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강-창 6장 5-8절(자작극)160504-이 근호 목사
37강-창 6장 5-8절(자작극)160504-이 근호 목사
이름 : 오용익(IP:125.136.25.28)
37강-창 6장 5-8절(자작극)160504-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6장 5-8절입니다. 구약성경 5페이지입니다.
창 6:5-8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가라사대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성경은 모세가 썼습니다. 모세가 누구 들으라고 썼는가 하면, 모세가 이스라엘 사람들 들으라고 이 구약성경을 줬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말씀을 받으면서 무엇도 함께 받느냐 하면, 이스라엘이 어떻게 생존하느냐, 어떻게 살아가느냐, 그것이 우선이 아니고 그들이 받은 사명이 더 우선된다는 것, 그것을 그들은 지적받게 됩니다. 그들은 그 사명을 부여받게 되지요. 출애굽기 19장에 보면, 이스라엘 보고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합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명분이 ‘내가 어떻게 밥 먹고 사는가?’ 그것보다 더 우선되는 거지요. 인간이 육으로 태어나서 그런 하나님의 사명과 명분을 받게 되면 엄청난 갭이 생기는 겁니다. 사람은 똑같거든요. 우선 나부터 밥 먹고 살아보자, 이것이 우선인데 하나님께서는 그것과 전혀 어울리지 않게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라.” 그렇게 되어버리면 동떨어지게 되는 겁니다. 아무리 그 벌어진 것을 메우기 위해 달려가 봐야 합치되지를 않지요. 거기서 우리가 느끼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주고 사명을 준 것은 우리를 이 땅에 실패자로 자각토록 하기 위한 사전조치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실패자, 우리 자신이 실패자라면 성공 자가 따로 있다는 이야기지요. 그러면 우리 자신의 실패와 성공 자가 따로 있음을 결합시키면 그것이 바로 성공 자에 대한 증인이 되는 겁니다. 그 성공 자는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의 증인이 될 때 그동안, 물론 구약 때입니다, 이스라엘이 인간의 힘으로 아무리 말씀대로 합치되고 살려고 애써도 실패했던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사는 그 순간부터 이미 이스라엘 백성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지요. 성령을 통해서 알게 됩니다.
새로운 이스라엘을 만든다, 다른 말로 하면 새로운 이스라엘을 창출한다는 말입니다. 새로운 이스라엘을 창출하고 창조할 때 그것은 우리보고 어떤 명령을 줘서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진 명령을 이 죄인과 함께 섞여서 오셨던 그분이 아버지의 명령을 자기에게 빨아들여서 자신의 명령으로 홀로 완수, 성취를 해버립니다. 일점일획도 빠트리지 않고 모든 율법을 다 이뤄버려요. 그러면 그 이뤄진 그것이 새로운 혜택으로 주어지게 됩니다. 새로운 혜택이 주어지는 형식, 틀이 있어요.
그 틀이 뭐냐? 내가 거룩한 백성이라고 이야기하는 순간 너희는 거룩한 백성이 된다는 그 원리원칙을 예수님이 실시해버립니다. 이것을 쉽게 말해서 인간은 하나님에게 말하는 존재가 아니라 말하게 된 존재로 등장하는 거예요. 주님이 우리 말할 것을 제공함으로서 우리에게 나오는 말 말고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말이 같이 겸해서 튀어나오는 새로운 존재로 주께서는 창설하시지요.
이것을 마태복음에서는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마 10:20)라고 되어있어요. 우리가 여기서 두 가지를 알아야 돼요. 하나는,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뭐냐? 그리고 이것 제키고 ‘그것은 아니야. 그것은 엉터리야. 그것은 죄야.’ 제켜버리고 우리 입을 통해서 말하고자 뱉어내게 하시는 그 내용은 뭐냐, 그 둘 다를 알아야 됩니다. 그게 서로 배치가 된다는 것은 우리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기에 반드시 쏟아내는 것이 있어요. 쏟아내는 그것을 속성이라고 저는 이렇게 이야기하고 고린도전서 2장의 표현으로는 우리의 속마음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같은 말입니다. 달리 이야기하게 되면, 인간은 말을 한다. 어떤 말을 하는가? 자기 속에 담겨 있는 마음을 말을 통해서 바깥으로 내 놓는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거기서 더 들어가는 거예요. 인간의 마음은 뭘 로 구성되어 있는가, 그것까지 알아야 돼요. 그것까지 알아야 인간이 평소에 말하고 싶었던 것, 하나님이나 다른 사람에게 말하고 싶었던 내용이 나오니까.
