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강의(2016. 4. 22) 2강
광주 강의(2016. 4. 22) 2강
이름 : 서경수(IP:211.220.22.20)
광주 강의(2016. 4. 22) 26-2
두 번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마가복음 8장에서 해석하기 곤란한 점이 무엇인가 하면, 왜 딱 맞게 먹이시지 않고 남는 것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5절에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느냐 가로되 일곱이로소이다.”라고 되어 있는데, 인간이 내놓을 수 있는 것이 떡 일곱 개입니다. 그런데 배고픈 사람이 4,000명 됩니다. 떡 7개, 물고기 2마리로 4,000명을 배불리 먹일 수 있습니까?
이런 상황은 주님이 의도적으로 유발시켰지요. 왜냐? 우리에게는 답이 없음을 폭로하기 위함입니다. 답도 없으면서 인간은 그럭저럭 살아왔으니까 자신의 삶이 별 문제가 없다고 여기며 살고 있습니다. 주님과 인간은 대화가 안 됩니다. 예수님 말씀을 알아들을 인간이 없다는 말입니다.
인간은 구원 받을 자격도 능력도 없습니다. 성도가 발생되는 것은 예수님의 자기 숙제입니다. 그래서 구원 받고자 해서 구원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평소에 비정상이기에 구원해 달라는 생각도 비정상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자기 분수도 모르고, 주제로 모르고--
주님 보시기에 우리 모습이 이와 같습니다. 지옥 갈 인간이 전도하고 구제했다고 자랑거리로 내놓으니 기가 찰 노릇입니다. 죽어가면서 죽는 이유도 모르고. 인간에게는 답이 없습니다. 답이 없는 곳으로 주께서 몰아넣었습니다.
답할 수 없는 질문을 주님이 던집니다. 왜냐? 우리가 그동안 답이라고 생각한 것이 제대로 된 답이 아니고 육적인 것이고 죄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 자체가 답이 되게 하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답을 알려고 할 필요 없어요. 성도답게 살 이유가 없어요. 성도답게 살려고 하면 나와 성도 사이의 갭이 생깁니다.
현재 내 모습에서 성도다운 모습으로 가려고 하는 시도 자체가 답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면 성도다운 모습이 되겠습니까? 평생을 가도 안 됩니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점점 더 완전과는 거리가 뭡니다. 나이가 들면 점점 짐승에 가까워집니다. 늙어 치매가 걸렸는데 어디서 온유와 화평이 나옵니까?
우리에게는 답이 없는데 주께서 질문을 통해서 결국 답이 되게 하시잖아요. 이 과정에서 우리의 모든 것을 털어내야 돼요. 우리가 정답이라고 우긴 것을 쏟아내야 됩니다. 책받침 위에 쓰레기가 담겨 있는데 책받침을 기울이면 쓰레기가 쏟아져 내립니다. 우리가 쓰레기인데 주님이 책받침을 기울이면 우리는 죽는다고 아우성을 칩니다.
주님이 우리의 모든 것을 털어낼 때 우리는 공포를 느낍니다. 그런데 우리는 진작 다 털려야 한다는 것을 주님 쪽에서 확인하는 방법이 뭐냐? 남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대로 채워지면 우리는 빈 공간을 채우게 되잖아요. 그러면 기존의 ‘내가 비어있습니다.’ 라는 것도 정답이 될 수 있습니다.
“주님이여, 집을 사야하는데 돈 700만원이 필요합니다.” 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주님 보시기에 정답입니까? 아니죠. 이것은 잘못 살아온 삶의 일부일 뿐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700만원을 주시는 것이 아니고 내가 사려고 했던 집보다 더 넓고 좋은 집을 공짜로 주신다면, 우리가 노력해서 얻은 것입니까, 여분의 것입니까? 여분의 것이지요.
여분의 것이 있다면 ‘700만원만 있으면 내 집 마련한다.’는 생각은 포기해도 괜찮지요. 내가 700만원을 채워서 살 집보다 거저 주시는 집이 더 좋다면 내가 생각한 그 계획을 포기할 수 있지요? 내 계획을 포기하면 공짜로 주시는 것이 남겠지요. 그러면 공짜로 주신 집에 살면서 어떤 마음을 가질까요?
