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서 160517
내 안에서 160517
이름 : 이근호(IP:119.18.94.40)
충성모(IP:14.♡.214.15)
16-06-03 14:17
요한복음 10장 30절(가락-내 안에서)160517a-이 근호 목사
요한복음 10장 30절에 엄청나게 간결하게 축약된 말씀이 나옵니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이 말씀 자체가 성립이 안 됩니다. 하나라면 나와 아버지라는 말을 하지 말아야 돼요. 둘이 되니까요. “내가 아버지다.”라고 하면 말이 되겠지요. 숫자를 사물에 붙일 때 그 사물은 두 개가 되면 안 돼요. 달랑 하나가 될 때만 숫자 1을 붙일 수가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남북이 한 민족이다.’라고 할 때 1자가 들어가잖아요. 그때는 개인을 하나하나 세는 것이 아니고 이념적으로, 관념적으로 우리는 한 민족이라고 할 때는 하나(1)라는 말을 거기에다가 붙일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내 남편하고 하나다.”라고 하는 말은 부부, 아내와 남편 말고 더 높은 차원의 둘이 합쳐서 하나가 되는 가정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마련할 때 거기에다가 1자를 붙일 수가 있어요. 애까지 합해서 4명이지만 우리는 하나라고 하는 것처럼 개인을 떠나서 추상적인 가정을 생각할 때는 그렇게 할 수가 있는 거에요. 가정은 사람이 아니고 추상 관념이지요. 사람에 대해서 “나와 아버지는 하나”라고 했을 때에 여기 우리 인간들 세계에서 하나라고 하는 것은 아까도 얘기했지만 추상적인, 초월적인(이것을 메타라고 합니다.) 어떤 개념이 하나 있어야 되는데 여기 예수님께서 나와 아버지를 하나라고 하실 때 이것은 사물에 붙이는 1은 아닙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면 이것은 어디에다가 붙인 것인가? 행함에 대해서 하나라고 붙인 겁니다. 행함을 다른 말로 하면 기능적으로 하나가 된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행함과 기능이라는 것의 영역은 어디에 해당되는가 하면 이 세상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 아버지와 아들이 하는 일이 하나가 되는 겁니다. 그리고 하늘나라에 가면 하나가 아니지요. 아버지 따로, 아들이 따로 있어요. 그러나 이 인간 세상에서는 아버지의 일과 아들의 일이 하나가 되는 거지요. 그런데 이렇게 하나가 된다고 언급하시는 이유가 있어요.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한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걸 단일신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단일신이라는 말을 하지 말고 유일신이라고 하는 게 더 좋아요. 유일과 단일이라는 말이 좀 다른데, 신이 하나밖에 없다는 뜻에서 단일신이고 독보적이라는 뜻을 쓸 때는 유일신이라고 씁니다.
너희들이 생각하는 신을 초월해서 너희들이 생각하는 그 신이 아니고 월등하게 모든 것을 전부 통합해서 하나밖에 없다고 할 때는 유일신이라는 말을 써야 합니다. 유일신을 신약의 용어로 하게 되면 (구약에도 나옵니다만) 주가 돼요. 오, 나의 주여. 주라는 말은 전쟁이 다 끝나고 난 뒤에 전쟁의 최종승리자에게 붙는 개념입니다. 모든 것을 다 평정한 거에요. 그래서 주가 되기 위해서는 앞에 전쟁을 하는 기능이 있고 전쟁을 할 때는 네가 옳다, 내가 옳다고 하다가 전쟁이 끝나버리면 최종승리자가 무조건 옳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승리했다는 것은 전쟁을 일으키는 그 영역에서 통치자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프로야구의 결승전에서 두 팀, 두산하고 한화가 붙는다고 합시다. (지금 꼴찌하고 있어서 한화가 붙을 가능성이 없지만..) 두산은 현재 1등이고 한화는 10등(꼴찌)이지만 둘이 결승전을 하고 있다면 둘 중에 한 팀이 우승자가 되겠지요. 그런데 만약에 두산이라는 프로팀이 우승을 하게 되면 대구에 있는 모든 토지와 제주도에 있는 섬은 다 두산 그룹의 소유가 됩니까, 안 됩니까? 안 되지요. 그들이 야구에서 1등을 했다고 나머지는 손을 대면 안 되겠지요. 야구에서나 최고지 바둑이라든지 회사 브랜드 중에서 최고는 아니잖아요.
그런데 신이 거론될 때는 그게 아닙니다. 옛날에 싸움을 할 때 신을 앞장세웠거든요. 네 쪽 신하고 내 쪽 신 중 누가 이기느냐에 따라서 “그래, 네 쪽 신이 이겼다.”라고 하면서 끝이 나는 게 아닙니다. 이긴 신이 저쪽의 신을 앞장세웠던 그 기존의 모든 것을 접수합니다. 신을 앞장세워서 모든 것을 가져가요. 출애굽기 잠깐 한 번 봅시다. 출애굽기 17장 16절에 보면 아말렉하고 전쟁하는 것이 나옵니다. 지팡이를 든 모세의 손이 올라가면 이기고 내려가면 지는 거에요. 모세의 손이 내려오지 말라고 옆에 아론과 훌이 손을 받쳐주었고 그래서 승리합니다. 이 대목은 교회에 좀 다닌 사람은 다 아는 유명한 대목이지요. 장로가 목사를 도와줘야 되지 장로가 이렇게 힘을 안 써주면 목사가 무슨 기분이 나서 하겠느냐. 목사는 모세고 장로는 아론과 훌이니까 장로가 옆에서 받쳐줘야 된다고 하거든요. 이번에 북한에 17차 전당대회할 때 35살 먹은 김정은이라는 애(?)를 60살 먹은 영감쟁이가 옆에 앉아서 아론처럼 받치는 모습이 나오잖아요. 이건 출애굽기 17장도 아니고..
모세를 받치는 게 아니고 지팡이를 받쳐올리는 겁니다. 그런데 15절에 보니까 싸움이 끝났습니다. 그리고 난 뒤에 그 이름을 여호와 닛시라고 했지요. 여호와 닛시라는 말은 여호와의 깃발이라는 뜻입니다. 깃발이라는 것은 (신의 표상처럼) 신이 계시면 그 신이 어떤 신이냐가 깃발로 상징이 되는데 그 깃발화된 단체가 지금 이스라엘, 우리 자신이라는 겁니다. 요즘 말로 하면 성도가 전부 다 주님의 깃발이에요. 우리 깃발을 막 날립시다. 여호와께서 전쟁을 하는데 이미 승리가 결정이 되고 난 뒤에 주님 쪽에서 자랑질을 하고 싶어서 흔들어 대는 깃발입니다. “보람찬..” 이런 노래를 부르면서 깃발을 흔들 듯이 우리의 모가지를 쥐고 흔드는 거에요. 이런 자도 아무것도 행한 것 없이 구원을 받았다고 깃발로 흔드는 거에요. 이게 여호와 닛시이고 이것은 전쟁이 끝났을 때 벌어지는 일입니다.