그게 뭐냐? 그것이 창세기 6장 1절부터 4절까지 나오는 겁니다. 인간의 입에서 나오는 것은 부모의 속성이 마음으로 구성되어서 나오는 겁니다. 부모의 속성이 뭐냐? 6장 3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라고 했습니다. 육체라고 주께서 규정한 몸으로 형성되었어요.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과 유혹에 빠져서 육체가 된 겁니다. 육체가 되었다는 것이 무슨 의미냐 하면, 3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라고 하는 거지요.
육체가 되었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나님의 신이 같이 있지 않는 상태로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누가? 모든 인간이 다 그래요. 언제? 이미 사라진 원 인류사에 있어서. 지금은 없어진, 처음 땅에 함께 살았던 그 원주민들, 초창기 인류사회에 속했던 사람들은 노아홍수에서 땅과 함께 다 사라져버렸습니다.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다 사라졌어요. 그렇게 장담할 수 있는 이유가 6절에 나옵니다. “땅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이것은 괜찮은 사람 몇 명을 제하여 놓고 나머지 못된 인간들에 대해서 ‘한탄하사’가 아니라 인간이냐, 그러면 다 쓸어버리는 겁니다. “가라사대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공중의 새, 그리고 6일에 만든 짐승까지 그렇게 하겠다는 말은 인간은 예외 이 다 죽인다는 말을 함유하고 있습니다. “사람이냐? 사람이라고 하지 마 . 너는 육이야. 네 부모가 수상해.” 하나님의 신이 함께 할 수 없는 부모를 만난 거예요. 그 부모의 정신이, 속성이 대대로 그대로 자식들에게 이어져 온 겁니다.
그래서 이들은 멸망당하지요. 그 부모의 그 자식이어서 멸망하는 겁니다. 왜 부모의 속성이 자식에게 전수되어서 그 속성으로 인하여 그들이 육체가 되고 그 부모가 결혼해서 자식이라는 이유 때문에 그 자식이 멸망한다는 것을 제가 왜 여기서 강조하는가? 하나님께서 동행하는 자의 자식은 노아밖에 없습니다. 약속된 에녹의 동행하는 패턴, 동행하는 형식을 갖추고 홍수때 살아남은 자는 노아밖에 없어요. 5장 29절에 보면, “이름을 노아라 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로이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
땅은 저주되어야 됩니다. 땅은 저주되어야 되니까 땅 위에 있는 인간도 다 저주받아 사라져야 됩니다. 그리고 인간뿐만 아니고 6일에 만든 짐승, 5일에 만든 공중의 새까지 다 저주받아서 없어져야 되는 겁니다. 그렇게 뭔가 없어진다는 것은 뚜렷하게 뭐 하나를 앞장세우기 위해서 어두운 배경을 없애버린 거예요. 뭘 앞장세우는가 하면,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으면 홍수 이후에 새 땅에서 살 자격이 없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우리가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아, 노아는 그만큼 착하구나.’가 아니라 노아에게 얽혀있는 것이 있습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홍수 이후에 홍수언약, 무지개언약, 방주언약, 노아언약, 아무거나 괜찮아요, 하나님의 은혜로 주시는 언약에 얽힌 존재로서 새로운 땅을 밟게 돼요. 그래서 홀로 착하고 홀로 훌륭해서 새 땅에 사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에 홀로 훌륭하다면 주께서 모든 인간과 짐승을 쓸어버린다든지, 후회하고 한탄한다는 그것이 어울리지 않아요.
“네가 인간이냐? 다 쓸어버린다.” 하는 그 다 쓸어버림에 합당하려면 노아마저 단독적인 입장에서는 쓸어버림을 당해도 마땅합니다. 다만 노아가 살아난 것은 노아에게 추가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그러면 노아가 살아 있다? 장차 노아가 살아 있는 것이 아니고 노아를 매개로 하여 언약이 살아 있어요. 하나님의 약속이 살아 있게 하는 작업을 여기서 하신 거예요. 약속을 살아 있게 하는 겁니다. 가끔은 도로에서 공사를 하고 있지요.
