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0장 26절(가락-없음)160503a-이 근호 목사
요한복음 10장 26절(가락-없음)160503a-이 근호 목사
이름 : 충성모(IP:14.35.214.25)
요한복음 10장 26절(가락-없음)160503a-이 근호 목사
요한복음 10장 24절 끝에서부터 26절까지 읽어보겠습니다. “그리스도여든 밝히 말하시오 하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어늘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라고 되어 있지요. 이것을 통해서 우리가 성경을 보는 핵심을 메시아론으로부터 추적을 해야 됩니다. 유대인들이 기다리는 것이 있어요. 그래서 당신이 메시아냐, 아니냐를 굉장히 중요시하게 여겨요. 그것이 이 성경 해석에 있어서 이스라엘의 입장에서 봐야 된다는 이유에요.
구약은 메시아가 오실 것을 이야기하고 신약은 이미 왔었음을 이야기하잖아요. 그러니까 메시아라는 존재가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이 기다린 구원자지, 이스라엘 외부의 민족이나 나라들이 기다린 신의 형태가 아니거든요. 그래서 성경을 보려면 메시아라는 하나의 틈을 통해서 들어가줘야 되는 겁니다. 성경에 의하면 메시아를 빼고 하나님을 거론한다는 것은 반칙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메시아는 생각을 하지 않고 “저, 구원 받겠어요?”라고 자기의 구원부터 성급하게 들이대고, 또 목회자들은 고객(왕)이 그것을 원하니까 “이렇게 행하시면 구원 받습니다.”라고 하지요. 중간에 메시아는 날아가 버렸어요. 메시아는 빼버렸어요. 기껏 메시아를 집어넣는다는 게 문제를 더 크게 틀어지게 만들었어요. “당신이 구원을 받기를 원하시면 메시아를 만나면 됩니다.”라고 하면 메시아 이전에 나 구원부터 먼저 시작을 하고 수단으로 개입되는 것이 메시야지요.
그러면 메시아는 옆구리를 차고 들어온 셈이 되는 겁니다. 나는 주가 되고 옆으로 차고 들어온 것이 메시아라면 메시야는 빨리 볼일 보고 빨리 나가버려야 되지요. 자, 예수 믿었다. 볼일 봤으면 빠져주세요. 그리고 나는 내 갈 길, 아버지한테 가기만 하면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자기의 구원론부터 시작해서 마지막에 구원론만 달랑 남는 거에요. 교인들이 맨날 목사한테 묻는 것이 그거거든요. “저, 어떻게 하면 구원 되겠습니까?” 질문 자체가 메시아론이 아니에요.
이스라엘이라면 “메시아는 언제 오겠습니까?”라고 하겠지요. 왜냐하면 그들은 구원론이 문제가 아닙니다. 이스라엘 나라의 구원이에요. 개인 구원이 아니고 이스라엘 나라의 구원이라고요. 달리 말해서 어떤 나라의 일원이 됨으로써 구원이 확보되는 것이지, 개인적으로 설친다고 구원이 되는 건 아닙니다. 그러니까 시작하면서 했던 이 몇 마디만 가지고도 2000년 기독교 역사가 얼마나 처음부터 다른 종교인지를 말해줍니다.
완전히 다른 종교를 만들어놓은 거에요. 성당의 천주교, 기독교도 마찬가지로 전혀 성경과 상관이 없는 거에요. 그렇다면 예수님은 어떻게 오셨습니까? 그 메시아론의 노선에 따라서 오신 겁니다. 이미 구약에 깔려진 메시아론에 맞추어서 주님이 오신 거에요. 그런데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그들이 기다린 메시아가 아니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자기들이 성경(그때는 구약 자체가 성경이니까) 아마 이런 모습으로 이렇게 오실 것이라고 딱 틀을 만들어놓았는데 이게 안 맞는 겁니다. 예수님이 맞지를 않아요. 지금까지 한 것을 한 번 정리해봅시다.
구약의 입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어떤 나라를 만들어요. 그 나라의 이름이 이스라엘이고 이것을 포함해서 출애굽기 4장 24절에 나오는 것과 같이 아들이라고 해요. 이게 아들이에요. 그러니까 개인을 가지고 아들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집단화된 아들만 아들이에요. 개인으로는 아들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집단으로 이스라엘 전체가 구원되기 위해서는 학력이라든지, 지식이라든지, 아이큐, 혈액형 같은 것을 무시하고 새롭게 투입된 하나에 종속되도록 그렇게 조치했습니다. 그게 어린양의 죽음입니다.
