, 심지어 지옥까지 말입니다. 지옥에서도 예수님은 주가 되셔야 돼요. 모든 만물이 그리스도를 주라 함으로써 그리스도에게 영광을 돌리는 이 거대한 작업에서 예외가 되는 피조물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방주를 만듦으로 말미암아 결국은 이 방주조차도, ‘방주가 있다’가 아니라 방주가 없어짐을 내다보게 합니다. 방주가 없어지면 그 안에 들어있던 노아식구도 다 같이 없어지는 거예요. 모든 있음을 없애겠다는 하나님의 작업은 일관성이 있게 다 마무리되는 겁니다. “노아는 방주에서 나와서도 살아 있잖아요.”라고 한다면 그 노아는 그 때 그 노아가 아니에요. 사건 화된 노아에요. 노아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노아 안에 내장되어 있는, 홍해사건, 홍수사건으로 말미암아 노아가 그 사건을 경험한 것이 아니고, 사건을 위하여 노아는 죽지 않고 방주를 타야 했고, 그게 운구차였고, 방주 안에서 본인은 이미 일찌감치 저들과 함께 죽어야 마땅한데, 사건을 증언하고 하나님의 창조의 원판을 증거 하라고 그 홍수사건이 노아를 가만두지 않고 방주에 태웠고, 결국 방주는 노아를 방주에서 나오게 해놓고는 결국은 방주마저 날라 가버리게 하는 겁니다.

예배당, 성전, 다 날라 가야돼요. 왜? 방주를 만든 재료가 땅위에서 난 재료기 때문에.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혈육이 있는 것은 한 쌍씩 그들이 방주에서 나오는 것은, 노아가 아니고 노아와 맺은 하나님의 계약이 있고 그것을 언약이라 하는데,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암수가 새로운 땅에서 새끼를 치고 번식을 할 거예요. 번식을 하는데 그 번식을 하는 모든 피조세계에 뭐가 들어 있는가? “휴, 우린 완전히 죽었다가 살아났어.” 그러한 예수님과 관련된 정보가 모든 피조세계에 깔리게 만드는 겁니다.

그걸 창세기 9장에서 ‘피’라고 했어요. 정결한 짐승을 죽여서 구닥다리 모든 것을 살린다는 말은 죽을 뻔 했는데 산 것이 아니고 벌써 죽었어요. 벌써 죽고 지금 사는 것은 그 때 있던 내가 아니라 사건에 의해서 새롭게 창조된 거예요. 그 사건과 주님과의 새로운 관계성을 유지하는 겁니다. 오늘 설교 정리해 봅시다. 기존의 관계성, 홍수 이전에 인간을 구성했던 모든 관계성은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다 날라 가버리고 새로운 관계성이 구성이 되는 겁니다.

그 관계성을 구성하기 위해서 오늘 본문 6장 17, 18절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홍수를 땅에 일으켜 무릇 생명의 기식 있는 육체를 천하에서 멸절하리니 땅에 있는 자가 다 죽으리라 그러나 너와는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 언약을 세우는 겁니다. 언약은 사건화 된 채로 등장한다는 겁니다. 언약을 받고 난 뒤에 ‘나 여기 있음’이라고 이야기 하지 말고 사건으로 인하여 내가 있게 되었기 때문에 내가 있는 것이 아니고 사건이 있다고 이야기해야 돼요.

더 쉽게 말해서, 노아는 홍수 끝나고 난 뒤에 “내가 여기 있습니다.” 하지 말고 “사건 화된 방주가 여기 있습니다.”라고 이야기해야 돼요. 그리고 잣나무로 만든 방주는 땅위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노아홍수 끝나고 난 뒤에 무너지고, 부서지고, 다 깨져야 돼요. 그러면 이 언약의 모습은 뭐냐? 이 언약의 모습은 미래형을 갖춥니다. 오늘 방주의 구조를 보면 3층으로 되어 있어요. 방주의 길이가 135미터요, 폭이 23.5미터, 높이가 13.5미터인데 이 방주의 층이 중요합니다.