그러면 도로의 절개 면이 나옵니다. 절개 면이 나오면 차가 다닐 때는 보이지 않던 지중선, 땅 속에 묻혀 있는 전화선, 전기선, 각종 케이블, 배수관, 이런 것이 막 나오지요. 하나님께서는 이 심판, 땅을 끊음으로서 눈에 보이는 이 땅이 눈에 보이는 그것으로 인해 유지되는 것이 아니고 그 땅을 유지할 수 있는 원인이 있기에 그동안 땅이 유지된 겁니다. 그 원인이 뭐냐? 창세기 3장 15절이에요.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의 약속을 구현하기 위해서, 구체화하고 실제화하기 위해서 그동안 땅 밑에 뭔가 관이 뚫려 있습니다.
그 관이 노아당시에는 노아언약이 되고, 모세당시에는 모세언약이 되고, 아브라함당시에는 아브라함언약이 되고, 예수님 당시에는 그 선이 드디어 역사 바깥으로 공개됩니다. 새 언약,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와 함께 계신 분이에요. 동행정도가 아니고 아버지 하나님과 하나가 되신 분이에요. 그 예수님까지 닿기 위해서 창조로부터 예수님까지 연결된 그 배수관, 또는 동선, 케이블이 있어요. 창세기 1장에는 안 나와 있지만 창세기 1장의 모든 피조물은 예수님과 관련성이 있도록 해서 하나님아버지가 예수님하고 의논해서 천지를 창조했어요.
이게 요한복음 1장에 보면 나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는데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고 되어 있어요.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이렇게 되어 있고 함께 있어버리면 곧 하나님은 아니에요. 하나님이신데 하나님과 함께 계시니까. 그러면 말씀이라는 하나님은 기능이 뭐냐? 그가 없이는 하나도 만들어지는 것이 없다고 했어요.
창세기 1장의 숨겨진 케이블선이 요한복음 1장 1, 2, 3절에서 나와요. 예수님을 위하여,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천지가 창조된 겁니다. 사도바울은 이 비밀, 이 놀라운 사실을 골로새서 1장에서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지요. 1장 16절에,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그가 만들었고 만드신 이유가 그 본인을 위해서 만들었다는 겁니다. 여기서 그는 하나님을 두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두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복음은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이 낄 자리가 없어요. 복음은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을 우상화시키고 미신이라고 제거해야 비로소 등장하고 밝혀지는 것이 복음입니다. 하나님을 위해 사는 것이 복음이 아니고 예수님을 위해서 사는 것이 복음이에요. 사람에게 매 맞고 뺨 맞은 그 분을 위해서. 사도바울이 만났을 때 “네가 핍박하는 나 예수”
사도바울에게도 핍박당했던 그분을 위해서 해와 달과 별, 모든 것이 다 만들어진 거예요. 미국 가면 또 언제 이 소리 듣겠습니까? 제가 안쓰러워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어디에 가더라도 확고하게 흔들림 없이, 단정 지을 수 있는 그것을 박스로 만들어서 던지고 싶어요. 미국가나 영국가나 어디에 가더라도 전부 다 하나님밖에 없어요. 전부 다 우상입니다. 하나님 믿고 지옥 갈 사람들이에요. 하나님을 빼버리세요. 성경 골로새서 1장 16, 17절은 그렇게 하고 있지 않습니다.
나까지 포함해서 모든 것은 예수님과 관련성이 있도록 창조될 때만 그것이 천국백성입니다. 하나님 아닙니다. 주 예수를 믿어야 구원받지 하나님을 믿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믿는 것은 이슬람교이고 흔히 말하는 2천년교회역사가 하나님을 믿어요. 예수교지 하나님교가 아니에요. 하나님성회도 아닙니다. 한국에도 이거 믿는 사람 몇 명 될까요? 이걸 제가 이야기해도 왜 못 믿는가 하면, 자기 마음에서 하나님을 떼 내야 되니까 문제가 되는 거예요. 내가 그동안 귀신 섬겼다고, 마귀 섬겼다고 인정을 하고 그것을 자백을 해야 되는데 떼 내지를 못해요.