구약에서는 그 전쟁이 계속 있는 게 아니고 전쟁이 출몰해요. 그러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은 누구하고 전쟁을 해야 될지를 몰라요. 그때그때 달라요. 어떤 때는 블레셋이 쳐들어오다가 어떤 때는 아람이 쳐들어오다가 합니다. 어릴 때 물방개를 가지고 게임을 한 적이 있는데 (우리가 한 게 아니고 야마꾼들이요) 숫자를 만들어 놓고 돈을 걸고 물방개를 던지면 물방개가 자기 맘대로 가듯이 주님께서 옆에 있는 아람, 모압 등을 사용해서 물방개처럼 딱 떨어뜨리면 이들이 와서 전쟁을 해야 됩니다. ‘이번에는 블레셋을 한 번 집어넣어봐?’ 이렇게 하나님께서 적재적소에 전쟁을 하게 해서 잃어버렸던 여호와에 대해서, 하나님의 법의 약속에 대해서 되새기고 깨우치게 하는 기능을 하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실패의 반복을 통해서 장벽을 확장시키는 겁니다. 인생은 실패를 함으로써 내 힘으로 구원이 되지 않았다는 것을 성도에게 확인시켜 주는 겁니다. 그 실패는 성도 본인의 실패입니다. 성도는 매일같이 실패를 안 한 날이 없어요. 늘 실패해야 돼요. 사람이 실패를 안 하게 되면 이 사람은 하나님을 잊어버려요. 실패를 안 함으로써 하나님의 구원방식을 잊어버려요. 따라서 실패를 안 하게 되면 내가 생각하는 구원의 방식을 밀어부칠 가능성이 많습니다. ‘내가 이 정도로 착하니 누가 뭐래도 구원을 받겠지.’ 그것을 실패해야 됩니다. 그게 실패의 근거가 돼요. 그게 실패로 끝나야 돼요. 착하다고 자부하고 완벽하다고 자부했는데 그 완벽이 우연히 들이닥친 상황을(구약에서는 전쟁이지요.) 통해서 자신의 뻔뻔스러움과 위선적이고 가증스러운 면이 남들은 모르지만 본인은 그것을 얼굴이 뜨겁도록 느끼는 겁니다. 그럴 때 ‘아, 구원이라는 것은 내 손으로 달성되는 게 아니구나.’ 다시 되새기게 되는 겁니다.
이걸 제가 방금 실패라고 했지요. 그런데 실패라는 말보다 더 확실한 단어를 쓴다면 그것은 창피입니다. 누가 누구한테 창피하느냐 이 말입니다. 내가 나한테 창피스러워요. ‘이런 인간도 산다고..’ 하면서 자기가 자기한테 쥐어박는 겁니다. ‘아이고, 인간아. 너 왜 사니?’ 그런 생각이 드는 거지요. 표정들을 보니까 그런 경우가 거의 없습니까? 다들 지금 대범하시네요. 다이어트 한다고 그렇게 관리했는데 맛있는 피자를 한 판 먹고는 ‘인간아, 왜 사니?’라고 하면서 체중계에 또 올라가봐요. 그런데 몸무게는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몸무게는 주신 대로 다 보여주지요. 날마다 자기에 대해서 창피스러워야 됩니다.
그래서 우리교회에도 하나의 제도라고 해야 할까, 그런 것이 있는데 그것은 오후예배 때에 돌아가면서 기도하는 거에요. 그런데 대부분 안 합니다. 대부분 제가 혼자 기도 제목을 드리는데요. 웃지 마세요. 여러분들도 우리교회에 오시면 전부 다 안 할 겁니다. 그런데 왜 안 하느냐 하면은 공중 기도를 하게 되면 자신의 일대기가 나와요. 내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았는지가 나와요. 물론 이것을 안 들키게 다들 골라서 합니다마는 교회에 오래 다닌 귀신들이 귀신같이 알아내요. ‘고생 많이 했구나. 가정 사정이 안 좋구나. 오늘 남편하고 싸우고 왔구나. 자식이 말을 안 듣다가 사고쳤구나.’ 이런 것들이 나와요. 어떻게요? 억양을 통해서. 단어 선정을 무심코 하거든요.
그래서 일반 교회에서는 자기의 일대기를 감추기 위해서 틀에 잡힌 기도를 해버려요. 남북통일부터 해가지고 당회와 어린아이까지, 그저 대통령이 정치를 잘하고 세월호 아이들로 인해 걱정하는 부모들은 위로를 받게 해달라고 (착한 일 다한다고 거기까지 신경을 쓰고요) 하지요. 일대기로 하는 거에요. “우리 교회 부흥되게 해주시고 하늘나라를 확장시켜 주시고 전부 다 성령이 충만케 하시고”라고 하지요. 그런데 만약에 어떤 분이 우리교회에 와가지고 남북통일과 국제 평화를 이야기하고 그저 반기문 총장이 빨리 우리나라의 대통령이 되게 해달라는 식으로 기도한다면 아멘은 안 나오고 속으로 우우우.. 하겠지요. 왜냐하면 뻔히 알거든요.
그러면 자기의 이야기를 해야 되는데 자기의 이야기를 하게 되면 단어의 강조점이 다르고 자칫하면 울컥하는 수가 있어요. ‘저 사람은 또 뭐지? 집에 일이 있구나.’ 그렇게 되면 다 들킨 거잖아요. 그러면 결국 창피하잖아요. 그런데 창피해야 돼요. 창피하라고 그 제도를 만들어놨는데 전부 다 이 창피의 올가미에 안 말려들려고 하는 거에요. 인간의 모든 행동과 그 사람의 과거사가 다 드러나게 되어 있어요. 인간의 무심코 하는 행동 이런 것들이요. 다시 말해서 나는 무엇에 더 관심이 있고 무엇에 신경을 바짝 쓰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들통이 난다고요. 다른 것에는 내가 관심이 없는데 이것에 대해서는 내가 유난을 떨면서 거기에다가 바짝 신경을 쓴다는 것이 다 드러납니다.
그게 왜 창피스러우냐 하면은 예수님이 성경을 보는 관점과 다르기 때문에 그래요. 아까 기도할 때 자기의 일대기가 나온다고 했잖아요. 정답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성도의 일대기에는 본인의 일대기가 나오면 안 돼요. 예수님의 일대기가 나와야 됩니다. 이순신 장군의 귀신이 들린 사람은 무슨 일대기가 나오겠습니까? 이순신의 일대기가 나오고 안중근을 모시는 무당은 안중근이 나올 거란 말이지요. “어이, 일본아 물러가라.” 이런 식으로 할 거다 말이지요. 예수님의 일대기에는 이미..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늦게 오신 분이 있어서 다시 하겠습니다.) 지금까지 한 것을 다시 해보겠습니다. 하다 보면 자꾸 잊어버릴 것 같아서 내가 걱정이 돼서 말합니다.
“나와 아버지가 하나”라는 것은 존재론적으로 하나가 아니고 기능적으로 하나에요. 그런데 그 기능은 하늘나라, 아버지와 아들이 계시는 곳이 아니고 이 땅에서 하나에요. 하나라는 것은 기능적으로 하나가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기능적으로 전체가 하나가 되려면 이것은 최종적으로 하나가 될 경우입니다. 최종적이란 말은 그 전에 전쟁을 치뤘고 전쟁을 하고 난 뒤에 전쟁이 끝났을 때 제대로 최종 승리는 이분이다라고 할 때 그가 주님이 되고 그 주님에 의해서 발생 된 것이 여호와 닛시라는 뜻이에요. 논리가 그렇게 되는 겁니다. 지금 논리가 정리정돈이 좀 되었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여호와의 깃발이라고 할 때 그 깃발은 자기 힘으로 승리해서 얻은 게 아니잖아요. 한 번 쓸게요. 오늘 제목을 이것으로 할까.. 아니잖아요. 뭐가 아니라는 말입니까? 내가 아말렉을 이긴 게 아니잖아요. 아까 출애굽기 17장에 여호와 닛시라고 나오잖아요. 여호와의 깃발이 있을 때 우리는 깃발을 드는 사람인데 만약에 그 깃발을 드는 사람이 “아우, 팔 아파라.”라고 한다면 그것은 안 된다는 말이지요. 아론과 훌이 모세의 팔을 들어서 이긴 것입니까? 옆에 있는 아론과 훌이 이긴 거에요? 아니지요. 그러면 모세가 이긴 거에요? 아니지요. 지팡이가 이긴 거잖아요.