3층으로 되어 있어요. 제일 끝에 창이 나와 있습니다. 그 창이 언약이 스스로 뭔가 최종지점을 향하여, 십자가지요, 최종지점을 향하여 창을 내는 겁니다. 창은 최종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연관되어 있는 창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 창으로 비둘기가 나왔다는 것은 여러분이 아시지요. 이것은 없는 세계인데 언약 안에서만 비로소 미래가 보장되는 세계입니다. 이미 홍수가 일어났을 때 다 죽은 사람들은 미래가 단절된 채 죽어버린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는 미래가 없어요.

제가 아까 기도제목 낼 때 세상이 양분된다는 말을 했는데, 이 세상에서 성령을 받지 않는 사람은 미래가 없습니다. 이 세상이 전부니까. 그런데 성령 받은 사람은 미래를 향하여 나는 하나의 비둘기역할이기 때문에 항상 우리의 모든 지향점은 이 세상이 아니고 보이지 않는 세상을 바라봅니다. 그러니까 이 땅에서 우리는 나그네가 되는 거지요. 성도만이 나그네가 되는 겁니다. 히브리서 11장 7절에 보면,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이것은,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은 거예요. 이제부터 이야기가 어려워집니다. 보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노아만큼은 보지 못하지만 이미 있는 세계가 되어버립니다. 그렇다면 노아입장에서는 어떠한 인식의 변화가 생기는가? 보지 못하는 것만 있음이 되고 지금 자기가 보고 있는 것, 이게 없음이 되는 거예요. 남들이 들으면 미쳤다고 할 거예요. “나무가 있다? 저 나무는 없는 거야. 앞산, 저거 없는 거야. 대통령, 대통령 없어. 북한도 없고 미국도 없어.” “너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다 유황불로 없어질 거야.” “그러면 있는 것은 뭔데?” “있는 것은 바로 주의 나라야.”

이렇게 안목이 바뀌어갔다는 거예요. 누가? 노아가. 누가 말입니까? 노아 가요. 언제요? 홍수 오기도 전에요. 어디 안에서? 언약 안에서. 왜? 자기 있음이 아니고 사건의 언약 때문에 본인이 있는 거예요. 본인 구원하려고 본인이 있는 것이 아니고 그 하나님의 사건 화된 언약을 위해서 본인이 잠시 여기에 있음이라는, 존재라는 형태로 있을 뿐인데 그 있음은 없어질 있음이에요. 이 있음을 하나님께서 구원하지는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구원이 없다는 말은 이 있는 것을 구원하지는 않아요.

뭔가 현재 이 있는 있음을 없애버리는 작업, 언약작업을 통해서 이 있는 것은 없어지고 없는 자아가 새롭게 생기면서 천국백성으로 산다는 그 말입니다. 어려워라 참! 예수님께서 어려운 말씀을 하신 적이 있어요. 마태복음 13장에 12절, 이것은 성경에서 제일 어려운 이야기인데요.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이 말씀이 굉장히 어렵습니다.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이게 앞뒤가 안 맞아요. 지금 나랑 장난 치냐, 하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없는데 어떻게 빼앗을 수 있는 것이 생깁니까? 있는 자는 더 받을 것이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긴다는 말이 무슨 뜻이냐는 말이지요. 이것은, 예수님께서 하늘나라 이야기를 하면서 정말 제대로 천국이야기를 알아듣는 사람은 지금 내가 있다고 여기는 것은 없음에 해당된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것이 없음에 해당되도록 조치함으로 말미암아 우리로 하여금 내가 어느 것을 고를 것인가, 어느 것을 소유할 것인가, 나는 비로소 창조의 바닥과 접촉이 되고 연관되어 있는 존재로서 그렇게 주께서 찾아오셨다는 겁니다.

