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강-창 6장 9-13절(의인노아)160511-이 근호 목사
38강-창 6장 9-13절(의인노아)160511-이 근호 목사
이름 : 오용익(IP:125.136.25.28)
38강-창 6장 9-13절(의인노아)160511-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6장 9-13절입니다. 구약성경 5페이지입니다.
창 6:9-13
“노아의 사적은 이러하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그가 세 아들을 낳았으니 셈과 함과 야벳이라 때에 온 땅이 하나님 앞에 패괴하여 강포가 땅에 충만한지라 하나님이 보신즉 땅이 패괴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패괴함이었더라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 있는 자의 강포가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 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
노아는 이러하니라, 하는 이것은 5장의 패턴과 동일한 패턴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담은 셋을 낳았고 몇 년을 살다가 죽었더라, 그 패턴을 따라서 노아까지 왔습니다. 그런데 보통 아담 같으면 ‘아담은 이렇게 살았다.’ 또 셋의 경우도 ‘셋은 이렇게 살았다.’라고 되어 있는데 노아의 경우에는 노아이야기뿐만 아니고 땅의 이야기까지 겸해서 알려주고 있습니다. 노아라는 것은 노아이름자체가 멸망 그 이후에 계속 살아 있어야 할 존재로서의 이름을 가졌습니다.
노아의 이름은 ‘안식’이라 해서 ‘땅이 안식했다.’는 뜻의 이름을 가졌습니다. 노아만 유일하게 뭔가 안식이라는 것이 의미 있게 되려면 그 전에 멸망되어야 되거든요. 노아만이 유일하게 땅의 멸망을 경험하고서도 살아남게 될 사람이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노아의 이름은 안식인데 멸망 속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되겠지요. 그렇게 된다면 노아는 그 유일한 입장 때문에 나중에 무엇과 관련되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함과 관련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이거예요. ‘땅이 멸망했다. 여러 명이 살아남았다.’ 그것이 아니고 ‘땅이 멸망했다. 유일하게 노아만 살았다.’ 이렇게 해서 노아하고 다른 사람과의 차이를 놀랍게도 없애버립니다. 노아만 살았으니까 노아는 다른 사람과 달랐다, 이것이 우리네 상식인데 ‘노아와 다른 사람과 다를 바 없이 똑같다. 그런데 노아의 이름이 노아를 멸망가운데서도 빼내주었다.’라는 의미가 강해요. 왜? 그래야 중보자적 기능을 담기에 그렇습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에서 ‘노아는 당대에 의인’이라고 했거든요. 그렇다면 오늘 본문을 보면서 이것만 생각하면 돼요. 모든 땅은 죄로 멸망했다. 악하다. 이것을 패괴라고 하는데 패괴(悖壞)라는 말은 ‘썩었다.’는 뜻이거든요. 모두 썩음 속에서 어떻게 의가 나올 수 있는가를 주목하라는 이야기입니다. 쉽게 말씀드려서 “세상이 썩었다고 느껴질 때 반가워하라. 굉장히 기뻐하라. 세상은 지옥이다.”라고 할 때 오히려 환호성을 보내고 크게 기뻐하고 하나님에게 고마워해야 됩니다. 왜? 그걸 알아보는 사람은 유일성 속에 포함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더 쉽게 말해서 세상이 지옥 같고, 악하고, 패괴했다는 말은 벌써 끄집어내는 작업을 주께서 시작을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구원받고자 작정된 자만 세상에 대해서 미련두지 않는 안목이 발생되는 거예요. 다시 말씀드리면, 노아는 그 이름자체를 하나님께서 지어줬어요. ‘안식’이라고. 우리 생각에는 이 세상가운데서 지리산에 가서 안식하고, 의성골짜기에 가서 안식하고, 안동도산서원 근처에 가서 안식하고, 그러면 되는데 그게 아니고 모든 땅이 다 썩었다고 되어 있다는 말이지요.
모든 땅이 썩었다는 말은 노아도 같이 썩은 거예요. 우리가 오늘 본문을 보면서 느껴야 되는 것은 뭐냐? 노아는 구원받을 길이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됩니다. 노아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고 노아도 구원받을 길이 없어요.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그래서? 아무리 노아가 완전하고 당대에 의인이라 할지라도 이미 그 땅은 멸망하기로 작정된 땅입니다. “너는 참 훌륭하구나. 너는 착하구나. 하나님과 동행했구나. 같이 망해라.” 이렇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어요?