왜냐하면 아차피 결과적으로 이스라엘의 모든 사람, 모세부터 아론, 훌, 여호수아까지 여호와 닛시라는 개념 안에 포착이 되어야 돼요. 거기에 함몰이 되어야 된다고요. 그러면 나중에 여호와의 닛시가 되어 최종적인 승자가 되면 그들이 한 일, 모세는 지팡이를 올리고 아론과 훌은 옆에서 걸치고 받치고 한 모든 일이 승리의 요소에 개인적으로 들어갈까요, 안 들어갈까요? 개인적으로 들어가면 안 되지요. 그건 자기의 깃발이지 여호와 닛시가 아니잖아요. 이미 여호와의 깃발이지 내 깃발이 아니다 이 말이지요.
자기가 따로 ‘대한민국 만세.’라는 자기의 깃발을 만들어서 밑에다가 숨겨 놓았다가 내놓지는 않는다는 말입니다. 지난 번 우리교회 낮 설교 시간에 동영상이 안 되었잖아요. 그런데 동영상 두 개가 올려져 있지요. 어떻게 했습니까? 제 아내가 급해가지고 생각해서 스마트폰을 들고 생중계되어 나오는 화면을 찍은 거에요. 그렇게 하니까 팔이 아파가지고 오른팔로 찍다가 왼팔로 돌리고 다시 오른쪽으로 찍다가 또 왼쪽으로 바꿔가면서 무려 50분 동안 촬영한 거에요. 그래 가지고 두 편의 동영상이 나왔어요. 그러면 제 아내만 여호와 닛시입니까? 그렇게 되는 거에요. 고생했지요.
그 고생했다는 인식 자체가 되어 버리면 그때는 기능이 하나가 아니고 둘이 되어 버린 다고요. 주님도 고생했지만 나도 고생했다가 되어 버리면 이 땅에서 숫자 1이 아니고 2가 되어야 돼요. 주님도 하고 나도 하고 이렇게 2가 되어 버린다고요. 그런데 우리가 무슨 행동을 하게 되면 우리는 우리가 한 행동을 잊을 수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잊을 수가 없어요. 오른손이 한 행동을 무슨 수로, 어떻게 왼손이 잊습니까? 잊지를 못해요. 기억이라는 기제가 있기 때문에 잊지를 못합니다. 알파고라면 잊을 수 있어요. 부속판에서 부속을 하나 빼버리면 잊어버려요. 그러나 우리는 인공 기계가 아니잖아요. 그래서 우리 인간이 기계가 되지 못하는 거에요. 잊지를 못해서요. 수술을 하든지 해서 해마에 연결되어 있는 편도체 부분을 다 도려내든지 해서 무슨 조치를 하든지 해야지요. 그런데 이것을 빼내면 온 두뇌에 기억이 편재하게 되어 있어요.
이것이 두뇌 학자들의 고민이에요. 기억 대부분을 자르면 기억이 없어질 줄 알았는데 실험을 해보니까 기억이 있다는 그것이 분명히 기억에 심화 되고 전극선 자극이 활발한데 이것(편도체)을 떼니까 기억이 온 두뇌로 퍼져버렸어요. 뭐 인간인지, 괴물인지 인간을 분석하면서도 인간인 자기가 누구인지를 모를 정도에요. 그런데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인간은 자기가 한 행동을 잊지를 못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실패해야 돼요. 그런데 실패했으면 “실패했습니다.” 그러면 주께서 “너는 실패한 것이 뭐 자랑인가? 되게 당당하네.”
실패했으면 어떻게 해야 돼요, 우리의 감정은.. 창피해야 되잖아요. 실패했는데 창피로 넘어가면 신자고 안 그러면 신자가 아닙니다. “할렐루야! 주여, 부족합니다.” 이 사람은 신자가 아니에요. 왜냐하면 이것은 권력이에요. 이걸 다른 말로 하면 영발이라고 합니다. 이런 영발은 인간의 반복 행위에 의해서 인간에게 세뇌가 강화될 수가 있어요. 이걸 다른 말로 하면 주술이라고 합니다. 주술은 체험의 습득이에요. 군에서 많이 하는 거지요. ‘안 되면 되게 하라.’ 습득이에요. 군대는 장정을 군인으로 바꿔요. 뭘로요? 체험의 습득으로요.
보통 그냥 청년들이 유격훈련 할 일이 없고 각계전투 할 일이 없고 화생방 할 일이 없고 제식훈련 할 일이 없고 내무반에 가가지고 기합하고 전보 받을 일이 없잖아요. 군인이 뭡니까? 내무반에서 점호 받고, 그 다음에 유격훈련과 화생방을 하잖아요. 이것이 다 있어야 군인이지 내무반에서 점호를 안 받는 군인을 쉬운 말로 방위라고 합니다. 현역들은 방위를 군인이라고 취급을 하지 않습니다. 도시락 갖고 직장 생활하는 거지 그게 뭐에요. 5시 딱 되면 퇴근해가지고 당구장에서 당구 치고 있는데 그게 무슨 군인이냐 이 말이지요.
군인 생활은 업무가 끝나는 게 아니고 업무시간이 끝이 안 나요. 24시간 군인이어야 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힘든 거에요. 그런데 그 군인이 제대할 때가 되면 아쉬워가지고 말뚝, 말뚝이라고 합니까? 어떻습니까? 제대할 때가 되면 달력이 시커멓지요. 가위표 치고 모자도 삐딱하니 써보고 농땡이도 한 번 부려보고 그러지요. 말년에는 그렇지요. 그렇게 하는 이유는 빨리 빠져나가고 싶다는 거에요. 그 말은 체험된 습득을 빨리 탈퇴하고 싶다는 거에요. 이게 마태복음 11장 마지막에 나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군대 병장 말년 군인만 제대하면 행복은 절로 오는 것처럼 그렇게 생각들을 하잖아요.
그래서 성경에서도 우리가 이 땅을 나그네 생활이라고 하면서 그 동안 우리가 살았던 이 모든 무거운 짐들을 다 벗어버리라고 하잖아요. 그게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 세상은 우리의 본질에 맞지 않는, 악마한테는 맞지만 천국에서는 안 맞는 온갖 것들이 짐으로 꽉꽉 누적이 되어 있어요. 제대 말년에 유격훈련 소집을 받아보세요. 기분이 되게 나쁩니다. 제대를 일주일 남겨놓고 삼일 동안 유격훈련을 받으라고 하면요 진짜 탈영하고 싶다고 하는 사람도 있어요.
무수한 무거운 짐들을 벗어버려야 되잖아요. 그런데 그 동안 우리는 본질은 천국 백성이면서도 타인의 욕망, 타인의 시선, 타인의 평가가 그저 죽자사나 영원토록 이 세상의 사람으로 계속 강요당하고 있으니까 우리가 격이 안 맞는 짐으로 인해 얼마나 힘이 들겠어요. 그래도 우리가 모든 짐을 벗어버리고 천국에 간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우리가 정리해야 되는 것은 뭡니까? 천국에는 안 맞고 이 세상에는 적합한 게 뭘까를 알아내야 되지요. 천국에 가면 벗어버려야 될 것, 그렇지만 이 세상에서는 계속해서 강요당하는 그 무엇이 무엇이냐 이 말이지요. 그게 무엇일까요? 알려 드려요? 그건 바로 요한복음 10장 30절과 안 맞는 거에요. 요한복음 10장 30절은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입니다. 바로 이 세상의 무거운 모든 짐은 “아버지 따로, 나 따로”라는 의식이 유발시킨 것입니다.
주께서 이 정도까지 해주시고 거기에 대해서 내가 이 정도까지 나서게 되면 둘이 아다리가 되어 가지고 합쳐서 구원을 받는다는 생각, 그게 바로 아버지와 나는 하나라는 원칙을 어떤 인간도 지금 지켜내질 못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주께서 이만큼 해주셨기에 우리는 마음에 감동을 받아서 보답하는 양, 또는 은혜를 받았다는 티를 내면서 “이 정도까지는 성의를 표하겠습니다.”라고 하면서 내미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 버리면 예수님과 우리는 하나가 아니고 숫자로 2가 돼요. 그것은 나한테 무섭고도 무거운 짐으로 작용하는 겁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왜 그런 무거운 짐을 계속 짊어지고 가는 겁니까? 그건 아까 제가 무엇 때문에 그렇다고 했습니까? 이 세상에 살면서 창피를 느끼는 겁니다. 왜 우리는 남들이 시키는 대로 안 하면 창피를 느끼고 남하고 똑같이 안 하면 외로움을 느끼고 상당히 쓸쓸하게 느낍니까? 이것은 어릴 때부터 우리의 자아 속에 타인의 욕망, 욕심이 가득 담겨서 그래요. “너는 4등하면 죽어.” 이게 가득 담겨 있어요.