혹시 누가 “집이 참 좋은데, 이 집 마련한다고 고생 많이 했지요?”라고 한다면, “아닙니다. 주님이 공짜로 주셨습니다.”라고 하겠지요. 이게 성도가 사는 모습이고 천국의 삶입니다. 내가 계획한 대로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수박이 먹고 싶어요. 그런데 집사님이 내놓은 것은 오렌지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수박이 먹고 싶다는 내 뜻은 접어야지요.
내 뜻을 접을 때 우리는 공포를 느낍니다. 그런데 오렌지를 먹어보니 수박 생각이 나지 않을 정도로 맛있고 행복합니다. 이 순간 내가 수박 먹겠다는 생각은 털려야 될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얻고자 하는 것과 주님이 준비하신 것은 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주께서 배불리 먹이시고 남은 것을 일곱 광주리 거두었다는 말은, 인간의 한계에 대한 주님의 고발입니다. 그래서 은혜는 고발(지적)로 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이지요. 그런데 아브라함이 가만히 있는데 복이 왔습니까, 아니면 뭔가 설쳤습니까? 설쳤어요. 왜 설칩니까? 나는 평소에 이런 식으로 살아왔다는 거예요.
인간은 다 자기 방식대로 살아왔기에 그런 삶에 별 문제가 없다고 여깁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의 아들을 주기 전에 여종을 통해서 이스마엘을 나았습니다. 이것이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전부입니다. 그런데 그 이스마엘은 저주를 받지요. 이스마엘이 저주 받는다는 것은 아브라함이 저주 받는다는 뜻입니다. 왜냐? 저주 받는 자식이 누구에게서 나왔어요? 아브라함과 하갈에게서 나왔잖아요. 2개(아브라함, 하갈)의 저주가 1개(이스마엘)의 저주를 만든 것이지요.
그런데 저주가 발생되었다는 말은 복 받을 사람이 따로 존재한다는 뜻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는데, 그 결과 이스마엘이 태어났고, 이스마엘은 저주 받는 자녀라면 그들이 기대한 축복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어요. 복은 없어요. 그러니 우리는 우리 방식대로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냥 살면 주님이 택한 백성이라면 우리 힘으로 할 수 없었던 것을 복으로 주면서 우리의 삶은 ‘막 사는 것’이라고 지적하는 기능도 함께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만약 우리가 막 살지 않고 조심해서 살면 그 조심함이 내 기억 속에 누적되겠지요. 그 기억의 총체가 자아입니다.
자아를 깨보면 기억이 나와요. 기억의 중첩이지요. “내가 누구다.”라고 하면, 그 다음 말은 들어보지 않아도 알아요. ‘20살 때 무엇을 했고, 30살에 무엇을 했고 --’ 기억의 중첩이에요. 그게 모여서 ‘나’가 된 거예요. 그런데 내가 조심하고 경건하게 살면 그것이 누적이 되어 괜찮은 내가 되고, 그 괜찮은 것은 아까워서 버리지 못합니다. 그러면 그런 것들을 껴안고 살게 되지요. 이것이 바로 독자적으로 사는 겁니다. ‘나는 나로 인하여 산다.’는 것입니다.
지금 제자들이 4,000명을 어떻게 먹일까 고민할 때, ‘우리는 사단의 자식이기에 못합니다.’라고 하지 않고, 평소에 자신이 행동하는 것처럼 행동했는데 이것은 결국 그들이 마귀와 단짝이 되어서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돈만 있으면 떡을 사 오겠다.’는 것인데, 이것은 독자적으로 살 수 있으면 살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4,000명을 맡기면 남게 하겠습니까, 알맞게 사오겠습니까? 알맞게 사오겠지요. 영화관에 많은 영화들이 상영되는데 특히 인기 있는 것은 영웅이 나오는 영화입니다. 영웅들의 공통점이 있어요. 인간은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다 해결하지 못해요. 연약해서. 독자적으로 살고 싶은데 힘이 뒷받침되지 않아요.
그런데 영웅들은 무한한 힘을 가졌어요. 그러니 사람들은 영웅을 부러워합니다. 영웅들이 영웅답게 되려면 인간들이 해결 못하는 악인이 등장해야 합니다. TV 드라마에 나오는 ‘동네 변호사 조들호’가 있는데, 조들호는 영웅입니다. 불의한 재벌에 맞서서 법을 잘 알고 용감한 변호사 조들호가 약한 사람을 지켜주지요. 우리에게 이런 영웅들이 있으면 좋은 사회가 되는 거예요.