노아가 의인이고 당대에 완전한 자라면, 땅이 함께 있는 그것에 모든 의미가 충족되는 것이 아니고 그 땅이 멸망하고 난 뒤에 ‘아하, 노아가 의인이고 당대에 완전한 자고 주님과 동행한 것이 바로 이런 전제를 깔고 이게 굉장히 중요한 것이구나.’라고 파악이 되어야 됩니다. “집사님은 의인입니다.” 이 말은 다른 말로 하면, “지금 같이 잘 망하고 있지요?” 이런 뜻이라는 말이지요. “목사님 보기에 저는 의인이잖아요. 그러니까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살아야지요.” 이렇게 되면 그것은 이상한 노림수를 갖고 있는 사람입니다. 아주 수상한 사람이에요.
저는 그것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심리적 의인이라고 하는데 심리적 의인이라는 말을 하는 것은, 의인이 아니고 의인인 체 한다는 말이지요. 정신적으로, 심리적으로 성경을 보고, 성경에 나오는 노아보고, 예수님보고, 성도보고, 선지자 보고, 제자들보고, 그리고 감정이입을 하는 거예요. ‘내가 이런 사람일거야.’라고 자기가 자기보고 우기는 겁니다. 모든 인간에게 이런 보수적성향이 있어요. 그냥 있는 대로 유지하고 싶은 겁니다.
특히 모태신앙 같은 경우에는 보수적성향이 굉장히 강합니다. 모태신앙한테 복음 이야기하면 다 튕겨 나옵니다. “그거 내가 아는 건데 뭐. 옛날 세례 받을 때 구원받았는데.” 그렇게 돼요. 그러면 땅은? “구원받고 복 받았으니까 이 땅에서 살지.” 지금 이것은 전혀 하나님이 노아를 통해서 알리고자 하는 하나님의 계시와 전혀 상관없습니다. 이것을 저는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이것은 심리적 믿음이에요. 심리적으로 그렇게 되고 싶은 거예요. 욕망, 욕구, 소설이나 어떤 작품에 나와 있는 주인공, 영웅과 일치하고자 하는, 동일시하고자 하는 심리적성향이 있듯이 성경에 ‘노아가 방주 만들어서 구원받았다.’ 하니까 ‘그래, 그게 나야.’라고 일치시키고자 하는 의도가 있는 겁니다.
이것은 그동안 헛짓한 거예요. 전혀 실제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다 헛짓이라면 당신은 무엇을 실제적이라고 보는가?”라고 단도직입적으로 저에게 묻는다면, 노아는 하나님의 의를 실어 나르는 거예요. 노아는 중보자적인 기능을 갖고 있는 겁니다. 그 이름 때문에. 지금 세 번째 이야기하는데 다시 해봅시다. 노아 이름이 이미 ‘안식’이에요. 이미 안식이라는 이름을 가진 자가 등장했다는 말은, 이 세상에서는 어떤 구석도 안식할 수 있는 자격도 가치도 없다는 것을 병행해서 보여주는 겁니다.
“당신은 성도입니다.” 그 말은 당신 빼놓고는 다 지옥 간다는 뜻이거든요. 만약 어떤 가족이 다 절에 가는데 “엄마! 오늘 교회에서 내가 성도라는 이야기를 들었어.” 그러면 교회 안 나오는 다른 식구들이 “그래. 교회 가서 인간답게 칭찬받고 사랑받으면 내 새끼 좋지.”라고 한다고요.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엄마! 그게 아니고 엄마는 지옥 간다는 이야기에.” 그런 뜻이에요.
어버이날 부모님에게 “어머니, 아버지! 더 늦기 전에 예수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말은, 말을 곱게 하고 우회적으로 안 들키게 해서 그렇지 실제로는 뭐냐? “어머니, 아버지는 지금 빠른 속도로 지옥으로 빨려들고 있습니다. 지금 지옥가고 있습니다.” 물론 대놓고 그런 식으로 한다면 용돈이나 유산이 없을까봐서 걱정이 되니 그 말은 못하지만. 노아가 의인이고 당세에 완전한자고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그 말에서 주의 뜻은, 동행자는 2가 아니고 3도 아니고 오직 1, 항상 하나만 동행자를 삼는다는 하나님의 원칙이 있습니다.