아까 식사할 때 이야기했지만 ‘4등’이라는 영화가 있답니다. 애가 수영을 하는데 코치가 애를 줘패는 거에요. 그런데 코치가 때려도 엄마의 자기 욕심에 ‘저 애가 1등을 해야 되는데.. 1등이 되어야 되는데..’ 그런데 1등을 못하고 2등이 되었는데 엄마가 얼마나 좋아하는지요. 영화의 주제는 인간의 욕심에 대해서인데 그 욕심이 자식을 죽이든지 살리든지 관계가 없이 자식은 나의 욕심의 열매로서 있는 거에요. 그럴 때 그 자식 안에는 엄마의 욕심이 들어있고 자기의 생각은 거기에 안 들어있는 거에요. 맨날 눈치를 보는 거에요. “엄마 이렇게 하면 옳아? 저렇게 하면 옳아?” “안 돼.” 또는 “돼 그렇게 해.” 이런 식으로 자식에게 하는 거에요.
그런데 만약에 위배가 되면은, 창피도 창피지만, 이걸 더 포괄적인 의미로 해석하면 불쾌감을 유발하게 되어 있어요. 어릴 때부터 그런 식으로 세뇌를 했기 때문에 커가면 불쾌감이 생겨버려요. 이 불쾌감을 한 글자로 악, 죄, 또는 벌이라고 해요. 또는 이것을 더 심한 말로 저주, 심판으로 간주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악과 죄와 벌, 저주, 심판의 반대말이 뭐겠어요? 이 불쾌감이 이렇다면 반대말은 뭐겠습니까? 상쾌, 유쾌, 즐거움인데 이것이 축복이고 이게 나에게 진리가 되어버려요. 진리가 되어 버린다고요.
그러면 유쾌하게 되는 방법은 간단해요.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셨잖아요. 그때 성령께서 일부러 불쾌하게 만들었어요. 40일 동안 굶게 했잖아요. 배고프면 얼마나 불쾌한지 몰라요. 그런데 거기에 반대 급부로 마귀가 제공하는 게 뭡니까? 그 불쾌를 유쾌로 바꿀 수 있는 요건을 제시합니다. 떡을 먹고 배가 불러야 네가 주의 일을 한다는 거에요. 그리고 네가 기적을 베풀어야 네 교회 목회를 성공한다는 겁니다. 어느 교회에 기적이 일어났다는 소문을 들어보세요. “소문 듣고 왔지롱.” 해가지고 전국에서 다 와요.
대구의 갓바위가 왜 그렇게 11월달에 비좁은데요. 세 가지 중에 한 가지는 들어준다고 소문이 나가지고 전라도 쪽으로 부산 쪽으로 전국에서 다 오는 거에요. 그 갓바위에요. 갓바위 수입이 조계종 본사 수입과 맞먹어요. 바로 그게 마귀가 그렇게 한 거에요. 위에서 뛰어내리면 인기가 있고 인기가 있으면 진짜 메시아다. 우리의 병을 낫게 해주고 기적을 베푸는 그런 메시아상을 지금 이 세상에서는 다들 기다리고 있는 거에요. 그런데 예수 당신이 그런 기적을 베풀게 되면 기적을 받은 자가 기적을 베풀 수 있는 자격자라는 인식이 있기 때문에 대환영할 테고 그렇게 되면 당신이 목회하는 데에 훨씬 도움이 되니까 그렇게 하라고 하는 거에요.
세 번째가 뭐에요? 인간의 욕망은 그것으로 성에 찹니까? 인간의 욕망은 눈에 보이는 땅끝까지 전부 다 차지하는 거에요. 그럴 때 유쾌해지지요. 왜 이런 조건들, 돈과 인기와 권력이 유쾌의 조건이 되느냐 하면은 우리 속에 있는 악마가 하나님께 대든 이유가 있어요. 살림을 차리고 따로 살겠다는 거에요. 하나님의 지시와 간섭이 없는 곳에 따로 살겠다는 겁니다. 여러분 마귀가 한 번 보고 싶어요? 녹색 날개 달고 인상을 쓰고 눈이 쫙 째져가지고 얼굴이 벌개서 가시 달린 날개를 퍼득퍼득 거리면서 다닌다고 자꾸 그렇게 생각하는데 성경의 마귀는 양의 탈을 썼다고 했어요. 무슨 뜻이냐 하면은 자체적으로 갖출 것을 다 갖춘 것, 그것이 우리의 모델, 이상형이 된다고요.
그걸 자아이상이라고 하는데요. 어릴 때부터 부모는 자식들에게 부모가 원하는 욕망의 모델을 대물림해서 자식에게 그걸 계속 강요한 거에요. 내가 못 되었던 한을 네 대에서 좀 이루어달라는 거에요. 내가 못생긴 남자를 만났으니까 너는 절대로 못생긴 남편을 둬서는 안 된다고 딸에게 강요하고, 네 아버지 만나가지고 개 팔자가 됐으니까 너는 절대로 공부 열심히 해가지고 두 번 다시 내 전철을 밟아서는 안 된다, 이런 식으로 그걸 계속해서 엄마가 자식한테 계속 시키는 그것이 유아 정신 발달의 제일 초기에 일어나는 일이에요. 6개월에서 18개월 그 사이거든요.
그런데 그렇게 애는 무조건 엄마가 시키는 대로 엄마의 욕망이 내 욕망이라고 했는데 나중에 보니까 그 엄마가 아빠한테 지는 거에요. 그러니까 얘가 눈치를 보는 거에요. ‘어느 편에 서면 나한테 유리할까?’ 그러면서 아빠 편에 서는 거에요. 이걸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고 하는 겁니다. 보다 센 쪽에 붙는 건데 그것이 바로 여성에서 떠나서 남성에게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아버지를 라이벌로 여길 수밖에 없는, 아버지가 자기의 모델이면서도 라이벌이 될 수밖에 없게 되는 겁니다. 왜 이 이론이 정당하냐 하면은 모든 동물은 생식 본능이 가장 기본적인 본능입니다. 왜냐하면 인간 두뇌의 제일 밑에 있는 두뇌가 파충류의 두뇌라고 합니다. 그저 충동이 막 일어나는 겁니다. 아메바 같은 것 있잖아요. 아메바에게 아이큐라는 것이 없는데 그래도 새끼만 잘 까지요. 그리고 개구리의 아이큐가 얼마에요. 닭이 바보라고 닭대가리라고 하는데 바보인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만...
아이큐라는 것은 대뇌 피질에서 결정하는 것이고 인간 속, 제일 깊숙한 곳에 파충류의 뇌가 있는 거에요. 거기에서부터 일어난 충동이 크면서 서서히 없어지지만 영원히 인간의 두뇌 속에 박혀있는 거에요. 두뇌가 발달하면서 외부에서 오는 훈계와 양육에 대한 모든 잔소리는 대뇌 피질에 퍼져 있습니다. 이게 나만의 양심이 되고 나만의 윤리와 도덕이 되는 거에요. 그래서 윤리와 도덕을 계속해서 의식하고 살아가는 거에요. 그 윤리와 도덕은 누구의 것입니까? 아버지 대와 엄마 쪽의 윤리와 도덕을 계속해서 우리가 간직하고 지키는 거에요. 그러니까 그 집안을 봐야 자식을 안다고 하는 말이 맞는 말이라니까요.