여기에 하나님에게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이들이 누구냐 하면, ‘하나님의 아들과 사람의 딸들’이잖아요. 그러니 그 ‘하나님’을 빼버려야 된다고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은 신의 아들이라는 뜻이에요. 여호와가 아니고 엘로힘, 신의 아들들, 신을 믿는다고 자처하는 자들. 꼴좋다. 하나님 믿다가 멸망당한 거예요. 정작 하나님은 하나님 믿는 사람을 좌시하지 않고 멸망시켜 버립니다. 이유가 뭐냐? 이미 인간은 초창기 인류사를 구성했던 그 인간이 사는 땅 밑에는 하나님의 창세기 3장 15절이 들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약속을 위해서 그들은 멸망이라는 하나님의 속성에서 유발된 환경을 정통으로 얻어맞아야 될 대상자들이 초창기 인류사를 구성했던 그들입니다. 사라진 땅과 함께 사라져야 할 사람들이에요. 그러면 그들의 부모자식관계 자체가, 이미 부모로부터 그런 죄를 물려받았기 때문에 육체의 부모가 육체의 자식을 낳으니까 아무리 대대로 자녀를 낳아도 거기에 하나님의 신이 함께 있지를 않아요. 하나님의 신이라 하는 것은 창세기 1장에서 보면, 하나님이 처음 창조할 때 “보기에 심히 좋았더라.”에 함께하는 그 신인데 보기에 안 좋은 거예요.
여기서 중요한 문제가 등장해요. 어떤 의미에서 성경을 해석하는데 제일 난해하고 제일 풀기 어려운 문제가 시작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 본문의 성경을 그 당시 사람들에게 알려주는 기회를 허락해야 되지 않겠는가? 다시 말해서 그들이 멸망하는 이유에 대해서 알려주는 기회 정도는 줘야 되지 않겠는가, 그래야 공평하지 않겠는가, 그렇게 생각하기 마련이거든요. 그러나 분명히 창세기 3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선악을 아는 일에 하나가 되었기에 그들을 추방시켰습니다.
이 말은, 선악을 아는 자는 코앞에 하나님의 계획을 들이대도 그들은 그 계획을 눈치 채지 못하고 알아보지 못합니다. 이것을 오늘 본문에 뭐라고 되어 있는가? 5절에 이렇게 되어 있어요.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이라는 거예요. 항상 악하다. 인간치고 양심 없는 인간은 없습니다. 다 양심이 있고 나름대로 예의도 있고 선과 악을 구분해요. 그런데 그게 악해요. 그게 왜 악한가 하면, 내가 선과 악을 아는 순간 내 속에도 선을 행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주목하게 되어 있어요. 전적으로 자기가 나쁜 놈은 아니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계획이 어떠냐 하면, 인간의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육체니까 처음 날 때부터 항상 악하고, 생각하는 것도 항상 악하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계획을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들이대야 비로소 인간은 심판받아도 할 말이, 대꾸할 말이 없는 거예요. 이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인간 쪽에서 하나님의 계획을 아무리 설명해도 못 알아보는 계획을 하나님 쪽에서 준비하셔서 그걸 실시해버리는 겁니다.
쉬운 예를 들게 되면, 제가 아래층에 있는 남자 화장실에 가려고 했는데 문이 안 열리는 거예요. 10년 동안 여닫았던 화장실 문인데 오늘부터 문이 안 열려요. 상가 사람들이 회의를 해서 문 잠그기로 했습니다. 술집도 떠났겠다, 이제 문을 잠그기로 했어요. 문이 잠겨 있으니까 안에 누가 있는 줄 알고 처음에는 똑똑, 두드렸어요. 문이 잠겨 있어서 혹시 안에서 누가 담배를 피우고 있나 싶어서 살피니 안에 아무도 없어요. 그래서 세탁소에 가서 열쇠를 가지고 문을 여니 문이 열렸어요.