그 원칙에 담긴 내막은 예수님, 유일한 독생자만 이 땅에 보내셔서 건져내는 그것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노아는 장차 오실 분의 증인이 되는 거예요. 유일한 것만 이 지옥에서 건져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 세상은 왜 악해야 되고 왜 폐기해야 됩니까? 죄가 많아서 그렇습니까? 죄가 많아서 멸망하는 것이 아니에요. 이 세상이 멸망해야 되는 것은 구원자, 중보자, 메시아는 오직 한분이어야 한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이 세상은 하나의 연극무대처럼 노아부터 해서 다 망해야 되는 거예요. 모조리 다 망해야 되는 겁니다.
저 산속에 있는 절에 불전함이 놓여 있습니다. 그 불전함에서 돈을 빼내는 방법은 종이에 테이프를 붙여서 빼낼 수 있다는 거예요. 오늘 아침뉴스에 보니 그런 방법으로 불전함에서 돈을 많이 빼낸 거예요. CCTV도 없는 암자의 불전 함에서 돈을 슬쩍 빼냈어요. 그런데 그냥 빈손으로는 불전 함에서 돈을 빼낼 수가 없어요. 닫혀 있기 때문에. 기가 막히게 틈 사이로 들어가서 빼내야 되는데 우리 주님도 마찬가지에요. 자기 백성을 빼내는데 그 빼내는 방법이 뭐냐 하면, 오늘 본문에 ‘동행’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이 동행을 불전 함에서 돈을 슬쩍 빼내는 도둑질방식으로 표현하기를, 동행은 납작하다고 하고 싶어요. 동행은 납작해야 돼요. 분명히 아무런 틈이 없는데 틈을 만들어서라도 틈새에 예수 그리스도를 집어넣고, 하나님의 약속 집어넣고, 하나님의 의를 집어넣어서 자기 백성을 빼내는 작업이에요. 납작한 거기에다가 끈적이는 테이프 붙여서 빼내는데 지폐만 올라오지 동전은 못 올라와요. 이 말은, 우리가 이 세상을 빠져나가려면 누구와 같이 납작해져야 되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납작하지 않으면 이 세상을 빠져나갈 수가 없습니다.
큰소리치면서는 못 빠져나와요. 그러면 어느 정도로 납작해야 되는가? 그것은 예수님처럼 납작하면 되는데 예수님처럼 납작하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 예수님은 억울하게 살았어요. 자기가 짓지도 않는 죄를 온몸에 지시고 이 땅에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빌립보서 2장 5절의 말씀이지요. 많이 억울하라는 말이에요. 할 수 있는 한 억울하고 극단적으로 억울함을 당하면서 빠져나오는 방식 외에 다른 방식은 없습니다. 제가 하는 이야기가 아니고 베드로후서 1장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베드로후서 2장 7절에 보면, “무법한 자의 음란한 행실을 인하여 고통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 (이 의인이 저희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을 상하니라).”라고 되어 있어요. 무슨 말이냐 하면요, 성도가 되어가지고 우리가 논리적으로는, ‘너는 지옥 잘 가라. 나 혼자 천당 갈게.’ 희희낙락 즐겁게 가면 될 것도 같아요. 논리적으로, 그저 상상만 한다면.
그러나 실제적인 입장에서, 심리적인 것이 아니고 실제적인 입장에서 구원받는 롯 같은 경우, 노아도 마찬가지고요, 욥도 마찬가지고 선지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요, 선지자 엘리야가 희희낙락 구원받은 것이 아니고 열두 제자 베드로도 좋다고 늘 웃으면서 산 게 아니거든요, 사도바울도 마찬가지고요. 구원받은 자가 이 땅에 살아가면서 그렇게 힘들게 살아가는 이유는 제가 아까 이야기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신 그 길이 정신적으로 힘든 길이고 어려운 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마저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마 26:39) 했어요. 예수님께서 그 말씀 하실 때 그 순간도 아버지와 동행하는 중이었습니다. 오늘 설교에서 제일 어려운 대목을 설명해야 되는데 ‘동행이 뭐냐?’ 하는 겁니다. 어렵지만 나름대로의 설명을 해 드리겠습니다. 사람이 혼자 있으면 동행이 아니잖아요. 두 사람이 있을 때 나는 저 사람을 보고 있고 저 사람도 나를 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요. 우리가 아는 동행은 이겁니다. 손잡고, 서로 이야기하고, 친하게 지내고.