좋은 사회가 되면 좋은 사회 속에 있는 내가 좋은 거지요. 즉 내가 살기 위해서 좋은 사회가 되어야 하고, 좋은 사회가 되려면 나보다 더 지혜롭고 똑똑한 영웅들이 많이 등장할 때 내가 살기 좋은 사회가 되지요.
우리 집안에 영웅이 등장했다고 합시다. 그러면 친척들이 기가 살지요. 그래서 기도할 때도 영웅이 등장하기를 기도하고, 아이가 태어나면 큰 인물이 될 것이라고 덕담을 합니다. 큰 인물이 뭡니까? 영웅이 되는 거지요.
광야에 굶주린 4,000명이 있습니다. 먹을 것이라곤 떡 7개, 생선 2마리가 전부입니다. 대책이 없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다 먹고 남은 것이 7광주리입니다. 그렇다면 7광주리 안에는 4,000명을 다 먹이고 남았다는 것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면 떡 먹은 사람들은 “야, 배부르다.”라고 했다면 그 사람은 무엇을 이해 못한 것입니까?
떡 7개, 생선 2마리로 4,000명을 먹이고 7광주리가 남은 것은 예수님의 기능과 역할을 보여준 것입니다. 그래서 4,000명이 ‘배부르게 잘 먹었다.’라고 하면 안 돼요. 뭘 봐야 됩니까? 7광주리가 어디서 생겼느냐는 것. 주님에게서 바로 생긴 것이 아니고 배고픈 우리를 경유한 거예요.
이게 뭔가 하면, 죄인을 경유해서 죄인의 문제를 다 해결했음을 보여주는 의로운 축복의 모습이 7광주리가 되는 겁니다. 이 죄인의 대표자들이 누구냐? 12제자지요. 왜? 그들의 해결책은 4,000명의 해결책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가 여기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예수님의 모든 말씀과 행위는 반드시 인간을 경유해서 예수님 자신의 기능을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맡겨놓았으면 남는 것 없이 4,000명이 알맞게 먹을 수 있게 했을 거예요. 내가 배부르고, 내가 행복하고, 내가 구원 받았으면 그것으로 끝이지요.
‘너도 구원 받고, 저 사람도 구원 받았다.’고 하면 ‘저 사람이 구원 받든지 말든지 그것은 관심 없고 내가 구원 받은 것만 이야기해 주세요.’라고 합니다.
십자가마을에 올려놓은 ‘참소리 선교회 목사의 간증’을 읽어보셨어요? 제가 ‘구원론 중심의 간증의 결정판’이라고 했지요. 그 사람의 글을 보면 ‘나처럼 하면 복(구원)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문제는 ‘여러분들도 구원 받고 싶지요?’라고 묻는 게 잘못입니다. ‘저는 지옥가야 하지요?’라고 묻는 것이 아니고 ‘나는 지옥 가서는 안 돼. 기어이 천국 가야 해.’라는 자체가 천국, 지옥의 존재 의미를 자기 자신이 잘 되느냐, 못 되느냐는 것과 관련 시켰지요? 그것이 바로 마귀가 만든 천국, 지옥입니다.
그 사람의 모든 끝은 ‘이렇게 하면 구원 받습니다.’로 끝이 납니다. 구원론에서 시작해서 구원론으로 끝납니다. 남는 것이 없습니다. 본인이 구원 받기를 원해서 구원 받았으니 그것으로 끝이잖아요. 더 무엇이 필요합니까? 이런 주장은 기존 교회에서 배운 것이지요.
부산에 ‘백파’라는 교회가 있어요. 이 사람이 백파의 교리를 설명해 놓았습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구원 못 받는다.’고 백파교회에서 말했어요. 이것의 반대말은 ‘구원 안 받으면 되지.’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구원 안 받으면 된다.’라고 하지 못하고 ‘나는 회개해서 반드시 구원 받고 말리라.’ 이렇게 나오도록 유혹해서 큰 교회를 만들었어요.