그게 무슨 뜻이냐 하면, 인간이 생각하는 인간의 생각으로 주님이 계획한 세계의 문을 열어도 문이 열리지 않습니다. “주님의 세계가 어디 있습니까?” 본인이 지금 살고 있는 세계가 주님의 세계에요. LA가 주님의 세계에요. 그런데 인간은 LA에 살면서……, LA의 인구가 2392만 명인가요, 2014년도에. 그 392만 명이 나름대로 선악을 아니까 선하게 산다고 여기는 겁니다. 선하게 산다고 여긴다면 그 선하게 산다고 여기는 한 사람도, 주님의 계획이 작용하는 곳에 살면서도 화장실 문이 안 열리고, 한 번도 들어갈 수도 없고 들어가 본 적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 들어가 볼 수 없는 자에게, 이 창세기 6장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모세를 통해서 이 계시를 그들에게는 알려주는 거예요. 출애굽기 이후에 창세기라는 것을 만들어서 그들에게 이야기한 겁니다.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하면, 너희들은 열쇠가 있다는 거예요. 열쇠가 있으니까 너희들에게 납득이 되는지, 이 계획이 이해가 되는지 내가 모세를 통해서 이야기할 테니 잘 듣고 있다가 ‘아하, 그렇지. 납득이 돼요.’ 하고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지 너희가 한 번 들어보라는 겁니다.
그 모세가 하는 이야기를 지금 제가 할 테니까 여러분이 고개 끄덕여서 납득이 되는지를 테스트해 보겠어요. 6절입니다. “땅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가라사대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납득됩니까? 납득이 될까요? 납득 안 됩니다. 왜? “하나님이 전능하시고 하나님의 계획은 차질이 없고, 그래서 하나님은 실패나 실수가 없으신 분인데 인간이 죄짓는 것도 미리 못 알아볼 정도로 무능하십니까?” 하나님이 만들어놓고는, “어? 인간이 죄를 지었네? 바보같이 내가 왜 만들어놓았어? 이제라도 할 수 없이 쓸어버려야지.” 라고 한다면, “하나님이 그 정도로 코앞의 일도 못 내다볼 정도로 그렇게 무능한 하나님이십니까?”라고 우리가 대들만 하잖아요.
그러니까 우리는 문 잠긴 화장실이에요. 문 열고 들어갈 수가 없어요. 우리가 문 여는 그 생각하는 모든 사고, 사유가 날 때부터 항상 악하고 하나님의신이 함께 하지 않는 육체에서부터, 육체의 부모로부터 나온 육체적 생각이기 때문에, 악한 생각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타낸 그 계획에 대해서 ‘저래놓고 무슨 전능하신 하나님이야?’ 납득이 안 되는 거예요. 그 납득이 안 되는 그것을 이제 풀어드리겠습니다.
해답은 딱 하나에요. 이 세상은 울타리를 치고 무대를 만들었어요. 그 무대가 뭐냐? 홀로 두는 바둑입니다. 주님이 혼자 두는 바둑이에요. 이 ‘홀로’가 신약에 오면 둘로 갈라져요. 시편에 보면 “주께서 내 주에게” 이미 시편에서도 둘로 갈라지지만 그 전에는 하나님이 하나님을 위해서 자기가 스스로 노는 즐거움인 거예요. 자신의 후회하심을 매개로 해서 스스로 자기만족하시고 자기성취를 해내시는 그런 울타리 친 무대가 그 당시에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유혹을 받아서 그렇게 악을 저질렀던 그 무대, 동일한 무대에요.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똑같은 그 무대에요. 이걸 세자로 ‘자작극’이라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자작극이에요. 이 세상, 이 피조세계는 하나님의 자작극입니다. 하나님 스스로 한탄하시고 스스로 만족하시는, 그겁니다. 이런 자작극은 우리도 어른 되기 전의 유아 때 이미 거쳐 왔습니다. 혼자 하는 시체놀이가 재미있어요. 형제 없이 혼자 있는 애들 인형 하나 주게 되면 혼자서 울고불고 그러다가 또 혼자 웃고, 난리도 아니에요. CCTV로 보게 되면. 그거 있으나 없으나 엄마가 와도 세상모르고 놀지요. 인형 옷 입혔다가 벗겼다가, 청진기도 댔다가, “어디 아파요?” 흑흑흑, 울다가 혼자 한탄하다가 “저리가! 이젠 밥 먹을 때 되었으니까 다음에 또 놀자.” 하고 혼자 쓸어버리고. 자작극을 하고 있는 거예요.