그런데 이 동행이 하나님과의 동행에 방해가 됩니다. 이래서 어려운 거예요. 세상에서 동행하는 것, 부부가 서로 동행하는 것, “누가 나와 함께 따뜻한 동행이 될까”라고 최성수가 노래한 그 동행. 사진 찍으면 두 사람이 그대로 찍혀 나와요. 동행자지요. 그런데 하나님과의 동행은 사진 찍어봐야 나오는 것이 아니거든요. 이상한 물체나 귀신이 등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서 노아는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하는데 그 동행방식에 대한 이해를 누가 방해하는가? 우리가 이미 사람과 사람사이에 동행하고 있다는 그 동행하고 있다는 그 자부심 때문에 오히려 해석에 훼방이 되고 해석을 가로막게 되는 겁니다.
그것을 가지고 있음이 부재를 가로막는다고 하는데요. 현재 있다는 것이 없음을 가로막고 있다는 겁니다. 스크린처럼. 하나님과 동행을 할 때는 어떻게 하는가? 하나님과의 동행은 실제적입니다. 심리적인 것이 아니에요. 혼자 방에 누워서 ‘지금 하나님은 여기 계시다. 하나님은 여기 계시다.’ 이게 심리적인 겁니다. 가스펠송의 작사가들이나 소위 신앙의 영웅들이 있잖아요. 내일 일은 난 몰라요, 그런 노래 지은 사람들. 그런 사람들의 간증을 들어보면 “언제든지 하나님이 함께 있었다.” 어떤 사람은 몽골 선교사로 갔다는데 “내려놓으라. 내려놓은 것보다 더 내려놓으라.” 했다는 식의 책이 나왔어요.
제가 궁금한 것은, 동행을 했다는데 동행한 그 어떤 느낌, 그것이 뭐냐를 이야기를 해줘야 되거든요. 그냥 동행했대요. 그냥 노아처럼 동행했데. 그 말은 나도 하겠다. 동행한 티가 뭔데요? 어떤 게 동행인데요? 그런 식의 동행이라면 기독교뿐만 아니고 불교에도 있고, 천주교에도 있고, 이슬람교에도 있고, 온데 다 있어요. 심지어 전설의 고향에만 봐도 죽은 조상, 귀신하고 동행하고 있는데요.
창세기 5장에 21절부터 보면, “에녹은 육십 오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삼백 육십 오세를 향수하였더라.” 그렇게 되어 있어요. 여기에 보면 어떤 식으로 동행했느냐가 나온 것이 아니고 동행결과가 나왔습니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 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이게 힌트가 돼요. 하나님과 동행하게 되면, 뭐와 결별이 일어나요. 이 세상과의 결별이 일어납니다.
이 세상과 결별해야 된다는 말은 그 안에 무엇과도 결별해야 된다는 것인가? 내가 이 세상에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서 그것을 동행이라는 의미를 사용한 그 의미, 그 개념마저 결별해야 돼요. 우리가 평소 쓰던 동행이라는 개념과 결별해 버리면, 이것은 내가 심리적으로 억지를 부리는 거예요. 하나님과 내가 동행했다. 이것도 무의미하고 소용없는 헛짓이 되는 겁니다. 내가 나를 격려해서 ‘하나님! 내가 하나님과 동행한다고 고백했습니다. 동행하고 있습니다. 동행한다, 동행한다, 동행한다……’ 천 번 하면 동행하는 것처럼 느껴지겠지요. 이렇게 동행하니 천국 넣어주세요, 라고 하는 이런 심리적 자기최면과 결별해야 됩니다.
‘아, 이런 것이 다 헛짓이구나. 소용없는 자기최면에 불과하구나. 동행도 안 되면서 동행하고 싶은 나의 욕망을 상상으로 꾸며서 억지를 부렸구나.’ 그게 억지를 부리는 것이거든요. 그러면 당신이 말하는 진짜 동행의 의미는 뭐냐?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아버지가 동행한 것으로 이미 정답이 나왔습니다. 모든 성경은 주님에 의해서 완성이 돼요. 모든 성경의 진짜 의미와 그 단어의 해답은 예수님의 모습 속에서 찾아내야 되고 그것을 경유해야 돼요.