피를 가지고 문설주에 바르지요. 그러면 심판하시는 죽음의 사자가 와서 뭐만 확인하면 됩니까? 이 사람이 서울대학에 갔는지 이대를 나온 여자인지, 재산이 얼마이고 통장은 몇 개인지를 보는 게 아니고 문설주에 피만 보지요. 피만. 그래서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 서로를 보면 “너도?”, “나도!” 하는 공통점이 형성될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어느 누구, 남녀노소를 상관없이 어린양의 피로만 구원 받았다는 거지요.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이 40만이라도 숫자는 40만이지만 이러한 동일한 공통점을 가졌다는 점에서는 딱 한 사람입니다. 그걸 단일화라고 합니다.
그런데 단일화라고 해도 되지만 여기에 어떤 의미를 더하면 동일시 또는 동일화라는 말을 사용할 수가 있습니다. 현재 인간에게도 유아 시절, 6개월에서 18개월 사이에 동일화가 일어나요. 사실은 그게(동일화) 착각이거든요. 그런데 이 동일화라는 말이 사실은 말은 쉬운데 사실 따져보면 굉장히 어려운 말입니다. 저 사람이 나와 같은 것을 동일화라고 하지 않아요. 보통 상식으로는 “저 사람이 나와 같습니다.”라고 감정을 이입해서 동일화하잖아요. 그게 아니고 그 사람 쪽에 내가 포함이 되면서 동일화가 돼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원하는 동일화는 “내게 맞추어진 메시아가 오세요.”가 아니라 “저는 동일화될 준비가 되어 있으니까 어떻게 나타나시든지 주께서 원하시는 동일시의 요구에 후딱 제가 끼어들 용의가 되어 있습니다.”라고 하는 형태가 되는 겁니다. 이것이 신약의 사도 바울의 편지에 보면 굉장히 많이 나와요. 대표적인 것이 “예수 안에서 하나(한 형제)가 된다”라는 말이 있어요. 그런데 왜 예수 안에서 한 형제가 되느냐 하면 서로 똑같은 입장이거든요. “주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사랑(용서)을 받았기에 너희도 서로 사랑(용서)하는 것이 마땅하니라”(에베소서 4장 32절)
누가 에베소서 4장 마지막절을 한 번 읽어볼까요.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라고 되어 있지요. 여기에 ‘서로’라는 말이 나오지요? ‘서로’라는 말은 그렇게 해서 이미 우리는 한 통 안에 들어있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에베소서에 보면 성령이라는 단어를 1장부터 해가지고 주르르 막 쏟아부어 놓았어요. “성령으로”, “성령으로”, “성령으로” 그런데 그 성령의 의미가 뭐나고 할 때는 반드시 육과 대비된 상태에서 성령을 언급하거든요.
그러면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육은 뭡니까? 내가 행함으로 하는 것이 육이 돼요. 그런데 “내가 구원 받은 것은 나의 행함으로 말미암지 않고 주님으로 말미암습니다.”라고 하면 영이 되는 겁니다. 수동적이고 피동적이지요. 그러나 내가 능동적으로 나가면 육이 되어 버려요. 어떤 사람이 예수를 믿고 난 뒤에 율법을 지키니까 사도 바울이 하는 말이 “네가 성령을 받은 것이 네 행함이냐, 믿음이냐 네가 분명히 믿음으로 구원을 받아놓고 왜 행함으로 율법을 지키려고 하느냐”였습니다.
“그리스도를 믿어버리면 이미 율법을 다 지킨 것이 되어서 남아 있는 율법이 있을 리가 없는데 왜 네가 새삼스럽게 율법을 지키려고 하느냐”라는 겁니다. 그런 영은 없다는 거에요. 쉽게 말해서 수상하다는 겁니다. 그 사람이 수상한지 아닌지를 확인하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십자가를 들이대는 거에요. 십자가를. 십자가를 들이대는 방법 중에 하나가 할례 받지 않은 사람과 할례를 받은 사람이 같이 식사를 할 때 거기에서 내빼느냐, 아니면 형제라고 인정하느냐는 겁니다.