누굴 매개로? 하나님이 하나님을 매개로 자작극을 벌이는 거예요. 인간의 죄를 하나님이 하나님 속에다 집어넣고 하나님이 하나님을 저주해버리고 그 저주받은 하나님을 스스로 살려내는 십자가의 복음의 비밀을 앞당겨서 이미 케이블 선으로 깔아놓는 거예요. 어디 밑에? 천지창조 밑에. 그러니까 선악을 아는 인간들은 거기서 문 열고 들어갈 수가 없는 겁니다. “저도 선을 아는데 넣어주세요.” 안돼요. 선악의 극복은 선악을 아는 자가 스스로 극복할 수가 없습니다. 선악을 알게 되는 날에는 죽으리라, 하는 그 죽음에, 다시 말해 심판, 저주의 징벌을 받는 자작극 속에 하나의 단계로서 편입되어야 돼요. 합류되어야 됩니다.
창세기 6장 5, 6절 보면서 사람들은 ‘악이 관영해서 벌을 받았다.’ 하니까 거기에 대해 큐티 메모 란에다가 “옛날 사람들은 악이 관영해서 벌을 받았으니까 우리는 그렇게 악을 짓지 말자.” 이렇게 적어놓아요. 하나님이 깔아놓은 켸이블선을 모릅니다. 선악을 알았으니까, “아하, 악하다고 했으니까 그렇다면 악한 것의 반대는 선인데 그 선에 대해서는 이미 내가 납득이 되고 이미 알고 있으니 그 선 쪽으로 나가려고 오늘도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하고 경건하게 살려고 애쓰고 있어. 이것이 선이야. 악은 조심하고 성경말씀에 나오는 대로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형제를 돕고 서로 용서함으로서 선을 이루자.”라는 그 구조가요, 항상 악할 수밖에 없는 구조에요.
주님이 혼자 노는 마당에 주께서 열쇠 가지고 우리가 뛰어들지 않게 하시는 거예요. 문 열도 들어갈 위인이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쓸어버림을 당하면 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 선악기조 안에 마귀가 결탁이 되어 있거든요. 마귀가 거기에 대해서, 쓸어버림을 당할 수밖에 없는 인간으로 취급하거든 그런 신은 믿지 않기로 이미 결탁을 했어요. 착하면 천국 가게 하는 하나님으로 모든 것을 바꾸도록 뒤에서 사탄이 조종하고 있습니다.
사탄이 나타날 때는 반드시 독자적인 생각을 가지고 스스로 자기구원의 가능성을 주목하는 것을 격려하는 것이 사탄의 역사거든요. 쓸어버리라는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은 쓸어버리되 저는 쓸어버리지 마옵소서.” 하는 이것이 사탄이 하는 짓이에요. 왜? 내가 구원의 가능성을 어디선가 찾고자 하는 시도는 뒤에서 마귀가 계속해서 그렇게 하는 거예요. 그게 독자적인 구원입니다. 독자적인 노력으로 독자적인 가능성을 찾아가서 그걸 실시해서, 드디어 나는 가능성 하나 찾아서 구원되고 싶은 것, 그 배후에 사탄이 있습니다.
에베소서 4장에 보면, 평소에는 나타나지 않는 사탄이 우리의 마음을 뚫고 나올 때 어떻게 뚫는가? 거기에 나와 있습니다. 에베소서 4장 26절에 보면,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 이 말씀이 재미있어요. 분을 내어도, 그러니까 분이 날 수밖에 없어요. 분조차 내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
이게 뭐냐 하면, 인간에게 주어진 모든 상황은 인간이 결정한 상황이 아니고 들이닥친 거예요. 그래서 인간은 분노 안하고 싶어도 분노가 날 수밖에 없는 지경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는 이 말이 뭐냐? 사람이 분노하면서 ‘이것은 분노할 만 해서 분노했다.’고 갑자기 독자적인 자기의미를 줘버려요. ‘내가 분노하는 이것은 나쁜 짓이 아니야.’라고 자기에 대한 가치를 자기가 측정하고 자기가 그렇게 판단을 내려버려요. 그게 바로 마귀가 틈타는 순간입니다.