안 이숙여사와 닮아야 되고, 손양원목사와 닮아야 되고, 한 경직목사와 닮아야 된다, 그러지 마시고요. 그런 되도 않는 사람들, 지옥 갔는지 안 갔는지 그건 모르겠지만 그런 사람들을 왜 자꾸 거론해요. 예수 그리스도가 있는데. 그래서 이야기하잖아요. 있음이 없음을 가린다고요. 유명하다는 사람들 때문에 정작 주님을 가리고 있는 거예요. 인간적인 동행에 문제점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자신에게 동행의 의미가 회수가 된다는 거예요. “이렇게 동행하니까 저 구원하겠지요?”라고 자기 자신을 포기를 못해요.
“십년간 동행했습니다. 30년간 교회 나왔습니다.” 이것이 결국 나의 이득과 이해타산으로 되돌아오는 그 지점, 그 지점이 뭐겠어요? 자아지요, 자아, 에고지요. 나를 부정하지를 못하는 거예요. 동행이 나를 더욱더 절대화시키고 숭배하게 만들었어요. “30년 동행했으니까 지금에 와서 포기하는 것은 아까워서 못한다.” 아깝다는 거예요.
그러면 자기 자신을 어떻게 포기하는가? 궁금해요? 알려드리겠습니다. 구미의 어떤 작은 아파트에 물탱크가 두 개 있어요. 그 중 한 개의 물탱크에 중국인이 자살했어요. 거기서 시체가 나왔습니다. 그 때부터 그 아파트 주민들이 물을 못 마셔요. 토하고 싶어요. 자살한 중국인을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로 보시기 바랍니다. 토하고 싶지 않습니까? 사도바울은 예수의 죽으심과 함께 동행 한다고 했어요. 왜 그 아파트 주민들은 토하고 싶을까요? 재수 더럽게 없는 거예요. 생각만 해도 끔찍한 거예요.
시에서 조사 다 했어요. “아무 이상 없습니다. 병균 없습니다.” 백날 해도 소용없어요. 빨리 그 아파트 떠나고만 싶어요. 그래서 구미시에서 특별히 그 아파트에 생수를 보급해 준다고 했답니다. 나 잘되기 위한 이것이 육이고요, 그 육이 전체로 모이게 되면 같이 폐기하고 멸망할 수밖에 없는 땅과 그 땅의 일부분으로 우리가 가담되어 있어요. 노아와 다른 여러 명이 아닙니다. 노아와 그 외 다른 전부가 일대일 대응이 돼요. 노아도 하나고 노아 빼놓고 전부도 하나에요. 그 전부가 하나라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어떻게 되느냐 하면, 패괴하고 썩었다는 겁니다.
그 물탱크가 시체 때문에 썩은 것처럼 썩었다는 거예요. 우리는 뭐냐? 썩어도 이 세상이 좋다는 겁니다. 우리는 예수님 잘 믿고 썩든 말든 이 세상에서 애 낳고 잘 먹고 잘 살게 하나님은 도와주기만 하면 된다는 거예요. 우리가 교회 나왔으니까, 오늘 수요일에도 나왔으니까 좀 팍팍 도와줘서 썩든 말든 이 구미 아파트에서 그냥 살게 해달라는 거예요. 진실을 몰라요. 왜 진실을 모르는가? 진실은 내 존재함이 진실이에요. 나 있음이 진실이에요. 나 있음이 진실의 최종점이에요. 나 여기 있음.
그 최종적인 것이 예수님을 가려요. 예수님 십자가가 최종적인데, 모든 세상은 예수님 죽으심이 최종적인데 내가 살아 있다는 것으로 그걸 막아서서 하나도 안보이게 만들어요. 십자가죽음을 안보이도록 내가 그렇게 조치한 거예요. 그래놓고 하는 말이 “주여! 동행해 주시옵소서.” 이러고 있다는 말이지요. 심리적으로 동행을 자꾸 거론하면서. 실제로 심리적인 동행을 거론해서 얻은 수혜자는 본인이라는 것을 뻔히 본인도 알고 있으면서도.
마태복음 24장 37절에 보면,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라고 되어 있어요. 38절에, “홍수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제가 질문을 던지겠습니다.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가고, 이런 의식이 뭐가 문제가 되는 겁니까?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이게 뭐가 나쁜 짓이 되고 이게 뭐가 문제가 있다는 말입니까?