그곳에 모인 사람들의 공통점은 ‘누가누가 잘하나?’ 또는 ‘복면 가왕’에 나선 겁니다. 노래 잘하기 위해 나선 것이 아니라 상대를 이기기 위해 나선 것입니다. 이겨서 어떻게 하겠다는 것도 없고 무조건 이기겠다는 거예요. 세상에서 이긴 것은 이긴 것이 아닙니다. 누가복음 16장에서 거지 나사로와 부자 중 누가 이겼습니까?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에게 높임 받는 것은 하나님께 미움 받는 것’이라고. 오단 군은 실습에 가서 칭찬도 받고 높임을 받았지요? 그러면 주의해야 돼요. 남은 것이 없으면 구원 못 받습니다. 사람들의 아이디어에서는 남는 것이 없어요. 그런데 남은 것이 있다는 것은 주님이 개입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아버지께 받은 숙제를 인간들을 활용해서 실시하십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빼앗겨야 됩니다. 그럼 내가 살고 있는 집도 처분해야 합니까? 그 집을 주께서 남긴 것으로 보면 되잖아요. 그리고 그 집에서 떠날 준비를 하면 됩니다. 떠나기 전에 그 집마저 주의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하지요.
이 말을 확대시키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이 주님의 희생 위에서 제공된 것입니다. 이 귤도 햇볕이 없이는 생길 수 없잖아요. 모든 과일, 우리의 목숨, 우리의 잠자리 등등. 주께서 허락지 않으면 밤이라도 잠을 이룰 수 없습니다. 주께서 잠을 허락하셔야 잘 수 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의 날짜 개념은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둘째 날이라.’ 반드시 저녁부터 시작합니다. 인간의 입장에서 저녁은 無(무)입니다. 없는데서 있게 하시는 겁니다. 달리 표현하면 ‘남는 것’이지요. 떡 일곱 개 생선 두 마리로 사천 명이 먹고 남은 것이 일곱 광주리였습니다.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느냐?” “일곱이로소이다.” 그 일곱 개를 인간이 가지고 있으면 별 소용이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가지고 축사하신 후 떼어 주었을 때 몇 광주가 남았습니까? 일곱 광주리가 남았습니다. 그러면 떡을 먹고 배부른 사람은 그것으로 멈추면 안 됩니다. 그들이 떡을 먹고 배가 불러서 사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남은 자 되게 한 것이 바로 우리네요.’라고 한다면 그가 진정 살아있는 존재가 됩니다.
이런 것까지 가지를 못해요. 마가복음 8장이 왜 기록되어 있습니까? 성령 받은 사람은 4,000명 먹이는 것을 예수님을 경유해서 “야, 우리도 잘하면 예수님께 떡 얻어먹겠다.” 이런 사고방식이 아니라 “주여, 나를 나의 것이라고 여긴 것을 떨쳐버리게 하옵소서. 4,000명을 먹이신 것처럼 저희를 떨쳐버리고 없애주세요. 그리고 그 현장의 남은 것이 내가 되게 하옵소서.” 이렇게 되겠지요. 이런 고백을 하는 것은 성도이기에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배부르게 먹은 것이 전부이지만 남은 것이 생기게 하시는 것은 인간의 일이 아니고 예수님의 일입니다.
어떤 교회가 전도대회를 하면서 100명 전도할 것을 목표했는데 500명이 왔다면 남은 것이 몇 명입니까? 1) 500명. 2) 400명. 3) 0명. 정답은 3번입니다. 왜? 주님은 인간에게 전도를 맡긴 적이 없습니다. 전도는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인간이 전도 담당자인 주님께 드릴 게 전도입니다.
우리가 주님 것이라고 드릴 때 이미 그것이 전도의 시작입니다. 내가 따로 전도를 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전도를 하시는데 우리를 경유해서 하십니다. 이 말은 우리를 제쳐두고 주님 홀로 일하신다는 말입니다.
광야에 굶주린 4,000명이 있었습니다. 여기에 예수님이 개입했지요. 사람들은 자신들이 여기 있다고 생각했는데 예수님이 개입하시니 4,000명 더하기 1(예수님)이 되겠지요. 만약 사람들이 제대로 안다면 4,000명은 없고 예수님만 여기 계십니다. ‘예수님 + 예수님의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만 인간이고 나머지는 예수님의 것으로만 천국 갑니다. 내 이름은 없고 예수님 이름으로 구원을 얻습니다. 동행이란 내가 있고 예수님이 함께하는 것이 아니고, 동행이 되면 주체에 변화가 일어나서 예수님이 I가 되고 나는 그분의 것(it)이 되는 거예요. 내가 예수님의 것이 될 때 ‘남은 것’이 됩니다. 남은 일곱 광주리에 해당되는 거지요.