설교 처음으로 돌아가 봅시다. 설교 처음에 뭐라고 했던가요? 창조의 바닥은 처음부터 없음과 있음이 다 같이 있는데, 사람은 태어나고 난 뒤에 있음을 전제로 해버려요. 처음에 들은 예를 또 들어볼까요? 엄마가 애를 때리니까 애가 하는 말이 “왜 때립니까?” “엄마니까 때린다.” “엄마면 답니까?” 이런 의식은 엄마에게 뿐만 아니라 심지어 하나님에게도 마찬가지거든요. 지금 멀쩡하게 있는데 왜 인생 힘들게 만드느냐, 그 말이거든요.

노아는 그게 아님을 알게 된 거예요. 여기 있는 내가 창조의 바닥이 아니고, 이것은 창조로부터 붕 떠 있는 거예요. 진짜 창조의 바닥은 뭐냐? 내가 없을 수도 있다는 것, 아니 ‘있고 없고’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정작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기 위해서 때로는 있을 수도, 때로는 없을 수도 있고, 주님께서 십자가 복음을 증거 하기 위해서 그럴 권한이 얼마든지 주님에게만 있음을 지금 증거 하는 증인이 될 때 그 사람은 언약 안에서 비로소 구원되는 사람입니다.

방주 탔다고 구원됩니까? 그러면 노아의 아들인 함이 천국 갔어요? 저주받았는데. 방주가 구원한다? 아닙니다. 방주는 ‘있음’이에요. 잣나무로 만들어서 눈에 보이는 겁니다. 눈에 보이는 그것은 없어질 거예요. 보이지 않는 것은 사건의 형식으로 우리로 하여금 보는 것에 연연해하지 않도록 조치하시는 겁니다. 이게 바로 언약에서 유발된 사건입니다.

끝으로, 그러면 이 세계는 어떤 세계입니까? 방주를 만들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조치하시는 심판의 형식이 어떠하다는 것을 방주를 통해서 알려주시는 겁니다. 방주라 하는 것은 물에 뜨는 구조로 되어 있어요. 역청을 바른 것이 그 증거입니다. 역청을 발라서 물이 들어오지 않게 한다는 말은 장차 심판의 형식과 물이 들어오지 않는 방주라는 물체와 연관성을 갖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3층에는 창이 나 있으니까 그리로 물이 들어올 수가 있어요. 그러니까 이것은 붕 뜨는 구조입니다. 물이 오되, 세상 모든 것은 삼키되 방주마저 삼켜지지는 않는, 빼꼼이 창을 내서 비둘기를 내 보낼 수 있는 형식으로 심판이 제한되는 거지요.

그렇다면 심판이란 것은 어디에 맞춰서 심판되는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마음껏 드러내는 용도로서 심판이 주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십자가가 뭐냐 하면, 죄 때문에 죽으시고 의를 인하여 살아나셨거든요. 로마서 4장 25절에. 그렇다면 이 땅에서 필요한 것은 그 어떤 것도 죄를 의로 바꾸지 못할 것이라면 그것은 하나님과 관련 없는 겁니다. 대표적인 것이 예배당, 교회직분, 헌금, 기도, 선교하는 것, 예배드리는 것, 방언하는 것, 전부 다 이런 것들은 구원과 관련 없습니다.

왜 관련 없는가? 주체가, 내가 선교하고, 내가 전도하고, 내가 방언하고, 내가 헌금하고, 내가 예배드리려고 이 자리까지 나왔기 때문에. 깔끔하게 정리한다면, 내가 내 구원을 방해합니다. 이 육신이. 그렇다면 구원의 방법은 뭐냐? 우리를 날마다 죽이는 거예요. 갈라디아서 2장 20절,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한다면 그 사람은 방주입니다. 이 시대의 방주입니다. 십자가 안은 오늘 우리를 안전하게 모시는 운구차, 바람상조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우리가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구원을 위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언약 속에 있게 된 것을 감사합니다. 날마다 우리가 살아 있는 이 자체가 십자가사건에 의한 확실한 결과물인 것을, 그리고 우리가 죄인으로서 죽어 마땅함을 고백하고 깨닫는 것도 지금 주님과 동행하고 있는 확실한 결과물인 것을 늘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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