그런데 이런 식으로 살아가는 것을 성경에서는 한 마디로 육이라고 이야기해요. 창세기 6장에서 육이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성신은 육과 안 논다고 했습니다. “내가 그들과 함께 있지 않는, 그들과 하나가 되지 않는, 그들과 각자 따로 노는 이유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육체가 되었다는 말은 창세기 6장에 보면 불만족이에요. 여기 창세기 6장을 한 번 봅시다.
창세기 6장 5~6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이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라고 되어있는데요, 하나님의 불만족입니다. 쉽게 말해서 이 땅에 메시아가 오신 것은 그 불만족의 장벽을 더욱 더 밀어붙이기 위해서 오신 겁니다. 불만, 불만, 불만, 해가지고 장벽을 밀어붙이는 거에요. 그러니까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으니까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자, 기쁘게 해드리자, 기쁘게 해드리자.라고 나오겠지요. 성경에 나오는 어떤 구절을 하더라도 그 기쁘게 해드리자는 것이 인간이 갖고 있는 불쾌와 유쾌의 감정을 못 벗어나는 거에요.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선교 단체에서 대학교에 전도를 할 때 꼭 이쁜 아가씨한테만 전도한다니까요. 조건이 그거에요. 못생긴 것들한테는 전도의 기회를 박탈시켜 버려요. 지옥가라는 말인지 뭔지는 모르겠는데 꼭 이쁘고 목소리가 방울 같고 옷 입은 것을 보면 좀 사는 집 같고 다소곳하고, 물론 취향에 따라서 다르겠습니다마는.. 그것은 전도하는 게 아닙니다. 작업 거는 거에요. 전도를 빙자한 작업입니다. 유쾌와 불쾌 때문에 모든 가치를 그렇게 결정한 거에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너희들이 실패를 해야 된다는 거에요. 바로 그와 같은 본성 때문에 실패에 실패를 거듭해서 실패를 아예 현실화, 실패를 일반화시켜야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라는 말은 “짐 있지, 그렇지? 짐 없는 사람은 없지, 그렇지? 짐이 왜 생긴 줄 알아? 네가 짐을 유발해. 하지만 나를 배워라.”라는 뜻입니다.
주님은 어디에서 왔습니까? 주님은 하나님 따로 주님 따로가 아닙니다. 그건 마귀의 생각이지요. 마귀의 생각은 하나님이 계시고 우리는 우리 따로입니다. “내가 건전하게 살 테니까 건전한 것만 나중에 “참 좋다.”고 추임 해주시면 우리 둘이 천국에 가서 잘 삽니다.” 이게 인간들의 아이디어에요. 그런데 마태복음 11장에서 주께서 하시는 말씀은 아예 인간 자체의 행함을 전부 배제해버립니다. 완전히 보지도 않아요. 마태복음 11장을 한 번 봅시다. 말로 하는 것보다도 실제로 보는 게 좋겠지요. 11장 25절~27절을 누가 한 번 읽어보세요.
“그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라고 했지요. 무엇을 배제하는 거에요? 네가 나에게 나올 수가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소원대로 구원할 자에게만 내가 너희에게 이 지혜를 지혜답게 알 수 있는 안목을 허락하지 그 외의 사람에게는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라는 말은 노동자 계급을 해방하라는 그런 뜻이 아니고 이미 하나님의 성령을 받고 나게 되면 짐이 무엇인지, 도대체 그동안 내가 어떤 식으로 스스로 짐을 자초했는지, 어떻게 창피스러움과 스스로 자기가 자기한테 짜불리고 찌그러진 인생을 자진해서, 참 어리석게 바보처럼 매일같이 되풀이를 해왔는지를 알게 되는 거에요.
그럴 때마다 그 짐을 가지고 누구한테 오겠어요? 주님께 오겠지요. 이 말은 자기가 자기 인생에 대해서 포기를 해야 된다 이 말입니다. 내 인생을 내가 건사하고 내가 거둔다는 생각을 완전히 포기해야 돼요. 자기 관리, 자기 절제를 완전히 포기해야 돼요. 자기에게 손을 떼야 됩니다. 진짜 자기라는 회사가 부도나야 됩니다. 구조조정도 할 필요가 없어요. 그냥 파산신청만 하면 돼요. 이 파산신청을 다른 문자로 이렇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신체포기각서입니다. “간을 떼든지 신장을 떼든지 뭘 떼든지 주님 마음대로 하시옵소서. 아들을 죽이든지 남편을 죽이든지 마음대로 하옵소서.” 만약에 이걸 하지 않으면 짐은 여전히 쥐고 있는 거에요. 그러면 그 반대급부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너의 유쾌와 불쾌와 무관하게 축복을 주시는 겁니다. 그러면 이미 축복을 주신 자가 되어 버립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은데 이것을 설명하고 첫째 시간을 쉽시다.
인간이 힘들 때 어디로 피신하겠어요? 제가 객관식문제를 내겠습니다. 1. 노래방, 2. 찜질방, 3. 친구와 수다떨기, 4. 과거로. 몇 번입니까? 과거로 가요. 물장구 치고 다람쥐 쫓던 과거로 가요. 옛날에 듣던 음악을 들으면서 잠시 과거로 돌아갑니다. 그거 안 됩니다. 과거로 돌아가면 전혀 해결이 안 돼요. 그러면 왜 미래로 가지 않느냐? 미래는 자기가 지어내는 것도 힘들고 지어내봤자 그것이 다 무산이 되는 것을 뻔히 알기 때문에 너무 허황되어서 안 되고 이미 자기가 체험한 것이 있어요. 그것은 과거에요. 어린 아이이기 때문에 주변에서 무조건 사랑을 해줬어요. 우야우야 해줬고 이뻐해줬고 어떤 실수를 해도 용납이 되었고 특히 기본적으로 먹을 것과 입을 것이 부모로부터 제공되었어요. 숙제만 하고 놀기만 하면 되었지 밥벌이까지 생각할 필요가 없거든요.
그래서 이렇게 살다가 힘이 들면 다시 옛날로 돌아가는 겁니다. 이것을 가지고 정신분석학에서는 퇴행이라고 합니다. 퇴행의 특징은 유니폼입기에요. 유니폼입기는 바비인형을 갖고 노는 거에요. 왜 유니폼입기냐 하면은 옛날 어릴 때는 획일적이잖아요. 유니폼을 입은 사람은 두 부류밖에 없었어요. 하나는 스님이고 하나는 신부입니다. 이들이 둘 다 정신적으로 퇴행한 자들입니다. 요새는 목사도 이것을 따라하는 사람이 있어요. 흔히 말해서 장군따먹기하고 골목대장놀이하는 거에요. 골목대장이 나오면 갑자기 불쾌가 유쾌로 바뀌어요. 골목대장이 나오면 기쁘잖아요. 골목대장도 유쾌하지만 음악대장도 굉장히 기쁘게 해요. 복명가왕 나오는 것을 보면 기뻐요. 이걸 8년씩 해요.
그런 예능 프로가 또 있는데, 1박 2일이 뭡니까? 어른을 애로 만드는 거에요. 삼촌들이 아이들로 나와가지고 위, 아래, 위, 아래 하는 것을 왜 그렇게 좋아하느냐 하면 아무 고생 없이 현실에서 도피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그런데 성경은 과거로 돌아가면 안 돼요. 어디로 가라고 하느냐 하면은 정답 5번인데 예수 안으로 가라고 합니다.
그 다음은 아버지와 예수님이 하나라고 했는데 하나라는 것은 처음에 제가 기능이 하나라고 했지요. 예수님과 아버지의 하나의 기능에 우리가 아무리 수백 명이 끼어들어도 우리는 동일한 대우를 받아요. 직업과 나이와 행함과 교도소에 몇 번 갔다왔느냐 간음, 살인, 어떤 것을 해도 이 안에서는 전부 묻지도 따지지도 않습니다. 현장에서 간통하다가 잡힌 사람도 예수님께서 다 알아서 처리하는 겁니다.