지금까지 요한복음 8장에서 말한 복음의 핵심은 뭔가? 전에는 마귀의 것이었는데 이제 주님의 것이 되면 됩니까? 그것이 아니고, 창세전부터 주님의 것으로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났다는 사실을 뒤돌아보면서 소급해서 볼 수 있는 눈을 가져야 성령을 받은 사람입니다.
‘주님을 위해서 무엇을 하자.’ 이렇게 되면 독자적이 됩니다. 내가 여기 있고, 주님이 원하시는 어떤 일이 있다면, 나는 주님이 원하시는 일을 위해 열심히 달려가야 합니다. 현재 내가 여기 있는 것 자체가 내가 주님께 가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주님의 은혜로 남은 것, 주님의 희생으로 얻어진 생산물이란 사실을 늘 인식하면서 주어진 일에 대해서 내 것이라 하지 말고 주의 것이라고 하면서 막 살면 됩니다.
‘막 산다.’는 표현에서 왜 앞에 ‘막’이란 말을 했는가 하면, 대부분의 사라들이 조심스럽게 사는 것이 경건한 삶이라고 여기기에 ‘막’을 집어넣었어요. ‘막 살아라.’는 말이 성경 어디에 나옵니까? 성경에 없는 이야기를 왜 하나? 이건 성경에 숨어있는 이야기입니다. 성경에는 육으로 가면 안 돼요. 영을 경유해서 가야 합니다.
십자가를 경유해서 성경을 보면, 십자가 앞에서 모든 인간은 이미 막 살고 있다는 거예요. 성령 받은 사람이 자신의 삶을 돌이켜 보면 막 사는 것입니다. 막 사는 인간이 스스로 막 사는 것에 의지하면 그는 지옥 갑니다. 자신이 ‘막 산다’는 것을 안다는 것은 이미 주님의 것이 되었기에 독자적으로 살 수 없는 형편이 되었음을 늘 인정하자는 말입니다.
내가 사는 것은 내가 사는 것이 아님을 인정하자는 것입니다.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이렇게 살도록 했다는 거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는 것이지요. 제가 분명히 이렇게 말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목사님, 그러면 우리가 앞으로 어떻게 살란 말입니까?” 라고 물어요.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는 우리 소관이 아니고, 지금이 바로 ‘앞으로’에 푹 젖어 있어요. 앞으로 산다는 것은 천국 가서 사는 것을 말하잖아요. 천국에 사는 것은 오래 살았다고 천국 가는 것이 아닙니다. 기간이 몇 년 남아서 천국 가는 것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고 오늘 죽어도 천국 갈 수 있는 사람인가를 묻습니다.
오늘 죽어도 천국 갈려면 어떻게 해야 되지요? 이것은 독자적인 것이 아니고 ‘주께서 나를 살렸습니다.’ 라고 인정하는 것. 이게 오늘 밤 죽더라고 천국 가는 거예요.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만들어 놓았잖아요.’ 라고 주도권을 하나님께 맡기면 내일까지 기다릴 필요 없어요. 오늘 죽어도 천국 갑니다.
자꾸 우리는 몇 년 더 살다 가려고 합니다. 아들 결혼은 시키고 천국 갔으면 좋겠다고요? 그것은 주님의 남은 자가 아니고 나의 남은 자지요. 나의 공로를 삽입하지 마세요. 천국 가는 사람은 그래서는 안 됩니다. 천국 가는 사람은 모든 것을 다 빼앗겨야 됩니다.
내 것은 나의 희생이 강조되지만 주의 것은 주님의 희생이 강조됩니다. 내 딸이 손녀의 동영상을 보내주는데 그것을 보면 아직 어려서 누워만 있지 뒤집지를 못해요. 그러나 조금씩 변화가 보여요. 전에는 웃지 않았는데 지금은 웃고, 몸을 파닥거립니다. 제 손녀가 몸을 움직인다고 세상이 달라집니까? 아니죠.
그러면 해답은 간단합니다. ‘주께서 파닥거리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성장한 후 내가 파닥거리므로 북한 핵문제가 해결되기를 기다리고 있어요. 우리는 어떤 행동을 하면 행동한 것만큼 변화가 오기를 기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양심껏 살았다.’ 이런 말이 굉장히 수상해요.