그 질문보다 더 깊이 있는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이것 외에 다른 것을 따로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 과연 우리에게 있단 말입니까? 없어요. “저 사람들 맨 날 먹는 것, 입는 것, 그것밖에 모르지.”라고 할 때 그 사람이 “그럼 너는? 너는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이미 하늘나라인가? 너는 어떻게 사는데?” 똑같다는 거예요. 이 똑같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 빼놓고 다 똑같아요. 노아마저도 다 똑같아요. 노아가 구원받은 것은 예수님과 연계되어 있기에 구원받았지 노아가 착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노아가 당세에 의인이라는 그것은 멸망당한 다음 나중에 확인될 의지 노아가 스스로 “난 의롭다.”고 이야기하는 그런 의가 아니에요. 쉽게 말해서 동행이라 하는 것은 동행하시는 분이 노아를 크레인으로 잡아서 저쪽으로 가게 하시는 어떤 계획이 있는 동행이라는 말이지요. 동행함을 내가 소유할 수는 없어요. 차라리 동행하게 되면 “내가 이 땅을 마땅히 떠나야 되고 이 땅이 멸망 받아도 마땅합니다.”하는 고백이 나온다면 그 사람은 주님과 동행하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만이.
왜? 이 아파트에 더러워서 못사니까요. 구역질나서 못사니까요. 얼마나 인간들이 자기를 유일자, 오직 자기밖에 모르는가 하면, 버스 안에서 누가 기침을 많이 하면 굉장히 싫어해요. 그런데 본인이 기침하면 굉장히 관대해요. 이정도로 늘 평소에 오직 나만을 위하는 자기애, 이걸 나르시시즘이라 하는데 자기한테 반하는 자기연민, 이것으로 완전히 무장되어 있습니다. 그런 입장에서 성경 보면서 “나도 동행해주세요.” 하고 손 들어봐야 “손 내려!”
그게 바로 죄가 되는 거예요. 죄는 개인적인 죄는 없어요. 집단 죄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빼놓고는 다 죄인이기 때문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내 쪽에서 주님과 동행한다면 동행하는 방법까지 나올 판입니다. 동행하는 방법은 없어요. 왜냐? 동행하는 방법을 사용한다면 그 사람은 내가 잘나서 동행했음, 나는 의인임, 이렇게 자기가 자기를 자랑하는 셈이 되어버려요. 그러면 자기만 유일자임을 계속 쥐고 있는 거예요.
진정 노아가 구원받았으면 나는 나를 위한다는 그 자체가 노아에게서 파괴당해야 돼요. 차라리 유일하게 파괴당한 사람이 노아입니다. 모든 사람은 자기 잘난 맛에 살아가지만 노아만큼은 “나는 절대로 잘난 자가 아니고 주께서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팔고, 아무 일이 없는 이 세상을 주께서 무차별 멸망시키는 것에 대해서 제가 찬동의 표를 던집니다.” 할 정도로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팔고, 하는 가운데서 내가 구원받아야 될 정당성은 나오지 않습니다.”라는 고백을 노아만은 할 수 있어요.
세상이 왜 멸망해야 됩니까? 그 이유는 인간은 아무도 몰라요. 노아도 몰라요. 주께서 그렇게 실시한 것이 노아에게 들이닥친 겁니다. 이로써 노아는 자기가 기대하는 동행이 아니고 뭔가 자기가 육이라는 것, 내가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하는 그 사람들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음, 이상하게 그 자체가 부정적으로 느껴지는 것, 이게 바로 이미 동행하고 있는 사람의 특징입니다.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의 특징으로서 이 세상에서 떠났어요. 노아는 벌써 떠났어요. 살아 있으면서 떠났어요. 이 세상은 살 곳이 못 된다는 것.
지난 수십 년 동안 십자가마을에 많은 질문이 들어왔고 또 공격도 들어왔습니다. 그 때마다 친절한 금자 씨 이상으로 답변을 해줬어요. 항상 이 답변에 대해서는 말문을 닫고 더 이상 상대를 안 하게 돼요. 그게 뭐냐? 당신이 개혁주의 신학에 대해서 그렇게 옳다고 주장하는 것은 예수님의 증인이 아니고 신앙이라는 것으로 자기가 자기를 증언하는 겁니다. 그것은 자신의 증인입니다. 이것으로 답변하게 되면 그 쪽에서 끊어버려요. 왜냐하면 그 말이 맞기 때문에.