율법의 준수 여부라는 기준 자체가 십자가 안에서 이미 소멸되었는지를 확인해보게 되면 그 사람이 성령을 받은 사람인지, 육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채 성령을 받은 흉내를 내는지가 들통이 나는 거에요. “십일조를 했나, 안 했나?”, “나는 했어.”, “그러면 너는 잘못 되었네.”라고 하면 그 사람은 성령을 받은 사람이 아니에요. “안식일 지켰어, 안 지켰어?” 이런 것을 따지는 사람은 성령 받은 사람이 아니라고요. 그 사람은 흉내를 내는 사람이에요. 모방하는 사람이에요.
성경에 나온 것을 자기가 스스로 자기 것으로 현재 자기가 하고 있는 것에다가 이미지화 시켜서 억지로 성경 자체를 자기와 동일시시키는 겁니다. 자기는 꿈쩍도 안 하고 성경이 와서 자기와 동일되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을 메시아론적으로 봤을 때 예수님이 메시아로 오셨기 때문에 낯설게 등장하셨는데 낯설게 등장한 것은 다른 게 아니고 너와 나의 모든 차별을 다 없애버리는 거에요.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이런 것을 다 없애버리고 전부 다 부셔버린 그 망치와 자기를 동일시하겠다는 겁니다. (이름을 이제 망치로 바꿔야 돼요. 좋은 이름은 아니지만 하여튼..)
“예수를 믿었기 때문에 이제는 막 살아도 되지요?”라고 하는 물음은 전혀 성령을 받은 사람의 모습이 아닙니다. 생각이 엉뚱한 데에 있어요. 지금 막 사는 게 그리워요. 막 살고 싶어서 환장한 사람이에요. 성령은 전혀 좋지를 않아요. “이제 내가 어떤 짓을 해도 나한테 뭐라고 하지 마.” 그 자유가 그리운 거에요. 내가 주님 앞에 무시당하는 그 자유가 자유가 아니고 나는 생생하게 그대로 살아있으면서 “내가 무슨 짓을 해도 이제 주님도 나한테 탓할 거 없지요.”라고 뽐내고 싶은 마음이 너무 성급해요. 그게 그리운 사람은 여전히 육에 속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육에 속한 사람을 드러낼 수 있는 방법은 딱 하나밖에 없어요. “막 사세요.”라는 말밖에는 없어요. “막 사세요.”라고 해야, 들통이 나요. 본색들이 나와요. “시키는 대로 막 살았습니다.”라고 하면서 은근히 막 사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과 “정말 내가 한 모든 짓이 소급해서 막 사는 짓이였군요.”라고 고백하는 사람이 나뉘어요. “어떤 짓을 해도 십자가로만 구원해줬으니까 십자가 앞에서 어떤 짓도 내가 막 사는 짓, 의미 없는 짓이 되었군요.”라고 감사하는 사람이 분류가 된다고요.
사실은 사도 바울이 막 살은 사람이에요.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도 막 살았고 예수님을 만난 후에도 막 살았는데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율법에 흠이 없다”고 했고 예수를 믿고 난 뒤에 막 사는 방법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식으로 막 살은 거에요. 어차피 둘 다 막 사는 거에요. 그런 식으로 한 겁니다. 스데반 집사, 빌립 집사도 마찬가지에요. 자기가 누구를 전도하겠다고 사막에 간 것은 아니거든요. 주께서 가게 하시니까 간 거에요.
그래서 여기에서 예수님께서는 메시아론을 따라서 오신 겁니다. 우리가 이렇게 사는 이 세상을 현실판 또는 현실지형이라고 표현할 수 있거든요.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을 그냥 현실이라고 해도 괜찮습니다. 그런데 이 현실에 예수님이 등장했습니다. 예수님이 오셨다가 빠져나갔어요. 오실 때 역사적으로 오셨고, 빠져나갈 때 역사적으로 나가시지 않았습니다. 역사라는 것은 이 편평한 현실판이잖아요. 이 판에서 돌아가시면은 예수님의 시신이 남아있어야 돼요. 시신이 보고싶으면 남쪽 몇 km 네비게이션을 켜고 찾아가서 보면 있어야 돼요.
그런데 주님이 오실(합류할) 때도 어디서 오셨는지 모르지만 나갈 때는 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