더 엄격하게 말해서 현장에서 간음한 아줌마에게 주께서 그렇게 하도록 시킨 거에요.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됨을 위해서 주께서 그렇게 하게 하신 겁니다. 제 말이 좀 심했어요? 해도 해도 갑자기 너무 선 밖에 나가버렸습니까? 아닙니다. 모든 것이 그래요. 모든 것이. 그래서 그 간음죄를 용서받으면 그 아줌마는 구원을 받지 못해요. 내가 지금껏 태어나서 살아온 모든 것이 한꺼번에 용서받은 것으로 해줘야 그 사람은 예수 따로, 나 따라고 아니라 예수 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되면 아까 기도할 때 무엇이 나온다고 했지요? 일대기가 나온다고 했지요. 그 사람은 자기의 일대기가 아니고 예수님과 하나 되게 만들었던 일대기가 나오지요. 주께서 이렇게 하셨고 주께서 이렇게 하셨고 주께서 10살 때는 이렇게, 20살 때는 이렇게 하셨고.. 결국 지금 이 자리에 와서 그 모든 죄를 용서하셨고.. 결국 남는 것은 주님의 공생애만 그 사람 속에서 발현이 될 때 그게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한다는 말에 해당되는 겁니다. 내가 진리를 소유하는 게 아니고 진리가 너희를 진리로 티나도록 활용한다는 뜻이에요. 진리가 무엇이며 자유가 무엇인지를 드러내기 위해서 나는 너를 특별히 채용했다는 그런 뜻이에요. 그게 바로 요한복음 8장에 나오는 성도라는 거에요. 이제 10분 쉬고 이 요한복음 10장의 하나됨의 말씀과 요한복음 5장에 나오는 이것과 비슷한 말씀이 어떻게 연관이 되는지를 생각해봅시다.
충성모(IP:222.♡.181.154)
16-06-07 06:10
요한복음 10장 30절(가락-내 안에서)160517b-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을 시작하겠습니다. 여기 오늘 10장 34절~36절에 보면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율법에 기록한 바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 하물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가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는 것으로 너희가 어찌 참람하다 하느냐”라고 되어 있지요. 주석책에 보면 이것을 사람들은 이렇게 해석하고 있어요. ‘아, 인간은 인간이 아니고 신이구나. 성경에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사람들을 신이라 했기 때문에 말씀만 받으면 신이구나.’ 그러니까 김신, 박신, 최신이 되겠지요. 장신이고 황신이고 총신이고.. 하여튼 신들의 파티, 전부 다 신들처럼 행사한다. 이렇게 주석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주석을 하면서 여기에서 더 큰 문제가 생겨요. 비록 우리가 인간이었지만 결국 하나님이 말씀을 준 것은 인간의 위치에서 신격화시키기 위해서 말씀을 주었다고 결론을 내려요. 목표가 생겨버렸어요. 인간에서 출발해서 절대자가 되기까지 신이 되는 그것이 기독교의 이 복음을 주신 이유이고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이것이 목적이 되니까 신이 되는 조건이 궁금하겠지요. 신이 되는 조건은 신의 형상을 입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의 형상을 닮으면 닮을수록 점점 더 신이 된다. 이렇게 결론을 내립니다.
신이 된다고 했는데 그러면 신의 모습이 어디 있느냐 ‘에베소서 5장에 “거룩하라”라고 했고 베드로전서 2장에 보면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라고 했으니까 경건과 거룩과 선한 일을 극대로 보이게 되면 어떤 신의 경지에 들어서는구나.’ 이렇게 되어 버려요. 그런데 신의 경지에 들어섰다고 치고 약간 곁눈질해서 밑을 바라보다보면 헉헉거리고 아직까지 올라오려고 애를 쓰는 사람이 있잖아요. 그러면 그 자체에 계급이 발생되는 겁니다. 높은 경지에 있는 사람과 낮은 경지에 있는 사람, 내신 성적이 차이가 나요. 그러면 교회에 계급이 발생되겠지요.
그 발생된 계급을 구체적으로 표시한다면 목사가 제일 높고 목사 밑에는 장로, 부교역자는 목에서 삐져나와야 되겠지요. 흔히 목사에서 장로로 내려가는데 그 사이 목에서 삐져나와서 부목사, 부목사 밑에 전도사(총리직할)가 있고요 그 다음에 장로 밑에 장립집사, 집사이고요, 장로에서 따로 삐져나와서 권사인데 권사는 보통 집사에서 올라오고 집사 밑에는 보통 세례 받은 성도이고 그 밑에는 학습 받은 성도이고 그 밑에는 초신자라든지 드문드문 오는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조직도를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면 교회에 나오는 목표는 뭡니까?
처음에 1단계는 9급 공무원이고 2단계는 7급 공무원으로 계속 승진을 해야 되는데 올라갈 때마다 십일조와 돈을 요구하는 거에요. 십일조는 기본이고 증축을 한다든지 주차장을 넓힌다든지 목사관 사택을 넓혀준다든지 자가용을 바꿔준다든지 어떤 선교 단체를 도와준다고 하면서 또 목돈을 내게 하는 겁니다. 이단에서는 장로급에 숫자까지 집어넣어요. 14만 4천이 되게 해야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1년에 전도는 몇 번 해야 되고 (14만 4천이라는 티오가 정해져 있으니까) 또 몇 명이 탈락해야 돼요. 14만 3920명이 되면 80명의 티오가 생기잖아요. 그러면 전국에서, 세계에서 또 뽑아들여서 마지막 80명을 마저 채우면 또 14만 4천이 되는 거에요.
얼마나 돈을 갖다 바치고 얼마나 충성을 해야 이것이 되는 겁니까? 그런데 이것이 다 천주교에서 배운 거잖어요. 이게 교회이고 또 옆에 있는 교회에는 주교가 있고 주교 다음에 카디널(추기경), 그 다음에 밀실에서 투표해가지고 교황을 뽑지요. 이게 뭡니까? 이게.. 아까 첫째 시간에 이걸 퇴행이라고 이라고 했지요. 어린 시절, 장군놀이, 딱지따먹기를 하는 거에요. “펼쳐놔.” “별 두 개.” “별 한 개. 아이, 졌다.” 그 다음에 또 별 세고요. “너는 상사.”, “나는 중사.” 딱기 따먹기하는 것과 똑같은 거에요.
주 안에 있어야 되는데 과거로 가는 거에요. 과거로. 과거의 어떤 지위에서 우러름을 받고 사랑을 받는 그 아름다운 추억에 잠길 그때, 정신적으로 유쾌해지는 거에요. 자기의 기분이 좋았던 겁니다. 그 기분이 좋은 것을 축복의 상태로 보는 겁니다. 이런 짓거리를 한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죽였거든요. 예수님께서는 그걸 지금 빙자합니다. 이렇게 나와요. 요한복음 10장 34절에 보면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율법에 기록된 바”라고 나오거든요. “너희 율법”이라고 했는데 이 말을 설명하자면 율법을 누가 주었습니까? 예수님이 주셨지요. 그러면 율법의 진수(본질)는 누구만 알고 있습니까? 출제위원이 정답을 알잖아요. 그렇지 않습니까?
천국에서 교회에 다니나 안 다니나를 기준으로 삼아 그렇게 문제를 출제했습니까? 사도 바울이 교회에 나오면 구원을 받고 교회에 안 나오면 구원을 안 받는다고 이야기했습니까? 이게 사도 바울이 이야기한 구원의 기준이었습니까? 아니지요. 사도 바울은 무엇이라고 이야기했습니까? “너희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와 죽은 것 외에는 알지 않기를 원한다” 이미 그 기준은 십자가로 확정이 되었습니다. 교회가 아니고 십자가에요.