사람이 자기 자신의 증인되는 것 외에는 할 줄 아는 것이 없어요. 숨 쉬는 것, 모든 것 하나하나, 젖 먹고 좋아서 입 벌리는 것, 노는 것까지도 모든 것이 지금까지 자기존재증명이었습니다. “나 여기 있는 것을 좀 알아줘.” 그것을 지난주일 낮 설교에서는 “왜 사는가?” “폼 나게 살려고 산다.” “왜 폼 나야 되는데?” “그렇게 내가 잘났기 때문에.” 스스로 증인이에요. 로마서 10장에 ‘자기 의’거든요.
그 ‘자기 의’는 세상이 건재해 줘야 자기의가 빛나요. 그런데 주께서는 지금 세상을 멸망하려고 합니다. 자기 의를 알아줄 사람, 자기증명을 받아줄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하나님! 진즉에 그런 조치를 하셨어야 해요.”하고 동의하는 사람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 빼놓고는 없어요. 그렇게 하나님과 동행하려면 나 자신을 세상과, 육과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고 오실 분, 그리스도 이름으로 하나가 되는 거예요.
그러면 동행한다는 것은 내가 그분에 종속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보통 동행하면 두 사람이 동행하는데 두 사람이 아니고 한 사람이 내 이름을 가져가 버려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함께 있어도 항상 한 사람으로 사는 방식으로 하는 그것은 예수님의 증거 때문에 그래요.
빌립보서 1장 28절에, “아무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를 인하여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저희에게는 멸망의 빙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빙거니.” 빙거라는 것은 증거죠. 성도는 내가 신앙인이라거나, 내 믿음이 얼마나 좋은가를 증거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너를 통해서 일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거예요. ‘통해서’를 삭제하면 주님이 지금 일하고 있음을 너를 통해서 보여주는 겁니다. 그러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지요. 내가 동행한다, 가 아니라 나와 동행하는 분을 증거 하기 위해서 우리는 같이 멸망당해야 될 죄인 중에서 뽑아 세운 거예요.
그렇게 뽑아 세우니까 어떤 관점이 있느냐 하면,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파는 그것, “그러니까 멸망해야지.”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저쪽에서 “먹는 것 마시는 것이 이게 뭐가 죄고, 이게 뭐가 썩어빠진 것이고, 이게 뭐가 멸망의 이유가 되고, 이것이 뭐가 악이 되는가?” 그러면 우린 이렇게 해요. “너 지금 동행하는 자 없지? 그렇지? 너 자신의 잘남을 드러내기 위해서 이 땅에 사는 거지? 그러니까 그런 질문이 나오는 거야.”라고 답변해 줘야 되지요. 답변해줘도 무슨 말인지 모르지만.
동행이 되어버리면,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이것이 무조건 육이고 무조건 멸망당해야 될 일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저쪽에서 답답해가지고 “글쎄,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그것이 왜 멸망당해야 되는 나쁜 짓인데?”라고 물으면 우리는 이야기하기를 “나쁘다, 하는 그 개념이 인간들끼리 있을 때나 통용되는 나쁨이지 새롭게 동행하시는 메시아 앞에서는 그렇게 따지는 것도 나쁜 거야.”라고 해버리면 저쪽에서 뭐라고 하는가? “그러면 예수가 다냐?” 그러면 이쪽에서 “예수가 다다. 주님이거든.”
결국 마무리가 그렇게 돼요. 저쪽에서 십자가마을에 이런 말까지 해요. “너는 어떻게 예수밖에 모르는가?” 이래요. 이 말 들으면 황공스럽지요. ‘주여! 이런 축복을 악인을 통해서 얻게 하다니 저는 감당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주님만 아는 사람이라는 취급을 받으니 말이지요. 결론은 간단하지요. 예수님의 주되심을 위해서 모든 피조물이 나왔고 그들은 멸망과 죄를 통해서 그 속에서 의가 나온다는 것. 의를 위해서 이 세상은 악해야 된다는 당위성.