분노케 하신 것은 주께서 그렇게 하셨는데 그걸 잘 버텼다고 자랑 질하고 싶은 것은 독자적인 나의 가치를 따로 챙기고 싶어서 그렇게 하는 거예요. 주님 바라봐야 할 우리가 갑자기 어떤 분노하는 일을 통해서 “주여, 저 어때요? 제 점수 괜찮지요? 참는다고 제가 애썼습니다.”하고 갑자기 자기 잘남을 내세우고 자기 의를 자랑 질 할 때 거기에 마귀가 비로소 현실화된 현장인 것을 알라는 그 말입니다.
지금 하나님 혼자 노는 자작극 무대 위에서 싹쓸이하는 거예요. 공중의 새까지. 인간은 말할 것도 없이 완전히 싹쓸이를 하는 입장에서는 싹쓸이 당하면 되는 겁니다. 뭘 로 싹쓸이 당하는가? 하나님 스스로 후회하시고, 근심하시고, 스스로 극복하시는, 스스로 한탄하시고 그걸 스스로 극복하시는 그 하나님의 숨겨진 속성을 위하여 우리는 심판의 대상으로서 그 작업에 참여하게 된 것을 감사히 여기시기 바랍니다.
심판받음으로써 비로소 내 선악과 속성은 날라 가버리고 주님의 속성만 들어오게 됩니다. 주님이 알아서 심판하시고 알아서 구원하시는, 시작도 주님이고, 중간도 주님이요, 끝도 주님인 것을 받아들이는 것, 이것을 가지고 뭐라고 하는가? 오늘 8절에 보면,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하나님이 아니고 여호와, 여호와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더라. 그 당시의 예수 그리스도지요. 노아당시의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노아입장에서 인간은 마땅히 쓸어버림 당하는 것에 대해서 군말 할 필요가 없어요.
왜? 세상 모든 일은, 인간은 배제하고 하나님이 하나님끼리 혼자 노는 게임이기 때문에. 그것을 피조물은 찬미만 해야 되고 감사하면 되는 거예요. 거기에 끼어들 생각하면 안돼요. “저는요?” 하고 끼어들 생각하면 안돼요. 은혜를 받은 자, 열쇠를 받은 자만이 혼자 노는, 이 세상 전부가 주로 말미암고 주를 통해서 주로 가는 하나님의 홀로 하시는 자작극인 것을, 비로소 그 비밀을 온 몸으로 만끽하게 되는 겁니다. 성령 받은 사람만. 그게 은혜 속에, 언약 속에 있는 사람의 특징입니다.
군에 가면 유격훈련을 받거든요. 레펠을 타는 코스가 있어요. 레펠이라는 것은 등산가들이 높은데서 내려올 때 탁, 탁, 차고 내려오는 것, 그리고 헬기에서 줄 타고 내려오는 것인데 그 훈련을 받아요.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높이인 15미터 위에서 그 훈련을 합니다. 일반 연예인들 보면 강제로 군에 보내서 뛰어내리게 해요. 군인도 마찬가지고요. 저도 유격훈련 받을 때 그렇게 했습니다. 조교가 뛰어내리기 전에 이렇게 물어요. “죽어도 좋습니까?” 그래서 제가 “저는 죽는 것은 싫습니다.” 하니까 그냥 빼줘요. 거짓말 할 필요 없거든요.
그런데 “죽어도 좋습니까?” “좋습니다.” “두렵습니까?” “두렵습니다.” “그러면 따라하세요. 두렵지 않다.” “두렵지 않다!” 다시 “두렵지 않다.” “두렵지 않다!” 다시 “난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이렇게 따라하라는 거예요. 그걸 보고 제가 느낀 것이 있어요. “믿습니까?” “믿습니다.” 지금 레펠 탑니까? 믿습니다, 하는 것은 인간이 해낼 수 있는, 마귀가 시켜서 해낼 수 있는 가능성이에요. 이런 가능성은 어디에 어긋나느냐 하면, ‘주님이 인간을 한탄하사’의 그 법칙에 어긋납니다.
주님은 그런 인간을 보고 한탄한다는데 “주여, 저는 주의 한탄의 대상에서 빼주세요. 저는 한탄 안 할 만하지요?” 이러면 안돼요. 이것은 터무니없는 주장이거든요. 너 나 없이 육이기에 다 한탄 할만 해요. 한탄의 대상이 되어서 “애고, 난 너 지은 것을 후회한다.” 하면 그냥 한탄을 받고 그냥 심판을 받아버리세요. 왜 그런가? 옛날 초창기의 인류사는 날라 가버리고 인류사가 어디로 끼어드는가 하면, 인류사가 노아언약의 밑바닥으로 들어가게 돼요.