그 이유가 뭡니까? 사도 바울이 계속 교회를 보고 지적을 하는데 지적을 하면서 “너희들이 내가 주는 십자가를 욕되게 하느냐”라고 이야기를 해요. 그러니까 “어이구 기특하구나. 천당 가거라.”라고 하는 게 아니고 교회를 보고 이야기하기를 “너희들은 십자가의 원수로 행동하고 있다.”라고 본 겁니다. 빌립보서 한 번 봅시다. 평생을 교회를 다녀도 도대체 천당에 가는 기준도 모르면서 수십 년 교회에 다닌 사람들이 한두 명이 아니에요.
빌립보서 3장 18절을 누가 한 번 읽어보세요. 다른 분이 읽어보세요.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여기에 “원수”라고 하였는데 원수는 적이지요. 하나님의 적은 하나님의 적이 아니고 하나님이 이 땅에 뭔가를 제시하고 무엇의 적이 곧 하나님의 적이라고 하셨습니까?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가 곧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거에요.
오늘 요한복음 10장에서 “아버지와 내가 하나”라는 말은 자꾸 “하나님, 하나님.”이라고 하는데 그러지 말고 지금 내가 아버지하고 동일한 기능을 하고 있다는 거에요. 그런데 “너희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하면서 왜 같은 기능을 갖고 있는 나를 믿지 않느냐”라고 하시는 거에요. 그런데 유대인들(그 당시 바리새인들)은 그렇기 때문에 믿을 수가 없는 거에요. 바로 그렇기 때문에 믿을 수가 없는 거에요. 자기들이 지금 잘하고 있는데 구태여 중간에 누가 끼어든다는 것을 상당히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거라고 생각하는 거에요. 그럴 필요가 없는 일, 쓸데 없는 일이라고 지금 보는 거에요.
만약에 하나님이 예수님을 중보자로 보냈다면(그들 생각에 그럴 일이 없지만) 지금 하나님께서 앞뒤가 안 맞는 일을 하신 거에요. 왜? 말씀을 주시고 율법을 주시고 “너희들은 하나님의 신이니까 신처럼 살아라”라고 하셔서 “예.” 하고 지금 잘살고 있는데 거기에 또 중간에 끼어들었다는 말은 “네가 백날 해봐야 실패야.” 그런 뜻으로 이해가 되잖아요. 그런데 본인이 아무리 검토를 해봐도 자기들이 추구하는 방향이나 목적성에 문제나 하자가 있다고 생각이 안 드는데 어떻게 합니까? 이게 문제인 거에요.
나한테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안 든다 이 말이지요. 사도 바울도 자기 자신에 대해서 뭐라고 표현했느냐 하면은 “나는 율법에 흠이 없다”라고 했어요. 그러면 한 번 생각해봅시다. 율법에 흠이 없다고 자부하는 사람이 율법으로 죄를 알겠어요, 모르겠어요? 제 말이 어려운 말이 아닌데요. 율법에 흠이 없으면 100점 만점에 100점인데 무슨 틀린 게 나와요? 안 나오지요. 율법에 흠이 없으면 율법에 흠이 없는 거지요. 그러면 율법으로써 죄를 안다, 모른다? 모르는 거에요.
같은 논리인데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일단 율법을 가지고 죄를 알고 그 다음에 ‘내가 죄인이구나. 나는 어찌 할고?’ 그럴 때에 십자가를 들이대면 “아이고, 감사합니다.” 하고 믿는다는 거에요. 이것은 지금 사도 바울의 말을 완전히 곡해한 겁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이미 십자가 안, 예수 안에 있기 때문에 율법의 기능은 내가 생각지도 못한 모든 것이 죄가 된다는 것을 소급해서 까발려주는 것이라고 하는 거에요. 갑자기 어려워져버렸지요.
지금 아버지와 내가 기능적으로 하나라고 했는데 이 하나라는 말은 시간의 요소가 삭제되어 없다는 뜻이에요. 더 어렵게 이야기해서 죄송합니다만 할 수 없어요. 기능이 하나가 되면 시간의 요소가 없어요. 여기 요한복음 10장 27절~28절에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라고 했잖아요. 이것이 언제 유효합니까? 5월 17일(오늘)만 유효합니까? 어제로 sale이 끝났어요? 시간의 요소가 들어갑니까, 안 들어갑니까? 시간의 요소가 안 들어가지요.
예수님의 기능은 그 자체로써 알파요 오메가이기 때문에 이천 년 뒤에도 이 원칙을 유지하고요, 이천 년 전에도 이 원칙이 유지되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의 모든 행동은 시간의 요소가 가미되어 있어요. 왜냐하면 인간의 모든 행동은 전에 했던 행위의 기억에 준해서 일어나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오늘 이런 행동을 했다면 다시는 안 그래야지가 깔린 채 행동을 한다고요. 왜냐하면 인간은 모든 것을 실수의 반복을 통해서 개선하는 쪽으로 자기의 행동을 조절하기 때문에 그래요. ‘아침에 연속극을 보고 나오니까 차가 딱 지나가는구나. 다음에는 연속극을 덜 보고 해야 차가 오는구나.’ 이렇게 실패를 해보고 그 다음에 실패를 수정해서 시간에 딱 맞추어서 나가는 거에요. 그러니까 그 전에 기억이 된 게 있어야 돼요.
인간의 시간요소는 이렇습니다. 만약 인간의 시간요소를 수직선이라고 하고 가운데 지점을 A라고 한다면 사람들은 A라는 지점을 현재라고 합니다. 그런데 현재가 지금 나타난 현재만 현재가 아니고 현재라는 시간 밑에 사선으로 얼마 전에 있었던 과거가 과거 1으로 기어들어 가요. 그전에 있었던 것은 과거 2로 기억됩니다. 더 이전에 있었던 것은 과거 3로 들어가고 더 이전에 있던 기억은 과거 4로 들어갑니다. 과거 1은 약간(한 70%) 생생하다면 멀어질수록 %가 점점 떨어져요. 이것은 나이에 따라서 점점 더 떨어집니다. 나이 60이 넘으면 방금 해놓고도 ‘뭘 했지?’ 하고 잊어버려요. 그러니까 20년 전의 일은 과거 17, 과거 18로 막 떨어진다고요.
길에서 우연히 한 40년 만에 초등학교 동창생을 만났습니다. ‘어디에서 본 듯한 얼굴인데..’ 하면서 저쪽으로 가면서 휙 돌아보면서 “어! 너!”, “아!”라고 하는데 둘 다 기억은 안 나요. “어!”, “어!”, “가만히 있어봐. 보성고등학교?” “으음.” “아니가..” “그러면 서울사대부중?” “아니야.” “그러면 상계초등학교?” “아, 상계국민학교!” “아~~!” 이렇게 되는 거에요. “몇 반인데?” “몇 반.” 이렇게 나오는 거에요. 이것은 무얼 뜻하느냐 하면은 현재 만나도 깊숙한 과거가 생각난다는 겁니다.
여자들이 이 기억 때문에 힘들어 해요. 그래서 아까 내가 이야기했잖아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라고요. 과거에 남편이 무슨 잘못을 했다고 합시다. 그러면 나도 쿨한 여자다. 잊어버린다고 하거든요. 남자는 또 순진하게 그걸 믿어요. 잊어버린 줄 알고요. 미쳤어요? 절대로 안 잊어버립니다. 어떤 계기가 하나 되어 버리면(속도를 냈다든지..) “하여튼 너희집 식구는 다 그렇다.”고 하면서 지나간 것 있잖아요. “하여튼 너희 시가식구하고 똑같애.” 이런 일을 계기로 해가지고 과거 1, 2, 3, 4 다 나옵니다. 과거 1 나오는 데에 5분 걸리고, 과거 2 나오는 데에 7분 걸리고, 과거사 다 이야기하는 데에 2시간 반 걸립니다.