그런데 제가 아까 이야기한 롯이나 노아, 욥 같은 사람은 심히 탄식했고 아파했습니다. 논리적으로 보면 속이 시원한데 왜 실제상황은 그런가? 인간은, 성도는 육을 갖고 있어요. 육에는 뭐가 있는가? 육적인 의미의 동행개념을 계속 갖고 있습니다. 외롭지 않게 해달라는 요청, 기대했는데 기대한 그 사람이 실망으로 다가올 때, 그동안 안고 있던 우리의 기억은 아파합니다. 예수 믿는다고 기억이 날라 가는 것이 아니거든요. 예수 믿고 난 뒤에 “누구십니까?” 이럴 수는 없다는 말이지요. 갑자기 아이큐가 뚝 떨어지고, 그런 것은 없거든요.
예수 믿어도 역시 안 믿는 사람과 친하게 지내고, 다 한다는 말이지요. 그 사람이 돈 떼먹고 도망가면 돈이 아깝고 아파한다는 그 말이지요. 이게 바로 그동안 세상에 천착되었고, 세상과 너무 밀착해서 살았고, 장가가고 시집가는 것이 악인 줄 알면서도 시집보내려고 그렇게 기도하고, 시집가서도 잘 살라고 하고, 그 외롭지 않고 싶고, 남들에게 사랑받고 싶고, ‘잘한다, 잘한다.’ 하는 후원자도 많이 있고, 쓸쓸하지 않게 살고 싶은 그것, 그것에 비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두둑, 하고 세상을 뜯어내는 거예요.
뜯어낼 때 아픈 거예요. ‘저 사람은 왜 그렇게 예수도 안 믿는가?’ 그렇게 가슴앓이 하는 이유 중에 하나가, 저 사람이 예수 믿음으로서 나에게 이득이 있다는 것이 이미 내 속에 잠재되어 있다는 것을 파악하는 겁니다. 주님은 외롭게 갔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주님보다도 자꾸 다른 길로 새는 거예요. 예수도 믿고 외롭지도 않고. 그러니까 “주님의 동행을 내가 생각하는 동행으로 훼방하고 있습니다.”라고 고백하는 사람은 이 어두운 세계의 의인입니다. 성도고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기에 그것마저 죄가 된다는 사실을 아는 겁니다.
외롭지요. 왜? 유일적이니까. 이 세상 아무도 알아주지 않지만, 우리 몸은 알아주기를 원하지만 실제적으로는 아무에게도 의미 없는, 그러니까 우리가 이 땅에서 살면서 나한테 쏟아 부었던 모든 의미가 다 삭제당하는 쪽으로 주께서는 낯설게 상황들을 몰아넣습니다. 순간순간 성령을 통해서 우리는 깨닫게 되지요. 사람이 세상 살면서 짧은 순간이나마 제일 마음 편할 때가 언제인가 하면, 아무런 의미가 생각나지 않을 때가 가장 편해요. 나쁜 짓 한 것 이것도 괴롭고, 착한 일을 해도 그것도 지키려 들면 외롭고.
그런데 내가 생각나지 않고 그냥 주신 곳에 내가 존재한다고 느껴진다면 이대로의 이것이 하나님에게 가장 적절하고 완벽한, 그리고 합당한 나에 대한 현실인 것을 내가 안다면 그 짧은 순간이지만 감사가 되지요. 좀 길게 이어졌으면 좋겠습니다만 또 전화 오거든요. 그 좋은 시간에 전화가 띠리링, 와서 “예, 예! 갑니다.” 하면 또 성공을 기대해야 되고, 이 번일 잘 성사되어야 하고, 꿈들이 막 피어나게 되고, 줄줄이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서도 주께서 잊지 않도록 하는 것은, 십자가 의로만 우리가 이 죄에서, 멸망에서 벗어난다는 이 고마움, 이제부터 그것마저 주의 증인의 자료가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노아 살던 세상이나, 예수님 살던 세상이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는 똑같은 세상이었습니다. 평소에 살아가는 것이 뭐가 나쁜 것이고, 이게 뭐가 죄냐고 항변하는 그 항변에 우리 목소리가 같이 섞여서 저희들도 살아가고 있는 중입니다. 그런 우리에게 십자가 보여주셔서 우리가 예수님의 증인되었음을 깨닫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어떤 경우라도 이 증거가 소멸되지 않게 해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38강-창 6장 9-13절(의인노아)160511-이 근호 목사.hwp (64.0K), Down: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