양심껏 살았으면 됐지 뭘 바랍니까? 양심껏 살았으니까 세상이 달라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양심’입니까? 세상은 주님의 희생으로 유지되는데 왜 내 희생을 첨가하려고 합니까? 이게 마귀 짓이 아니고 뭡니까? ‘기도했다.’ 뭘 어쩌라고요? ‘헌금했습니다.’ 뭘 어쩌라고요? ‘헌금했으니까 아이 성적 올라야지요.’ 이것이 언약입니까?
광야에서 굶주린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배불리 먹는 거예요. 그런데 배불리 먹고 일곱 광주리 남았어요. 이것은 사람들의 아이디어가 아니고 주님 아이디어입니다. 따라서 인간들의 생각대로 배불리 먹어도 이것은 사는 것이 아니고 죽은 것입니다. 진짜 사는 것은 주가 개입하셔서 일곱 광주리가 남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 우리가 얼마나 이기주의며 나밖에 모르는 자인지 폭로시키는 주님의 손길을 느끼는 자가 천국 가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대부분 사람들은 주님의 개입을 싫어합니다. 왜냐? 그냥 내 방식대로 살고 싶어요. 그리고 나의 것을 빼앗기기 싫은 거예요.
11절을 봅시다. “바리새인들이 나와서 예수께 힐난하며 그를 시험하여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구하거늘 예수께서 마음 속에 깊이 탄식하시며 가라사대 --”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하늘로서 오는 표적 구하는 것을 예수님이 왜 탄식하십니까? 표적을 구한다는 것은 ‘우리가 이해 못한 신기한 것을 원한다.’는 것이죠. 그러면 인간이 기대하는 신기한 것과 신기하지 않은 것은 무엇을 기준으로 나눌 수 있습니까? 신기하지 않은 것은 인간들이 해낼 수 있는 것, 가능성이 있는 것은 신기한 것이 아닙니다.
요즘은 문둥병이 치료도 되고, 예방도 됩니다. 그런데 옛날 성경이 기록될 당시에는 문둥병이 치료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문둥병이 낫게 된다면 그것은 신기한 일에 해당됩니다. 사람들이 교회 나와서 기도하는 목적이 뭡니까? 자기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은 대충 해놓고 자기 힘으로 안 되는 것을 기도해서 되도록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무당’이 하는 짓입니다.
무당은 세상 질서를 본인이 조절할 수 있다고 자부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내가 아니까 내가 원하는 식으로 제물을 바치고 정성껏 기도하면 하늘은 반드시 여러분이 원하는 것을 주십니다.’라고 사기 치는 자들이 무당입니다. 그럼 구약에 나오는 모세, 아브라함, 사무엘 이런 사람은 무당입니까?
무당이 아니라 선지자입니다. 그렇다면 무당과 선지자의 차이점은 뭡니까? 남는 것은 예상 못한 것입니다. 주님은 인간이 원하는 것을 경유해서 남깁니다. 배고픈 사람이 있습니다. 다 배불리 먹였습니다. 이것은 인간들이 바라는 것의 끝입니다. 그런데 먹고 일곱 광주리가 남았다는 것은 인간들의 아이디어가 아닙니다.
인간이 생각 못하는 것이 나왔다는 것은 인간들의 한계를 고발하고 지적하는 하나님의 작업입니다. 그래서 율법이나 기적 이 모든 것은 죄를 더욱 드러내는 기능을 발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요구를 들어주심으로 ‘얼마나 너는 네 생각에 빠져있는가?’를 고발합니다.
히스기야 왕이 죽을 병에 걸렸는데 기도하므로 15년 생명을 연장 받았습니다. 기적입니까? 15년 더 살아서 한 짓이 뭔가 하면 적국 사람들에게 무기고를 보여준 것입니다. 그 후 그 무기는 아무 쓸모없는 것이 되었어요. 적군에게 겁을 주려고 했던 그 무기를 제대로 사용도 못하고 나라가 망했습니다.