“고마해라. 많이 들었다. 벌써 다 잊었다고 해놓고 왜 자꾸 짜증내면서 이야기하냐” “나도 하고 싶어서 하는 게 아니고 생각이 나는데 어떡하나?”라고 하거든요. 그런데 과거만 그런 게 아니에요. 현재도 가만히 있지를 않고 자꾸 상상을 하게 되어 있어요. 상상 1, 상상 2, 상상 3. 그러니까 과거가 현재의 받침이 되고 그 현재에서 상상력을 뿌려서(발휘해서) 미래 1, 미래 2, 미래 3이 되는데 이걸 가지고 “Boys be ambitious!(소년들이여, 야망을 가져라!)”라고 하는 거에요. 이 개꿈 같은 야망. 아무것도 야망이 될 수 없어요. 이 꿈은 너무나 일방적입니다. 이 전체를 주님 안에서가 아니라 내 안에서라고 이야기합니다.
이걸 나르시시즘이라고 합니다. 내 안에서 인간은 파멸되어 갑니다. 채식주의자에요. 스스로 파멸되어 가요. 말씀을 지킨다고요? 말씀을 지키면 대뇌 피질 속의 파충류의 뇌 속에 들어가고 이게 해마까지 들어가면 기억이 됩니다. 기억이 되면 그 기억이 일방적으로 나를 사랑하는 식으로 현실을 항상 재구성(조작)을 해버립니다. 자꾸 구성해요.
과거에 있는 기억을 바깥으로 끄집어내는 것을 두 자로 기도라고 합니다. 저는 그걸 죄를 토한다고 하는데 그래서 기도는 자기의 과거 일대기가 다 튀어나옵니다. 일대기 중에서도 한이 맺힌 것을 골라서 다 나옵니다. 그래놓고 부끄럽게도 뒤에다가는 예수의 이름을 갖다 붙여버립니다. 내 이름으로 해야지가 솔직하지요. 쭉 기도해놓고 “이것을 다 나, 아무개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또 더 노골적으로 하면 “아무개의 이름이 중보기도합니다.”라고 해야될 걸 가지고 건방지게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고 합니다.
예수의 이름이 주술입니까, 주문입니까? 거기에다가 갖다 붙이게요. 인간에게 놀아나는 예수가 어디 있어요. 그런 예수라면 천국은 개판이 되어 버려요. 사람에게 놀아나는 예수님이라면 천국도 우리한테 넣어줄 사람, 안 넣어줄 사람을 물어야 돼요. 내 돈을 떼어먹고 사기친 인간은 절대로 천국에 오면 안 됩니다. 왜? 천국에서 만나서 멱살을 쥐고 싸울 판이에요. 내 아내하고 바람난 놈을 천국에 가서 만나보세요. 죽일 판, 살릴 판으로 싸울 거에요.
“너 때문에 나 혼자 얼마나 우리 가정이 파탄 나서 운 줄 알아? 너 잘 만났다. 너 죽어라.” 천국에 가서 칼부림날 판이에요. 물론 천국 갈 때 천사가 칼 같은 것은 다 빼겠지만요. 이게 무슨 천국이에요? 개판이에요. 개판. 그런데 교회는 개판이라도 좋다는 거에요. 나만 과거의 그 이쁨 받고 백설공주, 신델렐라 꿈 꾸던 것을 성취시킨다면, 그러니까 나를 위한 천국이라면 기꺼이 내가 헌금하겠습니다.라는 식으로 나오는 거에요.
오늘 본문 내용은 이 거에요. “너희들이 정말 말씀을 알고 율법을 안다면 나처럼 되어야 된다. 나처럼. 아버지와 내가 하나의 기능으로 움직여야 된다. 다시 말해서 온전한 순종, 성령 안에서 완벽한 말씀 지킴, 이게 될 때 이 사람을 바로 신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외에는 신이 아니고 마귀다.” 그러니까 너희들 식대로 여기 시편 82편 6절~7절에 보면 “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신들이며 다 지존자의 아들들이라 하였으나 너희는 범인같이 죽으며 방백의 하나같이 엎더지리로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 안에는 시간이 없지요. 하나님의 말씀 자체가 반드시 이렇게 되도록 그렇게 조치해서 연쇄적으로 발생되어야 하는 연쇄사건들의 집합이 이 땅에 떨어집니다. 너희들은 신들이라고 언급하지만 그 신들이 어떻게 그냥 짐승같이 보통사람처럼 죽어버릴 것을 내가 말씀을 통해서 반드시 실현시키겠다는 겁니다. 하나님처럼 대우를 받는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처음부터 우리의 죄를 지적하기 위한 율법의 기능 때문에 그렇습니다. “율법을 주신 것은 죄를 더하게 함이라” 없던 죄, 우리가 알지 못한 죄, 내가 미처 예상도 못한 죄, 그 죄를 계속해서 방출하기 위해서 율법을 주는 겁니다.
그래서 말씀이 주어지게 되면 그 말씀은 우리 속에서 (실현태라고 하는데) 실현이 돼요. 아까 한 것을 다시 한 번 해봅시다. 우리는 이러한 시간관, 내가 한 모든 상상은 과거의 인생에 대한 어떤 보상, 과거에 상처 받은 것을 만회하기 위해서 미래를 그리는 것입니다. 인간의 욕심이라고 하는 것은 과거에 결핍된 요소를 마저 채우는 쪽으로 자기의 미래를 그려가게 되어 있습니다. 개가 없다. 개 이름은 윌리다. 그러면 윌리를 찾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윌리가 이쁘니까 그것을 찾는 데에다가 또 신경을 쓰지요.
만약에 화상을 입어가지고 얼굴에 흉터가 있다면 뭘 생각하겠어요? 대통령? 당신의 소원은 국회의원? 아니에요. 옛날 피부로 다시 새살이 돋아 돌아온다면, 분수처럼 확 태양을 향하여 뿜어오르는 화장품이 있어가지고 갖다가 바르면 갑자기 젊음이 생생하게 뿜어오르는 이런 것이겠지요. 그러니까 본인의 사적인 공간을 가지고 우리는 너무나 쉽게 그걸 현실이라고 불러버립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현실은 시간 자체가 초월된 현실을 현실이라고 합니다.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 간에 말씀에 입각해서 되어지는 상황, 이것을 이렇게 표현할 수 있어요. 말씀의 그물망.
말씀의 그물망에서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그중에 하나의 자리를 확보하는 겁니다. 따라서 내가 얼마나 사적으로 재산을 소유하느냐의 문제가 아니고 내게 얽혀 있는 말씀의 관계는 무엇일까하는 것이 문제인 겁니다. 왜냐하면 얽혀있는 말씀의 관계가 지금의 나의 실존의 자리를 형성시켜 주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무엇이 얽혀서 지금의 이 자리에 왔느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의인이 되나니” 이 말씀에 의해서 자리가 마련된다면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았는지 간에 그 사람은 의인이 되는 거에요. 이건 본인이 책임질 필요가 있겠어요, 없겠어요? 본인이 책임질 필요가 없어요.
내가 만약에 책임을 진다면 이것은 학교 때 내가 남한테 책임을 잘 졌다는 칭찬을 들은, 그 착실함을 나의 현재라고 착시현상을 일으켜가지고 ‘앞으로 내가 이처럼 착실하게 해야지.’라면서 그 조작된 현실을 나의 자리라고 움켜질 수가 있어요. 전에도 예를 들었지만 미국의 뉴욕에 센트럴파크 공원 근처에 있는 아파트가 세계에서 제일 비싼 아파트랍니다. 그런데 그 아파트에서 어느 중년 모델이 자살을 했어요. 자살한 이유는 젊을 때처럼 인기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말하는 현실은 뭡니까? 그 사람은 지금 나이지리아의 석유 파동 같은 것은 생각을 안 하고 있거든요. 케냐의 해적 같은 것은 생각을 안 한다고요.
그걸 전에 제가 대전에서 요한계시록을 할 때 뭐라고 했던가요? 그게 자기만의 연대기라고 했잖아요. 1999년 호텔 켈리포니아에서 이글스가 실황으로 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