그러면 모든 인간은 죽어 마땅하지만 언약 안에 있는 사람만 구원받는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복음을 위한 하나의 재료로 들어가는 거예요. 이야기가 이렇게 복잡해지고 어려워졌지만 오늘 본문이 그런데, 먼 길 가는 사람에게 이런 복잡한 이야기를 해서 중간에 다 잊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됩니다. 제가 걱정할 문제도 아니지만.
예수님 앞에서 믿습니다, 믿습니다, 그렇게 이야기할 필요가 없어요. 다시 말해서 내가 이야기할 필요가 없고 이야기하게 하는 것이 있어요. “나는 내가 믿어서 구원받고 싶어요. 하지만 그것이 주께서 십자가질 때 졌던 그 죄에 해당되는 것을 이제는 제가 제 입으로 고백을 합니다.”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게 주께서 내뱉게 하는 말이에요. 주께서 내뱉게 하는 말은 “‘나는 그냥 내가 알아서 구원받겠습니다.’ 하는 이것이 죄라는 사실을 일깨우기 위해서 주께서 그런 고백을 하게 하셨습니다.” 이런 고백을 내뱉게 하는 거예요. 그게 바로 하나님의 약속된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보면서 “저 이삭은 내 자식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신 자식입니다.”라는 말을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이삭을 잡게 하신 거예요. “내가 이 땅에 살아가는 것은 내가 살고 싶은 독자적인 계획이 있는 것이 아니고, 나의 계획은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어디 가서 어떻게 하든지 그 모든 계획은 악합니다. 하지만 그 악한 것을 밑바탕으로 끼워놓고 그 악함이 어떻게 의롭게 되었는가는 하나님의 자작극이 그 악함 속에 덮쳤기 때문에 악한 내가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 의인 되었습니다.” 하는 낯선 고백만 드러내면 되는 거예요.
이게 은혜 받았다는 노아처럼 은혜 받은 상태가 되는 겁니다. 창세기 6장은 끊어진 이야기가 아니고 그 앞에 “모든 인간은 마땅히 다 쓸어버려야 된다.”는 겁니다. 선악을 아는 인간들이 뭘 이해 못하는가? 주님의 자작극을 이해 못해요. “저도 선을 아니 하나님이여, 우리 손잡고 일합시다.” 그러나 이미 인간은 에덴에서 쫓겨난 입장이기 때문에 손잡고 일할 것이 없어요. “하나님, 제가 양심이 뭔지를 알고 주의 말씀이 착하라고 하는 것을 아니까 착한 나를 벌지 마옵시고 손잡고 일합시다.”
손잡고 일 안 해요. 그게 바로 항상 악할 생각밖에 없는 거예요. 그게 나에게도 의미가 있고 나에게도 어떤 가능성이 있다는 그것이 항상 악해요. 어느 정도로 악한가? 주께서 후회할 정도로 악하고 탄식할만한 정도로 악한 겁니다. 모든 종교는 다 미신이에요. 그리고 인간은 기껏 믿을 것이 미신밖에 없어요. 왜? 선악을 아는데 추방될 수밖에 없는 속성에서 나온 것이 선악입니다. 착하게 살면 되잖아요, 바르게 살게요, 열심히 노력할게요, 늘 회개하고 반성할게요, 이게 항상 악한 거예요.
주님의 구원은 주님이 알아서, 아버지와 예수님이 알아서, 둘만의 단독회담을 해서 알아서 건질 자를 건집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중 아무도 생각 못했던, 아무도 예상 못했던 하나님의 은혜, 십자가의 은혜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한 것이 없이 똑같은 세상, 항상 세상을 나 위주로 생각하는 그것이 하나님의 신이 함께 있지 않고 성령님이 함께 있지 않은 육신된 것임을 우리는 알면서도 실감하지 못했습니다. 이제는 십자가 바라볼 때마다 바로 나 자신을 위해서 하나님을 이용했다는 그 죄를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37강-창 6장 5-8절(자작극)160504-이 근호 목사.hwp (64.0K), Down:6