15년 더 살아도 별 소용이 없었습니다. 이 말은, 내가 기대한 것이 주님을 더욱 희생케 만드는 죄로 작용하고 있음을 성도는 뒤늦게 인정합니다. 우리가 막 사는 것이 주님의 희생으로 사는 것을 훼방하는 짓이 됨을 우리는 기쁨으로 인정해야 합니다. 만약 막 살지 않고 조심해서 살면 ‘내가 인생을 잘 사는 것은 내 하기 나름이다.’ 이런 식으로 모든 것을 인과관계로 이해합니다. 내 행동이 내 결과의 원인이라고 착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내가 원인이 되어 어떤 결과가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우리는 결과가 될 뿐 원인은 숨어 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 해석은 십자가 죽음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십자가 이후에는 환상이 있고 이전에는 역사가 있다면, 환상을 위해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역사를 아무리 유추해도 십자가에 막혀서 환상의 뜻을 알 수가 없습니다. 성령이 아니고는 환상의 의미를 알 수 없습니다.
표적을 구하는 바리새인들을 보며 예수님이 탄식하시는 이유가 뭔가 하면, 그들이 생각하는 기적은, 내 잘남과 나의 의를 유지하기 위해서 기적을 보기 원했고, 그런 기적을 주님이 행할 수 있다면 그 주님을 섬기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탄식을 했습니다.
누가복음 2장 34-35절을 보겠습니다. “시므온이 저희에게 축복하고 그 모친 마리아에게 일러 가로되 보라 이 아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의 패하고 흥함을 위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 되기 위하여 세움을 입었고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
하나님이 세우신 아기가 누굽니까? 예수님이죠. 예수님이 모든 사람의 흥함과 패함의 기준이 되는데 그 기능이 뭔가? 사람의 마음을 칼로 찌르는 식으로 기준을 세운다는 것입니다. 주께서 칼에 찔리면 우리도 바리새인처럼 ‘주여 기도 열심히 할 테니 제발 우리의 소원을 이루어주옵소서.’ 이런 식으로 평소에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데, 이처럼 주님의 탄식 소리가 들릴 때 주님이 우리를 찾아오신 것입니다.
늘 우리는 지적당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추석에 친척들과 장난삼아 화투를 쳤는데 100판 쳐서 100판 다 지고 잃은 돈이 16만원이었다면 화가 납니까, 안 납니까? 화나지요. 그런데 처음에 화투를 칠 때 뭐라고 합니까? ‘이건 아무것도 아니다.’ 라고 하지요.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왜 화를 냅니까?
아무것도 아니라도 여긴 것이 거짓말입니다. 우리는 내 안에 잠복되어 있는 십자가를 저항하는 다른 마음이 우리로 하여금 나를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그동안 힘들게 살게 했어요. 우리는 어떤 행동을 해도 내가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존재임을 드러내는 쪽으로 행동하게 되어 있어요.
아무것도 아닌 것을 위해서 힘써 전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나는 거지입니다.’라고 하는 사람이 많아요. 그런데 그 중 진짜 거지는 잘 없고 대부분은 자신이 더 많이 가지기 위해 거지라고 위장하는 거예요. 정말 아무것도 아닌 체 사는 사람이라면, ‘당신은 인간도 아니야.’ 이 말에 대해서 ‘정확히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렇게 되어야 하는데, 이것은 성령께서 이렇게 해 주실 겁니다.
‘왜 사소한 것이 목숨 거느냐?’고 이야기할 겁니다. 요즘 젊은이들에게 인기 있는 책 중에 [미움 받을 용기]라는 제목의 책이 있어요. 이 시대에 미움 받을 용기가 필요하다는 거예요. 미쳤습니까? 미움 받게. 미움 받을 용기가 없어요. 왜? 어릴 때부터 우리는 칭찬을 받고 자랐기 때문에 칭찬에 익숙하지 미움 받는 것은 용납이 안 됩니다.
따라서 우리를 대신해서 예수님이 바리새인에게 이야기를 한다고 보면, 결국 예수님의 죽으심은 오늘날 우리에 의해 싫어 버린바 되어서 돌아가신 십자가입니다. 그 십자가가 우리에게 찾아올 때는 우리가 바리새인이라는 것을 지적하며 찾아올 때 우리는 주님의 남은 자, 성도가 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내가 다 털릴 때 아찔하고, 조마조마하고 불안하고, 앞이 캄캄하고-- 평소에 우리는 그런 식으로 삽니다. 무슨 일이 생기면 안 된다는 불안감과 공포심. 이것을 이미 거쳤던 것이 십자가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6. 5. 17. 08:49 녹취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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