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강-YouTube강의(기대하지 않은 현실)160503-이 근호 목사
152강-YouTube강의(기대하지 않은 현실)160503-이 근호 목사
이름 : 이미아(IP:122.43.165.245)
152강-YouTube강의(기대하지 않은 현실)160503-이 근호 목사
제 152강, 제목은 ‘기대하지 않은 현실’입니다. 성경을 보게 되면 특별한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구약에서는 선지자라고 하고, 신약에 오게 되면 그 선지자의 계열의 연속으로 세례요한이 등장합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선지자도 보통 인간이고 세례요한도 그냥 인간이다, 그렇게 생각하는데, 그 세례요한이나 선지자들이 등장할 때마다 사람들은 기대하지 않은 현실로 재구성이 됩니다. 현실이 재배열이 되죠.
그리되면 선지자가 들어오지 않을 때 생각했던 세상관이나 현실관이라든지 또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선지자가 투입돼서, 선지자의 입에서 하나님의 계시가 터져 나오는 순간, 기존의 현실관은 엉터리라는 것이 이게 들통이 나버립니다. 그저 막연하게 선지자가 등장하게 되고 세례요한이 등장하게 되면 몰랐던 그 정보 하나 얻은 것이 아니라, 인간들이 그동안 살아왔던 삶의 바탕, 지형 자체가 다시 다 무너져야 되죠.
그것을 선지자나 세례요한은 강요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예수님이 등장했다, 선지자, 세례요한, 예수님이 등장했을 때는 기존의 인간들이 희망을 갖고 사는 현실관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것은 걸레 같고 쓰레기처럼 휴지통에 갖다 버려야 하는 현실관이 등장합니다. 그래서 이 예수님께서 오셔서 말씀하신 행적들이,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에 잘 나와 있는데요.
그 나와 있는 글들을 보게 되면, 기성세대, 기존에 알고 있던 사람들의 그 세상, 그 세상을 전적으로 거부하는 식으로 말씀을 해주고 있습니다. 나는 이런 세계상, 나는 이런 세계를 꿈꾸어왔다고 생각할 때 그 안에 필히 누가 들어가느냐 하면 특히 유대인들 같은 경우에 하나님이 거기 들어가 있죠. 하나님을 이렇게 모시고, 나는 하나님을 위해서 이렇게 살아왔고 하는, 그렇게 형성된 그 세계관은 예수님이 오셔서 밀어붙이십니다.
만약에 식탁 위에 음식들이 있는데, 어떤 가장이 들어와서 화가 난다고 아내가 차려놓은 그 음식을 확 밀어버리면 식구들이 깜짝 놀라겠죠. 기존의 그 음식에 대한 모독으로 느껴지지 않습니까?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차려놓은 아름다운 인생 설계, 꿈꾸는 그러한 미래, 그리고 과거에 자기가 이렇게 이만큼 잘난 존재라는 것을 성의를 다하여 표현한 그 식탁 위에 있는 자기 인생을 확 식탁 밑으로, 나락으로 밀어 제쳐버립니다. 아무 쓸모없다는 거예요.
우리가 꿈꾸던 세상이 아무 쓸모없다는 것은 곧 내가, 내 자신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어떤 노력을 하고 어떤 수고를 해도 아무 소용없는 겁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성경에서 선지자나 세례요한이나 예수님이나 특이한 분이 이렇게 등장할 때는 그냥 한 사람이 우리들 속에 포함되었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기존에 그 사람이 오기 전에 이미 형성된 현실관과 세계관은 전부 다 무가치한 것으로 취급받는다는 겁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 번 생각해봅시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뭡니까?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그동안 우리가 몰랐던 예수님에 관한 사항을 추가적으로 하나 얹어놓는 것이 아니죠. 자신이 그동안 잘못 살았고, 헛되게 살았다는 겁니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평생 동안 시험을 친다면 좋은 시험 점수 나오게 하기 위해서, 내 인생의 점수가 좋게 나오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애를 쓰고 얼마나 조심에 조심과 조심을, 성의와 성의를 다해서 살았겠습니까?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은 절대로 하지 않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반드시 이루어내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했겠습니까?
그것이 자기 이름이 쓰인 시험지에 고스란히 녹아있다면 예수님이 등장하고 세례요한이 등장하게 되면 그걸 찢어버려야 되죠. ‘아, 이것이 바로 헛짓이구나. 열심히 교회 다니고 봉사한 것이 다 헛짓이라는 이야기구나.’
누가복음 7장에 보면 예수님이 하신 그 내용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길을 가는데 어떤 백부장(로마 주둔군의 중대장)의 사랑하는 종이 병들어 죽게 되었더니 예수의 소문을 듣고 그 유대인 장로 몇을 보내어 예수께 나아가 가로되 백부장의 종을 낫게 해달라고 이렇게 간청하는 대목이 누가복음 7장 초반에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그 백부장이 벗들을 보내어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하면 “주님께서 친히 이 병든 종에게 오실 필요가 없습니다.” 라는 말을 덧붙이게 됩니다. 그대로 읽어보면 “주여 수고하시지 마옵소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치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 기존의 모든 사람들은 병자가 있는 현장에 병 고칠 사람이 와서 우리 인간들이 납득이 되는, 수용이 되는 어떤 치료행위를 보여주기를 원하고 그 치료행위를 보면서 병 고치는 결과와 치료행위와의 연관 관계를 이렇게 바라보면서 믿고자 합니다. ‘아, 이렇게 하셔서 이렇게 병 나았구나.’ 그것을 자기 눈으로 확인을 해줘야 자기 마음이 정립이 되겠다는 것이죠.
이것은 기존의 인간들이 알고 있는 현실 속에서 의사들이 환자 고칠 때 그렇게 하거든요. 그런데 백부장이 놀라운 말을 합니다. “안 오셔서도 되고 오실 필요도 없습니다.”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제가 주님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 내가 추구하는 현실, 내가 현실이라고 우기는 이 현실 속에 주께서 오시게 되면 그 현실은 무너질 수밖에 없는 허약한 현실, 그 속에서 저는 한평생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자기 종이 죽는다는 것은 자기 현실 속에서 자기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쉽게 말해서 그동안 내가 이렇게 해결해왔다는 그 모든 해결책이 주님 앞에서는 다 헛된 현실이고 소용없는 현실을 붙들고 살아왔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그 헛된 것을 놓는 일만 남았고 나의 모든 현실에 대한 문제는 우리 주님이 하시는데, 그 하시는 것이 뭐냐 “그냥 말씀만 하옵소서. 말씀만 하시면 내 하인이 낫겠나이다.” 이렇게 했어요.
그 말은 뭐냐 하면 “이미 기존의 내 현실 속에 어떤 병자가 생기고 아픈 사람이 있다는 것은 그 원인이 주님만이 아는 원인입니다.” 라는 고백이에요. 그러면 나는, 나의 현실이 있더라도 그것은 나의 현실이 아니고 누구의 현실이 되느냐 하면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시고자 하시는 그 말씀의 현실 속에 일부러 편입되어 있음을 제가 수용하겠다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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